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승기신론

대승기신론 序分(서분) 1

Skunky 2022. 11. 17. 10:01

大乘起信論(대승기신론)

The Awakening of Faith.

馬鳴菩薩造 (마명보살조) 

Patriarch Ashvagosha.

梁天竺三藏法師真諦譯(양천축삼장법사진제역)

Translated by Siksananda of Yang Dynasty

 

* Ashvaghosa;馬鳴, the first expounder of the Mayanistic Buddhist patriarchs, is known to the most eminent leaders among earlier Buddhists. He was in some way or other connected with the third convocation in Kashimir, probably presided over by the Bhikshu Parcva. The date, which varies according to different authorities from three hundred to six hundred years after the Parinirvana of Buddha.

마명 보살은 초기의 불교에서 가장 두드러진 선두자 중의 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으며, 대승적인 불교를 상세히 설명한 시조이다. 마명 보살은 ,아마도 비크슈 파르크바가 주관하였을 것으로 보이는, 케시미어의 세 번째 집회와 어떻게든 연관되어있었습니다. 생존 기간은 각각의 기록에 따라 다양하게 다르지만, 부처님 열반이후 300년에서 600년 사이로 보고있습니다.

 

* 아쉬바고사(Ashvaghosa;馬鳴), 부처님 입멸 후 600년경 중인도의 코살라국 쉬라바스티(Sravasti:舍衛城)에서 살았다. 처음에는 외도를 따르다가 나중에 불교에 귀의하였다. 혹자는 대승기신론의 범어본이 없음을 들어 중국에서 지은 것이 아닌가 하기도 하지만 대승불교의 시조인 아쉬바고사가 저자라고 보는 것이 통설이다. 시대를 격하여 서로 다른 두 사람이 각각 번역을 한 것을 보면 당시에는 원본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마명보살을 화엄종의 초조(初祖)로 본다.

 

* 논서의 한역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그 하나는 양(梁)나라의 파라마르타(Paramartha;眞諦;499-599)이 번역한 것이며, 다른 하나는 당나라의 쉬크샤난다(Siksananda;實叉難陀;學喜;652-710)가 측천무후 시대 695-700 사이에 번역한 경전 속에 이 대승기신론이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일반적으로 이것을 신역(新譯)이라 부른다

중요시되고 있는 세 종류의 주석서는 첫째 정영사문혜원(523-592)대승기신론 소 두권’, 둘째 신라해동사문 원효(617-686)대승기신론 소 두권셋째 법장(643-712)대승기신론 의기 세권이다.

기신론은 인연분, 입의분, 해석분, 수행신심분과 권수이익분의 다섯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 본론의 서론에 해당되는 인연분은 본론을 저술하는 여덞가지의 이유를 설명하고 
둘째 입의분은 본론의 기본적 사상을 총론적으로 제시하여 대승을 일심(一心 : 衆生心) 이문(二門 : 心眞如門, 心生滅門) 삼대(三大 : 體大, 相大, 用大)로 구분하여 설명하고
셋째 해석분에서는 앞의 입의분을 해석하는 장으로 본론의 중심이며, 주로 대승을 밝히고 있으며, 또 다시 현시정의, 대치사집, 분별발취도상의 세 부분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넷째 수행신심분은 기신을 설하며, 신심에는 네 종류가 있고 수행에는 다섯 문이 있어, 사신은 진여, 불, 법, 승의 삼보를 믿고, 시, 계, 인, 진, 지관의 오행을 닦는 방법을 설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권수이익분에서는 대승과 기신의 결론인 유통분을 설한다

 

I. 序分(서분)

 1. 歸敬序(귀경서) Adoration

귀경게는 불 법 승 삼보께 귀의하는 뜻을 밝히면서 예배드리는 글을 게송으로 담은 것으로 해설자가 편의상 붙인 것이다. 기신론의 원 저술자가 나눈 제목은 인연분, 입의분, 해석분, 수행신심분, 권수이익분 등 다섯가지 뿐이다.  

