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만경(勝鬘經)

승만사자후일승대방편방광경 31

Skunky 2023. 3. 3. 18:32

佛告帝釋(불고제석) 此經成就無量無邊功德(차경성취무량무변공덕)

부처님께서는 제석에게 말씀하셨으니,  경은 한량없고 가없는 공덕을 성취하였으므로교시카여,

一切聲聞緣覺不能究竟觀察知見(일체성문연각불능구경관찰지견)

모든 성문이나 연각들은 능히 이르지 못할 것이며, 관찰하여 알고   없을 것이느니라. 

[이 경을 잘 받아 지녀 행한다면 헤아릴 수 없고 가이 없는 공덕을 성취할 수 있으나, 일체 모든 성문과 연각들은 이 경의 최고 경지인 구경(究竟)을 관찰하거나 알 수 없을 것이니,] 

憍尸迦(교시가) 當知此經甚深微妙大功德聚(당지차경 심심미묘 대공덕취)

교시가(교시카)여 마땅히 알아라, 이 경은 매우 깊고 미묘하며, 큰 공덕의 덩어리이니, 

今當爲汝略說其名(금당위녀약설기명)

이제 마땅히 그대를 위해서 그 이름을 간략히 말하거니,

諦聽諦聽善思念之(제청제청선사념지) 諦 살필 체, 살필 제,

자세히 잘 듣고 잘 들어서, 잘 생각하여 기억하도록 하라.

[교시카여, 잘 알아야 한다. 이 경은 매우 심오하고 미묘한 공덕을 가지고 있음을 지금 그대를 위해 간략하게 이 경의 이름을 말하고자 하니 자세히 잘 듣고 생각하도록 하라.]

 

時 天帝釋及長老阿難白佛言(시 천제석급 장노아난 백불언)

그 때에 천제석과 장로 아난이 부처님께 말씀드리기를,

善哉世尊(선재세존) 唯然受教(유연수교)

훌륭하십니다, 세존이시여! (말씀하신 대로) 가르침을 오롯이 잘 받아 지니겠습니다.

 

佛言(불언) 此經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 경은

‘歎如來眞實第一義功德’(차경 탄여래진실제일의공덕) 如是受持(여시수지) 

‘여래의 진실한 제일의 공덕을 찬탄하는 것이라 하나니' 이와 같이 받아 지니며,

[이 경은 부처님께서 깨달아 증득하신 절대 진리인 여래의 진실한 제일의공덕(第一義功德)을 찬탄한 것〔如來眞實功德章〕이다. 그러므로 이 점에 유의하여 잘 받아 지녀야 한다.]

‘不思議大受’(불사의대수) 如是受持(여시수지)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는 큰 받음이라 하나니’ 이와 같이 받아 지니며,

[또한 일체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승만부인의 열 가지 큰 서원인 불가사의한 십대수(十大受)를 설한 것〔十受章〕이다. 그러므로 이 점에 유의하여 잘 받아 지녀야 한다.]

‘一切願攝大願’(일체원섭대원) 如是受持(여시수지)

온갖 소원을 거두어들인 대원이라 하나니, 이와 같이 받아 지니며, 

[또한 대승법에 의지하여 모든 중생을 전부 구제하겠다는 일체 모든 원력(願力)〔十大受〕도 결국은 세 가지 훌륭한 대원(大願)에 포용〔三大願章〕된다. 그러니 이 점에 유의하여 잘받아 기억해야 한다.]

‘說不思議攝受正法’(설불사의섭수정법) 如是受持(여시수지)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는 올바른 가르침을 거두어들임을 설함이니, 이와 같이 받아 지니며, 

[그리고 보살행을 함으로써 깨달음을 증득할 뿐만 아니라 다른 일체의 중생들도 제도한다는 대승의 올바른 가르침 〔攝受正法〕을 설한 것〔攝受章〕이다. 그러므로 이 점에 유의하여 잘 받아 지녀야 한다.]

