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智度論釋初品中 般若波羅蜜 第二十九 卷第十八

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구마라집 한역

30. 초품 중 반야(般若)의 모습[]과 뜻[]을 풀이함 1

 

問曰, 何以獨稱 般若波羅蜜 爲'摩訶', 而不稱 五波羅蜜?

묻나니, 어찌하여 오직 반야바라밀만을 마하(摩訶, mahā)라 칭하고 나머지 다섯 바라밀은 마하라 칭하지 않는 것입니까?

 

答曰, '摩訶' 秦言大, '般若'言慧, '波羅蜜'言到彼岸,

以其 能到智慧大海彼岸, 到諸一切智慧邊 窮盡其極故 名到彼岸。

답하나니, '마하(摩訶)'는 진나라 말로는 크다는 뜻이고, '반야(般若)'는 지혜라는 뜻이며, '바라밀(波羅蜜)'은 저쪽의 언덕=彼岸(피안)에 이른다는 뜻이라.

그가 능히 지혜의 대해(大海)인 피안에 이르고, 일체 지혜의 궁극=邊(변)에 이르러 그 근원의 궁극에 이르렀기 때문에 ‘피안에 이른= 到彼岸(도피안)’이라 하는니라.

 

마하(摩訶)는 범어의 ‘Maha’를 발음만 그대로 따온 것일 뿐, 한자로는 특별한 뜻이 없습니다.
‘마하’의 뜻은, ‘크다, 많다, 뛰어나다’는 의미로서, 우리들이 일상에서 사용하는 의미의 크고 많다는 개념을 훨씬 초월하는 뜻을 가지고 있는 마하는 절대적인 개념이기 때문에 ‘어마어마하게’라든가, ‘엄청나게’, ‘무진장’등의 개념으로도 이 마하를 풀이하기에는 많은 아쉬움이 있습니다.
우리의 분별의 세계에서 상대적으로 다른 것보다 크고, 다른 것보다 많고, 상대보다 뛰어나다는 정도의 개념이 아니라 어느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절대적으로 크고 많다는 개념인 것입니다. 마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가지고 있었던 상대적인 분별로부터 과감히 벗어나야 합니다.- 법상스님

 

一切世閒中 十方三世 諸佛第一大, 次有菩薩 辟支佛 聲聞,

是四大人 皆從般若波羅蜜中生 是故名爲大。

일체의 세상과 시방과 3세에서 부처님들이 제일 으뜸가게 크시고, 다음으로 보살과 벽지불과 성문이니, 이 네 가지 대인(大人)이 모두 반야바라밀로부터 나오게 되는 것이므로, 이러함으로 이를 일컬어 '大(대)'라 하는 것이며, 

 

復次 能與衆生 大果報 無量無盡 常不變異 所謂涅槃, 餘五波羅蜜不能爾。

布施等 離般若波羅蜜 但能與世閒果報 是故不得名大。

또한 능히 중생들에게 무량(無量)하고 무진(無盡)하며 항상하여 결코 변하지 않는, 이른바 열반이라는 큰 과보=大果報(대과보)를 줄 수 있으나,

나머지 다섯 바라밀은 그렇지 못하니, 보시 등은 반야바라밀을 떠나서는 단지 세간의 과보만을 줄 수 있을 뿐이므로 크다고 이름할 수 없느니라. 

 

問曰, 何者是智慧?

묻나니, 어떠한 것을 지혜(智慧)라 할 수 있는 것입니까?

 

答曰, 般若波羅蜜 攝一切智慧。所以者何, 菩薩求佛道 應當學一切法 得一切智慧, 所謂 聲聞 辟支佛 佛智慧。

답하나니, 반야바라밀이 모든 지혜를 포섭하나니, 왜냐하면 보살이 불도를 구하고자 하면, 마땅히 일체법(一切法)을 배워 일체의 지혜를 얻어야 하는 때문이니, 이른바 성문ㆍ벽지불ㆍ부처님의 지혜이다.

 

是智慧 有三種, 學 無學 非學非無學。

이 지혜에는 세 종류가 있나니, 배우는= 學(학, 유학有學)과 배움을 마친= 無學(무학)과 그 나머지 학도 무학도 아닌 것은 비학비무학(非學非無學)이니라.

