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아(眞我)
<진아(眞我)-참나에 대한 이해>
'진아(眞我)', ‘참나’란 초기경전에는 나오지 않은 말이다. 대승불교에서 생산된 용어로 그 의미를 크게 두 가지로 나눠볼 수 있다.
하나는 ‘상락아정(常樂我淨)’이라는 열반사덕(涅槃四德)의 하나로서 열반의 체(體)가 변하지 않고 진실하며, 그 작용이 자유자재하므로 ‘아(我)’라 한 것을 말한다. 즉, 열반사덕인 상(常)ㆍ락(樂)ㆍ아(我)ㆍ정(淨)에서 ‘아(我)’는 망상에 집착하는 아집(我執)의 나[가아(假我)]를 버린 참나(진아)를 의미한다.
따라서 우선 여기서 논의하는 ‘진아’는 ‘상락아정(常樂我淨)’에서의 ‘아(我)’를 의미한다. 인간의 마음은 가아(假我)인 에고(ego)에 길들여진 상태에서 가아인 에고가 주인노릇 하고 있는 현실을 보게 된다. 진아인 양심이 한 번씩 작동할 때마다 가아를 자신으로 알고 있는 상태에서 반성하기도 하고 새롭게 결심하기도 하는데, 이럴 경우의 진아는 아트만(atman) 계열이 아닌 도덕적인 개념으로서의 아(我)이다. 그러나 여전히 가아인 에고가 주인인 상태이기 때문에 그때 뿐이다. 찰나에 가아로 돌아서버린다.
“따라서 진아란 망상(내 생각)에 집착하는(我執) 가아를 버리는 수행의 길이며, 곧 열반은 번뇌의 더러움을 벗어나 청정한 자성을 얻음을 말한다.
‘가짜 나’는 과거(전생)로부터 지금까지 배우고 익힌 것(알음알이, 지식, 고정관념)을 내 것으로 삼고, 이것을 통해 모든 것을 분별하고, 판단해서 행동으로 옮기기 때문에 자기중심적(이기적)이다. 이 가아는 진아가 알음알이, 지식, 고정관념, 업(業) 등의 옷을 입은 것이다. ‘진짜 나’는 옷을 입지 않고 있기 때문에 모양(相)이 없어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고, ‘가짜 나’는 그동안 배우고 익힌 것(業)으로 옷을 만들어 입고 있으므로 사람마다 서로 다른 모양으로 나타나는데, 이것을 사람들은 자기 자신(진짜 나)이라고 착각한다.
결국 ‘진아’와 ‘가아’는 몸은 한 몸이지만 작용만 서로 다를 뿐이기 때문에 서로 분리될 수가 없으며, ‘가아’의 모습도 ‘진아’의 작용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진아’를 인식하지 못하고 ‘가아’가 행한 모든 행위 ― 가아의 작용은 자아의식[이기적인 아집(我執)]이 개임됨으로써 삶의 찌꺼기[업(業)]가 돼 남게 되고, 그 업은 윤회의 주체가 된다.
그러나 ‘진아(도덕적인)’의 작용으로 한 행위는 자아의식[아상(我相), 무명(無明)]과 취착(取着)을 여읜 상태에서 모두를 이익 되게 한 행위이므로 행하기는 했으나 행한 바가 없는 행이어서 삶의 찌꺼기가 전혀 남지 않기 때문에 윤회가 없다. 이것은 마치 새가 허공을 날았으나 그 자취가 남지 않는 것과 같다.
진아(眞我)와 가아(假我)는 늘 함께하면서 가아를 통해 진아(참나)가 작용을 하기 때문에 가아가 하는 모든 것은 진아(참나)의 다른 모습이다. 따라서 가아가 원리를 깨닫지 못해 망념으로 어리석은 생각을 하면 진아(참나)는 어리석은 모습으로 드러나고 가아가 원리를 깨닫는 수행을 통해 지혜를 얻으면 지혜를 얻은 만큼 비례해서 지혜로운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이유로 깨달음의 대상은 명상(삼매)을 통해 ‘진아(참나)’를 만나고 늘 진아와 함께하는 것(편안함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원리를 체득함으로써 진아(참나)가 늘 지혜롭게 작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원리를 깨닫지 못하면 아무리 삼매에 들었다 할지라도 지혜가 작용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러한 수행은 잘못된 수행이다.“ - 혜산
따라서 진아를 인식론적인 ‘참 자아의식’으로 생각하지 않고 존재론적으로 생각하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야 한다. 자아(自我)란 생각의 덩어리에 불과하다. 의식의 덩어리, 환상의 덩어리에 불과한 의식은 허망한 그림자와 같다.