‘說入一乘’(설입일승) 如是受持(여시수지)

승에 들어감을 설함이니, 그렇게 받아 지니며, 

[한편 부처님이 되는 유일한 가르침인 일승에 깨달아 들어감을 설한 것〔一乘章〕이다. 그러므로 이 점에 유의하여 잘 받아 지녀야 한다.]

 

[일승이란 일불승(一佛乘), 누구나 성불할 수 있음을 설한 것이 일승이다. 성문(聲聞)이나 연각(緣覺)들인 이승(二乘)들의 수행이 비록 이타 원력이 결핍된 수행이기는 하지만 그들도 대승심을 발하여 성불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초기 불교에서는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얻으면 수행이 완성되어 해탈한다고 하였다. 부파불교에서는 일승이니 일불승이니 하는 말은 잘 쓰지 않았다. 대승경전 특히 〈법화경〉이 설해지고부터 일승이 강조되었다. 〈법화경〉의 대의를 ‘회삼승귀일승(會三乘歸一僧)’이라 하듯이 〈법화경〉 이전에 성문승, 연각승, 보살승의 삼승(三乘)을 설하여 각 승(乘)을 구별한 것은 중생들의 근기에 맞추어 설한 권교(權敎)의 가르침인데 실제로 중생을 부처가 되도록 인도하는 일승의 가르침이 부처님 본래의 가르침이요, 이를 실교(實敎)라고 하였다. 이미 아라한과를 얻었던 사리불, 마하가섭, 수보리 등이 〈법화경〉에서는 모두 수기(授記)를 받는다. 수기란 부처가 될 것이라는 것을 미리 예언하여 성불을 보장해 준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아라한과를 얻은 것이 성불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리불아 부처님은 오직 일불승으로서 중생을 위해 법을 설한다.” 〈법화경〉 경문의 한 구절이다. 부처님 실제 법문에 있어서는 이승이나 삼승은 없다고도 하였다.
그런데 이 일승을 〈법화경〉을 소의로 한 천태종과 〈화엄경〉을 소의로 한 화엄종에서 교상판석(敎相判釋)을 달리하여 일승을 동교일승(同敎一乘)과 별교일승(別敎一乘)으로 달리 말했다. 동교일승은 천태종 설로 삼승과 일승의 관계에서 일승이 삼승과 다르지 않아 다 같이 일승으로 회통(會通) 된다는 뜻이고, 별교일승은 일승원교(一乘圓敎)라고도 하는데 삼승법을 뛰어넘어 삼승과 일승을 별개의 것으로 보는 관점에서 한 말이다. 승(乘)은 수레를 뜻하는 말로 중생을 해탈로 인도하는 가르침을 탈것인 수레에 비유하여 하는 말이다. 이 승에는 모두 오승(五乘)있다. 인천승(人天乘), 성문승(聲聞乘), 연각승(緣覺乘), 보살승(菩薩乘), 불승(佛乘)이다. 종파에 따라 불승을 제외하고 인천승을 인간승 천상승으로 나누어 둘로 보고 거기다 삼승을 합하여 오승이라 하는 경우도 있다. 보살승을 빼고 인승, 천승, 성문승, 연각승, 불승 이렇게 오승을 말하는 경우도 있다. 천태의 〈법화문구〉에 인승은 오계(五戒)의 수레를 타고 삼악도의 고통을 벗어나고, 천승은 십선(十善)의 수레를 타고 인간의 팔고(八苦)를 벗어나고, 성문승은 삼계(三界)의 무상(無常)이라는 것을 벗어난다고 하였다. 연각승은 남으로부터 듣는 괴로움을 벗어나고 안으로 지혜가 없는 고통과 밖으로 상호(相好)가 없는 고통을 벗어난다 하였다.
또 〈화엄경소초〉에는 5승을 방향에 맞추어 설해 놓은 이야기가 나온다. 중앙이 불승이고 동쪽이 보살승이며, 남쪽은 연각승, 서쪽은 성문승, 북쪽은 인천승이라 하였다.
부처님 설법을 들을 수 있는 세계를 육도 가운데 천상과 인간, 아수라 삼도(三道)라고 한다. 그래서 보통 경전 말미에 이 삼도 중생이 부처님 설법을 듣고 기뻐하며 신수 봉행했다고 말하는데 〈승만경〉에는 건달바가 추가되어 있다.- 지안 스님(반야불교연구원장)] 

