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만사자후일승대방편방광경 12
唯有如來得般涅槃(유유여래득반열반) 一切所應斷過(일체소응단과)
오직 여래만이 반열반을 얻었사오니, 온갖 끊어야 할 허물을
皆悉斷滅(개실단멸) 成就第一淸淨(성취제일청정)
모두 끊어 버리고 제일가는 청정을 성취한 까닭이오며,
阿羅漢辟支佛有餘過(아라한벽지불유여과) 非第一淸淨(비제일청정)
아라한이나 벽지불은 남은 허물이 있으므로 제일가는 청정이 아니지만
言得涅槃者是佛方便(언득반열자시불방편)
열반을 얻었다고 말씀하신 것은 바로 부처님의 방편입니다.
唯有如來得般涅槃(유유여래득반열반) 爲一切衆生之所瞻仰(위일체중생지소첨앙)
오직 여래만이 반열반을 얻으시어 온갖 중생들의 우러러 봄이 되어
瞻 볼 첨, 仰 우러를 앙,
出過阿羅漢辟支佛菩薩境界(출과아라한벽지불보살경계)
아라한, 벽지불, 보살들의 경계에서 초월하였사오며,
是故阿羅漢辟支佛去涅槃界遠(시고아라한벽지불거열반계원)
그러므로 아라한과 벽지불은 열반계와의 거리가 멀지만,
言阿羅漢辟支佛(언아라한벽지불) 觀察解脫四智(관찰해탈사지)
아라한과 벽지불이 해탈하는 네 가지 지혜를 관찰하여
究竟得蘇息處者(구경득소식처자) 亦是如來方便有餘不了義說(역시여래방편유여불요의설)
마침내 번뇌가 쉬는 경지=蘇息處을 얻었다고 말씀하신 것 역시 여래의 방편이니, 업의 잔재를 남기는 것이고 궁극적인 뜻을 다 드러내지 못한 가르침=不了議設일 뿐입니다.
蘇 차조기 소, 향할 소, 되살아날 소
[오늘날 불교의 4대 명절 가운데 열반재(涅槃齋)는 석존께서 입멸하신 2월 15일을 추억하는 불사(佛事)로서 의의를 갖는다. 「반열반(般涅槃)」은 산스크리트어 니르바나(nirvana)의 음사인데 팔리어에서는 닛바나(nibbana)라고 한다. 멸(滅)․적멸(寂滅)․멸도(滅度)로 번역하고, 해탈, 마음의 평안을 말한다. 원래는 불을 입으로 불어서 끄는 것, 불을 입으로 불어서 끈 상태로서 번뇌의 불길을 불어서 끄고 깨달음의 지혜, 보리를 완성한 상태를 말한다.
두 종류의 열반에서 성문․연각은 최종적인 열반을 육체가 죽고 없어진 상태, 회신멸지(灰身滅智)한 곳에 얻어지는 것이다. 그것은 죽음에 의해 참다운 열반이 획득되는 것이어서 그 점을 취하게 되면 불교는 죽음에 의해서 얻어지는 열반을 구극(究極)의 목적으로 삼고 있는 것처럼 생각되기 쉽다. 그렇다면 과연 그렇다면 열반이란 그러한 것일까? 육체의 죽음을 의미하는 열반이지 않음은 당연한 일이다.
그것은 다만 부처님께서 방편으로 열반하는 것이라고 한다. 여기에 대승에서의 열반의 이해가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승만경』은 아라한과 벽지불은 아직 참다운 열반으로 떠나는 것은 멀다고 한 이유는
(1)여래는 일체의 공덕을 갖추고 있으나 2승은 갖추지 못했다.
(2)여래의 공덕은 한량없지만 2승의 공덕은 유한(有限)한 것이다.
(3)여래의 공덕은 넓고 크지만 2승의 그것은 사의(思議)할 수 있는 것이다.
(4)여래는 모든 번뇌를 끊어서 청정하지만 2승은 아직 끊지 못한 번뇌를 갖는다.
