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승기신론 正宗分(정종분)의 解釋分(해석분) 5
(2) 여실불공(如實不空) - Non-emptiness in True Suchness
所言不空者(소언불공자) 已顯法體空無妄故(이현법체공무망고)
卽是眞心(즉시진심) 常恒不變(상항불변) 淨法滿足(정법만족)
故名不空(고명불공), 亦無有相可取(역무유상가취)
以離念境界(이리념경계) 唯證相應故(유증상응고)
이른 바 불공이라 함은 이미 법체가 공하여 망이 없음을 드러내기 때문에, 이것이 곧 진심이다.
(이 진심은) 항상 변치않아 정법을 만족하므로 불공이라 이름하지만, 역시 상을 취할 것이 있는 것도 아니다.
망념(생각)을 떠난 경계는 오직 증득하여야 상응하기 때문이다.
Non-emptiness, so to speak, is the substance of true suchness which can disclose its pureness (emptiness) after removing objectivity and subjectiveness from imaginative and delusional thoughts (mind), which we can call a sincere heart.
This pureness of a sincere heart can fulfil the right law of entity and can be called immutable non-emptiness, likewise it doesn't adopt imaginary or delusional aspects of mind.
That is because this state of pure emptiness of mind can be acquired only after realization.
[모든 망상을 여의면 진여들 증득하게 되며, 진여를 증득해야만 진여와 상응하게 된다. 즉 부합하게 된다. 생각으로 짐작하고 상상한 주관이나, 그 주관의 대상이나, 주객관의 분별로 생긴 상은 진여와 부합되지 않으므로 불상응이라고 하였다. 왜 불공이라고 하였는가? 망상이 걷힌 진여는 허상이 아니라 참되기 때문에 불공이라고 하였다.-물처럼바람처럼]
[여실불공(如實不空)이라 함은 일체 차별의 상을 나타내는 망심(妄心)이 없어진 여실공(如實空)의 인식계, 다시 말하면 불지(佛智)로서의 심진여(心眞如)이므로 거기에는 무루(無漏)의 성공덕(性功德)을 본래부터 갖추고 있다는 것을 말하여 여실불공(如實不空)이라 한다.
생명의 본체, 즉 법체(法體)인 심진여에는 번뇌가 공(空)으로서 망심이 없다는 것이 명백한 것이므로 이 진심(眞心)인 심진여는 그 본성이 항상하고 영원하며, 불변으로서, 거기에는 지혜광명의 청정한 본성〔淨法〕이 충만되어 있으므로 이점을 불공(不空)이라 이른다는 것이다.
마음의 본성이 이와 같이 무량한 성공덕을 갖추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현상세계에서 분별되는 차별의 모습으로 인식되는 것은 아니다. 즉, 상(相)으로 인식되는 것이 아닌 것이다.
상(相)으로 인식된다면 그것은 망념의 인식이 된다. 이념(離念) 다시 말하면 망념이 해소된 인식계에는 집착할 자기도 없고 그 자기가 인식하는 대상도 없어져, 오로지 있는 그대로를 비추어 주는 깨달음의 세계만이 존재하는 것이다.-전종식]
(3) 心生滅門(심생멸문) - Phenomenal Aspect of the Mind
① 心生滅(심생멸) - Phenomenal Mind (rise and fall of the Mind)
㉮ 여래장(如來藏)과 아리야식(阿梨耶識) -Yeoraejang and The eighth consciouness(Alaya-vijnāna)
心生滅者(심생멸자) 依如來藏故(의여래장고) 有生滅心(유생멸심),
심생멸이라는 것은 여래장에 의지하기 때문에 생멸심이 있는 것이다.
The rise and fall of the phenomenal mind count on the eternal Tathagata-garbha, therefore, there are waves of rise and fall in the mind(the thoughts or minds of living beings).
(The birth (or rise) is what differentiates all sorts of awareness when the ignorant and illusional mind affects the eternal pure mind.
The death (or fall) is what overcomes from the influence of an ignorant mind to recover the pure suchness of mind, in other words, the pure mind is covered with the worldly desire.)