그런데 우리는 오온(五蘊)을 ‘나’라고 믿고, 온 인생을 그곳에 다 쏟아 붇는다. 이는 잘못된 자아의식, 이기적인 자아의식이며, 탐욕, 분노, 고집, 집착, 그리고 자기중심적 생각이 만들어낸 결과이다. 이러한 자아의식을 고정관념 또는 아상(我相, atta)이라 한다.
그런데 아상(我相)이든, 이에 대립되는 무아(無我)이든 그것을 존재론적으로 파악하지 않고 인식론적인 의식으로 파악할 경우, 이기적인 자아의식을 바꿀 수가 있다. 그래야 해탈이 가능하다. 수행을 통해 의식을 바꾸어버리면, 해탈하게 된다는 말이다. 해탈한 그 맑고 청정한 의식은 영원하다. 이 영원한 의식이 바로 부처님 마음이요, 참 자아의식(참나)이다.
그런데 ‘진아(眞我)’에 대한 또 하나의 견해가 있다. 그것은 외도(外道)들이 고정불변의 실체라고 고집하는 나[我-아상(我相)-atman]를 지칭하는 것이다. 중국에서 노장사상(老莊思想)에 연계해서 개발되고 주장된 진아(眞我), 불성(佛性), 여래(如來) 등을 일컫는다.
「이러한 진아(眞我)는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며, 스스로 작용한다. 스스로 존재하므로 불생불멸하며, 스스로 작용하므로 심은 대로 거두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주장에 문제가 있다. 이럴 경우의 진아(眞我-참나)가 브라만의 아트만(atman)과 무엇이 다르냐 하는 것이다.
동아시아의 대승불교가 궁지에 몰리는 것이 바로 이런 경우의 진아(진아-참나)를 두고 하는 말이다. 덩달아 같은 선상에 있는 불성(佛性), 여래장(如來藏), 일심(一心),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까지도 문제가 되는 것이다. 중국에서 개발되고 주장된 이 문제를 우리가 일방적으로 떠안고 전전긍긍해서는 안 될 것 같다. 이념적으로든 교의의 측면으로든 이 문제를 시원히 해결하지 않고는 한국불교의 위상이 자꾸 어려워질 것이다.
즉, 진아(眞我), 불성(佛性), 여래장(如來藏)이라는 것이 석가모니 부처님이 말씀하신 무아사상이 아닌 힌두교의 아트만(atman)과 같다는 것이다. 석가모니께서 설하신 ‘무아(無我)’는 진아, 불성이 아니란 말이다. 즉, 석가모니께서는 몸도 물질일 뿐이고 마음이나 정신 등 그 어느 것도 실재하는 것이 없다고 하셨다. ‘참나’고 ‘가,짜 나’고 ‘나’ 자체가 없다고 하셨다. 만상(萬象)은 조건에 의해서 끝없이 생성되고 소멸되고 변하는 것일 뿐, 어떤 고정불변하는 ‘참나’가 있어서 이 몸이 죽고 썩어지고 나면 그 ’참나‘가 지옥에 가거나 다른 사람의 몸을 입고 태어나 또 어떻게 살고 하는 그런 연속성 자체를 부정하셨다. 따라서 이런 ’진아(참나)‘는 부처님 가르침에 어긋나는 외도라는 주장이다.
부처님께서 정신ㆍ물질적인 현상은 조건발생이요, 그래서 연이생(緣已生)이요, 찰나생 찰나멸하는 것이라고 하셨다. 불교에서는 이것을 법이라고 한다. 법은 연이생이고 찰나생이며 연이멸(緣已滅)이고 찰나멸이다. 이런 법을 부정하면 외도가 된다. 불교에서 말하는 ‘존재’라는 것은 제법이 조건생ㆍ조건멸 하면서 흘러가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고정불변하는 실체가 없으며 무아라는 것이다.
따라서 진아, 불성은 비불교, 반불교 사상이라는 것이다. 일체 중생이 본성 혹은 불성, 진아라고 하는 것을 감추고 있다는데, 결과적으로 그것이 힌두교의 아트만(atman)과 동일한 개념이라는 것이다. 한국불교를 지배하는 사상은 불성사상인데, 불성, 진아, ‘참나’사상 자체가 반불교사상이라면 심각한 문제이다.
