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지식

무아(無我)

Skunky 2021. 8. 29. 12:24

**무아(無我)(Anatman) 범어 anatman 혹은 nir-atman의 번역이다. 비아[非我]라 번역하기도 한다. 아는 영원히 변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자존하며[], 자체자로서[] 지배적인 능력을 지닌 주체[]로 생각되는 본체적인 실체를 의미한다. 무아는 불교의 근본 교리로서 삼법인의 하나인 무아인[無我印]에 해당한다. 이 제법무아인에서 아의 의미는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아의 뜻과는 구별되는 내용이 있다. 인도에선 예부터 브라만교의 교설에 의해 아트만[]사상이 보편화되어 있었으므로 부처님은 일차적으로 그런 의미의 아의 관념을 부정한 것이다. 나라는 관념, 나의 것이란 관념을 배제하는, 사고방식, 아는 실존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고 방식이었다.

팔리어 성전에서 말하는 무아의 원어는 anattan이다. 그 의미는 내가 아니다와 내가 있지 않다는 두 가지 뜻이 있다. 초기불교에선 결코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은 없었다고 한다. 원래는 나에 대한 집착에서 떨어진다는 의미. 우파니샤드철학이 아를 실체시하는데 반해 불교는 이런 견해를 거부한 것이다. 이것은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실존을 부정한 것이 아니라 객체적이고 기능적인 아에 대한 사고방식을 반대한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은 다만 나의 것이란 관념의 포기를 가르친다.

잡아함부 경전 권3에는 오온의 하나 하나가 고이므로 비아이다. 무상이므로 무아라는 교설이 있다. 이것은 아가 아닌 것을 아로 간주 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즉 신체를 나의 것, 나라고 간주해선 안 된다는 뜻이다. 유부에선 인무아[人無我]를 말하며 아를 부정했으나 법무아[法無我]는 말하지 않았다. 후에 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무아설이 확립되어 대승불교로 계승되면서 인법의 2무아설이 확립된다. 이때 법무아는 모든 인식의 대상은 인연에 따라 나타난 것이므로 사물 자체에 본래부터 지니고 있는 독자적인 자성은 없다는 것이다. 대승불교에선 이 무아설이 공관[空觀]과 연관되어 인무아. 법무아. 아법 2을 설하고 공이란 관념조차 초극해 버리는 사상[空空]으로 발전한다.

무아(無我) 불교에서의 무아란 모든 사물이 서로 의지하며 지탱하고 있다는 존재의 진상을 뜻한다. 흔히 무아라고 하면 사심(私心) 또는 아욕(我欲)이 없는 것이라든지 무아몽중(無我夢中)등으로 쓰이며 무엇에 몰두하는 것을 말하나 그것은 불교에서의 무아와 의미가 다른 것이다. ()라는 것은 나라는 인칭을 말하는 것은 아니고 실체의 뜻이다. 그 자체로서 존재하며 변하지 않으며 움직이지 않는 것, 그것이 아()이며 어떤 무엇에 의해서 지탱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자체로서 존재가 완전히 끝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무아란 그러한 변하지 않고 움직이지 않는 실체는 아니라는 것이며, 이것이 불교의 존재론이 되는 것이다. 우리들 주위를 돌아보면 어느 하나도 다른 것과 관계하지 않으며 독립적으로 실체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러한 무아라는 존재의 진리를 여실히 알았을 때에만 우리들은 다른 존재에 대한 경건한 마음과 자애를 품을 수 있다.

 

**만물에는 고정 불변하는 실체로서의 나〔實我〕가 없다는 뜻으로 범어(梵語)로는 아나트만(Anātman), 팔리어(Pali language)로는 아나딴(Anattan)이다. 무아(無我)는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은 뒤 최초로 설파한 가르침이다. 석가모니 이전의 인도사상에서는 상주(常住)하는 유일의 주재자로서 참된 나인 아트만(ātman)을 주장하였으나, 석가모니는 아트만이 결코 실체적인 나〔)〕가 아니며, 그러한 나는 없다고 주장하였다.

무아설은 아트만을 불변의 실체로 인정하는 기존의 인도 사상과는 구별되는 불교 고유의 주장이다. 그러나 고정 불변하는 실체로서의 아()는 부정하면서도 아트만의 상주설(常住說)과 함께 인도 사상에서 가장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던 윤회설을 수용하고 있다. 불교의 시각에서 윤회란 실체로서 존재하는 나〔)〕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범부의 그릇된 인식으로서 존재하는 나〔)〕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것을무아윤회(無我輪廻)’라고 부른다.

