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엄경(首楞嚴經)

수능엄경(首楞嚴經) 6권 6

Skunky 2025. 6. 5. 08:00

本名; ‘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大佛頂如來密因修證了義諸菩薩萬行首楞嚴經)’ 

또는 '중인도나란타대도량경(中印度那蘭陁大道場經)'당나라의 반자밀제(般刺密帝번역

송나라 급남(及南편찬(編纂), 송나라 계환(戒環해석개운조사 능엄경 참조

수능엄경(首楞嚴經) 6권 6

 

▷오근(五根)  

見性雖洞然,明前不明後,四維虧一半,云何獲圓通?

보는 성품이 비록 밝게 통하기는 하나, 앞만 밝고 뒤는 밝지 못하니,  

사유(四維)에서 하나 반이 모자라거늘 아떻게 원통(圓通)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아나율타(阿那律陀)의 안근(眼根), 눈은 앞은 잘 보지만, 좌우는 반만 볼 수 있고, 뒤는 보지 못하여서 눈은 800의 공덕이다.


鼻息出入通,現前無交氣,支離匪涉入,云何獲圓通?

코로 숨을 쉬는 비식(鼻息)은 들고 남에 통하기는 하나, 앞에서 교차하는 순간에는 기운이 없으니,

지리(支離)하여 간섭해 들어가지 못하거늘, 아떻게 원통(圓通)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주리반특가(周利槃特迦)의 비근(鼻根), 들숨(入)과 날숨(出)의 중간(中)에 숨이 교차하는 잠깐 동안 기운이 끊어지는 것이 지리(支離)라 하고, 들숨과 날숨의 중간으로서 잠시 멈추는 지점을 교기(交氣)라고 하며, 코는 팔백(800)의 공덕이다


舌非入無端,因味生覺了,味亡了無有,云何獲圓通?

혀는 무단히 들어가지 않는지라 맛으로 인해 느낌을 아는 것으로, 

맛을 볼 음식이 없으면 느낌이 없거늘, 아떻게 원통(圓通)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교범발제(驕梵鉢提)의 설근(舌根),  설근(舌根)은 일천 이백(1200)의 공덕.


身與所觸同,各非圓覺觀,涯量不冥會,云何獲圓通?

몸은 감촉하는 대상(경계)와 합할 때에는 동일하나, 각각 원만하게 깨닫고 보지 못하여서,

몸과 촉의 경계선이 어디인지 모르는데, 아떻게 원통(圓通)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필릉가바차(畢陵伽婆蹉)의 신근(身根), 몸에는 800의 공덕이 있고, 

소촉(所觸)은 촉각을 일으키는 물질, 대상을 말하며, 몸과 촉은 내외(內外)의 한계인 애량(涯量)이 있어서 원통이 되지 못한다.


知根雜亂思,湛了終無見,想念不可脫,云何獲圓通?

뜻의 지근(知根, 의근意根)은 어지러운 생각이 뒤섞여서 뚜렷이 맑은 담요(湛了)함을 끝내 보지 못하나니, 

생각하고 기억하며 벗어날  모르는데, 아떻게 원통(圓通)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수보리(須菩提) 존자의 의근(意根), 생각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이다.담료(湛了)는 원담요지(圓湛了知)로서 본성(本性)을 말하며, 의근으로는 본성을 볼 수가 없다.  의근(意根)은 천 이백(1200)의 공덕. 

 

▷육식(六識)
識見雜三和,詰本稱非相,自體先無定,云何獲圓通?

모는 식(識)은 근(根), 경(境) 식(識)의 세 가지가 섞여합한 삼화(三和)이니,

근본을 따져보면 실상이 아닌 비상(非相)이라서,

자체가 애매하게 결정된 것이 없거늘, 아떻게 원통(圓通)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ㅡ식견잠삼화(識見雜三和), 근(根), 경(境) 식(識)이 화합한 것을 말한다.안식(眼識)은 이 3 가지가 화합한 것일 뿐 스스로의 실체가 없기 때문에 비상(非相)이라 한 것이며, 금강경의 '범소유상(凡所有相) 개시허망(皆是虛妄)과 같은 뜻이다.

 

心聞洞十方,生于大因力,初心不能入,云何獲圓通?

