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십정품(十定品) 24
10. 無碍輪 大三昧 무애륜 대삼매
[열 번째, 무애륜대삼매(無礙輪大三昧)에서 윤(輪)은 비유하자면 윤왕의 천폭금강륜(千輻金剛輪)으로서 각(轂)ㆍ폭(輻)ㆍ망(網)ㆍ인(軔)이 모두 원만하듯이 생사를 무너뜨리는 행이 원만함을 밝힌 것이니, 이 보살의 지혜와 자비, 만행과 신통의 도력이 중생계에 충만해서 중생의 미혹을 다 끊어 원만케 함을 나타낸 것이니, 자기의 불과가 이미 이루어지매 보살의 지혜와 자비의 원행(願行)이 휴식함이 없어서 일념을 여의지 않고, 3세의 겁이 원만해서 모공을 여의지 않고, 시방 법계와 중생계에 두루 하여 자비와 지혜의 행운(行雲)이 일시에 널리 덮이기 때문에 그 명칭이 무애륜삼매임을 밝힌 것이다.
(1) 入三昧의 方便 삼매에 들어가는 방편
佛子야 云何爲菩薩摩訶薩의 無碍輪三昧오
佛子야 菩薩摩訶薩이 入此三昧時에 住無碍身業과 無碍語業과 無碍意業하며 住無碍佛國土하며
得無碍成就衆生智하며 獲無碍調伏衆生智하며 放無碍光明하며 現無碍光明網하며
示無碍廣大變化하며 轉無碍淸淨法輪하며 得菩薩無碍自在하야 普入諸佛力하며 普住諸佛智하며
作佛所作하며 淨佛所淨하며 現佛神通하며 令佛歡喜하며 行如來行하며 住如來道하며
常得親近無量諸佛하며 作諸佛事하며 紹諸佛種이니라
佛子야 云何爲菩薩摩訶薩의 無碍輪三昧ㄴ가? 碍 거리낄 애, 礙의 俗字, 輪 바퀴 륜
불자여, 어떤 것을 보살마하살의 걸림없는 수레바퀴=無碍輪 삼매라 하겠는가?
佛子야 불자여, 菩薩摩訶薩이 보살마하살이 入 此三昧時에, 이 삼매에 들 때
住 無碍身業과 걸림없는 신업, 無碍語業과 걸림없는 어업, 無碍意業하며, 걸림없는 의업에 住=머물고
住 無碍 佛國土하며, 걸림없는 불국토에 머물러서
得 無碍 成就衆生智하며, 걸림없는 중생 성취의 지혜를 얻고,
獲 無碍 調伏衆生智하며, 걸림없는 중생 조복의 지혜를 얻으며, 獲 얻을 획,
放 無碍 光明하며, 걸림없는 광명을 놓고, 現 無碍光明網하며, 걸림없는 광명그물을 나타내며, 網 그물 망,
示 無碍 廣大變化하며, 걸림없는 광대한 변화를 보이고,
轉 無碍 淸淨法輪하며, 걸림없는 청정법륜을 굴리며,
[법륜(法輪)은 법의 수레바퀴, 범어는 dharma-cakra이며, 범륜(梵輪)이라고도 한다. 수레바퀴는 때와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굴러갈 수 있듯이, 부처님의 가르침 역시 어느 한 사람 어느 한 곳에 머물지 않고 모든 곳에서 중생을 교화한다는 뜻에서 법륜은 전법(傳法)의 상징이다.]
