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승기신론

대승기신론 正宗分(정종분)의 解釋分(해석분) 20

Skunky 2022. 12. 14. 09:00

* 無明(무명)의 忽然念起(홀연염기)

所謂心性常無念故(소위심성상무념고) 名爲不變(명위불변)

이른바 마음의 본성=心性은 항상 그러하여 망념이 없는=無念이기 때문에 이름 하여 불변하다고 하며,

以不達一法界故(이부달일법계고) 心不相應(심불상응)

하나의 법계=一法界를 통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마음이 상응하지 못하여

忽然念起(홀연념기) 名爲無明(명위무명)

홀연히 망념을 일으킨 것을 이름 하여 무명이라고 한다.

 

심성(心性)= 마음의 본성, 심진여(心眞如)를 말함

일법계(一法界)= 심진여를 말하며, 일심(一心)과도 같은 뜻이다. 마음은 하나의 진리에 관통하고 있어 일법계라고 한다

불상응(不相應)=마음이 주관과 객관의 대응관계로 활동하기 직전의 상태.

 

[이는 근본 무명을 말한 것으로 워낙 미세하여 부처가 아니고서는 온전히 알 수 없다고 한 것이다. 일심과 일법계가 서로 상응하지 못하기 때문에 망념이 홀연히 일어난다고 하였다.

* 元曉 : 心不相應이라 한 것은 이 무명이 가장 미세하여 왕(王;心王)과 수(數;心所)의 차별이 없기 때문에 心不相應이라고 한 것이다. 오직 이것이 근본이 되고, 다른 염법으로서 이보다 미세하고 이보다 앞에 있는 것이 없으므로 이런 뜻에서 홀연히 일어난다고 말한 것이다.-물처럼바람처럼]

 

[중생들은 각자의 세계를 갖고 있고 자기 세계 속에서 자기만을 위해 살아갑니다. 무명에 물들면 하나의 법계임을 알지 못합니다. 물들기 전의 종이는 다 같은 종이지만 각자 자기만의 색깔로 물들이면 다르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입니다. 우리는 끝도 없이 일어나는 무명 속에서 나의 몸을 만들어서 업을 지어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변하지 않는 본래 성품을 보면 다 해결됩니다. 자기의 업대로 빗어놓았지만 알고 보면 다 하나입니다. 이것을 모르기 때문에 우리들은 끝없이 헤매고 있습니다.

염심의 여섯 가지를 밝히다. 집상응염(執相應染), 부단상응염(不斷相應染), 분별지상응염(分別智相應染), 현색불상응염(現 色不相應染), 능견심불상응염(能見心不相應染), 근본업불상응염 (根本業不相應染)이다.” 진여가 무명에 물들면 여섯 가지 마음이 나옵니다. 앞의 세 개는 상응염이고 뒤의 3개는 불상응염입니 다. 앞에 나온 6추 3세에서 3세는 무명업상, 능견상, 경계상이 었습니다. 이 가운데 무명업상은 근본업불상응염과 연결되고, 능견상은 능견심불상응염과 연결되고, 경계상(현식)이 현색불 상응염과 연결됩니다. 그 다음 6추로 넘어가서 지상이 분별지 상응염과 연결되고 상속상이 부단상응염과 연결되고 나머지는 집상응염과 연결됩니다. 불상응염 3가지는 3세와 연결되어 제 8식 아뢰야식과 상응하고, 상응염 3가지는 6추와 연결되어 제7식 말라식과 제6식과 상응합니다. 그 가운데 분별지상응염은 제 7식 말라식과 상응하고 부단상응염은 제6식과 상응합니다. 제6 식, 제7식이 생기려면 근거 뿌리가 모여야 하는데 그것이 집상 응염입니다. 우리는 수(受), 느낌을 안이비설신으로 받아 들이고 그 느낌이 모입니다. 안이비설신이 집의 입구 역할을 합니다. 이것들이 식이 작용하는 근본재료들을 제공합니다. 이 생에서 짓는 업의 대부분은 눈을 통해 짓습니다. 눈을 통해 형상을 보는데 이것이 마음을 일으키는데 많은 작용을 합니다. 보는 것은 냄새를 맡고 소리를 듣고 맛을 보고 몸으로 느끼는 것보다 접하기 쉽습니다. 이렇게 모으는 것이 집상응염입니다. 

