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만경(勝鬘經)

승만사자후일승대방편방광경 22

Skunky 2023. 2. 23. 07:00

8. 제 8장 법신(法身)

法身章第八

 

若於無量煩惱藏所纏(약어무량번뇌장소전) 如來藏不疑惑者(여래장불의혹자) 纏 얽힐 전,  

만약 한량없는 煩惱藏=번뇌의 더미에 얽매여 있는 여래장에 대해서 의심하지 않는다면,

於出無量煩惱藏(어출무량번뇌장) 法身亦無疑惑(법신역무의혹)

한량없는 번뇌의 더미에서 벗어난 법신에 대해서도 의심하지 않을 것이며,

於說如來藏(어설여래장) 如來法身(여래법신) 不思議佛境界及方便說(불사의불경계급방편설)

여래장과 여래의 법신을 말한 부사의한 부처님의 경계와 방편으로 설한 것에 대하여 

心得決定者(심득결정자) 此則信解說二聖諦(차즉신해설이성제)

마음으로 확신할 수 있다면, 이러한 사람은 곧 두 가지 성스러운 진리를 설함을 信解=믿고 이해할 것입니다.

 

如是難知難解者(여시난지난해자) 謂說二聖諦義(위설이성제의)

이렇게 알기 어렵고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이른바 두 가지 성스러운 진리의 뜻을 설한 까닭이니,

何等爲說二聖諦義(하등위설이성제의)? 어떤 것이  가지 성제의 뜻을 말한 것인가?

謂說作聖諦義(위설작성제의) 說無作聖諦義(설무작성제의)

이른바 有作=지음이 있는 聖諦=성스러운 진리의 뜻을 설하는 것과 無作=지음이 없는 聖諦=성스러운 진리의 뜻을 설하는 것입니다.

[유작(有作)은 무명번뇌가 쌓인 채로 생멸이 끊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억지로 하기 때문에 불완전하지만 무작(無作)은 그 반대로 생멸이 사라진 경계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완전합니다. 이렇게 승만부인이 성문이나 연각의 이승이 갖는 사성제(四聖諦)와 부처님, 불승(佛乘)의 경계에서의 사성제를 다르게 설하는 것은 대승불교의 입장에서 보는 사성제는 소승의 사성제와 다름을 강조하려는 의도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대승의 입장에서 보는 소승은 불완전하다는 것입니다. 아직 무명번뇌를 완전히 소멸하지 못한 경계에서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사성제라는 진리를 알기는 하지만 사성제를 알아 작위적으로 고통을 소멸하는 길을 나아가더라도 완전한 열반에 이르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성문과 연각은 생사를 초월했다고 하지만 유위유작(有爲有作)의 분단생사를 넘은 것일 뿐 단지 사성제의 진리를 보기는 했지만 깨달음으로 향하고 있는 존재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혜총스님,불교신문] 

 

說作聖諦義者(설작성제의자) 是說有量四聖諦(시설유량사성제) 何以故(하이고)?

지음이 있는 성스러운 진리의 뜻을 설하는 것은 곧 유한한 四聖諦=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를 설하는 것이니, 왜냐하면 

非因他能知一切苦斷(비인타능지일체고단) 一切集證(일체집증) 一切滅修(일체멸수)

다른 사람으로 말미암아 능히 모든 苦=괴로움을 알며, 모든 괴로움의 集=원인을 끊으며, 모든 괴로움의 滅=소멸을 증득하려고, 

一切道(일체도) 是故世尊(시고세존)

온갖 道=수행을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세존이시여, 

有有爲生死(유유위생사) 無爲生死(무위생사) 涅槃亦如是(열반역여시) 有餘及無餘(유여급무여)

有爲=함이 있는 생사와 無爲=함이 없는 생사가 있으며, 열반 역시 이와 같아서 남음이 있는 열반=有餘涅槃과 남음이 없는 열반=無餘涅槃이 있습니다.