 

‘說無邊聖諦’(설무변성제) 如是受持(여시수지)

다함이 없는 진리=聖諦을 설함이니, 이와 같이 받아 지니며,

[또한 부처님의 설법이 한량없으나 그 중에서 참으로 진실한 가르침은 일승이라는 무변성제를 설한 것[無邊聖諦章]이다. 그러니 이 점에 유의하여 잘 받아 지녀야 한다.]

‘說如來藏’(설여래장) 如是受持(여시수지) 

여래장을 설함이니, 이와 같이 받아 지닐지니라.

[또한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는 성품[佛性]을 지니고 있다는 여래장을 설한 것[如來藏章]이다. 그러므로 이 점에 유의하여 잘 받아 기억해야 한다.]

‘說法身’(법신장)' 如是受持(여시수지)

법신을 설함이니, 이와 같이 받아 지니며,

[또한 번뇌를 완전히 소멸하여 여래장이 환히 나타난 [여래]법신에 대하여 설한 것[法身章]이다. 그러므로 이 점에 유의하여 잘 받아 기억해야 한다.]

‘說空義隱覆眞實(설공의은부진실)’ 如是受持(여시수지)

공한 뜻이 진실한 이치를 가림을 설함이니, 이와 같이 받아 지니며, 

[또한 소승의 가르침만 가지고는 완전한 진리를 알지 못한다는 공(空)한 뜻이 진실을 가린 것을 설한 것[空義眞實隱覆章]이다. 그러니 이 점에 유의하여 잘 받아 기억해야 한다.]

‘說一諦(설일제)’ 如是受持(여시수지)

 가지 진실한 법=一諦]을 설함이니, 이와 같이 받아 지니며, 

[그리고 모든 번뇌가 소멸된 절대 진리[滅諦]인 유일한 진리를 설한 것[一諦章]이다. 그러므로 이 점에 유의하여 잘 받아 기억해야 한다.]

‘說常住安隱一依(설상주안은일의)’ 如是受持(여시수지)

항상 머물고 편안한  가지 의지처를 설함이니, 이와 같이 받아 지니며, 

[또한 진정한 가르침에 귀의하면 그곳에 편안히 안주할 수 있다는 안온한 곳에 상주(常住)함을 설한 것[一依章]이다. 그러므로 이 점에 유의하여 잘 받아 기억해야 한다.]

‘說顚倒眞實(설전도진실)’ 如是受持(여시수지)

전도된 견해와 올바른 견해를 설함이니, 이와 같이 받아 지니며, 

‘說自性淸淨心隱覆(설자성청정심은부)’ 如是受持(여시수지)

‘자성의 청정한 마음이 가리워 졌음을 설함이니, 이와 같이 받아 지니며

[한편 범부의 경우 여래장인 자성청정심이 번뇌에 가려져 있음을 설한 것[自性淸淨章]이다. 그러니 이 점에 유의하여 잘 받아 기억해야 한다.]

‘說如來眞子(설여래진자)’ 如是受持(여시수지)

여래의  아들임을 설함니, 이와 같이 받아 지니며, 

[또한 대승의 참된 가르침을 믿고 따르는 부처님의 진실한 제자에 대해 설한 것[眞子章]이다. 그러므로 이 점에 유의하여 잘 받아 기억해야 한다.]

