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마경(維摩經)

유마힐소설경(維摩詰所說經) 5. 문수사리문질품(文殊師利問疾品)6

Skunky 2023. 4. 18. 08:00

又無方便慧縛(우무방편혜박) 有方便慧解(유방편혜해)

또 방편이 없는 지혜는 속박이며, 방편이 있는 지혜는 해탈입니다. 

Also, wisdom without skilful means is bondage, while wisdom with skilful means is liberation. 

[지혜와 방편, 지혜가 있으면 지혜에 걸맞은 방편을 써야 되는, 방편과 지혜가 병행되어서 지혜를 동반한 방편이 행해져야 바람직한 것인데, 방편이 없는 지혜는 속박이다.

지혜가 아무리 있어도 그 지혜를 운영하는 방편이 없으면 그것은 여기 저기 걸리는 속박이라는 것입니다.]

 

無慧方便縛(무혜방편박) 有慧方便解(유혜방편해)

지혜가 없는 방편은 속박이며, 지혜가 있는 방편은 해탈입니다.
Skilful means without wisdom is bondage, and skilful mean with wisdom is liberation. 

[이 문장은 지혜와 방편을 바꾸어 놓았을 뿐입니다]

 

何謂無方便慧縛(하위무방편혜박)?

무엇을 가지고 방편이 없는 지혜는 속박이라고 합니까?
What is the meaning of wisdom without skilful means is bondage? 

[何謂= 어째서 방편이 없는 지혜는 속박입니까? 앞에서 말한 것을 다시 설명하는 것입니다]

 

謂菩薩以愛見心莊嚴佛土(위보살이애견심장엄불토) 成就衆生(성취중생)

보살이 愛見心=애욕에 물든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서 불국토를 장엄하고,

중생을 성취시키며,(중생들을 제도하며) 

It means that the bodhisattva adorns the Buddha’s land with a loving view when fulfilling sentient beings. 

於空 無相 無作法中(어공무상무작법중) 而自調伏(이자조복)

是名無方便慧縛(시명무방편혜박)
공(unyat), 무상(nimitta), 무작(apraihita)의 (세 가지 해탈문) 가르침(을 실천하면서)

스스로의 마음을 조복하는 것을 방편이 없는 지혜의 속박이라 하는 것입니다.

The so-called wisdom without skilful convenience is bondage when one subdues oneself with emptiness, formlessness, and the Dharma of the unconditioned.

[3해탈문(三解脫門, 산 trīni vimoksa-mukhāni) 3삼매문(三三昧門), 3계의 고통의 원인이 되는 번뇌에서 해탈하여 열반을 득하는 방편[門]인 공해탈문(空解脫門) · 무상해탈문(無相解脫門) · 무원해탈문(無願解脫門)의 3가지 선정을 말한다. 공(空: 空寂, 실체가 없음) · 무상(無相: 차별이 없음) · 무원(無願: 원함 즉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 없음)을 관조하는 3가지 선정이 해탈 즉 열반에 들어가는 문(門, 방법, 방편)이 되기 때문에 3해탈문이라고 이름한 것으로, 3해탈(三解脫) · 3탈문(三脫門) · 3문(三門) · 3공문(三空門) · 3공관문(三空觀門) 또는 3삼매(三三昧) 또는 3공(三空)이라고도 한다.
공해탈문은 공삼매(空三昧) 또는 공삼마지(空三摩地)라고도 하며, 무상해탈문은 무상삼매(無相三昧) · 무상삼마지(無相三摩地) · 무상심삼매(無相心三昧) · 무상심삼마지(無相心三摩地) 또는 무상정(無相定)이라고도 하며, 무원해탈문은 무작해탈문(無作解脫門) · 무원삼매(無願三昧) · 무원삼마지(無願三摩地) 또는 무원심삼마지(無願心三摩地)라고도 한다. 이 가운데 무상해탈문의 다른 말인 무상정(無相定, 산스크리트어: ānimitta)은 무상정(無想定, 산 asaṃjñi-samāpatti)과 혼동하지 않아야 한다. 또한 무상해탈문의 다른 말인 무상삼매(無相三昧, 산 ānimitta-samādhi)는 힌두교의 무상삼매(無想三昧, 산 nirvikalpa samādhi)와 혼동하지 않아야 한다.]