 

[사성제를 작성제(作聖諦)와 무작성제(無作聖諦)의 두 가지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작(作)은 작위(作爲)로, 의도적으로 애를 써서 무엇을 하려고 하는 인위적인 마음이다. 반면에 무작(無作)은 무작위(無作爲)로, 말하자면 인위적 의도를 가지지 않고 자연스러운 순수성이 그대로 완전하게 있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지음이 있고 지음이 없는 것을 구분해 말하는 것은 이승의 사성제와 대승의 사성제를 다르다고 보는 견해에 의해서이다.
〈법화경〉을 깊이 연구한 천태 지의(538~597)는 〈법화현의〉에서 네 가지 사제를 세워 생멸사제, 무생멸사제, 무량사제, 무작사제로 나누기도 했다. 이 중 무작사제에 대해서는 대승의 보살이 제법을 관찰할 때에는 사사(事事)가 이(理)에 즉(卽)하여 있기 때문에 조작이 없는 것을 아는 것을 무작이라 한다 하였다. 작(作)은 중도에 대한 미혹이 남아 있어 이(理)에 어두워 보리가 번뇌가 되고 열반이 생사가 되는 것이 고제(苦諦)이지만, 이를 통달하고 보면 번뇌가 곧 보리가 되는 것이 도제(道諦)이고 생사가 곧 열반인 것이 멸제라는 것이다. 이리하여 사사(事事)가 중도가 되므로 조작하는 것이 없으므로 무작이라 한다고 설명하였다. 원래 ‘무작’이라는 말은 어떤 작용이 없다는 것을 뜻하고 또 분별 조작이 없어 자연 그대로인 것을 뜻하는 말이다. 때로는 무위(無爲)와 같은 뜻으로 쓰이는 말이다. 〈유마경〉에는 이렇게 말했다.
“법은 공을 거스르지 않고 무상(無相)에 따르며 무작(無作)에 응한다. 법은 아름답거나 추한 분별을 떠나고, 법은 증가하거나 감손되는 차별을 떠나며, 법에는 생성과 소멸이 없고 법은 돌아가는 곳도 없다. 법은 육근(六根)으로 포착되지 않으며, 법에는 높거나 낮은 차별이 없다. 법은 항상 머물며 움직이지 않으며 법은 모든 관행(觀行)을 여의었다.” 하였다.
생사를 말하면서도 유위의 생사와 무위의 생사를 말했는데, 마음에 생멸이 남아 식심(識心)이 완전히 끊어지지 못한 것은 유위며, 생멸이 사라져 식심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무위다. 유루업(有漏業)으로 말미암아 수동적으로 생사에 윤회하는 것은 유위생사이고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대비원력을 세움으로써 능동적으로 생사에 머무는 보살의 변역생사를 무위생사라 한다. 부처님이 이승을 위한 작성제와 대승보살을 위한 무작성제를 각각 설하여 여덟 가지로 사성제를 설했다고 밝히고 있는 대목이 〈승만경〉 사성제 설명의 특징이다.-지안스님, 현대불교신문]

 

[4성제의 법문에 대해서 (1) 성문․연각의 2승이 갖는 4성제관(四聖諦觀)과 (2) 부처님․여래의 4성제관을 설한다. 앞의 것을 〔유(有)〕 작(作), 유량(有量)의 4제라 하고, 뒤의 것을 무작(無作), 무량(無量)의 4제로 설하고 있다. 〔유(有)〕 작(作)이란 작위(作爲)가 있다는 것으로서 다른 표현으로 말하면 타동적이며 불철저하다고 말한다. 불철저하기 때문에 한량이 있다. 즉 유량(有量), 분량(分量)이 있는 것이 된다. 무작(無作)은 이와 반대이다.

그렇다면 왜 4성제 그 자체는 하나인데 두 가지의 4성제가 고려되었는가. 원래 석존은 두 가지의 4성제를 설한 것이 아니다. 「여래소설」의 경전에도 있듯이 고제․집제․멸제․도제라는 네 가지의 성스러운 진리를 개시(開示)하였고 이 전승이 원시불교의 근본적인 입장으로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대승불교라고 하는 「불교」의 새로운 사상 전개 가운데서 대승측에서 소승측에 대한 폄칭의식(貶稱意識)이 생겨 「탐착소승(貪着小乘) 삼장학자(三藏學者)」(『법화경』안락행품) 라고 하듯이 소승․대승이라는 대립이 생겨났다. 이리하여 소승의 4제관(四諦觀)은 불완전한 것이며 대승의 사제관은 완전하다고 하는 입장이 생겨난 것이다. 이 입장에 서서 『승만경』은 작(作)의 사성제와 무작(無作)의 사성제를 설하는 것이다.

