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승기신론 正宗分(정종분)의 解釋分(해석분) 30
• 染法․淨法(염법정법)의 斷․不斷(단부단)
復次染法(부차염법) 從無始已來(종무시이래) 熏習不斷(훈습부단)
다시 염법은 시작 없는 때로부터 오면서, 훈습하여 끊어짐이 없으니,
乃至得佛後則有斷(내지득불후즉유단)
나아가 불과를 체득한 후에 (깨달은 뒤에야) 곧 단절한다.
淨法熏習(정법훈습) 則無有斷(즉무유단) 盡於未來(진어미래) 此義云何(차의운하)
정법의 훈습은 단절함이 없이, 미래에 있어서도 다하여 가니, 이 뜻이 무었인가?
以眞如法常熏習故(이진여법상훈습고) 妄心則滅(망심즉멸)
진여법으로 항상 훈습하기 때문이다. 허망한 마음=妄心이 곧 사라지면
法身顯現(법신현현) 起用熏習故無有斷(기용훈습고무유단)
법신이 나타나 용훈습을 일으키기 때문에 단절함이 없다.
[염법은 무시이래로 끊어짐이 없이 이어져오지만 결국은 끊어진다. 그러나 정법은 무시이래로 이어져 미래에도 다함이 없다. 그것은 불생불멸이다.-물처럼바람처럼]
[여기에서는 염법훈습(染法熏習)과 정법훈습(淨法熏習)이 언제까지 계속되는가를 살펴보면, 근본무명을 바탕으로 한 염법훈습은 성불될 때까지는 무시이래(無始以來) 그 훈습이 단절되지 않는다. 이에 대하여 진여의 훈습력은 영원히 미래를 다하여서도 단절됨이 없다. 다시 말하면 염법훈습은 영원한 과거로부터 미래에 이르기까지 그 훈습이 끊임이 없이 계속되다가 깨달아 부처가 되면 즉시 단절되는 것이지만, 진여훈습은 부처가 된 후에도 끊임없이 영원히 계속된다. 여기에서 진여훈습도 성불이 목적이었다면 성불한 후에는 단절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라는 의문이 제기된다. 미망(迷妄)이 있을 때는 그 미망을 파(破)하기 위하여 깨달음의 지혜가 일어난다.
정법훈습은 정화(淨化)시키는 힘을 말하는 것이므로, 이 힘은 무명(無明)이 존재하는 한, 그 무명을 파하기 위하여 작용하는 것이지만, 무명이 소멸된 후에까지 무슨 이유로 정법훈습(淨法熏習)이 계속되어야 하는가의 의문이다. 그 이유에 대하여 '기신론'은 무명이 소멸되어 성불하였다 하더라도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정법훈습이 일어나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무명이 멸하여, 불타의 근본무분별지가 완성된 후에는 후득지(後得智)가 일어나 보신(報身)이나 응신(應身)의 모습으로 중생 구제 활동을 행하는 것이다. 중생 구제 활동은「기신론」의 용어로서는 용훈습(用熏習)이다. 중생 구제를 위하여 후득지(後得智)가 활동하려면, 내부에는 항상 무분멸지(無分別智)가 존재하지 않으면 안된다. 따라서 진여의 내훈(內熏)은 무명이 소멸된 후에도 끊임없이 계속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므로 염법(染法)에는 단절이 있으나, 정법(淨法)에는 단절이 없는 것이다.