 

何謂有方便慧解(하위유방편혜해)?

무엇을 有方便=방편을 갖춘 慧解=지혜의 해탈(upyoptta-prja)이라고 합니까?
What is the meaning of wisdom with skilful means is liberation? 

[何謂有方便慧解오, 방편도 있고 지혜도 있는 해탈은 무엇인가?]

 

謂不以愛見(위불이애견심) 莊嚴佛土(장엄불토) 成就衆生(성취중생)

물들지 않은 (애착하지 않는) 마음으로 불국토를 장엄하고 중생을 성취시키며, 

It means the bodhisattva does not adorn the Buddha’s land with affectionate attachment to fulfil sentient beings. 

於空無相無作法中(어공무상무작법중) 以自調伏(이자조복)

而不疲厭(이불피염) 是名有方便慧解(시명유방편혜해)

공․무상․무작의 가르침을 실천하면서 스스로를 조복하되,

피곤해 하거나 싫어하지 않음을 방편을 갖춘 지혜의 해탈이라고 합니다.
When one subdues oneself with emptiness, formlessness, and the Dharma of the unconditioned without exhaustions is called wisdom with skilful means is liberation. 

[즉 방편이 있는 지혜란 조화를 이룬 해탈이라는 말입니다

앞에서는 애견심, 애착심으로 중생을 건지고 불사를 하는 것은 조화가 깨어진 것으로 속박이 되는 것이라고 하였으나, 여기에서는 애견심이 아닌 마음으로 불토를 장엄하고 중생을 성취하고 공과 무상과 무작의 이치로써 스스로를 조복하고, 또 생사에 대해서 싫어함 없는 것이 방편도 있고 지혜도 있는 해탈이다]

 

何謂無慧方便縛(하위무혜방편박)?

何謂=무엇을 無慧=지혜가 없는 方便縛=방편의 속박(prajnupttopya)이라고 합니까?
What is the meaning of skilful means without wisdom is bondage? 

[어째서 지혜가 없는 방편은 속박이냐

앞에서 無慧인 方便은 縛이요, 有慧인 方便은 解라고 했었습니다]

 

謂菩薩住貪欲(위보살주탐욕) 瞋恚邪見等諸煩惱(진예사견등제번뇌)

而植衆德本(이식중덕본) 是名無慧方便縛(시명무혜방편박)

보살이 탐욕과 瞋恚=분노와 사견(어리석음)= 탐진치 등 온갖 번뇌에 얽혀 있으면서 

衆德本=많은 선근을 植=심고자 하는 것을 지혜가 없는 방편의 속박이라고 이름합니다.
It means that the bodhisattva plants all kinds of virtuous roots while dwelling upon destructive emotions such as greed, aversions, and evil views. That is the bondage of skilful means without wisdom. 

[탐진치 등의 번뇌의 머물면서, 植衆德本=여러 가지 덕의 근본을 심는다. 우리 모두가 지금 하고 있는 것처럼 탐심, 욕심, 분노, 삿된 소견 등등의 온갖 번뇌에 머물면서도 이렇게 유마경 공부도 하고, 때로는 보시도 하고, 선행도 하는 등이 植衆德本= 여러 가지 덕의 근본을 심는 것, 좋은 일을 하고자 하는 것 전부가 是名無慧方便縛, 지혜가 없는 방편의 속박이다]

 

何謂有慧方便解(하위유혜방편해)?

무엇을 지혜를 갖춘 (지혜가 있는) 방편의 해탈(prajopttopya)이라 합니까?
What is the meaning of skilful means with wisdom is liberation?

謂離諸貪欲(위리제탐욕) 瞋恚邪見等諸煩惱(지예사견등제번뇌) 而植衆德本(이식중덕본)

탐욕과 분노와 사견 등 온갖 번뇌를 謂離=떠나서 衆德本=많은 선근을 植=심으며, 

It means to be free from all destructive emotions such as greed, aversions,

and evil views and cultivate various roots of virtue;

迴向阿耨多羅三藐三菩提(회향아뇩다라삼막삼보리) 是名有慧方便解(시명유혜방편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고자 회향하는 것을 지혜를 갖춘 방편의 해탈이라 이름하는 것입니다.

dedicating to unsurpassed complete perfect enlightenment. That is called skilful means with wisdom is liberation. 

