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 여래명호품 (如來名號品) 2
(신화엄경)
[[시방 보살이 모인 대중 속의 뜻을 열 가지로 나누겠다.
① 佛刹의 方面을 드는 것; 동방이란 진괘(震卦)· 春生:봄의 생명·初明:새벽의 밝음 ·長男·머리·청룡· 吉慶:길하고 경사로움·震動이 되는데, 法事와 작업이 움직여 작용하는 시초라서 道와 俗에 공통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먼저 동방을 들어서 첫머리로 삼음을 밝힌 것이다. 方이란 법으로서 단지 방법이란 뜻과 움직여 작용하는 시초를 취했을 뿐이지, 세간에서 보는 동서남북의 방향으로 집착하는 것과는 다른, 일체처가 동방이며 일체처가 남방으로서 단지 그 법을 취했을 뿐이니 나머지는 이에 준거하라.
② 불찰의 멀고 가까움을 드는 것; 동방의 십불찰미진수 세계 밖을 지나는 데 네 가지 뜻이 있다. ① 十이 완전한 수가 됨을 밝힌 것이니 멀고 가까움의 다함 없음을 밝힌 것이며, ② 신심 있는 자로 하여금 부처님 경계의 광대함을 알게 해서 자기 마음을 넓히도록 함이며, ③ 부처님 경계의 두루함이 거울 속의 像과 같아서 서로 사무쳐 걸림이 없음을 밝힌 것이며, ④ 신심을 일으키지 못한 자가 10佛刹塵으로서 미혹에 처한 데 비유한 것을 밝힌 것이니, 10無明:열 가지 근본 번뇌을 요달하지 못하고 스스로 부처님 경계를 가로막아서 현전하지 못하도록 하기 때문에 塵을 들어 법을 나타낸 것이다.
가령 {열반경}에서 “석가모니의 정토는 서방의 32항하사 세계 밖을 지닌다”고 한 것은 모두 법을 나타낸 數이다. 여기서 “십불찰미진수 세계 밖에서 왔다”고 말한 것은 10무명이 가로막음을 밝힌 것이니, 10무명 속 하나하나의 무명이 한량없는 正使(현행)와 業習(번뇌의 습기-종자)이 있어 主와 伴이 서로 熏을 하니 번뇌가 世界塵의 數를 능가해 끝간데를 알 수 없어서 능히 지혜의 경계를 가로막기 때문에 십불찰미진수 세계라 말한 것이다.
'왔다[來]'는 것은 미혹으로부터 믿음에 들어감이다. 저 세계 속에 부처님의 명호인 부동지가 있다고 말한 것은 부동지불이 시방의 범부와 성인이 다 함께 근본지를 갖고 있음을 밝힌 것이니, 이는 이 지혜에서 능히 신심을 일으키기 때문에 '來'라 호칭함을 밝힌 것이다. 이 부동지불은 일체 중생이 늘 스스로 갖고 있는데, 만약 相을 취해서 미혹을 따르면 곧 塵의 장애가 다함이 없고, 만약 일념에 미혹을 깨달아서 相을 요달하면 곧 청정해지면서 허공과 같아진다. 다만 미혹을 따르는 것을 밖[外]이라 칭하고 깨달은 곳을 온다[來]고 말할지언정, 실제의 불찰은 본래 멀고 가까움과 안팎 등의 장애가 없으며, 또한 가고 옴[去來]도 없어서 다함없는 불찰이 모공과 微塵의 밖으로 벗어나지 않는다. 그런데도 멀고 가까움을 불러들이는 것은 그 뜻이 처음 믿는 자의 마음을 광대하게 하기 위한 것이며, 저 세계 속으로부터 왔다고 말한 것은 또한 미혹으로부터 깨달음에 들어가기 때문에 온다[來]고 말했음을 밝힌 것이며, 부처님의 명호인 부동지가 있는 것은 그것이 믿는 자 스스로의 부동지임을 밝힌 것이니, 이러한 지혜가 있기 때문에 일체 중생으로서도 능히보리심을 발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근본지의 諦로써 능히 미혹된 성품을 요달해서 信解를 일으키기 때문에 저 미혹된 경계를 일으키는 것을 온다[來]고 칭하는 것이다.
