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엄경 설법의 장소와 광명과 법좌
★ 이통현 장자의 신화엄경론에서
부처님께서 법을 설한 처소와 법좌의 體를 거듭 편다는 것은 그 뜻이 세 가지가 있다. 첫째 법을 설한 처소와 意趣를 편 것이며, 둘째 광명을 놓은 처소와 의취를 편 것이며, 셋째 법좌의 體와 의취를 편 것이다.
●법을 설한 처소와 의취를 편다는 것에서 그 처소는 열 가지가 있고 그 의취는 열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로 보리장 보리수 밑의 1會는 熙連河 가, 優樓頻螺迦葉의 아란야에서 도를 얻은 것은 세간법에 의지하여 이러한 것이며, 이는 중생을 교화하는 법칙이니, 부처는 이것이 없다. 그리하여 昇天에 이르기까지 모두 법칙을 나타낸 것이지만, 가령 여래가 지혜의 體로써 두루 한다는 것에 비춰보면 시방에 항상 두루 하면서도 가고 옴이 없이 色身을 對現하는 것이다. 이는 세간과 더불어 법을 성취함으로써 본받아 배울 게 있음을 밝힌 것이니, 이 한 단락은 여래가 자기의 果法을 들어서 중생을 권해 수행케 한 門이다.
*제2회는 보광명전으로 보광명전이란 顯得(얻은 것을 드러냄)한 보광명지가 報居하는 殿이니, 지혜의 體가 광대하고 한량없기 때문에 과보의 경계도 한량없어서 법계와 두루 동등한 것이다. 경문의 처음에서 진술했듯이 그 대지가 견고하고 금강으로 이루어졌으며, 보배 나무의 행렬과 궁전이나 누각이 이에 해당된다. 모두 다 빛나는 광명으로 법계에 두루 하고 있으니, 이는 지혜의 體가 報居하는 집이 일체처에 두루 하고 일체처가 모두 터럭 안에 있어서 그 처소에 구애받을 수 없음을 밝힌 것이니, 지혜로 두루 관하매 그 집도 또한 다시 시방에 두루 해서 모두가 무한의 경계이다.
이 보광명전에서 10신의 법문을 설한 것은 果를 들어 信을 성취하매 오히려 智果의 보득한 집 안에서 근본부동지불을 설하는 것을 信位로 삼음을 밝힌 것이다. 이는 자기 마음이 부동지불임을 믿고 이것으로 지혜의 體를 삼음을 밝힌 것이니, 마음 밖에 법이 있으면 신심을 성취하지 못하는 것이다. 즉 여래근본지의 집에서 오히려 자기 마음의 분별이 여래의 근본보광명대지혜임을 믿고서 본질적으로 움직임이 없는 것이니, 단지 근본을 미혹해서 망령되이 움직이게 되는 것이다.
*제3회, 수미산 정상에서 10住를 설한 것은 理가 지혜에 계합하니 생멸하는 마음으로 이를 바가 아님을 나타낸 것이다. 가령 대해에 있는 수미산이 높이가 8만 4천 유순이라서 손이나 발로 반연해 미칠 바가 아닌 것은 8만 4천의 塵勞山(번뇌의 산)이 번뇌의 대해에 머물면서 일체법에 사념이 없고 작위가 없으면 곧 번뇌의 바다가 고갈해서 진로선이 문득 일체지의 산을 이루고 번뇌의 바다가 문득 성품의 바다를 성취하지만, 만약 마음을 일으켜 思慮하면, 있는 바의 반연으로 진로산이 더욱 높아지고 번뇌의 바다가 더욱 깊어져서 지혜의 정상에 이를 수 없는 것과 같음을 밝힌 것이다. 이는 定으로 방편을 삼기 때문에 법혜보살이 방편삼매에 들어가 이 법문을 설함을 밝힌 것이니, 반드시 알라. 사념이 없어지면 지혜가 나타나고, 상념이 있으면 곧 미혹이 존재하고, 적멸에 걸리면 지혜가 잠기고, 情이 비면〔虛〕 지혜가 발한다. 이것이 바로 도를 보는 시초요, 부처의 지혜 집안에 태어나는 시초이니, 범부를 벗어나고 세간을 초월하매 天과 같이 자재하면서 지혜산의 정상을 얻음을 나타냄을 기준으로 한 것이며, 또 방편의 定으로 마음을 止滅해 흐트러지지 않는 것이 산의 體가 되기 때문에 艮이 산이 되고 止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10住位에서 처음으로 부처의 지혜 집안에 태어나서 부처가 머무는 곳에 머무는 것이니, 이는 定에 의거해 슬기를 발하는 것이 수미산과 같음을 밝힌 것이다.
