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만사자후일승대방편방광경 19
24. 歸依第一義者是歸依如來 - 제일의에 귀의하는 것이 여래에의 귀의
世尊(세존) 如來無有限齊時住(여래무유한제시주)
세존이시여, 여래는 한량없는 시간 동안 머무시며,
如來應等正覺後際等住(여래응등정각후제등주)
여래, 응공, 등정각은 後際=끝없는 미래와 같이 머무시니,
如來無限齊大悲(여래무한제대비) 亦無限齊安慰世閒(역무한제안위세간)
여래는 한량없으며, 크게 자비로우심=大悲 또한 한량없으며 또한 세간을 편안하게 위로하십니다.
[여래는 한제(限齊), 즉 한계(限界)가 없다고 하며 귀의(歸依)의 제일의(第一義)는 여래에게 귀의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의 의미하는 바는 여래(如來)는 시간적(時間的), 공간적(空間的)인 한정(限定)을 받지 않으며, 대비(大悲)에도 한계(限齊)가 없이, 이 세간의 일체중생(一切衆生)을 애민(哀愍)하므로 그 여래에 귀의하는 것이 귀의의 요체(要諦)라고 하는 것이다-혜경스님]
[여래는 무한한 시간 속에 항상 머문다고 설한 것은 진리의 영원성을 의미한다. 진리는 어느 한 곳에만 옳다는 상대성이 아닌 절대성이다. 그리고 끝없이 확장되는 시공의 무한성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자비는 영원하고 중생은 언제 어느 세계에서나 구원받고 제도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불승(佛乘)의 본래 모습이다.-혜총스님]
無限大悲(무한대비) 無限安慰世閒(무한안위세간)
한정이 없는 자비로 한정이 없는 세간을 위로하시니,
作是說者是名善說如來(작시설자시명선설여래)
이러한 설을 하는 이를 이름하며 여래를 잘 설하는 것이라하며,
若復說言無盡法(약부설언무진법) 常住法(상주법) 一切世閒之所歸依者(일체세간지소귀의자)
만약 다시 ‘다함이 없는 법과 항상 머무는=상주하는 법은 모든 세간의 귀의할 바이라'고 설한다면
亦名善說如來(역명선설여래) 是故於未度世閒(시고어미도세간) 無依世閒(무의세간)
또한 이름하여 잘 설하는 것이라 하며, 그러므로 여래는 아직 제도를 얻지 못한 세간과, 의지할 데 없는 세간에 대하여
與後際等(여후제등) 作無盡歸依(작무진귀의) 끝없는 미래=後際와 같이 다함이 없는 귀의와
常住歸依者(상주귀의자) 謂如來應等正覺也(위여래응등정각야)
상주하는 귀의가 되는 이를 일컬어 이른바 여래, 응공, 등정각이라 합니다.