得 菩薩無碍自在하야, 보살의 걸림없는 자재를 얻어서
[自在= 마음대로 무엇이나 자유롭지 않은 것이 없고 장애될 것이 없음을 일컫는 말. 불 · 보살이 갖춘 功德의 하나로써 ,그래서 佛을 自在人이라고도 한다]
普入 諸佛力하며, 부처님의 힘에 두루 들어가고,
普住 諸佛智하며, 부처님의 지혜에 두루 머물며,
作 佛所作하며, 부처님 하시는 일을 하고,
淨 佛所淨하며, 부처님 청정히 하신 것을 청정히 하며,
現 佛神通하며, 부처님의 신통을 나타내고,
令 佛歡喜하며, 부처님을 기쁘게 하며,
行 如來行하며, 여래의 행을 행하고,
住 如來道하며, 여래의 도에 머물며,
常得親近 無量諸佛하며, 한량없는 부처님을 항상 친근하여 作 諸佛事하며, 모든 불사를 지으면서
紹諸佛種이니라. 부처님의 종성을 이어갑니다. 紹 이을 소,
[佛種(불종)= 불종성(佛種性). 모든 중생이 불성을 지니고 있으므로 아직 깨닫지 못한 중생일지라도 부처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이러한 불성사상은 중생의 마음은 번뇌의 때에 가리워져 있지만 본래 맑고 깨끗하다는 원시불교의 교설에서 유래한 것이다. 〈열반경〉은 "모든 중생이 본래부터 불성을 지니고 있다"고 명시한 최초의 대승경전이다. 부파불교시대까지는 부처와 보살만이 성불할 수 있다고 보았으나, 세친의 〈불성론〉에 의하면 중생에게 선천적으로 갖추어진 불성은 없지만 후천적인 수행에 의한 불성은 얻을 수 있다고 했다. 대승불교 시대에 이르러 보살과 부처의 개념이 일반화되면서 중생의 성불이 어떻게 가능한가가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이에 따라 불성론도 활발히 논의되기 시작했는데, 특히 중국과 한국에서 성립된 여러 종파에서 불성론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선종에서는 불성의 유무에 집착하지 말고 자신의 본래면목을 깨달음으로써 견성성불할 것을 가르쳤다.
천태종(天台宗)에서는 불성을 ① 모든 존재가 본래 갖춘 부처가 될 수 있는 진여(眞如)의 본성인 정인불성(正因佛性),
② 진여의 이치에 비추어 나타나는 지혜인 요인불성(了因佛性), ③ 지혜를 일으키는 인연이 되는 육바라밀(六波羅蜜) 등의 수행을 뜻하는 연인불성(緣因佛性)으로 구분하고, 이를 3인불성(三因佛性)이라 했다. 화엄종에서는 중생의 불성이 원인과 결과, 본체와 현상(因果性相)의 모든 것을 원만하게 갖추고 있다고 하며, 유정(有情:생명체)이 지닌 성불의 종자(種子)를 불성·각성이라고 하고 모든 존재가 갖춘 진여의 이치를 법성으로 구분했다.
법상종에서는 이불성(理佛性)과 행불성(行佛性)의 2불성설(二佛性說)을 주장했다.
이불성은 모든 존재에 내재된 진여성을 말하며, 행불성은 근원적인 마음인 아뢰야식(阿賴耶識)이 본래 갖고 있는, 번뇌에 물들지 않은 무루종자(無漏種子)로서 수행을 통해 이불성을 현실화하는 작용을 한다. 모든 중생이 부처가 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모든 선근(善根)을 끊어버린 일천제(一闡提 icchantika)의 성불 가능성을 둘러싸고 많은 논란이 있었다. 이에 대해 선종(禪宗)에서는 "개는 불성이 없다"라는 화두를 통해 불성의 유무(有無)에 집착하지 말고 자신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깨달음으로써 견성성불할 것을 가르쳤다.]
(2) 智慧의 作用
佛子야 菩薩摩訶薩이 住此三昧已에 觀一切智호대 總觀一切智하고 別觀一切智하며 隨順一切智호대
顯示一切智하고 攀緣一切智하며 見一切智호대 總見一切智하고 別見一切智하니라
佛子야 불자여, 菩薩摩訶薩이 보살마하살은 住此三昧已에, 이 삼매에 머물러
觀 一切智호대, 일체지를 관찰하되, 總觀 一切智하고, 일체지를 일괄하여 관찰하고, 總觀총관= 전체를 살펴봄
別觀 一切智하며, 일체지를 개별적으로 낱낱이 관찰하며,
隨順 一切智호대, 일체지에 수순하되, 顯示 一切智하고, 일체지를 나타내보이고, 顯示현시= 깨우쳐 보여 줌
攀緣 一切智하며, 일체지를 반연하며, 攀緣반연= 다른 사람이나 사물을 의지하거나 연줄로 삼음, 객관의 사물에 의지함
見 一切智호대, 일체지를 보되, 總見一切智하고, 일체지를 일괄하여 보고,
一切智 別見니라. 일체지를 개별적으로 봅니다.