사람이 땅으로 인해 넘어졌다가 땅으로 인해 일어남과 같이 일체의 중생도 자기 마음의 근본지로 인해 넘어졌다가 자기 마음의 근본지로 인해 일어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여래께서 일승 경전에서 단박에 근본법을 드러내 금색세계로 삼은 것은 법신의 오염 없는 순백의 청정함을 밝힌 것이며, 단박에 근본지를 드러내 不動智佛이라고 호칭한 것이며, 단박에 문수사리가 바로 자기 마음의 묘하게 가려내는 슬기임을 드러낸 것이다. 나머지 아홉 개의 세계와 아홉 개의 智佛과 아홉 개의 보살은 자기 마음의 信解로 수행하는 지위의 닦아 나아가는 진보에 따라 법신이 행에 따라 명칭이 다른 것이다.
이 자기 마음이 본래 부동지불임을 자각하는 데서부터 도를 보고 지위에 들어가서 10주·10행·10회향·10지·11지를 일으켜 加行으로 법신·智身과 大願·大慈·大悲와 4섭법·4무량심과 10바라밀과 37助道分法을 닦아 나아가는 것이니, 처음 발심한 근본 법신의 根本不動體를 통해 만행을 자량함으로써 자비와 염원이 사무쳐 융화하여 서로를 성숙시키면서도 법신으로 행을 자량해 오염이 없게 하고 행으로 법신을 자량해 순수하게 성숙시키는 것이다. 위 안에서 각각 열 개의 불과와 열 개의 보살을 세우는 것은 지위를 따라 닦아 나아가는 가운데 스스로의 행으로 터득한 곳의 불과와 보살행의 과를 잡아서 명칭을 세운 것이니, 이는 다른 부처님의 명호가 아니며 다른 보살로 명칭을 세운 것이 아님을 밝힌 것이다. 지혜의 불과를 따라서, 그리고 행의 불과를 따라서 5위 상의 인과가 각각 50개가 있는데 합치면 100개가 되고, 근본 5위에 있는 다섯 개의 인과를 합치면 도합 110城의 법문이 된다.
이는 앞서 질문한 네 종류의 불찰 중에서 부처님께서 머무는 불찰과 법성의 청정을 장엄하는 불찰에 답하는 것이니, 이 두 종류의 불찰로부터 정각 성취를 보인 불찰과 신통이 자재하는 부처님의 위덕 불찰을 얻는 것이다.
그러므로 전회에서 世主가 물은 것은 비로자나불의 자재함을 얻은 과이며, 이 제2회에서 보살이 물은 것은 스스로 수행하는 자의 佛刹菩薩行의 인과이니, 이로부터 곧바로 [여래출현품]에 이르기까지는 5위를 닦아 나가는 보살의 加行하는 自力이 한 번 종결된 지위이다.
이는 이 품이 신심으로 나아가는 果이며, 이로써 [출현품]에 이르는 수행의 지위가 지극한 인과의 모습임을 밝힌 것이다. 자기 마음의 根本佛智 위에서 닦아 나아가는 수행을 낳기 때문에 이 부동지가 바로 일체 모든 부처님과 일체 중생의 地인 것이니, 이 지혜 때문에 중생을 짓고 이 지혜 때문에 정각을 이루는 것이다. 즉, 이 지혜 때문에 미혹을 따라 중생을 지을 때는 6道 속의 천상인간과 악도를 따라 모두 중생의 의보와 정보를 따름인데, 업에 따라 조잡한 것과 미세한 것이 같지 않다. 또 이 지혜 때문에 깨달음을 따를 때는 삼승과 법계의 원만한 일승 불과의 오묘한 의보와 정보를 성취하니, 만약 이 지혜가 없다면 원래 허공이라서 중생도 아니고 부처님도 아닌 것이다.
[문] 일체 중생이 본래 부동지가 있는데, 무슨 이유로 스스로 眞에 응하면서 늘 청정하지 않고 무슨 이유로 오염을 따르는 것입니까?
