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십정품(十定品) 28
(19) 德의 殊勝
㉰雖知諸法이 無上中下나 而能宣說最上之法하며 雖知諸法이 不可言說이나 而能演說淸淨言辭하며
雖知諸法이 無內無外나 而說一切內外諸法하며 雖知諸法이 不可了知나 而說種種智慧觀察하며
雖知諸法이 無有眞實이나 而說出離眞實之道하며 雖知諸法이 畢竟無盡이나 而能演說盡諸有漏하며
雖知諸法이 無違無諍이나 然亦不無自他差別하며 雖知諸法이 畢竟無師나 而常尊敬一切師長하며
雖知諸法이 不由他悟나 而常尊敬諸善知識하며雖知法無轉이나 而轉法輪하며 雖知法無起나 而示諸因緣하며
雖知 諸法이, 비록 모든 법에 無 上中下나, 상중하가 없음을 알지만
而能宣說 最上之法하며, 최상의 법을 펼쳐 연설하며, 宣 베풀 선
雖知 諸法이, 비록 모든 법이 不可言說이나, 말로 표현할 수 없음을 알지만
而能演說 淸淨言辭하며, 청정한 언사로 연설하며,
[청정(淸淨) ① 깨끗함. 순수한. 번뇌의 더러움을 떠난 것. 악이 없는 것. ② 맑은 것. ③ 청정한 것. 마음이 깨끗이 맑아지는 것. 성신(誠信)의 하나. ④ 깨끗한 사람. 여래(如來)의 동의어. ⑤ 진언밀교(眞言密敎)에서 맥관(脈官)을 말함. [rakta-vahin(더러움을 제거한다)의 뜻으로 해석.] ⑥ 세속의 도덕을 승인하는 것. 맑음. <讚佛偈> 예; 진리 그대로를 깨달아 나타나기 때문에 청정(淸淨)이라 함. 무루(無漏)의 뜻. 번뇌를 떠났으니 청정하다. 지혜로써 관(觀)하여 심법청정(心法淸淨)됨을 청(淸)이라 함. 번뇌가 쉬어 심법(心法)이 조용해지는 것을 정(靜)이라 함.]
雖知 諸法이, 비록 모든 법에 無內 無外나, 안도 밖도 없음을 알지만
而說 一切內外 諸法하며, 온갖 안팎의 법을 설하며,
雖知 諸法이, 비록 모든 법을 不可了知나, 요지할 수 없음을 알지만
而說 種種智慧 觀察하며, 갖가지로 지혜의 관찰을 설하며,
雖知 諸法이, 비록 모든 법에 無有 眞實이나, 진실이 없음을 알지만
而說出離 眞實之道하며, 출리의 진실한 도를 설하며,
雖知 諸法이, 비록 모든 법이 畢竟 無盡이나, 결국 다함이 없음을 알지만 필경(畢竟) 궁극의. 결국. 결코. 절대적으로.
而能演說 盡諸有漏하며, 모든 유루를 다하게 하는 것을 연설하며, 漏 샐 루, 냄새날 루
유루(有漏)= 漏는 번뇌를 말하며, 번뇌가 있는 것을 有漏라 하고, 없는 것을 無漏라 한다. 有漏는 또 有染(유염) · 有染汚(유염오) · 有諍(유쟁)이라고도 한다. (染도 染汚도 諍도 번뇌를 말함.) 또 잘못된 견해를 내는 依處(의처)이기 때문에 見處(견처)라고도 한다. 有部에서는 번뇌를 隨增하는 것(곧 번뇌에 隨順하여, 번뇌를 增長한다)을 有漏法이라 하고, 그렇지 않는 것을 無漏法이라고 한다. 곧 四諦중에서 迷의 果와 因인 苦集二諦의 諸法은 有漏法이고, 悟의 果와 因인 滅道二諦의 諸法은 無漏法이다.
