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십회향품(十廻向品) 12
(17)金剛幢菩薩(금강당보살)의 偈頌(게송)
가. 廻向(회향)의 名(명)
爾時에 金剛幢菩薩이 承佛神力하사 普觀十方하고 卽說頌言하사대
彼諸菩薩摩訶薩이 修過去佛廻向法하며 亦學未來現在世에 一切導師之所行이로다
爾時(이시)에, 그 때에
金剛幢菩薩이 承佛神力(승불신력)하사 普觀十方(보관시방)하고 卽說頌言(즉설송언)하사대
그때 금강당보살이 부처님의 신력을 받들어 시방을 두루 관찰하고 게송으로 말했다.
彼諸菩薩摩訶薩(피제보살마하살)이, 저 모든 보살마하살은
[보통 우리가 성인의 차제를 이야기할 때, 성문ㆍ연각ㆍ보살ㆍ불이라 하는데 화엄경에서는 불 위에 보살마하살이 있는, 성문ㆍ연각ㆍ보살ㆍ불 다시 보살마하살입니다.
보살마하살= 大보살은 사실은 따지고 보면 위대한 중생= 大心凡夫(대심범부)라는 뜻입니다.
마하살타; 보살 = 깨달은 사람. 보리= 깨달음. 살타= 깨달은 중생이라는 뜻으로 위대한 중생이라는 뜻입니다.
부처가 된 뒤에 바로 다시 보살로 나아가서, 보살행으로써 세상을 정화하는 것이 화엄경의 취지입니다.]
[선불교에서 여래선은 보았지만 조사선은 꿈에도 못 보았다고 아주 큰 소리를 칩니다.
그것도 내용을 알아보면 화엄경의 영향을 받은 이야기입니다.]
[보살(菩薩) bodhisattva, bodhisatta)= 부처(깨달은 사람 또는 존재)가 되기 위해 수행하는 사람(초기불교 경전-니까야에서의 정의), 또는 여러 생을 거치며 선업을 닦아 높은 깨달음의 경지에 다다른 위대한 사람을 뜻한다. 특히 대승불교에서 강조되었다. 보리살타 · 보살마하살 · 각유정 등으로도 불린다. 대승불교가 발달하면서 초기불교의 보살의 의미가 변화되었다. 대승불교는 원래 재가(在家)의 신자들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것으로, 종래의 부파불교가 출가수행자(出家修行者)의 독점물이었던 것을 널리 전 불교도의 것으로 만드는 데 목적이 있었다. 부파불교 시대에서 보살이라 하면 전생시대(前生時代)의 고타마 붓다 한 사람만을 지칭하는 것이었는데, 대승불교가 일어난 후로는 모든 사람이 다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입장에서 불교의 수행자 모두가 부처의 후보자로서 보살이라고 칭해지게 되었다.
대승불교에서는 성문승과 연각승의 2승(二乘: 두 가지 탈것, 두 종류의 가르침, 두 종류의 길)에 대하여 이들 2가지 길보다 뛰어난 길로서의 보살승 즉 보살의 길을 포함시켜 3승(三乘: 세 가지 탈것, 세 종류의 가르침, 세 종류의 길)의 교의를 주장하였다. 3승의 교의에서 보살은 보살승의 수행자 즉 대승불교의 수행자를 뜻한다. 이런 취지에서 2승의 수행자인 성문·연각과 비교하여, 대승불교 경전인 《해심밀경(解深密經)》에서는 "미세하고 아주 깊고 통달하기 어려워 범부나 2승은 이해할 수 없는 승의제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을 보살이라 하고 있다.
