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십정품(十定品) 23
(6) 二行無碍
佛子야 菩薩摩訶薩이 雖能於定에 一念入出이나 而亦不廢長時在定하고 亦無所着하며
雖於境界에 無所依住나 而亦不捨一切所緣하며
雖善入刹那際나 而爲利益一切衆生하야 現佛神通하야 有厭足하며
雖等入法界나 而不得其邊하며 雖無所住無有處所나 而恒趣入一切智道하야
以變化力으로 普入無量衆生衆中하야 具足莊嚴一切世界하며
雖離世間顚倒分別하야 超過一切分別之地나 亦不捨於種種諸相하며
雖能具足方便善巧나 而究竟淸淨하며 雖不分別菩薩諸地나 而皆已善入하나니
佛子야 譬如虛空이 雖能容受一切諸物이나 而離有無ㄴ달하야 菩薩摩訶薩도 亦復如是하야
雖普入一切世間이나 而離世間想하며 雖勤度一切衆生이니 而離衆生想하며
雖深知一切法이나 而離諸法想하며 雖樂見一切佛이나 而離諸佛想하며
雖善入種種三昧나 而知一切法自性皆如하야 無所染着하며
雖以無邊辯才로 演無盡法句나 而心恒住離文字法하며
雖樂觀察無言說法이나 而恒示現淸淨音聲하며 雖住一切離言法際나 而恒示現種種色相하며
雖敎化衆生이나 而知一切法畢竟性空하며
雖勤修大悲하야 度脫衆生이나 而知衆生界가 無盡無散하며
雖了達法界가 常住不變이나 而以三輪으로 調伏衆生하야 恒不休息하며
雖常安住如來所住나 而智慧淸淨하야 心無怖畏하고
分別演說種種諸法하야 轉於法輪하야 常不休息이니라
佛子야 是爲菩薩摩訶薩의 第九法界自在大三昧善巧智니라
[二行= 有ㆍ無 등 상대적인 것을 말합니다.]
佛子야 불자여, 菩薩摩訶薩이 보살마하살은
雖 能於定 一念入出이나, 비록 한 순간에 선정에 들고 나고 한다지만 雖 비록 수,
而亦不廢 長時在定하고, 오랫동안 선정에 있기를 폐하지도 않고 [그만두지도 않고] 廢 폐할 폐, 버릴 폐
亦無所着하며, 또 집착하지도 않으며,
雖 於境界에 無所依住나, 경계에 의지해 머무는 일이 없다지만 [비록 경계에 의주하는 바가 없으나]
而亦不捨 一切所緣하며, 또한 모든 반연을 버리지도 않고,
[일체경계에 의주하는 바가 없으나 일체 所緣을 버리지 않는다. → 중도적인 이치로서 표현하고 있습니다.
비록 雖(수)자를 써서 中道이치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建立水月道場(건립수월도량)이라. 중요한 수행도량, 포교도량을 건립하지만, 그것이 水月道場입니다.
물에 비친 달그림자와 같은 도량인줄 알고 건립해야 된다는 中道의 이치입니다.
水月道場인줄 알고 열심히 목숨 다해서 포교당을 세우고, 절을 건립하고, 수행처를 건립해야 한다.
그 어디에도 치우쳐서 집착하지 말아야 된다는 것이 이 雖가 뜻하는 것입니다.]