 

非學非無學智者 如乾慧地 不淨 安那般那 欲界繫四念處 煖法 頂法 忍法 世閒第一法等。

비학비무학(非學非無學)의 지혜라 함은 건혜지(乾慧地, tarka-bhūmi, 초지初地)ㆍ부정(不淨, 부정관不淨觀)ㆍ안나반나(安那般那, 입출식념入出息念), 욕계에 매여 있는 법=欲界繫(욕계계, kāma-dhātv-apta)의 4념처(四念處)ㆍ난법(煖法, 명득정明得定)ㆍ정법(頂法, 명증정明增定)ㆍ인법(忍法, 인순정印順定)ㆍ세간제일법(世間第一法, 무간정無間定) 등과 같으며, 

  

*건혜지(乾慧地, tarka-bhūmi, 초지初地) 이른바 ‘마른 지혜’를 뜻한다. 보살 10지 가운데 하나이며, 성문ㆍ연각ㆍ보살이 함께 닦는 삼승공십지(三乘共十地) 가운데 하나이다. 4염처관(念處觀)을 닦아 지혜는 깊으나 아직 궁극적인 진리의 법성(法性)을 깨닫지 못한 상태를 가리킴.

*안반(安般)은 산스크리트어 āna-apāna의 음사인 안나반나(安那般那)의 준말. āna는 들숨, apāna는 날숨을 뜻하며, 사띠(sati, 念) 즉,명상(瞑想》을 결합시킨 안나반나념(安那般那念) 또는 입출식념(入出息念)으로 들숨과 날숨을 헤아리거나 거기에 집중하는 수행법

4념처(四念處) 수행(위빠사나)= ①몸[身念處], 몸에 대하여 알아차림 ②느낌[受念處], 느낌과 반응을 알아차림 ③ 마음[心念處], 마음을 알아차림 ④ 법[法念處]  --마음의 대상을 알아차리는 수행으로, 신(身)ㆍ수(受)ㆍ심(心)ㆍ법(法)의 네 가지에 대한 수행으로 사념처는 어떠한 종교에도 전해지지 않은 붓다가 창안한 수행법이다. 붓다는 당시까지 어떠한 종교에도 없는 새로운 수행법을 스스로 창안해 내셨다. 그것이 바로 몸, 느낌, 마음, 법 즉 「신ㆍ수ㆍ심ㆍ법」에 대한 집중적인 통찰법인 사념처 수행이다.-아미산
*난법(煖法)=유식불교(唯識佛敎)의 수행 5위(修行五位) 중 가행위(加行位)에 4선근(四善根) 가운데 처음이 난법(煖法)이다.
이것을 명득정(明得定)이라고도 하는데, 밝을 명(明), 얻을 득(得), 우리 마음이 항시 어둠이 깔려 무겁다가 마음이 훤하게 밝아 와서 마음이 시원해 온다는 말이다. 수행에 처음에 들어가면 어두움이 갔다 왔다 하고 마음이 답답하고 괴롭다. 그러나 깊이 공부하다가 보면, 맑아져서 몸과 마음이 개운하여 성성적적(惺惺寂寂)하게 되는데, 이때는 혼침(昏沈)도 안 오고 그야말로 어떠한 분별망상도 줄어드는 것이다. 그래서 몸이 마치 전류에 감전 된 것처럼 찌르르해지고, 전신이 머리에서 발끝까지 아주 시원스럽게 개어오는 때가 난위(煖位), 이른바 명득정(明得定)의 밝음을 얻는 경계이다. 그만치 우리 인간이 선량해졌다는 증거이고, 난법의 단계까지만 가도 그 때는 별로 피로를 모르게 된다.-대한불교광덕사

*정법(頂法, 明增定)= 질다심상(質多心相), 즉 분별(分別)하는 마음 상태(狀態)가 아니라, 질다심상(質多心相)을 직견(直見)하는 법상(法相)입니다. 밝음이 더욱 증가(增加)하는 단계(段階)로서, 욕계정천(欲界頂天) 즉 욕계(欲界)를 거의 벗어난 경지(境地)입니다. 정법(頂法)은 인위(忍位)의 진(進)과 난위(煖位)의 퇴(退)의 양(兩)쪽에 있는 것이 산정상(山頂上)과 같으므로 정(頂)이라 합니다. 퇴(退)하더라도 결코 선근(善根)을 끊지 않게 되는 법상(法相)입니다.