보살은 보리살타(菩提薩唾)의 줄임말로 보리살타는 산스크리트어 "보디사트바(bodhisattva)'"를 음에 따라 번역한 것이다. 산스크리트어 "보디(bodhi: 보리)"는 깨닫다는 뜻이며 "사트바(sattva)"는 존재 또는 유정(有情)을 뜻한다. 즉 보리살타는 깨달은 존재라는 뜻으로 각유정(覺有情)이라 의역되기도 한다. 유정은 중생이라 불리기도 한다
대승불교에서는 깨달음을 이룬 존재라는 뜻이지만 초기불교에서는 깨달음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이란 뜻이었다.]
修過去佛廻向法(수과거불회향법)하며, 과거 부처님의 회향법을 닦고
亦學未來現在世(역학미래현재세)에 一切導師之所行(일체도사지소행)이로다.
또 미래 현재 세상의 일체도사 행하신 것도 배웠네.
나. 對境廻向(대경회향)
於諸境界得安樂하니 諸佛如來所稱讚이라 廣大光明淸淨眼으로 悉以廻向大聰哲이로다
菩薩身根種種樂이요 眼耳鼻舌亦復然이라 如是無量上妙樂으로 悉以廻向諸最勝이로다
一切世間衆善法과 及諸如來所成就를 於彼悉攝無有餘하야 盡以隨喜益衆生이로다
世間隨喜無量種이라 令此廻向爲衆生하며 人中師子所有樂을 願使群萌悉圓滿이로다
一切國土諸如來의 凡所知見種種樂을 願令衆生皆悉得하야 而爲照世大明燈이로다
菩薩所得勝妙樂을 悉以廻向諸群生하니 雖爲群生故廻向이나 而於廻向無所着이로다
於諸境界得安樂(어제경계득안락)하니, 모든 경계에 안락을 얻으니 [화엄경도 경계일 수가 있습니다.]
諸佛如來所稱讚(제불여래소칭찬)이라. 부처님 여래의 칭찬 받고
廣大光明淸淨眼(광대광명청정안)으로, 광대한 광명 청정한 눈으로
悉以廻向大聰哲(실이회향대총철)이로다. 모두 大聰哲= 큰 총명함에 회향하네. [大聰哲= 부처님과 같은 분]
菩薩身根種種樂(보살신근종종락)이요, 보살의 신근은 갖가지로 안락하고
眼耳鼻舌亦復然(안이비설역부연)이라. 안이비설도 亦復然= 그러하니
如是無量上妙樂(여시무량상묘락)으로, 이처럼 무량하고 상묘한 낙으로
悉以廻向諸最勝(실이회향제최승)이로다. 諸最勝= 모든 수승함(부처님)에 회향하네.
[모든 眼耳鼻舌身의 6경에서 낙을 누리고, 6근에서 낙을 누리는 그런 모든 낙을 모두 부처님께 회향한다.]
一切世間衆善法(일체세간중선법)과, 일체세간 모든 선법과
及諸如來所成就(급제여래소성취)를, 여래가 성취하신 것들
[모든 여래께서 성취한 세상에 있는 좋은 법이란 좋은 법, 모든 것을]
於彼에 悉攝無有餘(어피실섭무유여)하야, 그것을 남김없이 섭수하여
盡以隨喜益衆生(진이수희익중생)이로다. 기꺼이 중생을 이롭게 하네.
世間隨喜無量種(세간수희무량종)이라, 세간을 기쁘게 할 일 여러가지인데
[알량한 중생들의 마음으로 좋아할 꺼리도 세상에 너무너무 많은 그것이 世間隨喜입니다.]
令此廻向爲衆生(영차회향위중생)하며, 이 회향으로 중생 위하게 하여 [전부 중생들을 위해서 회향하며.]
人中師子所有樂(인중사자소유락)을, 인중사자= 부처님이 지니신 낙이
願使群萌悉圓滿(원사군맹실원만)이로다. 群萌= 중생들도 다 원만하기 바라네.
[善根廻向= 내가 좋은 일을 하고, 그 좋은 일한 것을 또 딴 사람에게 한 번 더 회향하는 것입니다.
내가 좋은 일을 해서 나 혼자만 누리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회향한다.]
