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승기신론

대승기신론 正宗分(정종분)의 解釋分(해석분) 19

Skunky 2022. 12. 13. 09:00

* 意識(의식)

復次言意識者(부차언의식자) 卽此相續識(즉차상속식)

또한 의식이라고 하는 것은 곧 상속식에 의지하여 있는 것이니, 

依諸凡夫(의제범부) 取著轉深(취착전심)

모든 범부가 취하고 집착함에 따라 점점 깊어져,

計我我所(계아아소) 種種妄執(종종망집) 隨事攀緣(수사반연)

나와 나의 것을 헤아려 따지고, 갖가지 허망한 집착으로 사물에 따라 반연하여 

分別六塵(분별륙진) 名爲意識(명위의식)

육진 경계을 분별하므로 이에 이름하여 의식이라고 한다.

 

의식(意識)= 분별사식, 사물을 분별하는 거친 마음의 작용을 말한다. 의식은 마음 안팎의 사물을 분별하는 것이어서, 분별사식이라고도 하는 것이다. 유식설의 제6식인 의식과 구별하여야 한다.

의식이 바로 상속식이다= 진제의 오역이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전종식 대승기신론에 대한 원효주석의 비판적연구, 대승기신론 연구외 참조 바람.

반연(攀緣)= 망념이 대상에 집착하여 여러 가지로 활동하는 것.

 

[計我我所(계아아소) : 나와 내것을 헤아림.

隨事攀緣(수사반연) : 반연이란 대상에 의해 마음이 움직이는 것. 事(사)는 보통 말하는 일이 아니라 인식의 대상이 되는 모든 유무형의 것.

* 憨山 : 여기에서는 의식이 바로 앞의 상속식이지만 단지 범부가 외부의 육경(六境)을 취하여 나와 내것으로 집착하고 육진을 반연하여 나의 수용(受用)으로 삼는다는 것을 밝혔다. 그러므로 사고가 계속해서 분별한단 뜻에서 意의 識이라고 명칭하였다.

대체로 이 의식은 상속식을 근본 뿌리로 삼는다. 때문에 상속하는 분별로 아애(我愛)를 깊이 집착하여 견사이혹(見思二惑)을 일으키고, 삼업을 짓는 것은 바로 의식일 뿐이다. 이는 육추상 가운데 집취상(執取相)과 계명자상(計名字相)에 해당한다.- 물처럼바람처럼]

 

[‘言意識者 卽此相續識 의식이라고 말하는 것은, 바로 상속식이다’ 의식(意識)을 설한 본문에 대하여 필자(전종식)은 논문을 발표함과 동시에 상당한 이론을 전개하여, 이것이 바로 진제의 오역(誤譯)에 기인한 것이라고 밝혔다.  그것은 앞에서 이미 의(意)의 오식(五識)에서 설명되고 분류된 아뢰야식(阿賴耶識) 성격의 상속식(相續識)에 대하여 이를 제7식(말나식) 성격의 의식에 해당시켰기 때문이다. 상속식은 삼세육추의 상속상(相續相)에서 설하였듯이, 본문의 설명과는 상치되는 내용을 담고 있으며, 본문의 의식을 상속식으로 설명하는 것은 기신론의 정연한 이론에 비추어 볼 때 이치에 맞지 않으며, 이는 진제(眞諦)의 오역(誤譯)에 기인 된 것이라는 것이 확실하다.

현재 기신론의 원전이 상존하지 않고, 두 종류의 번역본만이 현존하는 입장에서 이 부분에 대한 실차난타(實叉難陀)의 신역을 면밀히 검토해 보면 그것이 오역(誤譯)이라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 의식을 상속식이 아닌 상속식을 의지하여 나타난 분별사식(分別事識)으로 보고 본문을 해석해 가면 혼란에서 벗어난, 정연한 이론으로 설명될 수 있다.