불교의 무아윤회는 윤회의 주체로서 중유(中有: 사람이 죽은 후 다시 태어나기 전까지의 시간) 개념을 상정하였으며, 대승불교의 유식학(唯識學)에 이르러 아뢰야식(阿賴耶識: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심층의식)으로 대체되었다.

구사론(俱舍論)에서는중유의 상속’ 또는 무상(無常)오온(五蘊: )의 상속’으로써 윤회가 성립된다고 주장한다. 즉 중유라는 개념이 윤회의 주체를 연속시키며, 이것이 구체적으로 지시하는 것은 업력(業力: 선악의 행위가 남기는 잠재력) 또는 잠세력(潛勢力: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숨어있는 세력)의 상태로 있는 오온이다. 결국 중유의 상속에 의한 윤회는온갖 번뇌와 업에 의해 오염된 온()에 의한 윤회’를 의미한다.

아뢰야식을 장식이라 하여 인간의 심층의식으로 상정하였던 유식학에서는 아뢰야식을 윤회의 주체로 보았다. 이는 기존의 상속이론보다 진전된 무아설의 일환이다. 아뢰야식은 업의 잠세력을 의미하는 습기(習氣)일 뿐이며 바로 이 점에서 그것은 무아적 존재이다.

불교의 무아설은나〔)〕’가 있는가 없는가에 대한 이론이 아니라 실체가 없는 것을 실체로 보아서는 안 된다는 실천적 의미를 담고 있다. ‘나’라고 하는 실체가 존재하는가 하지 않는가? 하는 형이상학적인 문제는 불교 수행자에게는 무의미한 것이다. 따라서 무아는 제법무아(諸法無我)라는 이름 아래 설명되었고, 무아의 생명은 무아의 실천이나 무아행(無我行)이라고 하는 실천적인 면에서 살아 있다. , 이 세상의 모든 것은 고정성이 없는 무아이고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기 때문에, 무아성을 자각하여 수양하고 노력함에 따라 역경을 극복하여 더욱 향상할 수 있음을 뜻하고 있다. 그러므로 불교의 이상인 열반은 무아성의 자각 아래 철저하게 무아행이 이루어질 때 나타나는 경지이다. 이 무아는 일반적으로 크게 인무아(人無我)와 법무아(法無我) 나누어 설명되는데, 신라의 원효(元曉)는 그의 여러 저술에서 명쾌한 해석을 가하였다.

원효는 인무아를 외도(外道)나 범부(凡夫)들의 견해를 타파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였다. 외도나 범부는 몸과 마음을 한결같이 주재하는 영구불변의 주체가 있다고 보고 이를나〔)〕’라고 하나, 우리의 몸과 마음은 오온이 가정적(假定的)으로 화합해 있는 것일 뿐, 특별한 주체라고 인정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으므로인무아’라고 한다고 하였다.            

법무아는 소승(小乘)의 수행자들이 갖는 그릇된 집착을 타파하기 위한 것이다. 그들은 모든 대상의 법에 대하여 실아(實我)가 있고 실법(實法)이 있다고 그릇 생각하여, 갖가지 현상들에 대하여 상주하고 실재하는 것으로 인정하지만, 실은 모두가 인연의 화합으로 생긴 가법(假法)일 뿐, 따로 그 현상들을 있게끔 하는 법아(法我)가 없는 까닭에법무아’라고 한다고 하였다.

또 실천적인 면에서 볼 때 무아는 무소득(無所得)과 무가애(無罣碍)라는 두 가지 측면을 갖는다. 무소득이란 집착이 없다는 것이다. 인간은 자기〔〕와 자기 소유물〔我所〕에 대하여 고정되고 변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하거나 고정불변할 것을 원하여 이를 집착하게 된다. 이와 같은 아집(我執)과 아소집(我所執)이 없는 것이 무소득이다. 무가애는 무애(無碍)라고도 하는데, 장애와 정체됨이 없이 자유자재한 것이다. 이것은 무소득의 무집착이 진전하여 완성된 상태를 가리킨다. [한국 민족문화 대백과]

 

**중생의 마음은 모든 현상을좋다/싫다’, ‘즐겁다/괴롭다’, ‘아름답다/ 추하다’ 등으로 분별해서 그 2분의 한쪽을 회피하고 다른 한쪽에 집착하면서 마치 시계의 추처럼 끊임없이 왕복한다. 회피와 집착의 강도가 크면 클수록 그 왕복 운동의 진폭이 커져 더 큰 불안정에 휘둘린다. 어디에 집착하거나 무엇을 회피한다는 건 거기에 속박되었다는 뜻이다. 그래서 늘 불안정하고, 얽매이고, 불안하다. 그래서 고이다.

