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보현행품(普賢行品) 1
卷 第四十九
三十六, 普賢行品
*첫째, 품의 명목을 해석하면, 어째서 그 명칭이 「보현행품」인가? 첫 회상의 보리수 밑에서부터 여래는 불과이며, 10보현보살과 그 이하 보살과 신천(神天) 등의 무리는 부처의 보현행이기 때문이다. 제2회 보광명전에서부터 부동지불과 무애지불 등 10智 여래를 설함으로써 10신의 마음을 성취하는 것은 능히 스스로의 마음이 부동지불로서 자기 마음의 本果이고 나머지 아홉도 마찬가지이며, 문수사리와 覺首·目首 등의 10首 보살은 자신이 행할 보현의 행의 믿음을 밝힌 것이다. 그 다음 10주·10행·10회향·10지·11지에 있는 十十 등의 부처 명호와 十十 등의 보살 명칭과 나아가 한량없는 부처님의 명호와 한량없는 보살의 명칭은 다 자기 몸과 자기 마음이 닦아 나가는 불과와 스스로의 보현행이며, 이 [보현행품]에 이른 것은 한 개의 자기 마음의 佛果와 한 개의 자기 마음의 보현행이며, [여래출현품]에 이르러야 비로소 자기 불과의 이지체용(理智體用)이 바야흐로 종결됨을 밝히고 있다. 그리하여 [출현품]에서는 여래가 미간의 광명을 놓아서 문수의 정수리에 붓고, 입 안의 광명을 놓아서 보현의 입에 놓아서 그 理智 법신의 묘한 슬기인 문수사리와 함께 보현보살로 하여금 스스로 서로 여래가 출현하는 경계를 문답케 하여 바야흐로 자신의 이지의 묘한 슬기와 보현행의 바다와 불과를 닦아 나가는 것이 시종 원만함을 밝힌 것이니, 부촉(付囑)과 流通도 또한 「출현품」 안에 있는 것이다.
[이세간품(離世間品)]은 불과 후의 상도(常道)이니 시종이 없는 보현행이기 때문이다. [법계품]은 부처의 상도법계(常道法界)이니 항상 불과 후의 보현행으로써 하기 때문이다. 뜻에 의거한다면 「이세간품」이라 지을 수도 있는데, 이는 자기의 道行이 이미 원만하매 순수히 세간을 이롭게 함으로써 세간도 여읠 만한 게 없고 출세간도 이를 만한 게 없기 때문에 보현행으로 늘 중생을 이롭게 하는 것으로 근본을 삼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 품이 10信 이래로 [출현품]에 이르기까지 일세(一勢)의 시종인과본말(始終因果本末)을 총괄함으로써 그 품의 명목을 세운 것이니, 대략 이 1會의 10定 이래 11품 경문은 총체적으로 10定의 體로 처음과 끝을 통틀어 거두어서 1찰나제를 벗어나지 않는 것이다. 이 품은 부처의 果位 안의 自行인 보현행의 원만함을 밝힌 것이기 때문에 이로써 그 명칭을 세우는 것이다.
둘째, 품의 온 뜻을 설명하면, 앞의 품은 과극(果極)의 성지(性智)의 광명으로 중생을 이롭게 함을 밝히고 있는데, 이 품은 보현행으로 능히 사물을 이롭게 함을 밝히고 있음을 밝히기 위함이다. 理智만 있고 행이 없으면 理智가 곧 세속에 처해서 원만치 못하고, 행만 있고 이지가 없다면 그 행이 세속을 벗어남을 말미암지 못하기 때문에 理와 행의 體가 사무쳐야 비로소 不二의 자재로운 문을 성취하는 것이니, 이 때문에 이 품이 반드시 온 것이다.