‘說勝鬘夫人師子吼(설승만부인사자후)’ 如是受持(여시수지)

승만 부인의 사자후를 설하였음이, 이와 같이 받아 지닐지니라.

[그리고 승만 부인이 대승의 올바른 가르침을 사자후한 것을 설한 것[勝鬘章]이다. 그러므로 이 점에 유의하여 잘 받아 지녀야 한다.]

復次憍尸迦(부차교시가) 此經所說斷一切疑(차경소설 단일체의)

 교시가여,  경에 설 것은 온갖 의심을 끊고 

決定了義入一乘道(결정요의입일승도)

올바른 뜻을 결정하여 일승의 도에 들어가게 하는 것이니라.  

[또한 교시가여, 이 경에서 설한 것은 일체 모든 의심을 끊어 대승의 올바른 가르침을 밝혀서 부처님께서 증득하신 깨달음의 경지인 1승(一乘)에 들어가게 하는 방법이다.]

憍尸迦(교시가) 今以此說勝鬘夫人師子吼(금이차설 승만부인 사자후)

교시가여, 지금  승만 부인이 사자후한 경을 

經付囑於汝(경부촉어여) 乃至法住(내지법주) 受持讀誦廣分別說(수지독송광분별설)

너에게 부촉하나니, 나아가 불법이 머물러 있을 때까지 받아 지니고 읽고 외우고 자세히 분별하여 널리 설하여라. 囑 부탁할 촉 

[“교시가여, 지금 승만 부인이 사자후한 이 경을 그대에게 널리 전하고 잘 수호할 것을 부촉하노라. 진리가 머물러 있을 때까지 받아 기억하고 읽고 외우며 사람들의 근기에 따라서 잘 분별하여 널리 설하도록 하라.”]

帝釋白佛言(제석백불언) “善哉世尊(선재세존) 頂受尊教(정수존교)

제석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훌륭하십니다, 세존이시여! 높으신 가르침을 받들겠습니다.

時 天帝釋長老阿難(시 천제석장노아난) 及諸大會天人阿修羅(급제대회천인아수라)

이 때에 천제석과 장로 아난과 여러 모임 가운데 있던 하늘 사람, 인간 사람과 아수라

乾闥婆等聞佛所說(건달바등문불소설) 歡喜奉行(환희봉행)

건달바들이 부처님의 설하신 바를 듣고 환희하며 즐겁게 받들어 행하였다.

[이 때에 제석천과 장로 아난존자 그리고 그 자리에 있었던 모든 천신과 사람, 아수라, 건달바 등이 부처님께서 설법하신 것을 듣고 기쁘게 받들어 실행하였다.]

 

[이상 『승만경』전15장에 걸쳐 그 내용을 살펴 왔다. 경전은 최후에 전15장의 내용을 간략하게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1) 여래의 진실제일의(眞實第一義)의 공덕을 칭찬하는 것이다.

(2) 불가사의한 대서원이라 이름 한다.

(3) 모든 서원을 포섭하는 대원이라 이름 한다.

(4) 정법을 수지하는 불가사의한 가르침이라 이름 한다.

(5) 1승에 포섭되는, 1승에 들어가는 가르침이라 한다.

(6) 무변한 성제(聖諦; 八聖諦)를 설한 것이라고 이름 한다.

(7) 여래장을 설한 것이라고 이름 한다.

(8) 여래 ․ 법신을 설한 것이라고 이름 한다.

(9) 공성(空性)의 뜻이 가진 심밀(深密)한 바른 가르침이라고 이름 한다.

(10) <고제의> 1제(一諦)를 설한 것이라고 이름 한다.

(11) 상주하며 안온한 오직 하나 뿐인 의지처를 설한 것이라고 이름 한다.

(12) 전도(顚倒)와 진실의 설시라고 이름 한다.

(13) 마음은 본래 청정하다는 것의 가르침이라고 이름 한다.

(14) 여래의 진실한 아들의 바른 가르침이라 이름 한다.