본문에서 ‘의식이 바로 상속식’의 부분을 신역의 내용에 맞추어 ‘의식은 상속식을 의지해 있는 것’으로 해석한다. 분문에서 의식을 다른 이름으로 분리식(分別識) 또는 분별사식(分別事識)이라고 설하고 있는 것이, 역시 상속식과는 거리가 먼 타당한 이름들이다.-전종식]

 

亦名分離識(역명분리식) 又復說名分別事識(우부설명분별사식)

또한 분리식이라고도 이름하며, 다시 사물을 분별하는 식=分別事 識이라고도 이름하나니, 

此識依見愛煩惱增長義故(차식의견애번뇌증장의고)

이 식이 견번뇌와 애번뇌=見愛煩惱에 따라 증가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견애번뇌(見愛煩惱)= 번뇌는 견(見)과 애(愛)의 두 가지로 나눈다. 도리에 미(迷)한 번뇌를 견혹(見惑)이라 하고, 정서적으로 애착하고 탐하는 등의 번뇌를 수혹(修惑)이라 한다

 

[물처럼바람처럼- 見愛煩惱(견애번뇌) : 견번뇌와 애번뇌라는 뜻으로 견번뇌는 이치에 어두워 일어나는 번뇌이며 상사각에서 끊어진다. 애번뇌는 애착으로 인한 번뇌로서 생존욕이나 생식욕 같은 선천적인 것으로 이치를 안다고 해서 끊어지지는 않는다. 견번뇌는 견혹(見惑)으로 인한 것이고, 애번뇌는 생활상의 애착을 버리지 못한 것이므로 수혹(修惑)으로 인한 번뇌이다.

* 元曉 : 분리식이라 이름한다는 것은 육근에 의해 각각 육진을 취하는 것이니, 이는 말나식이 각각의 근에 의하지 않는 것과는 같지 않기 때문에 분리식이라 이름한 것이다. 또 과거와 미래, 안과 밖의 여러 가지 사상(事相)을 분별할 수 있기 때문에 다시 분별사식이라고 이름한다고 하였다.

依見愛煩惱增長義故라는 것은 분별사식의 뜻을 해석한 것이니, 왜냐하면 견수번뇌(見修煩惱=見愛煩惱)가 증장됨에 따라 여러 가지의 일을 분별할 수 있기 때문이다.]

 

[통섭불교- 그래서 삼계(三界)는 허망한 것이며, 오직 마음이 지은 것이니, 마음을 여의면 육진의 경계도 사라지게 된다. 일체법이 모두 마음으로부터 일어나 망령으로 생겨난 것이니 일체의 분별은 곧 스스로의 마음을 분별한 것이며, 마음은 마음을 볼 수 없 기에 모양을 가히 얻을 수 없다. 세간의 모든 경계는 중생의 무명의 허망한 마음에 의지하여 머무름을 얻는다. 그러므로 일체 법은 거울 속의 형상과 같아서 본체를 가히 얻을 수 없고 오직 마음일 뿐 허망한 것이다. 왜냐하면 마음이 생기면 갖가지의 법 이 생기고 마음이 없어지면 갖가지의 법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지식이 실제로 나타나는 것은 의식을 통하여 제 육식으로 표현됩니다. 그래서 상속식은 의식이며, 제 육식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상속식을 제 육식이라고도 합니다. 

