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성게

법성게(法性偈)와 법계도(해인도)무비스님 해설 6

Skunky 2021. 4. 12. 21:49

法性偈 禪解 - 雨寶益生滿虛空 - ②

這一个如意寶가 流出百千如意寶하고

這一海印定光三昧가 流出百千海印定光三昧라

然而나 這海印定光三昧는 非但十佛大人境界에 獨證이요

一切衆生이 各有十佛大人境界인 海印定光三昧하야 從生으로 至死하며 從旦으로 至暮히

或嗔或喜와 或語或黙에 一一이 各有一一海印하니라

이 한 개의 如意寶珠가 100천 개의 여의보주를 유출하고 이 하나의 海印定光三昧가 100천의 해인정광삼매를 유출한다.

그러나 이 해인정광삼매는 다만 10불의 대인경계에서만 홀로 증득하는 것이 아니요.

일체중생이 각각 10불의 대인경계인 해인정광삼매를 가져서 태어나서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아침부터 저녁까지 성을 내든 기뻐하든 말을 하든 잠자코 있든 낱낱이 각각 하나하나의 海印이 있는 것이다.

사람ㆍ사람들은 모두 개의 여의보주가 있고, 개의 여의보주는 다시 100천만 개의 여의보주를 유출합니다.

해인삼매도 그와 같아서 사람ㆍ사람에게 해인삼매가 있고, 해인삼매는 다시 100천만 개의 해인삼매를 유출합니다. 이것이 어찌 10불이나 보현과 같은 대인의 경계에서만 홀로 증득하는 것이겠습니까?

모든 사람들이 같이 여의보주와 해인삼매를 가지고 있어서 무한과거 이전부터 무한미래 이후까지 앉으나ㆍ서나ㆍ오나ㆍ가나ㆍ행주좌와와 어묵동정에 한순간도 떠나지 않고 있으니, 또한 경사스럽지 아니한가요?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요?

 

法性偈 禪解 - 雨寶益生滿虛空 - ③

一一海印이 一一이 流出衆生煩惱海하고 一一煩惱海가 各具眞如法性海하야 無二無雜일새

故로 其滿虛空益을 但八字打開하야 兩手分付而已로다

하나하나의 해인이 하나하나마다 중생의 번뇌 바다를 유출하고, 하나하나의 번뇌 바다가 각각 眞如法性 바다를 갖추어서 가지가 없고 섞임이 없기 때문에 허공에 가득한 이익을 다만 팔을 벌리고= 八字打開 손으로 주고 따름이다.

諸法無行經에   貪欲是涅槃 恚癡亦如是  如此三事中 有無量佛道

사람의 탐욕이 열반이요, 성내고 어리석음이 또한 그와 같다. 이러한 가지 가운데 한량없는 불도가 갖추어져 있다. 라고 하였습니다.

불도가 없다면 어찌 탐욕을 부릴 알겠으며 어리석을 알겠습니까? 능력과 미묘한 작용이 모두 우리들을 한순간도 떠나 있지 않는 불도의 능력이며, 불도의 작용입니다.

영명연수스님 보살계를 받는 ”이라는 책에서 貪欲卽是道 瞋恚亦復然  如是三法中 具一切佛法.

탐욕이 도다. 화내고 성내는 것도 또한 다시 그러하다.

이와 같은 가지 가운데 일체불법이 모두 갖추어져 있다. 라고 하였습니다.

참으로 통쾌하기 이를 없습니다. 탐진치 3독과 84000 번뇌를 언제 버린단 말입니까?

그것이 사람들의 살림살이인 것을요.

그대로 두고 삽시다. 번뇌가 많을수록 부자라 했습니다. 특히 화엄경의 안목으로는 84000 번뇌를 가지고 사는 우리들의 그대로 완전무결한 것이라고 봅니다. 어떤 것을 없애거나 더하여 완전한 삶을 구가하는 것이 아닙니다.

 

法性偈 禪解 - 衆生隨器得利益 - ①   22

衆生隨器得利益   하늘에서 아무리 많은 비가 쏟아지더라도 그릇이 작으면 빗물은 적게 담기고, 그릇이 크면 많이 담기듯이 우리들 인생이 본래로 부처님이나 보살들과 같은 지혜와 자비의 근본을 가지고 있어도 각자가 가진 안목의 그릇 따라 삶의 질과 양은 천양지차로 달라집니다.

그러므로 평소에 聖人들의 가르침을 열심히 공부하여 자신의 그릇을 크게 해야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지 못하면 자칫 안타까운 인생이 되고 맙니다. 즉 하늘에서는 환희의 보배 비가 폭우가 쏟아지듯이 쏟아지고 있는데, 만약 자신의 인생그릇이 기울어져 있거나 엎어져 있다면 삶이 어떻겠습니까?