  1) 三寶(삼보)에 귀명

歸命盡十方(귀명진시방) 最勝業偏知(최승업편지) 

다함이 없는 생명에 돌아가 귀의하며, 가장 높은 업으로 두루 아시며, 

I offer my life to the all, to all beings, and Buddha whose wisdom is infinite and transcendent,

 

歸命(귀명)은 목숨을 바쳐 진여법성, 삼보에 의지 한다는 것 → 귀의이며 南無의 역어,   
盡十方(진시방)은 귀의의 대상인 불법승이 있는 온 시방 세계을 의미  

歸命盡十方(귀명진시방)은 이들 삼보에 귀의함을 밝힌 것이다.

歸命(귀명): 범어 namas 또는 namo, 음역하면 南無, 南謨. namo의 음역어인 南無(나무)에서는 받침을 빼고 '나'로 읽는다. 이는 중국어, 일본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歸命(귀명)이란 목숨을 건다는 말이다. 뒤집어 말하면 목숨을 걸지 않는 것은 거짓 약속이고 거짓 믿음이란 것이다. 인생을 바꾸겠다는 것은, 목숨(命)의 궤도 수정인데 목숨을 걸지 않고 목숨의 궤도 수정이란 것은 없기 때문이다. 목숨을 걸지 않는다는 것은, 이런들 저런들 이 목숨 이대로 살겠다는 것이니까. 목숨을 걸지 않는 그런 반성과 그런 약속과 그런 믿음이란 것 거짓이라는 이야기이다. 물론 반성과 참회도 가지가지이고, 수준차가 있지만, 보통의 반성이란 것들은 관성을 이기지 못한다. 6식이라는 의식적 차원의 반성, 아주 논리적이고 합리적이고 통찰력이 있는 반성이라도 해도 관성을 이기지 못한다.  6식, 7식, 8식 이런 어려운 이야기를 하지 않더라도 목숨을 걸 때, 비로소 나라는 존재의 코어(心)에 통할 수 있는 진정성이 확보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고는 우리는 겉 다르고 속 다른, 표리부동한 모습 그대로 구차한 명을 굴릴 수밖에 없기 때문일 것이다. -배영순」

 

「最勝業偏知(최승업편지)는 가장 뛰어난 중생구제 활동능력과 깨달음의 지혜를 가진 불타를 말한다.
업이 아무리 뛰어나다 하더라도 불타는 업이 소멸된 분이기에 업이라는 표현을 사용할 수 없다. 이러한 경우의 없은 ‘업용’ 즉 '용대'의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무난할 것이다. 
最勝業(최승업)은 가장 뛰어난 활동 능력, 즉 불타의 용대 활동을 말한다.
偏知(편지)는 불타의 지혜가 온 누리에 가득하다는 의미로

법장은 ‘안으로는 두루 아는 지혜가 있고 밖으로는 걸림이 없는 색신이 있다’고 하며,
원효는 ‘지혜의 바탕인 체가 두루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고 하면서 ‘섭대승론’을 인용하고 있다. ‘마치 허공이 일체의 물질세계에 두루 퍼져, 생기고 머물고 사라지는 변이가 없는 것처럼, 여래의 지혜도 그러하여, 알아야 할 일체의 자리에 아는 바가 두루 미치어 잘못 아는 일이나 달리 아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전종식」

 

「最勝業偏知(최승업편지) 意業(의업)이 가장 수승하시고 意業(의업)이 뛰어나 걸림 없음을 말하는 것, 범부는 진여법계의 이치를 아예 모르고, 이승(二乘)은 열반에만 치우쳐 알고, 십지 보살은 열반의 상주(常住)와 생사의 무상(無常)이 둘이 아님을 알지만, 유일하게 부처님만이 진여법계의 이치를 빠짐없이 보편하게 아신다.

