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십무진장품(十無盡藏品) 6
(9) 未來施
云何爲菩薩의 未來施오 此菩薩이 聞未來諸佛之所修行하고 了達非有하야 不取於相하며
不別樂往生諸佛國土하야 不味不着호대 亦不生厭이라 不以善根으로 廻向於彼하며
亦不於彼에 而退善根하야 常勤修行하야 未曾廢捨하고 但欲因彼境界하야 攝取衆生일새
爲說眞實하야 令成熟佛法이니라
然此法者는 非有處所며 非無處所며 非內非外며 非近非遠이니라
復作是念호대 若法非有인댄 不可不捨라하나니 是名未來施니라
云何爲菩薩의 未來施(미래시)오? 어떠한 것이 보살의 미래시인가?
此菩薩이, 이 보살이
聞未來諸佛之所修行(문미래제불지소수행)하고, 이 보살은 미래 부처님들의 수행하신 일을 듣고서도 [법화경에도 사리불은 미래에 몇 억 겁 지난 뒤에 어떻게ㆍ어떻게 할 것이라는 이야기가 많이 있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듣고,]
了達非有(요달비유)하야, 있는 것이 아닌 줄을 알아서 不取於相(불취어상)하며, 상을 취하지 않고
不別樂往生諸佛國土(불별락왕생제불국토)하야, 불국토에 왕생하기를 유달리 좋아하지도 않아서, 즐겨하지도 않고
不味不着(불미불착)호대, 음미하지도 집착하지도 않고 亦不生厭(역불생염)이라. 싫어하지도 않으며,
不以善根(불이선근)으로, 선근으로 廻向於彼(회향어피)하며, 거기에 회향하지도 않고
亦不於彼(역불어피)에 또한 거기에서 而退善根(이퇴선근)하야, 선근이 물러나지도 않으며,
常勤修行(상근수행)하야, 항상 힘써 수행하기를 未曾廢捨(미증폐사)하고, 일찍이 그친 적 없이
但欲因彼境界(단욕인피경계)하야, 다만 그 경계로 인해 攝取衆生(섭취중생)일새. 중생들을 섭취하고자
爲說眞實(위설진실)하야, 진실을 설하여 令成熟佛法(영성숙불법)이니라. 불법을 성숙하게 함이라,
然此法者(연차법자)는, 그러나 이 법이란 非有處所(비유처소)며, 처소가 있지 않고
非無處所(비무처소)며, 처소가 없지도 않으며, 非內非外(비내비외)며, 안도 아니고 밖도 아니며
非近非遠(비근비원)이니라.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것이라서 復作是念(부작시념)호대, 다시 생각하기를,
若法非有(약법비유)인댄, '만일 법이 있는 것이 아니라면 不可不捨(불가불사)라하나니, 버리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니,
是名未來施니라. 이것을 미래시라 합니다.
[있는 것이 아니라면 법에 대한 관념은 불가불 버려야 되는 것이 미래시다. 존재의 실상이라고 하는 말을 굳이 쓰지는 않으면서도 모든 존재의 실상. 그리고 모든 법은 中道(중도)의 원리로 존재한다는 것이 화엄경 전편에 아주 쫙 깔렸습니다.
中道라고 하는 것이란, 과거법이나, 과거 부처님법이라든지 미래의 부처님법들도 전부 중생을 성숙 교화하기 위한 하나의 조건일 뿐, 그것이 꼭 있다고 집착해도 안 되고, 그렇다고 없다고 해도 안 된다.
있다고 해도 안 되면 그러면 없는 것이라고 해야 세속의 논리인데요.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불교를 이해하려면 그런 中道논리에 밝아야 됩니다. 예를 들어서 남자ㆍ여자 또 속인ㆍ출가인을 보더라도, 남자도 여자가 하는 일은 얼마든지 할 수 있어야 됩니다. 또 여자도 마찬가지입니다. 거기에 서로가 걸리지 않아야 됩니다.
