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마경(維摩經)

유마힐소설경(維摩詰所說經) 4. 보살품(菩薩品) 4

Skunky 2023. 4. 5. 07:00

◎光嚴童子(불고광엄동자)

[광엄동자(光嚴童子) 표상적 인물이라 할 수 있으며, 광(光)은 色ㆍ心ㆍ絶對를 상징한다.

동자(童子)란 어린 아이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구도심에 눈뜬 사람을 말한다.

광엄동자(光嚴童子)란 광엄보살을 일컫음이나, 보살을 동자라 함은 ① 여래의 왕자라는 뜻 ② 음욕이 없는 것이 아이들과 같다는 뜻이다.]

 

佛告光嚴童子(불고광엄동자) 汝行詣維摩詰問疾(여행예유마힐문질)

부처님께서는 동자인 광엄에게 말씀하셨으니,
그대가 유마힐을 찾아가서 문병하도록 하라.

The Buddha then said to Child of Shining Austerity, Go to Vimalakirti and ask him about his illness. 

 

光嚴白佛言(광엄백불언) 世尊(세존) 我不堪任詣彼問疾(아불감임예피문질)

광엄도 부처님께 말씀드리기를,

세존이시여, 저도 그를 찾아가 문병하는 일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Shining Austerity replied to the Buddha, World Honoured One! I am afraid I cannot go there to ask him about his illness. 

 

所以者何(소이자하) 憶念我昔(억념아석) 出毘耶離大城時(출비야리대성시)

왜냐 하면, 생각해 보니 예전에 제가 비야리 대성을 나가려 하였을 때에 

Why? I thought back to when I was leaving the great city of Vaisali, 

 

維摩詰方入城(유마힐방입성) 我卽爲作禮而問言(아즉위작예이문언)

유마힐이 마침 성문으로 들어오고 있어서, 저는 그에게 인사를 하고 물었습니다.
as Vimalakirti was entering the city, so I bowed to him and asked, 

 

居士從何所來(거사종하소래)?

‘거사님, 어디서 오십니까?’(어디 갔다 오십니까?)

Where did you come from householder? 

 

答我言(답아언) 吾從道場來(오종도량래)

그는 대답하였습니다
‘저는 도량에서 오는 길입니다.
He replied, I came from the place of awakening. 

 

我問(아문) 道場者何所是(도량자하소시)?

제가 다시 묻기를, 그 도량이 어디에 있습니까

I asked What is the place of awakening? 

[道場(도량) 불가에서는 수행자가 수행하는 곳을 도량(道場)이라고 합니다.

*한자로는 도장(道場)으로 쓰지만 ‘도량’으로 읽습니다. 도장으로 읽을 때는 태권도나 검도 등을 가르치거나 연습하는 장소나 집을 가리킬 때이고, 도량은 ‘도를 닦는 장소, 도가 있는 장소’를 일컫는 말입니다. 원래는 ‘석가모니부처님이 도(道)를 이룬 땅’을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하지만 요즘은 삼보(三寶)를 모시고 수행하는 장소, 또는 법(法)을 펴기 위해 대회를 여는 장소로 ‘절’을 가리키는 말로 널리 쓰이고 있으며 좁게는 좌선이나 염불, 수계 등을 하는 방이나 법당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또, 사찰의 법당 안에서 진행되는 법회는 물론, 법당과는 관계없이 일정한 곳에서 진행되는 법회를 일컫기도 합니다.
예부터 우리나라에서는 고도의 신비화된 종교의식을 지칭하여 도량이라고 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즉, 질병을 낫게 하거나 가뭄 등의 천재지변이 없도록 하고 수명을 연장하게 하며, 번영을 이룩하고 도둑이나 외적을 굴복시키기 위한 갖가지 주술을 조직적으로 의식화한 것을 도량이라고 파악하였던 것입니다.
신라시대에는 불법을 펴고 수행한다는 의미로 『삼국유사』에 인왕도량 · 미타도량 · 관음도량 · 백좌도량 등의 이름이 보이며, 613년(진평왕 35) 나라에서 황룡사에 100명의 고승을 초청하여 백좌도량을 열었을 때 원광(圓光)이 가장 윗자리에 앉아 이를 주관하였다고 합니다. 또, 670년(문무왕 10)에는 문두루(文豆婁) 도량을 열어 당나라 군사 50만 명을 물리쳤다는 기록도 보입니다.-
작성자 사이공

