大智度論 釋譬喩品 第五十一 卷七十一
聖者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삼장법사 구마라집 소역.
51. 비유품(譬喩品)을 풀이함 2
“須菩提!譬如有人年百二十歲,年耆根熟,又有風冷、熱病、若雜病。須菩提!於汝意云何?是人能從牀起不?”
須菩提言:“不能。”
수보리야, 비유하자면 마치 어떤 사람이 나이가 120살이라 늙어서 쇠약한데다 풍병ㆍ냉병ㆍ열병과 그 합병증이 있다면, 수보리야,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 사람이 평상(침대)에서 일어날 수 있겠는가?”
수보리 존자가 답하여, “일어날 수 없을 것입니다.”
佛言:“是人或能起者,云何?”
須菩提言:“是人雖能起,不能遠行若十里、若二十里,以其老病故。”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 사람이 혹 일어날 수 있다하여도 어떻게 되겠는가?”
수보리 존자가 말씀드리기를,
“설령 이 사람이 일어날 수 있다 하여도 10리(里)나 20리를 갈 수는 없을 것이니, 그는 늙고 병들었기 때문입니다.”
“如是,須菩提!善男子、善女人雖有爲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有信、忍、淨心、深心、欲、解、捨、精進,不爲般若波羅蜜、方便力所守護,乃至不爲一切種智所守護故,當知是人中道墮聲聞、辟支佛地。何以故?不爲般若波羅蜜、方便力所守護故。
“그와 같이 수보리야, 선남자ㆍ선여인이 비록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위하여 마음에 믿음의 신(信)ㆍ참음의 인(忍)ㆍ청정한 마음의 정심(淨心)ㆍ깊은 마음의 심심(深心)ㆍ하고자 하는 욕(欲)ㆍ이해하는 해(解)ㆍ버림의 사(捨)ㆍ정진(精進)이 있을지라도 반야바라밀의 방편의 힘에 수호되지 못하고, 나아가 일체종지에 수호되지 못한다면, 이 사람은 중도에 성문이나 벽지불의 지위에 떨어진다고 알아야 하나니, 왜냐하면 반야바라밀의 방편의 힘에 수호되지 못하기 때문이니라.
須菩提!如向老人百二十歲,年耆根熟,又有風、冷、熱病,若雜病,是人欲起行,有兩健人各扶一腋,語老人言:‘莫有所難,隨所欲至,我等二人終不相捨。’如是,須菩提!若善男子、善女人爲阿耨多羅三藐三菩提,有信、忍、淨心、深心、欲、解、捨、精進,爲般若波羅蜜、方便力所護,乃至爲一切種智所護,當知是人不中道墮聲聞、辟支佛地,能到是處,所謂阿耨多羅三藐三菩提。”
수보리야, 마치 앞의 120살 노인이 늙고 쇠약한 가운데 풍병ㆍ냉병ㆍ열병과 그 합병증을 앓고 있으므로 이 사람이 일어나서 가고자 한다면 양쪽에서 건강한 사람들이 저마다 한 팔씩 부축하고는 말하기를 ‘어려워하지 마시고 가시고 싶으신 대로 가십시오. 우리들 두 사람이 잘 붙잡고 놓지 않겠습니다’고 하는 것과 같으니라.
이와 같이 수보리야, 만약 선남자ㆍ선여인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위하여 믿음과 참음과 청정한 마음과 깊은 마음과 의욕과 이해와 버림과 정진이 있으면 그는 반야바라밀의 방편의 힘에 수호되고 나아가 일체종지에 수호되므로 이 사람은 중도에 성문이나 벽지불의 지위에 떨어지지 않고 목적한 곳에 이르르게 되나니, 곧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이니라.”
