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승기신론

대승기신론 正宗分(정종분)의 解釋分(해석분) 13

Skunky 2022. 12. 7. 09:00

• 不覺(불각)

[되새김=진여(眞如),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 여래장(如來藏), 각(覺) =이들은 동일한 것을 일컫는 말이지만 있는 자리가 달라서 명칭을 달리한다.

진여(眞如)는 심(心)진여이므로 마음을 떠난 것은 아니지만 진여는 이(理)의 뜻이 강한 진리의 자리로 표현되고 있고,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은 진여를 인격화한 것으로, 인격으로 나타나 진여이다. 심진여는 마음의 본성이므로 그것을 개인적인 마음의 차원에서 고찰하면 그 본성이 청정하므로 자성청정심으로 말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마음의 본성이 불변의 진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진여라고 하면 이(理)의 측면이 강하지만 마은은 지(智)의 측면이 강하다. 그러나 기신론에서는 이(理)와 지(智)가 둘이 아니라는 불이(不二)의 입장에서 설하고 있다. 이(理)가 지(智)로서 활동한다고 보는 것이 기신론의 특색이다. 지(智)는 이(理)의 발현이므로, 깨달음의 지(智)즉 불지(佛智)가되고 여래의 법신(法身)이 된다.

심진여에서 자성청정심으로 생각을 진전해 가면 이와 같은 이(理)의 인격화, 이(理)가 지(智)로서 활동한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생각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개인적인 마음의 차원이지만 또한 마음의 본성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일단 여기서는 번뇌에 관해서는 생각하지 않고 있어서 ‘여래의 법신’이라 불리는 것이다. 순수 청정한 입장에서 마음을 보고 설하는 것이다.

여래장(如來藏)번뇌에 에워싸인 상태의 자성청정심이다. 그래서 비일비이(非一非異)의 아리야식을 설하게 된다.

기신론의 아리야식(阿梨耶識)은 유식설의 아뢰야식(阿賴耶識)과 그 성격을 달리하고 있다. 유식설은 처음 출발점을 아뢰야식부터 설정하고 진여가 결론으로 되어 있으나, 기신론은 진여가 출발점이 된다. 기신론의 아리야식은 진망화합식(眞妄和合識)으로서 망심(妄心) 망념(妄念)이면서 그 본성은 자성청정심이다. 진망화합식이라 하더라라도 이원론(二元論)이 아니고 전체가 망식(妄識)이면서 동시에 그 전체가 심성(心性)으로는 청정한 것이다. 이것은 식(識)이므로 주체적이고 자각적으로 인식하는 생활의 주체로서 마음을 보게 된다. 자성청정심이나 여래장은 인격적이기는 하지만 아직 주체적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자기의 인식을 문제로 할 때는 심성(心性)보다 번뇌가 표면에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아집(我執)과 아견(我見)을 중심으로 한 자기가 주체가 되어 있는 것이다. 자성청정심이 아리야식의 중심이라고 생각하지 못한다.

이와 같이 주체(主體)라는 입장에서 심성을 생각하여 각(覺)과 불각(不覺)의 문제가 나오는 것이다. 각과 불각은 자각(自覺)적인 것이고 주체적인 것이다. 현재의 미혹으로부터 탈출하는 관점에서 자성청정심이 어떠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가를 문제로 하여 각과 불각의 문제가 있게 된다. 현실에 있는 미혹의 자기는 불각의 자리에 있는 것이나 그 불각 속에서 그 불각을 부정하는 각(覺)의 활동이 자각되기 때문에 수행의 문제로서 시각이 설해지는 필연성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 시각의 바탕에 본각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불각(不覺)은 아리야식의 두 가지 뜻 가운데 하나이다. 아리야식을 미망(迷妄)의 측면에서 보면 전체가 미망이고 진실은 보이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불각의 아리야식이다. 그러나 이 아리야식 속에는 그 불각을 때뜨리려는 각(覺)의 힘이 있는 것이니, 환멸문의 입장에서 보면 이 아리야식은 깨달음을 위한 주체(主體)가 된다.