(3) 十種廣大 10종 광대
於普賢菩薩의 廣大願과 廣大心과 廣大行과 廣大所趣와 廣大所入과 廣大光明과 廣大出現과
廣大護念과 廣大變化와 廣大道에 不斷不退하며 無休無替하며 無倦無捨하며 無散無亂하야
常增進恒相續하나니 何以故오 此菩薩摩訶薩이 於諸法中에 成就大願하고
發行大乘하야 入於佛法大方便海하며 以勝願力으로 於諸菩薩所行之行에
智慧明照하야 皆得善巧하며 具足菩薩神通變化하야 善能護念一切衆生을
如去來今一切諸佛之所護念하야 於諸衆生에 恒起大悲하야 成就如來不變異法이니라
於普賢菩薩의, 보현보살의 廣大 願과, 광대한 서원과 廣大 心과, 광대한 마음과
廣大 行과, 광대한 행과 廣大 所趣와, 광대한 나아감 廣大 所入과, 광대한 들어감,
廣大 光明과, 광대한 광명, 廣大 出現과, 광대한 출현, 廣大護念과, 광대한 호념, 護 보호할 호, 도울 호
[호념(護念)= 항상 불·보살을 마음 속에 품고 선행을 닦으면 부처님·보살·하늘·귀신들이 여러 가지 장애로부터 중생을 보살펴 준다는 말. 無量壽經에 「무량한 諸佛은 모두 함께 護念한다」하였음.]
廣大 變化와, 광대한 변화, 廣大 道에, 광대한 도에서 不斷 不退하며 끊임 없고 물러나지 않으며
[不退(불퇴)=阿鞞跋致(아비발치) · 阿鞞拔致(아비발치) · 阿惟越致(아유월치), 不退轉 · 無退 또 必定이라고도 한다. 退는 退步(퇴보) · 退墮(퇴타)의 뜻으로 惡趣나 二乘地(聲聞 · 緣覺의 자리)에 退墮하고, 깨달은 보살의 地位나 깨달은 法을 잃는 것을 뜻하며, 따라서 不退란 그 반대를 말한다. 不退의 자리를 不退轉地라고도 한다.
有部에선 四善根位 중에 忍位에 이르면 다시 惡就에 떨어지는 일이 없으므로 不退를 얻는다고 說한다.
大乘般若 卷四四九에는, 見道에 들어가면 無生法忍을 얻어 다시 二乘地에 떨어지지 않으므로 不退를 얻는다고 했다. 또 보살의 品階로 말하면 十住의 第七住位를 不退轉住라고 부른다. 이런데 근거하여 여러 가지 不退說이 생겼다.
① 三不退= (1) 位不退는 十住位의 第七住 이상의 보살이 二乘地에 退轉치 않는 것. (2) 行不退는 十地중 第七地의 보살이 수행한 行이 退轉치 않는 것. (3) 念不退는 第八地이상의 보살이 無功用(짐짓 노력을 하지 않아도 자연히 도를 얻는 것)의 道에 들어 不動念이 된 것.
② 四不退= (1) 信不退는 十信位중 第六心 이상의 보살은 재차 邪見을 일으키지 않는 것. (2) 位不退는 十住位의 第七住 이상의 보살이 二乘地로 退轉치 않는 것. (3) 證不退는 初地 이상의 보살이 깨달은 법을 잃지 않는 것. (4) 行不退는 八地 이상의 보살이 有爲와 無爲의 행을 잘 닦아 退轉치 않는 것.
③ 五不退. 信 · 位 · 證 · 行의 四不退에 煩惱不退(等覺位의 보살이 번뇌 때문에 退轉치 않는 것.)를 더한 것.
④ 또 淨土宗(眞宗)에서는 진실한 信心을 얻는 자는 現生(이승)에서 正定聚의 자리에 住하여 반드시 佛果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은 기정사실이라고 설명한다. 그래서 이것을 現生不退라고도 하며 現生正定聚라고도 한다.]
無休 無替하며 쉬거나 변심하지 않고 替 바꿀 체,
無倦 無捨하며 권태나 버리는 일도 없으며, 倦 게으를 권, 捨 버릴 사
無散無亂하야 산란하지도 않아서 常增進 恒相續하나니, 늘 더욱 정진하고 항상 계속하는데,常增進상증진 恒相續항상속,
何以故오? 무엇 때문인가 하면, 此 菩薩摩訶薩이, 이 보살마하살은
於諸法 中에, 모든 법 안에서 成就 大願하고, 대원을 성취하고 發行 大乘하야, 대승을 행하여
入 於佛法 大方便海하며, 불법의 큰 방편바다에 들어가며,
以勝 願力으로, 수승한 원력으로 於諸菩薩所行之行에, 보살이 행해야할 행을
智慧를 明照해서, 지혜로 밝게 비추어 皆得善巧하며, 모두 잘 공교히 하고,
具足 菩薩神通變化하야, 보살의 신통변화를 구족하여
善能護念一切衆生을, 능히 일체중생을 잘 호념하기를
如去來今 一切諸佛之所 護念하야, 마치 과거 미래 현재의 부처님들이 호념하시던 바와 같이 하여
於諸衆生에, 모든 중생에게 恒起大悲하야, 늘 대비를 일으키며,
成就如來不變異法이니라. 여래의 변치 않는 법을 성취합니다.