▶論. 釋曰:菩薩有二種:一者、得諸法實相;二者、雖未得實相,於佛道中有信、有忍、有淨心、有深心、有欲、有解、有捨、有精進。“信”者,信罪福業因緣果報,信行六波羅蜜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有人雖信佛道,思惟、籌量,心不能忍,是故說“有忍”。
▷논. 해석한다; 보살에는 두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제법의 실상(實相)을 얻은 이요,
둘째는 비록 아직 실상을 얻지는 못하였으나, 부처님의 불도 가운데에서 믿음의 신(信)ㆍ참음의 인(忍)ㆍ청정한 마음의 정심(淨心)ㆍ깊은 마음의 심심(深心)ㆍ하고자 하는 욕(欲)ㆍ이해하는 해(解)ㆍ버림의 사(捨)ㆍ정진(精進)이 있는 이이다.
믿음의 신(信)이란 죄와 복의 업인연(業因緣)의 과보를 믿으면서 육바라밀을 믿고 행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 것이니, 어떤 사람이 비록 부처님의 불도를 믿으면서 사유하고 헤아릴지라도 마음으로 참아내지 못하기 때문에 참음의 인(忍)이 있음을 말하는 것이며,
有人雖忍,邪疑未斷故心濁不淨,是故說“有淨”。有人雖信、忍、心淨,而有淺、有深,是故說“深心”。四事因緣故,一心欲得無上道,不欲餘事,是故說“有欲”。了了決定知無上道爲大、世閒餘事爲小,是故說“有解”。
어떤 사람은 비록 참음의 인(忍)이 있이 있을지라도 삿된 의심을 아직 끊지 못한 때문에 마음이 흐리고 깨끗하지 못하기 때문에 청정함의 정(淨)이 있음을 말하며,
어떤 사람은 비록 믿는 신(信)과 참음의 인(忍)이 있고 마음이 청정한 정(淨)일지라도 얕고 깊음이 있기 때문에 깊은 마음의 심심(深心)이라 하며,
신(信) 인(忍) 정심(淨心) 심심(深心)의 네 가지 인연으로 무상도(無上道)를 일심으로 얻고자 하면서 그 밖의 일은 바라지 않기 때문에 하고자 하는 욕(欲)이 있다고 하며,
분명하게 결단하여 요결정(了決定)하면서 위없는 무상도를 아는 것을 가장 큰 것으로 삼고, 그 밖의 세간의 일은 작은 것으로 삼기 때문에 이해함의 해(解)가 있다고 하며,
以欲、解定心故,捨財及捨諸惡心、慳、恚等煩惱,是故說“捨”。爲捨故常能“精進”。有如是等諸功德。
하고자 하는 욕(欲)과 이해함의 해(解)로 마음을 다스려 안정된 정심(定心)으로 재물과 악심(惡心)과 간탐과 성내는 등의 번뇌를 버리기 때문에 버림의 사(捨)를 말하며,
버렸기 때문에 항상 정진(精進)할 수 있으므로 이와 같은 모든 공덕이 있게 되는 것이다.
若不得般若波羅蜜,若身壞命終時,若惡知識沮壞,則失菩薩道;世閒功德故受世閒果報,然後墮聲聞、辟支佛地,不能至無上道。
만약 반야바라밀을 얻지 못한 채, 몸이 무너지면서 목숨을 마칠 때 만약 삿된 이에게 파괴당한다면, 보살도를 잃게 되며, 세간의 공덕 때문에 세간의 과보를 받은 뒤에는 성문이나 벽지불의 지위에 떨어지게 되므로 위없는 무상도에 이르지 못하는 것이니,
此中佛自說五譬喩:“船”是行者身。“浮囊等物”卽是般若、方便。“甁”是菩薩道。般若、方便是火。未與般若、方便和合故,不能受持六波羅蜜功德水至無上道。
여기에서 부처님께서 다섯 가지의 오비유(五譬喩)로 말씀하셨으니,
배는 수행자의 몸을 말하고, 공기주머니인 부낭(浮囊) 등의 것들은 반야의 방편을 말하며,
병(甁)은 보살의도를 말하고, 반야의 방편은 물을 말하는 것이니,
아직 반야의 방편과 화합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육바라밀 공덕의 물을 받아 지니면서 위없는 무상도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이다.