일체지혜를 증득하지 못한 중생계는 뒤바뀐 생각으로 그릇되게 알고, 치우쳐 알고, 부분적으로 알거나, 온전히 알지 못하므로, 오직 實相(실상)의 지혜를 증득하신 부처님만이 밝아서 진여실상이 만물에 상응함에 契合(계합)되고, 온 우주법계에 충만한 지혜로 뚜렷이 비추어, 중생이 원하는 바와 그 근성이 미치고 미치지 못하는 바를 능히 알아서 세상을 구제한다 하였다. 세상을 구제하자면 語業(어업)이 뛰어나야 하는데,   
語業(어업)이란? 부처님 가르침 그대로의 설법이다. 경전의 말씀으로 깨달음을 얻은 이들의 뛰어난 설법만이 세상을 구제하는 방편이다. 그러나 중생들은 그 業(업)의 기틀이 달라서 듣는 이마다 이해하는 바가 다르다.    
그러므로 부처님은 중생들의 근기에 따라 對機說法(대기설법)과 威儀敎化(위의교화)와 無記說法(무기설법)등으로 중생의 근기에 따라 교화하기에, 대자대비의 힘(大慈大悲力)을 지니신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 准提覺圓(준제원각)」

adoration 1. 숭배 2. 동경 3. 기도 [ӕdəréiʃən]

transcendent 1. 초월적인 2. 탁월한 사람 3. 이해가 안 가는 사람[trænséndənt]

 

色無礙自在(색무애자재) 救世大悲者(구세대비자)

걸림없이 자재로우신 몸(색신, 육신)이시며, 세상을 구제하시는 대자대비하신 이(부처님),  

He who is free from all obstacles and who appears everywhere at any time, who save and guard all beings with great compassion and great mercy.

 

「色無礙自在(색무애자재)는 불타의 신체가 자유자재로 활동하여 중생을 이익 되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법장은 ‘화엄경’ '불사의법품'을 들어 네 가지의 걸림 없음을 말한다
첫째, 크고 작음에 걸림이 없어, 하나하나의 뿌리가 모두 법계에 두루 퍼져 있으나, 그 모든 뿌리가 파괴되지 않으며 또한 섞이지 않는다 
둘째, 상호 작용에 걸림이 없어 모든 뿌리의 모습이 서로 작용하여도 서로 걸림이 없다
셋째, 理(이)와 事(사)가 걸림이 없어, 색을 나타내는 것이 분명하지만 모든 체성의 空(공)에도 걸림이 없다. 묘한 이치는 깊어서 업용이 작용하되 모가 없어 걸리지 않는다
넷째, 근기에 따라 걸림이 없어, 시방세계 어디에도 응하여 다양한 근기에도 바로 감응한다. 몸 또한 나누지 않고도 널리 나타나며, 여기에 있어도 저기에 걸리지 않고, 저기에 있어도 여기에 걸리지 않는다, 행주좌와에도 걸리지 않는다.

救世大悲者(구세대비자)는 중생을 구제하는 불타의 대자비를 말한다. 

나와 남을 떠난 慈悲(자비)는 無緣(무연)의 자비로서 모든 자비 가운데 가장 뛰어난 것이기 때문에 ‘大悲(대비)’라- 원효. 
無緣(무연)의 大悲(대비)가 가자 수승한 까닭에 다비하고 한다-법장
‘불성론’에서 悲(비)란 잠시 구제하는 것으로, 진실한 구제는 불가능 하다고 하였으나, ‘大悲(대비)’는 능히 영구히 구제하는 것이며 항상 버리거나 떠나지 않게 하는 것이라고 한다
-전종식」

 

色無礙自在(색무애자재), 色은 色身을 말한다. 육신을 갖추고 있는 것을 색신이라고 한다. 부처는 신체가 걸림이 없이 자유자재하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왜 걸림이 없이 자유자재한가? 그 무엇에도 집착함이 없이 마음을 내기 때문이다.

救世大悲者(구세대비자) : 세상을 구원하는 크게 자비로운 분. 즉 부처님을 가리킨다.

* 歸命(귀명) ~ 大悲者(대비자) : 부처님(佛寶)을 찬미하고 귀의할 것을 나타내었다.-준제원각」

 

「불·법·승佛法僧 삼보三寶 - 숭산 행원 선사

초기 형태의 佛法僧 삼보三寶는 2천5백년 전 생존하셨던 석가모니 부처님(佛寶)과 그가 행하셨던 법문(法寶), 당시 승려와 신도(僧寶)를 부처 생존에 존재했던 것이라고 해서 ‘진체삼보眞體三寶’라고도 한다.