雖知 諸法이, 비록 모든 법이 無違 無諍이나, 어긋남이나 다툼이 없음을 알지만 違 어길 위, 어긋날 위, 諍 간할 쟁,
然亦 不無自他 差別하며, 또한 나와 남이 차별함이 없지 않다는 것도 알며,
[차별(差別) 現象界에 있어서 個個의 事象은 이것과 저것이 서로 別異(별이)한 특성을 가지는 관계에 있음을 말함]
雖知 諸法이, 비록 모든 법이 畢竟 無師나, 필경에 스승이 없음을 알지만 師 스승 사
而常尊敬 一切師長하며, 모든 스승을 늘 존경하며, 而常尊敬이상존경, 師長사장= 스승과 어른
[無師(무사)= 자기 마음이 스승이지요. 결국 각자 가진 마음하나 제대로 밝히자고 하는 것이고, 그것 궁구하자고
하는 것이고, 그것 깨닫자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불법에는 스승이 없습니다.
‘그러나 不恥下問(불치하문)= 아래의 사람에게 묻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전부 스승으로 생각하고
존경하는 것입니다.]
雖知 諸法이 비록 모든 법이 不由他悟나, 남으로 말미암아 깨닫는 것이 아님을 알지만
而常尊敬 諸善知識하며, 모든 선지식을 항상 존경하며,
[혼자 깨닫는 것입니다. 법을 주는 것도 없고 받는 것도 없습니다. 자기가 공부해서 자기가 깨닫는 것이고,
자기가 눈을 뜨는 것이고, 자기가 철이 드는 것이고, 자기 스스로 지혜가 나는, 不由他悟입니다.]
雖知 法無轉이나, 비록 법은 구르지 않음을 알지만 而轉法輪하며, 법륜을 굴리며,
[轉法輪(전법륜)= 부처님이 설한 가르침을 법륜(法輪)이라 하고, 敎法(교법)을 說하는 것을 轉法輪이라 한다.
輪(륜)은 전륜성왕의 輪寶(윤보)가 四天下를 廻轉(회전)하여 모든 怨敵(원적)을 굴복시키는 것처럼 부처님의 敎法도 또한 일체 衆生界를 廻轉(회전)하며 모든 煩惱(번뇌)를 굴복하므로 輪寶에 비유하여 法輪이라 했다.
轉(전)이란 敎法을 說함에 비유한 말이며, 自心의 法을 굴려 他人의 마음에 옮기는 것이 흡사 轉車輪(전차륜)과 같음을 뜻한 것. 止觀輪行一에서는 轉義(전의)와 摧破(최파)를 들었다. 嘉祥法華義疏(가상법화의소)에는「圓을 굴리고 通을 演하여 一人도 얽매이지 않게 하기 때문에 輪이라 하며 累를 破하지 않음이 없는 것이 또한 輪의 義다」하였다.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이룬 후 최초로 교진여(倧蓮如) 등의 5비구에게 중도(中道)와 사성제를 설한 것을 가리켜 초전법륜(初轉法輪)이라고 하고, 대승경전의 가르침을 제2전법륜(第二轉法輪) 또는 제3전법륜(第三轉法輪)이라고 한다.]
