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승기신론 正宗分(정종분)의 解釋分(해석분) 27
• 妄心熏習(망심훈습)
妄心熏習義有二種(망심훈습의유이종) 云何爲二(운하위이)
망심훈습의 뜻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 그 두 가지인가?
[망심훈습(妄心熏習)은 망심에 대한 진여(眞如)의 정화작용, 즉 정용(淨用)이 나타나는 것으로서, 달리 말하면, 미망 속에 있는 중생이 그 미혹의 마음속에 보리심(菩提心)을 일으켜, 수행(修行)을 통하여 미혹(迷惑)을 끊고 깨달음에 나아가는 활동을 나타내는 훈습작용을 말한다. -전종식]
一者(일자) 分別事識熏習(분별사식훈습) 依諸凡夫二乘人等(의제범부이승인등)
厭生死苦(염생사고) 隨力所能(수력소능) 以漸趣向無上道故(이점취향무상도고)
첫째는 분별사식훈습이니, 모든 범부와 이승의 사람들이 생사의 괴로움을 싫어하고, 능력에 따라 수행할 수 있는 한도 내에 의지해서 점차 무상의 도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元曉 : 分別事識熏習이란 경계가 식(識)의 작용 때문에 생겨난 것임을 모르고, 경계가 있다고 착각하여 집착하는 것을 분별사식이라고 하며, 범부와 이승(二乘)이 생사를 싫어하고 열반을 좋아하는 것 또한 이와 다르지 않으므로 분별사식훈습이라고 한다.
* 지운 : 경계를 분별하는 것은 일곱 가지가 있다. 시.청.후.미.촉의 다섯 감각, 의식, 말라식이다. 이중 가장 강렬한 것이 의식이다. 오각은 경계를 인식할 뿐이고, 말나식은 미세하여 잘 드러나지 않지만, 의식을 경계를 인식하면서 동시에 생각을 한다. 진여가 의식을 훈습하여 생사를 싫어하게 하고 열반을 구하게 하니 이를 분별사식훈습이라고 한다. 이승의 경지이다.
의식의 특징 : a.자유롭다. 생각의 대상에 한계가 없음. b. 유무형을 다 대상으로 함. c. 오구의식 즉, 다섯 감수 작용과 함께 작용. d. 형상 작용. e. 직관과 추리를 다 할 수 있음. 의식이 지혜로 바뀌면 묘관찰지가 된다.-물처럼바람처럼]
[첫째는 분별사식훈습(分別事識薰習)인데, 이는 허망한 경계가 유식(唯識)일 뿐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 십신(十信) 이전의 모든 범부와 칠식(七識)·팔식(八識)과 사식(事識)의 미세한 부분은 모르고 단지 아공관(我空觀)만을 닦은 이승인이 평등하게 삼계에 나고 죽는 윤회의 괴로움에 염증을 내고 능력을 따라 수행할 수 있는 한도 내에 의지하여 위없는 보리의 도에 점차로 닦아 나아가는 의미에서 분별사식훈습이라고 하였습니다.-수선]
[첫째는 분별사식훈습(分別事識熏習)이다. 분별사식은 의식(意識)의 이명(異名)으로서, 이 식(識)은 마음에 인식되는 어느 개체가 그대로 외계의 실재라고 분별하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범부이승(凡夫二乘)의 사람은 그러한 망심에 진여의 정화작용이 일어나 발심(發心)하게되며, 생사의 고통을 싫어하는 마음이 일어나게 된다. 그러나 이들 범부와 이승은 그러한 생사(生死)나 윤회(輪廻)의 고통이 실재라고 생각하는 것이지만 그들이 발심하게 되면 미혹의 마음속에 점진적으로 정용(淨用)이 일어나 생사의 고통을 싫어하게 되고 그 힘의 정도에 따라 무상도(無上道)를 향하여, 점진적으로 수행해 가는 것이다.]