雖 善入刹那際나 비록 찰나의 경계에 잘 들어간다지만
而爲利益 一切衆生하야, 일체중생을 이익케 하기 위해
現佛神通하야, 부처님의 신통을 나타내기를 無有厭足하며, 흡족함이 없이 하며, 厭足염족,
雖等入 法界나, 비록 법계에 평등히 들어가지만 而不得 其邊하며, 그 끝을 얻지 못하고,
雖無 所住의 無有處所나, 비록 머무는 일도 없고 처소도 없다지만
而恒趣入 一切智道하야, 일체지의 도에 항상 나아가서 以變化力으로, 변화력으로
普入 無量衆生衆中하야, 한량없는 중생들 속에 두루 들어가서
具足莊嚴 一切世界하며, 일체 세계를 구족히 장엄하며,
雖離 世間 顚倒分別하야, 비록 세간의 전도된 분별을 여의어
超過 一切分別之地나, 모든 분별의 자리를 초월했다지만
亦不捨 於種種諸相하며, 또한 갖가지 모양을 버리지도 않으며,
[분별(分別) ① (외적인 사물에 구애된) 단정. ② 다투다. ③ 수기(授記)와 동일. ④ 논의. 구분교(九分敎)의 하나. ⑤ 배분하는 것. 나누어 배부하는 것. ⑥ 조치. ⑦ 하나하나 분해함. ⑧ 구별. ⑨ 구별하는 것. 열어 보임. 사유. 구분하는 것. ⑩ 구별하여 생각함. 판별하기. ⑪ (두개 이상의) 경우를 나누어 구별하여 설명하는 것. ⑫ 개념으로서 표시할 수 없는 것을 표시하는 것. ⑬ 개념작용. 생각. ⑭ 망분별(妄分別)을 하는 것. 망상. ⑮ 주관적 구상. 구상작용. 아라야식이 개전하여 차별상을 나타낼 때의 주관적 측면. ⑯ 아라야식이 개전하여 차별상을 나타내는 것. 또는 그때의 주관적 측면. ⑰ 망분별. 잘못된 인식. 망상. ⑱ 사물(事物)을 분석하고 구별하는 것. ⑲ 특수. 바이세시카 철학에서 말함. ⑳ 사유(思惟). ㉑ 구별. ㉒ 분별기(分別起)의 약어. 생각하는 것으로부터 일어남.→분별기 ㉓ 사람들이 이해되도록 나누어 설명함. ㉔ 생각하는 것. ㉕ 수심(受心)을 말함. ㉖ 지식으로 하는 이해. 대상을 사려하는 것.
「分別名意識」(분별이 즉 뜻이라는 것.) vika-lpa는 마음의 작용이 대상을 사유하고 계산하는 것이지만, 여기에는 세 종류가 있다. (1) 자성분별(自性分別) 안(眼)·이(耳)·비(鼻)·설(舌)·신(身)의 오식(五識)이 대상을 식별하는 작용.
(2) 계탁분별(計度分別) 대상의 차별을 추량하고 재는 작용.
(3) 수염분별(隨念分別) 과거의 것을 추념하는 작용. <俱舍論 2권 ㊅ 29권 8中>
분별(分別)국어사전 : ① 사물을 종류에 따라 나누어 가름. ② (무슨 일을) 사리에 맞게 판단함, 또는 그 판단력. ③ 화학에서, 혼합물을 단계적으로 분리하는 일.]
雖能具足 方便善巧나, 비록 방편의 선교함을 구족했더라도
而究竟淸淨하며, 구경에 청정하며,
雖不分別 菩薩諸地나, 비록 보살의 모든 지위(53위 지위점차)를 분별하지 않지만
而皆已 善入하나니, 모두에 잘 들어가나니,
[보살 수행계위(菩薩修行階位)는 보살 즉 보살승(菩薩乘)의 수행자 즉 대승불교의 수행자가 처음 보리심(菩提心)을 발한 후 수행의 공덕을 쌓아서 불과(佛果) 즉 부처의 상태에 도달하기까지 거쳐가는 단계 또는 계위(階位)를 말한다. 보살의 수행계위 · 보살수행의 계위 또는 보살계위(菩薩階位)라고도 한다. 보살 수행계위 또는 수행계위 일반을 각각의 또는 궁극적인 계(界) 또는 계위에 들어가는 분위(分位)라는 뜻에서 입계분(入界分)이라고도 한다 (참고: 5주지번뇌#보살영락본업경). 여기서의 계(界)는 어떤 부류 · 범주 · 영역 · 구역 · 세계 · 경지 · 상태를 말한다.
보살 수행계위에 대해서 모든 대승불교의 경전과 논서의 의견이 일치하는 것은 아니며, 여러 가지 계위 체계가 있다.
이들 가운데 《화엄경》 계통의 경전인 《보살영락본업경》에서 설하고 있는 10신(十信) · 10주(十住) · 10행(十行) · 10회향(十廻向) · 10지(十地) · 등각(等覺) · 묘각(妙覺)의 52위(五十二位)의 수행계위 체계가 모든 계위를 사실상 빠짐없이 망라하고 있고 그 명칭과 뜻이 잘 정리되어 있어서 전통적으로 대승불교권에서 널리 채택되어 사용되고 있다. ]
佛子야 불자여, 譬如虛空이, 비유컨대 마치 허공이
雖能容受 一切諸物이나, 모든 사물을 수용할 수 있다지만 而離有無ㄴ달하야, 있고 없음을 떠났듯이
菩薩摩訶薩도 亦復如是하야, 보살마하살도 그와 같아서
雖普入 一切世間이나, 일체 세간에 두루 들어가지만 而離 世間想하며, 세간이라는 생각을 떠났으며,
[世間(세간)= 범어 loka의 번역, 축약해서 세[世]라 하며, 로가[路迦]라 음역한다. 세[世]는 변화해 가는 것[遷流], 간[間]은 가운데 즉 안이란 의미다. 보통 멈추지 않고 흘러가는 현상세계를 말한다. 현상세계 속에 포함되어 있는 것도 세간이라 한다. 이런 경우는 세속. 범속[凡俗]이란 뜻이다.