(4) 菩薩智慧의 譬喩 보살지혜의 비유
佛子야 譬如有人이 以摩尼寶로 置色衣中에 其摩尼寶가 雖同衣色이나 不捨自性인달하야
菩薩摩訶薩도 亦復如是하야 成就智慧로 以爲心寶하야 觀一切智하야 普皆明現이나
然不捨於菩薩諸行하나니 何以故오 菩薩摩訶薩이 發大誓願하야 利益一切衆生하며
度脫一切衆生하며 承事一切諸佛하며 嚴淨一切世界하며 安慰衆生하며 深入法海하며
爲淨衆生界하야 現大自在하며 給施衆生하며 普照世間하며
入於無邊幻化法門하야 不退不轉하며 無疲無厭이니라
佛子야 譬如虛空이 持衆世界호대 若成若住에 無厭無倦하며 無羸無朽하며 無散無壞하며
無變無異하며 無有差別하야 不捨自性하나니 何以故오 虛空自性이 法應爾故ㄴ달하야
菩薩摩訶薩도 亦復如是하야 立無量大願하야 度一切衆生호대 心無厭倦이니라
佛子야 譬如涅槃이 去來現在無量衆生이 於中滅度호대 終無厭倦하나니 何以故오
一切諸法의 本性淸淨이 是謂涅槃이어니 云何於中에 而有厭倦인달하야
菩薩摩訶薩도 亦復如是하야 爲欲度脫一切衆生하야 皆令出離하야
而現於世어니 云何而起疲厭之心이리오
佛子야 如薩婆若가 能令過去未來現在一切菩薩로 於諸佛家에 已現當生하며
乃至令成無上菩提호대 終無疲厭하나니 何以故오 一切智가 與法界無二故며 於一切法에 無所着故ㄴ달하야
菩薩摩訶薩도 亦復如是하야 其心平等하야 住一切智어니 云何而有疲厭之心이리오
佛子야 불자여, 譬如有人이, 마치 어떤 사람이 以摩尼寶로, 마니보배를 摩尼寶마니보,
置色衣中에, 색깔이 있는 옷에 달면 置 둘 치 其摩尼寶가, 그 마니보배가
雖同衣色이나, 비록 옷의 색깔과 같아지지만
不捨自性인달하야, 제 성품은 그대로이듯이 [자기 성품을 버리지 않듯이,]
[摩尼寶珠(마니보주)=주(珠)ㆍ보(寶)ㆍ무구(無垢)ㆍ여의(如意)ㆍ보주(寶珠) 혹은 여의주(如意珠)라 한다. 이 구슬은 용왕의 뇌속에서 나온 것이라 하며, 사람이 이 구슬을 가지면 독...불법이 멸할 때에 모두 변하여 이 구슬이 되어 중생을 이롭게 한다는 것이다. 범마니(梵摩尼)ㆍ일정마니(日精摩尼)ㆍ월정마니(月精摩尼) 등의 종류가 있다.]
