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이세간품 2 (離世間品) 7
㉲ 菩薩의 十種智光照 보살은 열 가지 지혜광명으로 비춤이 있다
佛子야 菩薩摩訶薩이 有十種智光照하니 何等이 爲十고 所謂知定當成阿耨多羅三藐三菩提智光照와 見一切佛智光照와
불자 보살마하살 유십종지광조 하등 위십 소위지정당성아뇩다라삼막삼보리지광조 견일체불지광조
見一切衆生死此生彼智光照와 解一切修多羅法門智光照와 依善知識發菩提心하야 集諸善根智光照와 示現一切諸佛
견일체중생사차생피지광조 해일체수다라법문지광조 의선지식발보리심 집제선근지광조 시현일체제
智光照와 敎化一切衆生하야 悉令安住如來地智光照와 演說不可思議廣大法門智光照와 善巧了知一切諸佛神
불지광조 교화일체중생 실령안주여래지광조 연설불가사의광대법문지광조 선교요지일체불신
通威力智光照와 滿足一切諸波羅蜜智光照가 是爲十이니 若諸菩薩이 安住此法하면 則得一切諸佛無上智光照니라
통위력지광조 만족일체제바라밀지광조 시위십 약제보살 안주차법 즉득일체제불무상지광조
질문 66 '何等이 爲智光照며'
佛子야 菩薩摩訶薩이 有十種智光照하니 何等이 爲十고
불자여, 보살마하살은 열 가지 지혜광명의 비춤이 있나니, 무엇이 열인가하면
所謂 知定當成 阿耨多羅三藐三菩提 智光照와
소위 결정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루리하는 것을 아는 지혜광명의 비춤이며,
見一切佛 智光照와 모든 부처님을 보는 지혜광명의 비춤이며,
見一切衆生死此生彼 智光照와 일체중생이 여기서 죽어 저기에 태어남을 보는 지혜광명의 비춤이며,
解 一切修多羅法門 智光照와 모든 수다라의 법문을 해석하는 지혜광명 비춤이며,
수다라(修多羅) 범어 'sūtra', 팔리어 'sutta'의 음역. 수트라는 본래 실이나 끈을 의미하며, 선(線), 규칙, 경구(警句), 강요서, 경전 등을 뜻함. 고래로부터 인도에서는 종교와 철학 및 학문의 기본적인 내용을 간단한 문장으로 정리해 놓은 것을 수트라, 곧 경(經)이라 불렀다. 이에 따라 부처님의 가르침을 정리해 놓은 것도 경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인도에서는 그러한 경을 야자수 잎사귀 등에 적어서 실로 꿴 다음 바구리에 담아 놓았는데, 그처럼 실로 꿴 경을 한데 모아 놓았다는 뜻에서 경장(經藏)이라고 한다. 수투로(修妬路), 소다라(蘇多羅), 계경(契經), 성교(聖敎), 정경(正經), 법본(法本), 경(經). 다라(多羅). ⇒ 경장(經藏).경(經).계경(契經).직설(直說).성교(聖敎).법본(法本).선어경(善語經)이라고 한역(漢譯)한다.
依善知識 發菩提心하야 集諸善根智光照와 선지식을 의지해 보리심을 내어 모든 선근을 모으는 지혜광명의 비춤이며,
示現一切諸佛 智光照와 일체제불을 나타내 보이는 지혜광명 비춤이며,
敎化一切衆生하야 悉令安住 如來地 智光照와 일체중생을 교화하여 여래의 지위에 안주하게 하는 지혜광명의 비춤이며,
演說 不可思議廣大法門 智光照와 불가사의한 광대 법문을 연설하는 지혜광명의 비춤이며,
善巧了知 一切諸佛神通威力 智光照와 일체제불의 신통과 위신력을 잘 요지하는 지혜광명의 비춤,
滿足一切諸波羅蜜 智光照가 是爲十이니 모든 바라밀을 만족히 하는 지혜광명의 비춤이니, 이것이 열이니라.
若諸菩薩이 安住此法하면 만일 모든 보살이 이 법에 안주하면
則得 一切諸佛無上 智光照니라곧 일체제불의 위없는 지혜광명의 비춤을 얻을 것이니라.
