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엄경(首楞嚴經)

수능엄경(首楞嚴經) 4권 9

Skunky 2025. 5. 15. 08:00

本名; ‘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大佛頂如來密因修證了義諸菩薩萬行首楞嚴經)’ 

또는 '중인도나란타대도량경(中印度那蘭陁大道場經)' 당나라의 반자밀제(般刺密帝) 번역

송나라 급남(及南) 편찬(編纂), 송나라 계환(戒環) 해석. 개운조사 능엄경 참조. 

수능엄경(首楞嚴經) 4 9

 

佛告阿難:“卽如城中 演若達多,狂性因緣 若得滅除,則不狂性 自然而出,因緣 自然理窮於是。

부처님께서 아난 존자에게 말씀하셨다.

“저 성안의 연야달다가 만약 미친 성품(증세)의 인연을 제거하여 없앨 수만 있다면, 미치지 않은 본성이 저절로 드러나는 것과 같아서, 인연과 자연의 이치가 여기에서 끝날 것이다.

ㅡ광성(狂性)의 인연이 없어지고 나면 자연의 성품이 나올 것이니, 미친 증상이 있기 전에는 두 가지 모두가 본래 없었다.

인연의 근본을 추구해 보면 다 혼미하고 허망한, 미망(迷妄)한 후(後)이니, 허망(虛妄)하지 않았을 때에는 애당초 인연과 자연이 없었으나, 미치고 망령됨으로 말미암아 성립되는 것이므로 '이치가 여기에서 끝날 것이다'라고 한 것이다.

비단 머리만이 자연과 인연에 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미친 증세도 자연과 인연에 속하지 않는다. 

 

*거울을 본 인연 때문에 미쳤다고 한다면 거울을 보지 않을 경우에는 왜 머리가 없어지지 않는가?

다만 미쳤을 뿐, 머리가 없어진 것은 아니므로, 따라서 인연이 아니니, 만약 인연이라면 머리까지도 잃어버려야 할 것이다.

연야달다의 머리가 자연이라면 본래 어릴 때부터 미쳐야 될 것인데, 지금 성인이 된 후에야 미쳤으니 자연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미친 성품이 어디에 숨어 있다가 성장한 후에 거울을 보고나서야 미치게 되는 것인가? 따라서 자연이 아니다.

자연인가 인연인가 하는 것은 말장난일 뿐, 전혀 진실한 뜻이 없는 것이다.

따라서 도를 닦아서(공부를 해서) 번뇌 망상이 없어진다고 하면 그것은 멸(滅)이고,

도를 깨달은 것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생(生)이 되는 것이므로, 이것은 진짜 보리의 마음이 아니고 생멸의 마음이다.
인연도 아니고 자연도 아니다. 인연이라고 하는 것은 '함이 있는 것'이고, 자연이라고 하는 것은 '함이 없는 것'이다.

화합(和合)은 인연이고 불화합(不和合)은 자연이다. 이 자리는 화합과 불화합을 모두 떠난 자리, 불이법(不二法)이다. 말과 생각을 떠난 자리이다.ㅡ향적법진

 

阿難!演若達多頭本自然,本自其然無然非自,何因緣故怖頭狂走?

아난아, 연야달다의 머리가 본래 자연이라면, 본래 자연 그대로일 것이니, 본래 스스로 그러한 것이라면 자연 아닌 것이 없거늘, 무슨 인연 때문에 머리를 두려워하며 미쳐서 날뛰었겠는가?

ㅡ자연이란 본래 천연(天然) 그대로여서 인연을 빌리지 않는다. 만약 본래 자연이라면 혹 미치고 미치지 않음이 본래 그러한 것이라서 자연 아님이 없을 것이거늘, 어찌하여 거울에 비치는 인연을 빌린 다음에야 미쳐서 날뛰는 것인가? 자연이 아닌 것이다.

 

若自然頭因緣故狂,何不自然因緣故失?本頭不失狂怖妄出,曾無變易何藉因緣?

만약 자연(自然)인 머리가 인연(因緣) 때문에 미쳤다면, 어찌하여 자연의 인연 때문에 잃어버리지는 않는가?

본래의 머리를 잃는 것이 아닌데, 미쳐 두려워함이 허망하게 나왔다면, 이는 조금도 변함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어찌 인연에 의한 것이라고 하겠는가?