 

法性偈 禪解 - 衆生隨器得利益 - ②

大富의 家中에 噐噐가 皆金이라 海印定中에 法法도 皆眞이로대

但有大小의 方圓과 染淨이 異耳니 其所得益은 不是他法이라

큰 부자의 집안에는 그릇마다 다 금이요, 海印定가운데는 법마다 다 진리로되 다만 크고 작음과 모나고 둥긂과 물들고 깨끗함이 다를 뿐이니, 그 얻은 바의 이익이 다른 법은 아니다.

부자의 집은 누구네 집인가요? 바로 우리들 모든 사람입니다. 사실을 믿고 이해하는 것이 우선 되어야합니다.

이와 같은 사실을 믿는 것은 불법의 창고 속에서 제일가는 재산이 되기 때문입니다. 만약 믿음이 없는 사람이라면 평생을 부처님의 밥을 먹으며 절에 살거나 불교와 가까운 인연을 맺고 살더라도, 마치 10년을 국을 떠다 나르더라도 국의 맛을 모르는 국자와 같은 인생이 되고 맙니다. 얼마나 애석하고 안타까운 일입니까?

 

法性偈 禪解 - 衆生隨器得利益 - ③

只爲大者를 言大하고 小者를 言小하며 方者를 言方하고 圓者를 言圓하며 染者를 言染하고 淨者를 言淨이요

非愽小以令大하며 刻方以爲圓하며 革染而說淨也니 會麽아

山虛에 風落石하고 樓靜에 月侵門이로다

다만 큰 것을 크다 하고, 작은 것을 작다하며, 모난 것을 모났다 하고, 둥근 것을 둥글다하며, 물든 것을 물들었다 하고, 깨끗한 것을 깨끗하다고 말할 뿐이요.

작은 것을 넓혀서 크게 하고, 모난 것을 깎아 둥글게 하며, 물든 것을 고쳐 깨끗하다고 함이 아닌 것이니 알겠는가?  “산이 텅 비었으니 바람이 돌에 부딪히고, 누각이 고요하니 달빛이 문에 들어오도다.”[넓을 박]

본래로 완전무결하여 손댈 없고 고칠 곳이 없습니다. 크면 큰대로ㆍ작으면 작은 대로, 모났으면 모난 대로ㆍ둥글면 둥근 대로, 더러우면 더러운 대로ㆍ깨끗하면 깨끗한 대로,본래 그대로가 원만하고 완전무결한 것입니다.

다만 어리석은 중생들은 사실을 모르고 불만스러워하고 불평할 뿐입니다.

 

法性偈 禪解 - 是故行者還本際 - ①   23

是故行者還本際 그러므로 行者가 本際로 돌아가니.  누가 行者인가요? 하루에 시간씩 좌선하고 기도하는 사람이 행자인가요? 절을 100 배씩 하는 사람이 행자인가요? 8 장경을 읽고 있는 사람이 행자인가요? 중이 되려고 절에 처음 들어온 사람이 행자인가요?

그리고 행자가 本際로 돌아간다고 하는데요. 시간적으로 본제를 1 1초라도 떠나본 사람이 있습니까? 공간적으로 0.1밀리라도 거리를 두어 사람이 있습니까? 돌아가기는 어디서 어디로 돌아간다는 말입니까?

이쯤 말했으니 이제 약간 짐작이 가는가요?  

 

法性偈 禪解 - 是故行者還本際 - ②

要識本際麽아 問禪인댄 禪是妄이요 求理ㄴ댄 理非親이니 直饒玄會得이라도 也是眼中塵이로다

本際를 알고자 하는가? “禪을 물으면 禪은 바로 妄이요, 이치를 구하면 이치는 멀어질 것이니, 설사 알았다 하더라도 또한 눈 속의 티끌인 것이다.”

行者가 本際로 돌아가니 처음도 끝도 모두가 본제이기에 본제를 알고자 한다는 말이 이미 잘못된 것입니다. 그래서

“禪을 물으면 禪은 바로 妄이요,  이치를 구하면 이치는 멀어진 것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마치 머리가 있는데 다시 머리를 찾는 격이 되고, 또한 머리위에 머리를 얹는 격이 됩니다. 머리위에 다시 머리를 얹으면 어떤 모습이 되겠습니까? 그리고 얹어지기나 하겠습니까?

 

法性偈 禪解 - 叵息妄想必不得 - ①   24

叵息妄想必不得 망상을 쉬지 않으려 해도 반드시 되지 않으리라.