“의식의 유전함을 밝히다. 또한 의식(意識)이라는 것은 곧 상속식이니 범부의 취착함이 점점 깊어져서 나[我]와 나의 것[我 所]을 따지고 여러 가지 허망된 집착으로 일을 따라 반연하여 육진(六塵) 경계를 분별하므로 의식이라고 말한다. 또한 분리식(分離識)이라고도 이름하고 다시 분별사식(分別事識: 사물을 분별하는 식)이라고도 하며, 이 식이 견애번뇌(見愛煩惱)를 의지하여 증장한다는 뜻이다.” 이 상속식이 구체적으로 TV에서 김태희를 보는 순간 내 속에 내재되어 있는 티끌 하나가 움직이기 시작하여(업식) 어렴풋한 형체를 이루고(전식) 더욱 뚜렷한 형체로 완성되며(현식), 이것이 거울에 투영되어 분별을 하게 되고(지식), 분별한 것이 연속적으로 의식화되며(상속식), 이것이 구체적으로 원망하고 미워하는 마음을 일으킨다(의식). 이러한 마음으로 상대방과 감정을 교감하면서 원망하는 마음이나 미워하는 마음이 증장되어 다른 형태의 원망하는 마음이 지식에 저장 되며, 이 마음이 거울에 투영되듯 현식화 되며, 어렴풋한 전식을 거쳐 무명 업식으로 아뢰야식에 저장되게 됩니다.

일체 범부의 심적 작용에는 집착심이 강하게 활동하고 있지만, 그 집착이라고 말하는 것은 ‘나에 대한 집착’과 ‘내 것에 대한 집착’이 있다. 범부의 자아의식은 아집에 사로잡혀 아애(我愛), 아만(我慢), 아견(我見), 아치(我癡) 등의 번뇌와 함께 생성되고 있다. 여기에서 탐욕(貪) 노여움(瞋)과 치심(痴)등의 강력한 번뇌가 일어난다. 범부중생의 자아(自我)인식과 아집에는 이것들이 함께 하고 있는 것이다. 아소(我所)는 내 것에 대한 집착이지만 또한 ‘내 것이 아닌 것’과의 두 가지 모습으로 인식하는 것이 범부중생이다. 이처럼 우리 범부는 아(我)와 아소(我所)를 분별하고, 여러 가지 맹목적 집착과 인식대상에 따른 색성향미촉법 등의 육경(六境)을 총체적 상으로 분별하고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의식이라 불린다. 이 의식은 육진(六塵)의 개별적 대상을 인식하는 것이므로 분리식(分離識)이라 하며, 분별사식(分別事識)이라 불리는 것은, 개개의 사물을 대상별로 분별하여 인식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아집을 기초로, 대상을 인식하는 것을 의식이라 하고, 육근(六根)을 기초로 개별적 경계를 인식하는 것을 분리식(分離識)이라 한다.

此識依見愛煩惱增長 이 식이 견애에 의하여 번뇌가 증장한다’는 두 가지로 나누어 고찰하는 번뇌, 즉 견혹(見惑)과 수혹(修惑)에 의하여 번뇌가 늘어난다는 것이다.

우리들의 인식이 종교적 차이나 사상적 차이에 의하여 애착이나 미움이 발생하고 있으나, 그러한 이데올로기 때문에 집착을 일으키는 것도 견혹의 하나이다. 소유욕에 의하여 대립과 미움이 깊어지는 탐욕은 수혹의 하나이며, 이데올로기의 주장이나 소유욕의 근저에는 항상 자아에의 집착이 있다. 그렇다면 자아의식에 수반되지 않는 상속식을 본문의 의식이라고 번역한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다.

갑작스런 위험에 처했을 때 무의식적으로 몸을 피하는 등의 본능적 인식은, 자아의식이 수반되지 않은 상속시의 작용이며, 예측하지 못한 난데없는 발견이나 신비적 체험, 일상적으로 떠오르는 아이디어 등은, 연후에 자아의식과 연결되는 것이므로 이 또한 자아의식이 동반되지 않는 상속식의 작용이다.

상속식은 지나간 과거의 경험을 기억하고 생각해 낸다던가, 살생이나 도둑질 등의 악업을 마음의 상처로서, 무의식의 영역에 보존시키고, 더욱 그 업을 성숙시켜 고락의 과보를 받게 하는 것이다. 또한 밀에 어떤 일을 하겠다고 갑자기 생각나게 하는 것도, 자아의식을 초월한 상속식의 작용이며, 유식설(唯識說)에서는 이와 같은 작용을 아뢰야식(阿賴耶識)이라고 설해지고 있다.