*인법(忍法, 印順定)= 인법(忍法)은 사성제(四聖諦)를 증득하여 아는 것(證知)이 가장 수승(殊勝)하므로 인(忍)이라고 합니다. 도종인(道種忍), 즉 도(道)의 종자(種子)가 잠재의식(潛在意識)에 확실(確實)하게 뿌리를 내려서 불퇴전(不退轉)의 인법(忍法)을 증득(證得)하는 경지(境地)입니다. 경(境)도 식(識)도 모두 공(空)한 지혜(智慧)를 내어서 인가(印可)하는 인순정(印順定)입니다.

세제일법(世第一法, 無間定)= 유루위(有漏位) 중에서 가장 수승(殊勝)한 법상(法相)이기 때문에 세제일법(世第一法)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한 찰나에 관찰하여, 바로 견도(見道) 성위(聖位)에 들어 갑니다. 금강불성(金剛佛性)의 심일(心日)을 견증(見證)하여, 세간(世間)에서 가장 수승(殊勝)한 경지(境地)입니다. 무간정(無間定)은 번뇌(煩惱)가 낄 사이가 없다는 의미(意味)입니다. 세제일법(世第一法)은 유루위(有漏位)이기 때문에 아직은 성자(聖者)가 아닙니다.-불교와 아미타정토

 

學智者 苦法智忍慧 乃至 向阿羅漢 第九無㝵道中 金剛三昧慧。

유학(有學)의 지혜라 함은 고법지인(苦法智忍)의 지혜 내지 아라한의 아홉 번째 무애도(無礙道, 멸수상정滅受想定) 가운데 금강삼매(金剛三味, Vajropamasamādhi, 금강유삼매金剛喻三昧)의 지혜이다.

 

고법지인(苦法智忍)= 고법인(苦法忍)은 불교사전들과 문헌들에서 다음과 같이 내용은 동일하지만 그 표현은 여러 형태로 정의되고 있다.
고법인(苦法忍)은 욕계의 고제(苦諦)를 명료하게 주시하여 그것에 대한 미혹을 끊고 확실하게 인정하는 지혜이다.
고법인(苦法忍)은 욕계 고제(苦諦)의 이치를 관(觀)하여 고법지(苦法智)를 얻으려고 할 때에 일어나는 인가결정(認可決定)하는 마음이다.
고법인(苦法忍)은 욕계의 고제(苦諦)를 관(觀)하여 생기는 무루심이다.
고법인(苦法忍)은 고제를 관찰해 얻는 지혜인 고법지(苦法智)의 직전(直前)에 얻는 마음이다.
고법인(苦法忍)은 욕계의 고제(苦諦)를 관(觀)하여 고법지(苦法智)를 득하기 전에 일어나는 무루의 법지(法智)의 인(忍), 즉 법지(法智)의 무간도지(無間道智)이다.
고법지인(苦法智忍) 즉 고법인(苦法忍)에 대해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음의 전제 사항들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사실상 이것은 불교의 번뇌론 전반에 대한 이해에 해당한다.
고법지(苦法智): 고지(苦智)와 법지(法智)가 합쳐진 낱말로서의 고법지에 대한 이해,
견혹(見惑): 모든 번뇌를 견혹(견소단) · 수혹(수소단)으로 나눌 때 견혹의 성격에 대한 이해,
견고소단(見苦所斷): 모든 번뇌를 견고소단(見苦所斷) · 견집소단(見集所斷) · 견멸소단(見滅所斷) · 견도소단(見道所斷) · 수도소단(修道所斷)의 5부(五部)로 나눌 때 견고소단에 대한 이해,
무간도(無間道): 인(忍)과 지(智)의 관계에 대한 이해, 즉 인(忍)을 무간도라고 하고 지(智)를 해탈도(解脫道)라고 하는 것에 대한 이해이다

금강삼매(金剛三昧, vajra)는 금강유삼매(金剛喻三昧)라고도 하며 108삼매 가운데 언급되는 순서로 제10번째 삼매이다.