*제4회는 야마천궁에서 10행을 설한 것이다. 이 天이 허공에 거처하는 것은 지혜의 법공을 기준으로 행의 體를 삼는 것이니, 이는 곧 세간에 처해서도 오염이 없는 것이다. 또 이 天의 명칭이 時分天임은 보살이 행에 처할 때 근기의 生熟(설익은 것과 성숙한 것)과 時와 非時를 알아서 망령되게 중생을 이롭게 하지 않으며, 또 미혹이 얼마만큼 많아지고 얼마만큼 감소하는지를 알아서 미혹의 증감에 따라 성숙함을 밝힌 것이다. 근기를 알아 중생을 이롭게 하는 것을 시분전이라 칭하고, 법공으로 행을 따르는 것을 空居(허공에 거처함)라 칭함을 나타낸 것이다.
*제5회는 兜率天宮에서 10회향을 설한 것이다. 이 天은 욕계의 중간에 있고, 樂知足天이라 칭하기도 하는데, 이는 회향의 법문이 열반을 탐내지도 않고 생사를 탐내지 않으면서도 늘 생사에 처하고 늘 열반에 처해서 두 성품이 없기에 중도에 처함을 밝힌 것이다. 나머지 네 天은 放逸이니, 색계와 無色界天은 청정을 좋아해서 중도의 뜻에 융화 회통하지 못하며, 비록 他化自在天에서 10地法을 설했지만 이 지위의 중도법으로 10地를 성취해서 수행을 쌓아 功을 이루는 것이다. 10회향법을 설할 때 무릎 위로 광명을 놓는 것은, 거두고 폄의 자재로움이 무릎을 말미암음을 나타낸 것이니, 이는 理智와 大願과 大悲가 시방에 두루 원만하면서 걸림 없이 융화회통함이 10회향의 지위를 말미암지 않음이 없음을 밝힌 것이다. 그리고 10지는 이에 의거한 행으로 쌓아나가 성숙케 하기 때문에 별개의 법이 없는 것이다.
*제6회는 타화자재천궁에서 10지를 설한 것이다. 이는 欲際의 정상에 도달함을 나타낸 것이며, 또 중생에 의거해서 融化하기 때문에 自化가 없음을 나타낸 것이니, 이 때문에 이 天의 처소를 빌려서 他化의 지혜를 나타낸 것이다. 또 이 천의 처소가 마왕 파순의 거처이니, 이는 10地位의 지혜로 心魔를 조복시켜서 대자비의 행을 성취해 성숙시킴을 밝힌 것이다.
*제7회는 제3禪에 있다. 이는 보현행이 원만하게 法悅로 중생을 이롭게 함을 나타낸 것이니, 이 천이 오직 禪悅로만 기쁘게 움직임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제8회는 보광명전(普光明殿)에서 「십정품(十定品)」과 「여래출현품」을 설한 것이다. 이는 부처가 출현해서 닦아 나가는 도의 지극함이 본래의 처소〔本處〕를 여의지 않음을 밝힌 것이며, 한 개의 보광명지를 여의지 않음을 닦아 나감으로 삼음을 밝힌 것이다. 천상(天上)에 오른다고 말한 것은 법의 승진이 원래 한 개 보광명대지혜와 근본 선정〔本定〕의 집을 여의지 않음을 나타낸 것이니, 비록 승진의 행을 닦아서 원만하지만 원래의 근본부동지 중의 보광대용(普光大用)을 옮기지 않음을 밝힌 것이다.
