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승기신론 正宗分(정종분)의 解釋分(해석분) 16
[차별없는 참사람, 펼치면 우주 만물을 덮고, 접으면 터럭 하나도 그 위에 놓지 못한다. 홀로 밝히는 빛이지만 온 우주를 비추고도 부족함이 없다. 눈에도 안 보이고 귀에도 안 들리니, 이를 무엇이라 이름하겠는가? <설사 한 물건이라 해도 맞지 않는다(육조 혜능)>는 옛 스승의 말 그대로다. 그러니 어찌하겠느냐. 스스로 들여다보는 수밖에.”
“설사 한 물건이라 해도 맞지 않는다.”는 육조 혜능과 남악 회양의 선문답입니다. 남악 회양이 혜능을 찾아가 ‘부처가 무엇인가’ 하고 물을려고 했는데 혜능이 먼저 묻습니다. “어떤 한 물건이 왔는가?” 남악은 여기서 말문이 막혀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8년 동안 도대체 한 물건이 무엇인가 생각하며 화두에 집중하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깨우치고 보니 한 물건이라 해도 맞는 답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부리나케 혜능을 찾아가서 “설사 한 물건이라 해도 맞지 않습니다.”고 말하자 혜능이 “ 알았으면 됐지. 뭣하러 찾아왔는고.” 라고 했습니다.
왜 공부해야 하는가. 스스로 들여다보지 않으면 알 수 없습니다. 세상의 묘한 진리는 내가 아는만큼 내 세상입니다. 진리를 깨우치고 여유작작하게 걸어가는 그 모습이 바로 화엄입니 다. 공부를 해야 압니다.-통섭불교]
• 覺(각)과 不覺(불각)의 同相(동상)과 異相(이상)
復次覺與不覺(부차각여불각) 有二種相(유이종상)
云何爲二(운하위이) 一者同相(일자동상) 二者異相(이자이상)
또 다시 각과 불각에는 두 가지 모습=二種相이 있으니, 무엇이 그 둘인가?
첫째는 같은 모양=同相이고, 둘째는 다른 모양=異相이다.
[동상이상(同相異相)= 동상은 진여문이고, 이상은 생멸문이다. 진여문의 입장에서 보면 일체는 평등하고 동일하여 동상이나, 생멸문의 입장에서 보면 모든 법은 각기 인연에 의하여 성립되고 있으므로 각기 다른 이상이다.
또 각이라는 것이 어떤 볼 수 있는 물질이나 형상이 아닌 것이지만, 불타와 같은 어떤 색상(色相)을 볼 수 있는 것은, 불타가 오로지 중생을 구제하기 위하여 중생의 번뇌심에 따라 속세에 나타난 것일 뿐이며, 이 지혜는 물질적 성질의 것이 아니고, 또한 그 불타의 색신 색상은 진실한 지혜 자체가 아니므로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각과 불각이 다르다고 하는 까닭은 마치 토기의 모양이 각각 같지 않음과 같이, 무루의 결함 없는 각과 무명의 불각은 속세 인간의 염법(染法)에는 제각기 차별이 있는 것이므로 그에 따라 각(覺)이 수염환(隨染幻)의 차별 즉 중생의 번뇌심에 따라 불신이 나타나기 때문에 차별이 있다는 것이며, 불각(不覺)은 본래부터 근본무명과 지말무명이 차별이 있기 때문에 성염환(性染幻)의 차별이 있다는 것이다.
각과 불각은 진여문(眞如門)의 입장과 생멸문(生滅門)의 입장에서 각기 동상(同相)과 이상(異相), 다시 말하자면 동일한 면과 상이한 면을 설명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물과 얼음과 수증기의 동상은 화학기로호 H2O이다. 그러나 그 순수 H2O의 이상은 물과 얼음과 수증기로 차별되는 물리적 삼태(三態)이지만, 이 세 가지 형상도 청차만별의 이상(異相)이 있음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동상은 H2O의 순수가 생멸문의 인연 화합으로 물과 얼음, 수증기가 되듯이 각과 불각은 다 같이 진여일 따름이다.-전종식]
[각과 불각의 동이(同異)를 설하다. 각(覺)과 불각(不覺)에는 두 가지 모양의 상(相)이 있다. 첫째는 같은 모양=同相이고 둘째는 다른 모양=異相이다.” 각과 불각은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합 니다. 일심 속에 모든 것이 있습니다. 불각에서부터 진여의 세계까지 모두 있는 것이 대승기신론입니다. 깨닫지 못한 우리도 일심 속에 있으며 진여가 같이 들어있습니다. 단지 오염되어 있으면 불각이고 오염되어 있지 않은 진실은 각일 뿐입니다. 나의 삶도 각과 공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하루의 삶은 부처의 삶인 것입니다.]