一切國土諸如來(일체국토제여래)의 일체국토의 모든 여래가
[특정한 석가모니 부처님만을 화엄경에서는 부처님이라 하지 않으니까 일체국토의 모든 여래들이 한 두 분이 아닙니다]
凡所知見種種樂(범소지견종종락)을, 무릇 지견하시는 갖가지 낙을
願令衆生皆悉得(원령중생개실득)하야, 중생들도 다 얻어서
而爲照世大明燈(이위조세대명등)이로다. 세간을 비추는 대명등이 되기 바라네.
[보살이 모든 낙을 중생들에게 회향하면 중생들은 그것을 얻어서 照世大明燈이 되기를 원한다.]
菩薩所得勝妙樂(보살소득승묘락)을, 보살이 얻은 승묘한 낙= 수승하고 미묘한 낙을
悉以廻向諸群生(실이회향제군생)하니, 그로서 모두 중생들에게 회향하고
雖爲群生故廻向(수위군생고회향)이나, 중생을 위해 회향했다 하여
而於廻向無所着(이어회향무소착)이로다. 회향에 집착하는 일이 없네.
[비록 많은 중생을 위해서 짐짓 회향하기는 하지만, 집착하는 바는 없다.
집착이 있다면 그것은 벌써 着相(착상)회향= 相에 집착한 회향이 되기 때문에 無所着= 좋은 일 하긴 하지만 거기에 대한 집착이 없어야 그것이 중도적인 회향이 된다는 뜻입니다.]
다. 增長廻向(증장회향)
菩薩修行此廻向에 興起無量大悲心호대 如佛所修廻向德하야 願我修行悉成滿이로다
如諸最勝所成就한 一切智乘微妙樂과 及我在世之所行과 諸菩薩行無量樂과
示入衆趣安隱樂과 恒守諸根寂靜樂을 悉以廻向諸群生하야 普使修成無上智로다
非身語意卽是業이나 亦不離此而別有니 但以方便滅癡冥하야 如是修成無上智로다
菩薩修行此廻向(보살수행차회향)에, 보살은 이 회향을 수행할 때
興起無量大悲心(흥기무량대비심)호대, 무량한 대비심을 興起= 일으켜
如佛所修廻向德(여불소수회향덕)하야, 부처님 회향공덕 닦으신 것처럼
願我修行悉成滿(원아수행실성만)이로다. 나도= 일체 중생이 수행하여 다 원만히 이루기 원하네.
如諸最勝所成就(여제최승소성취)한, 최승한 이들이 성취하신 바와 같은
一切智乘微妙樂(일체지승미묘락)과, 일체지에 오른 미묘한 낙과
及我在世之所行(급아재세지소행)과, 내가= 일체 중생들이 세상에서 행한
諸菩薩行無量樂(제보살행무량락)과 모든 보살행의 무량한 낙과
示入衆趣安隱樂(시입중취안은락)과, 衆趣= 여러 갈래에 들어가 안은함을 보여주는 낙과
[여러 가지 갈래 = [衆趣= 지옥ㆍ아귀ㆍ축생ㆍ인도ㆍ천도ㆍ아수라에 들어간 보살은 혼자 극락 가는 것을 절대 바라지 않습니다. 화엄사상이 제대로 되면 모든 신도나 승속을 막론하고, 49재 지낼 때 速還娑婆= 빨리 사바세계에 와서 다 못한 일을 성취하고, 보살행을 해서 이 험한 세상을 살만한 세상으로 만들어 주십시오라고 축원해야 사실은 옳습니다.
스님들에게는 速還娑婆하라고 하면서, 일반인들에게는 “극락 가십시오.” 라고 하는 것은, 고쳐져야 할 축원입니다.]