본론에서는 이를 '眞如法常熏習故 진여의 법은 항상 훈습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망심(妄心)이 소멸하여 불타의 법신(法身)이 나타나기 위하여서는 끊임없는 진여(眞如)의 내훈(內熏)과 외부로부터 제불(諸佛) 보살의 인도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나타난 불(佛)의 법신(法身)은 중생 구제의 용훈습(用熏習)을 일으켜, 보신(報身) 응신(應身)의 모습으로 미래를 다하여 중생 구제 활동을 계속하는 것이다.-전종식]
[여기서는 염법(染法)과 정법(淨法)의 훈습이 단절하고 단절하지 않는 의미를 총괄하여 결론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염법의 훈습은 시작은 없어도 그 끝남이 있지만 진여정법의 훈습은 시작도 끝도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무명염법의 종자인 근본무명은 진여를 의지해서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진여는 시작이 없는 것이고 끝도 없게 됩니다. 이러한 무시무종(無始無終)인 진여의 청정한 진리의 훈습 때문에 무명이 끊겨 다하면 성불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홀연히 일어난 한 생각의 무명이 사라져 다할 때 진여(眞如)인 진리의 몸이 환하게 나타나 그 자체에서 불가사의한 위대한 정법에 배어들어 익혀짐이 다함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반야심경'에서 불생불멸(不生不滅)이고 불구부정(不垢不淨)이며 부증불감(不增不減)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상에서 생멸문(生滅門) 가운데 이 망심(妄心)이 생멸(生滅)하는 인연의 양태라는 "시심생멸인연상(是心生滅因緣相)"에 대해 풀이하여 마쳤습니다. 이후부터 일심(一心)의 체(體)와 상(相)과 용(用) 삼대(三大)의 의미를 논서의 처음에 나타낸 이 마음이 생멸로 인연하는 모습에서 마하연(摩訶衍, 대승)의 자체와 모습과 그 작용을 제시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시심생멸인연상(是心生滅因緣相) 능시마하연자체상용고(能示摩訶衍自體相用故)"에 대해서 풀이하게 됩니다.-수선]
[염훈은 오염된 훈습이고 정훈은 맑고 깨끗한 훈습입니다. 진여의 세계로 나아가려면 염훈을 단절시키고 정훈을 이어나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보살, 부처의 삶이나, 중생은 이와 반대입니다. 염법은 탐진치, 번뇌망상에 오염된 것으로, 제7식에 우리의 행위가 저장되어 있는데, 이것은 모두 오염된 것입니다. 그래서 깨닫지 못한 상태에서는 끊임 없이 오염된 것을 쓰게 됩니다. 이 염법은 내 속에 훈습되어 끊어지지 않다가 부처가 된 후에야 끊어집니다. 견성을 해서 내 본래 성품을 봐야 끊어집니다. 무명이 타파되어야 끊어집니다. 중생은 오염된 제7식 말라식을 평생 씁니다. 선정삼매에 드는 것은 무명을 타파하고 본래성품으로 가는 길을 닦는 것입니다. 선정삼매에 들며 끝없이 공부하고 수행하면 본래성품으로의 길이 열립니다. 그렇게 되면 물들지 않고 오염되지 않은 본래 성품을 꺼내 쓸 수 있게 됩니다. 정훈이 상속되는 것입니다. 결국 공부를 해서 그 마음을 쓰자는 것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발달해도 모든 것을 이롭게 하는 마음은 오염 되지 않는 깨끗한 마음에서 일어납니다. 부처가 되면 청정한 법의 훈습밖에 없으며 이 청정법이 끊어짐 없이 이어지게 됩니다. 무명이 타파되어 정훈밖에 없는 것입니다. 다시 원력으로 몸을 받아도 정훈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되면 다시 공부를 하여 견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중생의 목적은 염훈을 단절하고 정훈을 상속하는 것이며, 내 속에 충족된 진여를 끝없이 쓰는 것입니다. 우리는 진여를 터득해서 진여의 마음을 갖고 진여로 살아야 하며, 더 나아가 부처와 같이 세상을 진여로 물들여야 합니다.-통섭불교]
(4) 三大(삼대)
[이미 근본사상을 제시한 입의분(立義分)에서 체상용(體相用) 삼대(三大)에 대한 내용을 총론적으로 설한바 있다. 입의분에서 세운 근본사상은 법(法)과 의(義)로서, 법은 대승(大乘)의 체(體)이며 바로 우리의 중생심이다. 그렇다면 이 중생심이 어찌하여 대승인가의 의미를 밝히는 것이 의(義)이며, 이 대승의 의(義)를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는 것이 바로 생멸문(生滅門)에서 나타내는 체대(體大)·상대(相大)·용대(用大)의 삼대(三大)이다.