본제에 돌아간 사람에게는 망상이란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서, 실재하는 것이 아닌 알면 즉시 망상은 사라지고 맙니다. 사실은 사라질 망상도 없는 것입니다. 망상이란 말만 존재하지 망상은 본래 없습니다. 이와 같은 이치를 알다보니 망상을 쉬지 않으려고 해도 쉬지 않을 없습니다.

구절을 이와 달리 해석하여, “가히 망상을 쉬지 않으면 반드시 얻지 못한다.”라고 하는데요. 그것은 화엄경과는 거리가 해석입니다. 있지도 않은 망상을 언제 쉬고 本際를 얻는다는 말인가요?

 

法性偈 禪解 - 叵息妄想必不得 - ② 

三世諸佛은 是守屍鬼요 歷代禪師는 是愽地凡夫라

直饒佛이 說하고 菩薩이 說하며 刹이 說하고 三世가 一時說이라도

不異煎沸熱椀鳴聲불이전비열완명성이니 於向上一着에 了沒交涉이라

盡大地가 是業識일새 茫茫하야 無本可據 何故오

但以假名字로 引導於衆生이로다

3세의 모든 부처님은 바로 시체를 지키는 귀신이요, 역대선사는 곧 못난= 愽地 범부이다. 설사 부처님이 설하고 보살이 설하며 국토가 설하고 3세가 일시에 설 한다하더라도 끓는 주전자의 김 새는 소리와 다르지 아니한 것이니 向上의 一着에는 아무 관계가 없다. 온 대지가 業識이 茫茫하여 의거할 근본이 없으니 무슨 까닭인가. “다만 거짓 名字로써 중생을 인도한 것뿐이다.”

[ 달일 , , 끓을 , 주발 , , 부를 , 빠질 , 건널 , 아득할 , 의거할 거]

禪家에서는 높은 안목과 높은 견해를 대단히 중요시 해서 向上一着子니 向上一路니 하는 말을 즐겨 씁니다.

3세의 모든 부처님은 바로 시체를  지키는 귀신이요, 역대선사는 못난= 범부이다.”라는 말은 고준한 견해를 높이 사는 데서 나온 말이며,

“부처님이 설하고 보살이 설하며  국토가 설하고 3세가 일시에 한다하더라도  끓는 주전자의 새는 소리와 다르지 아니한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선불교는 대승보살행을 세상에 펼치는 것보다 높은 견해와 안목을 우선시하는 까닭에  설잠스님도 법성게를 처음부터 禪解로 풀어나간 것입니다.

3세의 모든 부처님은 바로 시체를 지키는 귀신”이라니 반드시 이와 같은 말로 표현하지 않으면 표현할 길이 없는지 필자는 모를 일입니다. 또한 “설사 부처님이 설하고 보살이 설하며 국토가 설하고 3세가 일시에 한다하더라도 끓는 주전자의 새는 소리와 다르지 아니한 것” 이라니 더욱 모를 일입니다.

물론 부처님이나 보살들이나 조사스님이나 경전의 말씀에 목을 매달고 집착하는 사람들이라도 있었으면 하는 것이 필자의 비원입니다.

 

法性偈 禪解 - 無緣善巧捉如意 - ①    25 

無緣善巧捉如意 = 無緣의 훌륭한 솜씨= 善巧로 여의주를 잡아서 인연이 없는 중생에게까지도 자비를 베푸는 가장 뛰어나고 훌륭한 자비를 無緣자비 합니다. 그와 같이 무연선교란 어떤 일에도 장애가 없고 걸림이 없는 훌륭한 솜씨로 여의주를 마음대로 가져서 자신의 것으로 삼는다는 의미입니다.

여의주란 본래 모든 사람들이 같이 가지고 있는 구슬입니다. 특별히 가지려고 하지 않아도 이미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여의주가 없다면 어찌 이와 같이 글을 읽고 쓰고 있겠습니까?  그래서 無緣의 훌륭한 솜씨로 여의주를 잡아서 사용하고 있게 것입니다.

 

法性偈 禪解 - 無緣善巧捉如意 - ②

以眞如의 性緣起之無緣으로 捉出家中의 無相之如意일새 是名이 善巧라

其善巧는 本非伎倆의 所到니 會麽아

江上晩來堪畵處니 漁人皮得一蓑歸(사귀)로다

眞如의 성품연기인 無緣으로써 집안에 있는 형상 없는 여의주를 끄집어내는 것이기에 이 이름이 ‘훌륭한 솜씨= 善巧’이다. 그 ‘훌륭한 솜씨’는 본래 伎倆의 미칠 바가 아니니 알겠는가?