하지만 여기에 또 반론이 있다.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불성은 공성(空性)을 뜻하며, 그것은 무아(無我)요, 평등(平等)이요, 중도(中道)를 뜻하는 것으로, 그 내용은 자비(慈悲)이다. 그리고 이것은 인과법칙이 적용된다. 단순하게 있다(有) 없다(無)를 떠난 인연에 의해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그 자체가 바로 공성(空性)인 것이다. 한 차원 높이면 진여불성, 진아가 공성이자 불교 근본교의의 핵심임에 틀림이 없다는 주장이다.
초기불교의 무아사상(無我思想)이 반야사상에서는 공성(空性)으로 전환되고, 후기 대승불교에 들어와서는 공성은 불성(佛性)으로 인격화된다. 그리고 중국 선종에 와서 불성사상은 무심(無心)과 평상심(平常心)의 조사(祖師) 가풍으로 자리 잡는다.
헌데 부처님은 결코 존재론을 설하시지 않았다. 존재론은 결국 ‘나’를 찾는 것이기 때문에 존재의 근원을 찾는 수행이 될 수밖에 없다. 이렇게 존재의 근원을 찾다 보면 결국 “이 세상은 영원한가?”라든가 “나는 과거세에 있었을까?” 등으로 의심하게 된다.
이런 의심을 부처님은 번뇌의 온상으로 보셨다. 부처님은 존재의 근원을 찾는 것에 대해, “정신을 쓰지 말아야 할 것들에 정신을 쓰고, 정신을 써야 할 것들에 정신을 쓰지 않음으로써, 아직 생겨나지 않은 번뇌가 생겨나고, 이미 생겨난 번뇌가 성장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연기의 가르침이 자아(自我)니 진아(眞我)니 주인공이니 하는 존재론적인 실체를 상정하고 그것을 찾아들어가는 것쯤으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 흔히 여래장(如來藏)이나 진여(眞如), 불성(佛性), ‘참나(眞我)’ 등을 논하면서 자칫 존재론적 논리로 빠지곤 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 어떤 것이든 존재론적인 실체로 이해한다면 그것은 불교가 아니다. 존재론적인 실체는 어떤 경우라도 부처님 법에 정면으로 위배하는 것임을 명심해야 하겠다.
특히 대승불교는 무아론 연기설을 생명으로 한다. 반야ㆍ중관의 어디에도 마음을 실체시하고 진아를 설한 부분이 없다. 유식도 삼성(三性)과 삼무성(三無性)의 구조로 알음알이와 마음의 허구성을 철저하게 밝히고 있지, 어디에도 마음을 실체시하지 않았다. 심지어 여래장 계열의 <열반경>에서도 12연기가 불성이라고 밝히고 있다. 연기ㆍ무아를 바탕 하지 않은 불성은 외도의 아트만설이 되고 말기 때문에 <열반경>에서도 연기가 바로 불성이라고 밝히는 것이다. 대승불교의 꽃이라는 <화엄경>도 중중무진연기(重重無盡緣起)를 상징화법으로 드러내고 있다.
초기불교와 아비담마 불교는 해탈ㆍ열반을 강조한다. 해탈ㆍ열반은 그러나 결코 세우지 못하는 것이다. 해탈ㆍ열반은 그것을 실현할 때 드러나는 것이다. 그리고 초기경전들과 아비담마에서는 해탈을 실현하는 세 가지 관문을 설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유위법의 「무상ㆍ고ㆍ무아」이다. 무상ㆍ고ㆍ무아 셋 중 하나에라도 투철할 때 유위의 세계에 대해서 염오하고 이욕 해서 해탈을 실현하고 그 때 체득되는 경지를 열반이라고 한다. 그래서 「무상ㆍ고ㆍ무아」를 해탈의 세 가지 관문이라고 못 박고 있다. 유위의 현상에 대한 「무상ㆍ고ㆍ무아」 외에는 모두 개념(산냐/sañña 혹은 빤냣띠/Pannatti)일 뿐이라고 초기경들과 아비담마는 확정하고 있다.