(15) 승만부인의 사자후(獅子吼)라 이름 한다.

이 15장에 걸친 내용 파악은 그대로 『승만경』 각장의 문제 제기와 그 해답이다. 그리고

(16) 최후에 이 경의 가르침은 모든 의혹을 끊고 제일의(第一義)의 의지처라고 이름하기 때문에 그것을 명기(銘記)하여 이 경전을 수지하라고 말한다.

가르침을 받는다는 것은 우리들에게 커다란 기쁨이다. 법을 듣는[聞法]의 기쁨은 그것을 받는 사람만이 맛볼 수 있는 세계이다.

『승만경』은 『법화경』과 더불어 여인성불(女人成佛)이라는 점에서 동양 3국에서 특히 여성들에게 많이 읽혀진 경전이다. 수많은 불전(佛典) 가운데 여인성불(女人成佛)을 확실하게 설해진 것은 『법화경』의 〈제바달다품(提婆達多品)〉이 처음이지만, 세계의 문화사(文化史) 상(上)에도 참다운 의미의 남녀평등(男女平等)을 밝힌 것은 이것이 최초(最初)라고 하겠다.
기독교에서도 『구약성서』에 “여자는 아담(男子)의 늑골(肋骨)을 뽑아서 만들은 것이다”라고 하고 있으며, 이슬람교에서도 『코란』에 “남자는 부인(婦人) 위에 자리해야 한다”라고 명기(明記)하고 있으며, 유교에서도 『논어』에 “여자와 소인(小人)은 기르기 어렵다”라고 했듯이 옛날에는 어디를 가더라도 여성 멸시가 보통 사상(思想)이었다. 그 사상은 근대에 이르기까지 계속 일관해 온 것이어서, 자유평등사상의 본가(本家)라고 하는 프랑스마저도 여성의 참정권을 인정한 것이 1946년이었으므로, 아주 최근의 일이었다. 2000년 이상의 옛날에 『법화경』이 “여자도 부처가 된다”라고 뚜렷이 선언(宣言)한 것은, 참으로 대단한 사실이다. 부처가 된다고 하는 것은, 최고의 인간․완성된 인간으로 된다는 것이므로, 이것이야말로 참다운 의미의 남녀평등 바로 그것이다.