ㅡ만약 본래 스스로 미친 것이 아니었는데, 인연을 빌린 것으로 인하여 미친 것이라면,

본래 스스로 잃어버리지 않은 것이 어찌 인연을 빌림으로 인해서 잃어버린 것이 아니겠는가?

머리는 이미 잃어버리지 않았거늘 다만 미치고 망령됨으로 인하여 인연이하는 생각이 없어진 것이다.

 

本狂自然,本有狂怖,未狂之際狂何所潛?不狂自然,頭本無妄,何爲狂走?

본래 미친 본광(本狂)이 자연이라면, 미친 두려움이 본래부터 있었던 것이겠지만,

미치지 않았을 때에는 미친 증상이 어디에 숨어 있었던 것이며?

미치지 않은 것이 자연이라면, 머리는 본래 망령됨이 없는 것이거늘, 어찌하여 미쳐서 날뛰는 것인가?

ㅡ만약 미치고 두려워하는 것이 본래 자연이라면, 이는 본래 미치고 두려워함이 있어야 할 것이지만, 그러나 숨어 있는 것이 아니라면 본래 미친 것이 아니다. 

만약 미치고 두려워함이 자연에 근본한 것이 아니면, 머리는 본래 허망함이 없는 것이거늘, 어찌하여 히쳐 날뛰는 것인가? 본래 미치지 않은 것도 아니다.

본래 미치지 않은 것도 아니니, 자연이다 인연이다 하는 것이 다 망령되게 성립된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若悟本頭,識知狂走,因緣自然俱爲戲論。是故我言三緣斷故卽菩提心。

만약 본래의 머리라는 것을 깨닫고 나서 미쳐서 날뛰었던 것을 안다면, 인연과 자연이 다 희론(戲論)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세 가지의 삼연(三緣)이 끊어지면, 곧 보리심(菩提心)이다’라고 말한 것이다.

ㅡ만약 본래의 참된성품을 보는 견성(見性)을 한다면, 모든 망령된 연(緣)을 깨끗이 끊어버려서 대해탈을 이룰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본 면목을 바로 보면 어리석은 마음은 사라진다. 따라서 자연이다, 인연이다라는 말은 모두 희론법으로 전혀 실제적인 뜻이 없는 것이다.

 

▷무희론(無戲論)이다.

菩提心生生滅心滅,此但生滅,滅生俱盡無功用道。若有自然,如是則明自然心生,生滅心滅 此亦生滅,

보리심(菩提心)이 생기고 멸하는 마음의 생멸심(生滅心)이 없어진다면, 이것 또한 생멸(生滅)이니, 

생멸이 모두 다하여 공부의 작용이 없는 무공용도(無功用道)에 만약 자연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자연심(自然心)이 생기는 것이며,

생멸심(生滅心)이 없어지는 것이 분명하니, 이것 또한 생멸인 것이니라.

보리심이 생기는 것은 생(生)이고, 생멸심이 없어지는 것은 멸(滅)이니까, 이것 또한 생멸(生滅)이다.

생멸은 청정이 아닌 것으로, 생멸은 인연인 것이다.

보리심 가운데에는 본래 생멸이 없으며, 또한 자연도 없으니, 만약 보리심이 생기고 생멸심이 멸한다고 한다면, 이것은 생멸하는 것이지 보리가 아니며,

만약 생멸이 모두 다해서 무공용의 도에 자연이 있다고 한다면, 이로 인해서 자연심이 생겨나고 생멸심이 없어지는 것이 분명하니, 이것 또한 생멸하는 것이지 보리가 아닌 것이다. 

 

無生滅者名爲自然。猶如世閒諸相雜和成一體者,名和合性,非和合者稱本然性。

생멸이 없는 것을 자연이라고 이름한다면, 이는 마치 세간의 모든 상(相)이 섞여서 일체(一體)가 되는 것을 이름하여 화합성(和合性)이라 하고,

화합하지 않은 비화합(非和合)을 본연의 성품인 본연성(本然性)이라고 하는 것과 같으리라.

반대로 생멸이 없는 것을 가리켜서 자연이라고 한다면, 이는 곧 희론인 것이다.

비유하자면, 마치 섞여서 화합된 것이 있음을 인한 까닭에 화합이라 하고, 반대로 화합하지 않은 것을 가리켜서 본연성(本然性)이라고 하는 것과 같이, 이 모두는 대상을 기다리는 망려됨이 성립된 희론인 것이다. 