이중 체대(體大)는 일체법의 진여(眞如)로서 그것은 중생심의 본체이면서 불타의 본체이며, 모두가 평등하고 증감이 없다는 것을 이미 밝힌바 있다. 또한 상대(相大)는 진여에 무량한 성공덕(性功德)이 갖추어져 있다는 것과 용대(用大)는 그와 같이 여래(如來)가 갖추고 있는 성공덕의 활동이 위대하다는 것을 밝히는 것이다. 따라서 이지불이(理智不二)의 체대와 상대는 여래의 법신(法身)이며 세간에 나타나 중생을 구제하는 불타의 용대(用大)는 바로 불타의 보신(報身)과 응신(應身)을 가리키는 것이다.
여기서는 위와 같이 입의분(立義分)에서 총론적으로 제시한 삼대(三大)를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부분이 된다.]
① 體大 相大(체대 상대)
* 眞如(진여)의 自體相(자체상)
復次眞如自體相者(부차진여자체상자)
다시 다음에 진여의 자체의 모습=眞如自體相이라는 것은
一切凡夫聲聞緣覺菩薩諸佛(일체범부성문연각보살제불) 無有增減(무유증감)
일체 모든 범부, 성문, 연각, 보살과 모든 부처가 더하거나 뺄 것=增減이 없으며,
非前際生(비전제생) 非後際滅(비후제멸) 畢竟常恒(필경상항)
이전에 나지도 않았고, 이후에 소멸하지도 않으며, 필경에 영원하고 항상하여
[진여의 체(體)를 설명하였다. 진여 자체는 누구에게나 평등하며, 늘거나 줄지 않으며, 늘 그러하다. 부처라고 해서 더 크거나, 범부라고 해서 더 작지도 않다. 과거에 생겨난 바도 없으며 미래에 사라질 것도 없어서 늘 그러하다.]
[삼대(三大) 가운데 먼저 진여(眞如)의 자체와 모습과 작용인 공능(功能)을 밝히고 있습니다. 먼저 진여의 본질인 체대(體大)와 그 모습인 상대(相大)입니다. 일체 범부·성문·연각·보살·모든 부처님이 수행하여 증오(證俉)한 정도에 따라서 증감이 없는 것이므로 상주하여 범부 이전에 나오지도 않았고, 항구하여 불과위(佛果位)의 이후에도 사라지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필경(畢竟)에 영원히 머물고 항구불변하여 원래부터 자성에 일체 공덕의 모습을 만족한다고 하였습니다. 십법계(十法界)인 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성문·연각·보살·불 등의 전체가 진여(眞如)로써 그 자체와 모습을 삼고 있습니다. 이는 즉 본 논서의 첫 부분에서 언급했던 "일법계(一法界)인 대총상(大總相)의 법문체(法門體)"입니다. 이러한 법문체인 진여는 범부와 성인이 균등하게 타고나 미혹과 깨달음의 차별 어느 쪽에도 소속하지 않기 때문에 성인의 깨달음을 따라 증가하지 않고, 범부의 미혹을 따라 감소하지도 않습니다. 진여는 본래 저절로 허망하지 않고 불변의 영원한 진리로 무명업식을 따라 제법의 차별로부터 나오는 것도 없는 불생(不生)이고, 인연의 부분적인 진리를 따라서 사라지는 것도 없는 불멸(不滅)입니다. 그리하여 광대하게 십법계를 포용하여 서로 걸림이 없이 융합하고 소통합니다. 그러므로 "일체의 공덕을 만족하게 갖추었다"고 하였습니다.]
