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엄경(首楞嚴經) 5권 2
本名; ‘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大佛頂如來密因修證了義諸菩薩萬行首楞嚴經)’
또는 '중인도나란타대도량경(中印度那蘭陁大道場經)'당나라의 반자밀제(般刺密帝) 번역,
송나라 급남(及南) 편찬(編纂), 송나라 계환(戒環) 해석, 개운조사 능엄경 참조.
수능엄경(首楞嚴經) 5권 2
阿難!汝今欲逆生死欲流,返窮流根至不生滅,當驗此等六受用根,
誰合?誰離?誰深?誰淺?誰爲圓通?誰不圓滿?
若能於此悟圓通根,逆彼無始織妄業流,得循圓通,與不圓根日劫相倍,
아난아, 네가 지금 생사의 애욕의 흐름인 생사욕류(生死欲流)를 거슬러서 그 흐르는 감각 기관인 유근(流根)의 근원으로 돌아가서 생(生)과 멸(滅)이 없음에 이르고자 한다면, 마땅히 이 여섯 가지의 수용(受用)하는 육수(六受)가 어느 근(根)과 합하고?
어느 것을 떠나며? 어느 것은 깊으며? 어느 것은 얕으며? 어느 것은 원통(圓通)하고? 어느 것이 원통하지 않은가?를 깨달아서,
저 시작이 없는 무시로부터 허망하게 짜여진 업의 흐름을 거슬러서, 원만하게 통하는 원통(圓通)을 따를 수 있다면, 원통하지 못한 감관(根)에 의지하여 닦는 것과는 시간의 흐름인 일겁(日劫)이 서로 배나 차이가 날 것이다.
ㅡ'흐르는 감각 기관인 유근(流根)'은 곧 묘하고 맑음이 움직이지 않는 것으로, 그것이 터져 나와서 흘러 달아나 대경(對境)으로 달려가는 것을 '생사욕류(生死欲流)'이라 한 것이며,
이에 거슬러서 들어와 반대로 흘러 전일(全一)하게 죄는 것을 '생(生)과 멸(滅)이 없음'이라 한 것이다.
원만함을 따르면 성(性)과 합해서 깊어지고,
원만하지 못한 것을 따르면 성(性)과 분리되어서 얕아지고 깊고 얕음이 서로 멀어져서 '일겁(日劫)이 배가 된다'는 것이다.
我今備顯六湛圓明,本所功德數量如是,隨汝詳擇其可入者,吾當發明令汝增進。
내가 지금 육근(六根)의 맑고 원만하고 밝은, 담원명(湛圓明)은 본래부터 지니고 있던 공덕(功德)의 수량이 이와 같음을 모두 갖추어서 자세히 밝혔으니, 너는 잘 생각하여 들어가기에 알맞은 근(根)을 선택하여 그것을 따라 들어 갈 만한 것을 선택해 보아라.
내가 마땅히 드러내어 밝혀주어서 너로 하여금 더욱 더 나아갈 수 있게 하리라.
十方如來於十八界,一一修行皆得圓滿無上菩提,於其中閒亦無優劣;
시방의 여래께서는 십팔계(十八界)에서 낱낱이 수행하여 모두 원만한 무상보리(無上菩提)를 얻어셨는데,
그 중간에 전혀 우열(優劣)이 없었느니라.
ㅡ육근의 공덕을 분명하게 밝혔으니 어느 근을 사용하여 도를 닦을 것인가를 선택해야 한다. 위에서 밝힌 육근 공덕의 수량은 중생들에게 알려주기 위해서 설명한 것일 뿐이다. 부처님은 도를 닦을 때 십팔계에 대하여 모두다 수행을 하셨으므로 부처님의 입장에서는 십팔계 중에서 좋고 나쁜 것이 없다.
그러나 중생은 십팔계를 전부다 닦을 수는 없으니까, 이심원통(離深圓通)을 갖춘 이근(耳根)을 선택하여 수행하는 것이 좋다.
일문(一門)으로 들어가서 허망이 없어지면 육근이 일시에 청정하게 된다. 그래서 전등록(傳燈錄)에서는 망심무처즉보리(妄心無處卽菩提)라 하였다.