- 同相(동상)
同相者(동상자) 譬如種種瓦器(비여종종와기) 皆同微塵性相(개동미진성상)
같은 모양=同相이란, 비유하자면 여러 가지의 질그릇(도자기)이 모두 같은 미진(먼지)로 되어 있는=性相인 것처럼
성상(性相)= 성은 체를 말하고 성질을 말한다. 도자기의 성은 흙이고 상은 점토의 접착력이나 구우면 단단해지는 등의 성질을 말한다.
[질그릇은 모양이 다 다르지만 근본적으로 먼지(가루)로 만들어진다.-물처럼바람처럼]
[각과 불각은 같다고 말할 수도 있고 다르다고 말할 수도 있다.
여기서 같다고 말하는 이유는 마치 여러 가지 토기가 모두 한결같이 흙으로 만들어진 것과 같이 완전무결한 각(覺)과, 무명으로 생긴 여러 가지 환상적 불각(不覺)은, 모두가 한결같이 진여(眞如)를 본성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경전에도 말하기를 ‘이런 의미에서 모든 중생이 본래부터 열반에 들어있는 것’이라고 말하고, 각(覺)이라는 것이 ‘닦아야 할 그 무엇이나, 만들어 내는 그 무엇이 아니며, 궁극적으로 얻어지는 어떤 목적물이 아닌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如是無漏無明(여시무루무명) 種種業幻(종종업환) 皆同眞如性相(개동진여성상)
이와 같이 샘이 없는=無漏와 무명과 여러 가지의 업환이 다 같이 진여성의 모습인 것이다.
무루(無漏)=루는 마음이 객관의 대상에 대하여 끊임없이 허물을 누출시킨다는 뜻으로서 번뇌의 다른 이름이다. 무루는 번뇌가 없다는 것으로서 깨달음의 지혜. 여기서는 각(覺)을 말한다.
업환(業幻)= 업은 행동이고 환은 허깨비와 같이 실체가 없는 작용을 말한다
[같은 모양이라는 것은 여러 가지 형상의 질그릇이 같은 흙으로 빚어졌듯이, 각과 불각의 무루와 무명과 여러 가지 업환도 진여의 성품인 것이다.
* 원효 : 무루(無漏)는 본각(本覺)과 시각(始覺)의 여러 각(覺)을 말하며, 무명(無明)은 근본불각(根本不覺)과 지말불각(枝末不覺)의 불각(不覺)을 말한다. 이 두 가지가 모두 업의 작용으로 나타나는 것이지, 실제로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業幻이라고 말한 것이다.]
[동상, 같은 모양이라는 것은 여러 가지 형상의 질 그릇이 같은 흙으로 빚어졌듯이 각과 불각과 무루와 무명과 여러 가지 업환도 진여의 성품인 것이다.” 모양은 다르고 종류가 다양한 질그릇이지만 같은 흙으로 빚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빚고 나니 둥근 것도 있고 각진 것도 있고 큰 것도 있고 작은 것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각, 불각이나 번뇌가 없는 무루나 번뇌 의 근원인 무명도 모두 진여의 성품 안에 있는 같은 것입니다. 동상은 우리의 근본 성품, 오염되기 전의 하나=一心을 말합니다. 다른 모양을 하고 있지만 소재는 같듯이, 물들어 있는 것을 없애고 근본으로 가면 같은 진여입니다. 바로 그것이 동상을 밝 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똑같은 진여 속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깨우치면 일심(一心)이 되고 그렇게 되면 자기 자신을 위하는 마음이 없어집니다. 하나인 상황에서는 어떤 행동을 하건 모든 생명을 이롭게 합니다. 그에게는 어떠한 사심도 없습니다. 우리는 남에게 너를 위해서 했다고 자주 말하지만 자기 자신을 위한 마음과 계산이 깔려있습니다. 가장 일심에 가까운 것이 어머니가 자식을 위한 마음일 것입니다.]