집착해서 치우친 소견을 가지고 “이래야 된다.”고 고집하지 않는 것, 그리고 원융 자재한 것, 상황 따라서 남자일 수도 있고 여자일 수도 있어야 그것이 존재의 실상입니다. 예를 들어서 분필도 잠자는 학생을 깨우는 무기도 되지만 또 학생을 가르치고 지혜를 열어주는 판서하는 좋은 도구도 되는 겁니다. 이렇게 원융 자재해야 되는 겁니다.
일체사, 일체법이 다 그렇게 존재하고 있고, 그렇게 존재하고 있음으로 우리는 그렇게 융통자재하게 살아야한다고 하는 것이 화엄경의 논리이고, 그것이 中道입니다.
성철스님법문 녹음 들어 보면 “사람들이 나보고 중도광이라고 하는데...” 하시면서 아주 기뻐합니다. 그것이 사람들이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중도광이라고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면서 중도를 논리적으로 내세우는데요.
雙遮雙照 遮照同時(쌍차쌍조차조동시). 그 스님이 中道에 대해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용어입니다. 쌍으로 부정하고, 쌍으로 긍정하고, 그리고 부정과 긍정을 동시에 함께 한다. 그러니까 남자를 두고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니다. 또 여자를 두고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니다. 그러면서 남자이고 여자이고요. 여자와 남자를 동시에 표현하는 것.
그렇게 해야 세상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안 그러고 고집만 부리면 모든 존재의 실상을 제대로 모르는 것입니다.]
[[중도(中道) 팔정도의 실천을 통해 고와 낙의 양면을 떠나 심신의 조화를 얻는 길을 의미하는 불교교리.
우리 나라에서는 중도의 여러 가지 설 가운데 원시불교의 중도설, 중관파(中觀派)의 팔부중도설(八不中道說), 천태종의 삼제원융관(三諦圓融觀)에 의한 중도가 널리 채택되었다. 원시불교의 중도설은 불교의 가장 근본 입장이 되고 있다.
석가모니는 29세에 출가하여 35세에 깨달음을 얻어서 부처가 될 때까지 6년 동안을 대부분 가혹한 고행의 도를 닦았다. 그러나 그 고행도 몸을 괴롭게 하는 것일 뿐 참된 인생문제의 해결책은 될 수 없었다.
출가 전의 왕자로서 물질적으로 풍족하여 즐거움에 찬 생활을 보내고 있었으나 그러한 물질적 풍족함만으로는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석가모니는 출가 전의 낙행(樂行)도 출가 후의 고행도 모두 한편에 치우친 극단이라고 하였다. 이것을 버리고 고와 낙의 양면을 떠나서 심신(心身)의 조화를 얻는 중도에 설 때 비로소 진실한 깨달음의 도가 있다는 것을 스스로 체험에 의해서 자각한 것이다. 성도(成道) 후 함께 고행을 한 5인의 비구들에게 가장 먼저 설교한 것도 중도였다.
중도는 팔정도라고 하는 구체적인 실천에 의해서 지탱되는 준엄한 도이며, 여기서는 나태·번뇌·노여움·어리석음으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어떤 것에 집착하려고 하는 어떠한 일변도 모두 버려야 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참다운 진리가 모든 집착이나 분별의 경지를 떠난 무소득(無所得)의 상태에 있음을 밝힌 것이다.
이 세상을 이루고 있는 연기(緣起)의 이법(理法)이 생(生)·멸(滅)·단(斷:끊어짐)·상(常:항상함)·일(一:같음)·이(異:다름)·거(去)·내(來)의 여덟 가지 잘못된 견해(八邪)를 떠난 것임을 파악할 때 참다운 공(空)의 진리를 체득할 수 있고, 팔사가 떨어져 무소득의 바른 견해에 머무르는 것을 팔부중도라 한다.
여기에서 팔부(八不)는 생멸(生滅) 등의 팔사를 부정하는 불생(不生)·불멸(不滅)·부단(不斷)·불상(不常)·불일(不一)·불이(不異)·불거(不去)·불래(不來)를 가리키는 것이다. 이에 의하여 모든 사집(邪執)이 파멸되어 있는 그대로의 실상(實相)의 도리가 나타난다고 한다.