이상과 같은 자아의식이 수반되지 않은 상속식을 자아의식이 가장 강한 본문의 의식에 연관시킨다면 이는 기신론의 정론에 어긋나는 것이다. 의식은 본래부터 추대분별을 일으키는 것이지만 이 추대분별 자체도 상속식에 저장하고 윤생하는 것이므로, 상속식은 말 그대로 상속과 재생의 기능일 뿐 분별의 기능은 없는 것이다.]

 

[견혹(見惑)견도소단혹(見道所斷惑, 산스크리트어: darśana-mārga-prahātavyānuśaya)의 줄임말로, 문자 그대로는, 견도(見道)에서 끊어지는 번뇌를 뜻한다. 의미상으로는, 진리 즉 4성제에 대해 미혹하게 하는 번뇌로, 이지(理智)적인 번뇌를 말한다. 한편, 견혹과 대비하여, 수도(修道)에서 끊어지는 번뇌를 수혹(修惑)이라 하는데, 수혹은 삼라만상의 사물의 진실한 모습에 대해 미혹하게 하는 번뇌로, 정의(情意)적인 번뇌를 말한다. 견혹은 견번뇌(見煩惱) · 견장(見障) 혹은 견일처주지(見一處住地)라고도 한다.
견혹을 다른 말로는 견소단(見所斷) · 견도소단(見道所斷) 또는 견단(見斷)이라고 하는데, 4성제의 이치[理]를 바르게 알지 못하는 번뇌로서 견도의 계위에서 끊어지는 번뇌를 뜻한다. 이에 대해 수혹을 수소단(修所斷) · 수도소단(修道所斷) 또는 수단(修斷)이라고 하며, 현상의 사물[事]에 미혹한 번뇌로 수도의 계위에서 끊어지는 번뇌를 뜻한다.
또한 견혹을 다른 말로는 미리혹(迷理惑)이라고 하는데, 이것의 문자 그대로의 뜻은 '이치[理]에 미혹한 번뇌'로, 이지적인 번뇌, 즉, 이성 즉 견해에 관련된 번뇌를 가리킨다. 이에 대해 수혹을 다른 말로는 미사혹(迷事惑)이라 하며, 이것은 문자 그대로의 뜻은 '사물[事]에 미혹한 번뇌'로, 현상의 사물의 참된 모습[實相]을 알지 못하는 알지 못하는 번뇌를 뜻하는데, 정의적인 번뇌, 즉, 마음에 관련된 번뇌 또는 감정과 의지에 관련된 번뇌를 가리킨다.
부파불교와 대승불교 등 불교 일반에서 받아들이고 있는 불교의 수행 계위로, 견도 · 수도 · 무학도(無學道)의 3도(三道)가 있다. 이 가르침에 따르면, 수행자는 이지적인 번뇌 즉 견소단을 극복하는 견도의 단계를 먼저 거쳐 견해가 바르게 선 후, 계속하여 노력하여 정의적인 번뇌 즉 수소단을 극복하는 수도의 단계를 거쳐 사물의 실상에 대해 바르게 알게 되고, 그리하여 최종적으로 완전한 깨달음의 상태에 도달한다. 이와 같이 견소단 · 수소단, 즉, 견혹 · 수혹의 번뇌 분류는 불교의 수행계위와 밀접히 관련되어 있는 실천적인 분류로, 견혹과 수혹에 대한 확실한 이해를 가지는 것은 견도의 단계를 통과하는데 도움이 된다.-위키백과]

 

* 緣起(연기)의 深奧(심오)

依無明熏習(의무명훈습) 所起識者(소기식자) 非凡夫能知(비범부능지)

무명의 훈습에 의지하여 일어나는 식이란 범부가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며, 

亦非二乘智慧所覺(역비이승지혜소각)

이승의 지혜로도 깨닫는 바도 아니다.