금강경에서 일체중생을 무여열반에 들게 하지만, 마음에는 모든 중생의 번뇌를 끊는다는 생각이 없다는 명상을 가르친다. 
열반경에서는 열반경을 공부하면 얻는 10가지 공덕 중에서 여섯번째 공덕으로 금강삼매를 얻는다고 가르친다.- 위키백과

 

無學智者 阿羅漢 第九解脫智 從是已後 一切無學智 如盡智 無生智等 是爲無學智。

무학의 지혜라 함은 아라한의 아홉 번째인 멸수상정(滅受想定, 멸진정滅盡定)이라는 해탈도(解脫道)의 지혜이니, 이로부터는 일체의 무학의 지혜는 마치 사성제 완성의 진지(盡智, kṣaya-jñāna)ㆍ부동 아라한의 지혜인 무생지(無生智, anutpāda-jñāna) 등과 같은 것으로, 이와 같은 것이 無學智(무학지)이다.

진지(盡智, kṣaya-jñāna) 4성제의 완성을 아는 지혜. 괴로움은 이미 알려졌으며, 그 원인은 끊어졌고, 적멸의 경지는 체득되었고, 그리로 가는 길은 이미 수습되었다고 아는 지혜이다.

무생지(無生智, anutpāda-jñāna) 10지(智, daśa-jñānāni) 가운데 하나로, 진지(盡智) 다음에 생하는 부동아라한의 지혜를 말한다.

 

求辟支佛道智慧 亦如是。

벽지불의 도를 구하는 지혜 역시 이와 같와 같으니라.

 

問曰, 若辟支佛道 亦如是者, 云何分別 聲聞辟支佛?

묻나니, 만약 벽지불의 도(辟支佛道벽지불도) 역시 이와 같은 것이라면 어떻게 성문과 벽지불을 분별할 수 있습니까?

 

答曰, 道雖一種 而用智有異。若諸佛不出 佛法已滅 是人先世因緣故 獨出智慧 不從他聞 自以智慧得道。

답하나니, 도(道)는 비록 한 종류이지만 지혜의 쓰임에 있어 다르나니, 

부처님이 아직 세간에 나타나시기 전이나 불법이 이미 멸한 뒤라도, 이 사람은 전생의 인연이 있는 까닭에 스스로 혼자서 지혜를 내게 되어 남에게 배우고 듣지 않고 스스로의 지혜로 도(道)를 얻게 되느니라.

 

如一國王 出在園中 遊戲。淸朝 見林樹華菓蔚茂 甚可愛樂。

王食已而臥 王諸夫人婇女 皆共取華 毀折林樹。

王覺已 見林毀壞 而自覺悟, 一切世閒 無常變壞 皆亦如是。

思惟是已 無漏道心生 斷諸結使 得辟支佛道 具六神通 卽飛到閑靜林閒。

예를 들자면, 어떤 나라의 국왕이 동산에서 노니는데, 이른 아침에 숲의 꽃과 열매가 무성하여 매우 사랑스러워 즐거웠으나, 왕이 식사를 하고 잠시 누워있는 사이에 왕의 부인과 궁녀들 모두가 꽃을 따느라 동산의 나무들을 꺾어서 훼손하였다.

왕이 깨어나서 숲이 훼손된 것을 보고 스스로  깨우치는 覺悟(각오)하여, 

‘일체의 세상이 무상하게 변하고 무너지는 것도 모두 이와 같으리라.’

이렇게 사유한 후 모든 번뇌의 허물을 여읜 무루도(無漏道, 출세간도出世間道)의 마음이 생기니, 모든 결사(번뇌)를 끊고 벽지불(辟支佛)의 도를 얻었으며, 6신통을 얻고는 즉시 고요한 숲속으로 날아갔다.

 

如是等因緣 先世福德 願行 果報 今世見少因緣 成辟支佛道 如是爲異。

이러한 인연은 전생의 복덕과 원행(願行, 서원)의 과보로서 금생에 조그마한 인연으로도 벽지불의 도를 이루게 되나니, 이와 같은 것이 다른 점이니라.

 

復次 辟支佛有二種, 一名獨覺 二名因緣覺。因緣覺如上說。

또한 벽지불에 두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독각(獨覺)이요, 둘째는 인연각(因緣覺)이라.