  부단상응염이란 끝도 없이 오염된 것을 일으키는 것이며, 분별지상응염은 분별된 생각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이 분별은 업에 따라 분별합니다. 우리가 쓰고 아는 일반적인 단계는 상응염의 단계입니다. 상응염은 오염된 것에 상응한다는 말입니다. 나의 업과 내가 일으키는 생각은 같습니다. 나의 의식과 나의 업은 같은 것입니다. 내 업만큼 생각을 일으킵니다. 상응합니다. 내 안에 없는 엉뚱한 것을 일으키지는 않습니다. 이것은 중생들의 생각입니다. 그러나 부처는 자기중심적으로 분별, 판단하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도움이 되느냐 마느냐에 따라 생각합니다. 

불상응이란 상응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진여는 오염된 것으로 볼 때 모두 상응하지 않습니다. 물든 중생이 일으키는 생 각은 본질과 상응하지 않습니다.-통섭불교]

 

[지금까지 설명한 생멸인연, 즉 생멸연기(生滅緣起)의 이유를 밝히는 것이다. 마음의 본성은 본래 망념이 전혀 없는 무념의 것이나, 중생의 마음은 한편 염심(染心)을 가지고 있으며, 생멸하는 형태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염심을 가지고 있는 마음의 본체는 순수청정하고, 변함이 없는 불변의 것으로서, 이것이 생멸과 화합하여 심생멸(心生滅)이 되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은 끊임없이 동요하고 있으나, 마음의 본성은 고요하고 불멸인 것이므로, 우리가 그 불변의 본성을 자각하여야 하는 것이지만, 그러나 자기가 자기의 본성을 보려고 하는 한, 자기와 자기의 본성은 주객으로 분열되고 있는 것이므로, 본성으로의 귀환은 불가능한 것이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마음으로 하여금 마음을 보지 않게 되어야’ 본성으로의 귀환이 이루어 지는 것이다. 그래서 견성 성불이라는 용어는 기신론 이론에 맞지 않는 것이다.

마음의 본성은 항상 무념이고 불변이지만, 그러한 심성이 바로 ‘나와 너’라는 상대를 초월한 진여의 세계(일법계一法界)라는 사실을 마음 스스로가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 본성에 상응(相應)할 수가 없어 마음의 동요가 일어나고, 그것이 분별심을 일으키는 것이다. 이것이 홀연히 일어나는 망념이며, 바로 무명의 작용에 의한 것이다.

원효와 법장은 ‘영락본업경’을 인용하여, 이것은 바로 그 무명 이전에는 시작의 근본이 되는 별도의 법이 없었다는 것을 밝히는 것이기 때문에 ‘시작이 없다’고 말하고, 바로 그것이 기신론에서의 ‘홀연(忽然)’의 뜻이라고 설하고 있다.

또한 이는 미세한 번뇌와 거친 번뇌가 서로 의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이전에는 그것이 없었다고 설하는 것이며, 홀연히 일어난다는 것도 시간적인 것이 아니라, 그것은 일어나는 시초가 없다는 것을 말한다고 설하고 있다.-백련 전종식]

 

 * 有染心(유념심)

 • 枝末無明(지말무명)의 여읨

染心者(염심자) 有六種(유육종) 云何爲六(운하위육)

염심이라는 것은 여섯 가지가 있으니 무엇을 여섯이라 하는가?

一者(일자) 執相應染(집상응염) 依二乘解脫(의이승해탈)

及信相應地遠離故(급신상응지원리고)

첫째 집착으로 상응하는 오염=執相應染이니, 성문 연각의 이승의 해탈과 믿음에 상응하는 경지=信相應地에 의지하여 멀리 벗어나게 되기 때문이다.

 

집상응염(執相應染)= 집(執)은 집착을 일컬음, 아집과 법집이 있다. 여기서는 아집을 말하며, 앞에서의 집취상(執取相), 계명자상(計名字相) 즉 의식(분별사식分別事識)의 집착을 말한다.

신상응지(信相應地)= 십주, 십행, 십회향의 삼현위(三賢位). 십주이상은 신심이 순후해재고 신근이 성취되어 후퇴하는 일이 없으므로 그들을 신상응지 사람이라고 한다.