[첫째는 분별사 식훈습(分別事識熏習), 분별이란 제7식 말라식을 가리킵니다. 이승은 성문과 연각으로, 성문과 연각을 알면 이승인이고 모르면 범부입니다. 사성제와 연기를 알면 나름 진리를 알기 때문에 조금씩 진여를 좋아하는 기운이 생깁니다. 그렇게 되면 힘닿는 대로 진리의 세계로 나아갑니다. 만약 제7식에 훈습되는 우리가 공부할 마음이 생기면 분별사식훈습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공부, 수행을 열심히 하면 제8식으로 점점 훈습되어 결과가 쌓이면 어떤 계기로 깨달음을 얻습니다. -통섭불교]
二者(이자) 意熏習(의훈습) 謂諸菩薩發心勇猛速趣涅槃故(위제보살발심용맹속취열반고)
둘째, 의훈습이니, 이른바 모든 보살이 발심하여 용맹하고 신속히 열반에 나아가는 것을 말하는 까닭이다.
[元曉 : 意熏習이란 업식훈습이라고도 한다. 통틀어 말하자면 다섯 가지의 식(識:業識, 轉識, 現識, 知識, 相續識)을 모두 의(意)라 이름 하니, 그 뜻은 위에서 말한 것과 같으며, 근본 쪽으로 말한다면 다만 업식만을 취한다. 업식은 가장 미세하여 모든 식의 근본이 되기 때문에 이 중에서 업식을 의(意)라 하며, 이러한 업식은 견분(見分)과 상분(相分)이 아직 나뉘지 않은 것이다. 그리하여 모든 보살은 마음이 망령되이 움직일 뿐 따로 경계가 없음을 알며 모든 법은 오직 식(識)의 헤아림인 줄 알아서, 앞의 경계가 밖에 있다는 집착을 버리고 업식의 뜻에 따르기 때문에 업식훈습이라 이름하며 또한 의훈습이라 이름 한다. 무명에서 일어난 업식이 바로 발심하여 모든 행을 닦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둘째는 의훈습(意熏習)이다. 의(意)는 업식(業識), 전식(轉識), 현식(現識), 지식(智識) 및 상속식(相續識)의 오식(五識)을 말하는 것으로서, 의훈습(意熏習)은 이 5식에 가해지는 진여의 정화작용(淨用)을 말한다.
이것은 초지(初地)이상 보살의 수행심(修行心)으로서, 그들은 유식무경(唯識無境)의 이치를 깨닫고 있으므로, 마음밖에 어떠한 자아(自我)의 집착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 보살의 발심(發心)은 용맹스럽고 강력하며, 분별사식훈습이 점진적인데 비하여, 이 의훈습(意熏習)의 보살은 재빨리 열반에 이룰 수 있는 것이다.
분별사식훈습(分別事識熏習)을 다시 설명하면 범부이승(凡夫二乘)은 온갖 사물과 현상을 여러 가지로 분별하고 좋고 나쁨에 집착을 일으키는 분별사식(分別事識)에 머물러 있으므로, 이 식(識)에 대하여 진여가 정화작용을 일으켜 이를 소멸시키려는 훈습을 계속하면, 그 결과 생사(生死)의 고통을 싫어하는 마음의 작용이 일어나고 그 힘이 감당할 수 있는 정도에 따라, 위없는 진리의 길을 향해 점진적 으로 수행해 가는 것이다.