雖知 法無起나, 비록 법은 일어나지 않음을 알지만 而示 諸因緣하며, 모든 인연을 보여주며,
(19) 德의 殊勝
㉱雖知諸法이 無有前際나 而廣說過去하며 雖知諸法이 無有後際나 而廣說未來하며
雖知諸法이 無有中際나 而廣說現在하며 雖知諸法이 無有作者나 而說諸作業하며
雖知諸法이 無有因緣이나 而說諸集因하며 雖知諸法이 無有等比나 而說平等不平等道하며
雖知諸法이 無有言說이나 而決定說三世之法하며
雖知諸法이 無有所依나 而說依善法하야 而得出離하며
雖知法無身이나 而廣說法身하며 雖知三世諸佛無邊이나 而能演說唯有一佛하며
雖知法無色이나 而現種種色하며 雖知法無見이나 而廣說諸見하며
雖知法無相이나 而說種種相하며 雖知諸法이 無有境界나 而廣宣說智慧境界하며
雖知諸法이 無有差別이나 而說行果種種差別하며 雖知諸法이 無有出離나 而說淸淨諸出離行하며
雖知諸法이 本來常住나 而說一切諸流轉法하며 雖知諸法이 無有照明이나 而恒廣說照明之法이니라
雖知 諸法이 無有前際나, 비록 모든 법에 전제(과거)가 없음을 알지만
而廣說 過去하며, 과거를 폭넓게 설하며,
雖知諸法이 비록 모든 법에 無有後際나, 후제(미래)가 없음을 알지만
而廣說 未來하며, 미래를 폭넓게 설하며,
[“九世十世互相卽(9세10세호상즉)”이니까, 법에는 시간성을 초월했습니다
九世와 十世, 아무리 세밀하게 시간을 나눈다하더라도, 전부 서로서로 즉해있는 한 덩어리입니다. 손과 손가락의 관계입니다. 그러면서도 과거ㆍ현재ㆍ미래를 아주 세밀하고 아주 넉넉하게 이야기하는 것이 또한 불교입니다.]
雖知 諸法이, 비록 모든 법에 無有中際나, 중제(중간, 현재)가 없음을 알지만
而廣說 現在하며, 현재를 폭넓게 설하며,
[삼세(三世)= 三際(삼제)라고도 한다. 過去世(過去 · 前世 · 前生 · 前際)와 現在世(現在 · 現世 · 現生 · 中際)와 未來世(未來 · 來世 · 來生 · 當來 · 後際)의 總稱(총칭)으로 去來現 또는 已今當이라고도 하고, 現在世와 未來世를 합하여 現當二世라고도 한다. 한 인간의 현재의 한 생애를 現世, 그 出生이전의 생애를 前世, 命終이후의 생애를 來世라고도 하는데,
또 현재를 1刹那로 보고, 그 前과 그 後로서 三世를 말하는 수도 있다. 혹은 劫을 단위로 하여 賢劫의 사이를 현재로 하여 三世를 세우는 경우도 있다. 단 有部에서는 世無別體依法而立이라고 하여 世의 實在를 인정하지 않는다.]
雖知 諸法이 비록 모든 법이 無有作者나, 짓는 자가 없음을 알지만
而說 諸作業하며, 온갖 짓는 일을 설명하며,
[業(업)= 카마, karma, 인간이 하는 행위. 행동. 행위의 움직임, 신 구 의 3업(業)으로 분할하여 신구의가 이루는 일체의 행위 즉 신체의 동작, 입으로 하는 말, 마음의 의사나 생각 모두를 총칭한다.
행위가 남기는 잠재적인 업력(業力), 삼업에 의해 이루어지는 선악의 행위가 초래하는 어떠한 결과를 말함. 삽업이 행하고, 또 그 행위의 결과를 가져오는 잠재적인 능력, 특히 전생의 선악의 소업에 의해 현세에 받는 보답을 말하기도 한다.
업보설은 이생에서의 삶이 윤회(輪廻 saṃsāra)의 사슬 중 하나에 지나지 않으며 그것은 전생에서 행한 행위에 의해 결정된다고 보는 인도인들의 믿음에 기초를 두고 있다. 인도인들은 이것을 이론의 여지가 없는 자연법칙으로 받아들여서, 업은 몸[身]으로만 짓게 되는 것이 아니라 입[口]과 뜻[意]으로도 짓게 되는 것으로 보아 신업·구업·의업이란 3업의 개념을 성립시켰고, 그것이 외부로 나타나는 경우를 표업이라 하고 외부로 나타나지 않아도 그대로 상속하게 되는 것을 무표업(無表業)이라 했다. 그리고 업은 선업(善業)과 악업(惡業)으로 분류되기도 한다.]