* 조주스님은 도량의 뜻을 다음과 같이 정의합니다. 조주스님에게 어떤 납자가 물었다. “무엇이 도량입니까?”
그대는 도량에서 와서 도량으로 간다. 전체가 다 도량인데 도량 아닌 데가 어디냐?”]

 

答曰(답왈) 直心是道場(직심시도량) 無虛假故(무허가고)

그는 답하였습니다.
올곧은 마음=直心이 도량이니, 헛되고 거짓됨이 없기 때문이며,

He replied, The upright mind is the place of awakening because it is free from falsehood. 

[直心이 是道場이다. 정직하고 곧은 마음이 도량이다. 유명한 구절입니다 
정직한 마음이면 그대로 깨달음에 이른다. 그리고 깨달은 후의 표현이 直心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이야기 되어지고 있는 것은 원인이자 결과입니다. 불교에서는 방법과 수단을 가리지 않고 성불만하면 된다는 논리는 없습니다. 수단과 방법 그 자체가 결과이어야  되는, 즉 결과와 원인이 같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깨닫고 나서도 직심이요, 깨닫기 위해서도 직심으로, 원인도 직심이요 결과도 직심이다. 곧은 마음= 직심이 도량이다. 왜냐, 헛되고 거짓됨이 없는 삶을 살아간다면 곧 정각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니까]       

[도량(道場)은 건물이나 환경이 아니라, 마음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직심(直心)이란 흩어지지 않은 유연한 마음을 가리킵니다. 이 마음에는 거짓이나 에누리가 없으므로 도량이라는 대답이었습니다.

"직심(直心)"이란 순수한 마음으로 사로잡히지 않은 마음이기도 하므로 "빈(空) 마음"과도 상통됩니다. 

영가(永嘉) 대사(8세기의 중국 선승)는 이렇게 말했습니다."진리를 찾으려는 욕구에 불타 있으면 마음은 조용해진다. 다만 마음이 조용해지기만을 바라고 진리를 구하기를 잊으면 산 속도 소란스러워진다."
자기 마음을 조용히 가라앉히기를 잊고, 멀리 한적한 곳을 찾는 한, 아무데도 "도량(道場)"은 없습니다.- 향수선사]

 

◎사심 (四心)

發行是道場(발행시도량) 能辦事故(능판사고)

올곧은 마음으로 행하는=發行이 도량이니, 만사를 판별=할 수 있기 때문이며,

Initiation is the place of awakening because it can accomplish deeds. 

[發行= 행을 실천한다. 어떤 행위를 한다. 실천에 옮긴다.  
가릴 판, 판단할 판. 辦事는 어떤 일을 마련한다. 일을 판단한다. 일을 해나간다는 뜻으로 直心을 실천에 옮겨서 어떤 일을 성취해나간다]

 

深心是道場(심심시도량) 增益功德故(증익공덕고)

깊은 마음=深心이 도량이니, 공덕을 증대(증장)시키기 때문이며,

The mind of profound faith is the place of awakening because it is the development of good merits. 

[얕은 마음, 한 번 듣고 마는 마음, 한번하고 마는 마음, 시작만하고 끝이 없는 마음이 아니라  深心=깊은 마음은 끝까지 하는 마음, 오래도록 하는 마음, 꾸준히 하는 마음 등이 됩니다. 공부하는 것이나 어떤 기술을 배우는 것도 深心= 꾸준히 계속해야 공부도 깊어지고 기술도 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공득이 증익되는 것입니다.]