是故修多羅中(시고수다라중) 依於此義說(의어차의설)
一切衆生(일체중생) 本來常住(본래상주) 入於涅槃(입어열반)
그러므로 경에서 이 진여의 뜻에 따라 말하는 까닭은
일체의 중생이 본래 항상 머물러 있어 열반에 들어 있으며,
菩提之法(보리지법) 非可修相(비가수상) 非可作相(비가작상) 畢竟無得(필경무득)
보리의 법은 닦을 수 있는 모양=相이 아니며, 지을 수 있는 모양=相도 아니고 끝내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설한다.
[일체 중생은 진여를 성(性)으로 하고 있어, 그 관점에서 본다면, 일체 중생은 본래 상주하는 것으로서 생사를 거듭하면서 윤회한다 하더라도, 그 본성은 하등의 변화가 없는 것이다. 이미 성(性)과 체(體)는 영원한 과거로부터 열반에 들어 있는 것이므로 그 점에서 모든 부처와 동일한 것이다.
부처가 깨닫는다고 하는 것도 수행을 원인으로 하여 그 수행의 결과로서 보신(報身)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열반은 이미 상주하고 있는 것이므로 수행을 원인으로 하여 나타나는 것이나, 수행으로 새로이 만들어 내는 것도 아니다. 보리는 본래대로 있는 것이므로 수행을 원인으로 하여 결과로 나타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나타나는 것이다. 따라서 열반이나 보리는 본래대로 있는 것이므로 수행 결과에 의하여 최종적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닌 필경무득(畢竟無得)이며, 본래 있던 열반이 저절로 나타날 뿐이다.]
[무명 때문에 원래 열반적정인지 모르고 끝없이 번뇌망상을 일으킵니다. 번뇌망상 속에 열반적정이 들어앉아 있는 것입니다. 보리의 법은 깨달음, 본래 성품을 말합니다. ‘끝내 얻을 수 없다.’는 말은 원래 갖고 있기 때문에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내가 부처가 되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부처임을 인식해야 하는 것입니다. 절박함을 더하기 위해 부처가 되자고 말하지만 우리는 원래 부처입니다. 오염이 되어 부처임을 모르는 것 뿐 입니다. 공부하는 것이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지금 모양이나 형태는 오염된 상태에는 있지만 깨달은 상태, 진여의 상태에서는 없습니다. 그래서 ‘색상을 볼 수 없다.’고 말한 것 입니다. 이것은 진여가 무엇인지 표현한 말입니다.]
亦無色相可見(역무색상가견)
而有見色相者(이유견색상자) 唯是隨染業幻所作(유시수염업환소작)
또한 색상을 볼 수 있는 것이 없으나, 색상을 보는 것은 오직 오염된 업환=染業幻에 따라 지은 것=所作이며
非是智色不空之性(비시지색불공지성) 以智相無可見故(이지상무가견고)
지혜에는 색의 불공의 성질이 있는 것이 아니고, 지상은 볼 수 있는 것이 아닌 까닭이라고 하였다.
수염업환(隨染業幻)= 불타가 중생의 염심(번뇌에 오염된 마음)에 순응하여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
색불공(色不空)= 물질이나 형상에는 질량(質量)이 있어 색불공(色不空)이라 한다
지상(智相)= 여기서의 지상은 본각의 지혜를 말한다.
[그러나 색상을 보는 것은 오직 오염된 업환(業幻)에 따라 지은 것이며 지색의 불공[智色不空]의 성질이 아니므로 ‘지상(智 相)을 볼 수 없는 까닭이다.’고 하였다.” 지(智)는 지식으로 제7식 말라식에 해당합니다. 색은 우리의 형상을 이루고 있는 계명자상에 해당합니다. 여기서 나오는 불공(不空)이란 공(空)보다 더 본질적인 것입니다. 불공은 공이 아닌 것이 아니라 공을 넘어선 것으로 ‘공 조차도 아니다’는 뜻에 가까울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공의 성질이 아니다’는 것은 진여의 성질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지상(智相)은 제7식에서 만들어내는 모든 것입니다. 진여가 아니므로 업을 전부 볼 수 없다는 말입니다.]