(5)대열반을 얻은 여래만이 일체중생의 의지처가 되지만 2승은 중생의 의지처가 되지 못한다고 해석하고 있다.
「벽지불(辟支佛)」이란, 산스크리트어의 프라티에카-붓다(pratyeka-buddha)의 음사로서 독각(獨覺), 연각(緣覺)으로도 번역되는데 이것은 역사상 실존(實存) 인물이 아니다.
정설(定說)은 아니지만, 필자의 소견으로는 「초기불교의 아라한은 거의 부처님과 동등하게 번뇌를 여의게 되었으므로, 부처님의 十號에서 응공(應供), 즉 아라한이 있다. 거기서 부처님과 제자들과의 차별이 필요하게 되어, 스승이 있어 깨달은 유사각(有師覺)과 스승 없이 깨달은 무사각(無師覺), 즉 독각(獨覺)이 있게 되었으며, 제자들은 모두 부처님을 스승으로 따라 배웠기 때문에 성문(聲聞)의 유사각(有師覺)이라 했고, 부처님께서는 스승이 없이 홀로 깨달았다고 하여 무사각(無師覺)이 되고 그 깨달은 내용이 연기(緣起)였기 때문에 연각(緣覺)이라고 했지 않나」라고 나름대로 이해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아라한과 벽지불에게는 윤회․다시 태어남으로 이어지는 성질을 가지고 있어 생을 다했다고는 말할 수 없고 해야 할 것을 이루지 못했으며 아직은 가지고 있어서 버려야할 것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에 참다운 열반과는 아주 먼 것이라고 한다.
이것은 2승(二乘)이 자기의 완성만을 목적으로 함에 대해 보살은 자리(自利)와 이타(利他)의 염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그 도달점인 열반도 다른 것이라고 하는 뜻이다.
2승은 번뇌를 끊어서 열반을 획득했다고 스스로는 만족하고 있다고 하는데, 그러나 변하기 쉬운 존재에 깊은 공포의 염을 가지고 있는 이상, 그것은 번뇌가 남아 있기 때문에 진실한 열반이 아니고 여래만이 반열반(般涅槃)했다고 하는 것이 경문의 이해였다. 더욱이 2승의 열반 획득도 실은 여래가 방편으로 시설한 것으로만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혜경스님]
17. 二種死
何以故(하이고) 有二種死(유이종사) 何等爲二(하등위이)?
그 까닭을 말씀드리자면, 두 가지 죽는 것이 있사오니, 어떤 것이 그 두 가지인가 하면,
謂分段死(위분단사) 不思議變易死(불사의변이사)
하나는 육체적 죽음=分段死이고, 다른 하나는 부사의 하게 변화하여 죽는=不思議變易死입니다.
分段死者(분단사자) 謂虛僞衆生(위처위중생)
육체적 죽음=분단사는 허망한 중생을 일컫는 말이요,
[「분단사(分段死)」, 인간은 저마다의 과보를 받고 생존하고 있으므로 그 생존 방식에는 분분단단(分分段段)의 차이가 있다. 신심(身心)이 멸하여 없어진다는 것은 그 생존의 모습인 형태의 크고 작음과 수명이 길고 짧음을 수반하는 신체의 죽음을 의미한다. 즉 구도생활에 들어가지 않은 우리들의 육체의 죽음을 말한다. 계내(界內)의 생사라고도 한다. 「분단사란 허위의 중생」이란, 번뇌가 있는 범부의 죽음을 말한다. 불교에서는 인간은 선(善)․악업(惡業)을 인(因)으로 하고, 번뇌(煩惱)장을 연(緣)으로 한다. 이 세상에 과(果)를 받고 있기 때문에 그 수명(壽命)에는 길고 짧음이 있고, 육체에는 크고 작음 등의 일정한 한계를 갖는 것이라고 한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범부의 신체를 분단신이라 한다. 이 분단신(分段身)을 받고 윤회하는 것을 분단생사라 한다. 결국 사람 제각각의 과보에는 분분 단단의 차이가 있는 것이다.]
