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성게

법성게(法性偈)와 법계도(해인도)무비스님 해설 4

Skunky 2021. 4. 12. 17:31

法性偈 禪解 - 不守自性隨緣成 - ①6

不守自性隨緣成

사람을 위시하여 일체존재는 현재 상태로 고정되어 있으면서 변화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자세히 살펴보면 시시각각으로 천변만화하면서 생로병사하고 생로병사하고 생로병사하면서 무한히 이어집니다. 춘하추동이 그렇고 생주이멸이 그렇고 성주괴공이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변화든 모든 변화를 당연한 것으로 알아야 합니다. 지극히 미묘한 眞性!  참마음의 변화무쌍한 작용이야 무엇인들 되지 않겠습니까? 인연만 되면 부처도 되고 보살도 되고, 지옥ㆍ아귀ㆍ축생 무엇이든 됩니다.

一切法은 本來無性이요 一切性은 本來無住니

無住면 則無體요 無體면 則隨緣不礙라

隨緣不礙ㄹ새 故로 不守自性하야 而成十方과 三世矣니라

일체의 법은 본래자성이 없음이요  일체의 자성은 본래 안주함이 없으니 안주함이 없으면 실체가 없고 실체가 없으면 인연을 따라 걸림이 없기 때문에 자성을 지키지 아니하여 시방과 3세를 이루는 것이다.

사람의 몸이 중생의 몸도 되고,  국토의 몸도 되고, 업보의 몸도 되고, 성문ㆍ연각ㆍ보살ㆍ부처의 몸도 되고, 지혜의 몸도 되고, 법의 몸도 되고, 허공의 몸도 되고, 시방과 3 무엇하나 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法性偈 禪解 - 不守自性隨緣成 - ②

自性者는 諸法無相한 本來淸淨之體也니라

會麽아 去年梅에 今年柳여 顔色과 馨香이 捴依舊(총)로다

자성이란 모든 법이 형상이 없어 본래 청정한 體이니라. 아는가?

“지난해의 매화에 금년의 버들이니 안색과 소리가 모두 예와 같도다.”

무엇이든 되는 모든 법의 자성은 형상이 없지만 본래로 청정한 자체입니다. 없으면서 있고 있으면서 없는 도리를 알겠습니까? 1000 태어나고 10000 태어나 성씨도 다르고, 얼굴도 다르면서 참마음인 물건의 작용은 영원히 변함없습니다.

自性= 諸法 자체의 不變不改의 存在性을 말한다. 다른 것과 混同하지 않고 改變함이 없는 獨自의 體性, 本性을 말한다. 여기에 徧計自性 · 依他自性 · 圓成自性의 三性 말하기도 하고 四卷楞伽經卷一에는 集成自性 · 性自性 · 相性自性 · 大種性自性 · 因性自性 · 緣性自性 · 成性自性의 7종自性 說하고 있다. 中論 등에서는 일체의 현상계는 인연을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無自性이라고 하여 自性을 부정하기도 한다. 

七種自性. 여래에 7종의 性自性이 있으니, 性은 不變遷의 뜻이니, 不變遷의 性이  如來의 自性이므로 性自性이라 한다.

(1) 集性自性. 집은 聚의 뜻이니 性自性은 萬善聚集의 因이 되므로 이렇게 말함.

(2) 性自性. 앞의 第一義心에 의해 集聚된 바의 萬善의 因의 근원이 되는 自性이 안에 존재함 性自性이라 한다.

(3) 相性自性. 보아서 분별할 있는 것이 相이다. 앞의 第一義心에 의해 集聚된 萬善의 因으로 말미암아 自性이 밖으로 나타나므로 上性自性이라 한다.

(4) 大種性自性. 大種은 · · · 風의 四大의 종자이다. 四大가 각각 自性이 있음을 표준하여 말한 것이며, 大種은 본래 凡聖에 속하지만 여기서는 聖報에 준해서 말한 것이다. 大種의 性自性이 法性五陰의 果이므로 이것을 大種性者性이라 한다.

(5) 因性自性. 因은 能生의 뜻이니 무엇을 생겨나게 함을 말한다. 앞의 4 大種의 果는 반드시 因을 내는 因이 되는데, 그것이 제一義因인 心이므로 因性自性이라 .

