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만경(勝鬘經)

승만사자후일승대방편방광경 30

Skunky 2023. 3. 3. 07:00

爾時世尊(이시세존) 放勝光明普照大衆(방승광명보조대중)

이 때에 세존께서는 뛰어난 광명을 놓아 널리 대중을 두루 비추시고, 

身昇虛空高七多羅樹(신승허공고칠다라수) 足步虛空還舍衛國(족보허공환사위국)

몸이 허공으로 7다라수 높이 만큼 올라가셔서, 허공을 걸어서 사위국으로 돌아가셨습니다.

 

[다라수(多羅樹, tāla, 영어: Palmyra Palm), 다라 나무는 종려과(棕櫚科)의 식물로 잎이 부채꼴인 야자수(fan palm)의 일종이다. 학명은 보라수스 플라벨리포르미스(Borassus flabelliformis) 또는 보라수스 플라벨리페르(Borassus flabellifer)이다. 인도 · 버마 · 스리랑카 등 열대지방에서 나는 나무이다. 다라수(多羅樹)라는 명칭은 《아함경》 등의 한역 불교 경전에서 종종 등장하는데, 고타마 붓다 당시 인도에서는 이 나무를 척도(尺度)의 단위로 삼았다.

잎은 단단하고 평활해서 종이 대신 사용해 경(經)을 새겨 패엽경의 재료가 되었으며, 줄기를 자르면 다시는 움이 트지 않아, 비구가 살생 도둑질 음행 거짓말 등 무거운 죄를 범하면 결국 선근(善根)을 잃고 지견(知見)을 회복할 수 없는데 비유하였다.]

 

[1다라수는 49척(1척은 33.33cm)인데, 부처님께서 7다라수, 약 114m 정도 높이 솟구쳐 올라 허공을 걸어 사위국으로 가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결국 불가사의한 부처님의 위대성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승만부인은 성중으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먼저 우칭왕에게 대승법을 전하고 나서 7세 이상의 여자를 교화하는데, 왕도 7세 이상의 남자에게 대승법을 펼치니 온 나라가 대승법의 감로비를 맞게 됩니다. 여기서 7세 이상이라 한 것은 정법(대승법)을 듣고 수지할 수 있을 만한 연령을 의미하는 것이라 생각됩니다.-혜총스님 불교신문]

 

時勝鬘夫人與諸眷屬(시승만부인여제권속) 合掌向佛觀無厭足(합장향불관무염족)

그때 승만 부인과 모든 권속들이 부처님을 향하여 합장하고 싫어함 없이 바라보면서   

目不暫捨(목불잠사) 過眼境已踊躍歡喜(과안경이용약환희)

잠깐도 한눈을 팔지 아니하였으며, 부처님께서 눈에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에 기뻐하여 뛰면서 

各各稱歎如來功德(각각칭탄여래공덕) 具足念佛還入城中(구족염불환입성중)

저마다 각각 여래의 공덕이 갖추어진 것을 찬탄하고 부처님을 생각하면서 성으로 돌아와서,

向友稱王稱歎大乘(향우칭왕칭탄대승) 우칭왕을 향하여 대승을 찬탄하고 

城中女人七歲已上(성중여인칠세이상) 化以大乘(화이대승)

성중에 있는 일곱  이상  여자에게 모두 대승법으로 교화하고 

友稱大王亦以大乘化諸男子(우칭대왕역이대승화제남자)

우칭왕 역시 일곱 살 이상의 모든 남자들을 대승으로 교화하여서, 

七歲已上擧國人民皆向大乘(칠세이상거국인민개향대승)

온 나라의 모든 백성들이 모두 대승으로 향하게 되었습니다.

 