그러므로 자아(自我)니 진아(眞我)니 불변하는 마음이니 하는 것은 모두 개념적인 것일 뿐, 실체가 없다. 특히 한국불교의 소의경전인 <금강경>은 아상ㆍ인상ㆍ중생상ㆍ수자상으로 대표되는 이러한 산냐(sañña)를 척파할 것을 철저히 강조한다. 이처럼 자아니 진인(眞人)이니 영혼이니 하는 이러한 개념적인 것을 먼저 상정하고 그것을 깨치고 그것과 하나 되고 하는 것은 모두 관념 놀음, 산냐 놀음일 뿐이라고 초기경들과 아비담마와 대승의 <금강경>과 유식까지도 그렇게 강조하고 있다. 이것이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이다.
한국불교의 소의경전인 <금강경>에는 부처님이 깨달았다고 할 만한 그 어떤 법(法)도 존재하지 않는다, 정해진 불변하는 법이란 없다고 거듭 강조하고 있다. 깨달음이라는 정해진 법, 그리고 위없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 라는 정해진 법이 있지 않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사를 초월한 마음이나 진아가 있다고 하면, 그것은 대승불교가 아니고 힌두교의 교의에 빠져버린 것이다.
따라서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진아’는 힌두교의 아트만(atman)과는 다르다. 영식(靈識-깨끗하고 신령스런 마음)이 독로(獨露-전체를 드러내는 것)한 상태를 진아라고 부른다. 아상(我相)이 떨어져나간, 영식이 독로한 무아, 무심의 경계는 하나의 본래심이 오롯이 드러난 경지로서 공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따라서 이름도 모양도 없는 그 자리는 어디까지나 부처님 근본 가르침을 전제하고 있는 그 어떠한 고정된 실체를 인정하지 않기에 무유정법(無有定法)이다.
따라서 『불성(佛性)과 여래장(如來藏)을 성향(disposition) 또는 가능성(potential)으로 이해해야 한다. 무상(無常)과 무아(無我) 그리고 연기(緣起)와 공(空)의 가르침인 불교 안에서 불성이나 여래장이 어떤 영구불변의 고정된 본질 또는 자성으로 이해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말하는 성향(性向) 또는 가능성(可能性)은 기능적 속성의 일종으로 이해해야 된다. 그리고 성향이나 가능성은 기능적 속성으로 이해되고, 그 기능은 존재 세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만들어 낸 개념 또는 단어에 불과하다고 봐야 한다. 다시 말해 성향이나 가능성은 그 자체로 세계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고정불변의 속성이 아니라 우리가 가진 개념이나 단어로서 이해해야 한다는 말이다.
일부 초기불교 연구자들과 비판불교론자들이 비(非)불교적이라고 주장하는, 여래장 사상으로부터 비롯된 동아시아 대승불교의 불성(佛性)사상을 모든 유정물이 가지고 있는 어떤 고정불변한 본성 또는 자성(自性)으로 보면 안 된다. 다만 불성을 ‘깨달을 수 있는 가능성 또는 성향’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불성’과 ‘여래장’이라는 개념에 해당되는 직접적인 대상이 존재세계에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불성과 여래장은 단지 가능성과 성향일 뿐이다.
선문(禪門)에서 가르쳐 온 ‘참나’와 ‘참마음’의 존재와 그 성격에 대해서도 철학적으로 많은 논란이 있어 왔다. 중국에서 불교 도입 초기에 중국식으로 불교를 이해하기 위해 사용한 도교(道敎)의 체(體)와 용(用)의 개념 때문에 동아시아 대승불교에 많은 혼란이 있었고 그 혼란의 자취가 지금도 여러 곳에 남아 있다.
그러나 이제 참나와 참마음을 어떤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체(實體 substance) 또는 속성들의 존재 기반이 되는 어떤 기체(基體 substratum)로 간주하기를 그만둘 때가 됐다. 독립적 존재로서의 실체는 불교에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자연과학뿐 아니라 평범한 일상의 상식에 의해 봐도 조건에 의해 생멸하지 않는 그런 독립적 존재자는 없다.
특히 현대 양자물리학의 입장에서 볼 때, 모든 대상이 소립자들로 돼있고 각 소립자들도 에너지와 다른 소립자들의 관계 속에서만 그 존재를 이야기할 수 있음은 오늘날의 상식이다.
존재자는 기체가 없는 속성들의 집합으로 이해되며, 나아가 각 속성들도 다른 속성들과의 관계로부터만, 즉 연기의 관점에서만 그 존재가 이해된다.