“不補治船”,是菩薩無方便。信等功德寶物,是五波羅蜜等諸善法船。寶異處者,與本願乖異,或受人天樂、或墮二乘。
‘배를 보수하지 않았다’고 함은, 이 보살이 방편이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며,
믿음 등의 공덕은 보물이요, 이 다섯 가지의 오바라밀 등의 모든 착한 선법은 배(船)이며,
‘배와 보물이 처소를 달리하면서 흩어진다’는 것은 본래의 서원과 어긋나게 되어서 혹은 인간ㆍ천상의 즐거움을 받기도 하고, 혹은 이승(二乘)에 떨어진다는 것이며,
大利者,所謂一切智等佛法寶。“老病人”是有信等功德菩薩。不斷六十二邪見故名老;不斷百八等諸煩惱故名病。從牀起者,從三界牀起,我當作佛。以邪見煩惱因緣故不能成菩薩道。二人者,般若及方便。般若波羅蜜能滅諸邪見、煩惱、戲論,將至畢竟空中。方便將出畢竟空。
‘큰 이익의 대리(大利)’란, 이른바 일체지(一切智) 등의 부처님 불법보(佛法寶)이며,
‘늙고 병든 노병인(老病人)’은 바로 믿음 등의 공덕이 있는 보살이니, 62종의 삿된 사견을 끊지 못하였기 때문에 늙음(老)이라고 말하며, 108 등의 모든 번뇌를 끊지 못하였기 때문에 병(病)이라 하는 것이며,
‘평상(침대)으로부터 일어난다’고 함이란, ‘나는 삼계(三界)의 평상으로부터 일어나서 부처님이 되겠다’는 것이나, 삿된 사견과 번뇌의 인연 때문에 보살도를 이루지 못하는 것이며,
‘두 사람’이라 함은 반야와 방편을 말하는 것이니, 반야바라밀은 모든 삿된 소견과 번뇌와 쓸모없는 희론을 없애면서 필경공(畢竟空) 가운데에 이르게 하며, 방편으로는 장차 필경공마저도 벗어나게 하는 것이다.
▶經. 爾時,佛語須菩提言:“善哉!善哉!須菩提!汝爲諸菩薩摩訶薩問佛是事。須菩提!若有求佛道善男子、善女人,從初發意已來,以我我所心布施、持戒、忍辱、精進、禪定、智慧;是善男子善女人布施時作是念:‘我是施主,我施是人,我施是物。我持戒,我修忍,我精進,我入禪,我修智慧。’
▷경. 그때 부처님께서 수보리 존자에게 말씀하셨다.
‘참으로 훌륭하고 훌륭하구나, 수보리야. 그대는 모든 보살마하살들을 위하여 부처님께 이러함을 묻는구나!
수보리야, 만약 부처님의 불도를 구하는 선남자ㆍ선여인이 처음 초발의(初發意)하여서부터 나(我)와 내 것의 아소(我所)라는 마음으로써 보시하고 계율을 지니며, 욕됨을 참고 정진하며, 선정에 들고 지혜를 닦는다면,
이 선남자ㆍ선여인이 보시할 때에는 ‘나는 바로 시주(施主)요, 나는 이 사람에게 보시하는 시인(施人)하는 것이며, 나는 이 시물(施物)을 보시한다. 나는 계율을 지니고 나는 인욕을 닦으며, 나는 정진하고 나는 선정에 들며, 나는 지혜를 닦는다’고 하느니라.
是善男子、善女人念‘有是施,是我施’,乃至念‘有是慧,是我慧’。何以故?檀波羅蜜中無如是分別。遠離此彼岸是檀波羅蜜相;尸羅波羅蜜、羼提波羅蜜、毘梨耶波羅蜜、禪波羅蜜,般若波羅蜜中無如是分別。何以故?遠離此彼岸是般若波羅蜜相。是人不知此岸、不知彼岸,是人不爲檀波羅蜜乃至不爲一切種智所護故,墮聲聞、辟支佛地,不能到薩婆若。
이 선남자ㆍ선여인은 ‘이렇게 보시가 있고, 이것이 나의 보시이다’고 생각하며, 나아가 ‘이러한 지혜가 있고, 이것이 나의 지혜이다’고 생각하는 것이나, 단(보시)바라밀 가운데에는 이와 같은 분별이 없는 것이니, 이 언덕의 차안(此岸)과 저 언덕의 피안(彼岸)을 멀리 여의는 것이 바로 단바라밀의 상(相)이기 때문이니라.