[원효 : 本來常住 入於涅槃 菩提之法이란 ≪대품경≫에서 “이 지혜로써 모든 번뇌를 끊고, 무여열반에 들어가며, 본래 이것은 세속법이지 제일의제는 아니다. 무엇 때문인가? 공 가운데는 멸함이 없고, 또한 멸하게 하는 것도 없으니, 모든 법이 결국 공한 것이며, 곧 이는 열반이기 때문이다.”라고 하고 “어떤 뜻이 보리인가? 공의 뜻이 보리의 뜻이며, 여(如)의 뜻과 법성의 뜻과 실제의 뜻이 보리의 뜻이며, 또한 모든 법의 실상이 거짓되지 않고 다르지도 않은 것, 이것이 보리의 뜻이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과 같다. 非可修相이란 인행(因行)이 없기 때문이고, 非可作相이란 일어남이 없기 때문이며, 畢竟無得이란 얻을 수 있는 것이 없어서 얻을 때도 없고 얻을 곳도 없기 때문이다.
* 覺이나 不覺이나 진여를 본성으로 한다. 모든 그릇이 가루로 만들어져 있듯이, 갖가지 상을 띄지만 모두가 진여가 작용한 모습이다. 그래서 모든 중생이 열반에 상주하고 있다고 하였다. 진여는 본래 공성이므로 닦으려 해도 닦을 것이 없다. 망념만 여의면 바로 진여가 드러난다. 드러난다고 하지만 드러날 만한 것은 없다.
* 《金剛經》 <無得無說分>에도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느냐? 여래가 법을 설한 바가 있느냐?”수보리가 말하였다.“제가 부처님께서 설하신 뜻을 이해할 것 같으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이름할 만한 일정한 법이 없으며, 또 여래께서 설하셨다고 할 만한 일정한 법이 없습니다.”
* 《維摩經》에도 “일체 중생의 무명 불각의 모습이 바로 모든 부처님이 증득하신 열반의 모습이므로 증득했다고 해서 새삼스레 무명이 사라지진 않는다.”하였다.]
[경전에서 ‘진여가 일체중셍에게 본래부터 상주하고 있어 열반에 든다’고 하고 있으나, 열반과 보리가 수행의 결과에 의하여 최종적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본래부터 상주하고 있는 것이라면, 이것은 본각(本覺)만을 인정하고 시각(始覺)의 수행을 상실하는 논법이 될 것이라는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동상으로서의 이체(異體) 열반을 의미하는 것으로, 수행 중인 이상(異相)의 중생의 입장이 아닌 것이므로 문제가 안되는 것이다. 번뇌와 보리는 동일한 체(體)를 가체(假體)와 본체(本體)로 하고 있는 것이므로, 여기서의 동상(同相)은 그 체성의 상주(常住)를 강조하는 것이 되고, 시각(始覺)의 수행은 이상(異相)의 수행자가 이지불리(理智不利)의 지체(智體)를 발견하기 위한 방편이고, 그 방편의 결과에 의하여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나타난다는 의미이므로 동상의 설명으로서는 무리가 없는 것이다. 이지불이(理智不利)의 이체(異體)는 여실공(如實空)이고 지체(智體)는 여실불공(如實不空)으로서 이는 본래 불리(不二)의 관계속에 있다. 본각(本覺)을 향한 시각(始覺)의 수행은 자력문(自力門)으로서의 수행방편이다.
기신론이 열어놓고 있는 타력문(他力門) 즉 본론의 일곱 번째 저술 이유인 타력문은 열(劣)근기의 사람이 아미타신앙 등 염불을 통한 쉬운 방편으로 신심이 성숙되고 그에 따라 마음이 정화되어 진여를 발견, 불성의 자각이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자력문으로서의 시각(始覺) 수행과는 별도로 타력문도 결과적으로 궁극적 본체에 귀일되는 것이 될 것이다.]
- 異相(이상)
異相者(이상자) 如種種瓦器(여종종와기) 各各不同(각각부동)
다른 모양=異相이라고 한 것은 여러 가지 질그릇(도자기)이 각각 같지 않은 것처럼
如是無漏無明(여시무루무명) 隨染幻差別(수염환차별) 性染幻差別故(성염환차별고)
이와 같은 무루와 무명은 오염된 환영=染幻을 따르는 차별이며, 오염된 환영의 차별을 본성으로 하기 때문이다.
[다른 모양이라는 것은 여러 가지 형상의 질그릇이 모두 흙으로 빚어졌지만 각각 다른 인연에 따라 다른 형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 隨染幻差別(수염환차별) : 각(覺)은 남아 있는 染의 정도에 따라 차별이 생긴다.
* 性染幻差別(성염환차별) : 불각(不覺)은 무명이 본래 평등성을 어긴 것이므로 차별이 있다.]
