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마힐소설경(維摩詰所說經) 5. 문수사리문질품(文殊師利問疾品)5
◎연기(緣起)
文殊師利(문수사리) 是爲有疾菩薩(시위유질보살) 調伏其心(조복기심)
문수사리여, 이것을 앓고 있는 보살이 그의 마음을 조복한다고 하는 것이며,
Manjusri, it is for the bodhisattva with illness to subdue his mind,
[위에 설명한 바와 같은 것이 그 마음을 조복 받는 것으로, 이런 차원이 되면 병든 것이 좋은 선지식이 되어서 오히려 수행(관)이 더 깊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爲斷老病死苦(위단노병사고) 是菩薩菩提(시보살보리)
또 노, 병, 사의 괴로움을 끊어 없애는 것, 이것이 보살의 깨달음=菩提이니,
to cut off the suffering of old age, sickness, and death, and is the bodhi of the bodhisattva.
[노병사의 고통을 끊는 것이 보살의 깨달음이다. 노병사가 없는 것이 아닌, 老兵死는 있으되 그 노병사에 대하여 고통을 고통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무진의 보살이 부처님께 묻기를 관세음보살은 어떻게 사바세계에서 노닙니까? 하셨듯이, 그분들은 여기에 와서 우리 중생들 건진다고 고생하는 것이 아니라, 놀이로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마음을 기울여 삽니까? 그러면 관세음보살이 심심풀이로 우리를 제도하시는 것으로 잘못 이해할 수 있는데, 그분들은 심혈을 기울여서 피땀 흘려가면서 중생을 건지지만, 마음은 즐거우니까 경전에서는 유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빨래하고 청소하고 하는 것이 힘들지만 즐거운 마음으로 해야 됩니다.
재난에서 마음을 바꾸니까 상황까지 달라지는 것입니다.
독약의 성분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달마대사는 그것을 보약으로 먹었으니까 보약이 된것입니다. 우리들 보통 중생에게는 좀 지나친 과분한 생각이 되겠지만, 우리도 그런 무한한 능력의 심성, 진여 불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若不如是(약불여시) 己所修治(기소수치) 爲無慧利(위무혜리)
만약 이렇게 하지 않는다면 이미 닦고 다스렸던 것이 지혜로운 이익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If the Boddhisttva does not follow in this way, the disciplined and cultivated wisdom would not be benefiticial.
[보살이 이 와같이 마음을 조복 받고 또 노병사의 고통을 끊는 것이 보살의 깨달음이고, 보살의 삶인데, 만약에 그렇지 못하면 자기의 修治= 수행한 것이 지혜의 이익이 없는 것이 된다.
어떤 책은 慧가 은혜 惠(혜)로 되어 있어서 은혜와 이익이 없다고 되어있습니다.]
譬如勝怨(비여승원) 乃可爲勇(내가위용)
비유하자면 원수와 싸워 이겨야만 용사라고 할 수 있는 것과 같이
Someone who can overcome an enemy is a person of courage.
如是兼除老病死者(여시겸제노병사자) 菩薩之謂也(보살지위야) 兼 겸할 겸
(나와 남의) 늙음과 병과 죽음을 함께 없애는 자를 보살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In the same way, one who can overcome old age, sickness, and death is a bodhisattva.
[除(제)한다는 것이 화석처럼 굳어져서 그대로 있는 것이아니라, 남 죽을 때 죽고, 남 늙을 때 늙고, 남 병들 때 같이 병들지만 그러한 것으로부터 초월한 것이다.]
彼有疾菩薩(피유질보살) 應復作是念(응부작시념)
이 앓고 있는 보살은 또 이렇게 생각해야 마땅한 것이니,
The ailing bodhisattva should think to himself:
如我此病(여아차병) 非眞非有(비진비유) 衆生病亦非眞非有(중생병역비진비유)
나의 이 병이 진실한 것도, 실제로 있는 것도 아닌 것과 같이,
중생의 병도 또한 진실한 것도 실제로 있는 것도 아니다.