“비구들아, 갠지스 강의 물결을 보아라. 잘 살펴보면 거기에는 실체도 없고 본질도 없다.

비구들아, 어떻게 물결에 실체와 본질이 있겠는가.

몸은 물결

느낌은 물거품

생각은 아지랑이

의지는 파초

인식은 허깨비.

이것이 세존의 가르침이다.” <상윳타 니카야 22 : 95 泡沫>

‘나’라는 말은 5온의 일시적인 화합에 붙인 지칭 혹은 명칭일 뿐, 5온에는 독자적으로 존속하는 실체도 없고 본질도 없다. 다만 갖가지 조건으로 형성되어 매 순간 생멸을 거듭하는 몸-마음의 흐름이 있을 뿐이다.

차마(差摩)라는 비구가 병으로 누워 있을 때, 여러 비구가 병문안을 왔다.

“어떤가, 견딜 만한가?”

“어찌나 아픈지 견딜 수가 없네.”

그때 한 비구가 그를 위로하고자 말했다.

“세존께서는 무아의 가르침을 설하지 않았는가.”

그러자 차마는나는나’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대답했다.

이에 여러 비구들이 따지고 들자 차마가 말했다.

“벗들이여, ‘나’가 있다는 것은 이 몸이나’라는 뜻이 아니다. 또 감각이나 의식을 가리킨 것도 아니다. 또 그것들을 떠나서 따로나’가 있다는 뜻도 아니다. 벗들이여, 예를 들면 꽃의 향기와 같다. 만약 어떤 사람이 꽃잎에 향기가 있다고 한다면, 이 말이 맞다고 하겠는가. 줄기에 향기가 있다고 한다면, 이 말이 맞다고 하겠는가.

또 꽃술에 향기가 있다고 한다면, 어떻겠는가. 역시 향기가 꽃에서 난다고 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것과 마찬가지로 몸이나 감각이나 의식을나’라고 하는 것은 옳지 않다. 또 그것을 떠나서 따로나의 본질’이 있다고 하는 것도 옳지 않다. 나는 그것들의 통일된 형태를나’라고 하는 것이다.”<상윳타 니카야 22 : 89, 差摩>

그때 비구가 천타(闡陀)에게 말했다.

“몸은 무상하고, 느낌 · 생각 · 의지 · 인식도 무상하다. 모든 의식 작용은 무상하다. 모든 현상은 무아이다. 열반은 적멸이다.”

<雜阿含經10권 제7>

“비구들아, 죽음을 면하려거든 네 가지 근본 진리를 사유하라.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모든 의식 작용은 무상하다. 이것이 첫 번째 근본 진리이니, 사유하고 수행하라.

모든 의식 작용은 고이다. 이것이 두 번째 근본 진리이니, 다 함께 사유하라.

모든 현상은 무아이다. 이것이 세 번째 근본 진리이니, 다 함께 사유하라.

모든 번뇌의 소멸이 열반이다. 이것이 네 번째 근본 진리이니, 다 함께 사유하라.

비구들아, 이 네 가지 근본 진리를 사유하라. 왜냐하면 그것으로 태어남 · 늙음 · 병듦 · 죽음 · 근심 · 슬픔 · 번뇌 등의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增一阿含經23, 增上品4>

무아(無我)는 독립된개체적 자아’라는 생각이 소멸되고, 에고가 죽고, ‘/나 아닌 것’의 2분법이 허물어져 온갖 분별이 끊긴 상태이다. ① 모든 의식 작용은 무상하다(一切行無常), ② 모든 의식 작용은 고이다(一切行苦), ③ 모든 현상은 무아이다(一切法無我), ④ 모든 번뇌의 소멸이 열반이다(滅盡爲涅槃) 4법인(法印)이라 한다. ()붓다의 가르침’이고, ()특징’이라는 뜻이다. 4법인에서 ②를 빼고 3법인이라 하고, 4법인에서 ④를 빼고 3법인이라고도 한다.