[답] 이 지혜 때문에 삼계에 태어나는 일체 중생은 지혜에 자체성이 없어서 智와 非智, 선과 악, 괴로움과 즐거움 등의 법을 알지 못한다. 지혜의 體가 성품이 없기 때문에 다만 緣을 따라 나타나는 것이 빈 골짜기의 메아리가 사물에 응해 소리를 이루는 것과 같아서 자체성 없는 지혜가 단지 緣에 응해 분별하는 것이다.
분별을 하기 때문에 어리석음과 애착이 따라 일어나고, 어리석음과 애착을 말미암기 때문에 我所의 병이 생기고, 我所가 있기 때문에 自他를 집착하는 업이 일어나고, 집착을 말미암기 때문에 末那라 호칭하는 것이며, 말나의 집착을 하기 때문에 識이라 이름붙이고, 식의 종자를 말미암아 생사가 상속하고, 이 생사 때문에 온갖 괴로움이 한량이 없고, 괴로움이 한량이 없기 때문에 비로소 괴로움이 없는 도를 구하는 것이니, 미혹해서 괴로움을 알지 못하는 자는 능히 발심하지 못하고 괴로움을 알아 眞을 구하는 자는 구하는 그것이 바로 본래의 지혜이다.
괴로움의 연을 이해하기 때문에 능히 괴로움을 아는 것이며, 괴로움의 연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능히 괴로움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괴로움의 緣을 알기 때문에 비로소 발심하여 無上道를 구한다. 種性이 있는 보살은 宿世에서 미리 이 괴로움을 알고 발심하여 信解하는데, 종성이 강한 자는 비록 人天의 즐거운 果를 받더라도 능히 발심해서 무상도를 구하는 것이니, 이 때문에 지혜로 인해 미혹을 따르고 지혜로 인해 깨달음을 따르는 것이다. 마치 사람이 땅으로 인해 넘어졌다가 땅으로 인해 일어나는 것과 같으니, 미혹을 따를 때를 識이라 하고 올바로 깨달음[悟]을 따를 때를 지혜라 이름붙이며, 속박에 있으면 그 이름이 識이요 깨달음[覺]에 있으면 그 이름이 지혜이니, 식과 지혜가 본래 스스로의 명칭이 없지만 다만 미혹과 깨달음을 따라 그 명칭을 세운 것이다. 그러하니 常見이나 斷見을 묶어서 이름지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 지혜와 식은 다만 미혹과 깨달음을 따라 명칭을 세운 것인데도, 만약 어디서 비롯되고 어디서 끝나는가를 찾는다면 허공 중에서 자취를 찾는 것과 같으니, 그림자 속에서 사람을 찾는 것과 같으며, 몸 안에서 '나'가 의지하거나 머무는 소재를 찾는 것과 같아서 낡은 것과 새로운 것[故新]이나 길고 짧음이나 處所의 相을 끝내 얻을 수 없는 것이다. 이처럼 무명과 지혜가 시종이 없는 것이라서 설령 보리를 얻을 때라도 무명은 멸하지 않는 것이니, 그 이유는 본래가 없는 것이라서 다시 멸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또 무명을 따를 때에도 부동지는 멸하지 않는 것이니, 이 역시 본래 없는 것이라서 다시 멸함이 없기 때문이다. 다만 빛깔이나 소리나 냄새를 따라 취하는 바의 연이 되는 것을 무명이라 하고, 다만 괴로움을 알아 발심하는 緣이 되는 것을 지혜라 칭하며, 다만 緣에 따르는 것을 有라 이름붙인 것이다. 그러므로 體가 근본이 없어서 빈 골짜기의 메아리와 같은 것이니 생각하면 알 수 있을 것이다.