셋째, 왜 이 품이 보현이 가르침을 설하는 주가 되었는가? 이 품의 행문이 보현행의 원만이기 때문에 또한 보현으로 하여금 스스로 설하게 한 것이니, 보현이 바로 법신의 본지묘리(本智妙理)의 用이기 때문이다. 두 가지 법이 홀로 행하면 원만치 못하기 때문에 먼저 법신의 性智의 광명을 들고 다음에 보현의 행을 설함을 밝힌 것이다.- 신화엄경
*불교에서는 지혜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면서 한편 그 지혜가 구체적 실천행으로 나타나기를 강조한다. 일상생활에 구체적 실천행으로 나타내는 것을 흔히 보살행이라 하고, 보살행에는 또 보현보살의 행을 그 대표로 삼는다.
보현보살의 행에는 수많은 것이 있겠으나 보현행원품에서는 열 가지 行願을 권하였고, 이 普賢行品에서는 딱 한 가지 문제만을 지적하여 실천할 것을 강조하였다. 그것은 곧 성내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다.
경에 말씀하시기를, “불자여, 나는 어떤 법의 허물이라도 보살들이 다른 보살에게 성내는 마음을 일으키는 것보다 더 큰 것을 보지 못하였노라. 왜냐하면 불자들이여, 만약 모든 보살이 다른 보살에게 성내는 마음을 일으키면 곧바로 백만 가지의 장애되는 문을 이루게 되기 때문이니라.”라고 하였다.
“만약 성내는 마음을 일으키면 菩提를 보지 못하는 장애와 바른 법을 듣지 못하는 장애와 부정한 세계에 태어나는 장애와 온갖 나쁜 길에 태어나는 장애 등등 무려 백만 가지 장애가 생긴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보살이 보살의 행을 빨리 만족하려면 모든 중생을 버리지 않고, 모든 보살을 여래와 같이 생각하고, 부처님의 법을 비방하지 말고, 보살의 법을 좋아하는 열 가지 법을 닦아야 하고, 열 가지 청정함을 구족하는 등으로 위가 없는 바른 깨달음을 얻어서 삼세의 모든 부처님들과 평등하게 된다고 설하고 있다.- 무비스님
‘보현행품’에서는 보현보살의 모든 것이 다 드러나게 된다. 초회 법보리도량에 등장하셨던 여래는 바로 불과이고 보현과 힘께 등장한 20명의 보살들, 신들과, 천왕은 모두 부처의 보현행을 나타내고 있다. 2회 보광명전에 등장한 부동지보살과 열 명의 보살이 함께 十信을 이룬 것은 자기 마음 안에 부처가 있음을 알았다는 것이다. 보살문명품에서 등장한 문수보살과 열 명의 보살들이 실천할 수행이 바로 보현행이다. 십주, 십행, 십회향, 십지와 등각까지 일어나는 모든 실천은 바로 중생의 안목을 버리고 부처님의 안목을 이루려는 모든 보살들이 가야할 길이다. 그래서 ‘보현행원으로 보리이루리라’는 말이 나오게 된 것이다.
제35품에서 등장한 광명은 일체 중생이 함께 유익함을 공유했으나, 보현의 행원이 도우미가 되지 않으면 나타낼 수 없다. 보현의 행원도 이 佛果인 광명체가 없으면 법계 중생에게 공유될 수 없기 때문에 이 경을 ‘각행호엄경(覺行互嚴經)’이라 부른다.
제36품인 ‘보현행품’에서 보현보살이 실천해야할 수행법을 파악하고 여래가 되는 지혜의 안목을 갖추어 세속에 들어가 중생을 항상 이롭게 하며, 늘 부처님과 동행하게 되니 여래의 果行이 영글어가는 것이다.
보현행이라 함은 덕이 우주법계에 두루하기 때문에 보(普), 지극히 수순하여 유연하니 현(賢)이라 부르고 자성청정(佛性)의 마음을 의지해 수행해 나아가니 행(行)이라 한다. ‘두루하다(普)’는 것의 범위는 끝이 없다. 깨닫기를 바라는 것, 중생을 교화함이 두루하고, 미혹이 끊어짐, 상대적수행, 절대적 이치에선 깨달음이 필요하지 않음도, 무애행이, 융통행이, 수행이 일어나는 작용이, 수행이 행해지는 곳이, 원융하여 끝없이 행해지는 것이 두루하다는 것이다.