不思議變易死者(불사의변이사자) 부사의 하게 변하여 죽는 것은
[아라한이나 벽지불 및 대력의 보살은 번뇌장을 끊었으므로 분단생사를 받지 않는다. 그러나 번뇌는 없지만 분별(分別)이 있는 업(業)을 인(因)으로 하고 아직 끊지 못한 알아야할 바에 대한 장애인 소지장(所知障)을 연(緣)으로 하여 그 과보인 몸, 즉 의생신(意生身)을 받는다. 이 의생신을 가지고 보살의 행을 닦아 불과(佛果)에 이른다고 한다. 그 신체는 보살의 행을 닦는다는 비원(悲願)에 의해서 수명도 육체도 변화 개역할 수 있고, 일정한 한도가 없으므로 변역신(變易身)이라 한다. 이 변역신을 받는 것을 변역생사라 한다.]
謂阿羅漢辟支佛大力菩薩意生身(위아라한벽지불대력보살의생신)
아라한이나 벽지불이나 대력 보살들의 마음대로 태어나는 몸=意生身으로부터
[의생신(意生身), 범어의 마노말야(摩奴末耶)의 번역. 신역에서는 의성신(意成身)이라 한다. 부모가 낳은 육신이 아니고, 생각하는 대로 생기는 몸, 곧 화생신(化生身)이며, 변화신(變化身)이다. 겁초(劫初)의 인신(人身)ㆍ색계신ㆍ무색계신ㆍ중유신(中有身)을 포함한다. 보살은 몸도 마음대로 원력을 따라 나타내고, 그들이 활동하는 환경도 마음대로 나타낸다. 또 그와 같은 의미에서 色界 · 無色界의 天을 意成天이라고도 한다.]
乃至究竟無上菩提(내지구경무상보리)
위없는 보리에 이르기까지를 말하는 것입니다.(궁극적으로 위없는 깨달음입니다)
二種死中(이종사중) 以分段死故(이분단사고)
두 가지 죽음에서 육체적 죽음이 없어졌으므로 말미암아
說阿羅漢辟支佛智(설아라한벽지불지) 我生已盡(아생이진)
아라한과 벽지불의 지혜를 일러서 ‘나의 생은 이미 다했다’=我生已盡(태어남을 다하였다)을 설하며,→고제(苦諦)의 지혜
得有餘果證故(득유여과증고) 說梵行已立(설범행이립)
업의 잔재가 남음이 있는 과=有餘果]=를 증득하였으므로 청정한 행=梵行이 已立=이미 완성했다고 설하며,→멸제(滅諦)의 지혜
[원효소에서 '성스러움(梵, ārya)은 멸제의 청정한 특성을 이름하기 때문이고, 성스러운 행을 현증하므로 梵行이라 한다.'에서 ‘성스러움’이라는 글자가 내포하는 의미를 멸제의 청정한 특성이라 풀이한 다음, 그것을 통해 범행이란 청정한 멸제를
체험적으로 현증하는 것이라 해석한 것이다.-김홍미]
凡夫人天所不能辦(범부인천소불능판) 七種學人先所未作(칠종학인선소미작)
범부와 인간 천상의 사람의 과보를 얻을 중생은 능히 판단하지 못하며,
아라한이 되기 전의 일곱 단계 성자=七種學人들은 앞서 끊지 못하였던
虛僞煩惱斷故(허위번뇌단고) 說所作已辦(설소작이설)
허망한 번뇌를 끊었으므로 所作=지어야 할 바를 已辨=모두 마쳤다고 설하며,→도제(道諦)의 지혜
阿羅漢辟支佛所斷煩惱(아라한벽지불소단번뇌) 更不能受後有故(갱불능수후유고)
아라한과 벽지불이 끊은 바 번뇌는 다시 後有=미래의 윤회하는 삶을 받지 않으므로
說不受後有(설불수후유)
미래의 윤회하는 삶을 받지 않는다=不受後有라고 설하는 것이나, →집제(集諦)의 지혜
非盡一切煩惱(비진일체번뇌) 亦非盡一切受生(역비진일체수생)
그러나 모든 번뇌를 다 끊은 것도 아니며, 또한 다시 受生=모든 생(윤회하는 삶)을 다한 것도 아니기 때문에
故說不受後有(고설불수휴유) 미래의 윤회하는 삶을 받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니,
何以故(하이고) 有煩惱是阿羅漢辟支佛所不能斷(유번뇌시아라한벽지불소불능단)
왜냐하면, 어떤 번뇌는 아라한이나 벽지불로는 끊지 못할 번뇌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단에서는 분단생사와 변역생사라고 하는 두 가지의 생사를 중심으로, 아라한․벽지불이라는 2승의 해탈은 분단생사만을 벗어난 것이기 때문에 불완전한 것이라고 말한다.