If this illness of mine is not real and not existent, the illnesses of all sentient beings are also not real and not existent.
[나의 이 병은 非眞非有 (또는 非眞有) 참으로 있는 것이 아닌, 있는 것처럼 보일 뿐, 참다운 것도 아니고 실제로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병이라는 것이 없다가 생긴 것이고 그러다 보면 낫는 것으로,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라는 우리들 자만의식의 병들도 본래 있는 것이 아니라, 없던 것이 생긴 것으로, 나이가 들고 경험이 쌓이고, 능력이 있을수록 그러한 '상'의 병이 더 무거워지는 것입니다. 곡식은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옛말이 있듯이 사실은 그렇게 되어야 되는 것인데.....
凡所有相(범소유상) 皆是虛妄(개시허망) 형상이 있는 것은 전부 허망하다. 병도 마찬가지로 그렇다.
중생이 앓고 있는 병도 역시 亦非眞非有, 참다운 것도 아니고 실지로 존재하는 있는 것도 아니다. 즉 참으로 있는 것이 아니다.]
作是觀時(작시관시) 於諸衆生若起愛見大悲(어제중생약기애견대비)
卽應捨離(즉응사리)
이와 같이 관할 때에 모든 중생들에 대해서 애욕에 물든 마음=愛見으로
자비심을 일으켰다면 곧 그러한 생각을 버려야 할 것이니,
When viewed this way, if a loving view develops from great compassion, one should immediately abandon it.
[愛見大悲= 애착의 소견, 애착은 보통 자기와 가까운 사람 또는 부모가 자식을 생각하는 것과 같이 정에 지우친 진한사랑으로, 애착으로써의 자비를 일으키는 것을 卽應捨離, 곧 응당히 떠나버린다]
所以者何(소이자하) 菩薩斷除客塵煩惱(약보살단제객진번뇌) 而起大悲(이기대비)
왜냐 하면 보살은 밖으로부터 주어진 번뇌=客塵煩惱를 끊어 없애고 자비심을 일으켜야 하나니,
How can this be? The bodhisattva’s great compassion arises from removing the destructive emotions of external defilements.
[보통사람은 애견대비= 정에 의한 자비심을 일으키나 객진번뇌를 끊어버리고 본래적인 보살 심성, 본심에서 일어나는 대자비를 일으키는 것이다.]
[심성본정 객진번뇌(心性本淨 客塵煩惱) 또는 심성본정 객진소염(心性本淨 客塵所染)= 客塵煩惱, 사람의 본성은 청정하며, 번뇌는 실제로는 본성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번뇌를 마치 손님과 같은 것이라고 보는 것으로, 심성본정설(心性本淨說)은 인간 마음의 본성은 본래 청정하다는 것으로서 부파불교 대중부(大衆部)에 의해서 처음 주장된 사상이다.
‘심성본정 객진번뇌’란 마음의 본성[性]은 본래 청정한데, 밖의 번뇌가 오염시킨다는 말이다. 즉, 심성은 본래 청정하지만(心性本淨), 객진 번뇌에 오염된다(客塵所染)는 말이다.
번뇌라고 하는 미혹의 마음이 갖가지로 나오더라도, 그것은 그 사람에 있어서 본래적인 것이 아니고, 여러 가지 경험 속에서 욕심이나 미혹이 일어나서 여러 가지 잘못을 저지르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한 것(번되)들은 딴 곳에서 날아온 티끌과 같은 것이다. 그리하여 청정한 본성의 마음이 때로는 번뇌에 뒤덮이고 유전해 타락하는 일이 있더라도 이 번뇌는 객진번뇌(客塵煩惱)로서 외래(外來)의 2차적 존재에 불과하고, 마음의 본성 자체는 어디까지나 청정무구하다는 말이다.
비유하자면, 구름(번뇌)이 달빛을 잠시 가리지만 구름이 지나가면 달(마음)은 본래대로 밝게 빛나는 것과도 같다. 이럴 경우 달은 구름에 의해 가려지기 전이나 후나 조금도 달라지지 않고 원래대로 빛을 발하고 있다.
