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만경(勝鬘經)

승만사자후일승대방편방광경 15

Skunky 2023. 2. 16. 09:00

20. 得少分涅槃 - 불완전한 열반, 부분적인 열반

 

世尊(세존) 阿羅漢辟支佛最後身菩薩(아라한벽지불최후신보살)

세존이시여, 아라한, 벽지불, 최후신의 보살은 

爲無明住地之所覆障故(위무명주지지소부장고) 무명주지에 덮여 있기 때문에 

於彼彼法不知不覺(어피피법불지불각) 저 여러 가지 법을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며, 

以不知見故(이불지견고) 所應斷者不斷不究竟(소응단자불단불구경)

알지 못하기 때문에 마땅히 끊어야 할 바를 끊지 못하고 구경에 이르지 못하며,

以不斷故(이불단고) 名有餘過解脫(명유여과해탈) 非離一切過解脫(비리일체과해탈)

끊지 못하였기 때문에 허물이 남아 있는 해탈=有餘過解脫이라 이름하며, 온갖 허물을 여읜 해탈이 되지 못하므로 

名有餘淸淨(명유여청정) 非一切淸淨(비일체청정)

업의 잔재가 남아 있는 청정=有餘解脫이라 이름하며, 모든 청정이 아니기 때문에 

名成就有餘功德(명성취유여공덕) 非一切功德(비일체공덕)

업의 잔재가 남아 있는 공덕=有餘功德을 성취하였다 이름할지언정, 온갖 공덕을 성취한 것이 아닙니다.

[유여(有餘)란 무여(無餘)에 대비되는 말로써 번뇌의 잔여, 남음이 있으므로 완전하지 않다는 의미이다.]

以成就有餘解脫(이성취유여해탈) 有餘淸淨(유여청정) 有餘功德故(유여공덕고)

(모든 공덕을 성취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업의 잔재가 남아 있는 해탈, 업의 잔재가 남아 있는 청정, 업의 잔재가 남아 있는 공덕을 이루는 것이며,

知有餘苦(지유여고) 斷有餘集(단유여집) 證有餘滅(증유여멸) 修有餘道(수유여도)

그러므로 업의 잔재가 남아 있는 괴로움=를 알며, 업의 잔재가 남아 있는 괴로움의 원인=을 끊으며, 업의 잔재가 남아 있는 괴로움의 소멸=을 증득하며, 업의 잔재가 남아 있는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닦는 것이니, 

是名得少分涅槃(시명득소분열반)

이를 불완전한 열반(부분적 열반)=少分涅槃을 얻었을 뿐이라고 이름하며,

[열반(涅槃)= 범어 Nirvama를 음사한 말로 적멸(寂滅), 멸도(滅度), 원적(圓寂)이라 번역한다. 때로는 취소(吹消)라고도 번역했는데 바람에 촛불이 꺼지듯이 번뇌의 불길, 혹은 욕망의 불길을 꺼버렸다는 뜻이다.]

得少分涅槃者(득소분열반자) 名向涅槃界(명향열반계)

불완전한 열반을 얻은 이는 열반의 경지를 향하는 것이라 합니다.

 

