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玄奘)의 반야심경(般若心經) 1
반야바라밀다심경(般若波羅蜜多心經)
당(唐) 삼장법사(三藏法師) 현장(玄奘) 한역, 이운허 번역
600권의 대반야바라밀다경을 한문(漢文)의 260자로 요약하여 대승 불교의 깊은 진리를 함축한 경전이다.
이 경을 동아시아에 한문으로 번역하여 전래한 사람이 바로 동아시아사 대표적 불교 구법 여행의 '대당서역기'를 지은 당나라의 현장 법사이다. 원래 현장 이전에도 반야심경이라는 불경 자체는 '마하반야바라밀다명주경'이라는 이름으로 중국에 알려져 있었다.
번역문으로는 현장 (649년 번역본)과 함께 불경 번역의 거두로 꼽히는 412년 쿠마라지바(구마라습)의 번역본이 있으나, 현장의 번역이 더 유명하며, 조계종에서 정한 반야심경 한국어 표준번역도 현장이 한역한 반야심경을 기준으로 한다.
원래 반야심경도 다른 경전과 마찬가지로 부처님께서 반야심경의 내용을 설한 계기, 장소, 설해진 후의 결과 등이 다 쓰인 광본(廣本)이 있으나, 반야심경 자체가 짧으면서 핵심을 요약한 것이기 때문에 대승 불교 의식에서는 이 짧은 반야심경이 독송되고, 티베트에서는 다른 나라들과 달리 광본을 독송한다.
이 산스크리트어 광본을 두고, 소품반야경과 대품반야경의 내용을 바탕으로 중국에서 창작된 광본을 현장, 또는 누군가가 산스크리트로 역번역(back-translation)했다고 보는 불교학자(대표적으로 Jan Nattier)들도 있다. 산스크리트어에서 쓰는 관용구에 맞지 않는 표현이나, 중국식 언어습관이 섞인 산스크리트어 조어가 광본 이곳저곳에서 발견되기 때문이라고 하나, 현재로서 반야심경 위경 논란은 확실한 고고학적 증거가 없어서 결론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산스크리트 원본이 있었다 하더라도, 각 번역자의 선택에 따라 번역본 혹은 음역본이 쿠마라지바나 현장에 의해 첨삭되었다는 점은 대체로 학계에서 인정하는 편이며, 학계에선 현장과 쿠마라지바 둘 다 짧은 판본만 건드렸지 광본을 번역한 흔적을 찾지 못했다. 광본의 대표 역자로는 저 두 사람이 아닌 법월法月(739년역), 반야般若/리언利言(790년역), 법성法成(856년역), 지혜륜智慧輪(860년역), 시호施護(980년역) 등이 있다.
소본의 가장 오래된 산스크리트 사본은 일본 법륭사(法隆寺)에 패엽본으로 소장하고 있고, 광본의 산스크리트 사본은 일본 나라 하세데라(奈良 長谷寺)가 소장하였다.
반야심경은 대승 불교에서 핵심으로 다루는 '공 사상'을 설명한다. 색즉시공 공즉시색, 아제아제 바라아제 등이 널리 알려진 경구이다. 재미있는 점은, '공 사상의 측면에서 보면'이라는 전제 하에 초기불교의 교리가 깡그리 부정되는 듯하다는 것이다. 순서대로, 초기불교에서 무아를 설명하는 데 쓰이는 오온과 육입처, 육경, 육식은 물론, 순관과 역관을 포함한 연기의 제1항부터 제12항, 사성제가 깡그리 모두 '없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여기서 '없다'고 하는 것은 진짜 없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단지 자성(自性: 고정불변하는 실체, 혹은 본성)이 없다는 말이다.
스리랑카 출신 승려가 일본에서 반야심경을 비판하는 강연을 하고 책을 내서 크게 논란이 된 적이 있었는데, 그 대충의 요지는 '색즉시공은 불교의 교리에 부합하고 철학적으로 보아도 논리가 맞지만,
공즉시색은 말이 안 되는, 공즉시색은 틀렸다.'는 주장이다. 이는 상좌부 불교의 관점 때문인데, 상좌부에서는 공(空), 즉 무아(無我)인 것은 물질, 마음, 마음부수, 닙바나로 실제로 있는 것 네 가지 전부이며, 그러므로 공은 물질에 한정되지 않는다고 본다. 이는 '모든 가로수는 나무이다'와 '모든 나무는 가로수이다' 두 가지 명제의 참/거짓 여부와도 비슷하다.