시라바라밀과 찬제바라밀과 비리야바라밀과 선바라밀과 반야바라밀 가운데에는 이와 같은 분별이 없나니, 왜냐하면 이 언덕의 차안(此岸)과 저 언덕의 피안(彼岸)을 멀리 여의는 것이 바로 반야바라밀의 상(相)이기 때문이니라.
이 사람은 이 언덕의 차안(此岸)을 알지 못하고 저 언덕의 피안(彼岸)을 알지 못하는 것이니라.
이 사람은 단바라밀로부터 일체종지까지의 보호를 받지 못하기 때문에 성문이나 벽지불의 지위에 떨어지며, 살바야(薩婆若)에 이르지 못하느니라.
須菩提!云何求佛道人無方便?須菩提!求佛道人從初發心已來無方便行布施、持戒、忍辱、精進、禪定,修智慧。是人作如是念:‘我布施,是人,以是物施;我持戒、修忍辱、勤精進、入禪定,修智慧、如是修智慧。’是人念有是施、是我施,以是施自高;念有是戒、是我戒,以是戒自高;念有是忍、是我忍,以是忍自高;念有是精進、是我精進,以是精進自高;念有是禪定、是我禪定,以是禪定自高;念有是慧、是我慧,以是慧自高。
수보리야, 어떻게 부처님의 불도를 구하는 구불도인(求佛道人)에게 방편이 없는 것이라 하는 것인가?
수보리야, 부처님의 불도를 구하는 사람이 처음 초발심에서부터 방편없이 보시와 지계와 인욕과 정진과 선정을 행하고 지혜를 닦으면서도, 이 사람이 생각하기를 ‘나는 보시한다, 이 사람에게 보시한다, 이 물건으로써 보시한다’고 하며, ‘나는 계율을 지니고 인욕을 닦으며 부지런히 정진하고 선정에 들어가며 이처럼 지혜를 닦는다’고 하며,
이 사람은 ‘이러한 보시가 있고, 이것이 내가 한 보시이다’라고 생각하며, 이러한 보시로써 스스로 뽐내느니라.
‘이러한 계율이 있고 이것이 내가 지닌 계율이다’라고 생각하고 이러한 계율로써 스스로 뽐내며,
‘이러한 인욕이 있고 이것이 나의 인욕이다’라고 생각하고 이러한 인욕으로써 스스로 뽐내며,
‘이러한 정진이 있고 이것이 내가 한 정진이다’라고 생각하고 이러한 정진으로써 스스로 뽐내며,
‘이러한 선정이 있고 이것이 내가 닦는 선정이다’라고 생각하고 스스로 뽐내며,
‘이러한 지혜가 있고 이것이 내가 닦은 지혜이다’라고 생각하고 스스로 뽐내는 것이니라.
何以故?檀波羅蜜中無如是分別,遠離此彼岸是檀波羅蜜相;遠離此彼岸是尸羅波羅蜜相;遠離此彼岸是羼提波羅蜜相;遠離此彼岸是毘梨耶波羅蜜相;遠離此彼岸是禪波羅蜜相;遠離此彼岸是般若波羅蜜相。何以故?般若波羅蜜中無如是憶念分別。是求佛道善男子、善女人不知此岸、不知彼岸,是人不爲檀波羅蜜所護,不爲尸羅波羅蜜、羼提波羅蜜、毘梨耶波羅蜜、禪波羅蜜、般若波羅蜜所護故,乃至不爲一切種智所護故,或墮聲聞道中、或墮辟支佛道中,不能得到薩婆若。如是,須菩提!菩薩摩訶薩不爲般若波羅蜜、方便力所守護故,或墮聲聞地、或墮辟支佛道中。”
왜냐하면 단바라밀 가운데에는 이와 같은 분별이 없기 때문이니,
이 언덕과 저 언덕을 멀리 여읜 것이 바로 단바라밀의 상(相)이요, 이 언덕과 저 언덕을 멀리 여의는 것이 바로 시라바라밀의 상(相)이며, 이 언덕과 저 언덕을 여의는 것이 바로 찬제바라밀의 상(相)이요, 이 언덕과 저 언덕을 멀리 여의는 것이 바로 비리야바라밀의 상(相)이며, 이 언덕과 저 언덕을 여의는 것이 바로 선바라밀의 상(相)이요, 이 언덕과 저 언덕을 여의는 것이 바로 반야바라밀의 상(相)이기 때문이니라.