[이 장(章)은 부처님과 2승(二乘), 대력보살과의 사이에 차이를 구체적으로 검토하고 말하는 항(項)이다. 한 마디로 말한다면 미완성의 깨달음과 완전한 깨달음으로 구별할 수 있을 것이다.
내용을 다시 분류하면 2승 또는 대력의 보살이 얻은 지혜는 (1)완전하지 않고 (2)번뇌를 완전히 끊어 없애고 있지 않으며 (3)또 번뇌를 남기고 있기 때문에 완전한 해탈이 아니며 (4)부분적으로는 청정하지만 완전하게 청정해 있지 않다. (5)모든 공덕을 성취한 것은 아니다. (6)진리의 일부분을 앎에 불과하고 완전하게 진리를 깨닫고 있지 않고 (7)소분(小分)의 열반을 얻었을 뿐 완전한 열반을 얻고 있지 않다 등의 것이 열거된다. 따라서 그들은 진실한 대열반계로 향하는 과정에 있다라고 해설한다.
유여의 고를 알고, 집(集)을 끊고, 멸(滅)을 밝히고[證], 도(道)를 닦는다[修]는 순차로 알게 되고(知), 끊어지고(斷), 밝혀지고(證), 닦아(修)지지 않으면 안 되는 진리이다.  이것은 4성제(四聖諦)의 고․집․멸․도제(道諦)에 대응하는 것이다. 
‘인생은 고(苦)’라고 하는 진리를 완전히 아는 것이 불교 인간관의 출발점이며 동시에 그 귀착점이다. 인생이 고라고 인식할 때 해탈에의 길을 구하게 된다.
인생은 고라고 하는 올바른 인식에서 출발해 그 고는 ‘왜 일어나는 것인가’ 하는 원인을 추구할 때 여기에 미혹한 생존을 있게 하는 무명과 갈애(渴愛)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을 알게 되면 그 무명과 갈애를 끊으려는 작용이 일어난다.
이 번뇌가 끊어 없어진 경지를 열반이라고 하는데 이 경지야말로 심신(心身)의 평온(平穩), 평안(平安)에 직결된 경지이며 그것을 실증하는 것이 불교의 궁극적인 경지가 된다.
이 깨달음, 적정(寂靜)의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서 여덟 가지의 성도(聖道) 8정도 또는 8지성도(八支聖道)가 실천도로 된다.
올바른 견해(正見), 올바른 사색(正思), 올바른 말(正語), 올바른 행위(正業), 올바른 생활(正命), 올바른 노력(正精進), 올바른 기억(正念), 올바른 마음의 통일(正定)의 여덟 가지이다.
네 가지의 진리를 완전히 알았을 때 참다운 완전한 지혜를 얻는 것이나 유여의 고 내지는 유여의 도를 닦는 한, 그것은 얻을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유여의 지, 단, 증, 수란 도대체 어떠한 것인가. 참으로 4제(四諦)를 인식했다면 어떠한 사태를 만날지라도 불퇴전(不退轉), 부동(不動)의 평온을 얻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도리를 알았다 하더라도 그 행동이나 그 사람의 인생 모두에 걸쳐 그 진리가 항상 작용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동요하고 때로는 번뇌에 사로잡히는 존재이다.
2승 또는 대력의 보살은 완전한 깨달음을 목표로 하는 과정에 있는 한, 그러한 상황에 놓여져 있다고 보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그런 사람을 '소분(小分)의 열반을 얻은 사람이라 하고, 열반계(涅槃界)로 향하는 사람이라 이름한다'라고 본문에 있는 것이다.
완전한 열반계란, 열반이란 원래부터 번뇌를 지멸(止滅)한 적정(寂靜)의 경지를 이름 한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입멸하는 것을 열반에 드는 것과 같은 의미로 해석한다. 만일 열반에 드는 것을 죽는 것과 같은 뜻으로 이해한다면 불교는 열반을 궁극의 목적으로 할 때, 죽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되어 버린다. 이로써는 커다란 오해를 불러일으키게 된다.
불교에서 유여, 무여의 두 가지 열반의 동기는 인간이 살아있는 한, 번뇌를 완전히 지멸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육체가 남는 한 유여라고 생각하며 그 열반을 유여의열반(有餘依涅槃)이라 한 것이다.
이에 반해 육체가 멸해 비로소 무여의 열반이 있는 것이라는 것은 본래의 열반무명의 남김 없는 이탐(離貪), 멸(滅)을 열반이라 이름한다라고 하는 아함(阿含)․니카야의 해석과 모순하게 된다.
불교에서 말하는 열반은 도대체 무엇인가. 적어도 대승불교에 이르러서 열반의 해석이 아함․니카야의 열반과 다르게 된 것을 솔직히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또 번뇌를 완전히 끊는 것을 목표로 한 아함․니카야의 초기 불교와 번뇌 즉 보리라고 하는 대승불교의 사고방식의 차이이다.
예를 들면 『법화경』「여래수량품」게송에는 “중생을 제도하기 위한 까닭에(爲度衆生故) 방편으로써 열반을 나타낸다(方便現涅槃). 더욱이 참으로는 멸도치 않고(而實不滅度) 항상 여기에 머물며 법을 설한다(常住此說法).”
산스크리트 본(梵本) 역(譯)에 의하면, “깨달음의 경지를 나타내어 이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을 인도하기 위해, 나는 교묘한 수단을 말한다. 더욱이 그 때, 나는 깨달음의 경지에 들지 않고, 이 세상에서 가르침을 설한다.”(第3)