천태종에서는 삼제원융관의 중도에 의하여 모든 존재가 제법실상(諸法實相)임을 밝히고 있다. 삼제는 진제(眞諦)로서의 공(空), 속제(俗諦)인 가(假), 비유비공(非有非空)의 진리인 중(中)의 셋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삼제설은 중국의 지의(智顗)가 처음으로 주창한 뒤 천태종의 근본교설이 되었으며, 그 뒤 우리 나라 천태종의 근본 학설로 정착되었다. 원래 이 삼제설이 주창된 까닭은 제법의 실상이 중도에 있음을 밝히는 데 있으며, 공·가·중이 서로 원융(圓融)한 것을 천명하기 위한 것이다.
삼제 가운데 공제는 진리의 측면에서 이 세상을 본 것으로, 진리의 측면에서 보면 이 세상은 인연따라 생겨난 것이기 때문에 공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가제는 세속의 측면에서 이 세상을 본 것으로, 이 세상의 고정불변한 듯한 모든 것이 실제는 거짓과 헛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밝히는 것이다.
중제는 중도제일의(中道第一義)의 입장에서 실상을 본 것으로, 제법의 실상을 공이나 가의 일면으로 관찰할 것이 아니라 중도의 절대적인 입장에 서서 진리를 관찰하는 것을 말한다. 이와 같은 삼제의 설은 교학적으로 매우 발전하여 쉽게 파악되는 것이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세속의 입장에 속하는 가(假)의 상태에서 살아가고 있다. 이 가의 세계는 무상(無常)하고 괴롭고 부자유스럽고 번뇌가 많은 세계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상태를 긍정하고 그 거짓된 모습을 파헤쳐 공임을 깨달을 때 중도가 그곳에서 온전하게 모습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즉, 가의 상태에서 진제의 세계인 공으로 몰입한 뒤 다시 이 세속으로 나올 때 중도의 삶을 살 수 있음을 뜻한다.
그러므로 공과 가는 서로 진(眞)과 속(俗)이라는 상대적인 상황에 있고, 중은 진과 속을 가장 분명하게 이어주는 것이므로, 삼제는 어느 하나가 빠진 상태에서는 성립되지 않는다. 따라서, 이 셋의 관계를 삼제원융(三諦圓融)이라고 한다.
이 삼제원융을 관하는 것을 삼제원융관(三諦圓融觀)이라고 하며, 중생의 일심이 곧 삼제를 모두 포함하고 있음을 관하는 것을 일심삼관(一心三觀)이라고 한다.
신라의 고승 원효(元曉)는 불교의 계율을 중도에 계합시켜 그 참뜻을 밝혔다.
그는 ≪범망경보살계본사기 梵網經菩薩戒本私記≫에서 “비유비무(非有非無)는 극단을 여읜 중도의 계를 나타낸 말이다. 계의 바탕(體)은 인연을 따라 생긴 것이지만, 인연의 본체를 추구해 들어가면 계의 자성(自性)을 얻을 수 없으므로 비유(非有)이며, 계가 비록 비유라고 하지만 인연을 따라 생겨나 토끼 뿔이 없는 것처럼 아주 없는 것은 아니므로 비무(非無)라 한 것이다.”라고 하여 계를 비유비무의 중도에 입각하여 설명하였다.
이어서 원효는 “만일 계의 업을 말하면 막는다는 데 계의 뜻이 있는 것이며, 그 막아야 할 대상은 곧 죄(罪)이다. 계는 결국 인연을 따라 생기지만 그 인연의 본체를 추구하여 깊이 들여다 보면 절대적인 존재가 있는 것이 아니므로 얻어질 수 있는 실재(實在)의 객관은 없다.”고 하였으며, 한 걸음 나아가 계를 중도에 계합시키는 원리를 다음과 같이 전개하였다.