[ 7세를 든 것은 예(禮)를 아는 기준 나이를 말했다고 보아야 할 것 같다. 유교에서 남녀 7세 부동석이라 성별의 윤리를 강조한 것처럼 성안의 7세 이상의 남녀를 대승법으로 교화하였다 했다. 이는 〈승만경〉이 대승법을 설한 경전임을 다시 한 번 천명하는 말이다. 대승법이란 반야공 사상에 입각하여 자비와 회향의 실천을 위주로 가르치는 법문을 말하는 것이다. 〈중론〉에는 이렇게 설해 놓은 대목이 있다.
“부처님은 사견(邪見)을 끊고 불법을 바로 알게 하기 위하여 먼저 성문법 가운데 12인연을 설하셨다. 또 이미 성문법 닦기를 끝내고 대승심을 일으켜 수행하며 깊은 가르침을 받고도 감당할 수 있는 자를 위해서는 대승법으로 인연의 모습을 설하였으니 말하자면 불생불명, 불일불이 등과 필경공, 무소유 등이다.”
이러한 대승의 취지를 달리 중도(中道)라 한다. 대승불교가 일어난 이유를 밝힐 때 부파불교나 소승에서 실종된 중도를 회복하기 위해 일어났다고 말하는 경우도 있다. 중도를 잃어버리는 것이 곧 사견이 된다. 변견(邊見)이나 양변(兩邊)의 어느 한 쪽에 치우치면 중도를 잃어버리고 사견이 된다 하였다. 이 중도를 나타내는 ‘쌍차쌍조(雙遮雙照)’라는 말이 있다. 양변을 모두 차단하고 막으며 부정하는 것을 쌍차(雙遮)라 하고 양변을 모두 비추고 드러내며 긍정하는 것을 쌍조(雙照)라 하였다. 양자를 함께 부정하거나 함께 긍정하는 방법을 통하여 그릇된 견해를 물리치고 정견을 구하는 실천의 수단으로 쓰인 말이다. 가령 유(有)와 무(無), 이 둘을 동시에 부정하면 비유비무(非有非無)가 되는데 이것이 쌍차이다. 반면에 유이기도 하고 무이기도 하다고 하면 이는 역유역무(亦有亦無)가 되어 쌍조가 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중도제일의제(中道第一義諦)를 실현한다 하였다.-지안스님, 현대불교신문]

 

爾時世尊入祇桓林(이시세존입기환림) 桓굳셀 환

그때 세존께서는 기타태자의 숲(기원 숲)으로 돌아 오셔서 

告長老阿難及念天帝釋(고장로아난급염천제석)

장로 아난에게 일러주었으며, 또한 천제석을 생각하시자,

應時帝釋與諸眷屬忽然而至(응시제석여제권속홀연이지) 住於佛前(주어불전)

바로 그 때에 제석은 모든 권속들을 데리고 홀연히 부처님 앞에 이르러 머무셨습니다.

 

[세존이 제자들만이 아니라 널리 그 설법의 자리에 33천〔三十三天〕 가운데의 주(主)인 제석천을 모이게 하였다는 것은, 『승만경』의 사상이 천신과 인간에게 두루 버팀목이 되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널리 대중과 함께 하는 것을 이상으로 하는 붓다의 전도 교화는 인간계에 한하지 않고 천계(天界)마저도 포함한 것이다. 거기에 불교경전의 인도종교에 대한 대응자세를 볼 수 있다.]

 

[기원정사로 돌아온 부처님이 아난과 제석(교시가)에게 〈승만경〉 수지를 당부하는 장면이다. 승만 부인이 설한 이 경이 어떤 경인지 이름을 들어가며 전체 내용을 다시 요약하여 설해 주시고 이 경을 사부대중에게 유통시킬 것을 당부한 것이다. 경전의 마지막 부분을 ‘유통분’이라 한다. 모든 경전을 서분(序分), 정종분(正宗分), 유통분(流通分)의 삼분으로 나누어 경전의 전체 내용을 파악해 온 관례가 있다. 부처님과 승만 부인 사이에만 대화가 전개되다가 경의 말미인 ‘유통분’에 와서 아난이 등장하는 것은 아난이 유통교해(流通敎海)의 일을 맡고 있기 때문이다. 아난을 경가(經家)라고 칭하며, 다문제일(多聞第一)의 제자로 부처님으로부터 들은 말씀을 부처님 열반 후 경전을 결집할 때 송출(誦出)해 내었다.
제석은 힌두교의 신으로서 고대인도에서는 인드라(Indra)라고 불렀으며, 불교에 들어온 이후 제석천으로 불리게 되었다. 일설에는 제석천은 원래 마가다국(Magadha)의 브라만으로 있었던 사람으로 보시(布施) 등의 공덕을 닦음으로써 도리천에 태어나 삼십삼천(三十三天)을 통솔하는 천주가 되었다고 한다. 도리천은 사방으로 8천이 나누어져 있고 중앙에 선견천(善見天)이 있어 합하여 33천이 되므로 때로는 33천이라 부르기도 한다. 석가모니부처님도 이 도리천에 올라가 9순(九旬)을 머물며 생모였던 마야 부인을 위하여 설법해 주었는데 그 내용을 수록하고 있는 경전이 〈지장보살본원경(地藏菩薩本願經)〉이다. 제석은 도리천의 선견천에 있는 천궁 제석궁에 머물면서 불교의 호법주신(護法主神)으로서의 역할을 하며, 때로는 아수라와 전쟁을 하기도 한다고 알려져 있다.
중국이나 우리나라에서는 이 경을 많이 연구해 왔으며, 승만 부인이라는 한 우바이를 통하여 대승적 생활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 주며, 대승의 가르침을 일상생활 속에서 실천할 수 있도록 무엇보다도 실천적인 면을 강조해 놓은 점이 부각되고 있다. 여래장사상과 일불승의 사상을 천명해 놓은 대승불교의 비중 높은 경전이다.-지안스님, 현대불교신문]

 

爾時世尊(이시세존) 向天帝釋及長老阿難(향천제석급장노아난) 廣說此經(광설차경)

그때 세존께서는 천제석과 장로 아난에게  경을 자세히 말씀하시고, 

說已告帝釋言(설이고제석언) 汝當受持讀誦此經(여당수지독송차경)

제석에게 말씀하시기를, 그대는 마땅히  경을 받아 지니고  외워라. 