의훈습(意熏習)은 거친 분별사식보다 미세한 망심인 업식(業識)등 5식에 대하여 이를 소멸시키기 위하여 진여가 일으키는 정화작용이기 때문에 이는 보살(菩薩)의 수행결과로서 나타나 유식무경(唯識無境)의 경지를 깨닫게 되고, 그 발심수행은 용맹스럽고 강력하여, 재빨리 열반에 진입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해석상 주의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은 망심훈습(妄心熏習)의 두 가지 모습인 분별사식훈습(分別事識熏習)과 의훈습(意熏習)이라고 해서, 그러한 망심(妄心)이 훈습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망심을 제거 소멸시키기 위한 진여의 훈습작용임을 명심하여야 한다. 여기의 망심훈습은 정법(淨法)훈습에서 분류된 것으로서 진여가 망심을 정화시키는 망심훈습이며, 염법(染法) 훈습에서 분류된 망심훈습 즉, 망심이 진여에 훈습하는 망심훈습과 구별하여야 한다는 것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두 번째 의훈습(意薰習)은 허망한 경계가 유식(唯識)일 뿐이라는 것을 이해한 십신(十信) 이상의 모든 보살이 위없는 최상의 깨달음을 성취하려는 마음을 발하여 용맹하게 수행을 하여 열반으로 신속하게 나아가는 의미 때문에 단박에 닦아 버리는 의훈습이라고 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진여가 망심인 삼세육추를 훈습하여 진여인 정법으로 환원하는 것을 따로 밝히고, 이를 수행하는 사람의 측면에서 돈수(頓修)와 점수(漸修)의 차이가 있다는 것을 나타낸 것입니다. 즉, 진여가 망심을 훈습하면 망심의 염법을 이루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망심의 흐름을 돌이켜 정법의 수행을 이룬다고 말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또 망심훈습(妄心薰習), 즉 진여가 망심을 훈습한다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이러한 의미는 가장 은밀하여 마명보살의 오묘한 의도를 나타내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즉, "진여훈습으로 정법(淨法)을 일으켜 단절하지 않는다"라고 분명히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여기에선 "진여가 망심을 훈습한다"라고 말한 것은 앞장에서 말하길, "진여법이 있음으로 인해 무명을 훈습하는 인연력 때문에 망심으로 하여금 생사의 괴로움에 염증을 내고 열반을 즐겨 구하게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단지 안에서 진여를 인(因)으로 하였다는 것만을 밝혔을 뿐인, 본훈(本熏)에 해당한다고 하겠습니다. 그 다음에서 말하길, "이 망심에서 생사를 싫어하고 열반을 구하는 인연 때문에 곧 진여를 훈습한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관찰수행에 해당하는 신훈(新熏)에 해당한다고 하겠습니다. 앞에서 말했던, "진여법이 있기 때문에 무명망심을 훈습한다"라고 한 망심(妄心)은 오의(五意)를 총체적으로 개괄하여 다섯 가지 의미를 훈습하는 것이 스스로 심천(深淺)의 차이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위에서는 단지 망심을 훈습하여 진여정법으로 환원하는 시종(始終)의 인과(因果)관계만을 통설적으로 설명하였을 뿐입니다. 그러나 아직은 돈수와 점수를 분별하는 데는 미치질 않았는데, 지금은 진여정법의 훈습을 받는 망심으로써 도리어 진여를 훈습한다면 이 진여를 대상으로 하여 훈습되는 것이, 훈습하는 주체인 훈습하는 것이 망심엔 저절로 육추와 삼세의 두 가지 능훈망심(能熏妄心)의 의미가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육진경계가 유식(唯識)일 뿐 그 실체가 없다는 것을 알고 삼세의 허망한 마음으로 법공관지(法空觀智)를 능훈수행하는 삼현십성(三賢十聖)의 돈수와 육진경계가 유식일 뿐임을 알지 못하고 아공관지(我空觀智)만을 닦는 이승인의 점수의 차별을 밝힌 것입니다.
만일 진여정법의 훈습을 받는 육추의 분별사식에서 발심하는 자는 그 때문에 이승인의 기틀을 이루며, 훈습을 받는 오의(五意)에서 발심하는 자는 삼현(三賢)과 십성(十聖)인 십지(十地)보살의 기틀을 이루게 됩니다. 그러나 망심훈습(妄心薰習)이라고 나타낸 것은 이미 진여정법의 훈습을 받은, 그래서 다시 진여정법을 훈습하는 신훈수행(新熏修行)의 허망한 마음입니다. 지금은 진여에 대한 관찰수행을 일으켜 도리어 진여를 훈습하는 능훈의 허망한 마음임으로 근본무명의 훈습을 받는 허망한 마음이 아닌 그 뜻이 은밀하다고 하겠습니다.
