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십행품(十行品) 9 - 난득행(難得行)-원바라밀
10. 第八 難得行 願波羅密
亂得行은 원바라밀을 體로 삼고, 70행의 경문을 여섯 단락으로 나누며
첫째 “불자야” 이하 “하나인 성품의 선근”까지는 이 지위 가운데 10선근을 밝힌 분(分)이다.
둘째 “이 보살” 이하 “불퇴전을 얻는다”까지 8행 반은 괴로움에 처하면서도 싫어함이 없음을 밝힌 분이다.
셋째 “이 보살이 비록 중생이 有가 아님을” 이하 “왜냐 하면”까지는 중생계를 버리지도 않고 집착하지도 않음을 밝힌 분.
넷째 “보살이 깊이 중생계에 들어가” 이하 “果를 얻는 것이 아니다”까지 14행은 보살이 중생계에 들어가 집착하지 않으면서도 늘 세간에 몸을 나타내서 중생을 제도함을 폐하지 않음을 밝힌 分이다.
다섯째 “보살이 이같음을 성취해서” 이하 “세간에 집착하지 않는다”19행까지는 설하지 않고서도 법을 설함이 자재로움을 밝힌 분이다.
여섯째 “보살이 이처럼” 이하 “제8 난득행”까지 14행 반은 보살행을 행하면서도 과보를 구하지 않음을 밝힌 분이다.
(1) 十種善根
佛子야 何等이 爲菩薩摩訶薩의 難得行고 此菩薩이 成就難得善根과 難伏善根과 最勝善根과
不可壞善根과 無能過善根과 不思議善根과 無盡善根과 自在力善根과 大威德善根과
與一切佛同一性善根하나니라
難得行(난득행). 얻기 어려운 행.
佛子야 불자여, 何等이 어떤 것이 爲菩薩摩訶薩의 보살마하살의 難得行고? 난득행=얻기 어려운 행이겠는가
此菩薩이, 이 보살은 成就難得善根(성취난득선근)과, 얻기 어려운 선근,
難伏善根(난복선근)과, 조복하기 어려운 선근, 最勝善根(최승선근)과, 가장 수승한 선근,
不可壞善根(불가괴선근)과,무너뜨릴 수 없는 선근, 無能過善根과, 능가할 수 없는 선근,
不思議善根(불사의선근)과 불사의한 선근, 無盡善根(무진선근)과 다함 없는 선근,
自在力善根(자재력선근과 자재한 힘의 선근, 大威德善根(대위덕선근)과 큰 위덕의 선근을 成就= 성취하여
與一切佛同一性善根(여일체불동일성선근)하나니라. 부처님들과 선근이 동일한 성품입니다.
[일체부처님으로 더불어 동일한 성품인 선근을 成就=성취하느니라.]
(2) 善根修行의 得益
此菩薩이 修諸行時에 於佛法中에 得最勝解하며 於佛菩提에 得廣大解하며 於菩薩願에 未曾休息하며
盡一切劫토록 心無疲倦하며 於一切苦에 不生厭離하며 一切衆魔의 所不能動이며 一切諸佛之所護念이며
具行一切菩薩苦行하며 修菩薩行하야 精勤匪懈하며 於大乘願에 恒不退轉이니라
此菩薩이 이 보살은 修諸行時에, 모든 행을 닦을 때에 於佛法中에, 부처님 법 중에
得最勝解(득최승해)하며, 가장 수승한 이해를 얻고
[불법 가운데서 最勝解= 가장 수승한 이해. 어떤 존재에 대한 이해. 인생에 대한 이해. 명예에 대한 이해. 재산에 대한 이해. 사람에 대한 이해. 모든 것에 대해서 우리는 전부 나름대로의 이해를 가지고 있는데, 그 이해의 저변에 ‘무엇을 근거로 그렇게 이해하고 있는가?’그것은 그 사람이 살아온 것과, 교육과 환경과 또 화엄경을 공부 했으면 화엄경을 바탕으로 해서 이해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해하는 것이 다 다릅니다. 그러나
불법 가운데서 最勝解를 얻어야 됩니다. 갈등할 때가 참 많지요. ‘아이고 화엄경대로라면 이런 것인데, 내 삶, 탐 진 치는 이런 것이다.’ 탐 진 치와 화엄경 사이에서 갈등하는 경우가 많잖아요. 공부를 안 했으면 탐 진 치 시키는 대로 그냥하면 되겠는데, 그래도 들은 것은 있고 배운 것은 있어서, 알고는 있지만 그래도 탐 진 치가 계속 발동을 해서 탐 진 치 쪽으로 가자고 계속 끌어당기는 겁니다. 그래 갈등하는 겁니다. 갈등하는 사람은 그래도 그런대로 괜찮은 사람입니다. 아예 갈등도 안하고 그냥 탐 진 치 쪽으로 엎어져버리는 사람들이 무수히 많거든요.]