그럼 화엄에 등장하는 보살들과 우리들은 어떤 마음가짐으로 보현의 수행에 동참해야 할 것인가. 경(經)에선 의외의 가르침이 등장한다. 바로 성내지 말라는 것이다. 포교의 현장에서 나는 신도들에게 본의 아니게 큰 소리를 지르는 경우가 많이 있다. 아무리 가르쳐도 무한반복으로 되돌아가는 이들을 보면서 안타깝고, 답답해서다. 지옥에 살고 있는 머리는 소나 말, 몸은 사람인 우두나찰과 마두나찰이 지옥중생을 잔인하게 핍박하는 것을 보면서 보살이 ‘지옥에 온 것도 불쌍한데 왜 자비스럽게 대해주지 않는가’ 묻자, ‘저 중생과 내가 만난 지 수 억겁입니다. 다시는 여기 오지 못하게 달래고 편의를 봐주고 했으나 끝없이 만나게 되니 고통을 주어서 이곳을 생각했을 때 끔찍해서 스스로 오지 않게 하려고 그럽니다’라는 것처럼, 내가 중생을 교화한다며 했던 행동이 재가자의 눈에 선지식이 아닌 악지식이 되어가는 것이 아닌가, 이러다 처염상정의 길에서 나의 본질을 잃어버리면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고민에 빠지기도 한다.
이런 나의 고민을 한 방에 해결해주는 경전의 말씀이었다. “불자여. 나는 어떤 법, 우리들의 삶에 중대한 과실이 있다하여도 보살들이 다른 보살에게 성내는 마음을 일으키는 것보다 더 큰 허물은 보지 못했다. 왜 그럴까. 불자여, 그것은 모든 보살이 다른 보살에게 성내는 마음을 일으키면 곧 바로 백만 가지 장애되는 문을 이루기 때문이란다.”
‘보현행품’에서는 성질 한 번 부렸을 뿐인데 100만 가지 장애가 생긴다니 섬뜩한 생각까지 든다. 인생에서 화를 내지 않고 살 수 있을까? 나를 둘러싼 모든 마음에 들지 않는 것들에 어떻게 하면 매사에 성질내지 않고, 분노하지 않을 수 있을까? 우리 모두 부처라 생각하라고 말하지만 언제쯤 그렇게 될 수 있을까? 생각해보면 길이 보이지 않는다고 말하지 말고 보현행을 해야 한다. 일체중생을 버리지 말고, 모든 이들을 부처님이라 생각하고, 부처님을 원망하지 말고, 부처님 국토는 무궁무진함을 믿고, 보살의 실천을 보며 믿음을 내고, 보리심을 버리지 않고, 여래의 힘을 성취하고, 중생을 위해 정법을 설하고, 중생교화가 힘들고 고달파서 못하겠다고 하지 말며, 어디에 살더라도 집착하지 말라는 열 가지 수행이 100만 가지 장애를 극복하는 보현행자의 마음가짐이다. -불교신문
一, 隨機說法 수기설법(중생의 근기에 따라서 여래의 경계를 설하다)
爾時 普賢菩薩摩訶薩이 復告諸菩薩大衆言하사대 佛子야 如向所演이 此但隨衆生根器所宜하야 略說如來少分境界니
이시 보현보살마하살 부고제보살 대중언 불자 여향소연 차단수 중생근기소의 약설여래 소분경계
何以故오 諸佛世尊은 爲諸衆生하사 無智作惡하고 計我我所하며 執著於身하고 顚倒疑惑하야 邪見分別하며
하이고 제불세존 위제중생 무지작악 계아아소 집착어신 전도의혹 사견분별
與諸結縛하야 恒共相應하며 隨生死流하야 遠如來道故로 出興于世하시니라
여제결박 항공상응 수생사류 원여래도고 출흥우세
중생이 佛道에 가기가 멀어서 이에 부처가 세간에 출현함을 밝힌 것이니, 앞의 품에서는 약간의 경계를 대략 설한 分.