[삼보 중의 불보(佛寶) 즉 여래(如來)․응공(應供)․정등각(正等覺)을 파악하는 것이지만, 법(法)과 승(乘)에 대해서는 각각 1불승(一佛乘), 3승중(三乘衆) 즉 성문승(聲聞乘)․연각승(緣覺乘)․보살승이라고 설한다. 일승도(一乘道)의 교법(敎法)은 법신(法身)을 증명하는 것을 구경(究竟)으로 하는 것이므로, 구경의 법신을 얻었으면 그 위에 다시 1승도의 교법을 설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3승중(三乘衆)은 근본번뇌(無明住地)를 끊지 못했으므로 공포(恐怖)를 갖는 것이며, 세존에 귀의함에 의해서 무상정등각(無上正等覺)으로 향해서 전진한다. 더욱이 1승 진실(一乘眞實)․3승방편(三乘方便)이라고 하는 『법화경(法華經)』 이래(以來)의 사상(思想)에 의해서 교법인 법(法)과 3승중인 승(僧)에게 귀의하는 것은 여래에 귀의하는 것에 귀일(歸一)한다. 여래가 없으면 1승법(一乘法)도 3승중(三乘衆)도 없는 것이 되는 것이다.-혜경스님]
法者卽是說一乘道(법자즉시설일승도) 僧者是三乘衆(승자시삼승중)
법이라 함은 곧 一乘=하나의 길이고 승이라 함은 三乘=세 가지의 대중을 말하는 것이니,
此二歸依非究竟歸依(차이귀의비구경귀의) 名少分歸依(명소분귀의)
이 두 가지에 귀의함은 궁극적인 귀의가 아니므로 少分歸依=부분귀의(불완전한 귀의)라 이름하니,
何以故(하이고) 說一乘道法(설일승도법) 得究竟法身(득구경법신)
왜냐하면, 일승의 법을 설하는 것은 궁극적인 법신을 얻는 것이며,
於上更無說一乘法身(어상갱무설일승법신) 그 외에 다시 일승의 법신을 설하지 아니하였으며,
三乘衆者有恐怖(삼승중자유공포) 歸依如來(귀의여래)
삼승의 대중들은 공포가 있으므로 여래에게 귀의하여
求出修學向阿耨多羅三藐三菩提(구출수학향아뇩다라삼막삼보리)
벗어나기 위하여 修學=도를 닦아, 위없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향하는 것입니다.
是故二依非究竟依(시고이의비구경의) 是有限依(시유한의)
그러므로 이 둘에 귀의하는 것은 궁극적인 귀의가 아니며 한계가 있는 귀의이니,
若有衆生(약유중생) 如來調伏歸依如來得法津澤(여래조복귀의여래득법진택) 津 나루 진, 澤 못 택,
만약 어떤 중생이 여래에게 조복하여 여래에게 귀의하면, 불법의 은혜를 얻게 되고
生信樂心歸依法僧是二歸依(생신락심귀의법승시이귀의)
불법을 믿는 즐거움의 마음을 내어 법과 승에 귀의한다면,
非此二歸依是歸依如來(비차이귀의시귀의여래)
이는 그 둘에 귀의하는 것이 아니고, 곧 여래에게 귀의하는 것이 됩니다.
[참답고 청정한 나로서의 즐거움이 항상 머무는 상락아정(常樂我淨)의 네 가지 덕을 지니고 있는 것이 열반이요, 즉 구경의 불승이다. 그러므로 부처님은 이런 열반의 세계를 알려주시고, 보여주시며 증득하도록 팔만사천의 무궁무진한 경전을 통해 법의 방편을 설하신다. 그리고 성문 연각 보살의 삼승을 방편으로 보이시기도 한다. 이 법이라는 일승과 삼승은 그 이름이 일승이요, 삼승이지 곧 여래에 귀의함과 같다. 따라서 부처님께서 중생의 근기에 맞추어 설하신 경전의 말씀에 의지하여 일승의 법신으로 나아가거나, 또 홀로 선정을 닦거나, 혹은 십이연기의 이치를 체득하거나, 보살행을 닦는다 하더라도 그 모든 탈 것들은 대승의 길로서 궁극적으로 향하는 곳은 일승의 법신이요, 제일의라는 것이다.]
歸依第一義者是歸依如來(귀의제일의자시귀의여래) 此二歸依第一義(차이귀의제일의)
왜냐하면, 제일의에 귀의하는 것이 곧 여래에게 귀의하는 것이니, 이 두 가지에 귀의하는 것과 제일의는
是究竟歸依如來(시구경귀의여래) 何以故(하이고)
구경에 여래에게 귀의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無異如來無異二歸依(무이여래무이이귀의) 如來卽三歸依(여래즉삼귀의)。
여래는 두 가지 귀의와 다르지 않으므로, 여래는 곧 삼귀의가 되기 때문입니다.
