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승기신론 正宗分(정종분)의 解釋分(해석분) 14
- 枝末不覺(지말불각)의 三細(삼세)
復次依不覺故(부차의불각고) 生三種相(생삼종상) 與彼不覺(여피불각)
相應不離(상응불리) 云何爲三(운하위삼)
다시 불각에 의지하기 때문에 세 가지 모양=相을 내어서,
근본 불각과 상응하여 여의지 않는다. 무엇을 그 셋이라 하는가?
[위의 근본불각에서는 불각과 각을 설명하였고, 여기서부터는 무명으로 인하여 마음이 동요하여 여러 심식 작용이 일어나서 업을 짓고 괴로움을 받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물처럼바람처럼]
[ “지말불각을 설하다. 삼세를 밝히다. 아뢰야식은 다시 불각( 不覺)에 의지하기 때문에 무명업상, 능견상, 경계상의 세 가지의 모양이 생겨서 불각과 더불어 상응하여 여의지 않는다. 육추를 밝히다. 말라식과 의식은 경계의 연(緣)이 있기 때문에 다시 여섯 가지의 모양을 낸다. 지상, 상속상, 집취상, 계명자상, 기 업상, 업계고상이다.”
처음 일으키는 그 마음, 그 상태를 아뢰야식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아뢰야식이 처음 생기는 것이 무명업상, 능견상, 경계 상입니다. 근본불각에 어떤 불순한 오염된 망념이 일어나면 불각과 상응하여 무명업상, 능견상, 경계상 이런 것들이 생겨납니다. 이것들을 바탕으로 또 육추가 생겨나게 됩니다. 그것이 지상, 상속상, 집취상, 계명자상, 기업상, 업계고상입니다. 이것들 이 제8식 아뢰야식, 말라식, 의식, 오온에 대한 설명이 됩니다.-통섭불교]
一者(일자) 無明業相(무명업상) 以依不覺故心動(이의불각고심동)
說名爲業(설명위업)
첫째는 무명업상이니, 깨닫지 못함=不覺에 의지하기 때문에 마음이 움직이는 것으로,
이를 업이라고 한다.
覺則不動(각즉부동) 動則有苦(동즉유고) 果不離因故(과불리인고)
깨달으면 움직임이 없지만, 움직이면 괴로움이 따르나니, 결과가 원인을 여의지 않는 까닭이다.
[“무명업상(無明業相)을 밝히다. 불각에 의지하기 때문에 마음이 움직이므로 업상이라고 한다. 깨달으면 움직이지 않고 움 직이면 괴로움이 있게 되니, 결과가 원인을 여의지 않는 까닭이다.” 제8식 아뢰야식의 첫째 단계이며 유식에서 무부무기(無覆無記)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끝없는 허공에 한 생각이 일어납니다. 이것이 제8식 아뢰야식의 첫 출발점입니다. 끝없는 허공 속에 하나의 망념이 일어
나는 것이 바로 무명업상입니다. 깨닫고 알면 성성적적하지만 모르면 움직이고 요동합니다. 마음이 끝없이 요동하는 것은 무명, 무지 때문입니다. 모르기 때문에 끝없는 번뇌망상을 일으킵 니다. 움직임으로부터 생노병사가 일어납니다. 깨닫고 움직이지 않으면 생노병사를 아는 것이고 모르고 움직이면 끝없는 생노병사 속에서 고통받으며 헤매는 것입니다. 이것이 불각으로 부터 출발해서 벌어지는 일들입니다. 무명이라는 점을 찍었기 때문에 괴롭고 생노병사를 끝없이 되풀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허공에 첫 망념이 일어나는 것이 무명업상입니다. 처음에 무엇인가 움직임이 있기 시작하는 그 무명이며 제8식 아뢰야식의 첫째 단계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유식에서 제8식을 무부무기라고도 합니다. 제8식 아뢰야식을 감지하는 것이 견성입니다. 마음의 미세한 움직임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견성은 공부의 끝이 아니라 시작입니다.
[본각 또는 진여는 움직임(흔들림)이 없다. 진여를 여실히 본 사람 또한 움직임이 없으나 무명으로 인하여 심식이 움직이게 된다. 동(動)이란 심식이 움직이는 것을 말한다. 12연기로 본다면 무명으로 인하여 행(行)이 있는 것이다. 아직은 주․객이 분화되지 않는 상태이다. 업상(業相)
* 果不離因(과불리인) : 각(覺)과 부동(不動), 동(動)과 유고(有苦)는 각각 인(因)과 과(果)를 이룬다.
* 元曉 : 움직임을 일으킨다는 뜻이 바로 업(業)의 뜻이니, 心動 說名爲業이라고 한 것이다. 覺則不動이란 반대를 들어서 나타낸 것이니, 시각을 얻을 때는 곧 동념(動念)이 없는 것이다. … 動則有苦란 것은 적정(寂靜)을 얻으면 곧 극락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움직이면 곧 고통이라고 한 것이다.]
二者(이자) 能見相(능견상), 以依動故能見(이의동고능견) 不動則無見(부동즉무견)
둘째는 능견상이니, 움직임에 의지하기 때문에 능히 볼 수 있게 되며,
움직이지 않으면 보이는 것이 없다. (봄이 없다.)