㉳ 菩薩의 十種無等住 보살은 열 가지 같을 이 없는 머무름이 있다
佛子야 菩薩摩訶薩이 有十種無等住하야 一切衆生과 聲聞獨覺이 悉無與等이니 何等이 爲十고 所謂菩薩摩訶薩이
불자 보살마하살 유십종무등주 일체중생 성문독각 실무여등 하등 위십 소위보살마하살
雖觀實際나 而不取證하나니 以一切願을 未成滿故가 是爲第一無等住요 菩薩摩訶薩이 種等法界一切善根호대
수관실제 이불취증 이일체원 미성만고 시위제일무등주 보살마하살 종등법계일체선근
而不於中에 有少執着이 是爲第二無等住요 菩薩摩訶薩이 修菩薩行호대 知其如化하야 以一切法이 悉寂滅故로
이불어중 유소집착 시위제이무등주 보살마하살 수보살행 지기여화 이일체법 실적멸고
而於佛法에 不生疑惑이 是爲第三無等住요 菩薩摩訶薩이 雖離世間所有妄想이나 然能作意하야 於不可說劫에
이어불법 불생의혹 시위제삼무등주 보살마하살 수리세간소유망상 연능작의 어불가설겁
行菩薩行하야 滿足大願하고 終不中起疲厭之心이 是爲第四無等住요 菩薩摩訶薩이 於一切法에 無所取着하야
행보살행 만족대원 종불중기피염지심 시위제사무등주 보살마하살 어일체법 무소취착
以一切法이 性寂滅故로 而不證涅槃하나니 何以故오 一切智道를 未成滿故가 是爲第五無等住요 菩薩摩訶薩이
이일체법 성적멸고 이불증열반 하이고 일체지도 미성만고 시위제오무등주 보살마하살
知一切劫이 皆卽非劫이나 而眞實說一切劫數가 是爲第六無等住요 菩薩摩訶薩이 知一切法이 悉無所作이니
지일체겁 개즉비겁 이진실설일체겁수 시위제육무등주 보살마하살 지일체겁 실무소작
而不捨作道하고 求諸佛法이 是爲第七無等住요 菩薩摩訶薩이 知三界唯心이며 三世唯心이나 而了知其心의
이불사작도 구제불법 시위제칠무등주 보살마하살 지삼게유심 삼세유심 이요지기심
無量無邊이 是爲第八無等住요 菩薩摩訶薩이 爲一衆生하야 於不可說劫에 行菩薩行하야 欲令安住一切智地하나니
무량무변 시위제팔무등주 보살마하살 위일중생 어불가설겁 행보살행 욕령안주일체지지
如爲一衆生하야 爲一切衆生도 悉亦如是호대 而不生疲厭이 是爲第九無等住요 菩薩摩訶薩이 雖修行圓滿이나
여위일중생 위일체중생 실역여시 이불생피염 시위제구무등주 보살마하살 수수행원만
而不證菩提하나니 何以故오 菩薩이 作如是念호대 我之所作이 本爲衆生이라 是故로 我應久處生死하야 方便利益하야
이불증보리 하이고 보살 작여시념 아지소작 본위중생 시고 아응구처생사 방편이익
皆令安住無上佛道가 是爲第十無等住니라 佛子야 是爲菩薩摩訶薩의 十種無等住니 若諸菩薩이 安住其中하면
개령안주무상불도 시위제십무등주 불자 시위보살마하살 십종무등주 약제보살 안주기중
則得無上大智一切佛法無等住니라
즉득무상대지일체불법무등주
질문 67 '何等이 爲無等住며'
佛子야 菩薩摩訶薩이 有十種無等住하야 一切衆生과 聲聞獨覺이 悉無與等이니
불자여, 보살마하살은 열 가지 같을이 없는 머뭄=無等住이 있어 일체중생과 성문 독각은 더불어 대등할 자가 없나니,
何等이 爲十고 무엇이 열인가하면
所謂 菩薩摩訶薩이 雖觀實際나 而不取證하나니 소위 보살마하살이 비록 실제를 관찰하지만 취해 증득하지 않나니
以一切願을 未成滿故가 是爲第一無等住요 모든 서원을 아직 만족히 하지 못한 까닭이라. 이것이 첫 번째 무등주이며,
화엄경에서의 보살은 부처님이 되고 난 뒤에 다시 중생들을 교화하기 위해서 보살의 경지에 머무르는 일들이다.