왜냐하면 반야바라밀 가운데에는 이와 같은 생각과 분별이 없기 때문이니,
부처님의 불도를 구하는 선남자ㆍ선여인이 이 언덕을 알지 못하고 저 언덕을 알지 못한다면, 이러한 사람은 단바라밀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시라바라밀과 찬제바라밀과 비리야바라밀과 선바라밀과 반야바라밀의 보호를 받지 못하며, 나아가 일체종지의 보호를 받지 못하기 때문에 혹은 성문의 도(道) 가운데에 떨어지기도 하고 혹은 벽지불의 도 가운데에 떨어지면서 살바야(薩婆若)에 이르지 못하게 되느니라.
이와 같이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의 방편의 힘에 수호되지 못하기 때문에 혹은 성문의 지위에 떨어지기도 하고 혹은 벽지불의 도 가운데에 떨어지기도 하는 것이니라.
“須菩提!云何菩薩摩訶薩爲般若波羅蜜、方便力所守護故,不墮聲聞、辟支佛道中,疾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須菩提!
菩薩從初已來,以方便力布施,無我我所心布施,乃至無我、我所心修智慧;是人不作是念:‘我有是施,是我施。’不以是施自高;乃至般若波羅蜜亦如是。
수보리야, 어떻게 하는 것이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의 방편의 힘에 수호되기 때문에 성문이나 벽지불의 도 가운데에 떨어지지 않고 신속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하는 것인가?
수보리야, 보살은 처음부터 방편의 힘으로써 보시하되 나와 내 것의 아아소(我我所)의 마음없이 보시하며, 나아가 나와 내 것의 아아소(我我所)의 마음없이 지혜를 닦느니라.
이 사람은 ‘나에게는 이러한 보시가 있고, 이것이 바로 내가 한 보시이다’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이러한 보시로써 스스로 뽐내지 않나니, 반야바라밀에 이르기까지도 역시 그와 같느니라.
是菩薩不念‘我布施’,不念‘我施是人,用是物施’;不念‘我持戒,有是戒’;不念‘我忍辱,有是忍辱’;不念‘我精進,有是精進’;不念‘我禪定,有是禪定’;不念‘我修智慧,有是智慧。’
이 보살은 ‘나는 보시한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나는 이 사람에게 이러한 물건으로써 보시한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나는 계율을 지니며 이러한 계율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나는 인욕하며 이러한 인욕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나는 정진하나니 이러한 정진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나는 선정을 닦나니 이러한 선정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나는 지혜를 닦나니 이러한 지혜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느니라.
何以故?是檀波羅蜜中無如是分別,遠離此彼岸是檀波羅蜜相;遠離此彼岸是尸羅波羅蜜相;遠離此彼岸是羼提波羅蜜相;遠離此彼岸是毘梨耶波羅蜜相;遠離此彼岸是禪波羅蜜相;遠離此彼岸是般若波羅蜜相。
왜냐하면 이 단바라밀 가운데에는 이와 같은 분별이 없기 때문이니라.
이 언덕과 저 언덕을 멀리 여의는 것이 바로 단바라밀의 상(相)이요, 이 언덕과 저 언덕을 멀리 여의는 것이 바로 시라바라밀의 상(相)이기 때문이며, 이 언덕과 저 언덕을 멀리 여의는 것이 바로 찬제바라밀의 상(相)이요 이 언덕과 저 언덕을 멀리 여의는 것이 바로 비리야바라밀의 상(相)이기 때문이며, 이 언덕과 저 언덕을 멀리 여의는 것이 바로 선바라밀의 상(相)이요 이 언덕과 저 언덕을 멀리 여의는 것이 바로 반야바라밀의 상(相)이기 때문이니라.