於佛菩提(어불보리)에, 불보리에 得廣大解(득광대해)하며, 광대한 이해를 얻으며, 於菩薩의 願(원)에 보살의 서원에서
未曾休息(미증휴식)하며, 일찍이 쉬어본 적 없이 盡一切劫(진일체겁)토록, 일체 겁이 다하도록
心無疲倦(심무피권)하며,마음에 疲=피로나 倦=권태가 없고 [疲厭(피렴)= 疲倦 = 厭足(염족) 같은 뜻]
於一切苦(어일체고)에 모든 고통에도
不生厭離(불생염리)하며, 마다하는 마음을 내지 않으며,[厭離= 싫어서 떠나려는 마음을 내지 아니하며],
一切衆魔(일체중마)의, 일체의 마군이
마군이= 탐 진 치. 탐 진 치 하자는 대로하면 마군이에게 끌려가는 것이 되고, 화엄경 대로하면 마군이를 물리치는 것입니다
所不能動(소불능동)이며, 흔들 수 없고 [여러 마군이의 능히 움직이는 바가 되지 못하며,]
一切諸佛之所護念(일체제불지소호념)이며, 모든 부처님들이 호념하시며,
具行一切菩薩苦行(구행일보살고행)하며, 일체 보살이 고행을 갖추어서 행하며,
修菩薩行(수보살행)하야, 보살행을 닦기에 정근하고 精勤匪懈(정근비해)하며, 나태하지 아니하며,
於大乘願(어대승원)에 대승의 서원에서 恒不退轉(항불퇴전)이니라. 항상 물러나지 않습니다.
(3) 難得行의 利益
是菩薩이 安住此難得行已하야는 於念念中에 能轉阿僧祗劫生死하야 而不捨菩薩大願하나니
若有衆生이 承事供養하며 乃至見聞이라도 皆於阿耨多羅三藐三菩提에 得不退轉이니라
是菩薩(시보살)이, 이 보살이 安住此難得行已(안주차난득행이)하야는, 이 얻기 어려운 행에 안주하고는
於念念中(어념념중)에 매 순간순간마다
能轉阿僧祗劫生死(능전아승지겁생사)하야, 능히 아승지 겁의 생사를 구르면서도
而不捨菩薩大願(이불사보살대원)하나니, 보살의 대원을 버리지 않기에
[끊임없이 생사를 쫓아가면서 생사를 반복해서 죽고 태어나고ㆍ죽고 태어나지만, 그 가운데서 보살의 큰 원을 버리지 않는 이것이 중요한 것이지요.]
若有衆生(약유중생)이 만약 어떤 중생이 承事供養(승사공양)하며, 승사공양하거나
乃至見聞(내지견문)이라도, 보고 듣기만 하더라도
皆於阿耨多羅三藐三菩提(개어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모두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서
得不退轉(득불퇴전)이니라. 물러남이 없게 됩니다. 물러나지 아니함을 얻음이니라.
(4) 衆生濟度의 譬喩(중생제도비유)
此菩薩이 雖了衆生非有나 而不捨一切衆生界하나니 譬如船師가 不住此岸하며 不住彼岸하며
不住中流하고 而能運度此岸衆生하야 至於彼岸하나니 以往返無休息故인달하니라
此菩薩이, 이 보살이 雖了衆生非有(수요중생비유)나, 비록 중생이 있지 않는 줄 알지만
而不捨一切衆生界(이불사일체중생계)하나니, 일체의 중생계를 버리지 아니하나니
[비록 중생이 본래 있지 아니함을 아나, → 보살의 안목에는 중생이 본래 없습니다. 중생이 본래 空, 空觀입니다. ‘아직 중생은 탐 진 치 3독으로 가득찬 중생일 뿐이야.’ 이것은 假觀이라 그럽니다. ‘아니야, 그래도 중생은 불성을 가졌기에 본래 부처야.’ 다이아몬드가 아직 제련이 안 됐다 손치더라도 다이아몬드입니다. “眞觀(진관)”
거짓으로 보는 假觀(가관), 俗觀(속관)= 속된 안목으로 보는 것. ‘탐 진 치 3독으로 찌든 중생일 뿐이지, 네나 내나 뭐 다를 것이 뭐 있냐?’고 처음부터 끝까지 그렇게만 보면 假觀이고요.
반야심경, 금강경, 600부 반야부의 안목으로 無眼耳鼻舌身意 無色聲香味觸法으로 보는 것은 空觀입니다.
그런데 법화경, 화엄경 같은 아주 실다운 대승의 일불승의 안목으로 보면 그대로 부처입니다.
금광에서 캔 금에 비록 돌도 섞였고, 철도 섞였다 하더라도 금은 금지요. 그렇게 긍정적으로 보는 안목을 가지는 것이 법화경과 화엄경의 안목입니다. 그것이 제일의제로 보는 것이고, 중도로 보는 것이고, 청정하게 보는 것이지요.