그러나 오늘날의 삼보는 이와 다르다. 우선 부처님의 상징인 불상도 한국과 중국은 금불상이지만 스리랑카와 태국은 석고 불상이며, 일본 불상은 한국만큼 화려하지 않지만, 어쨌든 다 부처님의 형상[佛寶]이다.

8만4천 경전으로 전해 내려오는 경전 역시 부처님의 가르침이므로 법보이다.

또한 오늘날은 전세계에 수많은 불교 공동체가 있어, 이것이 우리가 오늘날 접하는 승보이고, 또한  현재 존재하는 삼보라는 의미에서 ‘현존삼보現存三寶’라고 한다.

엄밀히 말하면 본래 형태의 불·법·승佛法僧은 모두 사라졌다. 오늘날 우리가 만나는 본래 형태의 불·법·승은 지역마다, 나라마다, 절마다 다 다르다.

그렇다면 무엇이 진정한 불·법·승인가? 그 근원을 살펴 보자면,

불·법·승은 본래 사람들의 깨끗한 마음에서 나왔기에 우리의 순수한 마음이 불佛이고, 우리의 마음이 순간순간 맑게 빛난다면 그것이 법法이다. 또 우리 마음이 어떤 상황에도 걸림이 없다면 그것이 승僧이다. 다시 말해 불은 순수한 마음이고, 법은 맑은 마음이며, 승은 순간순간 걸림없이 모든 중생들을 돕겠다는 행동이다. 삼보는 이처럼 하나이다. 이를 ‘일체삼보一切三寶’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순수하고 깨끗하며 걸림 없는 마음인가? 오래 전에 한 스님이 중국의 조주 선사에게 이렇게 물었다.

"무엇이 부처입니까?"

"차나 마셔라."

"무엇이 법입니까?"

"차나 마셔라."

맑고 깨끗하고 걱정 없는 마음으로 차를 마신다면 바로 그 순간 우리는 불·법·승이 된다. 우리는 이것을 ‘실용삼보實用三寶’라고 한다. 즉 삼보를 실천한다는 것으로, 이것이 ‘평상심平常心’이다.

조주 선사는 어떤 종류의 질문에도 “차나 마셔라.”고 했다. 만약 여러분 중에 이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당장 차를 마셔라. 차가 싫으면 코카콜라를 마셔도 좋다. 어떤 방식으로든 우리는 조자 선사의 진정한 가르침, 부처님과 모든 위대한 스승들의 높은 가르침을 깨달으면 실용삼보를 얻을 수 있다.

불·법·승은 진선미眞善美와 바꿔 설명할 수도 있다. 여러분은 누구나 미스 코리아, 미스 유니버스니를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심사위원들은 각자 저마다의 잣대로 점수를 준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여자들의 얼굴과 몸이다. 그러나 몸과 얼굴이 아름답다고 해서 행동이나 마음까지 아름다울까? 진정한 아름다움은 몸이나 얼굴에 있는 것은 아니다. 

보통 우리의 마음은 무지의 생각들로 가득 차 있어서 좋고 싫음을 만들어 스스로를 추하게 하지만, 수행을 열심히 하면 무지가 사라지고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그러면 우리 안에 있는 지혜가 자연스럽게 나타나고 진실한 아름다움, 미美가 나타난다.

모든 사람들은 이미 마음속에 선함을 가지고 있다. 영화관에서 착한 주인공이 악당과 싸우는 장면에서 주인공이 거의 죽을 정도로 얻어맞고 악당이 결국 이길 것 같다. 주인공이 맞는 동안 관객들의 마음은 조마조마하다. 아무도 선한 주인공이 죽기를 바라지 않는다. 결론이 해피엔딩으로 끝나면 사람들은 안심하고 영화관을 빠져나온다.

