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승기신론 正宗分(정종분)의 解釋分(해석분) 12
三者(삼자) 法出離鏡(법출리경) 謂不空法(위불공법)
出煩惱礙智礙(출번뇌애지애) 離和合相(리화합상) 淳淨明故(순정명고)
셋째, 법에서 멀리 떠난 거울=法出離鏡이니, 말하자면 비지 않는 법=不空의 법을 말함이다.
이는 번뇌애와 지애를 벗어나 생멸의 화합상을 여의어, 순전히 깨끗하고 밝은 때문이다.
Thirdly, it is the mirror that is absolutely free from the two impediments, the Pure nature of suchness, is the law of the Absolute and Pure wisdom.
It is free from the concepts of birth and death by being out of the two impediments, which one is the attachment to 'I' as an immortal, and the other is misconception about substance, therethrough to be pure and clean.
[법출리경(法出離鏡)= 법을 여기서는 번뇌에서 벗어난 법, 즉 진여를 말한다. 체대와 상대를 합한 법신을 의미한다. 번뇌장(煩惱障)과 지장(知障)을 출리(出離)시킨 본각을 거울에 비유한 것. 따라서 앞에서의 지정상(智淨相)과 같은 것이다.
번뇌애(煩惱碍) 지애(知碍)= 번뇌장과 지장. 지장(知障)을 소지장(所知障)이라고도 한다. 기신론에서는 번뇌애는 근본업불상염 등 육염(六染)을 말하고 지애(知碍)는 육염(六染)의 의지처인 무명(無明)을 말한다.
화합상(和合相)= 업식(業識) 전식(轉識) 현식(智識) 상속식(相續識) 등 진망화합식의 상을 말함.
소지장: 사물의 참모습을 바로 알지 못하게 하는 장애.
번뇌장 (煩惱障)= 인간의 몸은 5온 (五蘊)이 화합한 존재에 불과한 것인데 영구성 (永久性)있는 ‘나’하고 집착하는 번뇌. 128근본번뇌와 20수번뇌.
[煩惱礙(번뇌애) : 번뇌장(煩惱障)과 같은 말이다. 아집으로 인해 인식 주관을 어지럽혀 열반을 방해하는 번뇌이다.
智礙(지애) : 소지장(所知障)과 같은 말이다. 인식된 현상에 집착하여 일어나 보리를 방해하는 번뇌.
和合相(화합상) : 아리야식을 말한다.-물처럼바람처럼]
[법출리경(法出離鏡)은 법에서 멀리 떠나는 거울이니 공하지 않는 법이다. 불공법(不空法)이 번뇌애(煩惱礙)와 지애(智礙)를 벗어나고 화합상을 여의어 순박하고 깨끗하고 밝은 까닭이다.” 인(因)에 의해 뭔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인훈습경에 의해서 인이 많이 훈습되었습니다. 그래서 법에서 멀리 벗어나며, 법에서 멀리 떠났으니까 이 세상에 이런 모양을 갖고 나타날 수 있는 조건을 갖춘 것입니다. 법에서 멀리 떠났기 때문에 진여 자체의 모양이 아닙니다. 즉 금이 아니라 금목걸이의 모양을 갖추어가는 것입니다. 물들고 멀리 떠나 공하지 않지만 체 자체는 깨끗하고 순박하고 밝습니다. 중생 속에 있지만 중생의 삶에서 자유로운 것입니다. 원효나 유마와 같은 사람들이 법출리경에 해당된다 고 할 수 있습니다. 진리가 형상화되는 과정이 법출리경입니다.-통섭불교]
[세 번째 거울에 비유한 성정본각의 성격은 법출리경(法出離鏡)이다. 이는 무명번뇌로부터 벗어난 본각(本覺)을 거울에 비유한 것이므로 이를 정경(淨鏡)이라 하기도 한다. 즉 영원한 무루의 성공덕(成功德)을 갖추고 있는 불공(不空)의 본각은 온갖 번뇌의 장애와 그 번뇌의 근본인 무명의 지장(知障)에서 벗어나, 아리야식의 진망(塵網) 화합의 상을 떠남으로서, 본각의 덕이 나타나고, 순수 청정한 지혜가 밝혀지기 때문이다. 이는 수염본각(隨染本覺)의 지정상(智淨相)을 성정본각(性淨本覺)의 입장에서 나타낸 것이다.