그것을 교리 상으로서는 相宗ㆍ空宗ㆍ性宗. 그렇게 말하잖아요. 공 성 상, 3종. 여기서는 衆生非有나 而不捨一切衆生界라. 중생이 있지 아니한 공한 것으로 알지만, 일체 중생계를 버리지 아니하나니,]
譬如船師(비여선사)가, 비유컨대 마치 뱃사공이 不住此岸(부주차안)하며, 이 언덕에 머물지 않고
不住彼岸(부주피안)하며, 저 언덕에도 머물지 않고 不住中流(불주중류)하고, 그 중간에도 머물지 않고서도
而能運度此岸衆生(이능운도차안중생)하야, 이 언덕의 중생을 건네어
至於彼岸(지어피안)하나니, 저 언덕에 이르게 할 수 있는 것은
以往返無休息故(이왕반무휴식고)인달하니라. 往返= 가고 돌아 오기를 쉬지않고 하기 때문이듯이 [보살은 중생과 더불어 탐 진 치를 굴리고, 생사를 같이하면서도 항상 중생을 구하는 마음으로 사는 것이 보살 마음입니다.]
[[ 천태교학에서는 실상의 진리를 나타내는 ‘삼제원융(三諦圓融)’을 역설한다. 공(空)ㆍ가(假)ㆍ중(中) 3제(三諦)란 모든 것은 실체로서 존재가 아니라 공(空)으로서 존재이며, 또한 연(緣)에 의해 가(假)로 존재하는 가적(假的)인 것이며, 더욱이 공이나 가의 어느 일면으로서는 파악할 수 없는, 사려분별을 초월한 절대존재로서의 중(中)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일체의 것은 이처럼 3제의 면을 갖고 있으며, 더욱이 3제가 원융한 곳에 그 자체의 진실성이 있다고 하는 삼제원융(三諦圓融)이 주장된다. 모든 현상은 불변하는 실체가 없으므로 공(空)이고, 또 서로 의존해 일어나는 일시적인 현상으로 가(假)이며, 그리고 이 둘의 어느 한쪽에도 치우치지 않은 것이 중(中)이다. 그리고 이 세 가지가 막힘이 없이 어울린 원만한 모습이 삼제원융(三諦圓融)이라는 것이다.
용수(龍樹, 나가르주나)가 확립한 공관(空觀)ㆍ가관(假觀)ㆍ중관(中觀) 삼관법(三觀法)이 중국으로 전해져서 수나라 때 천태대사(538년∼597년) 지의(智顗-智者)가 세운 천태삼관(天台三觀)의 모태가 됐다. 천태삼관(天台三觀)을 ‘일심삼관(一心三觀)’이라 일컫는데, 즉, 공관(空觀)ㆍ가관(假觀)ㆍ중관(中觀)을 말한다. 이러한 삼관은 차차 관(觀)이 깊어지는 단계를 말하는데, 공(空)ㆍ가(假)ㆍ중(中) 세 가지 진리를 한마음 가운데서 원만하게 체득하는 것을 일심삼관이라 한다.
가관(假觀)이란 모든 현상은 여러 인연의 일시적인 화합으로 존재한다는 주장으로서, 우주의 모든 존재는 공(空)한 것이어서 실재(實在)하는 것이 아니므로, 비록 모양을 갖추고 있는 것이라도 실체가 없는 임시적인 가(假)의 존재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 가관(假觀)을 종공입가관(從空入假觀)이라고도 한다. 모든 사물은 공(空)한 것이지만 가(假)라는 모양을 실어 표출된다는 말이다. 공관은 만유현상을 거울에 나타난 허상처럼 보는 것이고, 가관은 거울에 나타난 허상이 비록 실물이 아니나 보는 이의 시각에 들어와 차별을 느끼도록 하기에 그 허상대로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차별의 허상을 그대로 인식하게 된다. 그래서 가관이라 한다. 중생들이 보는 현상 세계가 바로 가관이다.
이와 같이 만유의 모든 법은 공한 것이어서 하나도 실재한 것이 없으나, 그 모양이 분명한 것은 대개 가(假)의 존재라고 관한다. 즉,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고, 사물을 가설로 생각해 명상하는 것이 가관이다. → 일심삼관법(一心三觀法), 천태삼관(天台三觀), 공관(空觀), 중관(中觀), 종공입가관(從空入假觀) 참조.
다음은 ❮염불론❯으로 유명한 청나라 말기 담허(1875∼1963) 대사의 법문이다.