“강물위에 저녁이 되니 마치 그림 같은데 뱃사공은 한 벌 도롱이만 입은 채 돌아오도다.[ 도롱이 , 돌아갈 귀]

본래 집안에 여의주가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훌륭한 솜씨= 善巧’입니다. 그래서 진여의 성품연기가 되는 것입니다. 저절로 조작 없이 되는 것이지요. 어떤 재주나 재능을 사용하여 여의주를 얻는 것이 아닙니다. 재주나 재능을 사용하여 얻는 것이 어찌 뜻대로 되겠습니까?

 

法性偈 禪解 - 歸家隨分得資糧 - ①   26

歸家隨分得資糧 집에 돌아가서 분수 따라 양식을 얻는다. 만약 집에만 돌아간다면 달리 양식을 구할 필요가 없습니다. 집에는 본래로 6바라밀과 10바라밀과 4섭법과 仁義禮智등이 갖춰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禪病이 사람이라면 반드시 이렇게 말할 겁니다. “배가 고프면 산나물이나 캐어먹고, 목마르면 흐르는 물이나

마시고,  베고 누워서 늘어지게 잠이나 한잠자면 그것으로 족하다. 그것이 분수 따라서 양식을 얻는 소식이다.”라고요.

 

法性偈 禪解 - 歸家隨分得資糧 - ②

歸家活計는 本無奇特이니 但以本地風光으로 得本來閑田地면 足伊家活計라

其所謂資粮은 三十道品이 即是이니와

집에 돌아가서 살아갈 방법이란 본래 별다른 것이 없으니, 다만 本地風光으로써 본래의 노는 땅을 얻었다면 그 집의 살아갈 방법이란 족한 것이다.  이른바 양식이란 것은 三十道品이 바로 이것이다.

본지풍광이란 本來面目이라고도 하는데요. 자기 心性의 본모습을 형용하는 禪語입니다. 모든 사람들의 심성에 본래로 한량없는 공덕과 자비와 지혜가 내재되어 있어서 별다른 양식을 구하지 않더라도 살아갈 방법은 훌륭합니다.

6바라밀과 10바라밀과 4무량심과 4섭법과 인의예지등도 본래로 내재되어 있습니다.

三十道品이란 三十七道品, 또는 三十七助道品을 간략하게 일컫는 말입니다. 상좌부불교에서 열반의 理想境에 나아가기 위하여 닦는 道行의 종류입니다. 四念處ㆍ四正勤ㆍ五根ㆍ五力ㆍ七覺分ㆍ八正道등을 말합니다.

 

法性偈 禪解 - 歸家隨分得資糧 - ③

飢飯渴漿(갈장)하고 寒附火하며 熱乘凉엔 有什麽消息고

雖然이나 種瓜得瓜요 種果得果니 一乘淸淨法界에 下得種子ㄴ댄 豈無玄談分이리오 速道하라

長因送客處하야 憶得別家時로다

배가 고프면 밥을 먹고, 목이 마르면 漿을 마시며,추우면 불 쬐고 더우면 바람을 쏘이니 무슨 소식이 있는가. 비록 그러나 오이를 심어 오이를 얻고, 과일을 심어 과일을 얻는 것이니, 一乘의 淸淨法界에 종자를 내린 이상 어찌 玄談= 현묘한 이야기 거리가 없겠는가. 얼른 말해보라. “언제나 나그네를 전송하던 곳으로 인하여 집 떠나 있던 때를 추억하도다.”

[ 주릴 , 목마를 , 漿 미음 , 오이 ]

이것은 선객들이 걸핏하면 하는 말입니다. 중생들의 고통을 모르는 禪病이 사람들의 전유물입니다.

玄談 만을 즐기다 보면 禪詩나 읊조리고 禪問答이나 주고받으면서 人我相을 다투는 일로 세월을 보내고 맙니다.

 

法性偈 禪解 - 以陁羅尼無盡寶 - ①   27

以陁羅尼無盡寶.  羅尼란 摠持ㆍ能持ㆍ能遮()라고 번역합니다. 무량무변한 뜻을 지니고 있으며 모든 악한 법을 버리고 한량없이 좋은 법을 갖는 것입니다.그래서 다라니는 다함이 없는 보배가 됩니다.

다함이 없는 보배란 여의주며 心珠입니다. 부처가 되고 보살이 되어 무한한 지혜와 자비로써 중생들을 제도하는 일도 다함이 없는 보배를 풀어서 하는 것입니다.

 

法性偈 禪解 - 以陁羅尼無盡寶 - ②

這个寶藏은 不在佛界하고 不在生界하며 不在淨界하고 不在染界하야 一一圓明하며 一一交徹하니

要識捴持法界의 無盡妙寶麽아

你看十二時中하대 遇聲遇色하고 遇逆遇順하야 方知不從他得하리라

이 보배의 창고는 부처님세계에 있는 것도 아니고, 중생세계에 있는 것도 아니며, 청정한 세계에 있는 것도 아니고, 오염된 세계에 있는 것도 아니어서, 하나하나가 다 圓明하며, 하나하나가 다 서로서로 사무쳐있다.