법장은 ‘앞에서는 수염본각의 입장이기 때문에 청정심으로 환원된 환정(還淨)의 경지를 설명한 지혜여서, 바로 지(智)와 용(用)을 함께 밝혀 시각(始覺)의 입장에서 설명한 것이며, 여기서는 자성(自性)의 입장이기 때문에 장애를 벗어난 법의 체를 나타냄으로서, 바로 법과 용을 함께 밝혀 법체의 입장에서 설명한 것이다. 때문에 앞에서는 지(智)라 하였고, 여기서는 법(法)이라 하였으며, 또한 앞에서는 업(業)이라 하였고, 여기서는 연(緣)이라 한것이다.’고 하였다.-백련 전종식]
四者(사자) 緣熏習鏡(연훈습경) 謂依法出離故(위의법출리고)
遍照衆生之心(편조중생지심) 令修善根(영수선근) 隨念示現故(수념시현고)
넷째, 연을 훈습하는 거울=緣熏習鏡이니, 법을 멀리 떠난=法出離를 의지하므로
중생의 마음을 고루 비추어 중생으로 하여금 선근을 닦게 하며,
생각에 따라 나타내 보이기 때문이다.
Fourthly, the mirror that makes to arise the wisdom of just attained enlightenment, so to say it is the exterior cause,whichis free from the law of the two impediments, and supports the mind of each life, and leads them to practice the root of good virtue, and also makes them to see Buddha’s appearance in accordance with their thoughts.
[연훈습경(緣熏習鏡)= 본각이 밖에서 중생의 연으로 작용하여 시각(始覺)의 지(智)를 일어나게 하는 것, 즉 외연(外緣)의 활동을 말한다.
염(念)=중생의 생각, 망념이지만 부처를 생각하는 염이다.]
[法出離(법출리) : 위의 셋째에서 본각이 번뇌애와 지애를 벗어나고 화합상을 떠난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중생들의 마음을 비추어 선근을 수행하게 하고, 중생들의 생각에 따라 나타내 보이게 된다.
* 연훈습(緣熏習)이라 한 것은 밖으로 중생들을 발심수행하게 하기 때문이다.
* 법출리경(法出離鏡)과 연훈습경(緣熏習鏡)은 시각이 본각과 일치된 상태를 설명한 것이며, 수행의 결과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된 자는 번뇌와 화합상을 떠나 자유롭다. 또한 중생들을 가르쳐 번뇌를 떠나게 하므로, 수행자로 볼 때는 밖으로부터의 조력이 된다. 그래서 연훈습이라고 하였다.]
[성정본각의 의미는 연훈습경(緣熏習鏡)이다. 연의 의미는 본각으로서의 불타가 중생을 위한 연(緣)이 되어 중생이 가지고 있는 각(覺)의 지혜를 깨우쳐 주는 것을 말한다. 이를 위하여 외부에서 중생에게 작용하는 것을 훈습(熏習)이라 한다. 따라서 연훈습경은 이와 같이 본각이 외연(外緣)의 힘이 되어 중생에게 시각(始覺)의 지(智)을 일으켜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을 앞서 법출리(法出離) 즉 번뇌로부터 빠져나온 본각의 지혜가 순정이 되어 불타로서의 활동을 행하는 것이다
따라서 불타의 활동이 외부로부터 일체중생의 마음에 두루 미치어, 그 중생의 근기와 능력, 소질에 따라 법을 설하고 교화하여, 선근을 닦게 하고 그들의 사념(思念)에 응하여 여러가지 모습으로 그들 앞에 나타나, 외연의 힘이 되는 것이다. 중생은 그릇 따라 받아 쓸 뿐이므로 수용경(受用鏡)이라는 이름도 있는 것이다. 이것은 수염본각(隨染本覺)의 부사의업상(不思議業相)에 상당하는 것으로, 성정본각(性淨本覺)의 입장에서 본 것이다.