[如來藏(여래장)이란 진여가 무명에 덮여 있는 것을 말한다.
元曉 : 依如來藏故 有生滅心은 자기의 청정한 성품을 여래장이라고 하는데, 여기에서 무명의 바람으로 생멸하는 마음이 일어나므로 생멸하는 마음이 여래장에 의지한다고 한 것이다.]
[아뢰야식= 제8식을 칭하는 여러 명칭들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아뢰야식(阿賴耶識)인데 이것은 산스크리트어 알라야 비즈냐나(ālaya vijñāna)를 현장이 음역한 것으로 신역어(新譯語)이다. 다른 음역어로는 아라야식(阿羅耶識) · 아랄야식(阿剌耶識) · 아려야식(阿黎耶識) · 아리야식(阿梨耶識)이 있으며 줄여서 뢰야(賴耶) 또는 리야(梨耶)라고도 한다.
산스크리트어 알라야 비즈냐나(ālaya vijñāna) 즉 아뢰야식에 대한 대표적인 의역어로는 진제(眞諦: 499~569)에 의한 무몰식(無沒識)과 현장(玄奘: 602~664)에 의한 장식(藏識)이 있는데, 각각 제8식에 대한 지론종 · 섭론종 · 천태종 등의 구역가(舊譯家)의 견해와 법상종 등의 신역가(新譯家)의 견해를 대표하는 명칭이다. 즉, 이 번역어에 담긴 뜻의 차이는 제8식에 대한 구역가와 신역가의 견해 차이를 보여준다.-위키]
[대승불교 가운데에서도 불교의 유가행유식학파(瑜伽行唯識學派, 한국의 법상종)의 용어. 산스크리트 알라야 비즈냐나를 음역한 것으로, 아라야식(阿羅耶識) · 아랄야식(阿剌耶識) · 아려야식(阿黎耶識) · 아리야식(阿梨耶識)이라고도 한다.
이 학파는 외부 세계가 실제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부정한다. 이들은 세상은 사람이 인식하는 만큼만 존재한다고 본다. 이런 생각의 틀 안에서 이들이 깊이 고찰한 것이 외부 세계를 인간이 인식하는 과정이다. 이들은 인간이 외부의 물상을 눈, 귀, 코, 혀, 몸의 다섯 가지 감각 기관을 거쳐서 인식한다고 본다. 이 다섯 가지를 5식(識)이라 하고, 정신을 6번째의 인식 방법으로 생각해서 제6식(識)이라고 한다.
그 다음 제7식은 말라식(末那識, manas- vijñāna)라고 부르는데, 이는 자아의식(自我意識)으로 정신보다 좀 더 깊은 곳에 있는 마음을 뜻한다. 아뢰야식은 제8식으로 자아의식의 뿌리가 되는 심층의식을 뜻한다.
인간이 생활하면서 제1식으로부터 제7식에 이르기까지 인식하는 모든 것들은 심층으로 내려가 아뢰야식에 기록된다. 모든 것이 누적된 아뢰야식은 무의식중에 거슬러 나타나서 인간의 마음과 행위를 결정하는 데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불교에서는 아뢰아식이 인간 모든 활동의 근원이 된다고 본다. 마음이 따뜻하고 차가운 것, 행동이 착하고 악한 것, 생각이 더럽거나 깨끗한 것도 모두 그 깊은 바닥에 있는 아뢰아식에서 출발했다고 보는 것이다. 아뢰야식보다 위에 있는 제1식부터 제7식까지의 인식은 대상을 대할 때마다, 기분에 따라 바뀌며 일관성이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마음 깊은 곳에 저장된 아뢰야식은 그 모든 것의 근본으로 제7식인 자아의식보다도 깊은 곳에서 모든 것을 받아들여서 그 모든 것의 진리를 성찰하는 인식을 말한다. 그러나 자신의 아뢰야식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수행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자신의 속에 어떤 업이 담겨 있는지 알 수가 없다.