반면 대승 불교에서는 공(空)뿐 아니라 유식(唯識)을 함께 고려해서 논리를 전개한다.
공 사상에 따르면 모든 것을 하나로 보는 것이 '색즉시공'이고, 유식 사상에 따르면 그러한 하나를 모든 것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 것이 '공즉시색'이다. 이를 통해 '하나의 빛이 온 세상을 장엄하게 비춘다'는 화엄(華嚴)의 사상이 성립하므로 대승불교에서는 '공즉시색'을 빠뜨리면 안 된다고 보는 것이다. 결국 이는 상좌부 불교와 대승 불교의 교리적 차이, 그리고 이를 믿는 지리적 차이를 고려하지 않은 해프닝이라 볼 수 있겠다. ㅡ 나무위키
摩訶 般若 波羅蜜多 心經(마하 반야 바라밀다 심경)
摩訶(마하): 크고 위대하다.
般若(반야, 프라즈냐 prajñā): '지혜', '깨달음의 지혜' ’참지혜‘, ’해탈의 지혜‘
波羅蜜多(바라밀다, 파라미타 pāramitā): 피안(彼岸)에 이르는 길, 완성
ㅡ반야(般若)는 참 지혜(智慧), 우리 인간이 축적한 지식이 아니라 깨달아서 번뇌를 떠난 성자의 참다움에서 우러나온 지혜로써, 사실 일반 중생에게는 반야가 없고 성자에게만 반야, 즉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이 있습니다.
바라밀(波羅蜜)은 ‘도피안(到彼岸)’하는 것으로, 번뇌에 쌓인 우리 중생이 사는 세계인 차안(此岸)에서 고해(苦海)의 강이나 바다를 건너는 도(到), ‘도피안(到彼岸)’을 해서 피안(彼岸), 즉 해탈(解脫), 극락세계(極樂世界)에 이르는 것입니다.
心經(심경): 心(심, 흐리다야 hṛdaya)은 ‘심장’ · ‘본질’ · ‘핵심’이라는 뜻으로, 지혜의 완성에 대한 핵심을 설한 경’이라는 뜻이며, 경의 골수(骨髓), 가장 중심(中心)의 정수(精髓)가 되는 경을 심경이라 합니다.
피안, 즉 ‘영생의 해탈에 이르는 거룩한 지혜의 가장 귀중한 경’이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摩訶般若波羅蜜多心經)이라는 것입니다.
청화스님; 부처님 경전은 무슨 경(經)이든 소중하지 않는 경이 있으리요만, 반야심경(般若心經)은 가장 짧은 동시에 불교의 모든 철학을 함장을 시키고 있다는 말입니다.
앞서 말씀과 같이 피안에 이르는 - 영생의 해탈에 이르는, 우리 중생은 지금 죽고 살고 헤매고 번뇌를 일으키고 하는 차안(此岸)에 있는데, 중생의 그런 고생스런 고생 바다를 건너서 영생의 저 언덕, 영생의 피안(彼岸)에 이르게 하는 거룩하고 가장 귀중한 경이란 뜻입니다.
따라서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摩訶般若波羅蜜多心經)은 ‘피안에 이르는 거룩한 지혜의 가장 골수의 경’이란 말입니다.