[중덕본을 심어서 아뇩다라샴먁삼보리 깨달음으로 회향하는 것이 有慧方便解다

즉 우리가 행하는 無慧方便=지혜가 없는 방편은 縛=속박에 해당되고, 보살들의 有慧方便은 解=해탈에 해당된다.  

지혜가 있는 방편은 바람직한 것이고 그것을 이름해서 해탈이라 하는 것으로 요컨대 탐, 진, 치 삼독이 속박과 해탈을 좌우한다는 것입니다.]

   

文殊師利(문수사리) 彼有疾菩薩(피유질보살) 應如是觀諸法(응여시관제법)

문수사리여, 저 병을 앓고 있는 보살은 반드시 제법에 대하여 이같이 바르게 관찰해야 할 것입니다.
Manjusri, the bodhisattva who is ill, 

[저 병든 보살이 제대로 된 보살이라면 설사 병을 앓고 있는 보살이라 하여도 응당히 이와 같이 모든 이치=법을 관찰한다.]

 

又復觀身(우복관신) 無常苦空非我(무상공공비아) 是名爲慧(시명위혜)

또한 몸을 관찰할지니, 이 몸은 무상하며, 괴로움이며, 공한 것이며, 영원히 변하지 않는 자아는 없는=非我(무아)라고 관하는 것을 이름하여 지혜라고 합니다. 

should see all Dharmas as they are and view the body as impermanent, of hardship, empty, and with no self, which is called wisdom. 

[우리의 육신을 그렇게 復觀, 다시 관찰할 줄 알아야 지혜 있는 사람이다]

 

雖身有疾(수신유질) 常在生死(상재생사) 饒益一切(요익일체) 而不厭倦(이불염권)

是名方便(시명방편

비록 이 몸은 병이 들었으나, 항상 생사 속에 있으면서 一切=일체 중생을 이롭게 함에 있어서, 피곤해 하거나 싫어하지 않는 것, 이를 방편이라고 합니다. 

Although one’s body is sick and suffering and is always amid birth and death, one benefits all sentient beings without ever becoming weary, and this is called skilful means. 

[비록 몸에 병이 있으나, 사람들을 돕는 일, 일체중생을 이익하게 하고, 넉넉하게 하고 보탬이 되게하고, 일체중생들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서 봉사하는 것에 피로해하거나, 이만치하면 되었다고 하는 것이 없으면, 그것이 바람직한 방편이다.

앞에서는 그것을 植衆德本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는 몸이 아픈 것이라고 했지만, 자기가 현재에 처한 상황에서, 나는 지금 무엇이 없어서 부족한 점이 있어도 다른 사람을 이익하게 하려는 마음, 즉 능력 따라서 도움이 되는 것에 싫어하거나 피곤해하지 않는 것이 방편이다]

 

又復觀身(우복관신) 身不離病(신불리병) 病不離身(병불리신) 是病是身(시명시신)

非新非故(비신비고) 是名爲慧(시명위혜) 故 옛 고古로 해석

또 자기 몸을 관찰하기를, 몸이라고 하는 것은 병을 떠나 있지 않고, 병이 몸을 떠나 있지 않으니,

이 병이나 이 몸이 새로 생긴 것도아니고, 오래 된것도 아니라는 것을 관찰하는 것을 지혜라고 이름합니다. 

Also, observe the body, which is not separate from the illness, that the illness is not separate from the body, and that this illness, this body, is neither new nor old. This is called wisdom. 

[非新非故=본래 있던 것도 아니고 또 금방 생긴 것도 아니다

왜냐 몸이 있는 한 병이 따르게 되어있고, 병이 있으면 몸이 있게 되어있으니까

身不離病하고 病不離身=몸은 병을 떠나 있지 않고 병은 몸을 떠나있지 않다

중간에 없던 병이 생긴 것은 몸이 있으니까 생긴 것입니다.

병이 붙을 근거인 몸이 있어서, 즉 병이 들어 않을 소지가 있어서 생긴 것이다. 이것은 중간에 생긴 것이니까 새로운 것도 아니고, 옛것도 아니라고 아는 것이 지혜이다

다른 말로하면 고정되어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무유정법이라고 아는 것이 몸에 대해서 지혜롭게 생각하는 것이다]

 

設身有疾(설신유질) 而不永滅(이불영멸) 是名方便(시명방편)

설령 몸에 병이 있으나, 영원히 멸하지 않는 것, 이를 방편이라고 합니다.