이상은 성정본각의 뜻을 네 가지 거울에 비유하여 설명한 것이지만, 원효와 법장은 상당한 이견(異見)을 나타내고 있다.
원효는 첫째의 여실공경(如實空境) 부분에서 ‘일체의 마음에는 경계상이 떠나 있다’고 한데 반하여 ‘열반경’의 제일의공(第一義空)을 인용하고, ‘망법이 타날 수 없다’는 데에 대하여 ‘공과 불공을 보지 못한다’고 해석하면서, 둘째의 인훈습경 부분에서 ‘일체세간의 경계가 모두 그 가운데 나타난다’는 부분에 대하여도 역시 ‘열반경’을 인용하여 ‘이는 공과 불공으로 본다’는 것으로 해석하여 인훈습경의 핵심에서 벗어나 있다.
또한 공을 생사로 본다든가, 불공을 대열반으로 보는 것은 기신론의 이론과는 상반되는 것으로서 있을 수 없다고 본다. 그리고 계속하여 불출불입(不出不入) 부분에 대하여서도 생사의 경계를 나타낸 것은 이미 거울에서 나타났기 때문에 ‘나오는 것이 아니다’라고 해석하고 그러나 오염되지 않은 거울이기 때문에 ‘들어오는 것도 아니다’라고 하여 역시 그 뜻을 이해하기가 매우 어렵게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거울로 비유한 성정본각을 다시 요약하면;
첫째의 여실공경(如實空境)은 여실한 진여에는 망념의 번뇌가 물들어질 수 없는, 번뇌 공무(空無)의 본각을 거울에 비유한 것이며
둘째의 인훈습경(因熏習鏡)은 여실불공의 내부적 작용으로서 번뇌 없는 진여에는 지혜광명 등 성공덕이 가득 차 있어, 그 힘을 인(因)으로 하여 내부에서 훈습으로 작용하며, 중생으로 하여금 불도를 구하게 하고 지혜를 완성케 하는 것이다. 그와 동시에 일체 세간의 경게가 또한 그 안에 나타나는 것이지만, 본체인 본각은 불출(不出), 불입(不入), 불실(不失), 불괴(不壊)하는 그대로이다. 그러나 그것이 무명망념의 연(緣)을 기다려 나타나게 할 뿐인 것이다.
이상의 두 거울은 재전위(在轉位) 즉 번뇌 속에 있는 본각의 성정(性淨)을 나타내는 것이다.
셋째의 법출리경(法出離鏡)은 여실수행의 결과에 의하여 모든 장애가 본각진여로부터 떨어져 퇴출됨으로서 순정지혜만이 남은 본각을 정경(淨鏡)으로 비유한 것이다.
넷째의 연훈습경(緣熏習鏡)은 위와 같이 지혜를 완성한 불타의 본각이 외부의 훈습으로 연이 되어 중생이 가지고 있는 각의 지혜를 깨우쳐 주는 것이다.
이상의 법출리경과 연훈습경 두 거울은 출전위(出轉位), 즉 번뇌에서 벗어난 본각의 체상을 나타내는 것이다. 또한 두 번째의 인훈습경은 진여의 내훈을 나타내고, 네 번째의 연훈습경은 진여의 외훈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들 둘은 진여의 뛰어난 작용을 나타내고 있는데 대하여, 첫째의 여실공경과 셋째의 법출리경은 본각진여의 체를 나타낸 것이다.]
[연훈습경(緣熏習鏡)은 연을 훈습하는 거울이니 법을 멀리 떠나 의지하기 때문에 중생의 마음을 두루 비추어서 선근을 닦게하여 생각에 따라 나타나는 까닭이다. 연훈 습경은 이 세상에 나타나는 모양을 훈습하는 거울입니다. 각각 중생의 모양대로 나타나게 하는 것이 연훈습경입니다. 우리가 이런 모양으로 나타나는 것은 진여 세계의 것이 물들고 물들어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성정본각의 네 가지 단계는 진여가 물들고 물들어 지금 이 모양으로 나타나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지금 이 모양이 투명해지면 바로 진여의 모습입니다. 결국 진여가 중생들의 삶과 같은 것입니다.