捴持法界의 다함없는 미묘한 보배를 알고자 하는가? “그대가 24시간 중에 소리를 만나고, 사물을 만나며, 거슬림을 만나고, 순함을 만나는 데서 볼 뿐이요, 바야흐로 다른데서 얻는 것이 아님을 알리라.”

진정한 보배창고라면 부처님세계에도 있고, 중생세계에도 있고, 청정한 세계에도 있고, 오염된 세계에도 있어야합니다. 보배 창고인 총지법계의 다함없는 미묘한 보배란 어디 있으며 무엇인가요? 매일매일 보고ㆍ듣고ㆍ냄새를 맡고ㆍ말을 하고, 춥고ㆍ더운 것을 알고, 웃을 일이 있으면 웃고, 일이 있으면 우는 바로 사실입니다.

 

法性偈 禪解 - 莊嚴法界實寶殿 - ①   28

莊嚴法界實寶殿 법계의 실다운 보배궁전을 장엄한다. 본래로 법계의 실다운 보배궁전인데 달리 장엄할 일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다라니의 다함이 없는 보배로써 실다운 보배궁전을 장엄하는 것은 화엄의 안목으로 세계는 본래로 重重ㆍ중중ㆍ중중하고, 無盡ㆍ무진ㆍ무진하기 때문에 사실을 더욱 분명하게 드러내고자 함입니다.

 

法性偈 禪解 - 莊嚴法界實寶殿 - ②

因陁羅網이 影像互叅하야 重重無盡하니 不因莊嚴하며 不因修證하대 本來具足하며

本來圓成故로 云하대 實이라. 又云하대

這介實字는 不得動着이니 動着하면 則禍生이라하니라.

인드라그물은 그림자와 형상이 서로 참여하여 거듭거듭 다함이 없으니, 장엄하는 것을 因하지 않고 닦아 증득함을 인하지 않되 본래구족하며, 본래 원만히 이룬 까닭에 “실답다.”라 하고, 또한 “이 實字는 건드릴 수 없는 것이니 건드리면 禍가 생긴다.”라고 하는 것이다.

인드라망= 羅網은 또는 帝網이라고도 하는데요. 제석천의 궁전을 장엄하게 덮고 있는 보배그물입니다.

낱낱의 그물코마다 보배구슬을 달았고, 보배구슬의 개마다 각각 다른 낱낱의 보배구슬의 影像을 나타내고, 보배구슬의 안에 나타나는 일체보배구슬의 영상이 나타나서 重重無盡하게 되었다고 하는데요.

사람을 위시하여 우리가 사는 세계와 드넓은 우주까지 모두가 그와 같은 형식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표현한 비유입니다. 그것만으로도 훌륭한데 달리 장엄하고 닦아서 증득할 일이 있겠습니까?

 

法性偈 禪解 - 窮坐實際中道床 - ①    29

窮坐實際中道床= 궁극에는 實際의 中道床에 앉았으니

앞에 “行者가 本際로 돌아간다.”는 말이 있었습니다.(是故行者還本際) 실제는 무엇이며, 본제는 무엇이며, 중도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무시이래로 번도 본제와ㆍ실제와ㆍ중도를 떠나있어 적이 없습니다. 처음부터 자리에 앉았고, 중간에도 자리에 앉았고, 궁극에도 자리에 앉았습니다.

자리에 앉은 이가 누구겠습니까? 다만 본래 사람일 뿐입니다.

본래 사람을 무어라고 이름을 지어 부를 것입니까?

참고로 사전적인 해석을 소개하면 本際’란 근본구경의 끝이며, 진여나 열반의 다른 이름이다.

‘實際’는 진여법성을 말한다. 이는 온갖 법의 끝이 되는 곳이므로 실제라 하며, 또는 진여의 實理를 증득하여 궁극에 이르므로 이렇게 이름 한다.

‘中道’는 복잡한 해석이 있지만 천태종은 實相을 뜻하고, 화엄종은 法界를 중도라 한다.

 

法性偈 禪解 - 窮坐實際中道床 - ②

深入法性海하야 了無究竟處ㄹ새 故로 云하대 窮이라하고

把斷要津파단요진하야 不通凡聖일새 故로 云하대 坐라하고

無眞無妄하야 不屬有爲ㄹ새 故로 云하대 實이라하고

一切凡聖이 容身無地ㄹ새 故로 云하대 際라하니라

깊숙이 법성의 바다에 들어가 더 이상 다다를 데가 없기 때문에 ‘’이라하고, 요긴한 나루터를 차단하여 범부와 성인에 통하지 않게 하였기 때문에 “앉았다.”라 하고, 眞도 없고 妄도 없어서 有爲에 속하지 않기 때문에 ‘’이라 하고,

일체의 범부와 성인이 몸담을 데가 없기 때문에 ‘’라고 한 것이다.