憍尸迦(교시가) 善男子善女人於恒沙劫修菩提行(선남자선여인 어항사겁수보리행)

교시가, 선남자와 선여인이 항하의 모래 수와 같이 많은  동안 보리행 닦으며,

行六波羅蜜(행육바라밀) 若復善男子善女人(약부선남자선여인)

 6바라밀을 행하더라도, 만약 다시 선남자와 선여인이

聽受讀誦乃至執持經卷(청수독송내지집지경권) 福多於彼(복다어피)

이 경을 받아 지니거나 읽고 외우며 내지 잘 보호한다면,  사람의 복이  사람의 복보다 많을 것이니,

何況廣爲人說(하황광위인설)?

하물며 널리 여러 사람을 위하여 말하여 주는 것이겠느냐. 

是故憍尸迦(시고교시가) 當讀誦此經(당독송차경) 爲三十三天分別廣說(위삼십삼천분별광설)

그러므로 교시가여, 마땅히  경을 읽고 외우며, 삼십삼천 위하여 자세히 분별하여 설해 줌에 있어서이겠느냐.

復告阿難(부고아난) 汝亦受持讀誦(여역수지독송) 爲四衆廣說(위사중광설)

다시 아난에게 말씀하셨으니, 그대 역시 받아 지니고 읽고 외워서 사부 대중을 위하여 널리 설하라.

 

[세존은 경전을 수지하고, 독송하며, 설하는 것의 공덕을 역설(力說)한다. 그것은 이미 『법화경』의 「법사품(法師品)」과 「법사공덕품」에서 “이 법화경 1게 1구(一偈一句)를 수지하고, 독경하고, 송경하고, 해설하고, 서사하는 다섯 종류의 법사(法師)는 무량한 공덕으로써 6근(六根)을 장엄하고 청정하게 된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과 그 길을 같이 하고 있다.
세존이 제석천에 대해서는 33천에 이 경을 설할 것을 권하고 아난다에게는 비구․비구니․우바새․우바이의 4중(四衆), 즉 출가자에게도 재가의 불교 신도에게도 이 경전을 설할 것을 권하고 있다. 수지․독․송․해설의 공덕이 매우 크기 때문이다.- 제주불교신문]

 

時天帝釋白佛言(시천제석백불언) 이 때에 천제석은 부처님께 아뢰었습니다.

世尊(세존) 當何名斯經(당하명사경)? 云何奉持(운하봉지)?

세존이시여,  경을 무엇이라 이름하며, 어떻게 받들어 지니오리까?

 

[<승만경>은 신라 진흥왕 37년(576) 수나라에서 귀국한 안홍법사에 의해 우리나라에 전래된 이후로 불교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승만경에는 일승(一乘)과 여래장(如來藏)이라는 두 가지 사상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일승사상입니다. 승만경에는 일승을 통해 바른 법이 무엇이고, 바른 법에 들어가는 길은 무엇인지 설하고 있습니다. 바른 법은 곧 대승(大乘)이며, 대승이 불승(佛乘)이며, 한량없는 법과 우리 곁에 항상 머물고 있는 법인 여래에 귀의함이 참된 귀의임을 설하고 있습니다.
승만부인이 이렇게 일승이 대승이요, 불승이라 함은 불교의 참된 가르침은 오직 한 가지이며, 그 가르침에 의해서 성문, 연각뿐만 아니라 그 어떤 중생도 성불(成佛)할 수 있다고 설합니다.
대승의 길을 가는 수행자는 석가모니부처님이 전생에 보살이라고 불린 것처럼 모두 보살이라고 불립니다. 또한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전생에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몸을 희생하기까지 하면서 자신의 깨달음을 뒤로 미루고 무량한 선근공덕(善根功德)을 쌓은 것처럼 대승의 보살들도 중생제도를 위하여 자신의 깨달음보다 중생을 구하는 이타행(利他行)을 행하는 것으로 대승의 보살행을 실천한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구제받지 못하는 한 스스로 열반의 세계에 머물지 않고(無住處涅槃) 항상 사바세계에서 고통의 바다에서 헤매는 중생들을 구제한다는 대승의 입장을 견지하는 것입니다.
이는 회삼귀일’이란 성문승, 연각승, 보살승의 3승이 일불승(一佛乘)으로 귀결되는  <법화경>의 핵심인 회삼귀일(會三歸一)사상과도 통합니다. 보살승은 일체중생을 제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대승불교를 가리키는 말이지만 부처님의 진실한 법이 하나, 일승이라는 뜻을 성문과 연각은 잘 이해하지 못하는 까닭에 여래는 방편을 써서 삼승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두고 삼승은 방편(三乘方便)이요, 일승은 진실(一乘眞實)이라고 합니다.
부처님의 진실한 뜻은 평등무차별하게 일체중생을 성불하게 만드는 데 있으므로 불교는 일부 특정인만을 위한 차별적인 교리가 아닙니다. 하지만 불교의 교리를 이해하는데 어려워하는 일반사람들이나 일불승의 인연을 만나지 못한 수행자들에게는 3승의 방편이 필요한 것입니다. 성문, 연각의 2승도 결국 최종적으로는 부처가 되어야 하므로 대승이요, 오직 하나의 불승(佛乘)으로 나아가는 것이 바른 가르침이라고 승만부인이 설하고 있는 것입니다.