雖知 諸法이 비록 모든 법이 無有因緣이나, 인연이 없음을 알지만
而說諸 集因하며, 모든 인을 모으는 일을 설명하며,
雖知 諸法이 비록 모든 법이 無有 等比나, 같음을 비교할 수 없음을 알지만 等比등비= 서로 같은 것
而說 平等不平等 道하며, 평등하고 불평등한 도를 설하며,
雖知 諸法이, 비록 모든 법이 無有言說이나, 언설이 없음을 알지만
而決定說 三世之法하며, 삼세의 법을 결정코 설하며,
雖知 諸法이, 비록 모든 법이 無有所依나, 의지할 바가 없음을 알지만
而說依善法하야 而得出離하며, 선법에 의지해 출리= 번뇌에서 벗어나도록 설하며,
[선법(善法) 선한 일. 바른 일. 도리에 따르고 자타(自他)를 이익되게 하는 법(法), 세상의 선법, 오계·십선 혹은 출세간(出世間)의 선법, 삼학육도(三學六度)를 말함.]
雖知 法無身이나, 비록 법에 몸이 없음을 알지만 而廣說 法身하며, 법신을 폭넓게 설하며,
[법신(法身)= 산스크리트어 Dharmakāya의 번역어로 문자 그대로의 뜻은 진리의 몸(truth body) 또는 실재의 몸(reality body)이다. 불신관(佛身觀)의 대표적인 견해인 삼신설(三身說)에 따르면 부처는 법신(法身) · 보신(報身) · 응신(應身) 또는 화신(化身)의 3가지 몸을 가지고 있는데, 법신은 진리(법) 그 자체에 해당한다.
초기불교 시대에는 부처라 하면 35세에 도를 깨닫고 80세에 입적(入寂)한 생신(生身)의 고타마 붓다 한 사람을 의미하였다. 그리고 고타마 붓다는 범인(凡人)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32상(相)에다 80종호(種好)의 특수한 모습을 갖춘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대승불교가 성하게 되자 대승의 여러 경전(經典)에는 이러한 부처를 초월한 부처가 기술되었다. 법화경(法華經)의 여래수량품(如來壽量品)에서는 부다가야의 보리수 밑에서 도를 깨닫고 부처가 된 고타마 붓다는 일시적으로 인간의 모습을 하고 이 세상에 출현한 것에 불과하며, 사실은 영원한 과거에 있어서 이미 성불을 완성하고 무한한 시간에 걸쳐 인간들을 교화해 온 구원실성(久遠實成)의 부처가 있었음을 말하고 있다. 이 부처를 구원의 법신불(久遠의 法身佛)이라 부른다. 이것은 불교가 진리(법) 신앙이며, 진리(법)는 영원불멸이기 때문에 그 진리(법)를 깨달은 부처도 진리(법)와 일체(一體)이며, 진리(법)를 신체(身體)로 하고 있는 영원불멸의 존재, 즉 법신(法身)이라는 것이다.]
雖知 三世諸佛 無邊이나, 비록 삼세제불이 끝없이 많은 줄 알지만
而能演說 唯有一佛하며, 그러나 능히 오직 한 부처님만이 있음을 연설하며,
[三世諸佛 無邊= 과거 수많은 부처님ㆍ미래의 수많은 부처님, 너도부처ㆍ나도부처ㆍ마음부처, 진여불ㆍ자성불ㆍ법성불ㆍ법신불, 법당마다 부처님ㆍ1000불ㆍ10000불이지만, 唯有一佛= 오직 한 부처님(석가모니 불)이 있음을 연설하며]
雖知 法無色이나, 비록 법에 색이 없음을 알지만 而現 種種色하며, 갖가지 색을 나타내며,
雖知 法無見이나, 비록 법에 견(견해, 소견)이 없음을 알지만 而廣說 諸見하며, 온갖 견(견해, 소견)을 폭넓게 설하며,
雖知法無相이나, 비록 법에 상(相)이 없음을 알지만 而說 種種相하며, 갖가지 상을 설하며,
[상(相)= 표·특징·특성·또는 상태·樣相(양상)·形相(형상)등의 뜻이며 지속·반복·순간·기동·완료·결과 등이 있다. 때로는 體(本體)·用(작용)의 對語로 쓰이며, 볼 수 있고 알 수 있는 것의 모습을 의미한다. 그것 자체만이 가지고 있는 相을 自相, 다른 것에도 공통하는 相을 共相이라고 한다.(自相은 또 自性 곧 體와 같은 뜻으로도 쓰인다).]