세간은 줄여서 세(世)라고도 하며, 깨지고 부서지게 될 것이라는 뜻이 있다. 보통 세간이라고 할 때에는 세간에 속한 것도 포함하며 세상의 사물과 번뇌에 얽매어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존재의 모든 현상을 가리킨다. 세친의 〈불성론 佛性論〉에 의하면 '세'에는 부정되고 없애버려야 할 것(對治), 옮겨가는 것(不靜住), 진리에 어긋난 거짓(虛妄) 등의 3가지 뜻이 있다고 한다.
세간은 일반적으로 3가지로 구분되는데, 이를 삼종세간이라고 한다. 천태종에서는 오음세간(五陰世間)·중생세간(衆生世間)·국토세간(國土世間)으로 삼종세간을 구분한다. 오음세간이란 색·수(受)·상(想)·행(行)·식(識)의 오음(五陰), 즉 5온이 화합하여 이루어진 세간이고, 중생세간은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이 만들어낸 세간이며, 국토세간은 중생을 수용하고 세간으로서 우리가 살고 있는 산하대지(山河大地) 등을 말한다. 이에 대해 화엄종에서는 기세간(器世間)·중생세간(衆生世間)·지정각세간(智正覺世間)의 삼종세간을 말한다.
기세간은 국토세간과 같은 것이며, 지정각세간은 부처가 세간과 출세간(出世間)의 법(法)을 치우침 없이 모두 깨달아 얻은 세간이다. 세속이라는 의미의 세간에 대해 세간의 번뇌를 뛰어넘은 열반의 세계를 출세간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고·집·멸·도(道)의 사성제에서 고·집의 2제(諦)는 세간에 속하고, 멸·도의 2제는 출세간에 속하는 진리이다.]
雖勤度 一切衆生이니, 비록 일체중생을 힘써 제도하지만 而離 衆生想하며, 중생이란 생각을 여의었으며,
雖深知 一切法이나, 일체법을 깊이 알지만 而離 諸法想하며, 법이라는 생각을 떠났으며,
[제법(諸法)은 세간과 출세간의 모든 법을 말하며, 나아가 일체 존재나 일체 현상을 포괄하는 말이다.]
雖樂見 一切佛이나, 모든 부처님 뵙기를 즐기지만 而離 諸佛想하며, 부처님이라는 생각을 여의었으며,
雖善入 種種三昧나, 갖가지 삼매에 잘 들어가지만
而知 一切法自性皆如하야, 일체법의 자성이 모두 같아서 無所染着하며, 물들어 집착할 것이 없는 줄을 而知= 알며,
[우리 자성은 皆如, 여여한 본래 삼매입니다.
그러면 따로 낱낱 삼매에 들어갈 것이 없는데, 낱낱 삼매에 들어갈 때는 또 들어갑니다.]
[染着(염착)= 妄念으로 인하여 객관에 나타난 대상을 실지로 알고 집착하는 것.]
雖以無邊 辯才로, 끝없는 변재로 演無 盡法句나, 다함없는 법구를 연설하지만
而心恒住離 文字法하며, 마음은 항상 문자를 떠난 법에 머물며,
[다함이 없는 법의 구절을 연설하기는 하나, 마음은 항상 문자법을 떠나 있어야 됩니다.
화엄경에 목숨을 걸고, 사랑한다고 하면서, 거기에 목을 매달고 사는 것 같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그것을 다 떠나 있는 상태, 살 때는 까마득히 잊고 사는 그 이치 입니다.
雖樂觀察 無言說法이나, 언설이 없는 법을 관찰하기를 즐기지만
而恒示現 淸淨音聲하며, 늘 청정한 음성을 나타내보이며,
雖住一切 離言法際나, 모든 말을 떠난 법의 경계에 머물지만
而恒示現 種種色相하며, 항상 갖가지 색상을 나타내보이며, [色相(색상)= 육안으로 볼 수 있는 모든 물질의 현상.]