안팎에서 일어났다가 사라지고 사라졌다가 일어나는 모든 현상의 생멸을 끊임없이 알아차리고, 그 현상들의 진행을 모두 무상 · · 무아라고 통찰하는 게 불교의 길이다. 모든 현상을 무상 · · 무아라고 거듭 알아차리고 거듭 통찰함으로써 그것들에 대한 집착이 점점 희박해져가고, 그것들의 속박에서 점차 벗어나게 된다. 그래서 무상 · · 무아를 열반으로 가는 세 관문이라 한다.[다움 백과]

 

**무아(無我)는 산스크리트어 아나트만(अनात्मन् anātman, anatman, 팔리어: anattā) 혹은 니르아트만(nir-ātman)의 번역어로 비아(非我)라고도 한다. 불교의 근본 교의 중 하나로 처음에는 자기 소유물을 자기 것으로서 집착함을 금하는 실천적인 입장에서 주장되었다. 즉 고타마 붓다가 말한 무아(無我)는 있는가 없는가에 대한 이론이 아니라 연기에 의해 이루어진 제법(諸法), 즉 유위법(有爲法)을 실체로 보아서는 안 된다는 실천적 의미를 가리킨다.

후에는 영원독립하며 주재적인 자아(아트만)의 실재를 주장하는 브라만교의 교의에 반대하여 사람은 5(五蘊)의 집합이요, 생명의 주체인 실아(실재로서의 자아)는 없고 또한 모든 존재는 인연으로써 생긴 것이며 고정적인 본성은 없다고 하는 무아설(無我說)을 주장하게 되었다.

무아와 무아설

무아(無我)란 이론적으로는 고정적 · 불변적인 실체로서의 아(" · 아트만")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고타마 붓다가 말한 무아는 있는가 없는가에 대한 이론이 아니라, 실체가 없는 것, 즉 연기에 의해 이루어진 제법(諸法), 즉 일체의 유위법(有爲法)을 실체로 보아서는 안 된다는 실천적 의미를 가리킨다. , 유위법(有爲法)을 실체로 보지 않을 수 있게 하는 구체적인 수행, 즉 도제(道諦: 팔정도, 37도품, 6바라밀 등의 수행)가 실제로 열반(무위법)에 이르게 하는 길이지, '우주가 시간적으로 또는 공간적으로 영원한가 아닌가? (, 아트만)라고 하는 실체(무위법)가 육체(유위법)와 어떻게 다른가?' 등과 같이 실체(무위법)의 성격은 어떠한지를 논하는 십사무기와 같은 형이상학적인 접근은, 마치 독화살에 맞은 상태에서 독화살과 독을 제거할 생각을 하지 않고 독화살이 어디에서 왔는가를 따지는 태도와 같아서, 고타마 붓다에게 있어서는 무의미한 것이었다.

무아는 일반적으로 제법무아(諸法無我)라는 명제로서 설명되었고 불교의 근본진리라고 하는 연기설(緣起說)은 이 무아설을 기초로 조직되었다. 그러나, 불교로서의 생명은 무아의 실천이라든가 무아행(無我行)이라고 하는 실천면에 있다. 즉 이 세상의 모든 것은 고정성이 없고("無我 · 무아")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는("無常 · 무상") 까닭에 우리들의 수양이나 노력에 의해서 역경을 극복하여 더욱 향상할 수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의 이상(理想)인 열반(涅槃)은 이 무아행이 철저하게 이루어진 경지를 말한다.

인무와와 법무아

대승불교의 교의에서 무아는 크게 인무아(人無我, 산스크리트어: pudgala-nairātmya)와 법무아(法無我, 산스크리트어: dharma-nairātmya) 2무아(二無我)로 나뉜다.

인무아(人無我)를 아공(我空)이라고도 하며 법무아(法無我)을 법공(法空)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이 둘을 통칭하여 2(二空)라고 하는데, 2(二空) 2무아(二無我)와 같은 뜻이다. 2(二空) 또는 2무아(二無我)아법2(我法二空)이라고도 하며, 아공(我空)은 인공(人空)이라고도 하는데 이 때문에 인법2(人法二空)이라고도 한다. 2(二空)의 교의는 초기 대승불교의 근본적인 교의 또는 사상이 되었다.