[ 잡을 , 나루 , 붙을 ,]

窮ㆍ坐ㆍ實ㆍ際를 해석하였습니다.

禪의 안목으로 보면 어떤 글자도 모두가 원융무애하고 융통자재해서 풀리지 않는 뜻이 없습니다.

 

法性偈 禪解 - 窮坐實際中道床 - ③

喚作一物하야  不得動着之謂中이요  三乘五性이 常常履踐之謂道요 究竟平常하야  不用安排之謂床이라

그리고 어떤 것= 一物이라고 불러서 건드릴 수 없음을 “中”이라하고, 三乘과 五性이 끊임없이 밟아 감을 “道”라하고, 궁극에 平常하여 安排를 쓰지 않음을 “床”이라고 한 것이다.

中ㆍ道ㆍ床을 해석하였습니다. 三乘이란 성문승ㆍ연각승ㆍ보살승에 대한 가지 敎法을 말합니다. 乘은 물건을 실어 옮기는 것을 목표로 함으로 부처님의 교법에 중생을 실어 열반의 언덕에 이르게 하는 비유하였습니다.

성문승은 四諦의 법문이니, 부처님이 말씀하시는 소리를 듣고 이를 관하여 해탈을 얻습니다.

연각승은 12인연의 법문이니, 스승에게 가지 않고 스스로 잎이 피고 꽃이지는 따위의 이치를 관하여 깨닫는 것입니다.

보살승은 6바라밀의 법문이니, 보살은 법문을 실천하여 스스로 해탈하고 남을 해탈케 하여 부처를 이루는 가르침입니다.

5성은 五性各別로서 유식종에서 중생의 성품에는 선천적으로 菩薩定性ㆍ緣覺定性ㆍ聲聞定性ㆍ三乘不定性ㆍ無性有情 5종구별이 있다는 것을 들었습니다.

 

法性偈 禪解 - 窮坐實際中道床 - ④

雖然이나 任麽華藏世界는 離染淸淨이어든 豈有如此啇量이리오

若有如此啇量인댄 爭到今日하며 若無啇量인댄 十普法界가 向什麽處하야 出生고

비록 그러하나 이러한 화장세계는 물듦을 여의어서 청정하거늘 어찌 이와 같은 헤아림이 있으리오. 만약 이와 같은 헤아림이 있을진댄 어찌 금일에 이르렀겠으며, 만약 헤아림이 없을진댄 十普法界는 어떤 곳을 향하여 출생하는가.

화엄경에서는 사람이 사는 가장 이상적인 세계를 화장장엄세계라 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정직하고 선량하여 6바라밀을 닦고 4섭법과 4무량심을 실천하고 인의예지를 생활화하기 때문에 어디를 가나 아름다운 꽃으로 장엄한 것과 같은 세상이라는 뜻입니다.

마음은 비어 아무런 계산이나 사량 분별이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과 같은 완전무결한 삶을 누리는 것입니다.

 

法性偈 禪解 - 窮坐實際中道床 - ⑤

左手로 拍一下하고 云하대 佛事門中에 不捨一法이라하고

右手로 拍一下하고 云하대 不見一法이 即如來라하노라

還會麽아  大千沙界는 海中漚요 一切聖賢은 如電拂이로다

왼손으로 한 번 치고는 이르되  “佛事 문중에서는 한 법도 버리지 않는다.” 라 하고,  오른손으로 한 번 치고는 이르되 “한 법도 보지 않음이 곧 여래다.” 라 하노니, 도대체 알겠는가. “3천대천세계는 바다 가운데 물거품이요, 일체의 성현들은 번개가 번쩍함과 같도다.”

緇門(치문), “實際理地에는 不受一塵이나 佛事門中에는 不捨一法이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진리의 땅에는 먼지 하나 받아들이지 않지만 불사를 하는 입장에는 어떤 가지 법도 버리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치는 현상을 따라서 무한한 변화를 일으키고, 현상은 이치를 얻어서 융통자재하게 됩니다. 무엇이든 조화가 중요합니다. 편협과 치우침은 아름다운 삶이 되지 못합니다.

증도가에, 不見一法即如來니 方得名爲觀自在라”고 하였습니다.