雖 敎化衆生이나, 비록 중생들을 교화하지만 而知一切法 畢竟性空하며, 일체법이 필경에 성품이 공한 줄을 알며,
雖勤修 大悲하야, 비록 대비를 힘서 닦아 度脫 衆生이나, 중생을 도탈시키지만
而知 衆生界가, 중생세계가 無盡無散하며, 다하지도 않고 흩어지지도 않는 줄을 而知= 알며,
雖了達法界가 常住不變이나, 법계가 항상 머물러 변하지 않는 줄을 알지만
而以三輪으로, 삼륜으로 調伏衆生하야, 중생을 조복하기를 恒不休息하며, 늘 쉬지 않으며,
[三輪(삼륜) 三轉法輪(삼전법륜), 示轉(시전)ㆍ勸轉(권전)ㆍ證轉(증전).
예를 들어 관세음보살을 어떤 초보 신도에게 설명을 하는데 세 가지 단계가 있습니다.
“관세음보살이라는 분이 있습니다.” → 示轉.
“관세음보살 한번 불러보세요. 관세음보살 부르면 관음경에 보면 중생소원 안들어 주는 것이 없답니다.”→ 勸轉.
“이것 보세요. 제가 관음기도 해서 이런 절을 세웠습니다.→ 證轉.
법문할 때 이 세 가지 조건이 갖추어져야 됩니다.]
雖常安住 如來所住나, 비록 여래의 머무신 곳에 늘 머물지만 而智慧 淸淨하야, 지혜가 청정하고
心無怖畏하며, 마음에 두려움이 없어서 分別演說 種種諸法하야, 갖가지의 법을 분별하고 연설하며
轉於法輪하야 법륜 굴리기를 常不休息이니라. 쉬지 않나니,
[怖畏포외= 두렵고 무서움. 화엄경에서는 생활의 두려움, 명예를 잃을 두려움, 악도(惡道)에 떨어질 두려움, 죽음의 두려움, 대중 앞에 나섬에 대한 두려움 따위의 다섯 가지 두려움을 이른다.]
佛子야 불자여, 是爲菩薩摩訶薩의, 이것이 보살마하살의
第九 法界自在 大三昧善巧智니라. 제 9 법계에 자재한 큰 삼매의 선교한 지혜인 것입니다.
[여기는 '비록 雖(수)'를 써서 中道이치로 표현하였습니다.]
[중도(中道)는 '치우치지 아니하는 바른 도리'를 말한다.
고타마 붓다는 29세에 출가하여 35세에 깨달음을 얻어 불타로 될 때까지의 6년간 그 대부분을 가혹한 고행의 길에 정진하였다. 그러나 그 고행도 고타마 붓다에 있어서는 몸을 괴롭게 하는 것뿐으로서 참된 인생 문제의 해결은 되지 않았다.
출가 전의 고타마 붓다는 왕자로서 물질적으로는 풍족하여 즐거움에 찬 생활을 보내고 있었으나 그러한 물질적인 풍족함만으로는 인간은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고타마 붓다는 출가 전의 쾌락(樂行)도 출가 후의 고행도 모두 한편에 치우친 극단이라고 하며 이것을 버리고 고락 양면을 떠난 심신(心身)의 조화를 얻은 중도(中道)에 비로소 진실한 깨달음의 길이 있다는 것을 스스로의 체험에 의해서 자각하였다. 성도(成道) 후 그때까지 함께 고행을 하고 있던 5인의 비구(比丘)들에게 가장 먼저 설교한 것이 중도의 이치였다.
중도는 팔정도라고 하는 구체적인 실천에 의해서 지탱되는 준엄한 도이며, 여기서는 나태 · 번뇌 · 노여움 · 어리석음에 의해서 부지 중 어떤 것에 집착하려고 하는 어떠한 치우침도 모두 버려야 할 것이 강조된다.
특히 대승불교의 공 사상(空思想)에서는, 공(空)을 관조하는 것이 곧 연기(緣起)의 법칙을 보는 것이며 또한 진실한 세계인 중도(中道)의 진리에 눈을 뜨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러한 관점은 또한 대승불교 실천의 기초가 된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서는 특히 대승경전 중 《반야경(般若經)》과 이에 입각하여 용수(龍樹)가 저술한 논서인 《중론(中論)》에서 명백하게 밝혀 두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