이치로서의 2무아

인무아(人無我)

인간 자신 속에는 실체로서의 자아가 있다고 보는 아집(我執)에 대해, 인간 자신 속에는 실체로서의 자아가 없다고 보는 견해 혹은 이치, 또는 이러한 깨우침을 증득한 상태 또는 경지이다. 아집(我執)은 번뇌장(煩惱障)이라고도 하는데, 번뇌장은 중생의 몸과 마음을 번거롭게 하여 열반(또는 해탈)을 가로막아 중생으로 하여금 윤회하게 하는 장애라는 의미이다.

법무아(法無我)

존재하는 만물 각각에는 실체로서의 자아가 있다고 보는 법집(法執)에 대해, 유위법(有爲法) 즉 존재하는 모든 것은 인연에 의해 생기는 것이므로 실체로서의 자아는 없다는 견해 혹은 이치, 또는 이러한 깨우침을 증득한 상태 또는 경지이다. 법집(法執)은 소지장(所知障)이라고도 하는데, 소지장은 참된 지혜, 즉 보리(菩提)가 발현되는 것을 가로막는 장애라는 의미이다.

경지로서의 2무아

불교에서, 수행에 의해 깨달음을 성취해 간다는 입장에서는 2무아(二無我)는 실제로 증득될 수 있고 또한 증득되어야 하는 특정한 경지를 뜻한다.

예를 들어, 유가유식파의 경우, 이 종파의 소의 논서인 《성유식론》에 따르면 이무아(二無我) 중 인무아의 경지에 다다르면 아집인 번뇌장이 소멸되어 열반(해탈)이 성취되고, 법무아의 경지에 다다르면 법집인 소지장이 소멸되어 보리(반야 · 대지혜 · 완전한 깨달음)가 성취된다.

《성유식론》에서는 이와 관련된 수행 단계를 더 자세히 설명하는데, 크게 자량위(資糧位) · 가행위(加行位) · 통달위(通達位) · 수습위(修習位) · 구경위(究竟位)의 다섯 단계("오위 · 五位")로 나누고 있다. 이 중에서 네 번째인 수습위는 다시 십지(十地)의 열 단계로 나뉘는데, 십지는 극희지(極喜地) · 이구지(離垢地) · 발광지(發光地) · 염혜지(焰慧地) · 극난승지(極難勝地) · 현전지(現前地) · 원행지(遠行地: 7) · 부동지(不動地) · 선혜지(善慧地) · 법운지(法雲地: 10)이다. 《성유식론》에 따르면 아집인 번뇌장은 수습위의 십지 중 제7지인 원행지(遠行地)에서 완전히 제거되어 제8지부터는 아무아의 경지에 있게 된다. 그리고 법집인 소지장은 수습위의 십지 중 제10지인 법운지(法雲地)에서 완전히 제거될 수 있는데, 완전히 제거되면 다섯 단계("오위 · 五位")의 마지막인 구경위(究竟位)에 이르게 되고 해당 보살, 즉 대승불교의 수행자는 비로소 부처가 된다.

유가유식파는 열반과 해탈은 동의어로 사용하는 반면, 열반과 보리는 용어를 구분해서 사용한다. 유가유식파의 문맥에서 열반(또는 해탈)은 아집인 번뇌장이 완전히 제거된 인무아의 상태를 의미한다. 그리고 보리는 법집인 소지장이 완전히 제거된 법무아의 상태를 의미한다. 《성유식론》에서는 열반을 진해탈(眞解脫: 참다운 해탈)이라고도 표현하며 보리를 대보리(大菩提: 큰 깨달음 · 완전한 깨달음)라고도 표현하고 있다.[위키백과]

 

無我론/한자경

[잡아함경]<유아경>에서 붓다는 자아가 있는가 없는가의 물음에 대해 세 번이나 무기를 보이다가, 그 무기의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만일 내가 자아가 존재한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이전부터 내려오는 私見을 더할 뿐이다. 만일 내가 자아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이전부터의 의혹을 더할 뿐이다. 내가 어찌 의혹을 더하게 할 수 있겠는가? 본래부터 있었는데 이제 단멸하였다고 말하겠는가? 본래부터 자아가 있어 지속한다고 하면, 그것은 常見이다. 이제 단멸한다고 하면 그것은 短見이다.”