 

本然非然,和合非合,合然俱離,離合俱非,此句方名無戲論法。

본연과 비본연, 화합(和合)과 비화합(非和合), 자연과 합해진 것을 모두 여의며, 

따라서 떨어지는 이(離)와 합(合)해지는 것 모두가 아니어야 비로소 희론이 아닌 무희론법(無戲論法)이라고 하느니라.

ㅡ그러나 자연과 자연이 아닌것, 화합과 불화합을 모두 여의면, 또한 여의고 여읠 것 도 없다는 그 마음마져 없어져야, 참으로 무공용도(無功用道)이며, 희론이 아닌 실법인 것이다.

 

자연이라는 생각이 있으면 자연심을 내어 생멸심을 멸하나 이 자연심 역시 생멸법으로 적멸법이 아니다. 
대개 생멸법을 인연(因緣)이라 하고 무생멸법(無生滅法)을 자연이라 한다. 
생멸법에 집착함을 자연이라 하는데 이 자연은 이내 생멸법으로 돌아가므로 적멸법이 아니다.ㅡ한울림  

 

菩提涅槃尚在遙遠,非汝歷劫辛勤修證,雖復憶持十方如來、十二部經,淸淨妙理如恒河沙,秖益戲論。

보리(菩提)와 열반(涅槃)이 아직도 아득하고 멀어서 네가 여러 겁(劫) 동안에 애써서 닦는 것으로 증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비록 다시 시방 여래의 12부경(十二部經) 청정하고 미묘한 이치를 기억해 가짐이 항하강의 모래 수와 같이 많을지라도, 단지 쓸모없는 희론(戱論) 더할 뿐이다.

많이 듣기만 하고 수행하지 않으면 큰 이익이 없다는 다문불수행(多聞不修行) 어법무대익(於法無大益)이다.

수행은 신해행증(信解行證)이다. 듣는 것은 수행하여 깨닫기 위한 도구이며,

다문은 신해(信解)에 해당하고, 신해(信解)한 후에는 행증(行證)이 필요하다.

규봉 종밀선사는 식자간경원불증오(識字看經元不證悟) 소문석의유치탐진(鎖文釋義唯熾貪瞋)이라 했다.

글이나 경을 보는 것으로는 깨칠 수가 없고, 문장을 해석하는 것은 오직 탐진치 사견만 더할 뿐이다.

자경문(自警文)에는 삼일수심천재보(三日修心千載寶) 백년탐물일조진(百年貪物一朝塵) 이라는 말이 있다.

사흘 닦은 마음은 천년의 보배요, ​백 년 탐한 재물은 하루아침의 티끌이라는 뜻이다. 역시 수행을 강조하신 말씀이다.-향적법진

 

12부경(十二部經), 부처님 일대 교설을 그 경문의 성격과 형식으로 구분하여서 12 가지로 나눈것. 

1. 수다라(修多羅)-계경(契經), 경(經) ㅡ 관경(貫經)

2. 기야(祈夜)-중송(重頌), 응송(應頌), 가(歌) ㅡ 기야경(祇夜經)

3.수기(受記)-화가라(和伽羅), 기별(記莂), 설(說) ㅡ 수기경(受記經)

4.가타(伽陀)-고기송(孤起頌), 송(頌) ㅡ 게경(偈經)

5.우타나(優陀那)-무문자설(無問自說), 자설(自說) ㅡ 법구경(法句經)

6.니타나(尼陀那)-인연담(因緣譚), 인연(因緣), 연기(緣起) ㅡ 천본경(天本經)

7.아파타나(阿波陀那)-비유(譬喩), 비유담(譬喩譚) ㅡ 증유경(證喩經) 비유경(譬喩經)

8.이제왈다가(伊帝曰多伽)-여시어(如是語), 여시법(如是法), 본사(本事) ㅡ 상응경(相應經)

9.사다가(闍多伽)- 본생담(本生譚), 본생(本生) ㅡ 본연경(本緣經)

10.비불략(毗佛略)-방광(方廣), 방등(方等), 광박(廣博) ㅡ 광경(廣經)

11.아부다달마(阿浮多達磨)-미증유법(未曾有法), 희법(稀法) ㅡ 미증유경(未曾有經)

12.우파제사(優波提舍)-논의(論議), 축분별소설(逐分別所說) ㅡ 대교경(大教經)

 

汝雖談說因緣自然決定明了,人閒稱汝多聞第一,以此積劫多聞薰習,不能免離摩登伽難,何因待我佛頂神呪,摩登伽心婬火頓歇得阿那含,於我法中成精進林,愛河乾枯令汝解脫。

네가 비록 인연과 자연의 이치를 설명함에 있어서 결정코 분명하고 명료하므로 사람들이 너를 일컬어 들은 지식이 뛰어난 다문제일(多聞第一)이라고 칭하였다.