*제9회는 역시 보광명전에서 이세간법(離世間法)을 설한 것이다. 이는 보광명지로 두루 하여 널리 중생을 이롭게 하면서도 온갖 법에 물들지 않는 것을 이세간이라 칭함을 밝힌 것이니, 보광명지를 보현행을 갖추어 항상 세간에 있으면서도 나가지도 않고 들어가지도 않는 것을 이세간이라 칭하기 때문이다. 지혜의 체(體)가 늘 작용하면서도 의지함이 없기 때문에 그 명칭을 이(離)라 하는 것이니, 이는 싫어해서 떠나는〔厭離〕 것이 아니다.
이처럼 3會가 보광명전에서 설해진 것은 행의 因·果와 아울러 보현행의 원만함이 모두 하나의 普光明의 始終도 없고 依住함도 없는 자재로운 대지혜임을 밝힌 것이니, 만약 보리심을 발한 중생이 이 지혜를 보지 못하면 발심이라 칭하지 못하고 이 지혜를 본 자라야 비로소 발심이라 칭하는 것이며, 만약 마음 밖에 부처를 보는 자와 相을 취해서 眞을 구하는 자는 善을 짓더라도 아직은 一切智心을 발했다고 하지 못한다. 경문에서 “일체지승(一切智乘)을 타고서 곧바로 도량에 이른다”고 했으니, 보광명대지혜의 승(乘)을 타고서도 도리어 보광명대지혜의 도량을 벗어나지 않는 것을 지(至:이른다)라 칭하는 것이다. 이는 발심과 필경(畢竟) 이 둘이 다르지 않음을 이른 것이니, 이러한 두 마음 중에서는 선심(先心:발심)이 어려운 것이다. 이는 이 지혜가 믿기 어렵기 때문에 믿음을 얻으면 곧바로 능히 들어감을 밝힌 것이다. 대체로 증발심(證發心:구경의 지위)은 쉽지만 먼저 신발심(信發心:초발심)을 일으키기란 어려운 것이니, 믿음이 지극하면 곧 지위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다만 방편삼매로 나타내면 곧 지혜 경계가 문득 나타나는 것이니, 이 3회(會)가 모두 보광명전에 있는 것은 定의 체용과 시종과 인과와 만행이 똑같이 하나의 지혜임을 밝힌 것이니, 앞에서 서술한 대로이다.
*제10회는 급고독원(給孤獨園)에서 「법계품」을 설한 것이다. 이는 법계가 세간에 양분을 공급함을 여의지 않는다는 뜻을 밝히기 때문이니, 세간에서는 생사(生死)의 원림(園林)이 바로 법계의 체용이란 걸 나타낸 것이다. 이 때문에 여래의 거처인 중각강당(重閣講堂)이 법계를 포함하고 사자좌가 시방에 미치는 것인데, 오직 제도(濟度)에 응하는 자만이 알 뿐 미혹에 처한 자는 깨닫지 못하니 5백 명의 성문과 나머지 중생이 이에 해당된다.
*제11회는 각성동(覺城東)에서 있었다. 문수사리가 모든 대중을 위해 법계를 두루 비추는 수다라문(修多羅門)과 선재동자의 선지식 등을 설하는 것은 문수가 바로 몽매한 이를 이끄는 首長이니 시방의 모든 부처와 일체 중생이 모두 이 법에 의거해서 사수(師首)를 삼음을 밝힌 것이며, 자체성 없는 묘한 슬기의 첫머리가 되기 때문에 곧 보현으로 행의 첫머리를 삼는 것이니, 두 가지의 첫머리가 똑같이 발해서 먼저와 나중이 없는 것이다.
● 광명을 놓는 곳과 의취에는 간략히 승진의 수행을 나타낸 광명이 대략 몇 가지가 있다.
제1회 중 「여래현상품」에서 두 번 광명을 놓으니,
*하나는 치아 사이의 광명을 놓아서 시방의 대중에게 고하여 부처의 성도(成道)를 알게 하고, 대중을 다 모이게 하여 부처의 인과법을 설하는 것이다.