菩薩摩訶薩도 亦復如是하야, 보살마하살도 그와 같아서
成就 智慧로, 성취한 지혜로 以爲心寶하야, 마음의 보배를 삼아
觀 一切智하야, 일체지를 관찰하여 普皆明現이나, 두루 모두 밝게 나타내지만
然不捨 於菩薩諸行하나니, 보살의 모든 행을 버리지 않는데
何以故오? 왜냐하면, 菩薩摩訶薩이 보살마하살이 發 大誓願하야, 큰 서원을 일으켜
利益 一切衆生하며, 일체중생을 이익케 하고
度脫 一切衆生하며, 일체중생을 도탈시키며
承事 一切諸佛하며, 모든 부처님을 받들어 섬기고
嚴淨 一切世界하며, 일체 세계를 청정히 하며 安慰 衆生하며, 중생을 안위하여 安慰안위
深入 法海하며, 법바다에 깊이 들게 하며, 爲淨 衆生界하야, 중생세계를 청정히 하기 위해
現 大自在하며, 큰 자재를 나타내 給施 衆生하며, 중생들에게 베풀어 주고 給 줄 급, 施 베풀 시
普照 世間하며, 세간을 두루 비춰서 入 於無邊 幻化法門하야, 끝없는 환화법의 문에
不退 不轉하며 들어가 퇴전치 않게 하는 데에
無疲 無厭이니라. 피로도 싫증도 없습니다. 無疲무피 無厭무염
佛子야 불자여, 譬如虛空이, 마치 허공이 持衆世界호대, 모든 세계를 지탱하되 持 가질 지
若成 若住에, 이루어지거나 머무름에 無厭 無倦하며, 싫증도 권태도 없고 無厭無倦무염무권
無羸 無朽하며, 쇠약해지거나 썪지 않고, 羸 여윌 리, 파리할 리, 朽 썩을 후,
無散 無壞하며, 흩어지거나 무너지지도 않으며 無變 無異하며, 변하지도 달라지지도 않고
無有 差別하야, 차별함도 없어서 不捨自性하나니, 자성을 버리지 않는데,
何以故오? 어째서인가 하면 虛空自性이 허공의 자성에
法應爾故ㄴ달하야, 법이 으레 그렇기 때문이며, 法應爾故법응이고
菩薩摩訶薩도 亦復如是하야 보살마하살도 그와 같아서
立 無量大願하야, 한량없는 대원을 세우고 度 一切衆生호대, 일체중생을 제도하는 데에
心無厭倦이니라. 마음에 싫증이나 권태가 없습니다.
佛子야 불자여, 譬如涅槃이, 비유컨대 열반은
去 來 現在 無量衆生이, 과거 미래 현재의 한량없는 중생이
於中滅度호대, 그 안에서 멸도하되 [열반이라고 하는 이치에서 멸도를 얻되]
終無厭倦하나니, 결코 싫증이나 권태가 없는데, 何以故오? 왜냐하면,
一切諸法의, 모든 법의 本性淸淨이, 본 성품이 청정한(텅 빈) 것을
是謂涅槃이어니, 바로 열반이라 할 것이거늘 [텅빈 그 자리가 열반이다.]
[本性이 본래로 淸淨= 텅 빈것이 열반이다.]
云何於中에 어찌 그 가운데 而有厭倦가? 싫증이나 권태가 있겠는가? 厭倦염권
菩薩摩訶薩도 亦復如是하야, 보살마하살도 그와 같아서
爲欲度脫 一切衆生하야, 일체중생을 도탈시켜 皆令出離하야, 모두 출리케 하고자
而現於世어니, 세상에 나타난 것이거늘
云何而起 疲厭之心이리오? 어찌 피곤하고 싫은 마음을 일으키겠는가? 疲厭피염
[涅槃(열반, nirvana)= 반열반(般涅槃)·대반열반(大般涅槃)이라고도 한다.
'열반'은 산스크리트 '니르바나'(nirvāṇa)를 음역한 것이고 취멸(吹滅)·적멸(寂滅)·멸도(滅度)·적(寂) 등으로도 번역된다. 열반의 본래 뜻은 '소멸' 또는 '불어 끔'인데, 여기서 '타오르는 번뇌의 불길을 멸진(滅盡)하여 깨달음의 지혜인 보리(菩提)를 완성한 경지'를 의미하게 되었다. 열반은 생사(生死)의 윤회와 미혹의 세계에서 해탈한 깨달음의 세계로서 불교의 궁극적인 실천목적이다. 인도에서는 불교가 아닌 다른 종교·사상에서도 열반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나 불교의 열반 개념과는 다르다. 소승의 부파불교에서 열반이란 번뇌를 멸해 없앤 상태를 말하며, 여기에는 유여열반과 무여열반의 2가지가 있다. 유여열반은 깨달음은 이루었으나 번뇌를 지닌 육신에 의지하고 있는 상태를 말한다. 무여열반은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 방편으로 의지하고 있던 육신을 벗어나 인간으로서의 삶을 마치고 법신의 상태로 돌아감을 의미한다. 대승불교에서 열반은 상·락·아·정의 4덕을 갖추어야 한다고 보았다. 4덕을 갖춘 열반을 무위열반이라 하여 이를 최상의 목표로 삼았다. 열반은 모든 중생이 추구해야 할 궁극적 이상적 경지이지만 불교의 근본적인 관점에서는 현실세계와 대립 단절된 열반의 적정에 집착하는 태도를 비판한다.]