실제(實際)란 眞如法性을 이르는데 이는 온갖 법의 끝이 되는 곳이므로 실제라 한다. 또 진여의 실리(實理)를 증득하여 그 궁극(窮極)에 이르므로 이렇게 이른다. 중생이나 성문이나 독각들은 이와 같은 실제를 증득하려고 애를 쓰지만 보살은 실제를 관찰하여 잘 알지만 그것을 증득하여 취하지 않는다. 중생교화의 일체 서원이 아직 만족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참마음 자리인 실제를 증득하여 그 경지에 머물러 있기만 하면 중생교화의 작용이 원만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實際(실제)= 진실제, 진여, 깨달음(보리) 등 수행을 통해 도달하는 궁극적인 경지. 범어로 koti 혹은 bhūta-koti. 인도의 승려 무성(無性)의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에 따르면 진실하므로 ‘실’이라고 하고, 궁극의 경지이어서 ‘제’라고 한다.
즉, 존재하는 것의 궁극적인 모습을 의미한다. 『보적경(寶積經)』에 따르면 실제는 진실제(眞實際)의 준말이며, 그 의미는 잘못됨이 없는 것이고, 일체처에 편만하여 단 한 법도 실제 아님이 없다고 한다. 이러한 이유로 여래의 의미가 된다. 『대지도론(大智度論)』에서도 아라한을 일컬어 '실제에 머무는 자'라고 하는데, 법성을 증득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실제는 진여(眞如)·법성(法性)과 더불어서 제법의 진실한 모습의 다른 이름이라고 규정된다. 동시에 궁극의 경지를 증득한 자인 여래 또는 아라한에 도달한 자의 의미도 포함하고 있다.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에서 실제는 진여, 깨달음(보리)와 동일시된다.
실제의 내용이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것으로 『금강삼매경(金剛三昧經)』 「입실제품(入實際品)」을 들 수 있다. 여기서는 수행을 통해 진실한 경지인 실제에 깨달아 들어가는 방법을 설하고 있다. 『금강삼매경』을 주석한 원효는 실제에 대해서 허구를 떠난 구경의 의미이라고 규정한다. 그리고 이러한 실제의 경지에 들어가는 방법으로 경전에서 말하는 이입(理入)과 행입(行入)을 제시한다. 원리적으로 깨달아 들어가는 방법과 실천을 통해 깨달아 들어가는 방법이다. 나아가 ‘제’라는 것은 실제로 ‘제’가 없음을 일컫기 때문에 깨달아 들어가는 것조차 없는 것이 깨달아 들어가는 것이라고 명언한다. 이와 같이 실제는 실천해서 증득해야할 내용으로 인식되어 실천적으로 접근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실제에 대한 또 다른 정의로써 『금강삼매경』「무상법품(無相法品)」에서는 모든 법의 실제가 ‘결정된 성품’이라고 한다. 진실한 존재의 경지는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 대해서 원효는 깨달음을 증득한 항상 고요한 모습을 설명하는 것이며, 그 모습이란 진제(眞際)와 같고, 법성과 같다고 하였다. 실제가 진실한 궁극의 경지인 존재의 본성으로서 이해된 것이다. 한편, 의상은 실제에 대해서 법성을 끝까지 증득한 때를 실제라고 한다. 실제의 의미가 깨달아 들어가야 할 법성 자체에서 법성을 증득한 사태를 의미하는 실천적 궁극이라는 의미로 전개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 하나 실제에 대해서 주목할 만한 것은 신라 표원(表員)의 『화엄경문의요결문답(華嚴經文義要決問答)』의 「실제의(實際義)」이다. 여기에는 지론사(地論師) 름(懍)의 이론이 전적으로 인용되어 설명된다. 름은 헛됨과 거짓됨을 묘하게 끊은 것을 일컬어 ‘실’이라고 하며, 진실한 이치의 근원을 일컬어 ‘제’라고 한다. 그리고 실제는 머무름이 없는 것(無住)을 본질로 한다고 정의한다. 름의 논의는 그동안의 실제에 대한 논의 맥락과 다르게 실제와 본제(本際), 선제(先際), 후제(後際)를 비교하면서 실제의 의미를 드러내고 있다. 즉, 진실한 이치가 숨어 있을 때가 본제이고, 드러나 있을 때를 선제와 후제로 하며, 숨어있거나 드러남도 없지만, 숨어있다거나 드러나 있다거나 하는 사태와 다르지 않은 것을 실제라고 하여 구별한다. 이와 같은 명칭은 각 측면에서 본 실제의 이명이다. 여기서 선제와 후제는 수행의 측면을 말하며, 十信의 계위가 선제이고, 중간에 十住·十行·十廻向이 중제이며, 초지에서 불지까지를 후제로 정의한다. 실제가 이렇게 보살 실천의 내용으로 설명된다는 것은 지론종 내에서 실제에 대한 많은 논의가 있었다는 것을 반증한다. 름은 실제를 생사와 열반의 근원으로 보고, 여래장과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다. 또한 상대를 초월한 모든 법의 실상을 실제로 본다.