불각은 바로 우리 인식의 세계이며, 그 인식의 미망(迷妄)성 그리고 아집을 기초로 한 인식을 불각이라고 이름한다. 여기에서 인식이라고 하면 각과 불각이지만 존재로서는 아리야식이므로, 그 아리야식의 성격으로서 각과 불각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각과 불각은 마음의 활동이다. 무명에 의하여 망념이 일어난 시점이 바로 불각이지만, 그것은 바로 각의 시점이기도 한 것이다.

불각에는 근본불각(根本不覺)과 지말불각(枝末不覺)으로 나누어지며, 근본불각은 불각이 생긴 근본자체를 말하는 것으로, 이 불각이 근본무명에 의한 것이므로 근본무명은 불각의 시원(始原)이 된다. 넓은 의미에서는 근본불각을 근본무명이라고도 한다. 지말불각은 불각자체인 근본불각이 어떠한 순서로 전개되어, 우리의 인식 세계가 성립하는가를 나타내는 것이며, 근본무명의 작용으로 나타나는 것이므로 지말무명(枝末無明)이라고도 한다.

여기에서 설해지고 있는 근본불각은 불각의 체(體)를 밝히는 성격을 가지고 있으나, 불각에는 각과 동일한 의미로서의 체(體)는 없는 것이다. 각의 체(體)는 진여이고 자성청정심으로서, 각이 귀일(歸一)하는 체가 있으나, 불각은 무명으로 말미암아 생기는 것이므로 무명이 본래 체가 없다면 불각 역시 체가 없는 것이다. 무명과 불각은 각의 체인 진여를 가체(假體)로 하여 무시이래 화합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다. 즉 근본 불각은 불각이 생긴 자체를 말하고 지말불각은 그로부터 나타나는 불각의 모습을 말하는 것이다.-전종식]

 

  - 根本不覺(근본불각)

所言不覺義者(소언불각의자) 謂不如實知眞如法一故(위불여실지진여법일고)

不覺心起(불각심기) 而有其念(이유기념) 念無自相(념무자상) 不離本覺(불리본각)

이른바 불각의 뜻이란 진여법이 하나임을 참답게 알지 못하는 것으로 이로써 불각심이 일어나 망념이 있는 것을 말하며,

그 생각(망념)이란 독립된 모습=自相이 없어서, 본각과 여의지 않으며, 

 

[앞에서 무명의 바람이 불어 자성청정심이 작용을 일으켜 심식이 일어난다고 하였다. 파도가 바닷물을 떠나 존재할 수 없듯이, 망념 또한 진여를 떠나 독립된 모습이 없다.-물처럼바람처럼]

 

猶如迷人(유여미인) 依方故迷(의방고미) 若離於方(약리어방) 則無有迷(즉무유미)

마치 방향을 잃은 혼미한 사람은, 방향에 의지하기 때문에 혼란스런 것과 같으니, 만약 방향을 여읜다면 혼미함이 없어지는 것과 같다. 

[元曉 : 옳다고 주장하는 동쪽의 개념을 여읜다면 다시 잘못된 서쪽의 개념도 없다. 그러므로 念無自相 不離本覺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衆生亦爾(중생역이) 依覺故迷(의각고미) 若離覺性(약리각성) 則無不覺(즉무불각)

중생 또한 그와 같아서, 각에 의지하기 때문에 미혹었지만, 만약 각의 성질=覺性을 떠나면 불각은 없어지게 된다.

 

以有不覺妄想心故(이유불각망상심고) 能知名義(능지명의) 爲說眞覺(위설진각)

若離不覺之心(약리불각지심) 則無眞覺自相可說(즉무진각자상가설)

불각의 망상심이 있기 때문에 명칭과 의의=名義를 알아서 진각을 말하게 되는 것이며,

만약 불각의 마음을 떠나면 진각이라고 말할 만한 자체 모습=自相도 없게 된다.

 

[能知名義(능지명의) : 말과 뜻을 알 수 있다. 깨달음이라는 것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망상과 망념을 쉬면된다. 그런데 망상의 마음 때문에 따로 깨달음이라는 것이 있는 것으로 생각하여, 깨달음이라는 이름과 그 뜻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참다운 깨달음이란 이러이러한 것이라고 설명을 하게 된다.