③ 세계의 명칭과 색깔을 드는 것; 세계의 명칭이 금색인 것은 金의 체가 순백으로 청정해서 오염이 없음을 든 것이니, 법신의 성품이 없어 그 체에 오염이 없다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 마치 세간에서 서쪽의 금이 백색이 되는 것과 같은데, 體가 희고 색이 황색인 것은 眞에 응하는 보살이 안으로는 흰 법에 계합하고 밖으로는 황색의 모습을 나타냄을 밝힌 것이니, 황색이란 眞에 응하는 氣이다. 許父는 “다섯 가지 색깔 중에서 황색이 최고이니, 사람의 얼굴이 누런 참외의 색깔과 같으면 안으로는 현명한 行이 있다”고 하였으며, 경전에서도 “眞에 응하는 보살은 모두 眞金色이다”라고 하였다.
또 금색세계를 밝힌 것은 信心의 지위에서 비록 자기의 몸과 마음이 순백으로 청정해 본래 오염이 없는 法身智身인 줄 믿긴 하지만 그 믿음이 생멸하는 有漏心이 되기 때문에 바로 色心이라는 것을 밝힌 것이다. 동방을 들어 첫머리로 삼은 것은 동방이 初明으로써 만물이 발생하고 진동하는 첫머리가 되기 때문에 이를 취해 법을 나타냄으로써 10신의 첫머리에 비유함을 밝힌 것이다. 이는 방위에 있으면서도 방위가 없는 것이라서 다만 그 법을 들어 理에 비유함으로써 그 체용을 나타낸 것이니, 牛王과 龍王 등으로 부처님의 덕을 비유하는 것과 같다.
[문]동방으로 법을 나타내서 10신의 첫머리에 비유했다고 하셨다. 하지만 金의 방위는 서방에 있는데, 어째서 동방이 금색세계가 되어서 법신이 금색이 되는 것을 나타내고 근본지가 부동지가 됨을 드러내는 것입니까?
[답] 이 물음이 도리를 깊이 드러내고 있다. 가령 경전에서 설했듯이 신심으로 胎를 삼고 10주의 지위에 가서는 '처음으로 佛家에 태어난다'라고 이름붙인다. 이제 동방으로 금색세계를 삼은 것은 金이 정월은 胞요 2월은 胎요 3월은 形을 이루고 4월은 巳에서 생기고 5월은 午에서 기르고 6월은 未에서 冠帶하고 7월은 相이요 8월은 王임을 밝힌 것인데, 이제 10신이 胎와 같음을 밝히고 있기 때문에 동방의 金胎로써 나타낸 것이다.
다음 남방과 서방과 북방과 上下四維는 10신의 마음을 닦아 나아가는 것이 두드러짐을 나타내기 때문에 事에 의탁해서 이해하기 쉽도록 비유한 것이다. 가령 이 품에서 문수사리는 “세존께서 과거 보살이었을 때 갖가지 談論의 방편과 지위 등으로 성취를 얻게 되었는데, 또한 중생을 이렇게 知見케 하기 위해 법을 설한다”고 하였으니, 후대의 배우는 자는 잘 살펴야 한다. 모든 것이 다 이 方隅를 설해서 법을 나타낸 것이니, 반드시 알라. 그물을 통해 고기를 잡을 때 고기가 그물은 아니지만, 그물이 없다면 또한 고기를 잡지 못하는 것이니, 뜻으로써 생각하면 지극한 至理에서 비로소 믿음을 이룰 것이다.
또 경전에서 “일체처가 금색세계이며, 일체처가 부동지불이며, 일체처가 문수사리이다”라고 한 것은 법신이 일체 중생의 몸과 마음에 두루하기 때문에 총체적으로 부동지불이며 총체적으로 문수사리임을 밝힌 것이니, 응당 이렇게 알고 이렇게 信解하라는 금색세계가 신심 있는 자가 믿는 이치[理]로써 이 금색으로 세계의 명칭을 삼으며, 또 이러한 믿음으로 인해 반드시 낳는 바의 오염 없음과 거처하는 바의 집착 없음을 과보로 얻음을 밝힌 것이니, 즉 서방의 연화색세계가 이런 뜻이다. 예컨대 금색세계는 10신의 初因을 드는 것이며, 남방의 묘화색세계와 서방의 연화색세계 등은 10신을 닦아 나아가는 뛰어난 작용이기 때문에 이 속에 10因과 10果가 있는 것이다. 10과라는 것은 10智의 부처님이 이에 해당되며, 10인이란 문수사리와 각수 등의 10보살이 이에 해당된다. 수행의 因으로 인 속에서 이익을 얻는 것은 바로 인 속의 果이니 부동지 등 열 개의 智佛이 이에 해당되며, 열 개의 세계는 수행하는 바의 법문이다.