불교에서는 아뢰야식에 업이 씨앗처럼 자리잡기 때문에, 인간의 생명이 다하면 그동안 인간이 느끼고 받아들였던 모든 인식이 아뢰야식에 담겨 있다가 씨앗처럼 자라나서 다른 생명으로 태어난다고 본다. 선행이 선행을 낳고 악행이 악행을 낳는다는 것이 바로 이 논리인데, 이를 윤회라고 한다. 하지만 수행을 게을리하지 않을 경우 아뢰야식에 담긴 자신의 본질을 깨닫고 그 업을 소멸하는 순간을 만나게 된다. 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의 경지이다.
이 아뢰야식을 철학적 입장에서 분석한 글이 신라의 고승 원효(元曉)의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이다. 원효는 외부의 것에 대한 마음에 따라 외부에 대한 인식이 달라진다는 것을 해골에 담긴 물을 먹고 깨달았던 것이다. 그는 <대승기신론소>와 <별기(別記)>에서 아뢰야식이 만들어지고 바뀌며 사라지는 것에 대해 철학적으로 논의했다.-다움]
所謂不生不滅與生滅和合(소위불생불멸여생멸화합) 非一非異(비일비이)
名爲阿梨耶識(명위아리야식),
이른바 불생불멸과 생멸이 화합하여 하나도 아니요 다른 것도 아니니, 이름하여 아리야식이라 한다.
It cannot be said that neither one mind or two different minds when the rise and fall of the phenomenal mind depend on no rise or no fall of eternal pure mind but we just call it the eighth consciousness.
[元曉, 별기 : 불생멸심(不生滅心)이 생멸심과 더불어 심체가 둘이 아니며, 다만 두 가지 뜻을 가지고 마음을 취하여 둘이 되는 것이므로 이를 依如來藏라고 말할 뿐이다. 이는 마치 움직이지 아니하는 바닷물이 바람이 불어 움직이는 물결을 일으키는 것이니, 동(動)과 정(靜)은 다르지만 바닷물의 체는 하나이므로 정수(靜水)에 의해 동수(動水)가 있다고 하는 것과 같다.
元曉 : 不生不滅이란 위의 여래장을 말한다. 이 생멸하지 않는 마음이 움직여서 생멸을 일으켜 서로 버리거나 여의지 않음을 더불어 화합한다고 이름하니, 이는 아래 글에서 (‘본각’에서) 如大海水 因風波動 水相風相 不相捨離라고 한 것과 같다.
元曉 : 이는 생멸하지 않는 마음이 생멸과 화합하는 것이지, 생멸이 생멸하지 않는 마음과 화합하는 것이 아니다.
非一非異란 생멸하지 않는 마음이 그 전체가 움직이기 때문에 마음이 생멸과 다르지 않은 것이요, 늘 불생불멸을 잃지 않기 때문에 그 생멸이 불생멸심과 같지 않은 것이다. 또 만약 같은 것이라면 생멸식상(生滅識相)이 다 없어질 때 심신(心神)의 체도 따라서 없어지게 되니 단변(斷邊)에 떨어지게 되고, 만약 다른 것이라면 무명의 바람에 의해 훈습되어 움직일 때, 정심(靜心)의 체가 연을 따르지 않게 되니 이는 상변(常邊)에 떨어질 것이다. 이 두 변을 여의었기 때문에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닌 것이다.
* 진여는 불생불멸이나, 무명에 따라 생멸하는 모습을 보인다. 여래장은 진여가 무명에 덮여 있는 것이므로, 불생불멸인 측면과 생멸인 측면이 있다. 생멸하는 모습이 보이더라도 진여성은 무너지지 않는다. 마치 바닷물에 파도가 일어서 파도가 생멸하지만, 물의 성품이 변하지 않는 것과 같다. 두 가지 측면은 하나는 아니지만 다른 것도 아니다.]
此識有二種義(차식유이종의) 能攝一切法(능섭일체법) 生一切法(생일체법)
云何爲二(운하위이),
이 식에는 두 가지 의미(뜻)가 있어 능히 일체법을 섭하여 거두고, 일체법을 낳으니,
무엇이 그 둘인가?