佛子야 불자여, 如薩婆若가, 마치 살바야(일체지)는 薩婆若살바야
能令 過去 未來 現在 一切菩薩로, 과거 미래 현재의 모든 보살들을
於諸佛家에, 부처님 가문에 已 現 當生하며, 이미 태어났고, 현재에 태어나고, 앞으로 또 태어나게 하고
乃至 令成無上菩提호대, 내지 무상보리를 이루게 하되
終無疲厭하나니, 결코 피곤해 하거나 싫증내지 않는데
何以故오? 어째서인가 하면 그것은 一切智가 일체지가
與法界 無二故며, 법계와 더불어 둘이 아닌 연고이며,
於一切法에 일체법에 無所着故ㄴ달하야, 집착이 없기 때문이듯이
菩薩摩訶薩도 亦復如是하야 보살마하살도 그와 같아서
其心이 平等하야 그 마음 평등하게 住一切智어니, 일체지에 머물렀는데
云何而有 疲厭之心이리오? 어찌 피곤함이나 싫증내는 마음이 있겠는가?
[법계(法界)는 산스크리트어 다르마다투(Dharmadhatu)의 역어이다.
법계의 법(dharma)는 dhar에서 유래하고, 지키는 것의 뜻으로, 그중에서도,「인간의 행위를 보존하는 것」이 원래의 뜻이다. 계(界)(dhatu)는 dha로부터 만들어진 남성명사로, 원래는 요소(要素)를 의미했으나, 불교에 들어와서 「계(界)」라든가「성(性)」의 의미가 덧붙여졌다고 생각되며, 법은 제법(諸法) 유무형의 온갖 물질과, 어떠한 일이나 이치를 뜻하며, 계는 분계(分界)의 의미로, 경계나 범위를 가리킨다. 즉 법계란 모든 것을 총칭하는 말이다. 특히 대승불교에 있어서는 사물의 근원, 법의 근원, 전우주의 존재를 법, 즉 진리의 표출이라 보고, 이것을 진여의 동의어로 사용한다. 그러므로 법계는, 한면으로는 세계·우주와 같고, 다른 면으로는 진여·법성 등과 동일한, 법의 세계이다. 부파불교에서 법계는 의식의 대상이 되는 모든 사물을 가리키는 반면, 일반적으로 대승불교에서는 법(法)을 모든 존재 또는 현상으로 해석하여 모든 존재를 포함한 세계, 온갖 현상의 집합으로서의 우주를 뜻하며, 또한 모든 현상의 본질적인 양상, 즉 眞如까지도 뜻한다.
대승불교 가운데에서도 특히 화엄종에서는 법계를 연기의 세계라 하여 법계연기에 대해 설하며, 밀교(密敎)에서는 법계를 영원의 이법(理法)과 동일시하고 있다.]
(5) 依報의 殊勝 의보의 수승함
佛子야 此菩薩摩訶薩이 有一蓮華호대 其華廣大가 盡十方際하야
以不可說葉과 不可說寶와 不可說香으로 而爲莊嚴하고
其不可說寶가 復各示現種種衆寶하야 淸淨妙好하야 極善安住하며
其華가 常放衆色光明하야 普照十方一切世界하야 無所障碍하며 眞金爲網하야 彌覆其上하고
寶鐸徐搖하야 出微妙音호대 其音이 演暢一切智法하며 此大蓮華가 具足如來淸淨莊嚴하니
一切善根之所生起며 吉祥爲表하니 神力所現이며
有十千阿僧祇淸淨功德하니 菩薩妙道之所成就며 一切智心之所流出이며
十方佛影이 於中顯現하야 世間瞻仰을 猶如佛塔하고 衆生見者가 無不禮敬하니
從能了幻正法所生이라 一切世間이 不可爲喩러라
依報의보= 중생의 마음과 몸이 의존할 세계, 가옥, 의식 등을 이르는 말
[정보(正報)와 의보(依報)= 자기의 행동을 업(業)이라 하고, 그 행동에 대해 갚음(보, 報)을 받는 것을 업보(業報)라 한다. 내가 나서부터 오늘 이 자리에 오기까지 일체의 행동이 곧 업(業)이요, 그 일체의 행동에 의해서 ‘나’라는 이 몸과 마음, 이 지위(처지)와 환경(경우)이 결정되는, 그 갚음이 보(報)이다. 즉 업은 자기의 행동이요, 보는 그 행동에 의해 생기는 결과이며, 그 갚음인 보는 다시 정보(正報)와 의보(依報)로 나뉜다. 정보(正報)란 그 사람의 몸과 마음의 작용이니, 가령 지금 내가 어떤 인간인가 하는 것은 내가 옛날부터 현재까지 해 온 업이 근본이 되어 지금의 나라는 인간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내 몸, 내 마음은 일체의 과거의 업에 의해 그 갚음을 받아서 이루어진, 정보(正報)가 된다.