『어디에 또 ‘나’가 있겠는가일곱 가지 인연이 모여서 ‘나’를 형성했지만 사실상 더러운 껍데기에 불과하다. 그 속에는 비린내 나는 더러운 물건들이 담겨져 있다. 지금 이 법문을 하는 이때, 어떤 사람이 가죽으로 된 자루에 똥을 가득 담고 꽁꽁 묶어서 이 법당에 들여 놓는다면, 우리는 더럽다고 코를 잡고 멀리 피할 것이다. 혹은 재빨리 이 자루를 법당 밖으로 멀리 버릴 것이다. 하지만 사실 우리들은 누구나 다 이 똥자루와 같다. 우리의 이 자루는 진짜 가죽자루에 똥을 담은 것보다 결코 깨끗하지 못하다. 왜냐하면, 이 자루는 아가리를 묶어 놓았지만 사람들의 이 자루는 아래위로 입을 벌리고 있으며, 더러운 냄새를 풍기고 아홉 구멍으로는 항상 부정한 것들이 흐르고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 더러운 가죽자루를 ‘나’라고 집착하고 아끼고 또 아낀다. 이렇게 화장도 하고, 저렇게 보양(保養)도 한다. 부처님의 눈으로 봤을 땐 어리석기 짝이 없다. 우리가 '나'라고 생각하는 이 몸은 ‘나’가 아니라 내가 사용하고 있는 하나의 물건이며, 나(我) 밑에 적(的)이란 글을 붙여 나의 것이라 불러야 한다.
왜냐하면 이 몸은 나의 일부분이며, 마치 나의 물건과 같아 내가 사용하고자 할 때 사용하고, 사용하지 않을 땐 놓아 버리고, 폐가 되지 않아야 한다. 만약 내려놓지 못한다면 육신의 폐를 입게 될 것이다. 보통 사람들의 습관은 이 몸을 ‘나’라고 여기고, 나 밖은 사람(人-남)이며, 많은 사람이 모여서 중생이 된다. 모든 중생들이 오래 살고자하는 생각은 이어져 끊이지 않는데, 이것이 수자(壽者-생멸체, 목숨)이다. 사실 이런 것들은 모두 가명(假名)과 가상(假相)이다. → 담허(1875∼1963) 참조. - 출처; 오디오와 컴퓨터]]
(5) 譬喩와 法
菩薩摩訶薩도 亦復如是하야 不住生死하며 不住涅槃하며 亦復不住生死中流하고 而能運度此岸衆生하야
置於彼岸의 安隱無畏無憂惱處호대 亦不於衆生數에 而有所着하야 不捨一衆生하고 着多衆生하며 不捨多衆生하고
着一衆生하며 不增衆生界하고 不減衆生界하며 不生衆生界하고 不滅衆生界하며 不盡衆生界하고
不長衆生界하며 不分別衆生界하고 不二衆生界니라
菩薩摩訶薩도 亦復如是(역부여시)하야 보살마하살도 이와 같아서 不住生死(불주생사)하며, 생사에도 머물지 않고
不住涅槃(부주열반)하며, 열반에도 머물지 않으며
[“열반에 머문다”는 것은 소승불교입니다. 화엄경은 소승ㆍ중승ㆍ대승불교를 아우르기 때문에 왔다ㆍ갔다하는 겁니다. 10지 품에 가면 근본불교의 교리들을 다 이야기해놓고, 결국은 전부 불승으로 회향하도록 되어있습니다. 중국ㆍ대만ㆍ한국ㆍ일본, 베트남까지 대승불교인데 요즘 남방불교에서 공부한 사람들이 와서 “열반이 최고다.”라고 하는 겁니다. 不住涅槃 열반에 머물지 않고 물론 생사에도 머물지 아니합니다]
亦復不住生死中流(역불주생사중류)하고, 또 생사의 중간의 흐름에도 머물지 않고
而能運度此岸衆生(이능운도차안중생)하야, 이 언덕의 중생을 건네어 置於彼岸(치어피안)의, 저 언덕의
安隱(穩)無畏無憂惱處(안은(온)무외무우뇌처)호대, 안은하고 두려움 없고 근심 번뇌도 없는 곳에 이르게 하되
[대승보살에게는 此岸, 彼岸, 涅槃이 없습니다. 오로지 불쌍한 중생만 있을 뿐입니다. 증엄스님 이야기를 제가 여러 수차 하는데요. 증엄스님에게는 기독교도 불교인도 눈에 없습니다. 오로지 고통 받는 중생이 있을 뿐입니다. 교회가 떠내려가서 예배 못 보고 있는 불쌍한 중생만 생각해서 교회를 지어주고 학교를 지어주고 마을을 지어 준 일들의 사진들을 전시를 한 그것은 相내고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교육차원에서 ‘부처님의 자비는 이런 것이다.’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것이 보살불교이고, 보살불교가 가장 정상적인 불교입니다. 성불해서 다시 보살행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성불은 중간과정입니다. 지장보살ㆍ관세음보살ㆍ문수ㆍ보현이 전부 다 성불해서 다시 보살로 돌아온 사람들이지, 그들이 중간과정에 있는 보살이 아닙니다.]