恒守諸根寂靜樂(항수제근적정락)을, 항상 제근을 적정히 지키는 낙을
[諸根= 眼耳鼻舌身意을 항상 잘 지켜서 6경에 빼앗기지 말고 잘 지켜서 寂靜한 樂을 누리는 것]
悉以廻向諸群生(실이회향제군생)하야, 모든 중생에게 다 회향하여
普使修成無上智(보사수성무상지)로다. 널리 무상지= 가장 높은 지혜를 닦아 이루게 하네.
非身語意卽是業(비신어의즉시업)이나, 신어의가 곧 업이 아니로되
[身ㆍ口ㆍ意, 3업으로써 모든 업을 짓지만 그 자체는 업이 아닙니다.
숟가락으로 밥을 떠먹기는 하지만, 숟가락은 밥은 아닙니다.]
亦不離此而別有(역불리차이별유)니 그것을 떠나서 업이 달리 있지 않으니
[또한 이 身口意를 떠나서 따로 業이 있는 것은 아니니까 조심해야 할 것은 身口意입니다.]
但以方便滅癡冥(단이방편멸치명)하야 다만 방편으로 치암을 없애서
如是修成無上智(여시수성무상지)로다. 이렇게 무상지를 닦아 이루네.
[우리 마음의 캄캄한 어리석음을 소멸해서, 이와 같이 無上智를 修成하는 겁니다.
無上智= 위없는 지혜라고 번역하는데, 그것은 사실 틀린 설명입니다. 제대로 하려면 “보다 위가 없는”
더욱 정확하게 번역하면 “가장 높은”이라고 번역하는 것입니다. 가장 높은 지혜를 닦아 이룸이로다.]
라. 積集廻向(적집회향)
菩薩所修諸行業이 積集無量勝功德하야 隨順如來生佛家호대 寂然不亂正廻向이로다
十方一切諸世界에 所有衆生咸攝受하고 悉以善根廻向彼하야 願令具足安隱樂이로다
不爲自身求利益이요 欲令一切悉安樂호대 未曾暫起戱論心하고 但觀諸法空無我로다
菩薩所修諸行業(보살소수제행업)이, 보살이 닦은 모든 행업으로
積集無量勝功德(적집무량승공덕)하야, 한량없이 수승한 공덕을 적집하고
[보살은 보살 업을 짓고 부처는 부처 업을 짓고, 중생은 중생 업을 지으니까 보살의 업은 한량없는 수승한 공덕이 될 수밖에 없는, 참 신기한 도리입니다.
스님들이 스님의 모습으로 어디 가서 무슨 짓을 해도, “스님이 뭘 했다."고 되는 것과 똑 같은 이치입니다.]
隨順如來生佛家(수순여래생불가)호대, 여래를 따라 불가에 태어나
寂然不亂이 正廻向(적연불란정회향)이로다. 적연하고 불란= 어지럽지 아니함으로 바르게 회향하네.
[善根廻向의 궁극은 여래家= 佛家에 태어나는 것이다.
佛戒를 받으면 佛位에 오른다. 부처님 계를 받았으니까 보증을 받은 것입니다.
十方一切諸世界(시방일체제세계)에, 시방 일체의 모든 세계에 있는
所有衆生咸攝受(소유중생함섭수)하고, 모든 중생들을 다 섭수하고
悉以善根廻向彼(실이선근회향피)하야, 선근을 저들에게 회향하여
願令具足安隱樂(원영구족안은락)이로다. 안은한 낙 구족하게 되기를 바라네.
[不昧因果(불매인과) 인과에 昧하지 않는 것, 어둡지 않는 것입니다.
대만의 星雲(성운)스님 법문을 근래에도 TV를 통해서 보면, 그 스님도 인과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기도해서 자기 잘되도록 이야기하는, 그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서 사업이 잘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신심이 증장할 뿐, 사업하고는 관계없다. 사업하고 관계없다면 학생들 진학하고도 관계없고, 치료하는 것도 기도하고 관계없다는 말입니다. 신심은 불어난다. 왜냐? 신심을 심었으니까, 콩 심은데 콩이 나야지, 신심을 심어놓고 돈 나기를 바라면 안 됩니다.]