[이를 12연기에서는 식(識)이라고 한다. 이는 주관이다. 견상(見相), 전상(轉相)
* 元曉 : 능견상이라는 것은 곧 전상(轉相)이니, 앞의 업상에 의해 점차로 능연(能緣)을 이루기 때문에 以依動能見이라고 한 것이다. 성정문(性靜門)에 의한다면 능견이 없기 때문에 不動則無見이라고 말한 것이니, 도리어 능견이 움직임에 의지하여야 하는 뜻을 나타낸 것이다. 이와 같이 전상이 비록 능연이 있으나 반연하는 바의 경계상을 아직 나타낼 수 없으니, 이는 다만 밖으로 향하는 것일 뿐, 경계에 의탁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 憨山 : 능견상을 전상(轉相)이라 하는 이유 - 진여를 본각의 실지로 관조한다면 본래 주관인 능견상과 객관인 경계상의 대립 의존이란 없다. 그런데 지금 실지(實智) 자체인 일심진여를 불각심으로 미혹하여 진여가 무명으로 전변하여 허망한 견해의 모습[능견상]이 되었고 이 때문에 허망한 견해로 보는 모습[경계상]이 있게 되었다. 일심진여가 무명으로 인해 전변한다는 뜻에서 전상이라고 하였다.]
[“능견상(能見相)을 밝히다. 움직임에 의지하기 때문에 능히 볼 수 있게 되며, 움직이지 않으면 보이는 것이 없다.” 제8식 아 뢰야식의 두 번째 단계입니다. 무명업상은 나와 대상, 주관과 객관이 나누어지기 전의 상태입니다. 그 다음 주체적으로 생각을 일으키게끔 주체적인 형상을 만들게 하는 것이 능견상입니다. 움직이지 않고 적적하면 눈에 안띄이는데 움직이면 보입니다. 이 능견상은 움직임에 의지하기 때문에 보입니다. 모든 것은 움직여야 보이는데 성성적적한 삼매에 들면 그 무엇이라도 볼 수 없습니다. 내 마음이 조금이라도 움직인다면 귀신이나 저승사자같은 초자연적 존재들이 그것을 감지할지도 모릅니다. 삼매에 들면 마음이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보이지 않게 되고 이러한 상태가 견성입니다.]
三者(삼자) 境界相(경계상) 以依能見故(이의능견고)
境界妄現(경계망현) 離見則無境界(이견즉무경계)
셋째는 경계이니, 봄 때문=능견상에 의지하기 때문에 경계가 허망하게 나타나므로
봄=能見을 여의면 경계가 없어지게 된다.
[元曉 : 경계상이라는 것은 곧 현상(現相)이니 앞의 전상에 의해 경계를 나타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能見故 境界妄現이라고 말한 것이다.
* 봄의 대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12연기의 名과 色이며, 객관이다. 이는 객체 그 자체가 아니라, 주관에 의해 물든 상태로 나타난다. 현상(現相)]
[“경계상(境界相)을 밝히다. 능견상(能見相)에 의지하기 때문에 경계가 허망하게 나타나므로 능견(能見)을 여의면 경계가 없어지게 된다.” 제8식 아뢰야식의 세 번째 단계입니다. 여기서는 주관에 의해 대상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주체가 삼매에 들면 대상은 없어지게 됩니다. 나의 마음이 움직이면 세상도 따라 존재하지만 내가 삼매에 들어 능견을 여의게 되면 보이는 모든 대상, 경계가 없어지게 됩니다. 이것들은 근본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근본의 마음에서도 이 세상에 보이는 세계와 똑같은 상황이 벌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근본불각을 말하며, 불각이 발생한 그 자체를 말하며, 불각이 어찌하여 생기는 가를 밝히고 있다.
불각의 기원에 대하여 본문은 ‘있는 그대로의 진여가 하나라는 진리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불각의 마음이 일어나 그러한 망념이 있다’고 설하고 있다. ‘그러한 망념’에서 ‘그러한’이란 불각을 말하는 것이므로 망념은 바로 불각이다. 망념은 바로 ‘나와 너’를 분별하는 것이므로 마음이 주관과 객관으로 나뉘어 인식하는 것을 말한다.
‘진여의 법이 하나라는 것을 알지 못하는 데서 불각의 마음이 일어나는 것’에서 마음은 불각이지만 ‘진여의 법이 하나라는 것을 알지 못하는 그 근원자체’는 불각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이 불각을 일으키는 힘은 불각과 같은 성질이라고 생각할 수 있으나, 불각이라고는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만약 그것까지 불각으로 삼는다면 그 힘의 또 다른 근본까지를 불각으로 삼아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불각과 그 이전의 관계는 마치 잠자고 있는 사람이 눈을 뜰 때와의 관계로 비교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눈을 뜨는 힘은 이미 잠자는 사람 속에 있기 때문에 눈을 뜨는 것이다. 그러나 ‘잠을 깬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잠을 깬 다음의 문제이다. 이와 같이 불각도 마음의 활동이기 때문에, 망념이 일어난 순간부터가 불각이다. 우리가 매일 아침 눈을 뜨지만 눈 뜨기 전의 마음의 작용은 알 수가 없다. 이와 같이 망념은 불각이지만, 그러나 망념을 만든 힘은 불각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바로 불각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이 불각적인 힘을 기신론에서는 무명이라고 한다. 그러면 불각의 시원(始原)을 넓은 뜻으로는 무명도 불각이지만, 그러나 무명은 불각의 시원으로 보는 것이 정당할 것이다.