*또 하나는 미간의 호상(毫相)에서 광명을 놓아 시방을 두루 비추니, 그 명칭이 일체보살력지광명조요시방장(一切菩薩力智光明照曜十方藏)3)이다. 시방을 다 비추고 나자 그 광명이 부처의 발 밑 족륜(足輪)으로 들어오는 것은 果를 들어 因을 성취해서 믿음에 들어가게 하는 광명임을 밝힌 것이다. 또 호상에서 불찰미진수의 보살을 내는데 승음(勝音)을 우두머리로 삼는 것은 여래가 행하는 행의 두루 함을 밝힌 것이니, 부처 스스로의 각행(覺行)이 두루 하는 果로써 믿음을 성취케 함을 밝힌 것이다. 그리고 이 광명이 부처의 발 밑 족륜으로 들어가는 것은 이 광명과 10지를 설할 때 미간으로 광명을 놓는 것이 비슷함을 밝힌 것이니, 전자는 믿는 바의 불과이며, 후자는 자기가 수행해서 승진해 얻은 果의 광명이다.
*제2회에서 여래가 두 발 밑의 족륜에서 광명을 놓으니, 이는 보광명전에서 信位를 성취한 광명이다. 이것은 초회 중 발 밑 족륜으로 들어온 광명을 이제 방출함으로써 10신의 果를 성취한 것인데, 10신을 설하는 광명을 밝히기 때문에 발 밑으로 나타내는 것이며, 윤(輪)은 원만함을 나타낸 것이니, 부처의 果德을 설함을 통해 신심을 성취함을 밝힌 것이기 때문에 신심 가운데 불과의 원만함을 믿음을 나타낸 것이다.
*제3회에서 여래가 발가락 끝으로 광명을 놓은 것은 內位에 들어가는 시초와 성도(聖道)에 오르는 처음과 불가에 태어나는 첫머리와 성행(聖行)을 행하는 시초임을 밝힌 것이기 때문이니, 이는 10住位를 설한 광명이 발에서 發하여 성(聖)에 들어가는 시초임을 밝힌 것이다.
*제4회에서 두 발등 위로 광명을 놓은 것은 법공에 의거해 행을 행함을 나타낸 것이니, 이는 10행위를 설한 광명을 밝힘으로써 空에 의거해 행을 일으킴을 밝힌 것이다.
*제5회에서 여래가 무릎 위로 광명을 놓은 것은 10회향의 大願이 理와 事가 서로 참여하고 지혜와 자비가 똑같이 제도하는 것이 마치 사람의 무릎이 구부리고 펴는 것을 말미암는 것과 같음을 나타냄을 밝힌 것이다. 이는 바로 10회향을 설한 광명이니, 영원을 세우고 자비를 일으켜서 생사와 열반에 지혜와 자비가 자재로움을 나타낸 것이다.
*제6회에서는 미간에서 광명을 놓으니 그 이름이 보살력염명(菩薩力焰明)이며, 이 광명이 초회 중 미간에서 놓은 광명으로 그 명칭이 보살력지광명(菩薩力智光明)이다. 이는 인과가 서로 같은 것이니, 처음에 역지(力智)라 한것은 근본지를 나타낸 것이며, 여기서 역염명(力焰明)이라 한것은 功으로부터 근본을 요달해서 능히 세속을 비춤을 나타내기 때문에 그 명칭이 역염명(力焰明)이니, 3승에서 근본지라 칭하는 것과 세속에 반연함을 후득지(後得智)라 칭하는 것과 같다.
이것은 근본지를 요달해서 능히 세속을 비추기 때문에 두 體의 선후가 없음을 밝힌 것이니, 비록 승진하는 지위의 계급을 세우긴 했지만 지혜와 대자비가 다르지 않고 때〔時〕가 다르지 않고 보현행이 다르지 않은 것이다. 총체적으로 변천함이 없는 법이기 때문에 이에 한량없는 지혜를 설하는 것이 모두 작용을 말한 것이지 근본에서 옮기지는 않은 것이니, 지혜로 비추면 볼 수 있고 情으로 보면 곧 미혹한다. 그리하여 大悲門 중에서 세속을 인도하기 때문에 곧 시겁(時劫)과 법이 제각기 나눠진 것이지만, 만약 대지혜로 眞을 잡는다면 시겁이 원래 의지함이나 장단(長短)이 없는 것이니, 이는 총별육상(總別六相)으로 말한 것이다.