 

菩提心是道場(보리심시도량) 無錯謬故(무착류고)

깨달음을 구하는 마음=菩提心이 도량이니, 잘못되는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The bodhi mind is the place of awakening because there is no confusion. 

[보리심의 문자적 해석은 깨달음에 대한 마음이지만 보리심은 불교에 대한 온갖 설명이 이 보리심이라고 하는 말속에 다 들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왜 깨달아야 하며 또 어떻게 해야 깨달으며, 깨닫고 나서 무엇 해야하는가 등의 논리 또한 보리심이라는 말속에 다 들어있습니다. 여기서의 보리심은 깨달음 그 자체이기 때문에 깨달을 수 있는 그 장소= 是道場이니, 錯謬= 그릇됨, 착각, 오류가 없다. 즉 보리심은 그런 것이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심 (四心)=직심(直心)ㆍ발행심(發行心)ㆍ심심(深心)ㆍ보리심(菩提心)이 6도(度) 행의 근본이 됨.]

[ "보리심(菩提心)이란, 본래 인도 불교와 티베트 불교에서 말하는 보리심은 ‘단지 깨달음의 마음’이 아닌, ‘일체중생이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는 큰 연민(비심, 大悲)과, 자신이 그 일을 반드시 성취하고 말겠다는 확고한 결심을 바탕으로 완전한 깨달음을 얻으려는 보살의 마음’으로 정의한다." - <람림 첸모(보리도차제광론)> 중에서  
그래서 보리심을 곧 '이타의 보리심'이라 하여 '이타'라는 단어가 '보리심'앞에 전제하는 것이다. 보리심은 대승불교(현교와 밀교)의 귀의점이자 입문이다. 반면 소승불교의 입문은 삼귀의와 사성제이다. 한국의 논서와 많은 책에서는 심지어 스님들조차도 보리심을 단지 깨달음의 마음으로만으로 알고 있다. 

‘단지 깨달음의 마음’이라 한다면, 소승과 대승을 전혀 구분할 수가 없게 될 뿐더러, 수행의 입문 첫 시작서부터, 바랴밀의 개념과 밀교의 개념까지, 대승불교의 기초와 기본 체계와 스텝이 처음부터 어긋나버리게 되는 매우 치명적인 실수를 범하는 것이다! 이제부터라도 '보리심'의 참뜻을 알고서 불교에 대한 구분을 명확하게 하여야 한다!  -상원(商源)]   

[보리심(菩提心, Bodhicitta)은 불교에서 깨달음의 마음. 깨달음을 향한, 혹은 이미 깨달은 마음을 말한다. 여러 가지 명칭이 있으나 그것은 오직 한 마음이라는 뜻이다. 보리심이 일어났을 때 땅이 진동하며 부처님의 법좌까지도 진동한다고 한다. 불교에서는 모든 생명의 공통된 업으로 우주가 생긴 것이 라고 말한다.
보리심은 모든 중생들을 윤회의 고통으로부터 영원히 벗어나게 하기 의해 부처님의 깨달음을 얻으려는 염원(상대적 보리심), 모든 것이 공 하다는 것을 이해하는 완전히 깨어난 마음(궁극적 보리심)을 말한다. 보리심을 일으키는 순간 윤회의 감옥에 갇혀 있는 불쌍한 분들도 부처님의 아들,딸이 되어 인간과 신들에게 예경의 대상이 된다.]

 

◎6바라밀: 六婆羅蜜 

布施是道場(보시시도량) 不望報故(불망보고)

보시가 도량이니, 보답을 바라지 않기 때문이며,

Generosity is the place of awakening because one does not expect a reward for charity. 

[보시와 不望報(불망보), 보시의 제일 중요한 것이 과보를 바라지 않는 마음, 어떤 결과를 기대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대가나 과보를 바라지 않는 마음 자세라면 성불할 수 있고, 성불 후에도 불망보의 정신으로 남에게 베풀게 되는 것입니다]

 

持戒是道場(지계시도량) 得願具故(득원구고)

계를 갖는=持戒가 도량이니, 온갖 구족한 소원=願具를 이룰 수 있기 때문이며, 

Ethical conduct is the place of awakening because it is the attainment of aspirations. 