석존께서는 그 무명을 이 「제바달다품」에서 철저하게 깨뜨려 버린 것이다. 겨우 여덟 살의 용녀(龍女)가 부처가 되었다, 게다가 앗! 하는 순간에 부처가 되었다. 그것은 ‘남녀를 불문하고 인간의 본질은 평등하게 부처(佛)인 것이다’라는 대선언,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것은 용녀(龍女)가 남자의 모습으로 변해서 부처가 되었다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사물을 깊이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특별히 남자의 모습으로 변하지 않고서도, 여자의 모습 그대로 성불하면 좋으련만 이라는 의문을 일으킬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그것을 심각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무엇보다도 우선 『법화경(法華經)』이 소수의 학자나 비구들을 위해서 설해진 가르침이 아니고, 무수한 대중을 구하기 위한 가르침이었다는 것을 생각해내면 그 해답은 스스로부터 나올 것이다.
당시의 인도사회에서는 세계의 대부분의 나라들과 똑같이 남존여비의 사상이 철저했다. 여성 측에서도 그것을 당연한 것이라고 하여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여자도 부처가 된다고 하는 사상을 무지(無智)한 대중의 머리에 곧바로 부딪치게 하는 것은, 여자가 남자로 되어 성불한다고 하는 형태가 가장 적당했었던 것이다.
만일 『법화경』이 학자나 비구들을 위한 철학서였다면 인간으로서의 본질의 위에서는 남녀평등이라는 것을 이론적으로 차근차근하게 설했을 것이다. 그러나 『법화경』은 그렇지 않고 고원(高遠)한 진리를 일반대중에게 어떻게 해서라도 깨닫게 하려고 하여 드라마의 형태를 취해서 편집된 것이기 때문에 이와 같은 연출을 한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근본사상은 ‘인간의 본질은 남녀의 차별을 초월하여 평등하다’라는데 있다.
그렇지만 극중의 인물로서 실재로 나타내는 데는 남자도 여자도 아닌 모습이라고 하는 것은 표현할 수 없다.
그렇다고 하여 여자의 모습 그대로 부처가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어도, 그 무렵의 사회통념으로서는, 과연 대중이 직감적으로 알아차린다는 것은 의심스럽다. 그보다도 당시의 사회통념의 현실에 즉(卽)하여 남자의 모습으로 변해서 성불한다고 하는 형태가 가장 알맞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우리들은 이 변성남자(變成男子)라고 하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면 좋을 것인가. 나는 이것은 결국 ‘여자의 잠재의식에 깊이 달라붙어 있는 열등감을 벗어 던지고, 남자와 평등한 본질을 자각하라’라고 하는 가르침이다. 현재와 같은 사회적인 지위가 ‘남녀평등’으로 되었지만, 여자 자신이 마음속 깊이 잠겨 있는 그와 같은 숙업(宿業)의 기분을 반드시 버리지 않는 한, 참다운 남녀평등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여자 여러분들이 자기의 마음의 본연의 자세를 조용히 되돌아본다면 짚이는 바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끝으로, 불자님들에게 기도에 대해 몇 마디 해주고자 하는 것은 우리들은 모두 부처님의 가피를 받고자 하여 열심히 기도를 한다. 그러나 가피는 좀처럼 실현되지 않는다. 왜 그럴까? 가피란, 원래 부처님께서 우리들에게 힘을 보태주는 것을 가(加)라고 하며, 우리들이 부처님으로부터 힘을 입는 것을 피(被)라고 하는 것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부처님과 기도하는 사람사이에는 서로 오고 가는 길이 있어야 한다. 이 길을 감응도교(感應道交)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과 기도하는 사람 사이에는 무엇보다도 사이클이 맞아야 한다. 예를 들면 달 밝은 밤에 맑은 물을 그릇에 담아 밖에 내어두면, 맑은 물에 달을 볼 수가 있다. 그런데 그 물그릇을 흔든다면, 달은 일그러질 것은 변형된 것이다. 게다가 그 물에 흙을 한 주먹 집어넣으면, 맑은 물이 흙탕물로 변하여 달은 그릇의 물에 비치지 않을 것이다.
이렇듯 기도하는 사람의 마음이 맑아야만 부처님의 가피가 있을 터인데 흔들리거나, 흙탕물이 된 우리들의 마음에 부처님의 가피를 입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것은 크게 잘못된 생각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흔들림이나 흙탕물은 어디서 온 것일까. 흔들림은 첫째 부처님을 믿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며, 둘째로 흙탕물은 육체를 자기라고 생각하며, 나는 항상 죽지 않고 살아 있을 것이라는 아상(我相)에서 비롯된 것이다. 불교, 즉 부처님의 가르침은 온갖 고통은 욕심에서 생긴 것이니, 욕심을 버리게 되면, 괴로움이 의지할 곳이 없다. 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이 고정된 실체가 없는 나를, 시시각각 변해가는 나를, 태어나자마자 죽음으로 향하는 나를, 영원한 나라고 잘못 믿는 것에서부터, 괴로움은 찾아오는 것이다.
요컨대, 아상을 버리지 않는 한 그 어떠한 기도를 한 대도 가피는 입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기도할 때는 청정을 요한다고 하는 것이다. 청정이란, 물론 육체를 깨끗이 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마음속의 아상(我相), 아집(我執), 아만(我慢)을 버려야만 비로소 부처님과 감응도교(感應道交)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들은 어떠한가, 남이야 어찌되었던 나만 잘되면 된다는, 그런 마음으로, 욕심을 만족시키기 위해 기도를 하는 것은, 한 마디로, 공염불(空念佛)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아무리 의식적으로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지만, 좀처럼 그렇게 되지 않는다. 그렇게 되지 않는 것은 습관 때문이다. 나도 모르게 욕설이 나오거나, 주먹이 나오거나, 속으로 욕하거나 하게 되는 것은 우리들 마음속의 무의식 때문이다. 이러한 것을 우리들은 업장(業障)이라고도 한다.
이렇듯 우리가 가지고 있는 업장, 즉 습관을 고치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나를 버리는 방법이란, 곧 일상에서 남을 위해 기도를 하게 되어, 그것이 습관이 된다면, 버리려고 애쓰지 않아도 나도 모르게 자연히 아상, 아집, 아만은 나에게서 멀리 사라져 가게 되는 것이다.
『잡보장경(雜寶藏經)』에는 ‘무재7시(無財七施)’가 있다. 그 중에서 한 가지나 둘 정도라면 초보의 수행자라도, 언제나 반드시 라고 할 수 없지만, 가급적이면 그렇게 하도록 마음가짐쯤은 할 수 있는 일이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이렇게 하여 모두 마음이 청정하게 되어 부처님의 가피를 듬뿍 받아서 같이 행복하기를 두 손 모아 빕니다. 감사합니다.-
혜경스님, 제주불교신문]