何以故?是般若波羅蜜中,無如是憶想分別。是菩薩摩訶薩知此岸、知彼岸,是人爲檀波羅蜜所護、爲尸羅波羅蜜所護、爲羼提波羅蜜所護、爲毘梨耶波羅蜜所護、爲禪波羅蜜所護、爲般若波羅蜜所護,乃至爲一切種智所護故,不墮聲聞、辟支佛地,得到薩婆若。如是,須菩提!菩薩摩訶薩爲般若波羅蜜、方便力所護故,不墮聲聞、辟支佛地,疾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왜냐하면 이 반야바라밀 가운데에는 이와 같은 생각과 분별이 없기 때문이니, 이 보살마하살은 이 언덕을 알고 저 언덕을 아느니라. 이 사람은 단바라밀에 보호 받게 되고, 시라바라밀에 보호 받게 되며, 찬제바라밀에 보호받게 되고, 비리야바라밀에 보호받게 되며, 선바라밀에 보호받게 되고, 반야바라밀에 보호 받게 되며, 나아가 일체종지에 보호 받게 되는 까닭에 성문이나 벽지불에 떨어지지 않고 살바야에 이르게 되느니라.
이와 같이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의 방편의 힘에 보호받게 되므로 성문이나 벽지불의 지위에 떨어지지 않으며 신속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하게 되느니라.”
▶論. 釋曰:爾時,佛可須菩提意,更說失行因緣:“菩薩雖行信等善法,亦不得無上道,所謂以我、我所心行六波羅蜜故。”是中無分別此岸、彼岸,以遠離相是般若波羅蜜;而分別著行,是爲失。
▷논. 해석한다. 그때 부처님께서는 수보리 존자의 뜻을 인가하시면서 다시 허물이 되는 행의 인연을 말씀하셨으니, 보살은 비록 믿음의 신(信) 등의 착한 선법을 행한다 할지라도 역시 가장 높은 무상법을 얻지 못하나니, 이른바 나와 내 것이라는 마음으로써 육바라밀을 행하기 때문이며,
이 언덕과 저 언덕을 분별함이 없고, 상(相)을 멀리 여의었기 때문에 바로 반야바라밀이라 하는 것이나, 분별하고 집착하면서 행하는 그것이 바로 허물인 것이다.
上佛雖說無方便義,不說無方便名;欲令是事明了故,命須菩提:“云何有方便、無方便?”內無我、我所心,外觀一切法空不取相,般若、方便乃至一切種智守護菩薩故,名有方便。守護者,五波羅蜜邊得功德力,般若波羅蜜邊得智慧力 以二因緣故不失道。
비록 부처님께서 위에서 방편이 없는 이치는 말씀하셨으나, 방편이 없는 이름은 말씀하지 않으셨으므로 이를 분명히 알게 하시고자 수보리 존자에게 명하시기를, “어떠한 것이 방편이 있는 것이고, 어떠한 것이 방편이 없는 것인가?”라고 하셨으며, “안으로는 나와 내 것이라는 마음이 없고, 밖으로는 일체법의 공(空)함을 관하면서 상(相)을 취하지 않는 것이 반야의 방편이며, 나아가 일체종지로 보살을 수호하기 때문에 방편이 있다”고 하셨으며,
‘수호(守護)’란,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바라밀의 다섯 가지 바라밀로부터는 공덕의 힘을 얻는 것이요, 반야바라밀로부터는 지혜의 힘을 얻는 것이니, 이 두 가지의 인연 때문에 도(道)를 잃지 않는 것이다.
'대지도론(大智度論)' 카테고리의 다른 글
대지도론(大智度論) 제71권 6 (0) | 2024.10.01 |
---|---|
대지도론(大智度論) 제71권 5 (0) | 2024.10.01 |
대지도론(大智度論) 제71권 3 (1) | 2024.09.29 |
대지도론(大智度論) 제71권 2 (1) | 2024.09.28 |
대지도론(大智度論) 제71권 1 (0) | 2024.09.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