雖知 諸法이 비록 모든 법에 無有 境界나, 경계가 없음을 알지만
而廣宣說 智慧境界하며, 지혜의 경계를 폭넓게 설하며,
[경계(境界)= 境이라고도 한다.
① 感覺器官감각기관(根) 및 認識인식을 주관하는 마음(識)의 대상을 가리킨다. 예컨대 눈과 眼識안식(視覺시각)에 의해서 보게 되는 色(빛 · 모양)이 그것이니, 여기에 五境, 六境의 구별이 있다. 唯識宗에서는 三類境의 說이 있으며, 또 內境 · 外境, 眞境 · 妄境, 順經 · 逆經 등으로 나눈다.
② 자기의 힘이 미칠 수 있는 범위, 인과응보의 이치에 따라 자기가 놓이게 되는 처지, 인식하거나 가치 판단을 주관하는 마음의 대상.]
雖知 諸法이, 비록 모든 법에 無有 差別이나, 차별이 없음을 알지만
而說 行果 種種差別하며, 수행의 과보가 갖가지로 차별함을 설하며, [行果= 수행과 수행에 대한 결과]
雖知 諸法이, 비록 모든 법에 無有 出離나, 출리가 없음을 알지만
而說淸淨 諸出離行하며, 청정한 모든 출리의 행을 설하며, [出離(출리)= 번뇌,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
雖知 諸法이, 비록 모든 법이 本來常住나, 본래대로 항상 머무는 줄 알지만
而說一切 諸流轉法하며, 일체의 유전하는 법을 설하며,
[本來常住= 상주불멸의 도리이지만 일체 流轉法= 흘러가고 변하는 이치를 설한다]
雖知 諸法이, 비록 모든 법이 無有照明이나, 밝게 비춤이 없는 줄 알지만
而恒廣說 照明之法이니라. 밝게 비추는 법을 항상 폭넓게 설합니다.
[여기까지 중도이치로, 완벽한 조화는 中道이다 즉 완벽한 삶은 조화로운 삶이 되어야 한다.
조화로운 삶이 되려면 중도적인 삶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20) 得入 얻어 들어가다.
佛子야 菩薩摩訶薩이 入如是大威德三昧智輪에 則能證得一切佛法하며 則能趣入一切佛法하며
則能成就하며 則能圓滿하며 則能積集하며 則能淸淨하며 則能安住하며
則能了達하야 與一切法自性相應이니라
佛子야 菩薩摩訶薩이 불자여, 보살마하살은
入 如是 大威德三昧智輪에, 이와 같은 큰 위덕이 있는 삼매의 지혜굴레에 들어가서
則能 證得 一切佛法하며, 능히 일체의 불법을 증득하고, 則 곧 즉,
[證得(증득)= 진리와 지혜를 깨달아 얻음, 완성하는 것. 가까워지는 것. 체득하여 직관적으로 보는 것. 깨달음.]
則能 趣入 一切佛法하며, 능히 일체의 불법에 나아가고,
則能 成就하며, 능히 (일체 불법을) 성취하고, 則能 圓滿하며, 능히 (일체 불법을) 원만히 하고,
則能 積集하며, 능히 (일체 불법을) 모으고, 則能 淸淨하며, 능히 (일체 불법을) 청정히 하고,
則能 安住하며, 능히 (일체 불법에) 안주하고, 則能 了達하야, 능히 (일체 불법에) 통달하여
與 一切法 自性 相應이니라. 일체법의 자성에 상응합니다.