從本已來(종본이래) 性自滿足一切功德(성자만족일체공덕)
본래부터 성품(본성) 자체가 일체의 공덕을 원만하게 갖추었으니,
所謂自體有大智慧光明義故(소위자체유대지혜광명의고)
이른바 자체에 광대한 지혜광명의 의미가 있기 때문이며,
遍照法界義故(편조법계의고) 眞實識知義故(진실식지의고)
법계를 두루 비추는 의미이기 때문이며, 진실하게 분별하여 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며,
[진여 또는 여래의 자성이 갖춘 공덕의 양상을 말한 것입니다. 즉, 자성의 본각(本覺)에는 항상 광채가 빛나 관조하여 미혹되고 오염된 어두움이 어둡게 하지 못한다는 여실한 공(空)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체에 대지혜광명이 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이는 바로 비로자나(毘盧蔗那)인 법신진여의 본질입니다. 본각의 참다운 지혜로 진여법계의 이치를 관조하여 그 이치를 끝까지 사무치지 않는 것이 없고, 방편의 지혜로 사물이 처해 있는 상황을 조감하여 사물의 작용마다 끝까지 추궁하지 않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물의 상황에 따라 완전하게 관조하면서도 생멸(生滅)의 인연을 잊고, 모든 육근(六根)을 의지해서 발현한 육경(六境)을 분별로 인식하는 망상을 여읩니다. 그러므로 "眞實識知義 진실하게 분별하여 안다"고 하였습니다.]
自性淸淨心義故(자성청정심의고) 常樂我淨義故(상락아정의고)
자성이 청정한 마음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며, 상·락·아·정의 의미이기 때문이며,
[여래장의 성품은 이혹(二惑)과 육염(六染)을 영원히 떠났기 때문에 "自性淸淨 자성청정"이라고 하였습니다. 시간적으로 과거·현재·미래가 다하도록 변함이 없는 것을 상(常)이라 말하고, 중생의 괴로움 속에 있어도 그 괴로움이 간여하지 않는 것을 낙(樂)이라 하며, 생사에 처하여도 그 생사에 구속되지 않는 것을 아(我)라 하고, 삼세육추의 생멸하는 모습으로 편력하면서도 오염되지 않는 것을 정(淨)이라고 합니다. 불타는 뜨거운 탐진치(貪瞋癡)의 번뇌를 영원히 떠났기 때문에 청량(淸凉)이고, 생(生)·주(住)·이(異)·멸(滅)이란 일심의 사상(四相)으로 번뇌가 옮길 수 없기 때문에 불변(不變)이며, 악업이 얽어매지 못하므로 자재(自在)라고 합니다.]
淸凉不變自在義故(청량불변자재의고)
청량하고 불변하며 자재하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진여의 공덕을 설명하였다. 진여는 공이요, 모습이 없다. 그러나 중생과 관계[因緣]가 이루어지면, 중생을 제도하려는 모습(相)을 나타낸다. 이를 공덕이라고 한다.]
[다음에 진여의 체대(體大)에 대한 공능(功能)입니다. 이른바 자체에 근본지(本覺智)의 밝음에 광대하고 원만한 지혜광명의 의미이기 때문이고, 진여(眞如)의 본각(本覺)은 법계를 두루두루 보편(普遍)하게 관조할 수 있게 비추는 공능의 의미이기 때문이며, 관조하는 작용을 일으킬 땐 진실하게 분별하여 아는 의미이기 때문이고, 견사(見事)의 이혹(二惑)과 육염(六染)을 여읜 자성은 자성청정심의 의미이기 때문이며, 자성이 상락아정(常樂我淨)이란 열반의 사덕(四德)을 빠짐없이 갖추고 있는 공능의 의미이기 때문이고, 자성의 덕은 옮겨 유전함이 없이 청량하고 변치 않고 자유자재한 공능의 의미이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항하사를 능가하는 본성의 공덕을 빠짐없이 만족하게 갖추어서 진여의 자체를 여의지 않고, 시작이 없는 옛적부터 상속하면서 단절하지 않았으며, 진여의 자체와 한결같아서 다르지도 않고, 다르지 않은 진여의 자체에 상즉(相卽)하여 있는 항하사와 같은 성덕의 불가사의한 불법을 원만하게 갖춘 데에 이르기까지 이르러 조금도 부족함이라곤 없는 의미의 공능 때문에 여래장(如來藏)이라 명칭하며, 또는 여래법신이라 부르기도 한다고 하였습니다.]