“마음자리를 두고 논하자면 뿌리인 자성은 본래 청정한 것이므로 죄가 될 요소가 따라붙을 수 없다. 따라서, 그릇됨을 막는다고 하지만 실은 절대적이고 객관화된 본질적 표준인 죄성(罪性)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절대적인 죄성은 마음의 근본 바탕에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또한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라는 이것 속에 계가 중도에 계합하는 이치가 있는 것이다.”
원효가 그의 여러 저술을 통하여 화쟁사상을 펼치고 무애자재한 이론으로 모든 경전을 올바로 풀이할 수 있었던 것도 철두철미하게 중도를 통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파(破)할 것도 없고 파하지 않을 것도 없으며, 세울 것도 없고 세우지 않을 것도 없으니, 이른바 이치가 없는 것이 지극한 이치요(無理之至理) 그렇지 않는 것이 크게 그렇다(不然之大然).”라고 천명한 ≪금강삼매경론 金剛三昧經論≫의 서문을 비롯한 수많은 글에서, 원효는 원융무애한 절대의 원리에 입각하여 성(性)·상(相)·공(空)·유(有)·일(一)·이(異) 등의 모든 상대적인 개념을 회통시킴으로써 중도의 사상체계를 세웠던 것이다.
고려의 의천(義天) 또한 “진리는 말이나 형상이 없지만 말이나 형상을 여읜 것도 아니다. 말이나 형상을 여의면 뒤집힌 미혹(迷惑)이요, 말과 형상을 집착하면 참으로 미(迷)한 것이다.”, “교학자(敎學者)는 안을 버리고 밖에서 구하며, 습선인(習禪人)은 인연법(因緣法)을 모르고 안으로만 밝혀 편향 집착한다.”고 하여 중도로써 수행할 것과 중도의 중요성을 누누히 밝혀 주고 있다. - 다움백과]]
(10) 現在施(현재시)
云何爲菩薩의 現在施오 此菩薩이 聞四天王衆天과 三十三天과夜摩天과
兜率陀天과 化樂天과 他化自在天과 梵天에 梵身天과 梵輔天과 梵衆天과 大梵天과 光天에
少光天과 無量光天과 光音天과 淨天에 少淨天과 無量淨天과 徧淨天과 廣天에 少廣天과
無量廣天과 廣果天과 無煩天과 無熱天과 善見天과 善現天과 色究竟天하며
乃至聞聲聞緣覺의 具足功德이라도 聞已에 其心이 不迷不沒하며 不聚不散하고 但觀諸行이
如夢不實하야 無有貪着이로대 爲令衆生으로 捨離惡趣하야 心無分別하며 修菩薩道하야
成就佛法하야 而爲開演하나니 是名現在施니라
云何爲菩薩의 現在施오? 어떠한 것이 보살의 현재시인가?
此菩薩이, 이 보살이 聞(문), 四天王衆天(사천왕중천)과, 三十三天(삼십삼천)과 夜摩天(야마천)과
兜率陀天(도솔타천)과 化樂天(화락천)과 他化自在天(타화자재천)과 梵天(범천)에
梵身天(범신천)과 梵輔天(범보천)과 梵衆天(범중천)과 大梵天(대범천)과 光天(광천)에 少光天과
無量光天(무량광천)과 光音天(광음천)과 淨天(정천)에 少淨天(소정천)과 無量淨天(무량정천)과
遍淨天(변정천)과 廣天(광천)에 少廣天(소광천)과,
[아마 정천에 소정천이 있고, 광천에 소광천이 있어서 토를 이렇게 상세하게 달아 놓은 듯합니다.]