(6) 緣性自性. 緣은 緣助의 뜻이니 第一義의 自性의 果德을 證得하는 것은 因心으로 말미암는데, 모름지 緣助를 빌려서 顯成하므로 이것을 緣性自性이라 .

(7) 成性自性. 成은 成就의 뜻이다. 因緣和合하여 果를 이루는 것으로, 如來第一義의 果德을 成就하기  때문에 成性自性이라 한다.

 

因明(論里學)에서는 論證할 바의 名題(宗이라 ) 主語를 自性이라 한다.

數論哲學에서는 神我와 결합하는 것에 의해서 일체의 현상을 展開하는 물질적 원리, 물질적 根本因을  自性이라고 한다.

 

法性偈 禪解 - 一中一切多中一 - ①   7

一中一切多中一   사람이든 사물이든 일체 존재를 화엄경의 안목으로 보면 모두 하나 가운데 일체가 있고, 많은 가운데 하나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하나와 많은 것이 서로서로 수용하면서 각각 독립되어 혼동하지 않는 것이 마치 방에 1000개의 등불을 밝힌 것과 같습니다.

1000개의 등불을 하나의 방에 밝혔어도 서로서로 방해하지 않고 자신의 빛을 모두 발하면서 다른 등불과 조화를 이루고 융화하여 더욱 아름답고 밝게 비춥니다.

우리들도 70 인구가 지구촌이라는 방에 같이 살면서 더욱 융화하고 즐겁고 환희로워야 것입니다. 이것이 화엄경의 안목입니다.

 

法性偈 禪解 - 一中一切多中一 - ②

所以는 不守自性하야 隨緣而成故니  

一法이 無自性故로 具一切하야 而成一하고

一切法은 無自性故로 以一法으로 而成一切라  

是故로 一中에 一切하야 多가 不礙於一하고 一切中에 一하야 一이 不礙於多니라

그 까닭은 자성을 지키지 아니하여 인연을 따라 이루기 때문이니

한 법이 자성이 없기 때문에 일체를 갖추어 하나를 이루는 것이요,

일체의 법이 자성이 없기 때문에 하나의 법으로써 일체를 이루는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하나가운데 일체이어서 많은 것이 하나에 걸리지 않고, 일체가운데 하나이어서 하나가 많음에 걸리지 않는다.

만약 사람이나 사물들의 자성이 고정불변하여 그대로 있는 것이라면 어찌 눈앞에 펼쳐진 것과 같은, 천변만화가 성립되겠습니까?

인연을 따라 무한히 변화하고 발전하므로 어린아이는 어른이 되고 범부는 성인이 되는 것입니다. 또한 봄날의 어린 싹은 가을에 무수한 결실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이런 이치를 모르고 눈앞에 보이는 사실만을 가지고 섣불리 사람들을 판단해버린다면 얼마나 실수인가요? 살피고 살필 일입니다.

 

法性偈 禪解 - 一中一切多中一 - ③

伊麽인댄 則一毫端裏에 三世諸佛이 處處度生하고

無邊刹海에 一切衆生이 箇箇涅槃이어니와  毫端과 刹海는 空花中의 境界요

諸佛과 衆生도 夢幻中의 物色이라

이러한즉, 한 터럭 끝에서 3세의 모든 부처님이 곳곳에서 중생을 제도하며,

가없는 세계바다에서 일체중생이 낱낱이 열반하거니와, 터럭 끝이든 세계바다든 허공 꽃 가운데의 경계요,

모든 부처님이든 중생이든 꿈과 환영가운데의 物色이다.

하나 가운데 일체가 있으므로 아주 작은 미세먼지 속에서도 과거ㆍ미래ㆍ현재의 모든 부처님이 곳곳에서 한량없는 중생들을 제도합니다. 또한 10 광년 멀고 세계에 있는 일체중생들은 낱낱이 열반에 듭니다.

작은 미세먼지든 드넓은 우주든 부처든 중생이든 모두가 夢幻이며 空華입니다. 몽환과 공화를 무엇 때문에 수고로이 붙잡으려 것입니까?

 

 法性偈 禪解 - 一中一切多中一 - ④

譬如虛空이 雖遍一切하대 而亦不離於一塵이니 要識虛空建立底消息麽아 

倚簷山色은 連雲翠요 出檻花枝는 帶露香이로다

비유하자면 허공이 비록 일체에 두루 하지만 또한 먼지하나를 떠나지 않음과 같으니라.