④ 부처님의 명호를 드는 것; 부동지불이란 일체 모든 부처님과 일체 중생의 根本智體이므로, 먼저 이를 거양함으로써 첫 믿음을 성취함을 밝힌 것이다. 이는 앞서 말한 부처님께서 머무는 불찰에 답함을 밝힌 것이니, 나머지 아홉 개의 智佛은 모두 이 근본부동지로부터 닦아 나아가는 명칭이지 타자에 있는 것이 아니다. 시방 모든 부처님께서 다 합치면서 '정각 성취를 보인 불찰'과 '부처님의 威德 불찰'을 얻는다. 위덕 불찰이란 것은 바로 여래의 신통이니, 나머지 뜻은 앞에서 이미 서술했다.
⑤ 上首보살의 명칭을 드는 것; 문수사리라 이름붙인 것은 시방 모든 부처님의 성품 없는 가운데 법을 간택하는 묘한 슬기로서 일체 모든 부처님께서 모두 이 슬기로부터 正과 邪를 간택하여 정각을 성취하기 때문에 문수가 시방 모든 부처님의 스승이 된다고 칭하며, 또한 佛母라고 이름붙이는 것이니, 이는 일체 모든 부처님께서 이 묘한 슬기로부터 생김을 밝힌 것이다. 만약 이 슬기가 없다면 설령 해탈을 닦더라도 단지 이승과 정토 보살을 얻을 뿐이지, 여래승을 타고서 정각을 성취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이 부동지의 體인 문수의 묘한 슬기의 法身妙理大智를 타고서 신심에서부터 5위를 거치면서도 부동지불의 文殊妙慧를 여의지 않고 정각을 성취하기 때문에 그 호칭이 여래승·부사의승·최승승·무상승을 타고서 정각을 성취함이 되는 것이다. 또 문수사리를 호칭하기를 小男 또는 동자라고 하는 것은 일체 모든 부처님께서 이 묘한 슬기로부터 정법을 잘 앎으로써 최초로 부처님의 집안에 태어남을 밝히고 있기 때문에 그 호칭이 동자보살이 된 것이다.
여래께서 세상을 떠나도 문수사리는 여전히 세간에 있다가 나중에 化緣이 다하게 되자 香山의 저앙에서 열반에 듦을 보였다는 것은 바로 삼승교의 설이며, 이 경전에서 “일체처가 문수사리다”라고 한 것은 바로 일체처의 중생이 평등히 공유하고 있음을 밝힌 것이다. 이 경전의 신심 첫머리에 그 명호를 드는 것은 신심 있는 자로 하여금 자기 마음의 묘하게 간택하는 슬기가 한결같이 이와 같아서 옛 자취에서 옮기지 않음을 믿게 하는 것을 밝힌 것이다. 이는 일체 모든 부처님과 중생의 근본적인 묘한 슬기로서 범부든 성인이든 평등히 갖고 있고 다시 다른 성품이 없으니, 마치 대왕의 길의 법칙이 항상 마찬가지인 것과 같다.
모든 경전이 문수를 문답의 첫머리로 삼는 것은 다 법신의 묘한 슬기의 문을 밝힌 것이며, 보현으로 문답의 첫머리를 삼은 것은 모두 妙智의 만행의 체용을 밝힌 것이니, 이 같은 두 분은 일체 모든 부처님의 理智가 묘하게 작용하는 만행의 문이다. 그 법문에 의거해 명호를 세우고 몸을 나타내 조화를 이룸으로써 중생을 이롭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일체 중생으로 발심한 자는 다 함께 닦고 다 스스로 自利利他의 행이 있는 것을 떳떳한 궤범으로 삼는다.