菩薩摩訶薩이 種等法界 一切善根호대 보살마하살은 법계와 같은 일체 선근을 심지만
而不於中에 有少執着이 是爲第二無等住요 거기에 조금도 집착하지 않나니, 이것이 두 번째 무등주이며,
일체중생들이나 성문이나 독각들은 선근을 심으면 그 선근에 집착하지만 보살은 심은 선근에도 집착이 없다.
執着(집착)=事物이나 道理를 고집하여 그것을 버리지 못하는 것. 執·着·計着이라고도 한다. 또 貪愛心(탐애심)에 집착하는 것을 染着(염착)이라고도 한다.
菩薩摩訶薩이 修菩薩行호대 知 其如化하야 보살마하살은 보살행을 닦되, 그것이 변화와 같아서
以一切法이 悉寂滅故로 일체법이 다 적멸한 줄 알기 때문에
而於佛法에 不生疑惑이 是爲第三無等住요 불법에 아무런 의혹이 일어나지 않나니, 이것이 세 번째 무등주이며,
寂滅(적멸) 1=약하여 滅이라고도 한다. 迷의 세계를 영원히 解脫(해탈)한 경계로서 涅槃(열반) 즉 nirvana라고도 하는데 특히 小乘의 涅槃을 가리키기도 한다. 열반의 경계가 無上의 즐거운 곳임을 뜻하여 寂滅爲樂(적멸위락)이라고 한다. 또 釋尊(석존)께서 깨달으신 곳, 곧 화엄경을 說하신 장소를 寂滅道場(적멸도량)이라고 하는데, 道場은 「깨달음의 道(菩提)를 성취한(곧 成道의) 장소」란 뜻이다. 인도 마갈타국 가야성 남쪽 尼蓮禪河(니련선하) 근처의 菩提樹下를 석존의 寂滅道場이라 한다.
적멸(寂滅) 2= 입멸(入滅), 입적(入寂) 열반에 들어가는 것을 가리키거나 모든 번뇌를 소멸시킨 붓다와 아라한 승려의 죽음을 높여 부르는 말이었으나, 번뇌의 세계를 완전히 벗어난 경지, 생멸이 함께 없어져 무위적정함을 말한다. 곧 번뇌의 경계를 떠난 열반으로 평안해지는 것. 조용히 가라앉는 것. 번뇌의 불을 완전히 꺼버린 정적, 마음의 궁극적인 고요함. 심신 일체의 활동을 멈추고 평정(平靜)해지는 것. 일체의 상(相)을 여읜 궁극의 깨달음의 경지, 법성진여(法性眞如)의 도리
菩薩摩訶薩이 雖離世間 所有妄想이나 보살마하살이 비록 세간의 모든 망상을 여의었으나
然能作意하야 於不可說劫에 行菩薩行하야 능히 뜻을 세우되 '불가설한 겁 동안 보살행을 행하여
滿足大願하고 終不中起 疲厭之心이 대원을 만족하리라' 하고, 결코 도중에 싫은 마음을 내지 않음이,
是爲第四無等住요 이것이 네 번째 무등주이며,
妄想(망상)=分別이라고 번역하며, 妄想分別(망상분별) · 虛妄分別(허망분멸) · 妄想顚倒(망상전도)라고도 하고, 망념 · 망집 등도 거의 같은 의미로 쓰인다. 마음의 집착으로 사물의 바른 모습을 분간하지 못하고, 함부로 그릇되게 생각하는 것. 宋譯 楞伽經卷二(능가경권2)에는 言說 · 所說事 · 相 · 利 · 自性 · 因 · 見 · 成 · 生 · 不生 · 相續 · 縛不縛의 12 妄想을 들었으며, 菩薩地持經卷二(보살지지경권이) 眞實義品에는 自性 · 差別 · 攝受積聚 · 我 · 我所 · 念 · 不念 · 俱相違의 8 妄想을 들었다.ㅡ (縛(박) : 煩惱(번뇌)의 다른 이름. 衆生의 마음을 속박하여 자재하지 못하게 한다는 뜻)
菩薩摩訶薩이 於一切法에 無所取着하야 보살마하살은 일체법을 취하여 집착하지 않으며,
以一切法이 性寂滅故로 而不證涅槃하나니 일체법의 성품이 적멸하기에 열반을 증득하지 않나니,
何以故오 一切智道를 未成滿故가 왜냐하면 일체지의 도를 아직 원만히 이루지 못한 까닭이라.