* 앞에서 모든 심식(心識)이 다 무명이라고 하였다. 바른 방향이 무엇인가라는 분별심을 놓아버리면 잘못된 방향이 없는 것처럼 분별 망상심을 떠나면 그대로 진여본각이 된다. 그런데 진여란 여실공(如實空)이어서 뭐라고 말한 만한 것이 없다.

* 元曉 : 본각도 불각을 기다린다다는 것을 밝혔다. 그 가운데 두 가지가 있으니, 처음에

以有不覺妄想心故은 무명이 일으킨 망상의 분별이니, 이 망상으로 말미암아 명의(名義)를 알기 때문에 언설(言說)을 두어 진각(眞覺 )에 대해 말하는 것이며, 이것은 진각이라는 이름이 망상에 상대한 것임을 밝힌 것이다. 만약 불각을 여의면 설명할 만한 진각의 자체 모습은 없는 것이니, 이것은 진각이라고 말하는 바가 반드시 불각에 상대한 것임을 밝힌 것이다. 만약 상대하지 않는다면 자상이 없으며 다른 것을 기다려서 있는지라 또한 자상이 아니니, 자상이 이미 없는데 어찌 타상(他相)이 있겠는가?

* 憨山 : 이 불각은 바로 진여각성이 전체로 성립한 모습이기 때문에 만약 불각의 망상심을 떠난다면, 불각에 상대되는 개념인 진여 각성의 그 자체 모습을 따로 설명할 수 없다. 이 무명 불각이 바로 본각과 분리하지 않는 상즉관계이기 때문에 중생이 일념에 본각의 광채로 돌이키기만 하면 즉시 본래 지녔던 본각과 동일하다. 그 본각이 무념임을 알면 즉시 진여법신을 증득하게 된다.]

 

[일심 속에는 깨달음의 진여의 세계와 깨닫지 못한 생멸의 세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버릴 것이 하나도 없고 있는 그대로가 부처입니다. 대승기신론에서는 우리가 추구하는 부처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형태 그대로가 부처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만약 선한 마음 70 악한 마음 30을 내면 70 만큼의 부처가 됩니다.
깨달음의 세계도 있지만 깨닫지 못한 세계도 있습니다. 깨닫지 못한 이 세계(불각의)는 어떻게 이루어져 있을까요. 근본불 각이 있습니다. 모든 것의 첫 출발점은 바로 무명입니다. 무명이 중생들의 삶에 스며들어 모든 중생은 지말불각의 삼세와 육추의 형태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근본불각과 지말불각을 총결해서 말하면 진여가 무명에 오염되면 생멸심이라는 것입니다.
학문을 하면서 기본적으로 주어진 내용을 명확하게 이해하고 있으면 공부하기 수월합니다. 세상은 나와 나 이외의 대상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주관이면 대상은 객관이 되고, 내가 주체면 대상은 객체가 되고, 내가 견분이면 대상은 상분이 되고, 내가 능견이면 대상은 소견이 되고, 내가 능변이 되면 대상은 소변이 되고, 내가 능의가 되면 대상은 소의가 되고, 내가 능취가 되면 대상은 소취가 되고, 내가 능연이 되면 대상은 소연이 됩니다. 나를 주체로 할 때는 주, 견, 능이고 대상을 주체로 할 때는 객, 상, 소가 됩니다. 어느 학문을 하건 주체와 객체의 개념은 다 같습니다.
앞서 불각에는 근본불각과 지말불각이 있다고 했습니다. 지말불각에는 3세(細) 6추(麤)가 있으며 3세에는 업상(業相, 主客 未分), 능견상(能見相, 주관), 경계상(境界相, 객관)이 있고 6추에 는 지상(智相), 상속상(相續相), 집취상(執取相), 계명자상(計名 字相), 기업상(起業相), 업계고상(業繫苦相)이 있습니다. 3세 부분은 제8식 아뢰야식의 내용입니다. 6추, 거친 것에는 지상(智相)이 있는데, 이 지상은 아뢰야식을 바탕으로 내 생각, 분별심의 뿌리인 제7식 말라식에 해당합니다. 나머지 5개의 거친 것은 전오식, 생기식(生起識), 제6식 의식에 해당합니다. 상속상은 현재 의식을 가리킵니다. 집취상은 수, 계명자상은 상, 기업상은 행, 업계고상은 색에 해당합니다. 이것이 오온(五蘊)입니다. 유식에서는 색수상행식이었는데 여기서는 순서가 약간 다릅니다. 이것은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와 같은 문제입니다.
불교에서 시간적인 관점에서 존재에 대한 속성은 무상이었고, 공간에 대한 존재에 대한 속성은 무아였습니다. 공간에서 모 양이 생기는 것들은 전부 다 오온을 근거로 해서 만들어집니다. 
그래서 불각에 대한 내용이 다른 것이 아니라 유식의 오온, 제6 식, 제7식, 제8식에 대한 설명들입니다.