그 이유에 대해서 『승만경』의 취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이해된다.
성문․연각의 2승의 무리는 남으로부터 가르쳐질지라도 「일체의 고(苦)를 완전히 다 알고 일체의 고의 원인을 다 끊고 일체의 고의 멸을 작증(作證)해 마치고 일체의 고멸(苦滅)에 도달하는 길을 다 닦았다」라고는 할 수 없다고 본다.
그 이유는 2승의 얕은 지혜로는 4성제의 도리를 순차적으로 이해했을 뿐이며 4성제를 관통하는 정신을 완전히 다 알고, 다 끊고, 다 증득하고, 다 닦았다고는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2승의 무리는 아직도 참답고 완전한 깨달음을 얻지 못했으므로 깨달음에 향하고 있는 존재였다. 그것은 진리를 보았다고 하는 단계에 불과한 것이다. 따라서 생사를 초월했다고 하지만 유위의 생사, 분단생사를 넘은 것뿐이므로 그것에서 얻어진 열반이라도 유여열반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 『승만경』의 주된 뜻이다.-제주불교신문, 혜경스님]

 

說無作聖諦義者(설무작성제의자) 說無量四聖諦義(설무량사성제의)

無作聖諦=지음이 없는 성스러운 진리의 뜻을 설한다는 것은 무한한 四聖諦=네 가지 진리의 뜻을 설하는 것이니,

[무작성제는 부처님의 경지를 그대로 드러내어 상대적인 의식으로는 도저히 헤아릴 수 없는 4성제의 의미를 설하는 것입니다.]

何以故(하이고)? 能以自力知一切受苦斷(능이자력지일체수고단)

왜냐하면 자기의 힘으로써 능히 모든 苦=괴로움을 알수 있으며,  

[왜냐하면 그것은 자기가 지니고 있는 참다운 부처님의 성품에서 나온 힘으로 자기가 받고 있는 일체 고(苦)를 알며,] 

一切受集證(일체수집증) 一切受滅修(일체수멸수) 一切受滅道(일체수멸도)

모든 괴로움의 集=원인을 끊을 수 있으며, 모든 괴로움의 滅=소멸을 증득하려고 모든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道=길을 닦기 때문입니다.

[받고 있는 일체 고(苦)의 원인인 집(集)을 끊으며, 받고 있는 일체의 고를 멸(滅)한 상태를 증득하기 위하여 받고 있는 일체의 고를 끊기 위한 수행[道]을 닦기 때문에 무작성제라 합니다.]

 

如是八聖諦(여시팔성제) 如來說四聖諦(여래설사성제)

이와 같이 여덟 가지 성제로 여래께서는 4성제를 말씀하셨으니, 

[이와 같이 작성제와 무작성제의 8성제는 부처님께서 설하신 4성제와 다른 것이 아닙니다.]

如是四無作聖諦義(여시사무작성제의) 唯如來應等正覺事究竟(유여래응등정각사구경)

이와 같은 네 가지의 無作聖諦=지음이 없는 성스러운 진리의 뜻은 오직 여래, 응공, 등정각만이 궁극적으로 깨달으심이며

[이러한 무작성제의 뜻은 오직 여래․응공․정변지이신 부처님만이 완전히 깨달아 우리를 위해 그 진리를 설하실 수 있으며]

非阿羅漢辟支佛事究竟(비아라한벽지불사구경)

아라한, 벽지불의 궁극적인 것이 아니니, 

[성문인 아라한과 연각인 벽지불은 실천 수행을 완전히 끝낸 것이 아닙니다.]

何以故(하이고) 非下中上法得涅槃(비하중상법득열반)

왜냐하면 하, 중, 상의 법으로써 열반을 얻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방편으로써 근기에 따라 설하신 상․중․하의 방법으로는 최고의 경지인 열반을 증득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何以故(하이고) 如來應等正覺(여래응등정각) 於無作四聖諦義事究竟(어무작사성제의사구경)

왜냐하면, 그것은 여래, 응공, 등정각께서는 이 無作四聖諦義=네 가지 지음이 없는 성제의 뜻에 대하여 구경하시어

[또한 여래․응공․정변지이신 부처님의 경우에 있어서만 무작성제를 깨달아 완전한 법신=事를 성취하십니다.] 

以一切如來應等正覺(이일체여래응등정각) 知一切未來苦(지일체미래고)

모든 여래, 응공, 등정각으로서 일체 미래의 괴로움을 아시며,

[일체 모든 여래․응공․정변지이신 부처님은 미래에 발생될 일체의 고(苦)를 아시며,] 

斷一切煩惱上煩惱所攝受一切集(단일체번뇌상번뇌소섭수일체집)

모든 번뇌와 上煩惱=부수적 번뇌가 攝受=거두어들이는 모든 괴로움의 원인=集을 끊고, 

[일체의 번뇌와 상번뇌(上煩惱)를 포함한〔攝受〕 고의 원인인 집(集)을 끊고,] 

滅一切意生身(멸일체의생신) 除一切苦滅作證(제일체고멸작증)

모든 의생신을 멸하며, 모든 괴로움을 멸하는 증득을 얻은 까닭입니다. 