서문(序文)
觀自在菩薩 行 深般若波羅蜜多 時(관자재보살 행 심반야바라밀다 시),
관자재보살(觀自在菩薩, 관세음보살)께서 깊은 참 지혜의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蜜多)를 수행(行)하실 때,
照見 五薀皆空,度 一切苦厄(조견 오온개공, 도 일체고액)
다섯 가지 쌓임의 오온(五薀, 정신적 물질적인 것) 모두가 공(空)한 것으로 실체가 없음을 비추어 보는 조견(照見)하시고,
모든 괴로움과 재앙의 고액(苦厄)에서 벗어나시니,
ㅡ 눈(眼)ㆍ 귀(耳)ㆍ코(鼻)ㆍ혀(舌)ㆍ몸(身)의 오정(五情)이 색(色)ㆍ 수(受)ㆍ 상(想)ㆍ행(行)ㆍ식(識)의 오중(五衆)을 받아들여서 쌓여서 '나'라고 생각하는 오온(五薀)이 공(空)한 것으로,
즉, 물질적인 색(色)과 정신적인 수상행식(受想行識)오온은 변해가는 것으로써 실체가 없는 것이라고 통찰함으로써 집착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관자재보살(觀自在菩薩), 관세음보살을 더욱 깊은 의미로 해석해서 관자재보살이라 하며, 우주만유를 막힘없이 자재롭게 원만무결(圓滿無缺)하게 관찰(觀察) 할 수 있는 보살(菩薩)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상대유한적(相對有限的)이라서 막히지만, 부처님과 같이 천지 우주를 다 통달해서 일체를 다 아는 자재(自在)로운 지혜 또는 자재롭게 모두를 다 관찰(觀察)하는 보살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관세음보살은 우리 중생을 구제(救濟)하는 자비로운 보살에만 국한되지 않고, 일체만유(一切萬有)를 다 알고 생사를 초월(超越)한 통달무애(通達無礙)의 지혜로써 중생을 영원의 저 언덕으로 인도하는 보살이 관세음보살입니다.ㅡ청화스님 설법 참고
“舍利子(사리자)!사리불(舍利弗)이여,
色不異空(색불이공), 물질이나 형상의 색(色)은 공(空)과 다르지 않고
空不異色(공불이색), 공(空) 또한 물질이나 형상의 색(色)과 다르지 않으며,
色卽是空(색즉시공),물질이나 형상의 색(色)이 곧 공(空)이요,
空卽是色(공즉시색), 공(空)이 곧 물질이나 형상의 색(色)이라.
受、想、行、識,亦復如是(수 상 행 식 역부여시) 감각의 수(受)와 생각의 상(想)과
의욕 또는 의지 또는 지어감의 행(行)과 의식의 식(識) 또한 그러하나니,
ㅡ色(색, 물질) 受、想、行、識(수상행식, 정신)은 변해가는 것이라서 실체가 없는 것임을 통찰하는 것이 지혜의 시작이다.
모든 물질적 형상(色)은 근본적으로 공(空)의 성질을 가지고 있으며, 이는 단순히 '없다'는 허무주의가 아니라, 모든 것이 상호의존적이며,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연기(緣起)의 진리를 말하는 것으로,
물질이나 형상의 색(色)만이 아니라 受、想、行、識(수상행식)의 정신적인 것도 모두 마찬가지로 고정된 것이 아니고 실체가 없는 공(空)이다.
受不異空(수불이공), 空不異受(공불이수), 想不異空(상불이공), 空不異想(공불이상)
行不異空(행불이공), 空不異行(공불이행), 識不異空(식불이공), 空不異識(공불이식)
청화스님의 말씀을 정리하였음; 천지 우주의 모든 것을 우리 중생이랑 통 털어서 유상(有相) 무상(無相), 유정(有情) 무정(無情) 다 털어서 한꺼번에 말할 때에 오온이라 합니다.
인간의 눈에 보이는 것, 안 보이는 것 하여튼 다 털어서 말할 때에 오온이라 하는데 관세음보살과 같은 그런 위대한 도인들이 영생에 이르는 지혜를 닦을 때, 맨 먼저 정신과 물질이 다 비어 있음을 비춰본다는 말입니다.
불교라는 것은 언제나 ‘내가 없다’ 또는 ‘물질이 공이다’ 하는 공 지혜를 떠나서는 불교가 성립이 안 됩니다.