謂依菩薩(위의보살) 從初正信(종초정신) 發心觀察(발심관찰)

이는 보살이 처음의 바른 믿음=從初正信으로부터 발심하여 관찰함을 의지하여 

若證法身(야증법신) 得少分知(득소분지)

법신을 증득하면 조금 알 수 있게 되며, 

乃至菩薩究竟地(내지보살구경지) 不能盡知(불능진지) 唯佛窮了(유불궁료)

나아가 보살의 구경지에 이른다 하여도 다 알 수는 없고, 오직 부처님만이 궁극까지 모두 아신다.

 

훈습(熏習)= 꽃향기가 옮겨 배는 것처럼, 세력이 간한 것이 다른 것에 미치어 자기의 힘을 옮겨 붙게 하는 것. 무명이 진여에 훈습하여 무명의 힘에 진여가 동화되어 생멸심이 된다

처음 정신(初正信)= 보살의 최하위, 십신의 만위에 이르러 믿음이 완성되면 정신을 일으킨다.여기서는 그 위 십주(十住), 십행(十行),십회향(十廻向)의 삼현위(三賢位) 보살을 일컫는다.

법신(法身)= 초지이상이 되면 불의 법신을 깨닫는다. 연기의 법은 우주에 편만되어 있어서 이(理)와 합체된 불(佛)이 법신이다.

보살 구경지(菩薩究竟地)= 보살의 최상위, 십지의 만심(滿心)

 

[正信(정신) ; 보살 십신(十信)의 첫 단계.

究竟地(구경지) : 보살의 마지막 단계인 법운지(法雲地)

元曉[별기] : 이 마음은 체가 깨끗하면서도 물들어 있고, 마음이 움직이면서도 고요하니 염정(染靜)의 두 가지가 없으며, 동정(動靜)의 구별이 없다. 염정이 두 가지가 아니며, 동정의 구별이 없지만 또한 하나도 아니다. 이 같이 절묘하므로 알기가 어렵다]

 

何以故(하이고) 是心從本已來(시심종본이래) 自性淸淨(자성청정)

왜냐하면 이 마음은 본래부터 자성은 청정하지만 

而有無明(이유무명) 爲無明所染(위무명소염) 有其染心(유기염심)

무명이 있어, 무명에 의하여 물듦이 되어 물든 마음=染心이 있는 것이다.

 

염심(染心)= 번뇌에 오염된 마음. 무명에 의하여 생멸심이 된 마음

 

[여기서 心(심)은 아리야식을 말한다. 

自性淸淨 而有無明은 무명에 의해 물들어 있지만 본성은 변하지 않으니, 즉 바람에 의해 물결이 일지만, 그 물결이 물의 성품을 떠나지 않는 것과 같다.]

 

雖有染心(수유염심) 而常恒不變(이상항불변) 是故此義唯佛能知(시고차의유불능지)

비록 물든 마음이 있으나 항상 불변하니, 그러므로 이 뜻은 오직 부처님만이 알 수 있는 것이다.

 

[본래 청정한데도 물듦이 있고, 진여 본체의 작용은 물듦이 있으나 본체 자체는 항상 변하지 않는다. 이러한 이치는 워낙 심오하여 범부나 이승은 알 수 없고, 법신을 증득한 보살은 조금 알 수 있으며, 부처만이 온전히 알 수 있다고 하였다. 물론 설명을 들으면 이해는 할 수 있으나, 증득하지는 못한다.]

 

[ “인연의 체상을 설하다. 인연의 깊은 도리, 인연의 차별된 상태이다.” 인연의 체상은 깊은 도리와 차별된 상태입니다. 인과 의 뿌리는 얼마나 깊은지 모릅니다. 인연의 차별된 상태는 다 다른 것입니다. 이렇게 몸받아 살아가는 모든 인연은 각각 뿌리에 깊은 도리가 있습니다.