의보(依報)의 의는 의지의 뜻이고 보는 과보라는 뜻으로 의보는 의지하고 있는 곳인 환경(環境), 경우(境遇)이다. 인간이 어떠한 환경에 있는가 하는 것은 역시 전부터 쌓아온 업의 갚음으로서 정해지는 것이다. 즉 어떠한 몸과 어떠한 마음을 가지고 어떠한 환경에 있는가 하는 것은 다 과거의 일체의 업의 갚음입니다.]
佛子야 불자여, 此菩薩摩訶薩이, 보살마하살에게는 有一蓮華호대, 한 연꽃이 있어서
其華廣大가, 그 꽃의 광대함이 盡十方際하야, 시방의 끝에 달하고
以不可說 葉과, 이루 말할 수 없는 잎과 葉 잎 엽, 不可說 寶와 말할 수 없는 보배와
不可說 香으로 말할 수 없는 향을 而爲莊嚴하고, 장엄하여
其不可說 寶가, 그 말할 수 없는 보배들이
復各示現 種種衆寶하야, 저마다 또 온갖 보배를 나타내보이며
淸淨妙好하야, 청정하고 미묘하게 極善安住하며. 지극히 잘 안주해 있는데,
其華가, 그 꽃이 常放 衆色光明하야, 항상 여러 빛깔의 광명을 발산하여
普照 十方一切世界하야 無所障碍하며 시방 모든 세계를 거리낌이 없이 두루 비추고 障碍장애
眞金爲網하야, 진금이 그물을 이루어 彌覆其上하고, 그 위를 덮었으며, 彌 두루 미칠 미, 覆 다시 복, 덮을 부
寶鐸徐搖하야, 보배 방울이 잔잔히 흔들려 寶鐸徐搖보탁서요, 鐸 방울 탁, 徐 천천할 서, 搖 흔들릴 요, 흔들 요
出微妙音호대, 미묘한 소리를 내서
演暢 一切智法하며, 일체지의 법을 펼쳐 연설합니다. 演暢연창, 演 흐를 연, 펼 연, 暢 펼 창, 화창할 창
此大蓮華가, 그 큰 연꽃은 具足如來 淸淨莊嚴하니, 여래의 청정한 장엄을 구족하였으니
一切善根之所 生起며, 모든 선근으로 생긴 것이며, [선근을 잘 닦아야 이러한 연꽃을 만난다.]
吉祥爲表하니, 길상을 의미하는 것이며 吉祥爲表길상위표, 吉 길할 길, 祥 상서로울 상, 表 겉 표
神力所現이며, 신통력으로 나타난 것이며,
有 十千阿僧祇 淸淨功德하니, 십천 아승지 청정한 공덕이 있으니
菩薩妙道 之所成就며, 보살의 미묘한 도로 성취된 것이며,
一切智心 之所流出이며, 일체지의 마음에서 흘러나온 것이며,
十方佛影이, 시방의 부처님 영상이 於中顯現이라. 그 안에 나타나서 顯現현현= 명백하게 나타나거나 나타냄
世間瞻仰을 세간이 우러러보기를 瞻仰첨앙= 우러러 사모함
猶如佛塔하고, 불탑과 같이 하고 猶如佛塔유여불탑, 猶 오히려 유, 塔 탑 탑
衆生見者가, 중생들이 보면 無不禮敬하니, 예경하지 않을 수 없으니 禮敬예경,
從 能了幻 正法所生이라. 허깨비 같음을 아는 정법에서 생긴 것이라
一切世間이 일체세간 것으로는 不可爲喩러라. 비유할 수가 없습니다. 喩 깨우칠 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