[일체보살이 원력에 따라 몸을 자유자재로 바꿔 중생을 제도하는 의생신을 멸하여 일체의 번뇌가 사라진 열반을 증득하기 때문입니다.]

 

世尊(세존) 非壞法故(비괴법고) 名爲苦滅(명위고멸)

세존이시여, 壞法=존재의 소멸을 괴로움의 소멸이라고 이름하지 않으니,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는 모든 변화를 초월하여 파괴되지 않는 법을 증득하셨기 때문에 일체의 고통을 소멸한 열반을 증득했다고 말한 것입니다.] 

所言苦滅者(소언고멸자) 名無始無作(명무시무작) 無起無盡(무기무진)

이른바 괴로움의 소멸이라고 하는 것은, 비롯함(시작)이 없고, 지음이 없으며, 일어남이 없고, 다함이 없다는 것이니,

[즉 일체의 고(苦)를 멸진하여 열반을 증득한다고 하는 것은 다시는 번뇌가 생기는 시작도 없고, 의식적으로 무엇을 한다는 작위도 없으며, 또한 번뇌가 사라졌으므로 고통이 생겨나지도 않기 때문에 부처님의 완전한 지혜에서 나오는 위력은 다함이 없습니다.]

離盡常住(이진상주) 自性淸淨(자성청정) 離一切煩惱藏(일일체번뇌장)

다함을 여의고 항상 머물러서, 自性=제 성품이 청정하여 온갖 번뇌장을 여읜 것입니다.

[그리고 부처님은 궁극의 경지인 열반에만 안주하지 않으시고, 중생 교화를 위해 사바세계에 항상 머물고 계시는 것입니다. 본래 누구나 갖추고 있는 자성(自性)은 청정하여 일체 모든 번뇌로부터 완전히 떠나 있습니다.]

 

[아라한은 여래와 같이 온갖 고통의 원인과 온갖 의생신을 멸하고 고통이 소멸하는 깨달음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일이 끝나지 않은 것입니다. 그렇다고 괴로움을 받는 존재(법)가 파괴된다고 해서 괴로움이 소멸되는 것은 아니라고 설합니다. 쉽게 말해서 괴롭다고 자살한다고 해서 그 괴로움이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괴로움의 업연은 완전한 소멸, 열반을 증득하지 않는 이상 끝없이 윤회의 사슬에 얽혀 유전하는 것입니다.-혜총스님,불교신문]

 

世尊(세존) 過於恒沙不離不脫不異(과어항사불리불탈불리)

세존이시여, 항하 강의 모래보다 많으며, 不離=떠나지도 않고, 不脫=벗어나지도 않으며, 不異=다르지 않으며,

[세존이시여, 비록 중생의 마음이 갠지스강의 모래알 보다 더 많은 무수한 번뇌를 떠나지 못하고 그 번뇌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지만, 번뇌로 가득찬 마음과 청정한 자성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닙니다.] 

不思議佛法成就(불사의불법성취) 說如來法身(설여래법신)

생각할 수도 없는 불법을 성취하심을 여래의 법신이라 설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중생의 인식으로는 헤아릴 수 없는 불가사의한 불법(佛法)이 중생의 마음에 모두 갖추어져〔成就〕있는 것을 여래의 법신〔如來藏〕이라 말하는 것입니다.]

[법신은 부처님이 설한 법의 보편성, 확실성을 주체화한 것으로서 그것은 법성(法性), 진여(眞如)라고 해도 좋다. 따라서 보편성, 확실성 있는 법성, 법신은 어느 특정한 한정을 갖지 않으므로 동체일미(同體一味)의 내용을 갖는 것이다(不異). 동체일미이기 때문에 차별이나 분리는 없다(不離). 그 법성, 법신은 영원히 불변의 진리이기 때문에〔不脫〕, 우리 인간들이 상식으로는 사의(思議)할 수 없는 세계〔不思議〕인 것이다.

인간은 저마다의 생활체험을 가졌으며 그로부터 생기는 인생관, 생활환경에도 서로 다름이 있다. 이 생활체험은 사람에 따라서 다르기 때문에 그 모습도 천차만별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지만 똑같이 여래장을 가지고 있다는 것, 그 여래장을 발굴하여 깨달음의 결과로서의 법신 그 자체에 귀일했을 때에는 천차만별이라는 모습은 모두 사라지고 일여평등(一如平等)으로 되는 것이다.-혜경스님, 제주불교신문]

 

世尊(세존) 如是如來法身不離煩惱藏(여시여래법신불리번뇌장) 名如來藏(명여래장)

세존이시여, 이러한 여래의 법신은 번뇌장을 여의지 아니하였으므로 여래장이라 이름하는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이와 같이 여래 법신이 중생의 번뇌[煩惱障]를 떠나지 않은 것을 여래장이라고 합니다.]