힌두교의 아트만(atman)이나 브라흐만(brahman), 또 서양종교의 영혼(soul)과 같은 실체 또는 기체의 존재를 신앙으로 믿고 받아들일 수는 있겠지만, 연기로 존재세계를 이해하는 불교나 21세기 자연과학의 관점에서 실체나 기체의 존재로 더 이상 이야기할 수가 없다. 따라서 불성, 여래장, 진아(참나) 등을 어떤 고정된 본성을 가진 실체가 아니라 다양한 의식 상태들을 그때그때 가리키는 편리한 이름으로서, 다만 유명론적(唯名論的)으로만 존재할 뿐이라고 이해해야 연기론에 걸리지 않는다.
‘참나’와 ‘참마음’의 개념에 실재성(reality)을 부과해서 참나와 참마음을 실체로 받아들이는 것은 실체화 또는 실체화(reification)의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오류는 선문의 가르침을 일부 초기불교 연구자들 및 비판불교론자들의 논점에 취약하게 만들 수밖에 없다.
그래서 참나와 참마음을 어떤 고정된 본성을 가진 실체가 아니라 다양한 의식 상태들을 그때그때 가리키는 편리한 이름으로서, 즉 이차 지시어(二次指示語)로서만 받아들여야 한다.
이와 같이 참나와 참마음을 해석하면 참나와 참마음이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실체성을 인정할 필요가 없고, 또 아트만이나 영혼이 가지고 있다는 것과 같은 실재성을 부여할 이유도 없다.
그리고 참나와 참마음이 가리키는 다양한 의식의 상태들은 모두 연기에 의해 생멸하며 자성(自性)이 없이 공(空)하기 때문에, 선문의 참나와 참마음에 대한 가르침이 불교의 다른 학파들 안에도 자연스럽게 수용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참나와 참마음이라는 개념은, 그것에서 실체성이나 형이상학적 실재성을 제거하기만 하면, 대승과 선불교의 내용을 더욱 풍부하게 하면서도 그 가르침을 더 효과적으로 전해 줄 수 있는 좋은 방편적 도구가 될 수 있다.
이렇게 해석하면 형이상학적 교리에 있어서도 대승과 선문의 전통에서 가르치는 불성과 여래장, 그리고 참나와 참마음이 모두 붓다의 무아(無我)와 연기(緣起) 및 공(空)의 가르침과 같은 연장선상에 있다고 하겠다.
거듭 말하지만, 불성, 여래장 및 참나와 참마음을 실체(實體)나 형이상학적 실재(實在)로 보면 안 되고, 단지 개념이나 이름으로만 봐야 한다.
또한 남전(南傳)불교와 북전(北傳)불교를 모두 붓다의 일관적인 가르침으로 이해하는 이러한 해석이 원효 이래 한국 불교의 이상으로 여겨져 온 회통불교(會通佛敎)를 구현하는데 일조(一助)할 것으로 기대한다.
결론은 이렇다. 불셩, 여래장, 참나, 참마음을 어떤 고정된 본성을 가진 실체가 아니라 다양한 의식 상태들을 그때그때 가리키는 편리한 이름으로서, 즉 이차 지시어로서만 받아들여야 한다고 하겠다.』- 홍창성
--------------------------------성불하십시오.
작성자 아미산(이덕호)
**천부경 구절에 나오는 "본심(本心)은 본(本) 태양(太陽)이니 앙명인(昻明人)은 중(中)하고 천지(天地)와 일(─)하여서"란 내용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하겠습니다.
이곳은 사람이 살아가야할 도리와 몸과 마음을 닦아 꾸준히 수행해서 모두가 건강하게 편안히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공부하는 정진의 공간입니다.
여기서 본심(本心)이란? 본래의 자신을 나타내는 진아(眞我)의 상태로 참 나를 의미하는 것이며, 이것은 본래 세상만물의 본질(本質)을 이루는 근본(根本) 기(氣)로 작용해서 물질(物質)의 본성(本性)을 이루는 것입니다.
참 나인 진아(眞我)는 창조신의 본자리인 대우주의 진공상태로 이루어진 ◯무극(無極)과 같이 기(氣)가 있으면서도 없고 없으면서도 있게 존재(存在)하는 것입니다.