 

[〈승만경〉의 마지막 부분에서 부처님은 다른 경전들과 달리 제석천인 교시가에게 특별 부촉을 한다. 제석은 불법 수호에 앞장서는 천왕이다. 석가모니가 성불한 이후 제석천은 그의 수호신이 되었으며, 석가모니가 도리천에 올라가 어머니 마야 부인에게 설법할 때 보개(寶蓋)를 손수 들고 옆에서 시중을 들었다고 한다. 그 모습은 보통 천인(天人)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하얀 코끼리를 타고 오른손에는 삼고저(三鈷杵)를 들고 있으며, 왼손은 허벅다리 위에 올려놓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단군신화〉에도 석제환인(釋提桓因)이라 하여 제석의 이야기가 나온다. 뿐만 아니라 고려시대 태조 왕건은 제석원을 설치, 제석도량을 개설하여 재를 베풀었다는 기록이 고려불교사에 나온다. 제석이 천신을 대표하는 신으로 받들어져 민간신앙에서도 제석을 숭배하는 사례가 있었다. 〈대품반야경〉 ‘천제품(天帝品)’에는 수보리와 교시가가 문답을 주고받는 내용이 있다. 거기에도 제석천을 교시가라 부르고 있다. 그런데 〈대품반야경〉을 해석한 용수의 지도론에는 일찍이 마가다국에 바라문이 있었는데 성은 교시가(몐尸迦)이고 이름은 마가(摩伽)였다고 한다. 그가 인간 세상에서 복덕을 많이 닦아 목숨을 마친 다음 도리천에 태어나 천주가 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니까 현재 천상에 있는 천왕들이 과거생에 인간 세상에서 사람으로 있으면서 복을 많이 지은 이들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 세상에 있을 때의 이름을 썼다고 했다. 비록 중생의 세계를 여섯 갈래(六道)로 나누기도 하고 삼계(三界) 이십오유(二十五有)로 구분하기도 하지만 그 중심 세계는 인간 세계이다. 인간 세상에서 지은 업이 나머지 세계에 태어나는 것을 결정하게 된다는 것이다. 수많은 나라가 있는 지구를 지구촌이라 부르는 말처럼 여러 갈래의 세계를 모두 중생 세계라고 하는 것이다. 다만 윤회를 거듭하는 중생이지만 그 중심이 인간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윤회는 인간에서 비롯되고 인간에서 끝난다는 것이다. 윤회가 끝나면 해탈의 세계요 부처의 세계다. 불교를 인본주의 종교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지안스님, 현대불교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