이와 같이 아라한․벽지불은 범부의 분단생사는 여의었으나 소지장, 즉 알아야할 바에 대한 장애를 끊지 못했기 때문에 지혜를 은폐하고 있는 소지장을 끊고 부처님의 지혜에 근접하는 과정에 있다. 따라서 변역생사를 여의지 못했다고 하는 것이다. 그런 아라한․벽지불의 2승이 분단생사를 여의었을 뿐 변역생사를 여의지 못하는 한,
(1) 나[我]의 생존(生存; 생사의 미혹)은 다했다(我生已盡)라는 고제(苦諦)의 지혜도 분단생사를 다했음에 불과할 뿐이고, (2) 자기는 청정한 행을 완성했다고(梵行已立)고 하는 멸제(滅諦)의 지혜도 번뇌장을 끊었을 뿐 소지장은 의연하게 남아 있으며,
(3) 해야 할 것을 해서 마쳤다(所作已作․所作已弁)라고 하는 도제(道諦)의 지혜도 범부나 수행해도 아라한이 될 수 없는 7종류의 수행자가 되지 않은 것을 지었을 뿐이며 또
(4) 이미 윤회 재생해 다음 세상에 다시 태어나는 몸을 받는 일이 없다(不受後有)고 하는 집제(集諦)의 지혜도 분단생사에 한할 뿐이다. 그것들은 부처님의 해탈과 비교하면 커다란 간격이 있다라고 말한다.
따라서 아라한․벽지불은 번뇌장을 끊고 있는 점에서는 후유를 받지 않는다고 해도 별일이 없지만 모든 번뇌, 소지장을 완전히 끊지 않은 한, 참으로 불수후유(不受後有)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아라한․벽지불은 자기 스스로는 해탈해 다시는 미혹한 생존으로 되돌아오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그들이 모든 번뇌를 완전히 끊은 것이 아닌 한, 참다운 해탈이 아니다 라고 경문은 말한다.
그에 관해서는 전단(前段)에서 아라한․벽지불은 열반을 얻었다고 말해도 그것은 불, 여래의 방편일 뿐 참다운 열반은 여래만이 있다고 하는 이해와 상응(相應)하는 것이다.
「부사의(不思議) 변역사(變易死)」란 아라한이나 벽지불, 대력(大力)의 보살들은 구도생활에 들어가 있으므로 계내(界內)의 생사, 즉 분단사(번뇌가 있는 죽음)를 면하여 3계(三界)를 나오지만 아직 남기고 있는 생사가 있다고 한다. 이것을 변역생사(變易生死), 변역사(變易死)라고 한다.