亦不於衆生數(역불어중생수)에, 역시 중생의 수에 而有所着(이유소착)하야, 집착하지 않아서
[저 중생들은 내가 이렇게ㆍ이렇게 해서 건져서 편안하고 두려움이 없는 곳에 뒀다는 생각 전혀 하지 않아서]
不捨一衆生(불사일중생)하고, 한 중생을 버리고 着多衆生(착다중생)하며, 많은 중생에 집착하거나
不捨多衆生(불사다중생)하고, 많은 중생을 버리고 着一衆生(착일중생)하며, 한 중생에게 집착하지 않으며,
[많고 적은 수에 관계하지 않고, 기독교인, 불교인 관계하지 아니하고 오로지 불쌍한 중생들만 구제한다.]
不增衆生界(부증중생계)하고, 중생계를 늘리지도 않고 不減衆生界(불감중생계)하며, 줄이지도 않고
不生衆生界(불생중생계)하고 중생계를 생기게 하지도 不滅衆生界(불감중생계하며 멸하게 하지도 않으며,
不盡衆生界(불진중생계)하고 중생계를 다하게 하지도 不長衆生界(불장중생계)하며 길게 하지도 않으며,
不分別衆生界(불분별중생계)하고 중생계를 분별하지도 않고
不二衆生界(불이중생계)니라. 둘이 되게 하지도 않습니다. 중생계를 둘로 여기지 아니하느니라.
[不生ㆍ不滅ㆍ不增ㆍ不減, 不盡ㆍ不長ㆍ不分別]
[[보살의 경지는 不二로 대변됩니다. 깨달음을 얻고 중생을 돌아보지 않는 자는 깨달은 자로 볼수 없고 깨달음을 얻을수도 없습니다.]]
(6) 因由 까닭을 말함
何以故오 菩薩이 深入衆生界如法界하야 衆生界와 法界가 無有二하야 無二法中에 無增無減하며 無生無滅하며
無有無無하며 無取無依하며 無着無二니 何以故오 菩薩이了一切法이 法界無二故니라
何以故(하이고)오 왜냐하면, 菩薩이 보살은
深入衆生界如法界(심입중생계여법계)하야, 중생계에 깊이 들어가기를 법계와 같이해서
衆生界와 法界가 중생계와 법계가 無有二하야, 둘이 없고
無二法中에, 둘 없는 법 안에는 無增無減(무증무감)하며 증감도 없고
無生無滅(무생무멸)하며 생멸도 없으며, 無有無無(무유무무)하며, 있음도 없고 없음도 없으며,
無取無依(무취무의)하며, 취함도 의지함도 없고, 無着無二(무착무이)니, 집착도 없고 둘도 없음이니
何以故오 菩薩이 그것은 보살이 了一切法(료일체법)이 일체법이
法界無二故(법계무이고)니라. 법계에 둘이 없음을 요달했다는 것입니다.
[법계로서 둘이 없음을 요달= 깨달아 안 까닭이다. → 보살은 이렇게 이해한다.]
(7) 動靜無碍(동정무애)
菩薩이 如是以善方便으로 入深法界일새 住於無相호대 以淸淨相으로 莊嚴其身하며
了法無性호대 而能分別一切法相하며 不取衆生호대 而能了知衆生之數하며
不着世界호대 而現身佛刹하며 不分別法호대 而善入佛法하며 深達義理호대 而廣演言敎하며
了一切法離欲眞際호대 而不斷菩薩道하고 不退菩薩行하며
常勤修習無盡之行호대 自在入於淸淨法界하나니라
菩薩이 보살은 如是以善方便(여시이선방편)으로, 이와 같은 훌륭한 방편으로
入深法界(입심법계)일새, 법계에 깊이 들어가서 住於無相(주어무상)호대, 無相=모양 없는 데에 머물되
以淸淨相(이청정상)으로 청정한 모양으로 莊嚴其身(장엄기신)하며, 그 몸을 장엄하고
[萬善同歸中道頌(만선동귀중도송)에 鑒無身而具相(감무신이구상)하며 본래 상이 없는 것을 환히 깨달을 때, 아주 온갖 중생들이 좋아할 모습을 갖추는 겁니다. 반야심경에서 관세음보살이 無眼耳鼻舌身意 無色聲香味觸法 전부 空하다고 했지만, 그 관자재보살은 아주 화려한 화장과 치장을 하고 있습니다. 고려 불화에 보면 옷을 겹겹이 입었어도 살이 비칠 정도의 고급 천으로 만든 옷을 입었고 제일 비싼 진주영락을 걸친 분이 관세음보살입니다. 그런데 그 분이 그렇게 상 갖추기를 좋아 하면서 無眼耳鼻舌身意 無色聲香味觸法. 거기에서 우리가 中道를 발견해야 됩니다. 無眼耳鼻舌身意가 없는 줄을 누구보다도 잘 알면서도 중생을 위해서, 중생의 구미에 맞도록ㆍ중생의 근기에 맞추어서 그렇게 아름답게 치장하고 비싼 장엄을 다 하는 겁니다. 그것이 관세음보살의 중생을 위한 마음입니다.
여기에도 住於無相호대, 상이 없다고 하는 이치에 아주 밝아서 無相에 머물되, 以淸淨相으로, 훌륭한 모습으로써
其身을 莊嚴. 그 몸을 장엄한다.]