앞에서는 번뇌를 완전히 끊는 것을 목표로 한 아함․니카야의 초기 불교와 번뇌즉보리라고 하는 대승불교의 사고방식의 차이를 말했는데, 여기서는 석존이 80세에 쿠시나가라(Kusinagara)에서 입멸한 것은 임시로 열반을 나타낸 것이어서 오히려 이 세상에 있어 항상 법을 설하고 있는 모습이야말로 진실한 것이라고 한다.
이 사상을 무주처열반(無住處涅槃)이라 한다. 즉 부처님은 완전한 지혜에 의해서 번뇌장(煩惱障)과 소지장(所知障)을 여의고 있으므로 이 생사의 미혹한 세계에 정체하는 일이 없다. 뿐만 아니라 또한 대비(大悲)를 가지고 일체중생을 구제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열반해 버리는 일 없이 이 미혹의 세계 속에서 활동한다는 사상이다.
불화(佛畵)에 유명한 석가금관출현도(釋迦金棺出現圖)라는 것이 있다. 석존이 입멸해 대열반에 들었으므로 불제자들이 석존의 죽음을 한탄하며 다시 한 번 이 세상에 모습을 나타냈으면 하는 간절히 원한 그 마음을 살피시고 석존이 천천히 관에서 얼굴을 내민다는 그림이다. 만일에 열반이라는 것이 입멸을 의미하는 것만 이라면 부처님과 중생과의 사이에 가로막는 심연(深淵)은 어떻게 넘을 수 있겠는가. (내가 입멸한 후에는 법(法)을 주저(洲渚), 즉 등불로 하라)라고 붓다가 유계(遺誡)하였더라도 그 법을 설하는 부처님이 현실로 지금 이 우리들 곁에 계시면서 「상주차설법(常住此說法)」을 하시는 것에 참으로 일체중생을 제도하지 않고는 그만 두지 않는다는 부처님의 서원에 대한 의의가 있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처님은 열반에 들어 버린 채로 있다면 중생과 연결되는 장소가 없어지므로 「방편현열반(方便現涅槃)」이지 않으면 안 되었다. 무엇보다도 육신은 멸하더라도 법신은 영원히 멸하지 않는다고 하는 불교의 사상에 뒷받침되고 있지만 여기에 열반에 관한 사상적인 전개의 자취를 엿볼 수 있다.
대승불교는 자기만의 깨달음을 목표로 하지 않고 이타행의 완성에 궁극적인 목적을 둔 이상, 대반열반에 들어가 버린다면 부처님은 다시는 이 세상에 출현하지 않는다고 해서는 해결되지 않았던 것이다. 여기에 무주처열반(無住處涅槃)의 사상이 생겨나는 근거가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이리하여 2승 및 대력의 보살은 스스로가 열반을 얻었다고 말하고 있어도 참다운 대승의 열반을 얻었다고는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거기에 소분(小分)의 열반을 얻은 사람을 열반계에 향하도록 한다라고 하는 본문의 이해가 있었던 것이다.-혜경스님]