不爲自身求利益(불위자신구이익)이요, 자신을 위해 이익을 구하지 않고
欲令一切悉安樂(욕영일체실안락)호대, 일체중생을 안락히 하고자
未曾暫起戱論心(미증잠기희론심)하고, 잠시도 희론하는 마음 낸 적 없이
[戱論心=말로 만, 생각으로 만 하는 것, 실제가 아닌 것, 허구적인 어떤 관념을 실재하는 대상처럼 간주하는 마음.]
但觀諸法空無(단관제법공무아)로다. 다만 제법의 공, 무아만을 관하네.
마. 對境善根廻向(대경선근회향). 경계를 대한 선근회향.
十方無量諸最勝의 所見一切眞佛子를 悉以善根廻向彼하야 願使速成無上覺이로다
一切世間含識類를 等心攝取無有餘하야 以我所行諸善業으로 令彼衆生速成佛이로다
無量無邊諸大願이 無上導師所演說이니 願諸佛子皆淸淨하야 隨其心樂悉成滿이로다
普觀十方諸世界하고 悉以功德施於彼하야 願令皆具妙莊嚴하니 菩薩如是學廻向이로다
心不稱量諸二法하고 但恒了達法無二나 諸法若二若不二에 於中畢竟無所着이로다
十方一切諸世間이 悉是衆生想分別이라 於想非想無所得하야 如是了達於諸想이로다
十方無量諸最勝(시방무량제최승)의, 시방에 무량한 최승한 이께서
所見一切眞佛子(소견일체진불자)를, 보신 일체의 진실한 불자들에게
悉以善根廻向彼(실이선근회향피)하야, 선근을 저들에게 다 회향하여
願使速成無上覺(원사속성무상각)이로다. 속히 무상각 이루게 되기를 바라네.
一切世間含識類(일체세간함식류)를,일체세간의 함식들= 중생 종류들을
等心攝取無有餘(등심섭취무유여)하야, 평등한 마음으로 남김없이 섭취= 다 거둬들여서
以我所行諸善業(이아소행제선업)으로, 내가 행한 모든 선업으로
令彼衆生速成佛(영피중생속성불)이로다. 저 중생들을 속히 성불하게 함이로다.
無量無邊諸大願(무량무변제대원)이, 무량무변= 한량없고 가이 없는 모든 큰 서원들은
無上導師所演說(무상도사소연설)이니, 무상도사=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바라
願諸佛子皆淸淨(원제불자개청정)하야, 모든 불자들이 다 청정= 성취하고 완성하여,
隨其心樂悉成滿(수기심락실성만)이로다. 그가 바라는 대로 다 이루기를 바라네.
普觀十方諸世界(보관시방제세계)하고, 널리 시방 모든 세계를 관찰하고
悉以功德施於彼(실이공덕시어피)하야, 저들= 중생들에게 공덕을 베풀어
願令皆具妙莊嚴(원영개구묘장엄)하니, 모두가 묘장엄 구조하기를 원하니
菩薩如是學廻向(보살여시학회향)이로다. 보살은 이와 같이 회향을 배우네. [보살이 회향하는 법을 이렇게 배운다.]
心不稱量諸二法(심불칭량제이법)하고, 마음으로 모든 두 법을 저울질하지 않고
[二法= 너ㆍ나. 주관ㆍ객관을 마음으로 稱量 상대적인 법을 헤아리고 따지지 않고]
但恒了達法無二(단항요달법무이)나, 다만 둘 없는 법에 항상 요달하여
[현상은 다양하지만, 법은 하나지 둘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諸法若二若不二(제법약이약불이)에, 제법이 둘이거나 둘 아니거나
於中畢竟無所着(어중필경무소착)이로다. 그 안에 결국 집착하는 일 없네.