是爲第五無等住요 이것이 다섯 번째 무등주이며,
보살은 일체 법에 집착함이 없고 또 모든 법의 성품이 적멸하므로 열반도 증득하지 않는다. 그것은 보살의 일체 지혜의 길인 보살행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이 또한 중생이나 성문이나 독각들과 다른 보살의 같을 이 없는 머무름이다.
菩薩摩訶薩이 知一切劫이 皆卽非劫이나 보살마하살은 일체의 겁이 곧 겁이 아닌 것을 알지만
而眞實說一切劫數가 是爲第六無等住요 일체의 겁 수를 진실하게 설하니, 이것이 여섯 번째 무등주이며,
劫(겁)= 'kalpa'의 음역인 겁파의 약칭으로, 장시·대시라 의역된다. 힌두교에서 우주의 창조와 파괴가 반복된다는 기간을 말한다. 우주의 창조 신인 브라흐마의 하루는 낮과 밤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1칼파는 브라흐마의 하루 낮 또는 하루 밤이다. 1칼파는 인간계의 43억 2천만년 또는 4억 3,200만 년을 1겁이라 한다.
菩薩摩訶薩이 知一切法이 悉無所作이니 보살마하살은 일체법이 실로 지을 것이 없음을 알지만
而不捨作道하고 求諸佛法이 도를 지어 모든 불법 구하기를 버리지 않나니,
是爲第七無等住요 이것이 일곱 번째 무등주이며,
道(도) (칸지) (영어: dao, tao)의 일반 사전적인 의미는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 또는 '깊이 깨우친 이치'인데, 유가와 도가 등의 동양 종교사상의 전통에서 道는 우주의 궁극적인 실재를 가리키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즉, 道란 천지만물에 선행해서 존재한 것으로, 천지만물을 창조해 내는 근원이며, 우주를 지배하는 대조화의 이법(理法) 즉 진리(眞理)인 것으로 본다. 불교 · 힌두교 등의 동양 종교사상의 전통에서는 도(道, 산스크리트어: mārga, 팔리어: magga, 영어: path)는 기본적으로 진리에 이르는 길을 의미하는데, 이 뜻에서 나아가 진리 그 자체를 의미하기도 한다.
동양인의 윤리 도덕의 근저에는 우주의 궁극적 실재 내지 우주의 이법 또는 그 이법을 깨닫는 길 또는 그 이법과 합치하는 길로서의 道에 대한 사상이 자리잡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도교 · 불교 · 유교 등의 해석에는 차이가 있다. 예를 들어, 도교에서는 道가 신격화되어서 최고신인 원시천존(元始天尊)으로 되었으며, 불교에서는 대부분의 경우에서 길의 의미로 해석되고 있는데 도가의 영향을 받아 특히 선종에서는 진리 자체를 뜻하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이와 같이 道에 대한 사상은 한국 · 중국 · 일본 · 인도 등 동양인의 세계관이나 역사관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흥미로운 주제이다.