망심이 없어진 곳이 곧 보리이다. 따라서 하나에 들어가서 허망이 없어지면 육근이 동시에 다 청정해지므로 하나를 잘 선택해서 마음을 닦아야 한다.ㅡ향적법진
但汝下劣未能於中圓自在慧,故我宣揚,令汝但於一門深入,入一無妄,彼六知根一時淸淨。”
다만 너는 근기가 하열하여 그 가운데 원만하고 자재한 지혜를 능히 얻지 못한 까닭에, 내가 이를 선양(宣揚)하여 너로 하여금 다만 일문(一門)으로만 깊이 들어가게 하려는 것이니, 일문으로 들어가서 망령됨이 없어지면, 저 여섯 가지의 지근(知根)이 일시에 청정하게 될 것이니라.”
阿難白佛言:“世尊!云何逆流深入一門,能令六根一時淸淨?”
아난 존자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어떻게 하여야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서 일문(一門)으로 들어가서 육근(六根)을 일시에 청정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佛告阿難:“汝今已得須陁洹果,已滅三界衆生世閒見所斷惑,然猶未知根中積生無始虛習,彼習要因修所斷得,何況此中生住異滅分劑頭數?
부처님께서 아난 존자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지금 이미 수다원과(須陀洹果)를 증득하여, 삼계(三界)의 중생들이 세간에서 견도문(見道門)을 수행할 때 끊어야할 번뇌의 미혹(迷惑)을 멸하였다. 그러나 아직도 육근 가운데에 오랫동안 쌓여서 생긴, 시작이 없는 과거로부터 지어온 허망한 습기의 허습(虛習)을 잘 알지 못하고 있느니라.
그 습기는 반드시 닦음을 통해서만이 끊을 수 있는 것인거늘, 더욱이 어찌 그 가운데 생주이멸(生住異滅)하는 분제(分齊)와 두수(頭數) 이겠는가?
ㅡ맑고 원만함이 의혹으로 인하여 나누어지며, 일(一)과 육(六)이 의혹으로 인하여 생기므로 그 이치를 설해주기 위해서 먼저 의혹부터 분별하여 밝히는 것이다.
소승은 견도문(見道門)에서 탐진치(貪嗔痴) 등의 10 가지 분별혹(分別惑)을 끊고서야 마침내 초과(初果)을 증득하는 것이므로, '이미 수다원과(須陀洹果)를 증득하여, 미혹(迷惑)을 멸하였다.'고 한 것이고,
수도문(修道門)에서는 탐진치(貪嗔痴)와 함께 만(慢)의 4 가지 구생혹(俱生惑)을 끊어야 하는 것으로, 이를 사혹(四惑)이라고도 한다.
이는 곧 여러 생 동안 육근에 쌓여온 무시로부터의 망습(妄習)이라서, 삼과(三果)를 증득해야만 끊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아난 존자도 알지 못하며, 또한 육근에는 생주이멸하는 모든 미세한 의혹이 있어서 그 분제(分齊)와 두수(頭數)도 알지 못하는 것이다.
'견도문(見道門)에서 미혹을 멸하였다'는 것은
첫째 탐(貪心)이 순응하는 대상에 애착이 생기는 것과
둘째는 진심(嗔心)이 거슬리는 대상에서 분노가 생기는 것과
셋째는 치심(癡心)이 제법의 사리를 알지 못하는 것과
넷째는 만심(慢心)이 다른 사람을 경시하는 것과
다섯째는 의심(疑心)이 모든 것에 대한 믿음이 생기지 않는 것의 다섯 가지의 둔사(鈍使)와
첫째 신견(身見)으로, 몸으로 인하여 나라는 소견의 아견(我見)을 일으키는 것과
둘째 변견(邊見)으로, 아견(我見)으로 인하여 기(起) 단(斷) 상(常) 유(有) 무(無) 등의 소견을 일으켜서 집착하는 것과
셋째 계취(戒取)로, 잘못된 것에 망령되게 집착하는 것과
넷쩨 견취(見取)로, 잘못되게 도를 얻었다고 헤아리는 것과
다섯째 사견(邪見)으로, 삼보와 인과를 믿지 않는 것의 다섯 가지의 이사(利使)와 함께
열가지의 끊기 어려운 분별번뇌혹(分別煩惱惑) 등을 끊은 것이다.
중생의 번뇌는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①견혹(見惑)은 잘못된 견해에 따른 번뇌로서 속칭 '안다병' 에 해당되며, 이치를 바르게 이해하면 제거할 수 있는 의혹이다. 견혹은 수다원과인 견도위(見道位)에서 끊을 수 있는 번뇌이다. 견도위는 아공(我空)과 법공(法空)을 깨달은 상태이며, 관(觀, vipasyana)을 통하여 번뇌를 끊는다.