유식에서는 안혜 논사, 난타 논사, 진나 논사, 호법 논사의 견해를 통해 아뢰야식을 어떻게 분석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안혜 논사는 아뢰야식을 일분(견분) 하나 밖에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난타 논사는 아뢰야식을 견분, 상분이라고 주장했고, 진나 논사는 아뢰야식을 견분, 상분, 자증분이라고 설명했고, 호법 논사 는 견분, 상분, 자증분, 증자증분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이 가운데 안혜 논사와 호법 논사의 견해가 많이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3세 가운데 능견상, 경계상은 업상으로부터 나왔기 때문에 안혜 논사는 일분 즉, 하나라고 주장했습니다. 빅뱅 이후 우주가 생겨났다고 이야기하듯이 처음 분리되기 이전의 점을 업상 이라고 합니다. 여기서는 주관과 객관이 나누어지기 전입니다. 난타 논사는 객관과 주관이 분리되기 시작하는 상태에 주목했기 때문에 견분, 상분으로 나누었습니다. 진나 논사는 여기서 더 나아가 견분과 상분 사이에서 둘을 조정, 관리하는 자증분이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어떤 병에 걸렸을 때 무언가를 먹어도 낫지 않는 경우가 있습 니다. 여기서 먹는 것을 중지하면 스스로 치유되기 시작합니다. 이런 작용을 하는 것이 자증분입니다. 호법 논사는 이 세 가지 를 총괄적으로 관리하는 시스템적인 무언가가 있을 것이라 생각해서 증자증분의 개념을 추가합니다. 자증분의 자가 치유 능력이 한 부분에 해당한다면 증자증분은 전체 시스템에서 모든 것을 조정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것입니다. 낙동강의 원천을 알아 보니 태백시 매동산 너덜샘에서 발원하여 황지연못에서 솟아오르는 샘물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아뢰야식이 흘러 흘러 제 7식을 만들고 우리의 삶을 만들어냅니다. 우리에게는 큰 강과 같이 수많은 업들이 흐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 업들의 출발점이 아뢰야식입니다.
 “근본불각을 설하다. 불각(不覺)의 뜻은 진여법(일심)이 하나 임을 여실히 알지 못해 불각의 마음이 일어나서 망념이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망념은 자상(自相)이 없어서 본각을 여의지 않지만, 방향을 잃은 사람은 혼미하게 된다. 만약 방향을 여읜다면 혼미함이 없어지는 것과 같다. 중생도 그와 같아서 각(覺)에 의지하기 때문에 혼미하게 되지만, 만약 각의 성질을 여의면 불각은 없어지게 된다.” 무명에 물들면 불각의 마음이 일어납니다. 망념이란 이 무명에 의해 일어나는 생각들입니다. 이것들이 진여의 세계에서 불각의 세계로 넘어오게 만듭니다. 망념은 자상(自相)이 없다는 뜻으로 주체적인 모양이 없다는 말입니다. 망념은 기생해서 사는 형태입니다. 본각(일심)이 물들면 불각이 되지만 본각 자체는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본각을 여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망념 자체는 주체적인 모양이 없기 때문에 본각과 같은 주체적인 하나의 모양이 없습니다. 원래 본각 하나 밖에 없습니다. 무명이 무엇인지 알고 깨우쳐버리면 본각이고 이것을 모르고 무명에 물들어 있으면 불각인 것입니다. 대승기신론에서는 알든 모르든 중생도 부처의 세계에 있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비록 내가 물들어 있지만 본각을 여의지 않았다는 부분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내 안에 그냥 본각이 있는 것 입니다. 우리가 중생마음을 일으키지만 그것의 원래 모양은 본각이며 진여가 바탕에 깔려 있는 것입니다. ‘방향을 잃은 사람은 혼미하게 된다. 만약 방향을 여읜다면 혼미함이 없어지는 것과 같다.’ 이 말을 비유해서 설명하면 여러 가지 음식들이 있어 이 음식도 먹고 싶고 저 음식도 먹고 싶어 방향을 잃고 혼미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음식 자체가 없어지면 혼미함도 없어집니다. 방향이 있으면 방향을 잃을 수 있지만 방향이 없으면 방향을 잃을 것도 없습니다. 우리의 망념이 이러한 것들입니다. 우리가 각을 생각할 때 그 대상이 되는 불각이 있습니다. 하지만 각과 불각 자체를 생각하지 않으면 불각도 없어집니다. 우리는 견성이나 진여와 같은 각을 생각하지만 사실은 있는 자체가 각이며 불각인 것입니다. 각과 불각은 원래 일심으로 하나다라는 생각을 하면 불각에 의해 혼미해지는 일이 없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불각의 망상심이 있기 때문에 명칭과 의의[名義]를 알아서 진각(眞覺)이라고 말하는 것이니, 만약 불각의 마음을 여읜다면 진각의 자상(自相)도 없게 된다.” 우리는 불각이라는 망상심이 있기 때문에 명칭과 의의에 의해 진각이라고 말합니다. 불각이 있기 때문에 불각에 대응하는 진각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만약 불각이 없어지면 우리가 진각이라고 설정하는 형태도 같이 없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이분법(二分-法)의 논리가 아니라 똑같이 하나라는 말입니다. 만약 내가 견성한다는 다른 하나를 설정하면 견성과 불각이 두 개로 나누어집니다. 하지만 원래 존재하는 것은 일심 하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분리된 이원의 세계가 아니라 오직 하나로써 모든 것이 회통하고 있음을 설명하고 있습니다.-통섭불교]