세상만물은 모두 안(眼) 이(耳) 비(鼻) 설(舌) 신(身) 의(意)에 의해 그 느낌이 반응(反應)해서, 이때에야 헝클어진 마음이 수많은 허상(虛像)과 같이 나타나는 현상(現狀)을 의식(意識)할 수 있기 때문에, 비로써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만물은 각각 그 존재를 구성하는 새로운 인자로 화해서 새롭게 세상에 태어나면 점점 자라나게 되어서 세월이 유수같이 흘러가면 누구나 몸이 늙어져서 차츰차츰 쇄약 해지므로 결국은 병들어 죽게 마련인 것입니다. 그러면 그 근본 실체(實體)를 이루었던 혼백은 모두가 본래 왔던 그 근본자리인 하늘과 땅으로 언제나 변함없이 그냥 그대로의 상태로 완벽하게 되돌아가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만물은 이와 같이 인연이 있는 새로운 사물로 다시 태어나서 생장해서 노쇠하여 병사하는 윤회작용을 끝도 없이 반복한다 해도 결코 그 근본 바탕을 이루는 참 기(氣)는 조금도 변(變)하지를 않는 것입니다.
모든 사물을 이룬 근본 바탕은 결코 움직이지를 않는 것이어서, 참마음을 나타내는 진아(眞我) 역시 조금도 변하지를 않는 것이어서 절대 부동(不動)한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만물 중에서 인간들이 그 모습과 본성이 창조신(創造神)과 가장 가까워서 매우 지혜롭고 도덕적인 품성을 지니고 있는 것은 모두가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진아(眞我)를 이루는 참 기(氣)를 가장 옹글게 불어넣어서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창조신은 우리들에게 진아(眞我)를 이루는 근본 기(根本 氣)를 후박(厚薄)과 청탁(淸濁)과 선악(善惡)의 개념이 따로 없이, 아주 평등(平等)하고 균등(均等)하게 넣어주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은 누구나 그 본성이 좋고 나쁜 사람이 따로 없으며 본래 잘나고 못난 사람도 없고, 깨달거나 깨닫지 못한 사람까지도 결코 없는 것입니다.
때 묻고 어두운 삶을 살아가는 중생(衆生)과 깨끗해서 밝은 삶을 살아가는 부처라 불리는 불(佛)이 본래 서로 다르지를 않는 것이기 때문에, 중생(衆生)이 곧 부처인 것이고 부처가 곧 중생(衆生)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각자 판단(判斷)해서 말하는 것들은 모두 그 자신(自身)의 안(眼) 이(耳) 비(鼻) 설(舌) 신(身) 의(意)에 의해서 비춰진 허상(虛象)만을 보고서, 갖가지 고저장단(高低長短)과 그 가치(價値)를 평가(平價)해서 그저 나타내고 있는 현상에 불과한 것입니다.
세상에 펼쳐진 모든 삼라만상(森羅萬象)중에 오직 근본마음을 이룬 진아(眞我)만이 진정(眞正)한 부처가 되는 것이기 때문에, 진정한 마음이 곧 부처인 것이므로 심(心) 즉(卽) 시(是) 불(佛)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현상은 사실 자신의 마음속에 비춰진 허상에 불과한 것이어서, 실제로 우리들의 마음과 몸에 일어나서 느껴지는 수많은 고통과 병까지도 결코 실체가 있으면서도 없는 환상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에, 이것들은 항상 마음속으로 느끼지를 않는다면 결코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먼저 자기 자신의 참 나인 진아(眞我)를 깨달아서 진정한 밝은 마음을 얻어야만 갖가지 수많은 번뇌를 떨쳐낼 수가 있기 때문에, 이로 인해 발생되는 수많은 고통을 쉽게 멸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들은 이제부터라도 항상 꾸준한 정신수행을 통해서 진정한 참 나를 찾아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중정(中正)의 도(道)를 바르게 이루어서, 급기야 밝고 지혜로운 품성을 지닐 수 있는 크게 밝은 사람인 환인이 될 수 있도록 꾸준히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 정신공부를 실천하는 많은 사람들이 밝은 마음을 쉽게 찾지를 못하고 헤매고 있는 것은 모두 이들이 너무 목적을 이루고자하는 욕심이 지나쳐서 가슴속 깊이 자리하고 있는 참마음이 밖으로 드러나지를 못하고 점점 더 깊이 숨어버리기 때문입니다.