빛에 계속 충격을 주면 전자가 두 개로 나누어집니다. 전자를 살펴보면 마이너스 전자가 있고 플러스 전자가 있습니다. 이 두 전자를 붙여버리면 아무것도 없습니다. 원래 없던 것에서 힘(충격)을 주어 두 개로 나누어진 것입니다. 형상이란 오염을 벗겨 버리면 진여 세계의 그 모양이 됩니다. 일심이란 것도 뭉뚱그려 하나로 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이 모양을 갖고 있는 것이 일심입니다. 이 모양을 나타내는 그대로가 진여의 세계가 되는 것입니다. 물들어 오염된 것에서 벗어나면 진여의 문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호수에 큰 산이 비치는 것과 같습니다. 실제 그 안에 산이 없더라도 산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물속에 산이 없어도 산이 있는 것입니다. 진여의 세계도 똑같습니다.
“불각의입니다. 첫 번째 근본불각은 무명이고 두 번째 지말불각은 삼세와 육추이고 세 번째 마지막 근본불각과 지말불각의 총결은 무명의 오염입니다.” 불각의부터는 우리가 사는 세계의 이야기입니다. 근본불각은 모든 것의 출발점. 무명입니다. 지말불각에는 삼세와 육추가 있는데 이것은 아뢰야식, 말라식, 육식, 의식, 색수상행식 등을 가리킵니다. 이 근본불각과 지 말불각은 모두 다 무명의 오염으로부터 옵니다.]
[元曉 : 네 종류의 뜻 중에 첫째와 셋째는 때를 없앤다는 뜻에 의해 맑은 거울에 비유하였고, 둘째와 넷째는 형상을 나타낸다는 뜻에 의해 역시 맑다는 뜻을 둔 것이다. 이 중 앞의 둘은 인성(因性)에 있고 뒤의 두 가지는 과지(果地)에 있다.
앞의 두 가지는 공(空)과 지(智)를 밝혔으니 이는 ≪열반경≫에서 “불성이란 제일의공이며, 제일의공을 지혜라고 이른다. 지혜란 공과 불공을 나타내고, 어리석음이란 공과 불공을 나타내지 않는다.”라고 널리 설명한 것과 같다.
처음에 遠離一切心境界相이라고 한 것은 ≪열반경≫의 제일의공을 나타낸 것이고, 無法可現 非覺照義故라고 한 것은 공과 불공을 나타내지 못한다는 것을 해석한 것이다.
둘째에 一切世間境界 悉於中現이라 한 것은 저 경의 “지혜란 공과 불공을 나타낸다”고 한 것을 풀이한 것이니, 이는 ≪열반경≫에서 “공이라는 것은 일체의 생사이고, 불공이라는 것은 대열반에 이르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과 같으며, 여기서는 다만 생사 경계를 나타낸 것이다.
이미 거울에 나타냈기 때문에 不出이라고 하였고, 거울을 더럽히지 않았기 때문에 不入이라고 하였다. 곳에 따라 형상을 나타내는 것이 본각의 양능과 같아서 허공계와 같고, 삼세에 두루하기 때문에 생각생각마다 잃음이 없으며, 다 멸하여 파괴됨도 없기 때문에 不失不壞常住一心이라고 하였다.
셋째에서 ‘두 가지 장애에서 벗어나 깨끗하고 맑고 밝게 되었다.’고 말한 것은 앞서 말한 인훈습경이 번뇌에서 벗어났을 때 법신이 된다는 것을 밝힌 것이다.
넷째에서 依法出離故 遍照衆生之心라고 한 것은 곧 저 본각이 밝게 나타날 때 중생의 근기를 똑같이 비추어 온갖 교화를 나타낸 것이니, 그러기에 隨念示現라고 한 것이다.]