[아라한이나 벽지불, 최후신 보살의 열반에 대해 완전한 열반이 아니라 일부분만 열반한 소분열반(少分涅槃)이라고 설했다. 아라한 벽지불 대력보살 등 3승은 할 일을 다 마치지 않았고 할 일이 남아 있는 경계라는 것이다. 무사인(無事人)이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무명주지에서 완전히 벗어난 무여열반(無餘涅槃)이 아니라 무명주지에 덮여 있어 무명이 남아 있으므로 끊어야 할 번뇌가 남아 있는 유여열반(有餘涅槃)이라는 것이다. 자기의 수행으로 사바세계의 번뇌를 끊었지만 아직 과거의 업보로부터 받은 근본무명의 몸을 벗지 못한 열반이라는 것이다.
열반은 반열반(般涅槃)·대반열반(大般涅槃)이라고도 하는데 산스크리트 ‘니르바나(nirva)’를 음역한 것이다. 적멸(寂滅)·원적(圓寂) 등으로도 번역하는데 타오르는 번뇌의 불길을 불어 꺼서 생사의 고해를 벗어나는 깨달음의 지혜인 보리(菩提)를 완성한 경지를 뜻한다. 따라서 열반은 불교의 궁극적인 목적이다.
역사적으로 부파불교의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에서는 열반을 실체적인 것으로 보았으나, 경량부(經量部)에서는 열반이란 다만 번뇌를 멸한 상태를 가리키는 것으로 실체가 없는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대승불교의 경전인 <열반경>에서 열반은 상(常)·락(樂)·아(我)·정(淨)의 4덕(四德)을 갖추어야 한다고 보다 적극적으로 해석했다. 열반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생주이멸(生住異滅)의 변화 없이 상주(常住)하기 때문에 ‘’이라 하며, 번뇌가 다하여 괴로움과 즐거움을 초월한 진정한 즐거움의 세계이므로 ‘’이라 하고, 허망한 나인 망아(妄我)를 벗어나 진정한 자아, 진아(眞我)에 도달한 경계이므로 ‘아’라 하며, 염오(染汚)에 덮인 생사의 세계를 여읜 청정한 세계이므로 ‘’이라 한다.
대승불교에서는 이와 같은 4덕을 갖추지 않은 소승의 열반은 유위열반(有爲涅槃)에 불과하다고 비판하고, 이에 대해 4덕을 갖춘 열반을 무위열반(無爲涅槃)이라 하여 이를 최상의 목표로 삼았다. 대승불교 안에서도 종파에 따라 열반에 대한 해석에 차이가 있는데 유식사상(唯識思想)에 근거한 법상종에서는 열반을 본래자성청정열반(本來自性淸淨涅槃)·유여의열반(有餘依涅槃)·무여의열반(無餘依涅槃)·무주처열반(無住處涅槃) 등의 4종의 열반으로 나누어 해석했다.
이중 유여의열반과 무여의열반은 앞에서 설명한 유여열반·무여열반과 같고, 본래자성청정열반은 성정열반(性淨涅槃)이라고도 하는데, 모든 존재가 실상(實相)에 있어서는 진리 그 자체인 진여(眞如)의 이체(異體)라는 절대적 차원에서 열반을 말한 것이며, 무주처열반은 완전한 깨달음을 이룸으로써 번뇌장(煩惱障)과 소지장(所知障)의 번뇌를 모두 여의고 생사의 세계를 벗어났으나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열반의 경지에 머무르지 않고 생사의 세계에서 활동하는 것을 가리킨다.-혜총스님]

 

[이 경은 성문(아라한), 연각(벽지불)의 二乘과 一乘의 차이점으로 그들의 사성제가 서로 다름을 지적하고 있다. 곧 이승이 말하는 苦·集·滅·道의 사성제는 知的인 한계가 있는 진리(有量聖諦)인 반면, 일승이 믿는 여래장과 여래 법신에 대한 가르침이야말로 그러한 한계가 없는 진리(無量聖諦)라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사성제는 각각 作聖諦와 無作聖諦라고도 불리는데, 후자가 참다운 진리인 이유를 이 경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작성제가 한계가 있는 진리인 이유는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것에 의지해서는 모든 苦를 알고, 모든 集(원인)을 끊으며, 모든 滅을 깨닫고, 모든 道를 닦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세존이시여, 有爲생사와 無爲생사가 있으며, 열반도 또한 이와 같아 有餘열반과 無餘열반이 있는 것입니다. 무작성제가 (지적인) 한계가 없는 진리인 이유는 자기 자신에 의지함으로써 모든 苦를 알고, 모든 集을 끊고, 모든 滅을 깨닫고, 모든 道를 닦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 세존이시여, 법을 파괴함으로 해서 고통이 멸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고통의 소멸(이라 불리는 여래의 법신)은 시초가 없고, 作爲도 없으며,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으며, 궁극을 떠났으며, 항상 머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본래 깨끗하여(自性淸淨) 일체의 번뇌장으로부터 멀리 떠나 있습니다. (세존이시여 또한) 이 법신에는 갠지스강의 모래알보다도 많은, 분리되지 않은, 불가사의한 佛法(佛性)이 수반됩니다. 세존이시여, 이러한 여래 법신이 번뇌장을 떠나지 않은 것을 여래장이라고 이름합니다.