There are two meanings in the eighth consciousness (Alaya-vijnāna), which now takes in the law of the whole and it contributes to the law of the whole.
What are they?
一者覺義(일자각의) 二者不覺義(이자불각의)
첫째는 깨달음=覺의 뜻이며, 둘째는 깨닫지 못함=不覺의 뜻이다.
One is infinite enlightenment, and the other is finite enlightenment.
(To explain, infinite enlightenment is the immutable pure mind and the finite enlightenment mind is delusional phenomenal mind)
[元曉,별기 : 묻기를 위에서 일심에 두 가지 문이 있다고 했고, 여기서는 이 식(識)에 두 가지 뜻이 있다고 하니, 저 심(心)과 이 식(識)이 무슨 차별이 있는가?
답하기를 위에서는 이체(理體)에 나아가 일심이라 이름하였으니, 일심의 체가 절상(絶相)과 수연(隨緣)의 두 가지 뜻의 문을 포함하기 때문에 일심에 두 가지 문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 이제 여기서 식(識)이란 다만 수연문 내의 이(理)와 사(事)가 둘이 아니고 오직 하나의 신려(神慮)인 점에서 일식이라고 이름한 것이니, 이 아라야식의 체가 각과 불각의 두 뜻이 함유되어 있기 때문에 此識有二種義라고 한 것이다. 이리하여 심은 넓고 식은 좁은 것이니, 심이 이문(二門) 내의 식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門)은 넓고 뜻[義]는 좁으니 생멸문이 두 뜻을 함유하기 때문이다.
* 아리야식의 두 가지 측면을 나타낸 것이다. 진여는 본래 청정하고 본래 깨달아 있는 것이며, 생멸심은 불각이다.
* 阿梨耶識(alaya;아리야식) - 아뢰야식(阿賴耶識)과 같은 말이다. a는 부정의 뜻. laya는 몰(沒)이라는 뜻. 함장식(含藏識)이라고도 하고 장식(藏識)이라고도 한다. 삶 속에 일어난 모든 기억들이 저장되는 창고라고 해서 이렇게 부른다.
* 지운 ; 生滅(생멸)
① 生 - 무명이 진여에 영향을 주어 염법(染法)이 일어나며, 이로 인해 고(苦)가 일어남.(流轉門) 진여가 무명을 훈습하여 정법(淨法)이 일어나고 낙(樂)이 생김.(還滅門)
② 滅 - 무명이 진여에 영향을 주어 정법(淨法)이 사라짐.(流轉門) 진여가 무명에 영향을 주어 염법(染法)이 사라짐(還滅門).]
[심생멸문은 심진여 즉 생명의 본체에 있어서의 상항불변(常恒不變)의 원리와 현상계(現象界)에 있어서의 생멸변화(生滅變化)의 원리와의 관계를 밝혀줌과 동시에 현상계의 생기(生起)를 설하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이 진여에 있어서의 상항 불변의 원리와, 현상계에 있어서의 생멸변화의 원리와의 관계는 어떠한 것인가. 이 두 가지 원리는 생명의 관점에서 본 차이(差異)일 뿐, 하나의 것을 두 입장에서 관찰한 것에 불과하다.
여기에서 생명을 본체적 방면에서 관찰할 때는 생멸도 없을 뿐만 아니라, 변화도 없이, 전적으로 상항불변(常恒不變)인 것이지만, 현상적인 방면에서 관찰하면 생멸(生滅)도 있고 변화도 있어, 유전윤회(流轉輪廻)의 모습이 역연(歷然)하게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생명 자체에 두가지 면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생명은 이 두 방면에서 관찰하지 않으면, 전혀 그 진상을 파악할 수 없기 때문에, 이것을 본체와 현상으로 나누어 관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체라고 하던가, 현상이라고 하는 것도, 결국 그것은 관점상의 입장을 나타내는 것에 불과하다.