 “한 법도 보지 않음이 여래이니, 비로소 이름을 관자재보살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설잠스님은 여기까지 이야기하다가 문득 다시 증도가를 인용하여

3천대천세계는 바다 가운데 물거품이요, 일체의 성현들은 번개가 번쩍함과 같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중생세계니 기세계니 성인들의 세계니 하는 것이 모두 공허한 언어에 불과한 것이요, 무엇도 실체는 없다.’는 뜻이겠지요.

 

法性偈 禪解 - 舊來不動名爲佛 - ①   30

舊來不動名爲佛 예로부터 움직이지 아니한 이름을 부처라 한다.

궁극적 입장에서 보면 본래부터 누구나 實際의 中道床에 앉은 것이 됩니다. 그렇다면 누군들 본래부터 일체의 수행도 깨달음도 필요로 하지 않은 부처가 아니겠습니까?

시간적으로 1 1초도 떠나있지 아니했으며, 공간적으로 1밀리도 떠나있지 아니한 사실입니다.

화엄경 여래출현품에서, “그때에 여래께서 장애가 없는 청정한 지혜의 눈으로 법계의 일체중생들을 두루 살피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신기하고 신기하여라. 모든 중생들이 여래의 지혜를 갖추고 있건만 어리석고 미혹하여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가. 내가 마땅히 성스러운 도로써 그들로 하여금 망상과 집착을 영원히 떠나고 자기의 가운데서 여래의 광대한 지혜가 부처님으로 더불어 다름이 없음을 보게 하리라.”라고 하였습니다.

爾時如來가 以無障礙淸淨智眼으로 普觀法界一切衆生하고 而作是言하사대

奇哉奇哉라 此諸衆生이 云何具有如來智慧언마는 愚癡迷惑하야 不知不見고

我當敎以聖道하야 令其永離妄想執着하고 自於身中에 得見如來廣大智慧가 與佛無異케호리라하시니라.

존재의 실상과 사람의 실상을 분명하게 깨달은 성인들은 모두 이와 같이 말씀하였습니다. 어찌 성인이 가지 말을 하겠습니까?

 

法性偈 禪解 - 舊來不動名爲佛 - ②

按台敎는 以六即으로 判圓敎하대 佛所謂一切衆生이 皆有佛性은

有佛커나 無佛커나 性相이 常住하야 從淺으로 至深히 位位가 不二를 名佛이라하니라

상고하니 천태교는 六即으로써 圓敎를 判釋하되 부처님이 이른바 “일체중생이 다 불성이 있다.” 함은 부처님이 있든, 없든 성품과 형상이 상주하여 낮음으로부터 깊음에 이르기까지 지위와 지위가 둘이 아님을 “부처님”이라 이름 하였다.

六即이란 천태종에서 圓敎의 수행상의 階位를 6단으로 나눈 입니다.

6단은 사람의 수행에서 迷悟의 차별이 있음을 표시한 것일 뿐이고, 수행의 대상인 實相의 이치에서는 迷ㆍ悟가 둘이 아닌 것이므로 6즉이라 것입니다.

1. 理卽이란 불성진여를 갖추고서도 알지 못하여 아무런 수행도 하지 않고 생사에 윤회하는 지위입니다.

2. 名字卽 일체가 모두 부처인 것을 敎示하였지만, 몸이 부처라는 것을 이름으로만 아는 지위입니다.  

3. 觀行卽 처음 觀智로 10乘觀法을 닦으면서 兼行六度와 正行六度등의 수행으로써 助成하여 圓妙한 이치와 상응하는 지위입니다. 五品位에 해당합니다.

4. 相似卽 수행의 공을 쌓아서 眞智와 비슷한 지혜를 내는 지위입니다. 원교 10신의 지위에 해당합니다.

5. 分眞卽 또는 分證卽이라고도 하는데요. 1분씩 무명을 파하고 1분씩 本有의 불성을 證顯하는 지위입니다. 원교의 10주ㆍ10행ㆍ10회향ㆍ10지ㆍ등각의 41위에 해당합니다.

6. 究竟卽 本有의 불성 전부가 나타나 끊을 惑도 없고 증득할 지혜도 없는 구경원만한 지위입니다. 妙覺位에 해당하는데요. 佛果입니다.

“예로부터 움직이지 아니한 이름을 부처” 하거늘 이와 같은 설명을 덧붙이는가요.

 

法性偈 禪解 - 舊來不動名爲佛 - ③

本圖緫髓論은 比如有人이 在床에 入睡하야 夢中에 回行三十餘馹(일)이라가 覺後에 方知不動在床하야

喩從本法性으로 經三十句하야 還至法性히 只一不動일새 故로 云하대 舊來不動인 佛이라하니라

本圖의 緫髓論은, 마치 어떤 사람이 침상에서 잠이 들어 꿈속에 30여 역을 돌아다니다가 깨고 나서 비로소 움직이지 아니한 채 침상에 있었음을 아는 것과 같이 처음의 法性으로부터 30句를 거쳐 다시 법성에 이르기까지 단지 하나로서 움직이지 아니하였음을 비유하기 때문에“예로부터 움직이지 아니한 채 그 이름을 부처라 한다.”라고 한 것이다.