菩薩摩訶薩이 知三界唯心이며 三世唯心이나 보살마하살은 삼계가 오직 마음이요 삼세가 오직 마음임을 알지만
而了知其心의 無量無邊이 是爲第八無等住요 그 마음이 무량무변함을 아나니, 이것이 여덟 번째 무등주이며,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일체유심조는 화엄경에 ‘만일 사람들이 삼세일체불을 알려고 한다면 마땅히 법계의 본성이 모두가 마음의 짓는 바에 달려있음을 보라’는 글에서 나왔다. 화엄경은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담은 방대한 분량의 대승불교 경전이다. 법계는 법의 종류, 영역, 본성 등 다양한 의미를 지닌 불교 용어로 세계, 우주 전체와 진리 그 자체인 진여를 의미한다. 따라서 인과의 이치에 지배되고 있는 범위를 뜻한다. 모든 법계는 마음의 산물인 것이다. 일체유심조와 관련된 이야기로 신라의 고승 원효의 예가 있다. 661년 원효는 의상과 함께 당나라에 가기 위해 당항성으로 가는 도중 일체유심조를 깨닫고 다시 신라로 돌아왔다고 전해진다.
(1)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聖師(원효대사)의 春秋가 삼십여세 되던 때이다.
그 때에 玄奬法師(현장법사)가 西域(서역) · 天竺(천축) 여러 나라의 旅行과 遊學(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皇帝(황제)의 보호에 譯經事業(역경사업)과 또는 근간의 學僧(학승)들을 모아 唯識(유식) · 法相學(법상학)을 講(강)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聖師는 道友 義湘(의상)과 약속하고 唐(당)에 遊學(유학)하기를 꾀하고 入唐의 길에 올랐다.
本國 唐州界(당주계, 지금의 수언 남양해안)에 이르자 날이 저물고 폭우가 계속되었다. 비를 피하여 어떤 움집에 들어 자다가 목이 매우 말라 주위를 더듬다가 사발 같은데 고인 물을 마시고 解渴(해갈)하여 편히 쉬었다.
그 밤이 밝자 다시 살펴보니 그 움집은 古塚(고가)의 龕室(감실, 유교에서, 사당 안에 신주를 모셔 두는 작은 장)이요 마신 물 그릇은 해골박이었다. 그것을 발견한 聖師는 돌연히 구역질이 울컥 나서, 마악 구역질을 하다가 문득 한 생각이 번개처럼 번쩍이는 찰라에 확 깨달음을 얻었다. 聖師는 마치 악몽에서 깨어난 듯 이렇게 感嘆(감탄)하였다.
「한 생각 일어나면 갖가지 法이 일어나고 한 생각 사라지면 갖가지 法이 사라진다.(心生則 種種法生, 心滅則 種種法滅)」
如來께서 「三界는 허망인 것이니 오직 한 마음의 造作이라」하신 말씀이 바로 이것을 이르심이다. 이 때에 聖師는 一心의 本源 · 萬法의 實相을 사무처 깨달았다. 이때까지 무엇인가 알듯 말듯 뚜렷이 드러나지 않던 「眞如」의 참모습이 확실히 나타나니 法에 대한 의심이 끊어져 버렸던 것이다.
聖師는 이 때에 萬法의 實相, 곧「一眞如」의 본바탕을 如實히 본 것이다. 그 原理는 起信論에「一心眞如」란 것은 곧 一法界 大總相法門體니 이른바 心性은 不生 · 不滅이다. 一切法은 오직 妄念에 의하여 차별이 있나니, 만일 妄念을 여의면 곧 一切 境界의 모습이 없도다」라고, 心性의 본바탕은 본래로 一如平等하여 아무런 차별이 없는데 오직 妄念에 의하여 一切境界의 차별이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이어서, 一切法은 본래부터 言說相을 여의고 마음의 반연相을 여의어서 끝내 平等하여 變異함이 없으며 破壞할 수 없어 오직 一心일 뿐이다. 그러므로 眞如라고 한다.」라고 한 것이 그것이다. 이러한 本然의 實相인데 범부는 妄念으로 一切 境界의 差別相을 일으키어 取 · 捨 · 愛 · 憎의 妄業을 지으므로 眞如의 實相을 스스로 가리울 뿐이다.