了法無性(료법무성)호대, 법의 성품이 없음을 깨달아 알되
而能分別一切法相(이능분별일체법상)하며, 일체법의 모양을 능히 분별하며,
[일체법상을 능히 분별하며,法相, 불교 교리만치 복잡한 종교 철학이 어디 있나요?]
不取衆生(불취중생)호대, 중생을 취하지 않되 而能了知衆生之數(이능료지중생지수)하며, 중생의 수를 능히 알고
不着世界(불착세계)호대 세계에 집착하지 않되 而現身佛刹(이현신불찰)하며, 부처님 세계에 몸을 나투며,
不分別法(불분별법)호대, 법을 분별하지 않되 而善入佛法(이선입불법)하며, 부처님 법에 잘 들어가고
深達義理(심달의리)호대, 이치에 깊이 통달하였으되 而廣演言敎(이광연언교)하며, 말의 가르침을 널리 펼치며,
[眞理는 離言(진리이언)입니다. 참다운 이치는 말을 떠났습니다. 말을 떠난 것이 진짜 眞理= 이치입니다. 그런데 깊이 이치를 통달한 부처님처럼 廣演言敎하신 사람이 세상에 또 없습니다]
了一切法離欲眞際(요일체법이욕진제)호대, 일체법의 탐욕을 떠난 眞際= 참된 경계= 진리를 알되
[歸依法離欲尊(귀의법이욕존). 구체적으로 불법은 離欲= 욕심을 떠나는 것입니다. 아주 참 고상하고 의미심장한 교설들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그 대표적인 하나가 離欲욕심 떠나는 것에 나는 歸依하노라. 그것이 歸依法離欲尊입니다.]
[離欲眞際. 진리, 우리 진여자성에는 욕심이 본래 없는데, 언제부터인가 탐 진 치 3독으로 욕심을 부리는 것이지요.]
而不斷菩薩道(이부단보살도)하고, 보살도를 단절하지 않아서
不退菩薩行(불퇴보살행)하며, 보살행에서 물러나지 않고
常勤修習無盡之行(상근수습무진지행)호대, 항상 다함없는 행을 힘써 닦고 익히되
自在入於淸淨法界(자재입어청정법계)하나니라. 청정법계에 자재히 들어가나니라.
[이것이 전부 中道입니다. 예를 들어서 불법에 잘 들어가려면 법에 잘 집착해서 누구보다도 불법을 소상하게 분별해야 지겠지만, 법을 분별하지 아니하되 善入佛法하며, 불법에 잘 들어간다. 전부 그렇게 이율배반적으로 전개되는 것이 관세음보살을 떠올리면 이해하기 제일 쉽습니다]
(8) 譬喩
譬如鑽木하야 以出於火에 火事無量이나 而火不滅인달하야 菩薩도 如是하야
化衆生事가 無有窮盡이나 而在世間하야 常住不滅이니라
譬如鑽木(비여찬목)하야, 비유컨대 나무를 끌어 모아 以出於火(이출어화)에, 불을 피우면
火事無量(화사무량)이나, 불이 한량없이 타올라 而火不滅(이화불멸)인달하야, 불길이 사그라지지 않듯이
菩薩도 보살도 如是하야, 그와 같이 化衆生事(화중생사)가, 중생을 교화하는 일이
無有窮盡(무유궁진)이나, 결코 끝이 없어서 而在世間(이재세간)하야, 세간에
常住不滅이니라. 항상 머물러 멸하지 않음이라
[중생을 교화하려면 세간에 있어야 하는 것이 연꽃과 같은 처염상정의 이치입니다.]
(9) 二行雙遮(이행쌍차) 2행을 쌍으로 부정하다.
非究竟이며 非不究竟이며 非取며 非不取며 非依며 非無依며 非世法이며 非佛法이며 非凡夫며 非得果니라
[二行雙遮(이행쌍차). 雙遮雙照(쌍차쌍조). 중도를 이야기할 때 쌍으로 긍정하는 것을 雙照,
쌍으로 부정하는 것을 雙遮, 비출 조. 遮, 막을 차.]
非究竟(비구경)이며 구경함도 아니요 非不究竟(비불구경)이며,구경하지 않음도 아니며,
非取(비취)며 취함도 아니요 非不取며, 취하지 않음도 아니며,
非依(비의)며 의지함도 아니요 非無依며, 의지함이 없는 것도 아니며,
非世法(비세법)이며 세간법도 아니요 非佛法이며, 불법도 아니며,
非凡夫(비범부)며 범부도 아니요 非得果 (비득과)니라. 과를 얻음도 아닌 것입니다.
[아닐 비가 앞에 전부 있는 것이 雙遮입니다. 2행을 쌍으로 부정하는 내용입니다.]