[法性圓融無二相. 法과 性, 법은 현상이니까 아주 다양합니다.
그 다양한 것을 한 마디로 “두 가지다.”고 표현합니다. 두 가지에서 천 가지 만 가지로 펼쳐지니나 성품, 본성은 하나다.
법은 여러 가지인데, 둘이 없음을 了達하나, 그 가운데 畢竟에 집착하는 바가 없다.
꿰뚫고 보면 둘이다 해도 맞고, 둘이 아니라 천만이라 해도걸리지 않는 것으로, 둘이면서 하나이고ㆍ하나면서 둘인,
一이 곧 일체이고ㆍ일체가 곧 一인 이치를 알고 보면 거기에 집착할 바가 없다.]
[법성(法性)은 공(空)과 무아(無我)에 의지하여 나타나는 진여(眞如)이다
원효(元曉: 617~686)는 『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에서 부처이든 부처가 없는 무성이든 법성은 항상 변함이 없다고 보며, 이러한 법성을 결정성이라고 표현하였다. 즉 일체의 존재에 항상 변함없이 존재하는 결정적 성품인데, 그것은 다름 아닌 공이며 깨달음이라고 명언한다. 법성에 결정성을 부여한 것은 『금강삼매경』의 영향을 받은 원효만의 법성 이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에서는 법성이 존재의 본성으로서 열반과 동일시된다. 마음의 진실이 법성이라고도 하는데, 여기서 원효가 말하는 마음은 불심(佛心)이다. 『열반종요(涅槃宗要)』에서는 법성이 상주법이며, 성문이나 연각 등의 이승이나 육도에 윤회하는 일체의 대상과 오역의 죄를 저지른 인간에게도 평등하게 내재한다고 명언한다. 뿐만 아니라 모든 사물에도 보편적으로 평등하게 존재한다고 본다. 원효는 진여법성이란 표현을 사용하여 법성을 진여와 동일시하였으며, 이러한 법성의 평등함을 보고서야 나의 몸이 법신과 다르지 않음을 깨달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즉 법성은 본래 갖추어져 있지만, 그것을 볼 수 있을 때만 의미가 있다는 실천적 해석을 덧붙임을 알 수 있다.
신라 승려 표원은 『화엄경문의요결문답(華嚴經文義要決問答)』에서 모든 법이 혼융하여 걸림 없는 원인의 하나로서 법성연기를 들고 있다. 원효는 이 때 법성은 ‘본성을 벗어난’ 의미를 지닌다고 본다. 즉 일체 존재의 본성에 대한 집착을 벗어남으로써 걸림 없는 존재 세계가 성립한다는 것이다. 동아시아 불교의 독특한 개념인 법성연기가 원효에서 출발한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이후 이 법성연기라는 개념은 법장과 법장의 제자 혜원 그리고 종밀 등이 화엄종에서 사용한다. 법장의 『화엄교분기(華嚴敎分記)』에 따르면, 존재들 간에 걸림 없는 연기가 성립하는 것은 존재가 본성이 없음을 기본으로 하며, 이것이 법성연기이다. 이로 인해 존재들 간에 모순이 없고, 존재의 능력도 서로 장애가 없이 발휘된다고 설명한다. 이러한 사태를 범부들이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성연기는 일체 모든 곳에 공통되는 사태라고 주장한다. 이와 같이 법장이 사용하는 법성연기는 원효가 사용한 개념의 기반 아래 전개된다.
원효와 동시대에 활약한 의상(義湘: 625~702)의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 게송 ‘법성게’는 존재의 본성을 노래하는 시이다. 의상은 법성은 원융하여 두 가지 양상이 없다고 한다. 그리고 그 게송을 스스로 해석하여 분별이 없는 것을 양상으로 한다. 평상시 그냥 중도에 있으므로 분별이 없는 것이 아님이 없다고 명언한다. 이와 같이 법성을 중도와 연결시키는 것은 이미 중국에서 지의(智顗)가 강조하던 정의이지만, 일제 존재가 특별한 작위 없이 ‘평상시 그냥’ 중도에 속있다는 의미로 해석한 것이 의상만의 특징이다. 즉, 일상생활이 모두 법성의 모습으로서 중도에 속해있다는 의미가 된다.]