[지운 : 眞實識知(진실식지)는 선가에서 말하는 공적영지(空寂靈知)이며 반야(般若)이다.
* 지운 : 진여훈습에 의해 왼쪽이 타파되어 오른쪽의 것이 나타남 | |
진여훈습 대상 | 진여훈습 결과 |
計名字相, 起業相 | 淸凉不變常住 |
執取相 | 常樂我淨 |
相續識 | 自性淸淨 |
智識 | 眞實識知 |
現識 | 遍照法界 |
轉識 | 大智慧光明 |
業識 | 如來法身 |
* 常樂我淨 : 무상(無常), 고(苦), 무아(無我), 염(染)에 대응하는 말이다. 염법은 무상하고 괴롭고, 무아이고 물든 것이지만, 진여는 늘 즐겁고, 무가 아니며, 청정하다. 진여는 공이다. 그러므로 변할 만한 것이 없으므로 常이며, 번뇌가 없으므로 樂이며, 텅빈 그 모습이 나의 본 모습인 我이며, 진여 자체는 물들지 않으므로 淨이다.
* 憨山 : 시간적으로 과거, 현재, 미래가 다하도록 변함이 없음을 常이라하고, 중생의 괴로움 속에 있어도 그 괴로움이 관여하지 않음을 樂이라 하고, 생사에 처하여도 생사에 구속되지 않음을 我라 하고, 삼세육추의 생멸하는 모습을 편력하면서도 오염되지 않음을 淨이라고 한다.]
具足如是過於恒沙(구족여시과어항사) 不離不斷(불리부단)
이와 같이 항하사(갠지스강의 모래)보다 많은 수를 지나도록 여의지 않고, 단절되지 않으며,
[진여 자체(自體)에는 항하(恒河)의 모래보다 많은 성덕(性德)을 갖추고 있고, 이 성덕이 진체(眞體)를 떠나지 않는 것이어서 '불리(不離)'라고 말하고, 무시이래(無始以來) 상속되어 끊임이 없기 때문에 '부단(不斷)'이라 하며, ]
不異不思議佛法(불이불사의불법) 乃至滿足(내지만족) 無有所少義故(무유소소의고)
다르지 않으며, 불가사의한 불법을 원만하게 갖춤에 이르기까지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의미이기 때문에
[자체(自體)와 함께 있어 동미(同味)이므로 '불이(不異)'라고 말한다. 또한 항하의 모래보다도 더 많은 뜻이 있어 '부사의(不思議)'라 말하고, 불타만이 알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불법(佛法)'이라 한다.]
[항하의 모래와 같은 성스러운 덕상(德相)이 진여자체와 다르지 않기 때문에 불리(不離)라 하였고, 시작이 없는 이래로 상속하기 때문에 부단(不斷)이고, 진여와 더불어 평등하여 한결같기 때문에 불이(不異)이며, 자성과 그 지닌 덕상이 융합하고 융통하여 일다(一多)가 걸림이 없고 이사(理事)가 교대로 사무쳐서 염법(染法)·정법(淨法)이 상대적인 둘로 나뉘지 않기 때문에 불가사의(不可思議)라 하였습니다.]
名爲如來藏(명위여래장) 亦名如來法身(역명여래법신)
이름하여 여래장이라 하며, 또는 이름하여 여래법신이라고도 한다.
[만일 진여의 체(體)에 이같은 불가사의(不可思議)의 성덕(性德)이 없다면, 여래(如來)가 이를 증득하여 덕을 갖춘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따라서 진여에는 이같은 공덕이 가득히 구족하고 있어 조금도 결함이 없다 함은 자명한 일로서 이 진여로부터 여래가 탄생하는 것이므로 여래장(如來藏)이라 이름하고, 또한 이름하여 여래법신(如來法身)이라고 한다.]