허공이 건립하는 바의 소식을 알고자 하는가? “처마에 기대인 산색은 구름에 연이어 푸르고, 난간을 벗어난 꽃가지는 이슬과 향기를 띠었더라.”

[ 의지할 , 처마 , 물총새 , 푸를 , 우리 , 난간 , 가지 , , 이슬 ]

“한 터럭 끝에서 3세의 모든 부처님이 곳곳에서 중생을 제도하며 가없는 세계바다에서 일체중생이 낱낱이 열반하는 도리” 비유하여 밝히기를 허공은 모든 것에 두루 하지만 하나의 먼지를 떠나지 않음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우주법계가 아무리 드넓다 하더라도 작은 미세먼지에 卽해 있어서 시간적으로 한순간도 떠나있는 것이 아니며, 공적으로 1밀리도 간격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설잠스님은 禪味가 풍기는 禪詩로 着語 하였습니다.

“처마에 기대인 산색은 구름에 연이어 푸르고, 난간을 벗어난 꽃가지는 이슬과 향기를 띠었더라.

 

 法性偈 禪解 - 一卽一切多卽一 - ①  8

一即一切多卽一 하나 가운데 일체가 있으며, 많은 가운데 하나인 이치가 완연하다면 그것은 저절로 하나가 일체며, 많은 것이 하나가 됩니다.

깨어있는 눈으로 우리가 본래로 “하나 가운데 일체며 많은 가운데 하나”라면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융화하여 살아야합니다.

사람의 생각과 행동이 70억이 생각하고 행동하듯이 하고, 70억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설사 서로 다르더라도 사람이 하듯이 해야 합니다. 그것이 본래로 완벽한 조화의 세계인 화장장엄세계입니다.

 

法性偈 禪解 - 一卽一切多卽一 - ②

所以는 一中에 一切며 多中에 一故니

以有一法故로 即有一切하고 以有一切故로 即有一法하며

以有衆生故로 即有諸佛하고 以有諸佛故로 即有衆生이라

그 까닭은 하나 가운데의 일체며 많은 가운데의 하나이기 때문이니, 한 법이 있기 때문에 곧 일체가 있고 일체가 있기 때문에 한 법이 있는 것이며, 중생이 있기 때문에 곧 모든 부처님이 있고 모든 부처님이 있기 때문에 곧 중생이 있는 것이다.

하나 가운데의 일체며 많은 가운데의 하나일 뿐만 아니라 마음과 부처와 중생이 각각 아무리 다르고 많더라도 근본적으로 차별이 없습니다.

부처님이 있어서 중생이 있고 중생이 있어서 부처님이 있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서로서로 걸림이 없고 원융한 이치가 바로 화엄에서 보는 이치입니다

 

法性偈 禪解 - 一卽一切多卽一 - ③

虛空이 無礙하야 生과 佛이 無二요

緣生이 無住하야 因果가 同時ㄹ새

無量圓因이 不出於刹那하고 無邊果海가 不離於當念이니

要識虛空動作底消息麽아 竹影掃階塵不動이요 月穿潭底水無痕이로다

허공이 걸림이 없어 중생과 부처가 두 가지가 아니고, 인연으로 생기는 것이 머무름이 없어서 원인과 결과가 동시이기에 한량없는 원만한 원인이 찰나를 벗어나지 않고, 가없는 불과의 바다가 현재의 생각을 여의지 않는 것이다.

허공이 동작하는 바의 소식을 알고자 하는가? “대나무 그림자 섬돌을 쓸되 먼지가 일지 않고, 달빛이 연못바닥을 뚫되 물에는 흔적이 없도다.”

[ , 섬돌 , 穿 뚫을 , 깊을 , , 흉터 , 흔적 ]

여기에 이어지는 글이 있어서 뜻을 더욱 분명하게 하고 있습니다.

水流任急境常靜하고  花落雖頻意自閑이라. 물이 급하게 흘러도 주변 경계는 항상 고요하고. 꽃잎이 어지럽게 떨어져도 마음은 스스로 한가하네.라고 하였습니다. [ 맡길 , 비록 , 자주 , 한가할 ]

지극히 미묘한 성품의 자리에서 중생이면 무엇 하고, 부처면 무엇 하겠습니까? 모두가 말에 불과할 뿐입니다.