즉 심진여문(心眞如門)은 시간을 초월한 본체적 입장에서 영원불멸의 일심(一心)의 체(體)를 보는 것이며, 심생멸문(心生滅門)은 시간속에 있는 현상적 입장에서, 끊임없이 생멸변화하는 일심의 상(相)을 보는 것이 된다. 생멸변화하고 있다는 것은, 마음이 번뇌와의 관계속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불타(佛陀)의 마음속에는 번뇌가 포함되지 않고 있지만, 그러나 중생과 함께 활동하고 있어 중생의 번뇌와 관계하고 있다. 따라서 불타는 스스로 시간을 초월하고 있지만, 그러나 시간의 세계에 관계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범부(凡夫)의 마음은,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이 번뇌와 결합되고 있기 때문에 생멸심(生滅心)이 되는 것이다. 이 생멸심이 시간을 자아내는 근원이 된다. 기신론(起信論)에서는 망념(妄念)이 시간의 근원이다. 그러나 마음은 한 면에서는 찰나찰나 분별하는 생멸심이지만, 다른 한 면에서는 영원불변의 불생불멸(不生不滅)이다. 그러기 때문에 자기의 주체성(主體性)을 불생불멸의 마음에 둔다면, 망념은 사라지고 영원불변의 세계가 전개되는 것이다. 생명 즉, 마음의 본성은 자성 청정심이다. 그것은 적정(寂靜)이며 무념(無念)이다. 그러나, 이 무념의 심성이, 무명(無明)에 의하여 홀연(忽然)히 염(念)을 일으켜, 범부의 분별심(分別心)이 된다. 그러나 무명에 의하여 어찌하여 갑자기 염을 일으키는가를 설명할 수가 없기 때문에, 이것을 홀연염기(忽然念起)라고 일컫는다. 여하튼 이것이 범부의 현실이며, 이 염(念)에 의하여 시간의 세계가 전개되고, 생사(生死)의 세계가 전개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생사를 초월하고 시간을 초월하기 위해서는, 망념(妄念)의 소멸(消滅)이 요구되는 것이며, 이「기신론」의 목적도 여기에 있다 할 것이다. 망념의 본질에는 집착이 있다. 특히 자아(自我)에 대한 집착이 있어, 이것이 망념을 만드는 근거의 하나이다. 제행무상(諸行無常)이 현실적 진실의 상(相)이라면, 스스로 흐르는 그대로 흘러감으로서, 오히려 그 흐름에서 벗어날 수도 있다 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의식(意識)이 흐르는 대로 의식하여 간다면, 거기에는 의식에 집착이 없어, 염(念)이 일어나지 않는 마음의 세계가 실현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지구(地球)와 함께 돌고 있는 우리가, 지구의 움직임을 감지하지 못하는 이치와 같다고 할 것이다. 심생멸문(心生滅門)은 시간속에서 생멸변화하는 마음과 상즉(相卽)하고 있는, 심진여(心眞如)의 존재가 어떠한 것인가를 탐구하는 것이다. 마음은 생멸변화하여 그 어디에도 머무름이 없기 때문에, 심생멸문에서는 마음의 체(體)를 문제 삼을 수가 없고, 마음의 상(相)을 문제로 하는 것이다.
심진여문이 마음의 총상이라 한다면, 심생멸문은 그의 별상(別相)이다. 여하튼 생멸문(生滅門)은,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을, 번뇌와의 관계속에서 해명한 것으로서, 전적으로 상대적 입장에 서있게 된다. 심진여문은 일어나지 않고 변하지도 않는 불기불변(不起不變)의 절대정(絶對靜)이지만, 이 절대고요와, 연따라 일어나는 수연기동(隨緣起動)의 동(動)과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시간속에 있으면서, 시간을 초월한, 영원의 상이 진여(眞如)이다. 절대정(絶對靜)의 진여가, 뒤에 시간과 결합하는 것이 아니다.
이와 같이 생명자체의 일심(一心)을, 심진여문과 심생멸문의 두 문을 세워, 두 방면에서 관찰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