*제8회에서 여래가 미간에서 광명을 놓아 문수의 정수리에 붓고, 입 안에서 광명을 놓아 보현의 입에 부은 것은 이지(理智)와 만행으로 하여금 서로 참여케 함으로써 부처의 과덕을 설하게 함을 나타낸 것이다. 문수는 理와 묘한 슬기요, 보현은 지혜와 만행의 작용임을 밝힌 것이니, 그 뜻은 이지(理智)의 묘한 슬기가 공적과 작용이 서로 사무치고 참여해서 불과의 門을 묻고 대답함을 나타낸 것이다. 문수는 여래의 법신이 형체가 없으면서도 정사(正邪)를 잘 결택(決擇)하는 묘한 슬기의 果이며, 보현은 여래의 대지혜가 두루 하여 색신을 대현(對現)함으로써 근기를 알아 그에 따라 세속을 이롭게 하는 行果이니, 일체 모든 부처가 이 두 가지 법을 써서 성불하기 때문이다. 가르침 중 「여래출현품」은 이 두 법을 융화회통하고 사무치게 함으로써 불과의 이지(理智)와 만행(萬行)으로 법계의 원융무애한 문을 성취토록 하기에 방광으로 비추어 서로 문답케 함으로써 나중에 배우는 자로 하여금 법을 보는 것이 쉽고 분명하도록 한 것이다. 이 두 분의 인과가 처음 믿음을 발한 때부터 곧바로 果의 종결에 이르기까지 서로 사무치고 융화하는 것이니, 이지(理智)로써 생각하여 자기 마음의 체용을 비추면 볼 수 있을 것이다. 初會의 불과는 부처가 스스로 성취한 것이며, 이 10지, 11지 이후의 불과는 수행자의 自力으로 성취한 것이니, 문수와 보현의 두 행이 사무침으로써 이지(理智)와 만행이 원만함을 밝힌 것이다.
*제9 「수호광명공덕품」에서 손 안에서 광명을 놓아 악도의 고통을 비추는 것은 도가 원만하매 대자비로 세속을 제접하는 광명을 밝힌 것이다. 이상은 제2회 이래부터는 스스로 수행하는 자의 승진이 종결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일종(一終)의 교말(敎末)이다. 부촉(付囑)과 유통(流通)도 또한 이 「출현품」 안에 있으니, 앞서 밝힌 바와 같다.
*제10은 「법계품」에서 또한 미간으로 광명을 놓는 것이니, 명칭이 3세를 두루 비추는 법계이다. 이는 3세가 모두 一時이기 때문에 총체적으로 법계를 果의 體로 삼음을 밝힌 것이니, 信과 住와 行과 회향(回向)과 10지와 11지로부터 불과까지 모두 법계를 果의 體로 삼아 문수를 법계의 理로 삼고 보현을 법계의 지혜로 삼아 理智의 묘용이 一佛門이 되는 것이다.
이 1門으로 뭇 몽매한 이를 교화하기 위해 두 가지 법으로 나누는 것이니, 만약 근기를 좇고 세속을 따른다면 법문이 다함이 없겠지만, 실다운 理를 논한다면 자체성 없는 가운데 一法을 여의지 않는 것이니, 一과 多에 걸림이 없는 것을 보현이라 칭한다. 처음 동몽(童蒙)을 제접할 때 자체성 없는 理 가운데 정사(正邪)를 묘하게 가려냄을 요달해서 無生의 슬기에 들어가는 것을 문수라 하고 또한 동자 보살이라 칭하며, 능히 고제(苦際)를 함께 하면서 행을 일으켜 중생을 이롭게 하여 부처 가문의 법을 다스리는 것을 보현이라 칭하는 것이며, 두 분의 體가 사무치는 것을 부처라 이름이며, 본래로 자재로움을 법계라 칭하는 것이며, 처음부터 나중까지 사무치는 것이 모두 이 법계가 體가 되지 다시 다른 법이 없다. 이 품은 일체 모든 부처의 인과의 대도(大都)가 되며, 또 온갖 성현이 행하는 大路가 여기서 벗어나지 않으며, 또 자기 마음의 一切智王이 노닐면서 관하는 큰 집〔大宅〕이며, 또 일체 중생이 의지하는 바이기 때문에 그 이름이 법계인 것이다.