붓다는 둘 다 간단히 대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둘 다 본래 있는 자아의 존재를 일단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무상함을 가지지 않은 것에 대해서만, 즉 일정 기간 자기 동일성을 恒常된 것에 대해서만 상이나 무상, 즉 불멸이나 단멸을 물을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그 두 관점은 다 무상하지 않은 자아 존재를 인정하는 有我론에 속한다. 일정 기간 변하지 않는 자기 동일적 자아를 인정하는 것이다. 이러한 유아론적 관점을 붓다는 私見이라고 말한다. 자기 동일적 자아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자아란 찰나 생멸하는 무상한 존재라는 것이 불교 無我론의 관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붓다는 위의 물음에 한마디로 ‘자아는 없다’라고 답하지 않았는가? 그렇게 할 경우 우리가 가진 의혹이 더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왜인가? 우리에게 무상하지 않은 恒常된 자아는 없지만, 그래도 무상하게 항상 변화하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로서 연속되는 그런 자아는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붓다가 인정하는 자아, 즉 연기의 자아이며 업의 자아인 오온이다. 그러므로 붓다는 앞의 인용에서처럼 자아에 대한 단견과 상견을 모두 비판한 후, 이어 중도의 견해로서 연기와 업을 설한다.

註-그러므로 불교가 말하는 일체 존재의 무상성 또는 우리 삶이나 자아의 무상성은 우리 젊음과 청춘이 너무 짧고, 우리의 인생이 단지 7~80년밖에 지속하지 않아 언젠가는 죽어야 하기에 무상하고 덧없다는 것이 아니다. 생명체가 언젠가는 죽음을 맞아 죽게 된다거나, 무생물도 시간이지나면 색이 바래고 닳아 없어지기 때문에 무상하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언젠가는 존재가 끝나기 때문이 아니라, 그 존재의 순간 자체 안에 비존재가 스며들어 있기 때문이다. 존재 자체 안에 이미 비존재가 그것을 그것이게끔 하는 존재의 핵이 자리 잡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불교는 그것을 공이라고 부른다. 그 공성 때문에 어느 존재도 그 어느 순간도 지속되지 않는다는 것, 우리가 매순간 생멸을 거듭한다는 것, 바로 그렇기 때문에 무상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작성자 도봉별곡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은 연기법이고, 연기법의 핵심은 무아/공성일 것이다.

무아(無我)라면, 해탈하는 자는 누구인가? 무아(無我)이기에 해탈하는 ""는 없다.

본질적인 측면에서는!!!

해탈하는 자가 없다면, 해탈이란 과연 뭔가? 무아(無我)이기에 실체로써의 해탈하는 ""는 없고, 다만 마음이 번뇌에서 벗어난 상태를 해탈이라고 명칭한다.

해탈이란 마음에서의 일이다.

실제 해탈되는 ""는 없다. 다만 마음의 변화일 뿐... 그래서 12연기법에서 첫번째가 바로 무명이다. 무명---명색-육입-------노사. 지혜가 생겨 마음 속의 무명無明이 다 사라진 상태가 해탈이다.

해탈은 마음에서의 일이지, 실제로 어떤 실체, 즉 자아/영혼/에고가 있어서 그게 해탈한 게 아니다. 하지만, 세속법에 따라서 말할 때는 "저 분은 해탈했다. 저 자는 해탈했다"라고 말한다. 왜냐면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런 게 바로 세속법이다.

그러나 본질적인 면에서는, 즉 진정한 진리인 진제의 측면에서 보면 해탈된 ""는 본래 없다. 일체가 공하기 때문이다. 이 문제도 역시 세속법과 진제에 대해서 알아야만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본질적인 차원에서는 해탈된 ""는 본래 없다.

마음이 무명에서 벗어나는 게 해탈이다. 무명에 빠진 우리 중생들의 마음엔 항상 나/자아가 있다고 믿고 있다. 이런 헛된 믿음이 바로 무명이고, 이 전도몽상/착각이 완전히 부숴진 상태가 바로 해탈이다.

/자아/영혼이 정말로 있다면, 오히려 결코 해탈은 불가능하다.

/자아/영혼은 영원불변해야 한다. 변하는 것은 나/자아/영혼이 될 수 없다. 이게 "" "자아" "영혼"의 개념이다.

변한다면 나/자아/영혼은 두개가 된다. 또는 그 이상이 된다. 두개나 이상이 된다면 어느 게 과연 나인가? 그러므로 나/자아/영혼은 오로지 하나여야 한다. 하나라는 의미는 결코 변하지 않는다는 걸 뜻한다.