何以故(하이고) 說一乘道(설일승도) 如來四無畏成就師子吼說(여래사무외성취사자후설)
왜냐하면, 일승의 도를 설하는 것은, 여래께서 四無畏=네 가지 두려움 없음을 성취하여, 사자후로 설하시는 것이니,
若如來隨彼所欲而方便說(약여래수피소욕이방편설) 卽是大乘無有三乘(즉시대승무유삼승)
만일 여래께서 그들의 욕망을 따라 방편으로 설하신 것이라면 곧 대승이며 삼승이 없는 것이니,
三乘者入於一乘(삼승자입어일승) 一乘者卽第一義乘(일승자즉제일의승)
삼승이 일승에 들어가는 것이며, 일승이라는 것은 곧 제일의의 승(길)이 되는 때문입니다.
제일의 [第一義]= 근본이 되는 첫째 의의
[부처님께서 저희들의 욕망을 살펴서[隨] 교묘한 수단[方便]으로 법을 설한다면 그것이 바로 대승(大乘)의 가르침일 뿐 방편으로서의 삼승(三乘)은 진실이 아닙니다. 즉 방편으로써 삼승을 설한 까닭은 결국 모든 중생이 최고의 깨달음을 향한 일승(一乘)에로 나가게 하기 위함입니다. 따라서 위에서 말한 일승이란 완전한 진리의 세계인 제1의승(策一義乘)입니다.」
참으로 여래의 그 때 그 곳에 응해서 설한 방편의 가르침은 1승에 모두 포섭되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법화경(法華經) 이래(以來)의 사상(思想) ‘1승진실(一乘眞實)․3승방편(三乘方便)’이 지금 이 『승만경(勝鬘經)』에서 훌륭하게 결실(結實)을 맺은 것을 알 수 있다.-혜경스님]
[사무소외(四無所畏)란 여래가 두려운 생각이 없는 자신감의 힘으로 설법하시는 네 가지 위신력을 말하며
①정등각무소외(正等覺無所畏) “나는 일체법(一切法)을 평등하게 깨달아 다른 이의 힐난을 받지 않는다”는 자신감,
②누영진무소외(漏永盡無所畏) “나는 일체의 번뇌를 모두 끊어서 밖으로부터 오는 곤란을 두려워 않는다”는 자신감,
③ 설장도무소외(說障道無所畏) “나는 깨달음에 장애가 되는 악법(惡法)을 모두 말했기에 다른 이의 비난이 두렵지 않다”는 자신감,
④ 설출도무소외(說出道無所畏) “나는 괴로움의 세계에서 벗어나 해탈(解脫)에 이르는 길을 모두 말해서 다른 이의 비난이 두렵지 않다”는 자신감의 힘이다.
이런 절대적인 자신감으로 여래께서 사자후하시는 것이니 일승(一乘)이 제일의(第一義)요, 가장 수승한 도리, 구경의 진리, 최승진실(最勝眞實)의 도리이다.부산 감로사 주지]
[승(乘, Yana)'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실어나르는 수단이요, 둘째는 운송해야 할 대상이다. 실어 나르는 수단에서 볼 때, 대승은 보리심으로써 주요한 인(因)을 삼고 육바라밀로써 수행의 방편을 삼는다.
이러한 수행 방편은 대승의 공통된 길이다. 비록 대승 가운데 중관(中觀)과 유식(唯識) 두 종파의 지견이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그렇다고 두 파가 승(乘)이 다른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승의 구별은 방편에 의한 것인데, 중관과 유식의 수행 방편에는 다른 구별이 없기 때문이다. 둘 다 타인을 이롭게 하기 위한 보리심을 발하고, 이러한 마음에 수순하여 수행하는 것이다. 중관(中觀)에서 보여주는 '미세한 법무아'의 도리에 깊이 상응하여 계합하는 사람은 대승의 바른 근기의 수행자라고 한다.또 대승 속에 금강승(金剛乘), 곧 밀교는 네 부파로 나누어지지만, 이들 또한 이타의 원을 발하는 것을 인으로 삼고, 육바라밀로써 수행법을 삼고 있다.