“인연의 깊은 도리를 밝히다. 무명의 훈습에 의지하여 일어 나는 식(識)은 범부가 능히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또한 이승( 二乘)의 지혜로 깨닫는 것도 아니다. 이는 보살이 처음 바른 믿음을 발심하여 관찰함을 의지하여 법신(法身)을 증득해도 조금 알게 되며 나아가 보살의 구경지(究竟地)에 이른다 하더라도 다 알 수 없으며 오직 부처만이 다 알 수가 있다.” 우리는 근본적으로 진여가 무명에 오염된 상태입니다. 식(識)은 우리가 일으키는 모든 생각을 말합니다. 이 속에 든 것은 아무도 모릅니다. 모르는데 생각을 자꾸 일으켜 경계에 부딪히면 알게 됩니다. 이것은 이승(二乘) 정도라도 모릅니다. 성문, 연각, 보살, 부처 중 성문, 연각 단계에서는 모른다는 말입니다. 연기를 깨친 연각승도 깊은 인연의 도리를 깨달을 수 없습니다. 부처님 제자 가운데 신통 제일인 목건련도 모든 것을 다 알 수 없습니다. 신통력으로도 돌아가신 어머니가 어느 지옥에 있는지 찾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가 왜 이렇게 태어난지 본질적으로는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사소하게 일어나는 것들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어떤 문제가 생겼을 경우 원인을 알면 해결할 수 있습니다. 암에 대해 살펴봅시다. 이것은 주로 스트레스가 원인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끝도 없는 조화입니다. 정신이든 육체든 조화가 깨지면 문제가 발생합니다. 세포가 일정한 속도로 분열해야 하는데 스트레스에 의해 혼자서 매우 빠른 속도로 분열합니다. 그렇게 되면 어떤 덩어리 같은 것이 생기게 됩니다. 이런 것이 암이 되는 것입니다. 

법신을 증득했다는 말은 견성의 세계에 들어갔다는 말입니 다. 보살 초지도 여기에 해당함으로 견성입니다. 부처가 된 상 태가 시작된 것입니다. 인연의 깊은 도리는 보살의 구경지에 이르러도 다 알 수 없고 오로지 부처가 되어야만 다 알 수 있습니다. 그 전에는 부분적으로 알 수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인연의 깊고 깊은 도리는 부처가 되어야만 다 알 수 있는 것입니다. ]

 

[불생불멸의 심성이 어찌하여 근본무명(根本無明)의 훈습에 의하여 아리야식이 되는 것인지, 이것은 범부뿐만 아니라 성문, 연각 등 이승의 지혜로도 깨닫는 바가 아니라는 것이다.

불타만이 아는 경지란, 이 마음은 본래부터 자성(自性)이 청정한 것이지만, 실질적으로는 무명이 있고, 이 마음은 무명에 오염되어 염심이 되고 있다는 것을 불타는 구경지의 만위에 이르러 일념이 상응하여 최후의 업식 즉 근본업불상응염이 이탈하면서 무명에 의한 최초의 생상(生相)을 보고(본다는 것은 깨달아 안다는 의미), 사라지는 무명의 구조를 알았기 때문이다.

마음은 오명되어 있다고 하지만, 그 마음의 본성은 항상 맑고 고요한 그대로이어서 변하지 않는 상항불변(常恒不變)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 범부들이 이 같이 영원불변의 자성청정심이 객진번뇌(客塵煩惱)에 의하여, 어찌하여 오염되는 것인가의 연기의 깊은 이치에 대하여 무엇인가 이해되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망상에 불과하다는 것이, 본론의 취지이다. 이와 같이 여래장연기(如來藏緣起)는 여래지(과지果地)에 이른 불타와 구경지의 만위에 이른 대력의 보살만이 알 수 있는 것이며, 범부는 불타가 말하는 것을 믿을 뿐인 것이다. 여기서 필자(전종식)가 대력 보살을 불타와 같은 지위로 보는 것은 인지(因地)의 극위에 이른 보살은, 등각(等覺)보살로서 과위(果位)의 묘각(妙覺) 불타와 그 경지는 같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