 

[執相應染 : 집착하기 때문에 물든 것. 집취상(執取相)과 계명자상(計名字相)에 해당한다. 이로 인해 기업상(起業相)이 생기고, 업계고상(業繫苦相)이 있다.

信相應地(신상응지) : 십주(十住), 십행(十行), 십회향(十回向)의 수행 단계, 신근(信根)이 성취되어, 줄어들거나 사라짐이 없는 상태.

* 憨山 : 信相應地(신상응지) - 십신(十信)으로부터 십주(十住)에 들어가 성공간(性空觀)을 깨달아 견혹과 사혹, 즉 분별사식을 증장하는 견일처주지(見一處住地)와 삼애를 홑으로 타파한 것을 두고 한 말이다. 집취상과 계명자상의 거친 번뇌만 우선 떨어져 단지 견혹과 사혹만 끊었을 뿐이다.

* 元曉 : 집상응염(執相應染)이란 의식이니, 견애 번뇌가 증장되는 뜻이며, 추분별집착(麤分別執着)으로 상응하기 때문이다. 이승인(二乘人)이라면 아라한의 자리에 이르러 견수 번뇌를 구경에 여의기 때문이요, 보살이라면 십해(十解) 이상에서 멀리 여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신상응지(信相應地)라고 한 것은 십해의 자리에서 신근이 성취되어 퇴실(退失)함이 없음을 말한 것이다. … 삼현의 자리에 들어갔을 때 이미 인공(人空)을 얻어서 견수번뇌가 현행하지 못하기 때문에 여읜다고 한 것이다.

* 지운 : 무상, 고, 무아의 삼법인의 깨쳐 인공(人空)을 체득해야 함.]

 

[상응염과 불상응염의 상응이란 업과 부합하거나 심소와 심왕이 같은 것을 가리킵니다. 내 속에 축적된 것과 나타내는 것이 같은 경우입니다. 그래서 중생들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업만큼 능력을 갖게 되어 알고 인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제8식 아뢰야식보다 근본적인 것들은 물들기 전의 것인데 이것은 우리가 써먹는 물든 후의 것들과 다릅니다. 그래서 근본 뿌리의 마음과 우리가 써먹는 오염된 업은 다릅니다. 이것이 불상응입니다. 제8 아뢰야식은 불상응염이고 제7 말라식과 제6식, 전5식은 상응염이 됩니다.

파도가 치면 우리는 파도가 치는 것을 인식하게 됩니다. 그래서 나중에 눈앞에 파도가 없어도 파도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 그 장면을 기억해냅니다. 그 생각의 뿌리는 제8 아뢰야식입니다. 우리는 보통 제7식까지는 알지만 제8식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실제 우리가 일으키는 모든 생각은 나와 대상이 있습니다.

여기서 불상응염 세 가지를 살펴보면, 불상응염 세가지 는 근본업불상응염, 능견심불상응염, 현색불상응염이 있습니다. 근본업불상응염이란 나와 대상이 나누어지기 전입니다. 예를 들어 파도가 치는 것을 생각을 했을 때 바늘구멍, 점과 같은 어떤 한 생각이 일어나는데 그 현상이 근본업불상응염입니다.

능견심불상응염이란 그 일어난 바늘구멍, 점과 같은 생각이 조금 구체화된 것입니다. 이 때는 아직 어렴풋한 상태라고 보면 될 것 입니다.

현색불상응염이란 그것이 완벽하게 구체화된 상태입니다. 그것이 투영된 것이 제7식인 말라식입니다. 그것을 ‘나’라고 생각하고 분별합니다. 제7식의 형상은 근본적으로 제 8식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그 시작은 작은 점과 같은 것에 있습니다. 우리가 만약 무언가를 생각한다면 이러한 과정들을 거친 것입니다. 
다시 파도로 돌아와서 파도가 치기 전 잠잠한 바다, 물은 제8식에 해당할 것입니다. 근본업불상응염, 능견심불상응염, 현색불상응염이 해당합니다. 무언가에 부딪히거나 작용으로 파도가 일어나는데 파도를 일으키는 그것은 제7식에 해당할 것입니다. 분별지상응염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끝없이 일어나는 파도의 경계, 작용은 제6식에 해당할 것입니다. 부단상응염 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파도가 일어나는 것을 모으는 것이 전오식인 집상응염입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본다면 눈을 통해 모읍니다. 눈 이외에도 다른 감각들을 통해 받아들이기도 하는, 그것이 제8식 아뢰야식에 자극이 되어 활성화되면 그것이 점에서 구체화되어 생각이 됩니다. 그 생각이 투영되어 나에게 저장된 업과 작용하여 개별적으로 구체화됩니다. 생각을 하고 행위를 일으키기 전에 감각을 통해 모으는 곳이 집(상응염)이며 전5식입니다.