無量廣天과 廣果天(광과천)과 無煩天(무번천)과 無熱天(무열천)과 善見天(선견천)과
善現天(선현천)과 色究竟天(색구경천)을 聞= 듣거나,
乃至聞聲聞緣覺(내지문성문연각)의 具足功德(구족공덕)이라도, 나아가 성문ㆍ연각의 구족한 공덕에 대해 들어도,
聞已에 其心(문이기심)이 듣고 나서는 不迷不沒(불미불몰)하며, 마음이 미혹하거나 빠지지 않고
不聚不散(불취불산)하고, 모이지도 흩어지지도 않으며, [굳이 이것을 모으려고 하지도 않고 흩으려고 하지도 않고]
但觀諸行(단관제행)이 如夢不實(여몽부실)하야, 다만 모든 행이 꿈 같아서 실답지 않음을 관찰하고
無有貪着(무유탐착)이로대, 탐착하는 일이 없이 爲令衆生(위령중생)으로, 중생들로 하여금
捨離惡趣(사리악취)하야, 나쁜 갈래를 떠나고 心無分別(심무분별)하며, 마음에 분별함이 없이
修菩薩道(수보살도)하야, 보살의 도를 닦게하여 成就佛法(성취불법)하야, 불법을 성취하도록 하기 위해
而爲開演(이위개연)하나니, 연설하나니, 是名現在施니라. 이것을 현재시라 합니다.
(11) 究竟施(구경시) 마지막 최고의 보시
云何爲菩薩의 究竟施오 佛子야 此菩薩이 假使有無量衆生이 或有無眼하며
或有無耳하며 或無鼻舌과 及以手足이라 來至其所하야 告菩薩言호대 我身이 薄祜하야
諸根殘缺이로소니 惟願仁慈는 以善方便으로 捨己所有하야 令我具足케하라하면
菩薩이 聞之하고 卽便施與호대 假使由此하야 經阿僧祗劫토록 諸根不具라도
亦不心生一念悔惜하고 但自觀身이 從初入胎로 不淨微形과 胞段諸根이 生老病死하며
又觀此身이 無有眞實하고 無有慚愧하야 非賢聖物이라 臭穢不潔이며 骨節相持요 血肉所塗며 九孔常流에
人所惡賤이라하야 作是觀已하고 不生一念愛着之心하며 復作是念호대 此身이 危脆하야 無有堅固하니
我今云何而生戀着이리오 應以施彼하야 充滿其願하고 如我所作하야 以此開導一切衆生하야
令於身心에 不生貪愛하야 悉得成就淸淨智身이라하나니
是名究竟施니 是爲菩薩摩訶薩의 第六 施藏이니라
云何爲菩薩의 究竟施오? 어떠한 것이 보살의 구경시인가? 佛子야 此菩薩이, 불자여 이 보살이
假使有無量衆生(가사유무량중생)이 가사 (무량 중생들이) 或有無眼(혹유무안)하며, 혹 어떤 이는 눈이 없고
或有無耳(혹유무이)하며, 혹은 귀가 없고, 或無鼻舌(혹무비설)과, 혹은 코와 혀와,
及以手足(급이수족)이라. 그리고 수족이 없는 無量衆生=무량 중생들이, 來至其所(내지기소)하야, 찾아 와서
告菩薩言(고보살언)호대, 보살에게 말하기를, 我身(아신)이, 내 몸은 薄祜(박호)하야, 박복하여
諸根이 殘缺(제근잔결)이로소니, 육근이 온전치 못하니 惟願仁慈(유원인자)는, 원컨대 인자께서는
以善方便(이선방편)으로, 선한 방편으로 捨己所有(사기소유)하야, 당신 것을 버려서, 내게 주어서
令我具足(영아구족)케하라하면, 내가 온전해지게 하소서' 하면 [당신 것을 버려서, 나로 하여금 구족케 하라고 하면]
菩薩이 聞之(보살문지)하고, 보살이 듣고 卽便施與(즉편시여)호대, 곧 보시하여 주고 ,
假使由此(가사유차)하야, 가령 그로 말미암아 經阿僧祗劫(경아승지겁)토록, 아승지겁을 지내도록
諸根이 不具(제근불구)라도, 육근이 온전치 못해지더라도,
亦不心生一念悔惜(역불심생일념회석)하고, 한 순간이라도 후회하거나 애석해 하지 않고
但自觀身(단자관신)이, 다만 '몸이란 從初入胎(종초입태)로, 처음 태에 들 때부터
不淨微形(부정미형)과, 부정하고 미미한 것이었고 胞段諸根(포단제근)이, 세포층이나 육근은
生老病死(생로병사)하며, 생노병사하는 것이다.'라고 觀= 관하고
又觀(우관), 또 此身이 無有眞實(차신무유진실)하고, '이 몸은 진실하지도 않고
無有慚愧(무유참괴)하야, 부끄러운 줄도 모르는 非賢聖物(비현성물)이라. 성현의 물건이 아니라서
臭穢不潔(취예불결)이며, 더러운 냄새를 풍기고 불결하며 骨節相持(골절상지)요. 뼈마디가 서로 지탱하고 있으며
血肉所塗(혈육소도)며, 피와 살이 발라지고 [피와 고기 덩어리로써 얼기설기 묶여있는 것이 우리 육신이다.]