교설 중에서, 동북방의 淸凉山에 있다고 미루면서 문수사리와 아울러 1만 보살이 그 속에 머문다는 것에는 세 가지 뜻이 있다. ① 이 세계의 일체 중생으로 하여금 기쁜 마음으로 나아가게 함으로써 善根이 끊어지지 않게 하는 것이며, ② 보살이 세간에 항상 머무는 것을 밝힌 것이며, ③ 방위를 따라 법을 나타내서 법을 이해하기 쉽게 밝힌 것이다. 앞의 두 가지는 알 수 있을 것이며, 셋째의 ‘방위에 따라 법을 나타낸다’는 것은 동북방이 이 염부제 한 경계의 동북방을 취함을 밝힌 거이니, 청량산이 이에 해당된다.
경전에서 震旦國에 있다고 미루고 또한 支提那國이라고 한 것은 한역하면 思惟이니, 그 나라 사람이 사려하는 바가 많고 계교하는 바가 많기 때문에 이러한 명칭을 세운 것으로서 바로 漢나라이다. 법을 나타낸 것은 동북방이 간괘(艮卦)로서 간(艮l 소남이 되고 童蒙이 되며, 축인(丑寅)의 사이가 初明이기 때문에 문수사리보살이 늘 범부의 올바른 믿음에 들어가는 것과 아울러 처음 도를 보는 童蒙을 發起함으로써 묘한 슬기로 하여금 밝음[明]이 생기게 하는 것과 같음을 밝힌 것이다. 또한 산의 정상에 올라가 모습이 다한 곳에 이르는 것과 같은 것이니, 이는 처음으로 올바른 믿음에 들어가는 자가 비로소 모든 법이 空한 줄 믿기 때문에 능히 법의 공함을 믿음으로써 묘한 슬기가 생기기 때문이다.
축(丑)은 첫 믿음과 같고, 인(寅)은 처음 증득해서 도를 보는 것과 같고, 묘(卯)와 진(辰)과 사(巳)는 닦아 나아감이 되고, 오(午)는 중도가 되고, 미(未)와 신(申)과 유(酉)와 술(戌)과 해(亥)는 일을 같이하여 중생을 이롭게 하는 것이 되고, 자(字)는 스승의 지위가 됨으로써, 감괘(坎卦)가 임금이 되고 스승이 되어서 어리석음에 처해 규범을 세우고 법을 제정해 중생을 이롭게 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북방이 임금이 되고 스승이 되어서 尊者가 거처하는 곳이 되는 것이니, 이는 덕을 밝혀서 다스리기 때문이다.
⑥ 대중의 수를 밝히는 것; 십불찰미진수가 있는 것은 몸과 행이 두루함을 밝힌 것이다. 1불찰진도 오히려 스스로 두루하거늘 하물며 십불찰진이겠는가? 모두 몸이 겹겹이 다함이 없이 두루함을 밝힌 것이다.
⑦ 대중이 다 와서 존경을 바침을 밝힌 것; 스승과 제자의 법칙이 존경하며 따르는 儀式임을 밝힌 것이다.
⑧ 방위에 따라 법좌를 化하는 것을 밝힌 것; 동방에 있다는 것이다.
⑨ 법좌의 명목을 밝힌 것; 蓮花藏師子의 법좌라 이름붙인 分 속의 뜻을 셋으로 나누겠다.
① 蓮華는 오염이 없다는 뜻이다. 이는 법에 의거하고 행에 의거한 과보로 얻은 것이니, 법신의 행으로 성품이 세간의 오염이 없기 때문에 능히 理智의 果를 꽃 피워서 더욱더 밝고 청정하게 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인과가 서로 자량해서 순수하게 성숙시킴을 밝힌 것이며, 연꽃을 꽃피워서 事法을 장엄한 것이 볼 만함을 밝힌 것이니, 이 法行의 꽃이 이 과보의 연꽃을 감응해 불러들여 법좌로 삼는 것이다.