爾時에 普賢菩薩摩訶薩이 復告 諸菩薩大衆 言하사대 그 때 보현보살 마하살이 다시 보살 대중에게 말했다.
佛子야 如向所演은 불자들이여, 앞서 설명한 것은 此但隨 衆生根器 所宜하야 단지 중생의 근기에 알맞게
略說 如來 少分境界니 여래 경계의 일부분을 약설한 것이니 何以故오 왜냐하면,
보현보살의 실천행에 대해서 가장 중요한 한 가지만을 설하려는 것이 보현행품이다. 그동안 설하신 모든 법문은 아무리 많아도 모두가 중생의 근기에 마땅함을 따라서 여래 경계의 일부분만을 간략히 설한 것이다. 더구나 이 보현행품은 딱 한 가지 사람들의 성내는 마음을 지적하여 그것을 다스리려고 설한 법문이다. 그러므로 그 서두가 성내는 사람의 근기에 맞춰서 조금만 설한다고 한 것이다.
諸佛世尊이 爲諸衆生의 모든 부처님 세존께서는 모든 중생들이 無智 作惡하며 무지하여 악업을 짓고
計 我我所하며 나와 내 것을 헤아리며 執着 於身하며 제 몸에 집착하고 계아아소(計我我所)란 신변의 2견이며,
顚倒疑惑하며 전도된 의혹 속에서 邪見分別하며 삿된 소견으로 분별하며
전도의혹(顚倒疑惑)이란 4倒이니 무상(無常)에서 상(常)을 계교(計較)하고 무아에서 아(我)를 계교하고 비락(非樂)에서 즐거움을 계교하고 부정(不淨)에서 청정함을 계교하는 것이다.
사견(邪見)이란 8사(邪)이니, 사념(邪念)·사명(邪命)·사사(邪思)·사정진(邪精進)·사정(邪定)·사어(邪語)·사업(邪業)·사혜(邪慧)이다.
與輿諸結縛으로 온갖 속박과 더불어 與 줄 여, 참여할 여, 輿 수레 여, 가마 여 縛 묶을 박, 밧줄 부, 얽을 박, 結 맺을 결,
결박(結縛)이란 6처(處)의 결박이니, 눈·귀·코·혀·몸·뜻이다.
恒共相應하며 隋生死流하며 늘 함께 어울려 생사의 흐름을 따라
遠如來道故로 出興于世하시니라 여래의 도를 멀리하기에 이 세상에 오셨느니라.
중생들은 지혜가 없어서 내가 없는데도 그 없는 나에게 집착하고, 내가 없으니 나의 것이 있을 수 없는데도 나의 것이라고 집착한다. 중생들의 일체 번뇌와 미혹과 고통이 여기에서부터 시작한다. 세존께서는 중생들이 이와 같은 삿된 소견 때문에 여래의 바른 길을 멀리하고 있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서 그들을 가르치려고 세상에 출현하신 것임을 밝혔다.
“여향소연(如向所演)”이란, 말하자면 앞의 [십신상해품]과 [수호광명공덕품]은 少分을 대략 설한 것이니, 사견(邪見)과 결사(結使)가 계박해서 늘 상응하기 때문에 여래의 도를 멀리 여의어서 출현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여래가 이 같은 중생을 위해 出興함을 나타내서 약간의 福德의 경계를 대략 설하지만, 실제로 여래는 출현함도 없고 사라짐도 없으니, 오직 도에 상응하는 자라야 지혜의 경계가 스스로 회통해서 모든 부처에 대해 출생과 멸진의 見을 짓지 않고, 스스로 定과 觀의 두 문으로 마음의 더러움을 다스려서 身邊의 見이 물러가면서 지혜의 경계가 상응하는 것이다.
만약 정견으로써 한다면, 무엇이 출현하고 무엇이 사라지며 무엇이 이루어지고 무엇이 무너지며 무엇이 오염되고 무엇이 청정하겠는가. 만약 스스로의 마음이 이같이 평등해서 오염되지 않고 청정해지지도 않는다면 이것이 바로 부처의 출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