부처님께서는 교리와 필요로 하는 바가 다른 것을 살펴 여러 가지 가르침과 서로 다른 승(乘)의 길을 설해 놓으셨다.
이와 같이 다른 교리와 승이 다양하게 출현하게 된 것은 부처님께서 가깝고 먼 파벌을 조성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법을 들을 수 있는 근기와 성향과 능력이 모두 다르기 때문에 각각의 수행자에게 계합되는 다른 수행법을 전수하신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설법을 하실 때 아직 전혀 성불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에게는,'네가 부처의 과위를 성취할 수 있다'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다만 이러한 수행자들이 받아들여 그가 실천할 수 있는 수행법만을 설해 주셨다.
그야말로 부처님께서는 대기설법(對機說法)을 하셨는데, 비록 그 설법에서 분명하게 '부처의 과위를 증득할 수 있는 방편'이라고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결국에는 최고의 깨달음은 부처의 지위에 오르게 하는 방편들이었다.
부처님께서 세간에 법을 펴신 본래 뜻은 일체 중생으로 하여금 다 부처의 지혜를 성취케 하고자 함이었으므로 이러한 지혜를 성취할 수 있는 방편은 다 일승(一乘)에 속하는 것이지 이승(二乘)이 아니다. 부처님께서는 절대로 성불할 수 없는 승으로써 유정중생들을 인도하지 않으셨다. 일체중생들로 하여금 다 부처의 지위에 안주하도록 하기 위해 임시 방편으로 여러 가지 다른 승을 보여주신 것이다.
물론 누군가는 다음과 같이 질문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미륵보살께서는, '대승을 수지할 수 있는 근기를 가진 사람은 비록 지옥에 떨어진다 하더라도 이것이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장애가 될 수가 없다. 그러나 오직 자신만의 이익을 구하는 소승의 길로 물러날 때는 불과에 이르는 데 막대한 장애가 일어난다.'고 하셨다. 그러므로 미륵보살이 말한 바와 같이 수행자가 만약 소승의 마음을 일으키면 그 장애의 정도가 지옥에 떨어지는 것보다 클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소승의 길 역시 부처의 지위를 성취할 수 있는 방편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이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답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대승을 수행할 수 있는 근기를 가진 자가 대승을 버리고 소승을 닦는다면 반드시 성불하는 데 장애가 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소승을 닦기를 좋아하는 모든 사람들이 반드시 부처의 지위를 성취하는데 장애가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성불의 길을 수행할 수 있는 자가 대승의 방편을 포기하였을 때만 해당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반드시 각각의 상황에 따라 판단해야 정확하다고 하겠다."
(위 말씀의 뜻은, 어떤 사람은 소승불교에 심취하여 배우다가 대승불교로 건너온다는 의미입니다. 이런 분들이 꽤 되시죠. 그리고 또 확고한 신념으로 아라한을 목적으로 한 소승불자도 있다는 뜻 입니다.)
소승은 대승의 일부분이 아니다. 성불의 길에 이르는 가행(加行) 단계일뿐, 정행(正行)인 대승의 길은 아니다. 대승이라야만 비로소 원만히 성불할 수 있는 길을 구족한다. 대승과 소승 사이에는 원만함과 원만치 않음의 차별이 있기 때문에 고하(高下)의 차이가 생겨나는 것이다.
여기서의 <고하>는 제도하는 중생의 숫자를 말합니다. <고하>라는 번역보다는 <다소>라고 하는게 낫겠죠.
결코 소승은 구경의 요의승(了義乘)이 아니다. 요의승은 '사람이 다 불성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원만한 깨달음을 성취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중생들이 다 그대로 불성을 구족하고 있다'는 가르침은 불과를 증득할 수 있는 진실한 인(因)인 것이다. -작성자 마하보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