수명도 육체도 자유로 변화, 다시 바꿀 수[改易] 있으므로 일정한 한계가 없는 것을 변역사라고 한다. 이것이 있음에 의해서 차츰 부처님의 지혜에 가까이 갈 수 있다고 하는 변역사를 받는 사람은 번뇌의 장애를 끊은 아라한․벽지불과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자진해서 생사의 세계에 머무는 큰 능력을 가진 보살이다라고 한다. 다만 무성(無性)과 성문, 연각 및 부정(不定)의 2승도(二乘徒)를 분단생사에 들어간다[五性 各別]고 하는 입장(法相唯識)도 있다.-혜경스님]
[분단생사는 중생들이 육도를 윤회하면서 유루(有漏)의 선악업을 인(因)으로하고 번뇌의 장애(煩惱障)을 연(緣)으로 하여
욕(欲界) ․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의 삼계(三界) 안에서 거친 과보를 받데 되는데, 그 과보가 수명의 장단이라든지 신체의 대소 등 일정한 한계를 갖고 있기 때문에 분단(分段)이라 한다. 이러한 분단을 받아 윤회하는 것을 분단생사라 하고, 변역생사(變易生死)는 삼계 안에서 윤회하는 몸을 여의고 성불할 때까지 자기의 수행정도를 따라 삼계 밖에서 받는 생사를 말한다. 미계(迷界)를 벗으나 오계(悟界)이르기까지의 사이에 해당하는 생사를 말하며, 몸의 형태나 수명에 한계가 없는 생사이다. 번뇌가 없는 선정과 서원의 힘에 의해 미묘한 작용이 불가사의하게 일어나기 때문에 부사의변역생사 (不思議變易生死)라고도 한다.
성문이나 벽지불 대력보살 등은 변역신의 상태에서 생사를 받는, 이 변역생사는 의생신으로써 생사를 받기 때문에 분단생사와 다르므로 실질적인 생사가 아니라고 볼 수도 있다.ㅡ지안스님]
[분단사(分段死)의 분단(分段)은 분한(分限)과 형단(形段)이란 뜻으로 범부는 각각 지은 업의 인과에 따라서 신체에 크고 작으며 가늘고 굵은 형단이 있고, 목숨에 길고 짧은 분한이 있어서 그렇게 욕계(欲界)·색계(色界)·무색계(無色界)의 삼계(三界) 안에서 나고 죽기 때문에 분단생사(分段生死)라 한다.
한편 변역생사(變易生死)는 삼계 안에서 무수히 나고 죽는 윤회하는 몸을 여읜 뒤로 성불하기까지, 미계(迷界)를 벗으나 오계(悟界)이르기까지 성자(聖者)가 받는 삼계 밖의 생사로서 몸의 형태나 수명에 어떤 한계가 없는 생사이다. 이를 번뇌가 없는 선정과 서원의 힘에 의해 미묘한 작용이 불가사의하게 일어나기 때문에 부사의변역생사(不思議變易生死)라고도 한다. 아라한이나 벽지불이나 대력보살들이 마음대로 태어나는 몸, 즉 자기의 뜻대로 생각하는 대로 생기는 몸 - 의생신(意生身)이요, 의성신(意成身), 화생신(化生身)의 몸을 받아 보살행을 닦아 부처님의 경계에 이르고자 정진하다가 죽음으로써 분단생사와 다름을 알 수 있다. 이 부사의변역생사를 뛰어넘어야 마침내 불과(佛果)를 이루는 것이다.
아라한과 벽지불 등 2승은 자기 자신만의 깨달음을 성취하고자 수행해왔기 때문에 설령 스스로 번뇌를 끊어서 열반을 획득했다고 만족하더라도 참다운 무여열반을 이루지 못한다고 한다. 그 까닭은 탐욕과 성냄, 어리석음 등의 번뇌가 알아야 할 바(所知)의 참다운 실상을 알지 못하게 하는 장애, 소지장(所知障)을 끊지 못했기 때문에 두려운 마음이 남아 있고, 할 일이 남아있으며 대승의 공덕을 쌓지 못했기 때문이라 한다. 따라서 아라한과 벽지불 등 2승은 부처님과 같이 일체중생의 의지처는 되지 못하는 것이다. -혜총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