(10) 昇進勝行(승진승행) 더욱 수승한 행에 나아가다
菩薩이 成就如是難得心하야 修菩薩行時에 不說二乘法하고 不說佛法하며 不說世間하고 不說世間法하며
不說衆生하고 不說無衆生하며 不說垢하고 不說淨하나니
何以故오 菩薩이 知一切法이 無染無取며 不轉不退故로 菩薩이 於如是寂滅微妙甚深最勝法中修行時에
亦不生念호대 我現修此行하며 已修此行하며 當修此行이라하야
不着蘊界處와 內世間外世間內外世間하고 所起大願諸波羅蜜과 及一切法에 皆無所着이니라
菩薩이 成就如是難得心(성취여시난득심)하야, 보살은 이러한 난득심= 얻기 어려운 마음을 성취하고
修菩薩行時(수보살행시)에, 보살행을 닦을 때에는 不說二乘法(불설이승법)하고, 이승법도 설하지 않고
不說佛法(불설불법)하며 불법도 설하지 않으며, 不說世間(불설세간)하고, 세간도 설하지 않고
不說世間法(불설세간법)하며, 세간법도 설하지 않으며, 不說衆生(불설중생)하고, 중생도 설하지 않고
不說無衆生(불설무중생)하며, 중생없음도 설하지 않으며, 不說垢(불설구)하고, 때 묻음도 설하지 않고
不說淨(불설정)하나니, 깨끗함도 설하지 않는데,
[難得心, 얻기 어려운 마음이라는 것이 色ㆍ受ㆍ想ㆍ行ㆍ識의 오온의 나를 초월한 참나ㆍ참마음ㆍ참사람, 임제스님이 강력하게 주장하는 차별 없는 참사람= 無位眞人(무위진인)의 세계를 말 하는 것입니다]
何以故오? 그것은 菩薩이 보살이 知一切法이 無染無取(무렴무취)며, 일체법이 물듦도 취함도 없고
[일체법= 눈으로 보이는 현상과, 눈에 보이지 않는 본질의 두가지 측면에서 그 본질의 입장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不轉不退故(부전불퇴고)로, 전변하지도 물러나지도 않음을 知=알기 때문입니다.
[일체법의 절대적인 본질의 입장은 그렇다는 것입니다.]
菩薩이 보살은 於如是, 이러한 寂滅ㆍ微妙ㆍ甚深ㆍ最勝法中修行時(적멸 미묘 심심 최승법중수행시)에,
적멸하고 미묘하며 심오하고 수승한 법 안에서 수행을 할 때에도
[중생은 그 자리를 전혀 모른 채 오온만을 가지고 살아가지만, 깨달은 사람들과 부처님은 그 자리= 적멸하고ㆍ미묘하고ㆍ심심하고ㆍ최승한 법에 있으면서 오온을 행사합니다. 육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오온을 행사하지 않을 수가 없지요.
그것이 우리들하고 다른 점입니다. 말하자면 참마음 자리에 뿌리를 내리고 오온의 행을 행하는 그것입니다.]
亦不生念호대, 또한 생각을 내지 아니하되, 我現修此行(아현수차행)하며, 나는 현재 이 행을 닦고
已修此行(이수차행)하며, 이미 닦았으며 當修此行(당수차행)이라하야, 장차 닦으리라. (亦不生念=하는 생각도 내지 않고)
不着蘊界處(불착온계처)와, 오온계= 五蘊ㆍ十二處ㆍ十八界(오온십이처십팔계)처와
內世間 外世間(내세간외세간) 내세간, 외세간, 내외세간에도 不着= 집착하지 않으며
[우리는 오온을 “나” 라고 생각하고, 오온에 전 무게를 싣고 살기 때문에 五蘊ㆍ十八界ㆍ十二處ㆍ內世間ㆍ外世間ㆍ內外世間에만 눈을 돌리고 삽니다. 그러나 깨달음의 자리에서는 거기에 집착하지 않는다. 참마음자리는 오온, 6근 6진하고 관계없습니다. 그것을 깨닫자고 하는 것, 그것을 알자고 하는 것이 見性이고ㆍ成佛입니다. 그 참마음 자리를 도외시하고 오온만 행사하면 중생의 삶이고, 참마음 자리를 근본으로 하고 오온을 행사하면 부처님이나 보살이나 도인의 삶이 되는 것이지요. 불교의 克難(극난)을 간단히 이야기하면 결국은 그 내용입니다.
“도통한다. 도통해서 어떻게 한다.”는 것들이 결국은 그 내용입니다. 이것이 부처님과 중생의 차이입니다.]
所起大願諸波羅蜜(소기대원제바라밀)과, 일으킨 대원이나 바라밀들이나
[일으킨 바 중생을 건지기 위한 큰 원력과 6바라밀ㆍ10바라밀과]
及一切法에 皆無所着(개무소착)이니라. 그리고 일체법에도 다 집착함이 없음이니라.
[우리는 처처 집착해서 집착이 없는 참마음ㆍ참사람자리를 잊어버리고 살기 때문에 그저 눈에 보이는 차별현상만 보고 거기에만 팔려서, 끄달려 사는 겁니다.