마음으로 듣는 심문(心聞)이 시방의 세계를 통하는 것은 큰 인연의 대인(大因)의 힘에서 생긴 것이니,

초심(初心)으로는 능히 들어갈 수가 없거늘, 아떻게 원통(圓通)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사리불(舍利弗) 존자의 안식(眼識), 즉 보고 아는 놈은 눈이 아니고 마음이라는 것을 깨달아 원통을 얻었다. 안근(眼根, 눈)과 색진(色塵, 대상, 경계)이 상대하여 안식(眼識, 마음)이 생기는 과정을 통한 시각현상을 아는 것, 즉 근(根), 경(境) 식(識)의 세 가지가 인연이 되어야 아는 마음이 생기는 안식은 인연이 생기면 나타나고 인연이 다하면 사라진다. 그러므로 근(根), 경(境) 식(識)이 흩어지면 시각현상이 생길 수가 없는 것이므로 안식은 완전하지 못한 것이다.보현보살은 들음의 심문(心聞)으로 법계행을 닦아서 대인(大因)이 생긴 것이지만, 초심(初心)으로서는 들어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鼻想本權機,秖令攝心住,住成心所住,云何獲圓通?

코에 생각을 모으는 비상(鼻想)은 본래 방편인 권기(權機)였으므로,

다만 그 마음을 거두어서 머물게 하려는 것이거늘, 아떻게 원통(圓通)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손타라난타(孫陀羅難陀)의 비식(鼻識), 손타는 마음이 산란하였으므로 부처님께서 비식(鼻識), 코끝을 관하게 한 것으로, 이것은 특별한 방평인 권기(權機)일 뿐, 진심(眞心)이 거기에 머문 것이 아니었다. 진심은 어디에도 머물지 않는 무주심(無住心)이므로, 머문다고 한다면 이는 망령된 것이다.


說法弄音文,開悟先成者,名句非無漏,云何獲圓通?

설법(說法)하여 말과 글로 희롱함은 깨달아 아는 개오(開悟)란 (여러 생을 갈고 닦아서) 먼저 이룬 것이니, 

말과 글귀는 무루(無漏)가 아니거늘, 아떻게 원통(圓通)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부루나미다라니자(富樓那彌多羅尼子)의 설식(舌識), 깨달아 앎이 먼저 이루어진 것이라면 초심(初心)이라 할 수 없는 것이다.

    

持犯但束身,非身無所束,元非遍一切,云何獲圓通?

계율을 지키는 지범(持犯)은 다만 몸을 단속하는 것으로, 몸을 떠나서는 단속할 대상이 없는 것이니, 

원래가 일체에 두루하지 못한 것이거늘, 아떻게 원통(圓通)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우바리(優波離)의 신식(身識), 몸(身識)으로는 음(婬) 살(殺) 도(盜)만 단속할 수 있을 뿐, 몸에 속하지 않는 구업(口業)은 단속할 수 없고, 또한 몸은 극히 작아서 두루 하지 않아서 원통을 얻을 수 없다.

 

神通本宿因,何關法分別,念緣非離物,云何獲圓通?

신통(新通)은 본래 숙세(宿世)의 인(因)이니, 법을 분별하는 법분별(法分別, 의식)과 무슨 관계가 있겠으며,

생각과 인연은 물질을 여읜 것이 아니거늘, 아떻게 원통(圓通)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대목건련(大目犍連)의 의식(意識), 대목건련의 신통은 과거 세상에서 훈습한 것에 근본한 것으로, 의식(意識)에 관계 된 것이 아니며, 또한 생각이 있고 인연이 있음이 원만하게 통한 것도 아니다.

의식은 법진(法塵) 경계에 따라 생기는 분별심으로 염념반연(念念攀緣)이다. 의식은 법진이 나타나면 생기고 법진이 사라지면 없어지므로, 따라서 인연 따라 생기는 망식(妄識)을 통하여 원통을 얻기는 어렵다.  

 

▷칠대(七大)
若以地性觀,堅㝵非通達,有爲非聖性,云何獲圓通?

땅(흙)의 성품을 관찰해 보면, 굳게 막혀서 통달하지 못하며,

작위가 있는 유위(有爲)이면 성인(聖인)의 성품이 아니거늘, 아떻게 원통(圓通)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지지보살(持地菩薩)의 지대(地大), 지대는 담장과 같이 단단하고 막혀있기 때문에 사통팔달(四通八達)할 수가 없고, 또한 유위(有為)의 성질을 갖고 있어서 성인들의 무위(無爲)와는 다르므로, 중생들이 지대를 관찰하여 원통을 얻기는 어려운 것이다. 


若以水性觀,想念非眞實,如如非覺觀,云何獲圓通?