Suppose that the body is ill yet not in eternal cessation (of suffering) is called skilful means.  

[設身有疾 而不永滅이 是名方便이라=설사 몸에 병이 있다고 하여도 이 병은 영원히 멸하지 않는다고 아는것이 방편이다 → 이것은 의례히 있는 것임을 알아라, 이병 끝나면 무슨 병이 있어도 또 있게 되는 것으로 알아라.

그렇게 생각하면 차라리 딴 병이 생기는 것 보다, 그 병을 가지는 것이 잘 되었다고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더 큰 새병을 앓게 되는 것 보다 이 병이 낫다 즉 이렇게 가지고 있는 병은 방편입니다.

이 육신의 속성, 육신의 구조가 이러한 것이 永不滅= 영원히 멸하지 않는다.]


文殊師利(문수사리) 有疾菩薩應如是調伏其心(유질보살응여시조복기심)

문수사리여, 병을 앓고 있는 보살은 마땅히 이와같이 그 마음을 조복해야 하나니, 

Manjusri, a bodhisattva who is ill, should subdue his mind in this way, 

[應如是調伏其心=그 마음을 조복하라 → 이렇게 마음 먹어라.

문수 보살이 유마거사에게 묻기를 '文殊師利言 居士여 有疾菩薩이 云何調伏其心니이까? 문수사리가 말하기를 거사여 병 있는 보살이 어떻게 그 마음을 다스리겠습니까?'에 대한 답변들]

 

不住其中(불재기중) 亦復不住不調伏心(역복불주불조복심)

그 가운데 머물지도 않거나 또한 마음을 다스리지 않겠다는 마음=不調伏心에 머물러서도 안되며, 

without abiding within it, and also not abiding in the non-subdued mind.  

[그 가운데 머물지도 말고 또한 다시 조복하지 않는 가운데 머물지도 말라, 바로 그런 형상 속에서 머물러 있어서도 안 되고 또 조복하지 않은 상태에 머물러 있어서도 안된다.

不住其中= 그 가운데 머물지도 말고 그것을 조복하지 않는데도 머물지 말라

즉 조복한다고 해서 내내 그 병만 생각해서도 안 되고 또 그 병의 흐름에 휘말려가도 안된다. 보살의 중도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아픈 것에 끄달려도 안되고 또 의례히 있는 병이라고 해서 자꾸 조복하려고 하는 것에 머물러 있어도 안 된다. 이러한 것들은 복잡한 교리로, 무엇 하나를 가르치면 거기에 집착하니까 그것들은 순서대로 긍정 부정하면서 드러내어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所以者何(소이자하)? 若住不調伏心(약주불조목심) 是愚人法(시우인법)

왜냐 하면, 만약 조복하지 않는 마음에 그대로 머문다면 이는 愚人法=어리석은 사람의 법이며, 

What is the reason for this? It is the practice of fools for one to be abiding upon an unsubdued mind. 

若住調伏心(약주조복심) 是聲聞法(시성문법)

만약 조복한다는 마음에 머문다면 이는 聲聞法=성문의 법이기 때문이니, 

If one abides in a subdued mind, that is the practice of the sravaka. 

是故菩薩不當住於調伏(시고보살부당주어조복) 不調伏心(불조복심)

그러므로 보살은 언제나 조복하는 마음에도, 조복하지 않는 마음에도 머물러 집착=住해서는 안 됩니다.

So the bodhisattva does not dwell in the subdued or non-subdued mind. 

[불교의 이론은 결국 중간이다. 병든 사람이 불자로써 그 마음을 다스리는 법, 마음 조복하는법을 설명해서 몸뚱이가 있음에 이 병이 있는 것으로, 오히려 다른 병이 있는 것 보다 차라리 이 병이 낫다고 생각하는 마음의 상태까지 설명하고는 결국에는 그것도 떠나라 했습니다.]

 

離此二法(이차이법) 是菩薩行(시보살행)

그러므로 이 두 가지 법을 떠나는 것이 보살행이고, 

And to be apart from such duality is the bodhisattva’s practice. 