각자 다른 경험과 생각을 가진 사람들인데, 왜 모두 착한 사람에게 복을 비는 한마음이 되는 것일까. 그것은 이미 우리 안에 선한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정의가 이기기를 바라고 선행이 행해지기를 바란다. 선의란 어떤 어려운 수행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본래의 마음은 항상 다른 사람을 돕고 싶어하는 심정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참 나’와 우주는 결코 다르거나 분리되어 있지 않다. 내가 고통받기를 원치 않는 것처럼 다른 사람 역시 고통받기를 원치 않는다. 어떤 종교는 ‘원죄’를 얘기한다. 이것은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고통을 일으키는 성향을 가지고 태어난다는 점을 지적한 말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업業’일 뿐이고 ‘마음의 습관’일 뿐이다. 업을 통제할 수 있고 없앨 수도 있다. 불교는 어떠한 원죄 의식도 요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공空’이므로 우리의 업도 공하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타고난 우리의 본성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따라서 진정한 선의는 옳은 방향을 말하는 것이고, 이것을 경험하는 방법은 부처님의 계를 실천함으로써 가능하다.

어느 날 내 제자 중 한 사람이 이렇게 물었다.

“스님은 언제나 진실과 선행에 대해 말씀하시는데, 요즘 같은 경쟁사회에서는 마냥 착하기만 하면 다른 사람들한테 이용만 당합니다. 그러면 더 많은 고통에 시달리게 됩니다.”

아주 흥미로운 질문이었다. 나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얘기하는 선행이란 ‘나, 나의 것, 나를(I, my, me)’이 아니라 나와 남이 하나라는 것입니다. 본성은 하나이므로 나와 남이 다를 수 없습니다. 선을 행하면 우리 자신의 고통도 없어지고 다른 사람의 고통도 없어집니다.”

인간에 대한 사랑이 있는 사람은 항상 슬프다. 이 세상은 늘 고통의 바다에서 허우적대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다른 사람의 고통을 자기 것으로 느낀다. 항상 다른 이의 괴로움을 경계 없이, 분별 없이 받아들인다. 이 슬픔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닌, ‘나의’ 슬픔이 아니다. 따라서 이 슬픔은 나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 슬픔은 결국 다른 사람을 돕는 연민의 행동으로 바뀌게 된다.

항상 여섯 개의 고리를 가진 긴 막대기를 들고 있는 지장보살은 고통에 허덕이는 중생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지옥에라도 들어간다는 서원誓願을 세운 분이다. 여타 종교에서는 지옥에 간 사람들은 구원의 대상이 아니지만 불교에서는 지옥에 간 사람들조차 구해 내야 한다고 말한다.

지장보살은 대원본존大願本尊 지장보살이라고도 한다. ‘대원’은 큰 서원이다. 마지막 중생 한 사람이라도 부처가 될 수 없다면 결코 열반에 들지 않고, 마지막 중생까지 고통에서 건져질 때까지 세세생생 다시 태어나 그들을 구언하겠다는 위대한 서원이다.

본존’이란 본래 우리의 본성, 마음이라는 뜻으로, ‘대원본존’이란 고통에서부터 모든 생명을 구하겠다는 위대한 서원, 즉 우리의 본래 얼굴, 본성, 본체라는 뜻이다. 이 대서원은 이미 우리 안에 있다. 다른 사람을 돕겠다는 큰 약속은 이미 우리 안에 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불·법·승 삼보는 우리를 거룩하게 하고 우리 마음에 자유를 갖게 한다.

불·법·승 삼보는 특별한 어떤 ‘것’이 아니며, 부처님의 가르침도 특별한 것이 아니다. 진정한 아름다움을 볼 줄 안다면 부처가 되는 것이다. 순간순간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만지고, 생각하는 모든 것이 아름다움 그 자체이며, 진리를 얻어 바른 길을 간다면 법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럴 때 모든 중생들이 이 고통의 세계에서 헤어 나올 수 있도록 걸림 없는 행동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승가의 삶이다.

거룩한 삼보에 귀의한다고 할 때의 거룩함은 사실 거룩한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이 본래 순수하고 맑은 것이 진정 거룩한 것이며, 그것은 우리의 본성이다. 거룩하다는 것은 단지 이름이 없는 어떤 것을 부르기 위한 ‘말’일 뿐이다. 만물이 공하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야말로 거룩함에 대한 어떤 생각보다 낫다.- 작성자 향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