 

[불각에 대한 원효 해석의 타당성
원효의 불각에 대한 해석의 핵심적 전략은 불각을 근본불각과 지말불각으로 나누는 것이다. 이 전략은 두 가지 측면에서 본문의 해석을 돕는다. 첫 번째로는 본각, 시각, 불각의 모호한 관계를 깔끔하게 도식화 시켜준다. 근본불각을 본각과 짝짓고 지말불각을 시각과 짝지어 앞에서 소개한 것 처럼 해석한다면 명쾌해진다고 보는 것 같다. 두 번째로는 불각으로 인한 현상을 지말불각으로 정의하여 불각의 일부로 포함시킬 수 있다. 이러한 사고의 기저에는 불각의 현상 또한 불각으로 불러야 합당하다는 전제가 깔려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깨닫지 못함이라고 말할때는, 실제로 특정 대상을 아직 알지 못한다는 의미로 많이 사용한다. 따라서 일상적 용법에서의 불각은 현상에 보다 가깝다. 하지만 대승기신론에서 불각을 그러한 현상을 일으키는 원리로 승격시켜 전개하기에 독자가 읽으며 혼란스럽기 쉬운 문제가 있다. 따라서 원효는 일반적으로 불각이라고 불리는 불각에 의한 현상 또한 불각의 정의에 포함될 수 있다고하여, 철학적 개념의 재정의가 가질 수 있는 혼란을 축소하려는 시도를 한 것 같다.
본문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아뢰야식 하에서 본각, 시각, 그리고 불각의 관계를 정의하는 부분에서 불각은 아뢰야식의 기능을 각과 함께 구성하는 주요한 요소이다. 원효가 볼 때 각 자체가 어떤 현상이라기보다 깨달음을 얻는 원리에 가깝다는 점을 고려할 때, 불각 또한 그에 걸맞는 추상적 원리로서의 지위를 확보해야만 했다. 그래야만 불각은 단순히 각의 부재가 아니라, 각과 함께 현상을 낳는 원리로서 해석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불각의 원리적 해석에 의해, 각과 불각은 상호 의존적인 관계로 성립될 수 있으며 다음의 본문이 해석 가능해진다. “依覺故迷若離覺性則無不覺 (…) 若離不覺之心則無真覺自相可說”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각을 단순히 원리적 개념으로만 두게 되면 그 이후에 나오는 본문이 완전히 해석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고 원효는 생각하였던 것 같다. 불각에 의해 발생하는 세가지 마음의 상태(依不覺故生三種相)를 원효는 지말불각으로 간주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마음의 상태는 일상적 개념으로 보았을때 깨닫지 못함 그 자체이다. 움직이는 마음이 카르마로 인함을 깨닫지 못하고, 그러한 마음이 있다고 잘못 인지해버려 깨달음에서 멀어지고, 인지된 마음에 의거해 인지의 대상이 존재한다고 오류를 범해 또다시 깨닫는 것이 요원해진다. 이러한 마음의 상태를 흔히 깨닫지 못함, 즉 불각으로 부르게 된다. 하지만 대승기신론에서의 불각은 보다 상위의 원리적 개념으로도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혼란을 피하고자 원효는 이러한 마음을 지말불각으로 구분하였다.