●법좌의 體가 마니(摩尼)를 대(臺)로 삼은 것은 本體가 법신의 성품에 더러움이 없는 것으로써 마니의 명칭인 이구보(離垢寶)로 삼음이다. 그 뜻은 불과의 보리가 법신의 무구(無垢)함을 體로 삼으니 佛身과 化身이 지혜의 작용을 과보로 얻음을 기준으로 하기 때문이다. 이는 體에 의거해 지혜의 작용을 일으킴을 밝힌 것으로 마니로써 법좌의 體를 삼은 것이다.
*제2회에서 법좌의 體가 연꽃을 장(藏)으로 삼은 것은, 제2회에서 중생을 교화해 이롭게 함을 기준으로 해서 믿음의 종자를 이루게 함을 나타낸 것이며, 믿음 속에 처해서도 세간에 처한 행이 오염됨이 없음을 나타낸 것이니, 오염됨이 없이 사물을 이롭게 하는 것을 功으로 삼음을 나타내기 때문에 곧 연꽃으로 장(藏)을 삼은 것이다.
*제3회는 제석천의 묘승전(妙勝殿) 위에 있는 보광명장(普光明藏)인 사자좌의 백천(百千) 층급을 안치한 것은 뜻이 믿음으로부터 지위에 들어갈 때 방편의 사념도 없고 작위도 없는 적정삼매(寂靜三昧)로써 하는 것을 안치(安置)라 칭하고, 삼매력으로 여래의 근본 지혜를 현득(顯得)해서 처음으로 불가에 태어나 두려움 없는 슬기〔無畏慧〕를 얻는 것을 보광명장인 사자좌라 칭함을 나타낸 것이다.
장(藏)이란 이 지위가 여래 지혜의 장(藏)에 들어감을 나타낸 것이며, 사자(師子)란 지혜의 두려움 없음을 밝힌 것이며, 보광명(普光明)이란 여래의 근본보광명법계의 대지혜에 계합함을 나타낸 것이며, 백천 층급이란 10주를 닦아 나가는 계급과 세간을 벗어남이 백천 가지 정계(情繫)의 무명을 초월한 것이자 백천 가지 업장을 타파함을 나타낸 것이다. 가령 부처의 과좌(果座:과의 법좌)는 모두 층급을 닦아 나가는 것의 오르고 내림과 깨달음과 미혹의 깊고 얕음과 지혜의 뛰어남과 열등함을 말하지 않는 것이니, 10주의 처음이 또 백천 층급인 것은 지위에 들어가 닦아 나갈 때 업장을 초월하는 분제(分際)를 밝힌 것이다.
*제4회 야마천궁에서 보련화장(寶輦華藏)인 사자좌를 化作한 것은10행위를 설할 때 행이 세간에 처하면서도 집착이 없기 때문에 연꽃으로 나타낸 것이며, 사자는 앞서와 같이 의주석(依主釋)이며, 백만 층급이란 것은 승진이 이전을 넘어서서 업을 초월함이 뛰어나기 때문이며, 법좌를 화작(化作)했다고 말하지 안치(安置)했다고 말하지 않은 것은 여래 지혜에 들어가 지혜로써 행을 따르매 행하는 바의 행업(行業)이 지혜로써 화위(化爲)하는 것이니, 마치 변화와 같기 때문에 안치라 말하지 않은 것과 같으니, 이는 행이 理로부터 化함을 밝힌 것이다.