선시란 아름다우면서도 여운이 깊고 오래갑니다. 부디 연이어서 읽고 읽어가며 음미하기를 바랍니다.

竹影掃階塵不動

月穿潭底水無痕

水流任急境常靜

花落雖頻意自閑

굳이 뜻을 필요가 있겠습니까? 반만 알고 반은 남겨뒀다가 다음에 알면 됩니다.

 

法性偈 禪解 - 一微塵中含十方 - ①   9

一微塵中含十方   깨어있는 화엄의 안목으로 , 공간적인 것은 하나의 작은 먼지 속에 드넓은 시방세계가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신기합니다. 앞의 “하나 가운데 일체며 많은 가운데 하나로다. 하나가 일체며 많은 것이 하나이다.”라는 구절에서 이미 일부의 뜻을 밝혔지만,

세상의 좁은 안목으로 많은 것과 적은 , 것과 작은 , 높은 것과 낮은 것의 차별과 갈등과 반목이 언제나 심하여 사람들이 괴로움을 겪는데, 경구 하나의 뜻을 새겨서 삶에 적용한다면 훌륭한 처방전이 것입니다.

하나의 먼지 가운데 시방세계를 포함하고 있거늘 어찌 작은 것이 작은 것이며, 것이 것이겠습니까?

 

法性偈 禪解 - 一微塵中含十方 - ②

只這一星兒中에 包含無盡法界하야 無量生佛이 淨土와 穢土를 一一充滿하고 一一周遍하대 無欠無餘라

伊麽인댄 則只這一星兒에 還有許多限量麽아

無量法界에 還有許多伎倆麽아

다만 이 하나의 먼지 가운데 무궁무진한 법계를 포함하여 한량없는 중생들과 부처님이 정토와 예토에 낱낱이 충만하고, 하나하나에 두루 퍼지되 모자람도 없고 남음도 없다.

이와 같다면, 다만 이 작은 하나의 먼지에 또한 그 많은 양이 있는가? 한량없는 법계에 또한 그 많은 능력이 있는가?

앞에서도 잠깐 언급한 바가 있지만, 설잠스님이 “이 작은 하나의 먼지에 또한 많은 양이 있는가? 한량없는 법계에 또한 많은 능력이 있는가?”라고 하셨으므로 같은 뜻이 될지 모르지만 현대의 상식으로 해석하자면,

손톱만한 컴퓨터의 속에 수억만 권의 책이 들어 있음을 아는 이치이며, 돌조각 하나에 10억년 지구의 역사가 들어 있음을 아는 이치이며, 사람을 위시한 모든 동물과 모든 식물의 작은 세포 하나하나에 사람ㆍ그 동물ㆍ그 식물의 모든 정보가 고스란히 들어 있어서 얼마든지 복제하고 분화하는 것이 가능한 이치입니다.

 

法性偈 禪解 - 一微塵中含十方 - ③

咄, 要大에 即大요 要小에 即小라  一塵에 計十方할새 十方이 爲小요

以十方으로 量一塵할새 一塵이 爲大니 無緣起故며 無自性故라 爲甚如此오

昨夜에 金烏가 飛入海러니 曉天이 依舊一輪飛로다

“돌” 크고자 하면 곧 큰 것이요, 작고자 하면 곧 작은 것이어서 하나의 먼지에서 시방세계를 헤아리므로

시방세계가 작음이 되고, 시방세계를 가지고 하나의 먼지를 헤아리므로 하나의 먼지가 큼이 되는 것이니,

緣起가 없기 때문이며 自性이 없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이와 같은가.

“어젯밤에 金烏가 바다로 날아들었는데 새벽하늘에 여전히 하나의 둥근 바퀴가 되어 날아오르도다.”

咄”은 무슨돌”인가요? 일체존재의 이치를 바르게 깨달은 안목과 최첨단 과학적 지식과 기술을 가진 이라면, 것과 작은 것이 원융하여 걸림이 없고, 많은 것과 적은 것이 또한 相卽相入하여 장애가 없다는 사실을 너무나 쉽게 알고 증명하여 보입니다.

결코 신기하거나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해가 뜨고 지는 일이나 달이 뜨고 지는 일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냥 일상사일 뿐입니다.

 

法性偈 禪解 - 一切塵中亦如是 - ①  10 

一切塵中亦如是   앞에서 “하나의 먼지 가운데 시방세계를 포함하고 있다.”고 하였는데요. 이치는 어느 특정한 먼지나 사물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일체먼지ㆍ일체사람ㆍ일체사물이 한결같이 같습니다.