十方一切諸世間(시방일체제세간)이 시방 일체의 모든 세간이
悉是衆生想分別(실시중생상분별)이라. 다 중생들 생각의 분별이라
於想에 非想無所得(어상비상무소득)하야, 생각이다 생각 아니다에 얻을 것 없나니
[중생들이 생각하는 그 생각에서 얻을 바가 없어서,]
如是了達於諸想(여시요달어제상)이로다. 이렇게 모든 생각에 요달하네.
[생각이라는 것을 그렇게 꿰뚫어 아는 것이다.]
바. 利益(이익)
彼諸菩薩身淨已에 則意淸淨無瑕穢하며 語業已淨無諸過하니 當知意淨無所着이로다
彼諸菩薩身淨已(피제보살신정이)에, 저 모든 보살의 몸이 청정해지면, [身口意 3업을 이야기합니다.]
則意淸淨無瑕穢(즉의청정무하예)하며, 곧 뜻도 瑕穢= 티, 때가 없이 청정해지고
語業已淨無諸過(어업이정무제과)하니, 말의 업도 청정하여 허물이 없나니
[몸이 청정해지고 뜻이 청정해서 때가 없으니까 말의 業이 이미 깨끗해서 모든 허물이 없으니,]
當知意淨無所着(당지의정무소착)이로다. 뜻 청정= 텅빔이 집착 없는 것인 줄 마땅히 알라.
사. 果位(과위)
一心正念過去佛하고 亦憶未來諸導師와 及以現在天人尊하야 悉學於其所說法이로다
三世一切諸如來가 智慧明達心無碍하사대 爲欲利益衆生故로 廻向菩提集衆業이로다
一心正念過去佛(일심정념과거불)하고, 일심으로 과거불을 정념하고
亦憶未來諸導師(역억미래제도사)와, 또 미래의 모든 도사도 기억하며
及以現在天人尊(급이현재천인존)하야, 현재의 천인존과 함께하여
悉學於其에 所說法(실학어기소설법)이로다. 그 설하신 법을 다 배우네. [부처님= 佛ㆍ導師ㆍ天人尊]
三世一切諸如來(삼세일체제여래)가, 삼세의 모든 여래는
智慧明達心無碍(지혜명달심무애)하사대, 지혜가 명달하고 마음은 무애하거늘
爲欲利益衆生故(위욕이익중생고)로, 중생들에게 이익되게 하고자
廻向菩提集衆業(회향보리집중업)이로다. 보리에 회향하여 모든 업을 모으시나니
[보리에 회향해서 衆業을 모으는 도다. → 깨달음에 회향해서 온갖 깨달음의 업을 모은다.]
아. 結歎(결탄)
彼第一慧廣大慧와 不虛妄慧無倒慧와 平等實慧淸淨慧와 最勝慧者如是說이로다
彼第一慧며 廣大慧(피제일혜광대혜)와, 저 第一慧= 제일가는 지혜, 廣大慧= 광대한 지혜,
不虛妄한 慧며 無倒慧(불허망혜무도혜)와, 허망하지 않은 지혜, 無倒慧= 전도됨이 없는 지혜
平等實慧淸淨慧(평등실혜청정혜)와, 평등한 지혜며 진실한 혜며 청정한 혜,
最勝慧者如是說(최승혜자여시설)이로다. 최승한 혜의 이가 말씀하셨네.
[앞의 第一廻向, 勝廻向, 最勝廻向, 上廻向, 無上廻向과 無等廻向 등의 19가지 회향이 지혜로 전환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