좋다 궂다 또는 너다 나라고 하는 그런 것이 있으면 불교의 깊은 의미를 음미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비록 내 앞에 네가 있고, 내가 있고 또 선(善)이 있고 악(惡)이 있다 할지라도, 그러한 것은 중생의 차원에서 보는 것으로, 사실 관세음보살이나 도인들이 볼 때는 텅 비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걸 알아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중생의 업장(業障)의 정도에서 보니까 밉다 곱다 귀엽다고 하는 것으로, 청정한 안목으로 볼 때에는 그러한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여기까지 못 느끼면 불교를 알 수가 없습니다. 즉, 우리가 보는 것은 결국은 다 빈, 공(空)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분자(分子)를 볼 수 있는 현미경(顯微鏡)을 쓰고 본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분자를 볼 수 있는 현미경으로 세상을 본다면 천지 우주는 다 분자로만 보일 것이고, 원자(原子)를 볼 수 있는 현미경을 쓰고 본다면 천지 우주는 그 때는 원자로만 보일 것입니다.
부처님의 불안(佛眼)이라, 부처님의 안목(眼目)은 천지 우주를 광명(光明)으로 보는, 천지 우주의 근원은 어떠한 것이라도 전부 다 순수한 광명 에너지가 꽉 차있다는 것 입니다. 그런데 우리 중생은 현미경을 이용하지 않으면 전자(電子)도 못 보고 분자(分子)도 못 본단 말입니다.
우리가 쓰는 안목은 삼독심(三毒心), 탐욕(貪慾)이나 또는 성내는 마음이나, 어리석은 마음의 독심(毒心)에 가려서 바로 못 보기 때문에, 나와 네가 있다는 벽을 세워버리고, 그러한 경계에서 보니까 여러 견해가 생겨서 시비(是非)가 생긴단 말입니다.
헌데 참다운 진리, 영생의 해탈에 이르는 반야지혜를 우리가 얻고자 할 때, 제일 먼저 무엇이 중요한가!
아무리 내가 귀엽지만은 결국은 나를 비롯한 천지 우주가 다 비어 있다는 것을 비추어 봐야 된다는 말입니다.
*사리불(舍利弗, Śāriputta) 또는 우바실사(優婆室沙), 사리불다라(舍利弗多羅), 사리보달라(奢利補怛羅), 사리자(舍利子), 추로자(鶖鷺子)라고 하며, BC 6~4세기경에 마갈타국 왕사성 북쪽 나라촌의 바라문의 가문에서 태어났는데,
인도 히말라야 산의 사리조(舍利鳥)라는 새는 그 눈이 아름답고 영롱한 새로 알려졌는데, 사리자의 어머니가 눈이 영롱한 미인이었고, 그 예쁜 어머니의 아들이라고 해서 사리자라고 이름하게 되었다.
당시의 갠지스 강 중류지방에는 사문들의 탁월한 지도자 6명이 잇달아 출현했는데, 이들을 ‘6사외도’라 하며, 사리불은 6사외도 중의 한 사람인 산자야의 제자였다.
사리불은 아사지(목건련 존자)가 탁발하는 것을 보고, 그의 안정되고 위엄이 있고 늠름함에 이끌려 탁발이 끝나길 기다렸다가 그에게 질문을 했다고 한다.
“벗이여, 당신은 누구에게 출가했으며, 누구를 스승으로 모시고 있으며, 누구의 법을 따르고 있습니까?”
“나는 붓다에게 출가했으며, 붓다를 스승으로 모시고 있습니다.”
사리풋타는 계속해서, “그대의 스승은 무엇을 설하십니까?”라고 물었다. 목건련 존자는 대답 대신 게송을 읊었다.
'모든 법은 원인으로부터 발생하니, 여래께서는 그 원인을 밝혀주셨네.
또 그것들의 소멸에 대해서도 설명하셨나니, 이것이 대 사문의 가르침이라네
그의 말에 감복하여 친구 목건련과 산자야의 제자 250명을 이끌고 부처님께 귀의했다고 한다.
이 사건으로 인도에서 부처님의 명성이 높아지고, 그의 설법에 귀를 기울여 가르침을 받고자 귀의하는 자가 늘어났다고 전한다. 주로 교화활동에 종사했으며, 부처님의 실질적인 후계자로 여겨졌으나 부처님보다 먼적 입적하셨다.
*육사 외도(六師外道)=당시 인도 우파니샤드 철학에 기초하여 62견(六十二見) 또는 360종 이설(異說)이라 불리는 다양한 사상이 나타났는데, 육사외도는 그 가운데서 (불교 이외에) 가장 세력이 큰 여섯 집단이었다.