 

<승만경>에서 중요한 두 번째 가르침은 여래장 사상입니다. 일승과 더불어 특히 <승만경> 속에서 강조되고 있는 여래장 사상은 원효스님을 비롯한 후세 스님들의 연구 대상이 되어 많은 관련 주석서들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여래장 사상이란 모든 사람들에게 장차 부처님이 될 수 있는 태아(胎兒), 부처님이 될 수 있는 가능성, 씨앗이 감추어져 있다는 사상입니다. 본래부터 중생의 마음속에 간직되어 있는 여래의 청정한 성품이 여래장인데, 누구에게나 마음속에 본래부터 여래의 청정한 성품이 감추어져 있지만 번뇌에 가려져서 드러나지 않으므로 번뇌만 제거하면 그 성품이 드러나 깨달음을 이룬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자신의 마음에 본래부터 부처님의 청정한 성품이 이미 내재되어 있다는 깨침이 중요합니다.
<대방등여래장경>에는 여래장이 여래와 다를 바 없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선남자야, 모든 중생이 갖가지 갈래에 머물면서 번뇌에 싸여 있지만 항상 오염되지 않은 여래장을 지니고 있어서 나(여래)와 다를 바 없다.”
 "내가 중생들을 보니, 모두 여래장을 간직했으나
 더러움에 뒤덮인 꽃처럼, 한량없는 번뇌에 덮여 있네.

 낭떠러지의 나무에 꿀이 있는데, 수많은 벌들에 둘러싸였네.
 훌륭한 솜씨로 꿀을 따는 자, 저 벌떼를 먼저 제거하네.

 중생의 여래장은 나무에 있는 꿀과 같은 것
 온갖 번뇌에 얽힌 것이, 벌떼가 에워싼 것 같네.

 나는 모든 중생들을 위해, 방편으로 바른 가르침을 설하여
 벌떼 같은 번뇌를 제거해, 여래장을 열어젖히리라." 

어리석은 중생들이 각자 갖추고 있으면서도 지니고 있음을 모르는 여래장의 속성을 잘 나타낸 게송이 아닌가 합니다. 또 <대승입능가경>에는 여래장이 외도들이 설하는 자아와는 다르다고 부처님이 말씀하십니다.
“대혜(大慧)야, 내가 설하는 여래장은 외도가 설하는 자아와 다르다. 대혜야, 여래·응공·정등각은 성공(性空)·실제(實際)·열반·불생(不生)·무상·무원(無願) 등의 여러 말로 여래장을 설했다. 어리석은 범부들을 무아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 분별이 없는 여래장을 설했다. 미래·현재의 모든 보살마하살들은 이 여래장을 자아로 집착해서는 안된다.
대혜야, 내가 여래장을 설한 것은 자아에 집착하는 여러 외도들을 다스려서 허망한 견해를 떠나 3해탈에 들어가 속히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을 얻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므로 모든 부처님께서 설하신 여래장은 외도가 설하는 자아와 다르다. 만약 외도의 견해를 떠나고자 하면, 무아인 여래장의 뜻을 알아야 한다.”
외도가 설하는 자아와는 다른 여래장은 자아 이전에 이미 갖추어져 있으므로 <열반경>에서는 아시다시피 “일체 중생은 모두 불성을 지니고 있다(一切衆生 悉有佛性)”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결국 여래장은 중생의 자성청정심을 가리키고, 이것이 중생에게 보리심(菩提心)을 일으키고, 수행을 통해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원초적인 힘이 됩니다. -혜총스님, 불교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