설잠스님이 本圖의 髓論이라고 것은 “法界圖記叢髓錄”을 일컫는 말입니다. 편자는 미상이고 고려시대에 편찬 되었습니다. 줄여서 “총수록”이라고 합니다.

의상스님의 “화엄일승법계도”에 대한 신라시대의 註記들을 모아 정리한 책입니다. 내용의 일부를 이끌어 왔는데  “예로부터 움직이지 아니한 이름을 부처라 한다.”라고 했는가를 설명하였습니다.

 

法性偈 禪解 - 舊來不動名爲佛 - ④

本覺이 始覺이고, 始覺이 本覺에서 벗어나지 아니하였습니다.

진심과 망심은 서로 사귀어 사무쳐있습니다.

그래서 범부의 마음에서 부처의 마음을 봅니다.  범부의 마음을 떠나서 어디서 부처의 마음을 찾겠습니까?

사람ㆍ사람들이 본래 갖춘 근본지혜에서 부처님의 지혜를 구합니다.

 미혹하고 어리석은 보통 사람들을 떠나서 달리 어디서 부처님을 찾을 것인가요?

그래서 법계도는 구불구불 여러 바퀴를 돌고 돌아도 끝내는 본래의 자리로 돌아오게 그려졌습니다. 법계도가 이렇게 그려진 이치만 제대로 알면 화엄경의 근본을 아는 것이며, 법계도를 아는 것이며, 법성게를 아는 것이 됩니다.

마음과 부처와 중생, 셋은 차별이 없다. 하지 않던가요?  그래서 “어떤 사람이 침상에서 잠이 들어 꿈속에  30 역을 돌아다니다가 깨고 나서 비로소  움직이지 어나한채 침상에 있었음을 아는 것” 입니다.

우리 모두가 본래부터 차별이 없는 참사람이지 어찌 다른 사람이 있겠습니까? 자신을 두고 다른 무엇을 찾는 일은 자신의 머리를 두고 다시 머리를 찾는 일입니다.

 

法性偈 禪解 - 舊來不動名爲佛 - ⑤

然이 說圓說頓하야 以名으로 現佛은 觸犯이 當頭니 不得名爲舊來不動佛이라

莫有離敎網葛藤하야 碎祖師玄關者麽(쇄)아 請道將來하라 如無인댄 自道去也하라

(良久云)

說盡山雲海月情이어늘 依前不會空惆悵(추창)이로다

 法界圖終하다

그러나 圓이니 頓이니 설하여 이름으로써 부처님을 나타냄은 잘못을 범하였음이 뚜렷하다. “예로부터 움직이지 아니한 채 그 이름을 부처라 한다.”라고 한 것만 못하다. 누구든 敎網과 葛藤을 여의고 조사의 현묘하고 깊은 관문을 부술 사람은 없는가? 청컨대 한마디 일러 보라. 만약 없다면 내가 스스로 말해 버리겠다.   (잠자코 있다가 이르되,)

“산과 구름과 바다와 달의 情趣를 남김없이 설하였거늘 여전히 알아듣지 못하고 부질없이 시무룩하게 있구나.”라고 하겠다.

 法界圖 서문과 주해를 마치다.[ 부술 , 슬퍼할 , 실심할 , 슬퍼할 , 원망할 창]

 

 法性偈 禪解 - 舊來不動名爲佛 -

부처님을 설하고 진리를 설하고 참사람을 설하는데, 원교로써 나타내고 돈교로써 나타내었지만 비슷할지는 몰라도 또한 가짜입니다.

 禪門에는 잠자코 있는 “良久”라는 말이 자주 등장합니다. 그렇게 묵묵히 있음으로써 모든 뜻과 깊은 의미를 표현한 것입니다. 동작을 하거나 말을 하는 것은 2구나 3구에 떨어지는 것이 됩니다.

유마거사가 不二法門을 침묵으로 드러냈으며, 설잠스님도 마지막에는 침묵으로 法界圖의 깊은 뜻을 표현하였는데, 아는 사람이 없는 같아서 “산과 구름과 바다와 달의 情趣를 남김없이 설하였거늘 여전히 알아듣지 못하고 부질없이 시무룩하게 있구나.”라고 섭섭한 감정을 나타내었습니다.

부질없이 시무룩하게 있든 기쁘게 웃고 있든 언제나 사람이 사람입니다. 조금도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2018 10 1

신라 화엄종찰 금정산 범어사

 

如天 無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