결코 변하지 않는다면 해탈이란 결코 얻을 수 없다. 중생은 영원히 고통받을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실체로써의 나/자아/영혼은 없다. 다만 그런 게 있다는 그 착각이 무명이고, 그게 박살나면 해탈이다. 그럼 참나/진아를 찾으면 해탈할 수 있을까? 부처님께서 과연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었을까? 만약 정말로 진아/참나가 있었다면, 부처님께서는 결코 무아(無我)의 진리를 설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무아(無我)와 참나/진아는 서로 상극이지, 같은 의미가 결코 아니다. 또 진아/참나가 있다면, 12연기법 역시나 설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참나/진아와 연기법은 상극이다.

연기법의 의미는 그 모든 것은 상호의존적으로 발생되기에 그 어디에도 실체가 없다는 것이다. 나도 없고, 거짓나도 없고, 참나도 없으며, 상위자아도 역시 없다. 다만 마음에서의 일이다.  나가 있다는 것도, 없다는 것도 마음에서의 일이요, 거짓 나, 참나가 있다는 것도 역시 마음에서의 일이다.

참나, 진아 VS ()

참나/진아와 공()은 전혀 다른 의미다.

참나/진아는 뭔가 실체가 있다는 유()의 의미이고, ()은 그 어떤 실체가 없이 텅 비어 있다는 의미다.

깨달아야 할 것이 공()이고, ()이 곧 깨달음이다. 그래서 공()이 곧 해탈의 문이라, 공해탈문이라고 한다.

해탈의 문이 바로 공()이다. 그 뭔가 어떤 실체가 있다고 여기는 한 해탈은 결코 성취할 수 없다.

그 뭔가가 있다고 여기는 게 바로 무명이니까.....

/자아/영혼/참나/진아가 없는데, 모든 작용을 할 수 있는가?

가능하다. 그게 바로 마음이 하는 일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마음이 모든 것의 근본이라고 하셨다.

심위법본....... 유식학파라면 진아/참나라는 얘기가 쬐금이라도 먹힐 가능성이 있겠으나,

중관학파라면 코딱찌만큼도 먹히지 않는다. 불교에서는 중관학파가 최고이다. 반야심경, 금강경과 같은 반야부 경전에 중관사상이 담겨져 있다. 반야심경, 금강경에는 참나/진아가 있다는 소리는 결코 없다.

불교에서 ""의 정의는 무엇인가? 나라는 것은 이 몸과 마음 즉 오온에 의지해서 붙여진 명칭/호칭이다.

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의 정의이다. ""라는 것은 그저 호칭/명칭일 뿐이다. 그러므로 참나/진아가 있을 리 없고, 상위자아니 고차원적인 자아니...이런 것도 역시 있을 리 없다.

명칭/호칭도 역시 실체가 없는 거짓인데, 호칭/명칭에 뭔 상위호칭이니, 고차원적인 명칭이 있겠는가?

금강경에 ""가 있다고 나와 있는가?

금강경 17장의 제목이 구경무아분[究竟無我分]이다. 구경무아분[究竟無我]의 뜻이 뭔가? 궁극적으로 나는 없다는 뜻이다.

참나든 진아든, 상위자아든 고차원적인 자아든.....그런 게 결국 없다는 부처님 말씀이다.

또 금강경에서 부처님께서 수도 없이 말씀하신 것이 바로, <그저 이름 뿐이다> 이것이다.

""라는 것은 그저 이름 뿐인 것이다. 호칭/명칭으로써 존재하는 것이지, 실체로써 존재하는 게 아니다.

자신의 마음을 관해 보면 답이 나온다. 내 마음 속에 나/참나/진아/상위자아/고차원적인 자아, 이런 게 있던가?

마음속에 뭔가 어떤 실체가 있던가?

그런 걸 발견할 수 있는가?

어디에 머물고 어떤 모습인가?

마음은 비어 있다. 다만 빈 채로 앎의 기능이 있을 뿐.... 그래서 마음/의식의 정의가 바로 앎, 즉 식()이다. 그러므로 마음을 들여다봐야 나도 없고, 진아/참나도 없고, 상위자아니, 고차원적인 자아니....이런 것도 역시 없다.

마음이 마음을 바라보면, 마음이 사라진다. 본래 텅 비어 있으니까....

자신의 마음을 관해보자. 거기서 답을 스스로 얻을 수 있다. [자연치유와 성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