그러나 원효의 이런 친절이 과도한 것은 아닌가하는 의문이 들기는 한다. 원효의 해석을 떼어놓고 본문만 보았을 때, 본문은 불각이라는 용어를 중복적인 의미로 사용하지 않는다. 그 보다 불각은 각에 대응되는 개념으로서, 원리적인 의미로 일관되게 사용되고 있다. 불각으로 인한 세가지 마음의 상태를 언급할 때, 본문은 분명히 그것들이 불각에 의존하고 불각에서 태어났다고 하였지, 불각 그 자체라고 말한 적이 없다(依不覺故生三種相). 만약 원효가 주장하는 것 처럼 세가지 마음의 상태가 (지말)불각이라면, 의존한다(依)와 생겨났다(生)는 동사가 같다는 의미로 사용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의존한다는 것, 생겨난다는 것은 의미적으로 적어도 두 가지의 구분된 존재를 상정할 수 있게 한다. 의존의 주체와 객체, 생겨나는 것의 주체와 객체는 보통은 다르며, 조금 양보해보아도 반드시 같을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불각, 시각, 본각의 관계를 지말불각의 도입이 보다 명확하게 도식화하는 것도 같지만, 굳이 지말불각 없이도 세 개념의 관계는 도식화될 수 있다. 불각과 본각이 서로 상호 대립적이지만 의존적인 관계라는 것은 그 자체로 이해될 수 있다. 하지만 이 두 개념이 단어의 의미적으로 완전히 구분되어 공통되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은 문제가 된다. 두 개념이 아무것도 공유하지 않는다고 할 때, 한 개념이 다른 개념에 의존한다는 것이 가능한가? 나아가 그러한 두 개념이 합쳐저 하나의 아뢰야식의 기능을 이룬다는 것이 가능한가? 어떤 두 가지가 상호작용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하나의 공통점(공간, 시간, 속성, 본질 등)을 가져야만 할 것이다. 이러한 철학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도입한 개념이 시각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시각이 두 개념을 잇는 다리의 역할을 하기 때문에, 불각은 시각을 통해 본각에 의존하며, 본각은 시각을 통해 불각에 의존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시각 자체가 불각과 본각을 연결하기 위한 역할을 담당하기 때문에, 시각은 불각과 본각에 의존적이다. 이런 해석 하에서도 세 개념은 상호의존적일 수 있다. 그렇다면 굳이 개념의 구조적 설명력을 높인다는 목적으로 시각과 지말불각을 도식적으로 짝지을 필요도 없을 것 같다.
결론적으로 원효가 지말불각과 근본불각을 구분한 것은 본문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니나, 지말불각이 굳이 도입할 필요가 있는 것인지 의문이 되었다. 본문은 불각을 원리적인 의미로만 명확히 사용하며, 현상에 대해 이야기 할때는 불각으로 인한 것이라는 표현을 분명히한다. 그리고 지말불각 없이도 본각, 시각, 불각의 관계는 이미 충분히 구조적으로 의존적일 수 있다. 따라서 원효의 개념적 구분이 오히려 대승기신론 본문의 불각의 개념을 보다 어렵게하는 것은 아닌지 비판적으로 생각해볼 여지는 있을 것이다.- sookiw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