 

[법신이 번뇌를 떠나지 않고 더불어 있는 상태가 여래장이다. 따라서 여래장이란 말은 번뇌에 덮여 있는 중생이 본래의 불성은 그대로 갖고 있음으로 여래를 내장해 있다는 뜻에서 하는 말이다. 법신을 성취하면 이 여래장이 법신 그 자체로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에 부처다 중생이다 할 것이 없이 모든 장애를 벗어나므로 여기에서는 해탈이라 할 것도 없는 불가사의한 것이라고 말했다. 지음이 없는 네 가지 거룩한 진리(無作四聖諦)를 증득한 부처님의 경계가 이승들과 다르다는 것을 이렇게 설명했다.
중생이 비록 번뇌를 가지고 있지만 여래장(如來藏)은 본래 번뇌의 창고(煩惱藏)가 아니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중생을 번뇌의 존재로 보지만 번뇌는 본래 공하여 여래장 안에서는 번뇌의 역할이 없다는 뜻이다. 그래서 여래장을 공(空)의 뜻으로 보아 공여래장(空如來藏)이라 한다. 물론 여래장이 한량없고 불가사의한 불법을 갖추고 있다는 면에서는 불공여래장(不空如來藏)이라고 한다.
보통, 번뇌를 극복하는 것을 수행이라 한다. 수행에는 번뇌의 장애가 있다. 몸과 마음을 교란시키는 것이 번뇌다. 이 번뇌로 말미암아 선정에 들어가지 못하며 본래의 자기 마음으로 돌아가지 못한다고 한다. 이 번뇌가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을 만들어 ‘나’에 집착하는 것이 아집이다. 변계소집성이란 실체가 없는 것을 실체가 있다고 생각하는 견해를 말한다. 길가에 떨어진 새끼를 뱀이라고 착각하는 경우다. 번뇌장이 끊어질 때 아집(我執)이 없어진다고 한다. 또 하나의 장애로 소지장(所知障) 있는데 이는 아는 것이 장애가 된다는 뜻이다. 올바른 견해가 아닌 알음알이로 분별을 일삼아 정견(正見)을 가지지 못하고 결국 무지의 상태가 되고 마는 것이다. 소지장 때문에 법집(法執)을 일으킨다고 한다. 따라서 소지장을 끊으면 법집이 없어진다.
'원각경'에서는 두 가지 장애를 이장(理障), 사장(事障)이라 하였다. 이장(理障)이란 '승만경'에서 말하는 번뇌의 장애처럼 바른 앎(正知)과 바른 견해(正見)을 막아 본각진여를 보는 것을 장애하기 때문에 이장이라 하였다. 사장(事障)은 탐(貪), 진(瞋), 치(痴), 만(慢), 의(疑) 등의 번뇌 때문에 생사의 세계에 끊임없이 윤회하여 열반에 이르는 것을 장애하는 것을 말한다.
'승만경'의 이 대목에서는 여래장은 번뇌의 장애를 떠나지 않는다 하여 번뇌 속에서도 여래장은 여래장일 뿐이며 이것이 여래의 법신이라 하였다. 번뇌의 장애를 떠나지 않는다는 것은 번뇌가 있어도 여래장 자체가 오염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마치 금이 불순물과 섞인 광석 속에 있어도 순금의 금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여래장 사상의 핵심 이야기는 여래장이 중생이 생사에 윤회하는 원인이 되지만 동시에 열반의 원인이 되므로 중생의 가치를 열반 쪽에서 보는 관점을 부각시키고 있는 것이다.-지안스님 현대불교신문]

 

[법신은 곧 여래, 부처님입니다. 이 부처님이 번뇌의 덩어리를 여의지 않았다는 것은 곧 번뇌즉보리(煩惱卽菩提), 번뇌 그대로가 곧 보리요. 생사즉열반(生死卽涅槃), 생사의 경계가 곧 열반이라는 말입니다. 탐·진·치 등의 번뇌, 그 당체는 깨달음을 성취하는 보리입니다. 이 보리의 법성은 곧 번뇌의 성품 위에 서는 것입니다. 번뇌는 분별하는 성품이라 그 성품이 공(空)함을 볼 때 번뇌는 곧 보리가 되는 것이니 번뇌를 끊고 말고 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