[願具= 온갖 소원이 구족한 것은 십악을 저지르지 않는 십선(十善), 십선행(十善行)를 행하면 우리들 마음에 바라는 바를 충분히 구족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원이 구족함을 얻는다.]

 

忍辱是道場(인욕시도량) 於諸衆生心無礙故(어제중생심무애고)

인욕이 도량이니, 모든 중생에 대하여 마음에 걸리는 바가 없기 때문이며,

Patience is the place of awakening because it accords with all sentient beings free from hindrance. 

[주변에 잘 참고, 어떤 것도 잘 소화하고 잘 이해하는 사람이 있으면 참 편안하지만, 아주 까다로워서 말하기가 무서울 정도로 곡해를 잘 하고, 잘 못 참아서 걸핏하면 반대의견을 내는 사람이 있으면 마음이 아주 불편합니다. 그래서 忍辱이 是道場이다. 모든 중생에게 마음에 걸림이 없게 하는 까닭에 인욕이 충분히 깨달음의 조건이 된다. 깨달음의 도량이 된다.]

 

精進是道場(정진시도량) 不懈退故(불해퇴고)

정진이 도량이니, 게을러 물러서는 일이 없기 때문이며,

Spiritual diligence is the place of awakening, the cause of ongoing effort and never falling back. 

[精進= 꾸준히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는 것 계속하는 것을 不懈怠(불해태)=게으르지 않는다.

신록의 계절이 되면 아무리 큰 나무도 계속 커지고, 굵어지는 것이 정진입니다. 그 높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큰 나무도 1년에 20~30cm씩 자라고 또 자꾸 굵어지듯이, 살아있는 모든 것은 그러하게끔 되어 있는 그것이 삶의 법칙입니다. 사실 나이와 관계없이 계속 정진= 계속 성장해야 되고, 자기발전을 도모해야 되는 것입니다.]

 

禪定是道場(선정시도량) 心調柔故(심조유고)

선정이 도량이니, 마음이 조화롭고 부드러워지기 때문이며, 

Meditative absorption is the place of awakening, for it subdues the mind into tranquility. 

[열심히 나부 데고 설치는 것도 어떤 의미에서 보면 정진이라고 좋게 볼 수도 있지만, 공부, 참선이나 기도 등을 할 때에는 禪定의 입장에서 차분하고 안정하게 마음을 한 곳에 집중하면 調柔(조유) 조화롭고 부드러워진다. 그러니까 마음을 집중시키는 훈련을 통해서 정진을 할 수 있다면 마음이 조화롭고 부드러워진다는 것입니다]

 

智慧是道場(지혜시도량) 現見諸法故(현견제법고)

지혜가 도량이니, 눈앞에 있는 제법을 現見=환히 보기 때문이며,

Wisdom is the place of awakening because it presents the perception of all Dharmas. 

[지혜를 흔히 불교에서는 빛, 등불 또는 광명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지혜가 도량이다 現見諸法= 지혜로우면 모든 법의 이치, 세상으로 돌아가는 모든 것들을 現見=환히 들여다본다. 

금강경에서 離一切諸相 卽明諸佛이라 했습니다. 허상을 허상으로 볼수 있으면 벗어날 수 있는데, 허상으로 보이지 않으니까(허상으로 볼 수있는 지혜가 없으니까)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일체상을 떠난 것이 부처라, 현견=모든 법, 모든 이치를 환히 보게 되면 곧 성불이고, 성불하고 나서도 제법을 현견해서 모든 이치를 환히 보고 지혜롭게 살면 그것이 바로 부처된 보람이고 성불한 결과라는 것입니다]

 

◎사무량심(四無量心)

慈是道場(자시도량) 等衆生故(등중생고)

가 도량이니, 모든 중생에게 평등하게 대하기 때문입니다. 

Loving-kindness is the place of awakening, being equal to all sentient beings. 