누구나의 가슴속에 지니고 있는 진아(眞我)의 참 모습은 본래 아주 현(玄)하면서도 매우 밝은 것이나, 더욱더 각자의 마음속 깊은 곳으로 파고들어서 잘 드러내 보이지를 않기 때문에, 번뇌가 점점 쌓일수록 자신의 참마음을 더욱 느낄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은 점점 참마음을 찾기가 힘이 들어서 갈수록 더욱 컴컴한 어둠의 공간을 헤매게 되기 때문에, 세월이 흐를수록 계속 번민이 쌓여서 매우 힘든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욕심을 부려서 더욱 많이 취하려는 집착에서 되도록 완전히 벗어날 수 있도록 자기 자신이 정신(精神)을 집중해서 부단하게 노력해야만 비로써 진아(眞我)의 본자리가 밝게 드러나 보여서 쉽게 접근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누구나 이러한 참마음을 얻기 위해서는 조식(調息)을 실시하고 정신수양(精神修養)을 통해서 정신을 집중할 수 있도록 더욱더 몸과 마음을 단련해야 되는 것입니다.
옛날부터 많은 사람들은 이런 행을 실천하는 일이 아주 힘든 일이라고 생각해서 이런 수행을 실천하는 사람들을 수도인(修道人)이라 부르며 매우 존경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사람들이 이러한 수도(修道)를 통하여 진정(眞正)한 참 마음인 진아(眞我)를 찾게 된다면? 마음과 행동이 양(陽)과 음(陰)의 극(剋)에 치우치지 않는 중정(中正)의 도(道)를 이루어서 조화로운 생활을 살아갈 수가 있기 때문에, 이때에 이르러야 비로써 바른 지혜(智慧)가 자라 나와 세상의 갖가지 이치(理致)를 깨달을 수 있는 능력(能力)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인간의 참마음인 본심(本心)은 본래 태양(太陽)과 같이 크게 밝은 것이기 때문에, 아주 대명(大明)하여 매우 밝게 비치는 것이므로 크게 대환(大桓)한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많은 사람들이 마음이 밝지를 못해서 매우 무명(無明)한 이유는? 사람들이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재물과 명예와 권력과 같은 사사로운 이득을 취하려고 무리하게 힘을 쓰기 때문에, 양(陽)과 음(陰)의 욕심(慾心)에 크게 사로잡혀서 본래 가지고 있던 밝은 마음을 크게 잃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욕심(慾心)을 많이 가진 자(者)를 대단히 밝은 사람이라고 칭(稱)해서 오히려 이들을 크게 떠받들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런 자(者)들은 대부분 자신만을 위한 탐욕(貪慾)에 크게 사로잡혀서 이기주의적인 욕심을 가득 부리므로, 수단(手段)과 방법(方法)을 가리지를 않고 무자비하게 행동해서 타인의 갖고 있는 모든 것을 더욱 많이 탈취하려고 노력하는 편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자신이 갖고 있는 명예(名譽)와 물질(物質)을 서로 균등히 나누려하지를 않기 때문에, 서로 간에 화합(和合)을 이루지를 못해서 결국 수많은 반대 세력을 유발하여 서로가 더욱 크게 대립(對立)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을 더욱 곤경에 빠트려서 매우 힘든 삶을 살아가게 만드는 아주 악랄한 불순세력으로서, 이들은 매우 어둡고 엉큼한 흑심(黑心)을 지닌 악인(惡人)에 불과해서 결코 존경할 수 없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또한 이와 반대로 선(善)하고 후(厚)하며 청(靑)한 사람을 과거 우리 조상들은 매우 크게 존경하였는데, 이런 사람들은 자신을 기준으로 삼아서 자기보다 못한 사람을 아주 어리석다고 비하(卑下)하기가 매우 쉽습니다. 자신의 심신이 매우 고달플 때는 자신보다 바르지 않은 사람들이 잘되는 것을 매우 시기하기가 쉬워서 이들을 크게 비평(批評)해서 반대하게 되고, 자신의 뜻을 이루지 못한 것을 하늘에 탓해서 무고한 신을 아주 원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들의 마음속에는 교묘히 꾸며서 속이려는 마음이 매우 많아서, 어리석은 사람들을 혹세무민(惑世誣民)하는 일을 유발하고, 자신의 뜻에 맞지 않거나 반대하면 이들을 이단이나 사탄이라고 모함해서 매우 경계(警戒)를 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무고한 천신(天神)을 팔아서 자신의 이익을 챙기려하고,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서로 편을 갈라 대립하게 만들어서 사회질서와 화합을 깨치기 때문에, 결국 세상만물까지도 매우 어려운 고통 속에 빠지게 만드는 소인배에 불과한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정으로 마음이 크게 밝은 사람은? 밝은 마음인 양심(陽心)도 없고 어두운 마음인 음심(陰心)도 없어서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도록 마음에 중심(中心)을 유지해서 완전한 중정(中正)의 상태를 이루므로 항상 매우 밝은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밝은 사람은 마음이 선(善)하지도 않고 악(惡)하지도 않아서 착하지도 않고 청(靑)하지도 않고 탁(濁)하지도 않아서 깨끗하지도 않고 더럽지도 않으며, 후(厚)하지도 않고 박(薄)하지도 않아서 너그럽지도 않고 옹졸하지도 않는 순수한 마음을 지니고 살아가고 있는 아주 평범한 우리들 서민들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욱 밝은 사람은 먼저 촉감(觸感)으로 느껴서 생각하는 단순하고 어리석은 마음을 끊으므로 금촉(禁觸)하고, 지극(至極)히 하나로 집중(集中)해서 마음이 감동(感動) 될 수 있도록 지감(至感)하는 생활을 실천합니다.