세상에서 어찌 특정한 사람이나 특정한 사물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진정으로 평등한 것입니다.

 

法性偈 禪解 - 一切塵中亦如是 - ②

只這十方法界는 个个是一微塵이어니와 一微塵도 亦不可得이니 如光如影하며

亦如因陁羅網이 互相參澈하고 重重交映일새 一一寶中에 衆象이 無盡하니라

이러한 시방법계는 낱낱이 곧 하나의 작은 먼지이거니와 하나의 작은 먼지도 또한 있을 수 없으니, 빛과 같고 그림자 같으며 또한, 인드라그물이 서로서로 참여하여 사무치며 거듭거듭 주고받아 비추어서 하나하나의 보석가운데 여러 모양이 다함이 없음과 같다.

지구가 크고 우주가 크고 우주에 있는 별들이 아무리 크고 많더라도 그것은 모두 본래 하나하나의 작은 먼지로 이루어졌습니다. 우리가 사는 지구가 처음 생길 먼지가 하나하나 모여서 45 여년의 세월을 지나면서 이렇게 되었고, 다른 많은 위성들도 모두 그와 같은 과정을 거치면서 저렇게 하늘에서 빛나고 있다는 사실을 이제 우리는 너무나 압니다.

그러나 지구와 다른 모든 별들까지도 먼지가 모여서 이뤄지고ㆍ머물고ㆍ변화하고 다시 먼지로 돌아가서 없어지는 과정을 반복하고 있어서 작은 먼지 하나도 잡아낼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실체는 없으나 분명하게 있는 빛과 같고 그림자 같습니다. 그래서 마치 인드라그물을 이루고 있는 낱낱보석에 서로서로 비치는 그림자들이 무궁무진하지만 다만 그림자로 존재할 뿐입니다.

 

法性偈 禪解 - 一切塵中亦如是 - ③

一一佛國이 滿十方하대 十方이 入一도 亦無餘라 非擬議의 所知요 非智眼의 所見이니 何也오

經行과 及坐臥가 常在於其中이로다

하나하나의 佛國이 시방세계에 가득히 차되 시방세계가 하나의 불국에 들어가더라고 또한 남음이 없다.

생각으로 헤아려서 알 바가 아니요 지혜의 눈으로도 볼 바가 아니니 무슨 까닭인가. “걸어 다니고 앉고 눕는 것이 늘 그 가운데에 있도다.”

[ 헤아릴 , 비길 ]

시방세계가 하나의 국토에 들어가는 이치를 생각으로 헤아려서 없으며, 지혜의 눈으로도 없다고 하였습니다.

보는 눈과 보이는 대상이 나눠지는 경계가 아니며, 하나의 국토와 시방세계가 둘이 아닌 경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걸어 다니고 앉고 눕는 것이 가운데에 있도다.”라고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공간적인 것이 원융하여 걸림이 없음을 설파하였습니다.

아래는 시간적으로 원융하여 걸림이 없음을 나타내었습니다.

 

法性偈 禪解 - 無量遠劫即一念 - ①  11

無量遠劫即一念  한량없이 오래고 오랜 겁이 곧바로 한순간인 것은 아무리 길고 억만 년의 시간이라 하더라도 아주 짧은 한순간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가 없어서, 시간이 한순간에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한순간과 한량없는 오랜 겁이 같은 것이며 하나인 것입니다.

공간적인 이야기이거나 시간적인 이야기가 그냥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화엄의 안목에 기준을 두고 이해해야하는 차원입니다.

如前所說하야 微塵과 十方이 無有自性體相故로

一切古今의 三世諸佛이 從初發心으로 入普賢願하야 窮未來際히 不離如今이라

앞에서 설한바와 같이 작은 먼지와 시방세계가 자성의 체와 상이 없기 때문에, 일체고금의 삼세제불이 처음 발심함으로부터 보현의 원을 세워 미래의 끝이 다하도록 지금을 떠나지 않는 것이다.

아주 작은 미세먼지가 되었든, 우리들이 사는 지구와 지구의 1000ㆍ수10000배의 별들과 은하계 전부가 되었든, 실상을 찾아보면 어디에도 자성의 체와 상이 없기 때문에, 위에 거주하고 있는 부처와 중생들의 실상 또한 자성의 체와 상이 없으므로 모든 부처님이 발심해서 성불하고, 다시 보현의 행원을 일으켜서 미래제가 하도록 교화하는 일이 지금의 순간도 떠나 있지 않습니다.