이렇게 여러 겁을 지내오는 동안 많이 들음만 쌓아 익히는 훈습(薰習)을 하였지만, 마등가(摩登伽)의 유혹을 벗어날 수가 없었으니,

어찌하여 나의 불정신주(佛頂神呪)를 기다려서 마등가의 마음에 음욕의 불꽃이 다하여 없어지게 하고,

아나함과(阿那含果)를 증득하여, 나의  가운데 정진림(精進林)을 이루고 애욕의 강물을 말려서 너를 해탈케  것이냐!


是故阿難!汝雖歷劫憶持如來秘密妙嚴,不如一日修無漏業,遠離世閒憎愛二苦;

그러므로 아난아, 네기 비록  동안 여래의 비밀스럽고 묘한 비밀묘엄법(祕密妙嚴법) 기억해 가졌다 할지라도, 단 하루 동안 무루도(無漏道)를 닦아서 세간에서 미워하고 좋아하는 이고(二苦)를 멀리 벗어나는 것만 못한 것이니.

ㅡ인연이나 자연이 변론(辯論)에는 유익하겠지만, 도(道)에는 유익함이 없으며,

다문제일(多聞第一)은 명성에는 유익하겠지만, 실제에는 유익함이 없기 때문에 비록 여러 겁 동안 훈습하였다고 할지라도 마등가의 유혹을 면치 못한 것이다.

무루도(無漏道)는 수능엄(首楞嚴)의 정혜(定慧)를 말한다.

이고(二苦)는 소지장(所知障)과 번뇌장(煩惱障)을 말하며,

보리심이 생긴 후 현행하는 거친 생멸심을 점점 없애는 것을 생멸심이 멸한 멸진(滅盡)이라 하며,   
보살이 초신위(初信位)에 올라서 현행하는 생멸심을 항복시키면 먼저 번뇌장(煩惱障)이 없어지고, 
7주위(七住位)에 올랐을 때 현행하는 생멸심을 항복시키면 소지장(所知障)의 번뇌가 사라진다.
 

如摩登伽宿爲婬女,由神呪力銷其愛欲,法中今名性比丘尼,與羅睺羅母耶輸陁羅同悟宿因,知歷世因貪愛爲苦,一念薰修無漏善故,或得出纏、或蒙授記。如何自欺,尚留觀聽?”

마등가와 같은 경우는 전생에 음녀(婬女)였으나, 신비한 주문인 신주(神呪)의 힘으로  애욕을 소멸하여, 지금은 나의 법(法) 가운데에서 성비구니(性比丘尼)라는 이름을 얻었으니, 라후라(羅睺羅)의 어머니인 야수다라(耶輸陀羅)와 함께 과거 세상의 인연인 숙인(宿因) 깨달아 많은 세상을 지내는 동안 맺어온 인연이 탐욕과 애욕으로 인하여 괴로움이 된 것임을 알고서,

일념으로 샘이 없는 무루(無漏)의 선(善)을 닦아 익혔으므로 혹은 얽매임에서 벗어나기도 하고, 혹은 수기를 받기도 하였는데, 

너는 어찌하여 스스로 속아서 아직도 보고 듣는 경계에만 머물러 있는 것인가?

ㅡ마등가를 번역하면 본성(本姓)이므로 성비구니(性比丘尼)라고 이름한 것이다.

'얽매임에서 벗어났다'는 것은 곧 마등가를 가리키는 것이고, 

'수기를 받기도 한다'는 것은 야수다라(耶輸陀羅)를 가리킨 것이다.

처음에는 참됨의 진(眞)과 거짓됨의 망(妄)을 가려서 깨달음의 성품임 각성(覺性)을 밝히고

여기에서는 일체법을 깊이 궁구하여 의심으로 막힌 것을 통하게 하였으니,

참된 수행으로 하여금 신해(信解)가 진실하고 정직해서 인지심(因地心)으로 삼게한 것으로,

인지심(因地心)이 진실해야 과지(果地)를 닦아서 증득을 원만하게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이상으로 견도분(見道分)을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