1. 니간타 나타풋타(Nigantha Nataputta)= 자이나교의 교주. 영혼(Jiva, 命)은 물질(Pudgala)의 업(業)에 속박되어 있으며, 그 때문에 현실과 같은 비참한 상태에 빠졌다고 파악한다. 그러므로 영혼을 물질로부터 해방시켜야 하는데, 그 방법으로 고행을 제시하였다. 불살생(不殺生), 불도(不盜), 불음(不淫)을 지키며, 무소유(無所有)를 실천하였다.
2. 산자야 벨랏티풋타(Sanjaya Belatthiputta)=진리를 객관적으로 인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회의론(懷疑論)과 불가지론(不可知論)을 주장했다.
산자야의 제자 가운데 뛰어난 사람 두 명이 바로 사리풋다와 목갈라나이다. 이 둘은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듣고 산자야의 가르침에 회의를 느껴 다른 제자 250명과 함께 석가모니에게 귀의하였다. 산자야는 이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아 피를 토하고 죽었다고 한다.
석가모니, 마하비라 이전에는 상당한 규모의 종단을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결국 회의론과 불가지론은 하나의 생각하는 관점이 되기는 하나 고뇌하는 사람에게 명확한 답을 줄 수 없다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불교와 자이나교에 나누어져서 흡수당한 것으로 볼 수 있다.
3. 아지타 케사캄발린(Ajita Kesakambalin)=단멸론자이자 유물론자. 순세파(順世派, Carvaka)라고 한다. 현세의 삶이 최초이자 최후이므로 인간은 그저 즐기고 살아야 한다는 철저한 유물론자였다.
아지타는 삶은 사대원소의 결합이며 죽음은 사대원소가 흩어져 무로 돌아가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므로 사후 세계나 영혼의 존재는 완전히 부정했으며, 현세도 없고 미래세도 없다고 보았다. 윤회도 없고 선악에 따른 과보도 없으므로, 도덕을 부정하였다.
4. 막칼리 고살라(Makkhali Gosala)=숙명론자. 사명외도(邪命外道).
일체의 구성요소로서 12원소설(지수화풍ㆍ공ㆍ득ㆍ실ㆍ고ㆍ락ㆍ생ㆍ사ㆍ영혼)을 주장했으며, 그 가운데는 영혼도 포함되고 인간의 영혼도 하나의 원소로 파악했던 유물론자이다.
의지의 작용을 부정하고 극단적인 결정론을 주장했고 인과와 업보를 부정하고 무인(無因) 무연(無緣)을 주장했다. 모든 것은 이미 정해져 있어서 수행으로 해탈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막칼라 고살라의 주장으로는 모든 인간은 8백 40만 겁을 윤회하는 동안 저절로 고통이 없어져 스스로 해탈한다는 것이다.
5. 파쿠다 캇차야나(Pakudha Kaccayana)=인간을 구성하는 것을 일곱 가지 요소로 보았다. 이는 지(地)ㆍ수(水)ㆍ화(火)ㆍ풍(風)ㆍ고락(苦樂)ㆍ생명(生命)ㆍ영혼(靈魂)이다.
일곱 가지 요소는 항상 존재하는 것으로, 생명도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생명은 나지도 죽지도 않는 불생불멸이라고 인식했다. 그러므로 살인을 저지른다고 해도 죽이는 자도 없고, 살해되는 자도 없다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칼로 인간의 목을 자른다고 해도 인간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일곱 가지 요소 사이로 칼이 지나갈 뿐이라는 것이다.
6. 푸라나 캇사파(Purana Kassapa)=선악(善惡)의 구분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이 마음대로 정의한 것이며 실제로 선악은 없다고 주장했다. 살생, 도둑질, 간음 등의 악행을 저질러도 인간이 임의로 정한 것이기 때문에 실제로 악행을 범한 것은 아니라고 보았다. 반대로 보시와 방생 같은 선행을 한다고 해도 그것 역시 인간의 관념에 따른 것이므로 선행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업(業)은 없으며 업에 의한 응보도 없고, 업보도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의 길흉화복은 인과나 운명이 아니라 단순히 우연에 의해서 좌우된다고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