따라서 마음 자체는 불생불멸(不生不滅)의 ‘불변(不變)’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은 생과 멸이라는 대립적 분별의식에 의해서 ‘달라지는 것 없이’ 본래 그대로 있는 진여(眞如)의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지, 초월적 절대자의 고정불변이나 영생불멸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청정’이라는 것도 선과 악의 이분적 가치 판단에 물들지 않는 것을 뜻하는 것이지, 극악과 반대되는 절대적 최고선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아미산]
愛見悲者(애견비자) 則於生死(칙어생사) 有疲厭心(유피염심)
애욕으로 물든 자비=愛見悲에는 생사에 피곤해 하고 싫어하는 마음이 있는 것이니,
If one has compassion because of a loving view, one will inevitably become weary of birth and death.
[生死(생사)란 현실 생활, 즉 죽고 살면서 온갖 생명이 부단히 이어지고 있는 우리의 삶을 말합니다. 생사의 반복이니까 결국은 이 생사 속에서는 싫어하는 마음이 있어서 이놈의 인생 그만 살아야지, 다시는 태어나지 말아야지, 아니면 저 이름 없는 산속에 들어가서 돌이 되어서 온갖 세상의 변화를 모르고 지냈으면 하는 등의 현실적인 삶을 싫어하는 마음이 있는 것은 보통 사람들의 애견비이고 정이고 애착심이라서 좋은 것을 좋아하는 반면에 생사 현실에서 안 좋은 것을 싫어해서 떠나려는 생각을 일으키는 것이 於生死에 有疲厭心입니다.]
若能離此(약능리차) 無有疲厭(무유피염)
만약 이 (애욕에 물든 마음을) 떠날 수 있으면 피곤해 하고 싫어하는 일도 없을 것이며,
If one can be free from this, there is no weariness and aversion,
[목석같이 싫어하지 않는 경우가 아니라, 도울 때 돕고, 건질 것 건지고, 은혜를 입을 때 입고, 은혜를 베풀 때 베풀면서도 크게 빠지거나 크게 흔들리지 아니하고 또 자기 자신을 망각하여서 정신이 혼미하지 않는 삶을 사는 것이 보살입니다.]
在在所生(재재소생) 不爲愛見之所覆也(불위애견지소복야)
在在=어떠한 곳에 所生=태어나더라도 애욕에 물든 마음=愛見에 덮이지 않을 것이며,
and a loving view does not cover oneself no matter where one is born or what happens.
[보살은 생사를 싫어하지 않으니까 크게 애착하지도 않고, 애착하지 않으니까 생사에 빠져서 정신을 잃거나 하는 일이 없다. 여기서의 문수보살과 재가불자 유마거사와의 대화는 어떻게 보면 유마거사가 모든 재가신자들을 대변하면서 또 유마거사 자신의 정신세계를 나타내고 있다고 볼 수있습니다.]
所生無縛(소생무박) 能爲衆生說法解縛(능위중생설법해박)
태어나는 곳에 속박되지 않으니,
중생을 위하여 가르침을 설하고 속박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을 것입니다.
Being born without bondage, he can speak the Dharma for all living beings and release them from bondage.
[所生無縛이면, 태어난 바, 즉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자리에 속박이 없으면
能爲衆生하야 說法解縛이니, 중생을 위하여 능히 설법하여 다른 사람의 속박을 풀어줄 수 있다]
如佛所說(여불소설) 若自有縛(약자유박) 能解彼縛(능해피박) 無有是處(무유시처)
부처님께서 설하신 바와 같이, 만약에 自有縛=자기가 (번뇌에) 결박(속박)되어 있으면서
능히 남의 결박(속박)을 풀어 주는, 이것은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니,
As the Buddha said, releasing others from their bondage is impossible if one is still in bondage himself.