[이러한 자성의 덕성은 모든 중생들에게 본래 갖추어져 있지만, 이를 깨달은 부처만이 끝까지 증득하기 때문에 불법이고, 제법을 포괄하지 않는 것이 없어 조금도 부족한 것이 없기 때문에 만족이며, 한량없는 성덕을 함용하고 포섭할 수 있기 때문에 여래장이고 또는 여래법신이라고 명칭하였습니다. 또한 본 논서의 첫 부분에서 여래장심은 대총상대법문체(大總相大法門體)라고 하였기에 여래장심(如來藏心)으로 귀결한 것입니다. 다음에 이를 문답으로 거듭 밝힙니다.-수선]
[대승의 의(義) 즉 마음 스스로의 체상용의 의미에 대하여 상세히 설명하는 부분이다.
제2장 입의분(立義分)에서 대승의 의미를 나타내어, '이 마음의 생멸인연의 상은 능히 마하연 스스로의 체와 상과 용을 나타내기 때문에 (是心生滅因緣相, 能示摩訶衍自體相用故)'라고 정의한 것에 따르는 것이다. 심진여문(心眞如門)에서는 대승의 체(體)를 나타내는 것이지만 심생멸문(心生滅門)에서는 진여(眞如)가 자성청정심으로서 인격화(人格化)되어 있어, '자(自)'라는 용어가 붙어 자체(自體)라 하고있음을 상기하여야 한다. 다시 말하면, 심진여문에서의 진여는 그대로 체(體)라고 부르지만, 심생멸문에서의 진여는 자(自)를 붙여 자체(自體)라 하는 것에 주의하여야 한다.
심생멸문에서 대승의 의미는 인격화된 체상용(體相用) 삼대(三大)가 있는 것이다. 여기서 인격화된 진여의 체와 상을 법신(法身)이라 부르고, '기신론'에서는 체의 의미를 밝히는 것이므로 속성인 상(相)이 되는 것이지만 체(體)를 떠난 상(相)이란 있을 수 없으므로 체와 상을 합하여 일체(一體)로 보고, 체대(體大)와 상대(相大)를 합하여 설하는 것이다. 체대(體大)는 법신의 본질(本質) 즉 진여(眞如)를 말하며, 상대(相大)는 법신(法身)이 갖추고 있는 덕(德) 즉 지(智)를 말한다. 이 진여와 그 덕성(德性)은 영원한 것이므로 범부에 있어서나 여래(如來)에 있어서나 증감(增減)이 없는 것이다. 범부로 있을 때는 공덕이 적고, 불타가 되면 증대된다는 그러한 것이 아니다. 과거에 생긴 것이 아니며, 또한 미래에 멸하는 것도 아니며, 시공(時空)을 통하여 영원불변의 것이다. 이것이 진여로서 법신의 존재 방식이다. 이 진여에는 당초부터 그 자체에 일체의 공덕을 갖추고 있으며, '기신론'에서는 이를 여섯 종류로 나누어 다음과 같이 그 의미를 설하고 있다.