[한자어의 자(慈)의 단어적 의미
- 이외에도 사랑을 표현하는 한자어로 사랑 자(慈, 㤵)가 있다. 기본적으로 사랑 자(慈)를 쓰는데, 속자로 사랑 자(㤵)라는 글자가 존재하기도 한다. 
- 사랑 애(愛)는 인간이나 자연 생태계의 생물 종 모두에게 존재하는 일반적 마음의 작용으로서 사랑을 의미하지만, 사랑 자(慈)는 자비(慈悲), 자애(慈愛), 자선(慈善)과 같이 헌신적 사랑, 돌보는 사랑이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慈(자)자는 이 자(玆)와 마음 심(心)이 결합한 모습이다. 자(玆)는 실타래가 늘어진 모습을 나타낸 것으로 ‘무성하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 이렇게 무성함을 뜻하는 자(玆)자에 심(心)자가 더하여 사랑 자(慈)자가 만들어졌는데, 이는 무성한 마음, 즉 힘쓰고, 애쓰며 돌보는 사랑의 마음을 말한다
- 사랑 자(慈)의 속자인 자(㤵)자는 힘쓸 자(孜)와 마음(心)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풀어쓰면 힘쓰는 마음, 애쓰고 돌보는 마음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강마을]
[자무량심(慈無量心)은 모든 중생에게 즐거움을 베풀어 주는 마음가짐]  

 

悲是道場(비시도량) 忍疲苦故(인피고고)

가 도량이니, (중생을 구제하는데) 피곤함과 괴로움을 잘 참아 내기 때문이며,

Compassion is the place of awakening because it can withstand pain and suffering. 

[사랑자 慈 슬플비 悲. 비(悲)는 어여삐 여긴다, 안타깝게 여긴다, 마음 아파한다는 뜻입니다. 

悲가 是道場이니 피곤하고 괴로움을 받는=疲苦를 참는다. 부모가 자식에 대하여 그저 애석하고 안타까워해서, 그 자식생각에 모든 것을 참고 견디는 마음, 아무리 피곤하고, 고통스럽고 힘들어도 내 목숨을 대신 줄 수 있는 그런 마음으로 피고=고통을 참는 그것이 悲의 정신입니다. 慈는 사랑을 부어넣는 것이라면, 어려움을 견딜 줄 아는 그런 마음이 悲의 정신입니다]     

[()란 중생의 고통을 덜어주며 근본적으로 그 근심과 슬픔의 뿌리를 뽑아내어 주는 것을 라고 한다.=<悲能拔苦(능발고)>

비무량심(悲無量心)은 중생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고통의 세계로부터 구해내어 깨달음의 해탈락(解脫樂)을 주려는 마음가짐이다.]

 

喜是道場(희시도량) 悅樂法故(열락법고)

가 도량이니, 부처님의 가르침=을 좋아하는 것을 보고 기뻐하기 때문이며

Joyfulness is the place of awakening because there is a delight in the Dharma. 

[불교에서 말하는 기쁨이란 진리, 가르침, 불법에서의 즐거움과  환희를 느끼는 것을 말합니다]

[희무량심(喜無量心)은 중생으로 하여금 고통을 버리고 낙을 얻어 희열하게 하려는 마음가짐]

 

捨是道場(사시도량) 憎愛斷故(증애단고)

버림=가 도량이니, 사랑과 미움을 끊어 버리고 평등하게 대하기 때문입니다.

Surrender is the place of awakening, for it breaks hatred and love. 

[버릴사 捨, 흔히 버리듯이 보시한다, 미련 없이, 대가를 바라지 않고 버리는 마음으로 보시하는 것으로 해석을 하지만, 여기서는 증애를 끊는다. 미워하고 애착하는 것을 끊는다. 미워하고 애착하는 것은 상대적이고 대립된 것이기 때문에 중도가 안 되는 것이니까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사무량심(捨無量心)은 탐욕이 없음을 근본으로 하여 모든 중생을 평등하게 보고 미움과 가까움에 대한 구별을 두지 않는 마음가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