[離此二法= 우인법과 성문법을 떠나는 것, 그 두 가지를 다 떠나는 상태가 바람직한 소견, 중도정견이고 그것을 여기에서는 보살행이라고 했습니다. ]  

 

在於生死(재어생사) 不爲污行(불위오행)

住於涅槃(주어열반) 不永滅度(불영멸도) 是菩薩行(시보살행)

생사에 머물러 있으면서도 더러운 행위=汚行을 하지 않고,

열반에 머물러 있어도 영원히 멸도해 버리지 않는 것, 이것이 보살행이며,

To dwell in the sea of birth and death without being polluted by defilements and to dwell upon nirvana without being perpetually in nirvana is the bodhisattva’s practice. 

[몸뚱이와 생각이 항상 변하듯이 모든 것이 변하지 않는 것이 없는 그것이 생사이고, 그런 과정 속에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지만, 그런 관념 속에서만 사는 것이 오행입니다. 이렇게 무상해서 곧 죽을 것이니까 아무렇게나 산다던지 아무렇게나 행동하는 것, 즉 다시 말해서 허무주의적인 관념으로 삶을 함부로 해버리는 것이 오행입니다. 

물론 이 몸은 허망해서 언젠간 변하고 결국 아무것도 없는 공, 무상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은 다 알고 있고 또 누구 없이 그런 과정에 있지만 이 몸뚱이를 함부로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생사 가운데 있지만 오행을 하지 않는 것이다.

住於涅槃= 번뇌 망상, 온갖 잡념과 좋지 않은 생각이 다 사라져버린 열반의 경지에 머물되 不永滅度= 그렇다고 해서 영원히 사라져버린 것은 아니다. 생각이 사라져서 나무나 돌처럼 목석처럼 되어버린 것은 아니다.

중생제도하고 남을 이롭게 하는 보살행을 하겠다는 바람직한 삶에 대한 생각은 당연히 있어야 되는 것이 보살행이다.]  

 

非凡夫行(비범부행) 非賢聖行(비성현행) 是菩薩行(시보살행)

범부의 행도 아니고, 성자나 어진 사람의 행도 아닌 것이 보살행이고, 

The practice of a bodhisattva is neither the practice of the ordinary mortal nor that of a sage. 

非垢行(비구행) 非淨行(비정행) 是菩薩行(시보살행)

때묻은 행도 아니고, 청정한 행도 아닌 것이 보살행이며, 

The bodhisattva practice is neither a practice of defilement nor a practice of purity. 

[非垢行非淨行이 是菩薩行이며= 더러운 행도 아니고 또 너무 깨끗한 행만 하는 것도 아닌 것이 보살행이다. 즉 중도라는 것입니다. 신선이 된 것처럼 사는것도 바람직한 생활은 아니다. 정행만도 아지만 구행도 아닌 것이 보살행이다. 다른 말로 더러운 행을 해야 할 때는 더러운 행을하고, 깨끗한 행을 해야 할 때는 깨끗한 행하고, 더러운 행 했다고 깨끗한 행 못하는 것이 아니고 깨끗한 행 했다고 더러운 행 안하는 것이 아닙니다. 화장실 가는 반면에 식당에도 가는 그것이 중도이고 사람은 그렇게 살게 되어있으니까 너무 가리면서 사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너무 치우쳐서 행동하던 사람들이 나중에 더 잘못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빽빽한 소견, 도대체 바늘 끝 하나도 들어갈 수 없는 소견은 결국 남에게도 피해를 입히고 자기 자신도 어떤 괴로움의 결과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옛말에 하루 길을 가는데 중도 보고 소(속인)도 본다. 중 봤다고 계속 중만 본다고 고집할 수도 없고 속인 봤다고 속인만 봤다고 고집할 수가 없는 것이 인생이라고 하는 먼 길은 가는 것입니다. 인생, 칠십 팔십년이라고 하는 먼 길에 우여곡절 많고 파란만장한 삶, 인생의 여정에서 무슨 행인들 없겠습니까?

그런데 더러운 행이나 청정한 행을 한 것에 너무 고집하고 치부하거나, 자기 자신도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은 너무 조그맣고 보잘 것 없는 삶을 사는 것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