(1) 대지혜광명(大智慧光明)의 의미
(2) 편조법계(편照法界)의 의미
(3) 진실식지(眞實識知)의 의미
(4)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의 의미
(5) 상락아정(常樂我淨)의 의미
(6) 청량불변자재(淸凉不變自在)의 의미
이상과 같이 진여 자체(自體)에는 여섯 가지의 뛰어난 성질[功德]이 있다는 것이다. 즉 진여인 체대(體大)에는 여섯 종류의 의미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상대(相大)이다. 이 여섯 가지 의미에서 밝혀진 바와 같이 상대(相大)는, '지혜'자체와 그 지혜의 활동으로 표현되어있다. 대지혜광명(大智慧光明)은 본각(本覺) 그것으로서, 그 지혜광명이 법계(法界)를 두루 비추어 제법(諸法)을 밝히는 것이다. 우주 법계의 모든 존재가 불타의 일체지(一切智)에 의하여 개현(開顯)되는 것이다. 진실식지(眞實識知)는 그렇게 하여 밝혀진 제법에 대한 이해(理解)가 모두 진리(眞理)와 합치하는 것으로서, 일체의 진실을 있는 그대로 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진여의 자체상(自體相)은 불타의 지혜임과 동시에, 순수청정하고 선(善)의 성질을 가진 마음이어서, 이를 인격화된 의미로서의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이라고 말한다. 더욱이 이 자성청정심은, 열반경에서 불(佛)의 성질로 일컬어지는 열반의 네 가지 덕성, 즉 상락아정(常樂我淨)의 성질을 간직하고 있다.
이 상락아정(常樂我淨)은 '승만경'에서는 여래장(如來藏)의 성질로서 설해지고 '열반경'에는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불성의 성질로서 설해지고 있다. 미망(迷妄)의 세계가 무명의 망염(妄染)에 의하여 무상(無常)하고 고(苦)이며, 무아(無我)이고 무정(無淨)인데 대하여 진여(眞如)는 상락아정(常樂我淨)의 덕성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여섯 번째의 상대(相大)의 의미인 청량불변자재(淸凉不變自在)라 함은, 진여는 순수청정하여 번뇌가 없으므로 청량(淸凉)이라 하고, 생멸(生滅) 증감(增減)의 변화가 없으므로 불변(不變)이라 말하며, 번뇌에 속박됨이 없이, 자유로운 스스로의 존재이므로 자재(自在)라고 말한다.
이상의 여섯 가지 내용은 상대(相大)의 의미이지만 이는 스스로의 체와 상을 합하여 이지불의(理智不二)의 법신(法身)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체상용(體相用) 삼대(三大) 중 용대(用大)에서는 보신(報身)과 응심(應心)의 이신(二身)을 설하게 된다.
이지불이(理智不二)는, 진여(眞如)와 지혜(智慧)가 떨어질 수 없는 것으로서 진여의 본성이 지혜이며 자성청정심이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진여에서 무명이 제거되면 진여의 본성인 지혜가 자연히 나타나는 것이므로 진여와 지혜는 불가분(不可分)의 것으로서, 이 전체가 불(佛)의 법신(法身)이 된다.
이상에서 보아온 여섯 가지 덕성은 언뜻 보아 세속적인 의미의 덕성인 것 같으나, 이는 본체 자체의 상을 설명한 것으로서, 일반사람에게 이를 알리기 위해서 차별적 용어로 설명한데 불과한 것이다.
범부의 인식세계는 모두가 상대적인 것이므로, 여기서 진여를 설하기 위해서는, 평등의 진여를, 마치 차별이 있는 것같이 설하고 있는 것이다. 망심에 사로 잡혀 있는 중생에게 진여의 덕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차별상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것이지만 진여 자체에는 차별상이 없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평등 무차별의 본체에 대하여, 상(相) 즉 그 속성을 차별적 용서로 말하는 것이 되어, 오해를 불러일으킬 우려가 있어, 본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의문을 제기하고 이를 해명해가고 있는 것이다.-전종식]
쉬어가는 쉼터= *열반경의 설산동자 이야기, 히말라야 산 속에서 수행하고 있는 어떤 젊은 수행자가 있었습니다. 매우 열심히 수행하기에 제석천왕도 그의 정성을 알게 되었습니다. 언젠가 부처가 될 수 있다고 보고 나찰로 변신하여 그를 시험합니다. 나찰이 된 제석천왕은 수행자의 반대편 나무 위에 앉아 게송 한 구절을 읊습니다. “형상이 있는 모든 것은 변하지 않는 것이 없으며 끊임없이 생겼다가 없어지나니.[諸行無常 是生滅法]” 이 게송을 듣자마자 수행자는 마음에서 환희심이 일어나서, 그 게송을 읊은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싶어 주변을 둘러보니 나찰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찰에게, “당신이 읊었소?” 나찰이 그렇다고 말하자, 수행자가, “나머지 구절도 들려주시오.” 그러자 나찰이 “그렇다면 네가 가진 무언가를 내놓아라.”라고 말합니다. 수행자는 “나는 지금 가진 것이 하나도 없소.”라고 하니 나찰은 “그렇다면 너의 몸이라도 내놓거라.”라고 말합니다. 그 말을 듣자 수행자는 나머지 구절을 들려주면 내 몸을 던져 너의 밥이 되겠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나찰이 뒷 구절을 말해줍니다. “생겨나고 없어지는 법 깨닫고 나면 진리의 바다 끝없이 고요하여 즐거우리라.[生滅滅已 寂滅爲樂]” 이 말을 들은 수행자는 환희로움에 겨워 자신의 몸을 던집니다. 그러자 제석천왕은 수행자를 살려주고 너를 시험한 것이라고 말하고 떠납니다.