② 藏이란 갈무리한다는 뜻이다. 법신의 理智로 세상에 처해 행에 따라 중생을 이롭게 하면서도 널리 법계를 갈무리하여 일체의 많은 공덕으로 요익케 하는 것을 藏이라 이름붙인다.
③ 師子라 이름붙인 것은 主에 의거해서 명칭을 얻은 것이다. 법성 대지혜의 생멸 없는 몸으로 세간에 처해 사람을 이롭게 하면서도 생사에 두려움이 없으며, 또 바른 지혜 광명으로 辯才가 두려움이 없고 나아가 5 怖畏 (不活畏, 惡名畏, 大衆威德畏, 死畏, 隨惡道畏) 등이 없는 것이 사자와 같은 것이다.
⑩ 대중이 법좌에 올라가 앉음을 밝힌 것; 법좌가 법계를 座의 體로 삼는 것이니, 이는 범부에서부터 법계의 체에 계합하기 때문에 이를 닦아 나아가는 수행으로 삼음으로써 비로소 믿음을 성취함을 밝힌 것이다. 이것은 일체 시방 모든 부처님의 果座이니, 첫 믿음에서부터 단박에 불과를 믿는 것으로 스스로의 행으로 행해야 하는 법을 삼기 때문에 비로소 믿음을 성취한다는 것을 밝힌 것이다.
이 단락을 다시 둘로 나누리니, ① 법좌의 넓고 좁음을 밝힌 것; 법계품에서“그 사자좌가 법계를 포함한다” 등을 말한 것으로서, 그 대의는 의지하여 머묾[依住]이 없고, 흐트러짐[定亂]이 없는심성의 體로써 법좌의 體를 삼는 것이다. ② 보살이 어떻게 편안히 앉는가를 밝힌 것; 結跏趺坐를 말하는 것이다. 세간의 온갖 緣을 회통해서 하나의 법계를 만드는 것을 結이라 이름붙이고, 하나의 법으로 온갖 緣에 부합하는 것을 跏라 이름붙인다. 또 결가부좌라는 것은 안정되어 움직이지 않는 威儀의 相이기 때문이다. 이 지위는 단바라밀 중 10바라밀을 주재한다.
四, 十方菩薩大衆
(1) 東方의 文殊菩薩
現神通已에 東方過十佛刹微塵數世界하야 有世界하니 名金色이요 佛號는 不動智시며
彼世界中에 有菩薩하니 名文殊師利라 與十佛刹微塵數諸菩薩로 俱하야 來詣佛所하사
到已作禮하고 卽於東方에 化作蓮華藏師子之座하사 結跏趺坐하시니라
現神通已(현신통이)에 신통을 나타내신 뒤에
東方으로 過十佛刹微塵數世界하야, 동쪽으로 10 불찰미진수의 세계를 지나
有世界하니, 한 세계가 있으니 名金色이요, 이름은 금색이요
佛號는 不動智시며, 부처님 명호는 부동지이신데 彼世界中에 有菩薩하니, 그 세계 안에 한 보살이 있어
名文殊師利라. 이름이 문수사리니라.
[[金色→不動智, 本來智, 차별없는 세계. 차별들을 쫓아가다 보니 우리 본래의 지혜가 캄캄해지고 둔해졌습니다]]
[[不動地= 깨침을 얻어 한없이 밝고 고요한 중에 머물러 일체의 생각도 일어남이 없고 온갖 주체와 대상이 끊어진 경지]]
與十佛刹微塵數諸菩薩(여십불찰미진수제보살)로 俱하야, 그가 10 불찰미진수의 보살들과 함께
來詣佛所(내예불소)하사 到已作禮(도이작례)하고, 부처님 처소로 찾아가 도착하자 예배드리고
卽於東方(즉어동방)에 化作蓮華藏師子之座(화작연화장사자지좌)하사. 곧 동쪽에 연화장 사자좌를 화작하여
結跏趺坐(결가부좌)하시니라. 가부좌를 맺고 앉았느니라.