우리는 물든 것만 빼면 부처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자기의 고집, 집착을 빼면 우리가 걸어가는 삶은 바로 부처의 삶 입니다. 앞서 진여나 진각, 시각, 불각이 다른 것이 아닌 하나임을 보았습니다. 이와 같이 중생들의 삶도 오염되어 있을 뿐 이지 원래 부처의 삶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 속에 중생과 부처가 공존하기 때문에 삶 속에서 부처되는 연습을 할 수 있습니 다. 연습을 하다보면 무언가를 객관화시킬 수 있고 긍정적으로 볼 수 있게 됩니다. 일어나는 것들 가운데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긍정이지만 나머지는 모두 부정입니다. 나 혼자 올바르고 똑똑하고 다른 사람은 바르지 않고 어리석게 보입니다. 이것이 100% 긍정이 되면 세상에 바르지 않고 옳지 않은 것이 없습 니다. 내가 부처라고 생각하면 삶 속에 물든 것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되돌아볼 수 있습니다. 끝없는 이기적인 마음이 생기지만 노력을 통해 해결할 수 있습니다. 공부, 수행의 노력이 있어야 아집과 무지가 광명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이러한 공부, 수행은 수행자도 할 수 있고 세속의 일반인도 가능합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여러 가지 일을 하면서 공부, 수행을 해야하기에 여러 가지 절제가 필요합니다.

여기서 ‘신’이란 책의 내용을 봅시다. “필자는 기독교인으로 자라났으나 하느님이 누구인가를 오래 추구한 끝에, 스피노자가 그랬듯이, 대우주(大宇宙)가 자신임을 깨달았다. 과학과 종교의 통일이요, 대통합이요, 분열된 모든 것으로부터의 해방이었다. 나의 기독교는 정점에 이르러 여기에 도달한 것으로, 이것을 남에게 전달하기는 힘들다. 각자가 깨닫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고, 깨닫기 위해서는 배우고 공부를 해야 하고 생각을 많이 해야 한다. 노력 없이 되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 종교지도자에게서 무엇을 들어도 비판적으로 생각하여 소화하는 능력이 있어야 노예가 되지 않는다. 그 수준에까지 가는 일은 자기 몫이다.” 여기서 대우주가 자신임을 깨달은 것이 바로 일심입니다. ‘비판적으로 생각하여 소화하는 능력이 있어야 노예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임제가 ‘부처님을 만나면 부처님을 죽이고 조상을 만나면 조상을 죽이라.’고 했습니다. 공부해서 부처되는 것은 우리의 몫입니다. 누가 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불교만 부처되어 깨닫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 어느 누구도 진지하게 공부하면 깨달음, 부처의 길이 열립니다. 
다시 6염심으로 돌아가서, 집상응염(執相應染)은 집착으로 상응하는 오염이니, 성문 연각, 이승 (二乘)의 해탈과 믿음에 상응하는 경지[信相應地]에 의지하여 집착을 멀리 여의게 된다.” 집상응염은 전5식에 해당합니다. 우리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몸으로 느끼는 모든 것에 집착합니다. 집착하기 때문에 내 속에 고여 있습니다. 집착하지 않으면 아무 상관없습니다. 우리는 근본적인 불안 때문에 집착을 하게 됩니다. 내 속에 집어넣어 자기화 시킵니다. 그렇게 우리는 자신의 업을 만듭니다. 만약 집착하지 않게 되면 눈으로 보는 것을 그냥 보고, 귀로 듣는 것을 그냥 듣고, 냄새 맡는 것을 그냥 맡고, 몸으로 느끼는 것을 그냥 느낍니다. 집착을 하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집착만 하지 않는다면 내 속에 무언가를 넣어놓는 것이 이 삶은 사는데 유리 할 수 있습니다. 돈도 많을 수록 좋습니다. 다만 집착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집착을 여의면 없어질 것 같지만 오히려 그 반대입 니다. 여기서 믿음도 중요합니다. 믿음이 없으면 공부하는 힘이 생기지 않습니다. 그리고 내 속에서 믿음이 있어야 다른 사람에게도 믿음이 생깁니다. 내가 헷갈리면 믿음이 생길 수 없습니다.-통섭불교]