* 우바리의 전생 이야기. 우바리는 부처님의 십대 제자 가운데 계율, 지계 제일이라고 일컬어지던 수행자입 니다. 부처님의 집안에서는 64명이 출가를 했습니다. 부처님이 아버지 정반왕을 찾아가 설법을 하자 모두 다 출가합니다. 우바리는 그 나라의 이발사였는데 왕족들을 따라 같이 출가를 합니다. 왕자들은 함께 준비하느라 출가가 늦었지만 우바리는 일찍 출가 준비를 마치고 혼자 부처님을 찾아갑니다. 당시 부처님 교단에서는 인도의 네 가지 신분제도를 타파하였기 때문에 출가한 순서에 따라 형님, 동생이 정해졌습니다. 우바리가 사형이 되니까 부처님의 친척들이었던 왕자들이 반발하기도 했습니다.
그 후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3개월 후 가섭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다시 되새겨야겠다고 생각하고 제자들을 소집합니다. 이 때 1차 결집이 일어납니다. 당시 집결 장소는 칠엽굴이었는 데 아라한과를 터득한 자들만이 들어올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모인 500제자 가운데 499명은 들어갔는데 다문 제일 아난만이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아난은 부처님의 법을 많이 듣기만 했지 문사수를 실천하지 않았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난은 7일 동안 용맹정진하여 결국 아라한과를 터득해 칠엽굴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1차 결집 때는 책으로 기록을 한 것이 아니라 누가 선창을 하면 따라서 후창을 하는 송의 형식이었습니다. 그 때 가섭이 의장을 하고 다문 제일, 기억력이 좋았던 아난이 법을 송출하고 지계 제일이었던 우바리가 계율을 선창합니다. 단체를 가만히 놔두면 혼란스럽게 되기 때문에 계율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부처님 제자들은 그 법과 계율들을 기억했습니다.
우리의 삶은 연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바리와 같이 이발사였으면 전생에도 이발사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인과는 연 속성과 보복성을 갖습니다. 기존에 행동했던 것을 계속하려고 하는 연속성과 무언가 상대방에게 작용을 했을 때 상대방도 나에게 작용을 하는 보복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잘 살기 위해서는 베풀어야 합니다. 베풀지 않으면 그것이 돌아오지 않으니 빈곤하게 됩니다. 내가 행한 만큼, 내가 베푼 만큼 내게 돌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열심히 베푼 사람은 큰 돈을 담을 그릇이 되어 있기 때문에 돈이 모여 큰 돈이 쌓이게 됩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설령 큰 돈을 벌어도 어느새 다 사라져버리고 자신의 손을 떠납니다. 선을 베풀고 자비가 가득찬 사 람은 세상 어디에 가도 살생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해꼬지를 당할 이유가 없습니다. 불안한 것은 전생에 지은 잘못 때문입니다. 내가 당당하면 어떤 상황에도 불안함이 일어나지 않습니다.-통섭불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