요컨대 성문·연각 등이 진리로 삼고 있는 작성제가 조건지워진 존재, 곧 有爲法의 소멸을 열반으로 보는 것과 달리, 佛智의 영역인 무작성제는 본래 깨끗하며 常住하는 법신을 통찰하되, 그것이 중생의 현실(번뇌장)을 떠나 있지 않은 모습(여래장)을 보는 지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부증불감경에서 중생계와 열반계를 하나의 세계(一法界)로 본 것과 일치한다. 또한 부증불감경에서 현실적으로 법신이 번뇌에 둘러싸여(在纏) 중생에게 내재되어 있지만, 그 법신이 보살과 여래로 전개되어 나아갈 수 있음을 주장한 것과 마찬가지로 승만경에서도 법신이 번뇌를 초월하여(出纏) 여래가 될 수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앞에서 살펴본 부증불감경이 無明의 지위를 단지 암시적으로 언급한 것과 달리 승만경은 무명·번뇌를 현실적인 존재자로서 인정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승만경은 이승과 여래의 열반을 비교하면서 끊기 힘든 번뇌로서 ‘無明住地’라는 개념을 도입하는데, 범부의 삶이 신체라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채 죽음에 이르게 됨에 대하여(分段死), 성문과 연각 등은 그러한 한계를 벗어나 자유로이 몸을 나타낼 수 있다고 한다(不思議變易死).

그러나 그들이 비록 범부가 느끼는 번뇌와 고통으로부터 자유롭게 되고, 따라서 “다시 미래의 몸을 받지 않는다(不受後有)”라고 선언하더라도, 그들의 열반은 완전한 열반이 못 된다(有餘涅槃)고 설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비록 중생이 윤회하면서 받는 육체적 한계(分段身, bhāgya-kāya)를 벗어나 뜻한대로 태어나는 意生身(manomaya-kāya)을 얻게 되었지만, 그것은 중생이 겪는 생사를 두려워하는 미세한 번뇌로 인해 얻게 된 또 다른 몸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성문과 연각이 얽매여 있는 미세한 번뇌를 승만경 은 무명주지라고 하였다.

승만경에서 무명주지는 모든 번뇌가 생겨날 수 있는 근본 번뇌인 ‘住地번뇌’ 가운데 하나로서 나머지 네 가지 주지 번뇌를 오래 머물게 하는, 가장 근본적인 번뇌로 설명되고 있다. 따라서 승만경은 네 가지 주지 번뇌를 끊더라도 이러한 무명주지는 여래의 지위에 이르러야만 끊을 수 있다고 설한다.

그렇다면 무명주지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승만경은 “성문과 벽지불이 無漏를 다하지 못한 것”을 무명주지라고 할 뿐, 더 이상 구체적인 언급은 없다. 그러나 성문과 벽지불이 ‘두려워하는 바’가 바로 중생의 생사라면, 이들 二乘이 얽매여 있는 무명주지란 결국 열반을 중생계를 떠난 초월적 실재로 보는 집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부증불감경에서 ‘일법계에 대한 바르지 못한 知見’으로 지적한 增減의 二見에 대응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개념은 기신론의 ‘근본불각’ 또는 ‘근본무명’ 개념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만약 기신론의 근본불각(근본무명)이 이와 같이 생사에 대한 두려움, 곧 무위법(열반)에 대한 집착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된다면, 기신론에서의 깨달음은 중생계 내에서의 자비의 실현으로 전개되어야 할 것이다. 이는 기신론 해석분의 ‘分別發趣道相’에서 보살의 수행이 궁극에 이른 證發心에서 “자연히 불가사의한 작용이 있어 온 세계에 (법신을) 나타내어 중생을 이익되게 한다”고 말한 데에서 잘 알 수 있다.

무명주지 개념과 더불어 승만경이 여래장사상사에 기여한 바는 여래장에 空과 不空의 두 가지 뜻이 있음을 천명한 데에 있다. 우선, 이 경은 무명주지가 아라한과 벽지불이 끊을 수 없는 미세한 번뇌인 것과 마찬가지로 여래장 역시 이들이 볼 수 없고, 얻을 수도 없음을 강조하면서, 그러한 여래장을 볼 수 있는 여래의 지혜(如來藏空智)는

⑴ 모든 번뇌로부터 구별되는 청정한 지혜 또는 법신 그 자체인 空여래장,

⑵ 무한하며 불가사의한 佛法또는 법신의 공덕으로부터 결코 분리될 수 없는 不空여래장 두 가지가 있다고 설한다.

이 두 가지는 다음과 같이 기신론의 진여문의 두 가지 뜻을 설정하는 데에도 영향을 주었다.-고승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