 

[여기에서는 삼세육추, 오식(五識, 업식(業識), 전식(轉識), 현식(現識), 지식(智識), 상속식(相續識)) 등의 무명에 의해 발생된 생멸심(生滅心)이 연기하여 생기(生起)한 염심(染心)을 어떻게 다스려 차단해 가는 것을 다루게 된다. 처음 무명에 의하여 번뇌가 발생되는 양상은, 미세한 번뇌상태로부터 시작하여 크고 거친 번뇌로 전개되는 유전문(流轉門)의 입장에서 설명된 것이지만, 여기에서의 염심 번뇌의 차단은, 반대로 크고 거친 번뇌로부터 차단하기 시작하여 차차로 미세한 번뇌까지 차단해 가는 환멸문(還滅門)의 입장에서 설명하고 있다. 예를 들어 먼지를 털 때, 크고 거친 먼지는 쉽게 떨어지지만, 작고 미세한 먼지는 쉽게 떨어지지 않는 것과 같이, 번뇌를 차단하는 경우에도 크고 거친 번뇌로부터 작고 미세한 번뇌를 향하여 차단해 가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다루는 염심(染心)에는 여섯 종류가 있다.

첫째는 집상음염(執相應染)으로, 이것은 삼세 육추의 아홉 상 가운데에서 거친 번뇌의 모습으로 분류되는 육상 중 집취상(執取相)과 계명자상(計名字相)의 번뇌에 해당되는 번뇌이다. 의(意), 의식(意識)의 분류로는 분별사식(分別事識)인 의식(意識)에 속하는 번뇌이다. 집취상(執取相)은 ‘경계를 연(緣)으로 망념을 일으키고 괴로움과 즐거움에 머물러, 마음이 집착을 일으키기 때문에 괴로움은 피하고자 하고, 즐거움을 항상 유지하고자 하는 집착을 일으키고, 계명자상(計名字相)은 그렇게 집착한 대상에 대하여, 헛된 가명와 말을 붙여 분별하는 것이다. 이러한 집착의 바탕에는 자아 의식이 활동하고 있다. 이것은 아집(我執)을 기초로 일어나고 있으며, 사랑과 미움에 대한 번뇌 집착이 현저하기 때문에, 이를 일컬어 집상응염(執相應染)이라고 한다.

상응(相應)이란 서로 대응한다는 의미로, 번뇌가 상응한다고 하는 것은 ‘나와 너’, ‘자아와 대상’, ‘심왕(心王)과 심소’가 서로 관계하여, 동일하게 맞아 일어나는 번뇌를 말하면, 자아를 기초로 하여 일어나는 것이므로 아집을 차단함으로서 끊어지게 된다. 아집이 없어지는 것은 이승(二乘) 중 성문승은 아라한의 위치이며, 연각승은 그 수행이 완성되어 연각, 독각이 된 때이다. 또한 십주, 십행을 거쳐 십회향의 신상응지에 도달된 때에 이 번뇌는 차단된다. 십신의 위치가 충족되고, 다 다음 십주 이상에서 신심이 두터워져, 신근이 성취되어, 물러서는 일이 없기 때문에 그들을 신상응지의 사람이라고 말한다. 성자(聖者)에 들어가기 이전의 위치이다. 즉 이승의 해탈과 초발의보살의 신상응지에서 차단되는 번뇌이다. -전종식]

 