本覺 - 高淳豪의 《大乘起信論》 | ||||
隨染本覺 | 智淨相 | 본각의 內熏(因) | ⟶ 시각=본각(果) | 體의 면, 근본지 법신 |
불보살의 外(緣) | ||||
不思議業相 | 智淨相(因) | ⟶ 중생 교화(果) | 용의 면, 후득지, 응신 |
|
중생의 감응(緣) | ||||
性淨本覺 | 如實空境 | 여실공경의 면 | 자성이 청정함 | |
因熏習境 | 여실불공의 면. 內熏의 기능 | |||
法出離境 | 번뇌를 떠난 면 | 번뇌를 떠나 청정 함 | ||
緣熏習境 | 번뇌를 떠나 示現하는 면, 外緣의 기능 |
* 이기영은 원효의 《대승기신론소·별기》를 해설하면서 ① 티 없는 거울(如實空境) ②지혜롭게 비치는 거울(因熏習境) ③ 자유의 거울(法出離境) ④ 잘 보이게 하는 거울(緣熏習境)라고 하였으며, ①②는 因으로 ③④는 果로 보았다.
[부처님 십대 제자 가운데 두타 제일 가섭 존자는 바라문 출신으로 왕사성에서 가장 부유한 집의 외동아들이었습니다. 가섭은 수행자로 사는 것이 소원이 었으나 부모들은 장가를 보내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세상에서 가장 예쁜 여자를 그려 이 여자가 아니면 결혼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이것은 불가능한 상대를 찾는 것이나 다름 없었으나 놀랍게도 그의 부모는 그림과 똑같이 생긴 여자를 찾아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결혼하게 되었지만, 아내에게 결혼은 했지만 수행자처럼 살자고 하여, 아내도 동의했습니다. 그 후 결혼해서 12년 동안 낮에는 평범한 부부와 같이 지내고 밤에는 수행을 하면서 살았으며, 그리고 석가모니 부처님 출현의 소식을 듣고 출가하게 됩니다. 가섭의 부인은 다른 곳으로 출가합니다.
어느 날 제자들이 부처님께 왜 저렇게 가섭이 공부를 잘하느냐고 묻자, 부처님께서는 가섭의 전생 이야기를 해주십니다. 가섭은 전생에 파라나성에 살았던 가난한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날 흉년이 든 파라나성에 벽지불 수행자(연기의 이치를 혼자서 터득하여 스스로 깨달은 사람, 성문, 연각, 보살의 단계에서 연각과 같습니다.)가 걸식을 하는데 빈 그릇을 들고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그 마을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이 벽지불이 빈 그릇을 들고 돌아가는 모습이 안타까워 자신이 먹으려고 한 피밥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 벽지불이 발우에 피밥을 받아 돌아가는 뒷모습이 너무나 성스러워서 가난한 사람은 합장을 하며 원을 세웠는데, “원하옵건대 앞으로 뛰어난 벽지불을 만나 진리의 말씀을 듣고 받들어 나도 벽지불과 같이 깨달음을 얻기를 원하옵니다. 또한 세세생생 지옥이나 악도에 떨어지지 않기를 원하옵니다.” 그 가난한 사람이 바로 가섭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었습니다. 그 벽지불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전생이었습니다. 가섭은 전생에 순수한 마음으로 원을 세웠기 때문에 공부를 잘 할 수 있었던 것이고 전생의 인연 덕분에 그 생에서도 부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내가 공부를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으면 어떤 인과도 피해갑니다. 지극한 마음, 거룩한 마음을 내면 세상은 그에 따라 바뀌어 갑니다. 가섭의 두타행을 보면 가섭이 평생 어떻게 수행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가섭은 평생 세 벌 이상의 옷을 갖지 않았고 다른 사람이 버린 옷을 주워다 기워서 만든 분소의를 평생 입었습니다. 부처님께서 그것을 보시고 가섭에게 분소의를 입지 않아도 되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시자, 가섭은 “부처님 이시여. 저는 이 생에서 어떻게 살아야하는가 소신이 있습니다.
분소의를 입는 것은 수행자의 바른 모습이라 생각합니다. 누가 버린 옷이지만 기워서 이렇게 입을 수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 말을 듣고 부처님은 그것을 허락해주시고 더 이상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가섭은 수행자가 된 이후로 한번도 등을 바닥에 대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처럼 가섭과 같은 위대한 제자들을 보면 부처님에 버금가는 위대함이 있습니다. 부처님의 교단이 끊어지지 않고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은 부처님을 따라 수행했던 수행자들의 삶이 부처님 못지않게 버금가는 삶이었기 때문이라 생각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