(2)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는 화엄경의 핵심사상을 이루는 이 말은 "세상사 모든 일은 마음먹기에 달려있다"는 뜻이다. 슬프고 짜증나는 일도, 한 생각 돌이키면 편안해지는 법이다. 유식(唯識)에서는 일수사견이라는 비유를 든다.
같은 것을 동시에 바라보는 데에도 보는 이에 따라 다르게 보일 수 있다는 것은 사람들은 물을 보면, 누구나 마신다든지, 발을 담그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지옥의 중생들은 물을 피고름으로 본단다. 물고기는 그냥 사는 집일 따름이다. 즉 물이라는 객관적 형태를 보는 입장에 따라서는 천차만별로 볼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낙엽 지는 호숫가에서 첫사랑을 속삭였던 이는 물만 보면 다정하고 아름다운 감정이 솟구친다. 즉 물에 대한 객관적이고 교과서적인 해석은 존재할 수 없다. 물은 결국 우리들 마음 속에 있는 것이다. 만약 지금 견딜 수 없는 고통과 미움에 시달리는 이가 있다면, 옛 기억을 떠올려 보자. 죽을 것만 같았던 그 고통의 시간들이 지금 와서 생각하면 모두 부질없는 번뇌망상이다. 마찬가지의 논리로 지금의 현실도 언젠가는 추억이 될 따름이다. 문제는 고통이 아니라, 그 고통을 어떻게 받아 들이느냐 하는 상념의 차이다. 이 세상을 바라보는 안목도 마찬가지이다. 신문 사회면으로만 본다면 이 세상은 저주와 불행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아름다운 면으로 보면, 여전히 세상은 따스하다. 문제는 어느 쪽에 액센트를 두는가 하는 점이다. 시끄럽고 말 많은 세상을 보면서, 그래도 살만하다고 느끼게 하려면 불교가 바로 서야 한다. 그래서 세상사람들로부터 존경받는 불교가 되어야 한다. 선 삶은 자신의 해석에 달려 있다는 말이다. 모든 사실은 그 해석에 따라서 개인의 진실이 된다. 그 다음은 창조에 대한 의미이다. 개인의 자신이 마음, 믿음에 따라 외부 세계는 형성된다.-불교사랑
菩薩摩訶薩이 爲一衆生하야 於不可說劫에 行菩薩行하야 보살마하살은 한 중생을 위해 불가설 겁 동안 보살행을 행하여
欲令安住一切智地하나니 일체지의 자리에 안주하게 하고자 하며,
如爲一衆生하야 爲一切衆生도 悉亦如是호대 한 중생을 위하듯이 일체중생을 위해서도 그와 같이 하되
而不生疲厭이 是爲第九無等住요 피로나 싫증을 내지 않나니, 이것이 아홉 번째 무등주이며,
菩薩摩訶薩이 雖修行圓滿이나 而不證菩提하나니 보살마하살은 비록 수행이 원만하여도 보리를 증득하지 않나니,
何以故오 菩薩이 作如是念호대 왜냐하면 보살이 생각하기를,
我之所作이 本爲衆生이라 '내가 하는 일은 본래 중생을 위한 것이니
是故로 我應久處生死하야 方便利益하야 그러므로 내가 마땅히 오래토록 생사에 머물면서, 방편으로 이익케 하고
皆令安住 無上佛道가 是爲第十無等住니라 위없는 불도에 안주하게 하리라.' 하니, 이것이 열 번째 무등주이니라.
보리를 증득한다는 것은 성불의 경지에 머무른다는 뜻이다. 설사 성불하였더라도 다시 보살로 돌아와서 중생들을 위하여 보살행을 하는 것이 대승보살의 본업이며 의무이다. 그래서 보살은 영원히 중생들과 함께 생사의 바다에 떠다니면서 방편으로 이익을 베푸는 것이 보살의 본업이며 의무이다
佛子야 是爲菩薩摩訶薩의 十種無等住니 불자여, 이것이 보살마하살의 열 가지 무등주이니
若諸菩薩이 安住其中하면 만일 모든 보살이 그 안에 안주하면
則得 無上大智 一切佛法無等住니라 곧 위없는 대지혜와 일체불법의 무등주를 얻을 것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