若自無縛(약자무박) 能解彼縛(능해피박) 斯有是處(사유시처)
스스로 결박되어 있지 않아야 남의 결박을 풀어 줄 수 있는 것, 이것이 옳은 것입니다.
Only when one is not bound can one release the bondage of others.
是故菩薩不應起縛(시고부살불응기박)
그러므로 보살은 반드시 (번뇌의) 결박을 일으켜서는 안 됩니다.
Therefore, I say that a bodhisattva should not give rise to being bound.
[속박되지 않는 것이 병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고 속박은 병이라는 말이죠.]
何謂縛(하위박)? 何謂解(하위해)?
무엇을 속박이라 하며, 무엇을 해탈(벗어남)이라고 합니까?
What is bondage? What is liberation?
貪著禪味(탐착선미) 是菩薩縛(시보살박) 以方便生(이방편생) 是菩薩解(시보살해)
참선의 기쁨=禪味에 집착하는 것이 보살의 속박(無方便慧縛, upynu ptta-praj)이요,
훌륭한 방편을 가지고 (참선의 기쁨을 맛보며) 사는 것이 보살의 해탈이며,
To covet the taste of meditation is bodhisattva bondage. To give rise to skilful means is bodhisattva liberation.
[승려도 역시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승려 물이 들어야 되는데 나중에는 승려물, 중물이 빠져야 됩니다. 어릴 때는 중물이 안 들었다고 핀잔하고, 조금 지나면 중물이 안 빠졌다고 핀잔을 주는 것이, 승려로써의 틀이나 규정 등만 내세우는 사람은 중물이 안 빠졌다고 합니다.
보살물이든 것도 남에게 피해를 끼칠 수가 있고, 중물도 남에게 부담을 끼치는 것이라 큰 속박이 될 수 있습니다. 주부가 나는 살림살이 잘하는 주부입네 하는 상에 쪌여있으면 그것도 병이듯이 어느 분야에서던지 너무 두드러지게 어떤 모습으로 틀을 고집하는 것은 보통 상이 아니고 보통 병이 아닙니다.
여기 貪着禪味, 선의 맛에 탐착해 있는 것이 얼마나 고상합니까? 그런데 유마거사는 그것도 보살의 속박이라고 합니다.
方便生은 방편으로써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 또는 방편으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방편으로 살아가는 것이 보살의 해탈이라.
금강경에 무유정법이라고 했듯이 이것은 이렇게 해야 되고 저것은 저렇게 해야 된다는 기준이라는 것이 본래 없습니다.
고정된 법은 어디에도 없는 것으로 이래도 되고 저래도 되는데, 뭐라고 고집하는 것이 우리들의 상식이고, 통념이고, 관습이고 ,습관이 되어서 또 그것이 자꾸 굳어져서 어떤 선이 생기면, 그 다음 사람들은 그 선에 맞추어야 되고 또 그 선에 안 맞으면 틀렸다고 하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본래 아무것도 없고 어떠한 선이나 기준이 없는 것입니다.
사람이 이렇게 살아야 된다는 것은 없습니다. 미국에서 옳은 것이 한국에서는 틀린 것이고, 한국에서 옳은 것이 미국에서는 틀린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여기서 말하는 방편으로 살아가는, 방편생이라는 것이 참 좋은 말입니다.
옛날에 어떤 선사가 계셨는데 제자가 스님 어떤 것이 해탈입니까?하고 물으니까, 그 스님의 대답하기를 '누가 너를 묶었느냐? 왜 해탈이라고 묻느냐? 묶였을 때 해탈이 필요하지만, 누구도 너를 묶은 사람이 없는데 왜 해탈을 묻느냐? 는 문답이 있고, 또 불법승 삼보에서 어떤 것이 부처님입니까 물으니까 '自家寶藏을 不顧하고 抛家散走하야 作什麽오' 자신이 불보 부처이면서 보배를 묻는다, 자기의 보장, 자기 보배는 돌아보지 아니하고 돌아다니면서 다른 보배를 찾느냐, 남에게서 보배 찾느냐는 기가 막힌 대답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