숨을 고르게 쉬어서 사기(邪氣)에 저촉(抵觸)되는 일이 없게 예방할 수 있는 조식(調息)을 행하므로 수시로 몸과 마음을 단련해서 항상 맑은 정신(精神)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밝은 사람은 몸을 건강하게 단련해서 신강(身康)하게 만들고, 마음을 평안(平安)하게 유지해서 심평(心平)하게 만들며, 기(氣)를 고르게 단련해서 몸과 마음을 편안하게 유지해서 안정시킬 수 있도록 기화(氣和)하고, 정기(精氣)를 낭비하지 않고 잘 보존할 수 있도록 보정(保精)하고 있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밝은 사람은 본심을 깨달아 통성(通性)하므로 참 나인 진아(眞我)를 찾고, 지명(知命)하여 창조신의 참뜻을 깨달아서 행하며, 합력(合力)해서 힘을 적당히 길러서 지니고, 남을 넓게 이해해서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여유 있는 마음을 갖고 살아갑니다.
밝은 사람은 누구에게나 올바른 행동(行動)을 실천할 수 있도록 어진 마음을 길러서 적당한 덕(德)을 갖으며, 똑똑해서 뛰어나지도 않고 무지(無智)하여 어리석지도 않는 올바른 마음과 지식(智識)을 터득해서 바르게 사용할 수 있는 적당한 지혜(智慧)를 갖고 있어야만, 진정(眞正)으로 밝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밝은 사람은? 천지(天地)의 운행(運行)과 기후변화(氣候變化)의 상태를 잘 파악해서, 몸과 마음이 천지(天地) 사이에서 일어나는 기운(氣運)의 변화(變化)에 일치(一致)하는 슬기로운 생활을 실천해서 건강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이와 같은 일에 잘 적응(適應)해서 잘살아갈 수 있는 방법인 양생(養生)의 법도(法道)를 바르게 실천(實踐)해야만 심신(心身)을 온전하게 유지 할 수가 있기 때문에, 밝은 사람은 언제나 천지(天地)와 합일(合一)하는 생활(生活)을 실천하므로, 급기야 굳게 닫쳐있던 몸과 마음의 문이 활짝 열려서 올바른 정도(正道)를 이루는 것입니다.
출처 : 새마갈노
**眞我[편집]
무아에 반대되는 걔념. 일부 불교도및 종교인들이 참 나. 참 본성의 의미라고 주장하는 개념이며, 쉽게 말해서 수행을 하다 보면 진정한 자아를 찾을수 있으며, 비록 육신이 사라져도 그 안에는 진정한 나 자신을 의미하는 에너지가 남아있다고 하는 가설이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불교에서는 잘못된 불교 개념이라 이를 부정하고 있는데, 애초에 진아는 불교가 생겨나기전에 인도에서 존재했던 '아트만'의 개념. 즉 브라만의 교리에 해당되기 때문에 불변의 법칙이 없다는 불교의 교리인 무아설과 크게 충돌하기에 이런 진아를 주장하는 불교도들에 대해, 불교가 아닌 브라만교를 전파하고 있다라며 비판하는 의견이 있다.[나무위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