[장수왕 이야기

장수왕 이야기는 부처님께서 제자들에게 인과를 설명해줄 때 하셨던 것입니다. 장수왕은 코살라국의 왕이었습니다. 당시 코살라국 남동쪽에 카시국이 있었는데 그곳의 왕은 범예왕이었습니다. 장수왕은 어질고 착했던 반면 범예왕은 악하고 악착같았습니다. 카시국은 코살라 국에 비해 약소국이었으나 범예왕이 장수왕의 빈틈을 타 전쟁에서 승리합니다. 그래서 장수왕은 나라를 버리고 아들 장생태자를 데리고 산에 숨어 살게 됩니다. 장생태자는 복수를 하고 나라를 되찾고 싶었으나 장수왕은 원한을 만들지 말라고 말합니다. 자신이 마음을 잘 먹으면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합니 다. 어느 날 마을 축제 때 씨름대회에서 뛰어난 장생태자를 보고 백성 중 누군가가 장수왕이 살아있다는 것을 알아챕니다. 범예왕은 승리한 후에도 안심하지 못하고 전국에 장수왕과 장생태자를 찾기 위해 사람을 보냅니다. 그 백성을 통해 밀정에게 장수왕의 장소가 알려지고 장수왕은 사로잡혀 처형을 당합니다. 그 후 장생태자는 복수를 위해 범예왕의 측근이 되어 뛰어난 무예를 뽐내며 동시에 이야기로 왕을 즐겁게 합니다. 범예왕의 최측근이 된 장생태자는 어느 날 범예왕이 혼자 낮잠을 자는 것을 봅니다. 그 때 그는 복수를 하려다 아버지의 말이 떠올라 갈등합니다. 그러는 사이 범예왕이 깼고 그는 그 사이 꾼 꿈 이야기를 장생태자에게 해줍니다. 꿈에 장생태자가 자신을 죽이려고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장생태자는 범예왕에게 자신이 장생태자이며 왕을 죽이려고 했다고 밝힙니다. 하지만 아버지 장수왕의 ‘원한은 원한을 낳으니까 어떠한 일이 있어도 너의 선에서 끝내도록 하라.’라는 말 때문에 그러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범예왕은 장생태자의 그 진실된 마음과 장수왕의 말에 감동하여 자신의 지난 과오를 반성하게 됩니다. 그 후 장생태자를 자기의 양아들로 입적시켜 나라를 물려줍니다. 결국 원한을 원한으로 안 갚고도 장생태자는 원래 나라를 되찾은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아쇼카 왕의 전생 이야기도 살펴봅시다. 부처님이 어느 날 아난과 함께 마을에 탁발을 하러 나갔습니다. 마을 어귀 에서 모래를 가지고 소꿉장난을 하던 키 작은 아이가 모래로 밥을 지어 정성껏 부처님께 올립니다. 그것을 보고 부처님께서는 아난에게 모래 밥을 받게 하여 정사로 돌아와 허물어진 벽에 바르라고 합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이 아이가 다음 생에 국왕으로 태어날 것이다. 환희심으로 이 모래를 공양 올렸으니 그 공덕으로 삼보를 공경하여 팔만 보탑을 세울 것이다.” 이 아이가 아쇼카 왕의 전생이었습니다. 팔만 보탑은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후 그 사리를 8등분해서 여덟 개의 탑이 세워집니다. 불교가 인도 전역으로 퍼지게 되자 아쇼카 왕은 탑이 인도 전역에 있어야겠다고 생각하여 사리를 나누어 팔만 개의 탑을 세웁니다. 그래서 인도 전역에서 공양을 올리고 예불을 올릴 수 있도록 한 것이었습니다. 아쇼카 왕은 출가를 하지 않았지만 불법이 지금까지 전해지게 하는데 1등 공신이 됩니다. 임금이 되어 좋은 환경에 만족하지 않고 불교를 나라 차원에서 전법합니다. 이렇게 한 생을 살 수 있습니다.

내 속에 진리에 대한 공부가 쌓이거나 진실된 마음이 있으면 세상이 대응합니다. 내 속에 쌓이는 만큼 세상은 물질적인 것 을 내게 줍니다. 내 마음이 깨끗하지 못하면 주어진 것을 악한 것으로 잘못 쓰게 되고, 내 마음이 청정하면 주어진 것으로 모든 중생을 이롭게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이 제대로 되기 위해서 내가 진리에 대한 공부를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돈이든 권력이든 명예든 세상을 통해 잘 전파되려면 덕성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집착을 없애는 것에서 부터 시작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끝없는 집착의 연속 속에서 삽니다. 아집, 아만, 아애, 아치에 휘둘려 살게 됩니다. 공부하지 않는 한 이것들은 깨트릴 수 없습니다. 아집이 깨지면 정견이 생깁니다.-통섭불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