 

法性偈 禪解 - 無量遠劫即一念 - ②

或謦欬一聲과 或彈指一下와 乃至楊眉瞬目이 無不是諸佛方便이니 且道하라 還相逶悉麽아

不離當處하야 常湛然하니 覓則知君不可見이리라.

혹은 기침소리 한 번이나 혹은 손가락 튕기는 것 한 번에서 내지 눈썹을 찡긋하고 눈을 깜박임에 이르기까지 모든 부처님의 방편 아님이 없으니 어떻든 말해보라. 대체 자세히 알고 있기나 하는가.

“이 자리를 여의지 않고 늘 湛然한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찾아보아야 볼 수 없음을 그대는 알리라.”

[謦欬 경해, 기침 , 기침 ,  눈깜박일 ,  깜짝일 순,  구불구불  위,  즐길 담,  찾을 멱]

마음의 이치를 알고 그것만을 거량하는 선객들은, 기침소리 번이나 손가락 튕기는 것이나 눈썹을 찡긋하고 눈을 깜박이는 것이나 주장자를 들어 보이는 것이나 고함을 치는 것이나 손가락을 들어 보이는 등등이, 모두 물건임을 보라고하는 방편입니다.

그러나 물건이 그토록 명확하지만, 실체를 찾아보면 누구도 찾을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그것의 실상입니다. 역시 영가스님의 일절입니다.

 

法性偈 禪解 - 一念即是無量劫 - ①  12 

一念即是無量劫  한량없는 오랜 겁이 한순간이기 때문에, 한순간이 한량없는 겁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다시 말하면 한순간과 한량없는 겁은 하나이며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순간순간 안에 수많은 세월이 낱낱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 마치 잠깐 꿈을 꾸는데, 10년의 일생이 지나가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꿈속에는 10년의 세월만 있는 것이 아니라, 10 동안 겪은 사건과 무수한 공간과 하늘과 해와 달과 별들까지도 들어 있습니다. 우리가 현실에서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모든 것들이 들어 있습니다. 참으로 신기하지 않습니까?

 

法性偈 禪解 - 一念即是無量劫 - ②

即今에 一念이 亘徹十世하고 橫遍十方일새

建立一切諸佛하야 同時에 度生하고 行布一切衆生하야 同時에 滅度라

지금의 한 생각이 十世에 걸쳐 사무치고 시방에 두루 퍼지는 것이니, 일체 모든 부처님을 건립하여 동시에 중생을 제도하고 일체중생을 펼쳐서 동시에 滅度= 열반하는 것이다. 

[ 건널 ,  , 뻗칠 긍]

꿈이 그렇듯이 현실의 우리들 생각도 그와 같아서 부처님의 세계에서 펼쳐지는 , 중생들을 제도하는 온갖 일과 중생들이 순간에 같이 열반에 드는 일까지도 지금의 순간에 포함되어있습니다.

마치 곡식의 씨앗이나 사람의 세포 안에 모든 것이 있어서 조금도 부족함 없이 그대로 나타내 보이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法性偈 禪解 - 一念即是無量劫 - ③

非古非今이며 非新非舊니 且道하라 無量遠劫에 還有時分也無아

無影樹下에 合同船이어늘 瑠璃殿上에 無知識이로다

옛날도 아니고 지금도 아니며, 새것도 아니고 오랜 것도 아니니, 아무튼 말해보라. 한량없는 오랜 겁에 또한 시간이라는 것이 있는지.

“그림자 없는 나무 아래에서 같은 배에  올랐는데 유리의 전각위에 아는 이 없도다.”

깨달음의 안목으로 보면 공간이나 시간이 전혀 다른 차원이 됩니다. 실은 새롭게 다른 차원이 되는 것이 아니라, 본래 그와 같은 차원으로 존재하는 것을 알게 되고 보게 됩니다.

“그림자 없는 나무 아래” 운운은 벽암록 18 충국사의 이음새 없는 = 忠國無縫이라는 내용의 글입니다.

설잠스님은 선의 안목이 높아서 인용한 글들이 모두 영가스님의 증도가를 위주로한 禪文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