九孔常流(구공상류)에, 아홉 구멍에서는
人所惡賤(인소오천)이라하야, 사람의 더러운 것들이 常流= 항상 흐르는 것이다' 하고 觀= 관하여
作是觀已(작시관이)하고, 이렇게 관한 끝에
不生一念愛着之心(불생일념애착지심)하며,한 순간에도 애착하는 마음을 내지 않으며,
復作是念(부작시념)호대, 또 생각하기를, 此身이 危脆(차신위취)하야, '이 몸은 위태롭고 연약하여 [脆 연할 취]
無有堅固(무유견고)하니, 견고한 것이 아닌데
我今云何而生戀着(아금운하이생련착)이리오? 내가 지금 무엇 때문에 연연하랴,
(我)應以施彼(응이시피)하야, 마땅히 그에게 보시하여 充滿其願(충만기원)하고, 그의 소원을 만족시키고
如我所作(여아소작)하야, 나와 같이 행하도록 以此開導一切衆生(이차개도일체중생)하야, 일체중생을 개도하며
令於身心(영어신심)에 不生貪愛(불생탐애)하야, 몸과 마음에 애착하지 않게 해서
悉得成就淸淨智身(실득성취청정지신)이라하나니, 청정한 지혜의 몸을 성취하게 하리라' 하나니,
是名究竟施(시명구경시)니, 이것을 구경시라 하고
是爲菩薩摩訶薩의 第六 施藏(시장)이니라. 이것이 보살마하살의 제6 시장입니다.
[[喫甘愛養(끽감애양)하여도 此身(차신)은 定壞(정괴)요. 아무리 잘 먹여주고 잘 입혀주고 보약을 먹여주고, 이래서 몸뚱이를 위해준다 하더라도, 이 몸뚱이는 결정코 무너지는 것이다.
着柔守護(착유수호)하여도 아무리 비단옷을 입히고 부드러운 것을 입혀서 이 몸뚱이를 수호한다 하더라도,
命必有終(명필유종)이니라. 명대로 살다가 죽는 것이지 잘 입는다고 명이 오래가는 것이 아니다.
着柔守護(착유수호)하여도 부드러운 것을 입혀서 보호한다 하더라도,
命必有終(명필유종)이니라. 명은 반드시 마침이 있는 것이다.
助響巖穴(조향암혈)로 메아리를 돕는 바윗굴로,
爲念佛堂(위염불당)하고 염불당을 삼고,
哀鳴鴨鳥(애명압조)로 슬피 우는 기러기 떼를 더불어,
爲歡心友(위환심우)니라. 환희심 가운데 벗을 삼으라
모든 애욕과 구질구질한데 걸리지 않고, 탈속하게 지내라는 얘기입니다.
시간을 유용하게 쓰지 못하는 것을 한가롭고 부질없다 하고, 슬피 우는 기러기로 환희스런 마음으로 벗을 삼고, 메아리를 돕는 바윗굴로, 염불당을 삼아서, 항상 부처님을 念하면 바로 생각이 집중된 곳이거든요. 입으로 읊조리는 것은 염불이 아니라 口佛(구불)입니다. 항상 생각이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번뇌 망상에 끌려가지 않는, 일심삼매 가운데 집중되는 것을 念佛堂(염불당)이라고 합니다.- 부처님 미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