[상응(相應) 범어 samprayukta. 평등하게 화합한다는 뜻. 法과 法이 서로 和合하여 떨어지지 않는 관계에 있는 것. 특히 마음과 心所간의 관계를 말하는 경우가 많다. 六因 중의 相應因이며, 俱舍論 卷六에 五義平等을 相應이라고 말하는 것도 이것이다. 雜集論 卷五에는, 서로 떠날 수 없는(不相應), 화합하는(和合), 모이는(聚集), 同時에 生하고, 同時에 滅하는(俱有), 목적을 같이 하는(所作), 心과 心所가 하나의 대상에 대해서 한결같이 작용하는(同行)의 6종 相應을 說함. 이 중에서 앞의 5종은 주로 色法(물질)에 대한 것이고 이 밖에, 函(함)과 뚜껑과 일치하는 것을 函蓋相應(함개상응), 敎를 받는 者(機)와 敎가 일치하는 것을 機敎相應(기교상응)이라고 한다.]
[자성(自性, 산 svabhāva, sva-laksana, svalakṣaṇa,/ intrinsic nature, essential nature, essence)은 다른 어떤 것과도 관계하지 않는 자기만의 특성이다. 즉, 어떤 법(法)의 본질적 성질을 그 법(法)의 자성이라고 하며, 간단히 성(性)이라고도 하며 또한 다른 말로 체(體) 또는 실체(實體)라고도 하며 또한 체성(體性)이라고도 한다. 어떤 법(法)의 자성은 해당 법을 다른 법과 구별되게 하는 결정적 요소이다. 부파불교의 설일체유부와 대승불교의 유식유가행파와 법상종에서는 흔히 자상(自相)이라고도 하며 또한 체상(體相)이라고도 한다.
어떤 법(法)의 본질적 성질을 자성(自性), 자상(自相) 또는 성(性) 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 그 법(法)이 이 본질적 성질을 바탕으로 다른 법(法)에 대해 일으키는 본래의 작용(作用), 즉 본질적 작용을 업(業) 또는 용(用)이라고 한다. 말하자면, 업(業)에는 여러 가지 뜻이 있는데 '작용'의 뜻이 있다. 예를 들어, 대승불교의 유식유가행파와 법상종의 주요 논서인 안혜의 대승광오온론의 제1권 그리고 호법 등의 성유식론의 제5권부터 제7권까지에서는 여러 마음작용(심소법)들에 대해 정의하고 설명하고 있는데, 각각의 마음작용(심소법)을 정의할 때 해당 마음작용의 본질적 성질인 성(性)과 본질적 작용인 업(業)을 밝힘으로써 해당 마음작용을 정의하고 있다. 본질적 성질인 성(性)과 본질적 작용인 업(業) 또는 용(用)은 동전의 앞면 · 뒷면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본질적 성질[性]을 다른 말로는 성능(性能)이라고도 하는데, 여기서 성은 성질 즉 본질적 성질을 뜻하고 능은 기능 또는 능력 즉 본질적 기능 또는 본질적 능력을 뜻한다. 한편, 성능의 일반 사전적인 의미는 '어떤 물건이 지닌 성질과 능력 또는 기능'이다.
한편, 본질적 성질과 본질적 작용을 합하여 불교 용어로 체용(體用)이라고도 하는데, 그 의미를 확대하여, 즉 체(體)와 용(用)을 개별 법의 본질적 성질과 본질적 작용을 가리키는 뜻으로 쓰는 것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체(體)를 일체의 만법의 본성으로, 용(用)을 본성이 일체의 만법 즉 차별적 현상을 구체화시켜 표현하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체상(體相)을 이러한 뜻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즉, 체(體)를 본질로, 상(相)을 본질이 구체화된 모습 즉 차별적 현상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자성(自性) 또는 자상(自相)에 대하여, 공상(共相, 산스크리트어: sāmānya lakṣaṇa, 영어: common nature)은 여러 가지 법(法: 개별 존재)에서 공통으로 존재하는 특성이다. 예를 들어, 가을의 산이 빨갛고 불이 빨갛고 옷이 빨갛다고 할 때의 공통의 빨강을 가리켜 공상(共相)이라고 하고, 파랑 혹은 노랑 등과 구별되는 빨강 그 자체를 가리켜 자상(自相)이라고 한다. 자상(自相)에는 처자상(處自相)과 사자상(事自相)의 구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