이상에서는 망심이 진여를 신훈(新熏)하는데 있어서 삼세와 육추가 동일하지 않다는 것을 밝혔습니다. 다음은 진여가 무명을 훈습하면서 자체와 그 작용이 동일하지 않다는 것을 밝힙니다.]
[둘째의 의훈습은 제8 아뢰야식을 훈습하는 것입니다. 그냥 공부하면 분별사식훈습이 되고 집중해서 깊이 들어가서 선정에 들면 이것은 의훈습에 든 것입니다. 용맹하다는 것은 용맹정진하는 것입니다. 그냥 하는 것은 용맹이 아닙니다. 용맹정진 하다보면 열반으로 나아 갈 수 있습니다. 지금 이렇게 공부하며 훈습을 하고 있지만 가끔은 밤잠을 설쳐가며 식사도 잊으며 용맹정진 해봐야 합니다. 깨달음의 순간은 언제 올지 모릅니다. 이런 깨달음을 얻으면 신통력이 생깁니다. 신통력이 생기면 전생의 기억도 납니다. 예를 들어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곳도 전생에 가본 곳이라면 생각이 난 그대로의 모습입니다. 어려서부터 공부, 수행을 해야하는 이유는 순수하기 때문입니다. 학습력, 흡수력이 성인이 된 뒤와는 매우 다릅니다. 성인이 되면 오염된 틀이 좀처럼 깨지지 않습니다. 자기가 맞다고 고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어렸을 때, 젊었을 때와는 다릅니다. 어떤 공부건 금방 익히고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한 점 의심도 없이 몰입하고 집중할 수 있는 것이 어린 시절, 젊은 시절입니다. 성인이 된 뒤에는 의심과 자기 확신이 생겨서 수행을 해도 ‘지금 이렇게 해봤자 부처가 안 될텐데...’하고 생각하고 맙니다. 의훈습은 용맹정진해야 될 수 있는데 어린 시절, 젊은 시절에 하는 것이 더 용이한 것입니다. 용맹정진을 하지 않으면 아무리 수행을 해도 전생과 비슷한 정 도가 될 것입니다. 용맹을 해야 전생을 뛰어넘을 수 있습니다.]
[머리 식히는 이야기
기록에 남아있는 부처님의 전생을 보면 먼저 선혜보살이 있습니다. 선혜의 집안은 무마성의 최고 장자였습니다. 하지만 선혜는 어려서 부모님을 잃었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막대한 재산을 물려받은 선혜는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그 많은 재산을 그대로 남기고 돌아가신 것입 니다. 생전에 아버지가 애착을 가지고 관리했던 재산들을 죽어서는 가져가지 못하는 것을 보고 선혜는 허무해졌습니다. 그리고 ‘나는 죽은 후에도 갖고 갈 수 있는 것을 가져야겠다.’고 생각 합니다. 선혜는 다음 날 국왕에게 알리고 북을 치며 전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수행자의 길을 떠났습니다. 그는 히말라야 산에서 수행을 했는데 당시 연등 부처님의 출현 소식을 듣고 마을로 내려옵니다. 그런데 내려오기 전날 비가 와서 곳곳에 웅덩이가 패여, 물이 고여 있었습니다. 연등 부처님이 지나가시는 길에도 큰 웅덩이가 있었습니다. 선혜는 부처님이 그것을 밟을까봐 몸으로 웅덩이를 메웁니다. 웅덩이가 커서 머리를 풀어 나머지 부분을 메웁니다. 그것을 본 연등 부처님이 “젊은이여 왜 그러고 있느냐? 난 너를 밟고 가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자 선혜는 “부처님이시여 이렇게 밟고 지나가는 것도 인연이니 밟고 지나가시옵소서.”라고 합니다. 그 말을 듣고 지극 정성에 감동한 부처님은 “너는 다음 생에 석가모니 부처로 태어 날 것이다.”라고 말해줍니다.-통섭불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