②수혹(修惑) 또는 사혹(思惑)은 애욕과 같은 습관적 또는 감성적 번뇌로서 좀처럼 고치기가 어렵다. 비록 아공과 법공을 깨달았지만 아직 마음 한 구석에는 미심쩍은 부분이 남아있는 상태이다. 수행과정에서 몸과 마음이 다 사라지는 것을 알게 되지만, 눈에 보이는 대상이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천년 묵은 우물의 때를 닦는 것과 같이 선정을 통해서 오랫동안 닦아야 버려진다. 수혹은 사다함 이상의 수도위(修道位)에서만 끊을 수 있다. 지(止, samatha)를 통하여 번뇌를 끊는다.
아난은 아직 수다원과에 머물러 있으므로 육근 가운데서 생주이멸하는 번뇌들은 처리할 수가 없다.
육근에서 일어나는 미세한 번뇌들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은 알 수가 없다.
마음은 생주이멸하고, 세계는 성주괴공하고, 사람은 생로병사를 한다.
분제두수(分劑頭數)란 여러 가지 번뇌의 수를 말한다. 분제(分劑)는 약(藥)의 숫자이고 두수(頭數)는 동물의 숫자로서 수가 많다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따라서 수행이 필요한 것이다.ㅡ향적법진
今汝且觀現前六根,爲一?爲六?阿難!若言一者,耳何不見、目何不聞、頭奚不履、足奚無語?
너는 이제 또다시 살펴 보아라. 앞에 나타난 육근이 하나인가? 여섯인가?
만약 하나라면, 귀는 어찌 보지 못하고, 눈은 어찌 듣지 못하며, 머리는 어찌 다니지 못하고, 발은 어찌 말하지 못하는가?
若此六根決定成六,如我今會與汝宣揚微妙法門,汝之六根誰來領受?”
“만약 이 육근이 결정코 여섯을 이룬다면, 내가 지금 이 법회 중에서 너희에게 미묘한 법문을 선양하고 있을 때, 너의 육근 중에서 어느 것이 받아 들이는 것인가?”
阿難言:“我用耳聞。”
아난 존자가 말씀 드리기를,
“저는 귀로 듣고 있습니다.”
佛言:“汝耳自聞,何關身口?口來問義,身起欽承,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네 귀가 제 스스로 듣는 것이라면 너의 몸과 입은 무슨 관계가 있어서 입으로 질문 할 때에 몸이 일어나서 공손히 받드는 것인가?
是故應知非一終六,非六終一,終不汝根元一元六。
그러므로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하나가 아닌 비일(非一)이라면 마침내 여섯(六)이며,
여섯이 아닌 비육(非六)이라면 마침내 하나(一)이라.
결국 너의 근(根)은 원래 하나도 아닌 비일(非一)이고, 여섯도 아닌 비육(非六)이니라.
阿難!當知是根非一非六,由無始來顚倒淪替,故於圓湛一六義生,
아난아,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이 근(根)은 하나도 아니고 여섯도 아니지만, 시작이 없는 과거로부터 뒤바뀐 전도(顚倒)에 빠져있엇으므로 원만한 맑음에서 하나다 여섯이다라는 이치가 생겼느니라.
汝須陁洹 雖得六銷 猶未亡一,
너는 수다원(須陀洹)이 되어, 육(六, 육진六塵)을 소멸하였으나, 아직 하나(一)을 없애지 못하였느니라.
ㅡ육(六)이란 진혹(塵惑)이 허망하게 맺힌 것이고, 하나(一)란 법집(法執)의 미세한 식(識)이다.
수다원은 이미 큰 진혹(塵惑)이 끊어져서 색성향미촉법에 들어가지 않으므로 육(六)이 소멸된 것이라고 하지만,
오히려 법집에 걸려 있어서 아직 일(一)은 없애지 못한 것이다.
법집에서 해탈을 이루어 구공까지도 생기지 않는 경지에 도달해야만 일(一)도 없어질 수 있지만, 대승은 곧바로 하나(一)를 없애서 육(六)으로 하여금 저절로 없어지게 하는 것이다.
如太虛空參合群器,由器形異名之異空,除器觀空說空爲一,彼太虛空云何爲汝成同不同?
何況更名是一非一?則汝了知六受用根亦復如是。
마치 넓은 허공을 여러 가지 모양의 그릇에 담아 놓으면, 그릇 모양의 다름을 따라 허공의 모양이 다른 이공(異空)이라고 하다가, 그 그릇을 치우고 허공을 보면 허공은 하나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더욱이 어찌 다시 하나다 하나가 아니다라고 하겠는가?
네가 아는 육근(六根)의 수용(受用)도 역시 그와 같으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