기신론에서는 불각을 ‘근본불각’과 ‘지말불각’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으며, 근본불각은 지금까지 설명한 불각 그 자체의 성격을 나타내는 것이며, 지말불각은 불각이 어떠한 순서로 전개되어, 우리의 인식 세계가 성립하는가를 나타내는 것으로, 이점도 기신론의 특색으로 꼽히는 한 구절이다.
각과 불각의 의미를 살펴보면, 각은 그 심체(心體)인 진여에서 망념이 떠나는 것을 깨닫는 것이라면, 불각은 진여(眞如)의 법이 하나라는 것을 여실(如實)히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하는데서 불각의 마음이 일어나는 것이다. 심진여(心眞如)는 일상(一相)으로서 ‘보는’ 주관과 ‘보이는’ 객관의 분별이 없는 것이지만 무명의 작용에 의하여 불각의 마음이 일어나는 것이다.
‘여실히 알지 못한다’는 말은 무명의 작용으로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 같은 무명은 시작이 없는 영원 속에서 본각과 함께 하고 있는 것이지만, 그 무명은 체(體)가 없는 것이므로 그 무명을 시원(始原)으로 나타난 망념도 체가 없어 본각을 의지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염(念)에는 스스로의 상이 없어 본각을 떠나지 못한다’고 설하여, 망념의 존재가 본각을 의지하여 함께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이처럼 불각의 작용은 본각을 떠나지 못하는 것이다. 본론에서 이 관계를 길 잃은 사람과 미리 정해진 길의 방향과의 관계로 설명하고 있다.
그와 같이 중생에는 깨우치는 각이 있기 때문에, 깨닫지 못하는 불각이 있는 것이다. 이 각성(覺性)을 떠나서는 불각 역시 없는 것이다. 따라서 불각은 각의 본성을 떠나 있을 수 없다. 우리가 참된 깨달음(진각眞覺)을 말하는 것은 불각의 망상심, 즉 망념이 있기 때문에, 이 불각과의 관계 아래에서 비로소 말해지는 것이다
불각의 망상심이 있기 때문에 진여의 이름과 의미를 알고 진여본각(眞如本覺)을 설명할 수가 있다. 만일 불각의 마음이 없다면, 진여본각의 의미를 나타내지도 못할 것이다. 진여본각은 절대적인 것이므로 그것 자체로서는 자상(自相)을 설할 수 없는 것으로서, 불각과 비교하여 비로로 각의 존재를 나타낼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불각에 의하여 각을 나타낼 수 있다는 것은, 불각이 수연(隨緣)진여에 의하여 일어나며, 불각에는 별도의 체가 없는 것이므로 불각을 고찰함으로서 그것으로 진여를 밝히는 것이 된다.- 전종식]
[ 불각 개념의 독특성
대승기신론을 읽으면서 가장 인상깊었던 것은 아뢰야식을 기능(義, function)으로 나눌 때, 깨달음(覺, 이하 각)과 동급으로 깨닫지 못함(不覺, 이하 불각)을 제시하고 설명한다는 점이었다. 불각이 설명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일반 상식과 배치되는 면이 있다. 세간에서 불교에 대해서는 윤회, 열반, 깨달음, 또는 불성 같은 개념들이 이야기 되고 소비된다. 즉 어떻게 하면 불교적 이상을 달성할 수 있는지가 불교에 대한 논의의 주제인 경우가 많다. 반면 그런 종교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과 반대되는 행위는, 바람직한 행위의 부재라는 반(anti)-개념으로만 제시되곤 한다. 다른 종교에서는 마찬가지이다. 기독교 전통에서는 사상적으로도 반-개념의 지위는 거의 없다시피 하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악이란 선의 부재에 지나지 않았다. 따라서 선의 부재인 악은 그 자체로서 어떤 기능을 할 수 없다. 선의 부재는 한시라도 빨리 종교적 선으로 채워저야 할 대상일 뿐이다. 혼란은 그 자체로서 어떤 의미를 가진다기보다, 신의 선한 뜻에 따라 바로잡아져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데 대승기신론의 본론에서는 불각을 각과 동일한 수준으로 제시한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상식이나 여타 종교와도 구분되는 독특성을 보인다. 그러면서도 불각은 각과 단순히 동급일 뿐 아니라, 각과 함께 모든 다르마를 포섭하고 생성한다(攝一切法生一切法). 각만으로는 모든 다르마를 포섭하거나 생성할 수 없다. 따라서 불각은 단순한 각의 부재일 수 없으며, 능동성을 지닌 개념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sookiw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