인연각이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으며, 

 

獨覺者 是人今世成道 自覺不從他聞 是名獨覺辟支迦佛。

독각(獨覺)이라 함은 그 사람이 금생에 도(道)를 이루되 다른 이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고 스스로 깨달으니, 이를 독각벽지가불(獨覺辟支迦佛)이라 하며, 


벽지가(辟支迦)는 “Pratyeka”의 중국식 번역으로, Pratyeka-buddha Pacceka-buddha 필륵지저가불(畢勒支底迦佛)이라 음역하며, 발랄예가불타(鉢剌翳伽佛陀) 벽지가불(辟支迦佛) 벽지가불(辟支迦佛) 줄여서 벽지불(辟支佛).

 

獨覺辟支迦佛 有二種, 一 本是學人 在人中生, 是時無佛 佛法滅。

是須陁洹 已滿七生 不應第八生 自得成道。

독각의 벽지불에 두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본래 학인(學人)으로서 인간 가운데 태어났으나, 이 때에는 부처님도 없고 불법도 멸하진 뒤로서,

이 수다원은 이미 일곱 생(生)을 채웠으나 여덟 번째 생(生)에서 태어날 수 없으므로, 스스로의 성도를 이루게 되나니, 

 

是人不名佛 不名阿羅漢 名爲小辟支迦佛, 與阿羅漢無異,

或有不如 舍利弗等 大阿羅漢者。

이러한 사람을 부처라 할 수도 없고 아라한이라고도 할 수 없음에 일컬어 작은 벽지불=小辟支迦佛(소벽지가불)이라 하니, 아라한과 다름이 없기도 하고, 혹은 사리불 등과 같은 大阿羅漢(대아하한)에 미치지 못하기도 하며, 

 

大辟支佛 亦於一百劫中 作功德 增長智慧 得三十二相分,

或有三十一相 或三十 二十九相 乃至一相。

둘째는 대벽지불(大辟支佛)로서 일백 겁(劫) 동안 공덕을 지으며 지혜를 길러서 32상(三十二相) 가운데의 일부를 얻게 되었나니, 그것이 혹은 31상(三十一相), 혹은 30상(三十相), 혹은 29상(二十九相) 내지 1상(一相)를 갖추게 되기도 하며, 

 

於九種 阿羅漢中 智慧利勝 於諸深法中 摠相別相能入, 久修習定 常樂獨處。

如是相 名爲大辟支迦佛 以是爲異。

아홉 가지의 아라한 가운데서 지혜가 날카롭고 수승함에, 모든 깊은 법=諸深法(제심법) 가운데에서 총상(總相)과 별상(別相)을 능히 분별하여 알며, 오랫동안 정(定)을 닦고 항상 혼자 있기를 좋아하는, 이와 같은 특징을 일컬어 대벽지불(大辟支佛)이라 하나니, 이러함이 다른 점이니라.

 

求佛道者 從初發心作願, '願我作佛 度脫衆生 得一切佛法 行六波羅蜜 破魔軍衆 及諸煩惱 得一切智 成佛道 乃至 入無餘涅槃'

불도(佛道)를 구하는 이는 처음 발심할 때부터 서원을 세우되 '원하건대 제가 부처가 되어 중생을 구제하고, 일체의 불법을 얻으며, 6바라밀을 행하고, 모든 마군들과 번뇌를 깨트리고 무찔러 일체지(一切智)를 얻어서 불도를 이루며, 나아가서는 무여열반에 들겠습니다' 하나니, 

 

隨本願行 從是中閒 所有智慧 摠相別相 一切盡知 是名佛道智慧。

이러한 본래의 원=本願(본원)을 좇아 행하며, 이러함으로 인하여 지혜를 얻게 되나니, 총상(總相)과 별상(別相)을 비롯한 일체를 모두 다 알게 되니, 이러함을 불도지혜(佛道智慧)라 하며,

 

是三種智慧 盡能知 盡到其邊 以是故言 '到智慧邊'。

이러한 세 가지의 지혜를 능히 끝까지 잘 알며, 그 궁극에 이르게 되는 까닭에 ‘지혜의 궁극에 이른=到智慧邊(도지혜변)’ 이라 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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