[이것이 7처 9회 중에서 두 번째 법회, 두 번째 장소에서 벌어지는 법회입니다. 앞 보다는 많이 생략되었습니다]
(2) 南方의 覺首菩薩
南方過十佛刹微塵數世界하야 有世界하니 名妙色이요 佛號는 無礙智시며 彼有菩薩하니
名曰覺首라 與十佛刹微塵數諸菩薩로 俱하야 來詣佛所하사 到已作禮하고
卽於南方에 化作蓮華藏師子之座하사 結跏趺坐하시니라
南方過十佛刹微塵數世界(남방과십불찰미진수세계)하야, 남쪽으로 10 불찰미진수의 세계를 지나
[[십불찰미진수= 미혹함을 밖[外]이라 말하고 법에 들어감을 온다[來]라고 말한다.]]
有世界하니, 한 세계가 있으니 名妙色이요, 이름은 묘색이요
[[妙色= 신심이 점점 더욱 묘해지면서, 법의 허무를 요달하여 법에 卽해서 스스로 묘하게 된 것이다.]]
佛號는 無碍智(무애지)시며, 부처님 명호는 '무애지'이시니
[[無碍智= 부동지의 體로 닦아 나아가 신심이 더욱 밝아짐으로써 지혜가 걸림 없음을 밝힌 것이니, 총체적으로는 자기 마음의 信位의 부처님이지 다른 부처님이 아님을 밝힌 것이다. 이는 부처님의 마음과 중생의 마음과 자기 마음이 총체적으로 一心 · 一法界 · 一智慧가 되어야 비로소 믿음을 이루기 때문이다.]]
彼有菩薩(피유보살)하니, 그 세계 안에 한 보살이 있어
名曰覺首(명왈각수)라. 이름을 각수라 하였느니라.
[[覺首= 문수의 묘한 슬기로써 正과邪를 잘 간책해 능히 자각하기 때문이며, 또한 스스로 깨달은 법에서 능히 타자를 깨닫게함을 밝히기 때문이다.
이 지위 보살의 세 깨달음= ① 스스로의 몸과 마음이 본래 법계로서 오염 없는 순백의 청정함임을 깨닫는 것으로서 앞서 말한 금색세계 같은 것이 이에 해당되며, ② 스스로의 몸과 마음이 분별하는 성품이 본래 能所가 없어서 근본적으로 부동지불임을 깨닫는 것이며, ③ 자기 마음의 正과 邪를 잘 간책하는 묘한 슬기가 문수사리임을 깨닫는 것이다.
신심의 첫머리에서 이 세 가지 법을 깨닫는 그 이름이 각수인데, 이는 바로 신심 속에서 잘 깨닫는 행이 각수보살이란 명칭이 됨을 밝힌 것이다. ]]
與十佛刹微塵數諸菩薩(여십불찰미진수제보살)로 俱하야, 그가 10 불찰미진수의 보살들과 함께
來詣佛所(내예불소)하사 到已作禮(도이작례)하고, 부처님 처소로 찾아가 도착하자 예배드리고
卽於南方(즉어남방)에, 곧 남쪽에 化作蓮華藏師子之座(화작연화장사자지좌)하사, 연화장 사자좌를 화작하여
結跏趺坐하시니라. 가부좌를 맺고 앉았느니라.
[[南은 正이 되고 日, 明, 虛無, 리 가운데 虛가 되기 때문에 밝음[明]이 緣이 되는 것이니, 10신을 닦아 나아가면서 모든 법의 허무를 요달하여 점점 더 밝아지는 것이다. 이 때문에 문수 覺母가 처음 배우는 자를 믿게 함으로써 바로 근기를 覺成의 동쪽에 따르게 하니, 선재동자가 도에 들어가 닦아 나아갈 때 남쪽으로 모든 벗을 순방하는 것은 남방이 正이 되고 日이되고 明이 되고 虛無의 理가 됨을 나타낸 것이다. 때문에 禮佛할 때 '南無'라고 말하는 것이니, 이는 남방의 허무를 밝힌 것이다. 허무의 理가 남방의 뜻이므로 일체처가 남방이며, 최초로 믿음을 낼 때가 일체처가 동방인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