수염환(隨染幻)= 무루의 본각은 본래 차별이 없는 것이지만 염법(중생의 번뇌심)에는 각기 차별이 있기 때문에 거기에 순응하여 차별이 있는 것 같이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
성염환(性染幻)= 이에 대하여 무명에 의한 근본지말불각은 그 성질상 차별이 있다. 그러나 무명은 실체가 없기 때문에 무명염법의 차별도 허깨비와 같은 것이다.
[이상(異相), 다른 모양이라는 것은 여러 가지 형상 의 질그릇이 모두 흙으로 빚어졌지만 각각 다른 인연에 따라 다른 형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각기 그릇의 모양은 다 다릅니 다. 물든 것을 넘어서 본래 성품을 보니까 하나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업에 물들어 다른 모양을 하고 있지만 업에 물들기 전의 성품은 같습니다. 동상은 진여의 입장에서 세상을 보니까 전부다 같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상은 뿌리는 같은데 나뭇가지는 다 다른 것입니다. 뿌리인 일심은 다 같은데 열린 업들은 다 다릅니다.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하다는 말(보리즉번뇌, 번뇌즉보리)에 서 같기도 하다는 것은 진여에 뿌리를 두고 말한 것입니다. 다 르기도 하다는 것은 업을 받아서 나타나는 각기 다른 모양을 말 한 것입니다. 업에 의해 각자 다른 모양을 가지는 것입니다. ‘보리즉번뇌, 번뇌즉보리’에서 번뇌즉보리는 동상의 관점에서 말한 것이고 보리즉번뇌는 이상의 관점에서 말한 것입니다. 우리 는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하지만 같은 것은 본래 성품입니다. 혜 능이 말했던 질문 ‘어떤 한 물건이 왔는가?’는 진여의 상태에서 답을 하면 맞는 것이 되고 분별심으로 답을 하게 되면 다른 것 입니다. 모르는 사람 입장에서 보면 다 맞는 것 같은데 아는 사람 입장에서 보면 맞고 틀린 것이 명확하게 분간됩니다. 알면 눈빛만 보아도 알 듯이 던지는 말도 본래 어떤 마음에서 던진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물들기 전의 진여는 하나입니다. 하나의 그 마음에서 일으키는 모든 것은 세상을 이롭게 하는 것 밖에 없습 니다. 위하고 원하는 마음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지혜, 광명, 깨달음은 세상의 모든 생명에게 끝없는 자비를 베풉니다. 그래서 깨달음의 성품은 자비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 마음밖에 없는 것이 본래 성품입니다. ]
[각(覺)은 색상(色相)이 없어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지만, 때로는 응신(應身)으로 나타난 석가모니 부처가 삼십이상(三十二相) 팔십종호(八十種好)의 색상을 갖추고 있고, 우리가 그 색상을 볼 수 있을지라도, 그것은 오로지 부처가 중생 구제를 위하여 그 중생의 오염된 번뇌심에 따라 색상을 나타낸 것에 불과한 것이며, 이를 수염업환(隨染業幻)이 만든 바=소작(所作)이라 하였다.
그러나 모든 부처가 중생의 제각기의 번뇌심에 따라 나타낸 것이므로 그것이 불타의 열반과 보리 그 자체는 아니며, 중생의 눈으로 보는 자심소작(自心所作)의 부처에 불과한 것이다. 예를 들어 하늘에 떠있는 달이 만 가지의 물에 비추어질 때, 그 달은 큰 바다에 비추어진 것이나, 작은 그릇에 비추어진 것이나, 때를 막론하고 그 비추어진 달은 동일한 달임에 틀림없는 것이지만, 그 달은 제각기의 물에 따라 비추어진 상태는 다른 것이다.
그와 같이 중생 구제를 위하여 나타난 불(佛)의 모습도 실제로는 자기의 그릇으로 만들어 보는 부처의 모습에 불과한 것이다. 따라서 불타의 지혜는 색불공(色不空)의 물질적 성질의 것이 아니다. 색불공(色不空)에서 이미 의언진여(依言眞如)의 여실불공(如實不空)에서 밝힌 바와 같이 진여 속에는 항하사만큼의 무한한 지혜 등 성공덕이 가득 차 있다는 의미로 사용되었으나, 여기서는 불타의 지혜가 어떠한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즉 불타가 색신을 나타냈다 하더라도 그 불신(佛身)은 지혜 자체가 아니기 때문에 불타의 지혜에는 색상의 성질이 없다는 뜻으로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타의 색상을 보는 것으로는, 진실한 본각의 지혜를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