*제5회 도솔천궁에서 전 위에 마니장(摩尼藏)인 사자좌를 백만억 층급으로 편 것은 10회향이 세간을 벗어난 이지(理智)로 근본 법신에 의거함으로써 세간에 처해서도 더러움이 없고, 근본 불과의 좌체(座體)를 의거해 승진함으로써 오히려 근본에 돌아가기 때문에 설사 회향 방편의 원력으로 그 자비와 지혜를 성취할지라도 법신 자체의 무구(無垢)는 변치 않음을 나타낸 것이다. 자비의 염원을 회향해 융화하고 회통함으로써 체용을 균등케 하기 때문에 법좌를 편다고 말할 뿐 안치나 化作이라 말하지 않은 것이며, 백만억 층급이란 것은 승진이 이전을 넘어서기 때문에 오염과 청정의 두 가지 장애를 없애서 걸림 없는 법계의 대비지(大悲智)를 성취하는 것이다. 비록 10주와 10행에서 5위를 가지런히 닦긴 하지만, 가르침으로 병을 가려내어 앞의 두 지위는 세속을 벗어나는 마음이 뛰어나고 대비심이 낮기 때문에 이 10회향위에서 원력으로 회통 융화하여 지혜와 자비가 처소를 얻음을 밝힌 것이다.
*제6회 타화자재천왕궁에서 다만 마니장전(摩尼藏殿)이라 말하고 법좌의 體를 말하지 않은 것은 뜻이 법좌가 도솔천의 마니좌를 변역(變易)치 않음을 나타낸 것이니, 다만 법성의 더러움 없는 대지혜로 대자비문을 성취해서 중생을 감싸기 때문에 전(殿)이라고만 말할 뿐 법좌를 말하지 않은 것이다. 이는 앞서의 회향법에 의거해 대자비의 전(殿)을 길이 양육함으로써 중생을 감싸 기르는 것이지, 별개의 승진은 없다는 걸 밝힌 것이다.
*제7회는 제3선(禪)에 있다. 이 회상의 법칙과 가르침의 행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에 우선 [보현행품]으로 대략 든 것인데, 그 [보현행품]은 36품에 해당된다. 이 또한 대략 든 것일 뿐 대본(大本)은 오지 않았으니 백만억 게송이 있다.
*제8회와 제9회 두 회상이 똑같이 보광명전에 있는 것은 10신의 마음과 승진의 수행으로 불과에 이르는 것과 [이세간품]에서 보현이 항상 행하는 것과 10定과 10通 등이 모두 보광명의 한 개의 지체(智體)를 여의지 않기 때문에 5위와 10신 등의 닦아 나감을 성취하는 것이니, 모두가 이 지혜에서 벗어나지 않음을 밝힌 것이다. 이 보광명지는 시방의 모든 부처와 일체 중생이 다 함께 공유하고 있지만 모든 부처는 이미 요달했고 중생은 미혹한 것이니, 체용은 하나이지만 미혹과 깨달음은 같지 않은 것이다.
*제10 「법계품」에서 다만 “그 법좌가 법계에 널리 두루 한다”고만 말하고 층급을 말하지 않은 것은 단지 불과의 좌체(座體)가 마니를 體로 삼음을 밝힌 것이니, 초회부터 제5회에 이르기까지의 좌체가 똑같이 마니를 계로 삼은 것은 불과의 體가 같음을 회통하였기 때문이다. 대의(大意)는 지혜로 자비를 행하는 것이 하나의 보광명지와 다르지 않고, 세간에 처해 더러움 없음이 하나의 묘리(妙理) 법신과 다르지 않음이니, 지혜와 법신이 똑같이 하나의 자재로움이 되서 체용이 없으면서도 작위가 없고 가지 않으면서도 이르러서 사물에 응하는 것이니, 이지(理智)로 회통해야 비로소 알 수 있는 것이다. 이상에서 나타낸 뜻은 단지 중생으로 하여금 事를 보고 법을 알게 해서 쉽게 이해하도록 한 것이며, 닦아 나가는 행을 일으키는 데 의혹이 없게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