물의 물의 성품인 수성(水性)을 관찰해 보면, 생각의 상념(想念)은 진실한 것이 아니고,

여여(如如)는 깨닫고 보는 것이 아니거늘, 아떻게 원통(圓通)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월광동자(月光童子)의 수대(水大), 월광 보살의 수관(水觀)도 상념에서 벗어나지 못하므로 여여(如如)와 계합하지 못한다.

수성(水性)을 관찰하는 것은 생각의 상념(想念)이 만들어낸 것이라서 진실하지 못하다.

여여(如如)는 진여(眞如)이고, 각관(覺觀)은 상념(想念) 또는 심사(尋伺)의 뜻이다. 따라서 생각으로는 여여부동(如如不動)한 진여(眞如)에 이를 수가 없으므로 중생들이 수대를 관찰하여 원통을 얻기는 어려운 것이다.  


若以火性觀,厭有非眞離,非初心方便,云何獲圓通?

불의 성품인 화성(火性)을 관찰해 보면, 존재를 싫어하는 것을 참으로 여읜 것이 아니며,

초심자에게 알맞는 방편이 아니거늘, 어떻게 원통(圓通)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오추슬마(烏芻瑟摩)의 화대(火大),  오추슬마는 음욕(婬欲)이 강하였는데, 몸의 따뜻한 기운이 걸림 없이 통하는 것을 관찰하여 원통을 얻었다. 음욕이 있음을 싫어하는 분별심이 있는 상태에서는 깨달음에 이르기 어려우므로 중생들이 화대를 관찰하여 원통을 얻기는 어렵다.  


若以風性觀,動靜非無對,對非無上覺,云何獲圓通?

바람의 성품인 풍성(風性)을 관찰해 보면, 흔들림의 동(動)과 고요함의 정(靜)이 서로 상대가 없는 것이 아니니, 

그 상대가 있다는 것은 무상각(無上覺)이 아니거늘, 어떻게 원통(圓通)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유리광법왕자(瑠璃光法王子)의 풍대(風大), 움직임(動)과 고요함(靜)의 상대적인 두 성질을 의지하여 원통을 얻기는 어렵다.

 

若以空性觀,昏鈍先非覺,無覺異菩提,云何獲圓通?

허공의 성품인 공성(空性) 관찰해 보면, 둔탁하고 어두운 혼둔(昏鈍)한 것으로, 깨달음의 각(覺)이 아니니,

각(覺)이 없는 것은 보리(菩提)와 다른 것이거늘, 어떻게 원통(圓通)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허공장(虛空藏)의 공대(空大), 허공 자체는 본래부터 무지(無知)하여 어둡고 혼미하므로 본래부터 밝은 각명(覺明)과는 다르다. 따라서 앎이 없는 무지(無知)는 보리(菩提)가 아닌데, 각(覺)이 없는 공대(空大)를 통하여 원통을 얻기는 어려운 것이다.

 

若以識性觀,觀識非常住,存心乃虛妄,云何獲圓通?

만약 식(識)의 성품인 식성(識性)을 관찰해 본다면, 관(觀)하는 식(識)은 항상 머물지 않는 것이며,

마음을 붙들어 두는 존심(存心, 유식관)한다는 것이 부질없고 허망한 것이거늘, 어떻게 원통(圓通)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미륵(彌勒)보살의 식대(識大),  의식(識)은 항상 머물러 상주(常住)하는 것이 아닌, 생각할 때는 식(識)이 있지만, 생각하지 않을 때는 식이 없으므로, 식은 상주(常住)하지 않는 것이다.

미륵 보살은 유식관(有識觀)을 닦았으므로, 관하는 식이 생각마다 생멸하므로, 마음을 붙들어두고 관하는 것도 어려운 것이다.

 

諸行是無常,念性無生滅,因果今殊感,云何獲圓通?

제행(諸行)은 무상한 것이며, 성품을 생각하는 염성(念性)이 본래 생멸(生滅)하는 것이니,

인(因)과 과(果)가 지금 다르게 느껴지거늘, 어떻게 원통(圓通)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대세지법왕자(大勢至法王子)의 근대(根大), 대세지보살은 염불행(念佛行)을 통하여 원통을 얻었다.

염불의 마음으로 부처님을 생각하는 의근(意根)과 육근(六根)의 입으로 부처님 명호를 부르는 것은 생멸(生滅)하는 것이므로 곤 생멸의 인(因)에 의하여 상주과(常住果)를 구하는 것이 느낌이 다르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