근래에 남방불교가 많이 들어와서 참사람이니 참마음이니 참나니 하는 말을 하면 “그것은 부처님의 학설이 아니다.”고 면밀하게 한번 객관적으로 검토해보지도 않고 무턱대고 싫어하는 경향이 있지요. 자기가 거기에서 힘들게, 애써서 공부했다는 그런 정 때문에 기를 쓰고 대승불교 특히 선불교를 비판해서, 대승불교도 불교 취급 안하는데, 선불교는 말 할 것도 없습니다. 이것이 순전히 정의 문제, 감정의 문제입니다. 이성적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대승불교의 기원; 대승은 '큰 수레'라는 뜻으로, 대승불교의 가르침은 모든 중생을 피안의 세계로 날라다주는 큰 수레와 같다는 의미이다. 대승불교는 자신의 이익뿐 아니라 생사의 세계에서 고통받고 있는 모든 중생들을 이익되게 하는 이타행을 강조하는 행동주의적 불교를 제창하고 나섰는데, 이러한 대승의 이상을 가장 잘 표현하는 것이 보살이다. 보살은 자신의 구원에 앞서 남부터 구원한다는 자비의 원을 세워 열반을 추구하지 않고 오히려 생사의 세계에 태어나기를 원한다. 또한 부처의 개념도 일반화되어 시방 삼세에 수없이 많은 부처가 존재한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대승불교는 종래의 불교에 비하면 훨씬 더 다채롭고 풍부하며, 대승의 종교세계는 소승불교처럼 외롭지 않은 세계라고 말할 수 있다.
*대승불교의 대두 대승불교(大乘佛敎 Mahāyāna)의 역사적 기원에 대해서는 아직도 불분명한 점들이 많이 남아 있다.
대승불교가 발생한 시대와 지역, 대승불교와 소승 부파불교와의 관계, 대승불교의 교단적 성격 등과 기본적인 문제들이 아직도 학자들의 연구와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2세기 후반에 쿠샤나국으로부터 후한(後漢)에 온 지루가참(支婁迦讖)은 대승경전 중에서 〈반주삼매경 般舟三昧經〉·〈수능엄경 首楞嚴經〉·〈도행반야경 道行般若經〉·〈보적경 寶積經〉 등을 번역했다.
이로 보아 그당시 쿠샤나국에는 대승불교가 성행하고 있었음을 확실히 알 수 있다. 또한 이들 경전들이 형성되기까지의 시간을 생각하면 대승불교의 발생은 적어도 1세기까지 소급될 수 있을 것이다. 대승은 '큰 수레'라는 뜻으로, 대승불교의 가르침은 모든 중생을 피안(彼岸)의 세계로 날라다주는 큰 수레와 같다는 의미이다. 반면에 대승불교의 운동을 전개한 자들은 종래의 불교를 '소승', 즉 '작은 수레'라 불러 그것이 출가승만을 위주로 한 편협한 불교임을 비난했다.
대승불교도들은 왕이나 부호의 지원 아래 경제적으로 안정된 생활을 누리는 출가승들의 안일한 삶과, 신도들의 물질적 공양에도 불구하고 자기자신들만의 정신적 평안만을 구하는 소극적·현세도피적인 경향에 반발하여, 일체중생(一切衆生)을 제도(濟度)할 것을 목표로 삼는 새로운 대중적 불교를 제창했다.
대승불교운동은 이러한 교단적 상황에 대한 재가신자들의 종교적 각성에서 일어났다. 대승불교도들은 자신의 이익뿐만 아니라 생사의 세계에서 고통받고 있는 모든 중생들을 이익되게 하는 이타행(利他行)을 강조하는 행동주의적 불교를 제창하고 나섰다. 이러한 대승의 이상을 가장 잘 표현해주는 것이 보살(菩薩)의 개념이다.
대승경전들; 무량수경(無量壽經) Sukhāvatῑvyūha-sūtra,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蜜多 Prajñāpāramitā) 계통의 경전들,
유마힐소설경 維摩詰所說經 Vimalakῑrtinirdeśa-sūtra, 법화경(法華經) Saddharmapuṇḍarῑka-sūtra, 화엄 계통의 경전,
승만경 勝鬘經, 열반경 涅槃經]]
(11) 無有定法 고정된 법은 없다.
何以故오 法界中에 無有法名向聲聞乘과 向獨覺乘이며 無有法名向菩薩乘과 向阿耨多羅三藐三菩提며
無有法名向凡夫界며 無有法名向染向淨과 向生死向涅槃이니 何以故오 諸法이 無二며 無不二故니라
何以故오? 왜냐하면, 法界中에, 법계에는 無有法名向聲聞乘(무유법명향성문승)과, 성문승을 향한다
[向聲聞乘=성문승에 나아가는 것, 그 다음에 성문승에 도달하면 聖聞僧果]
[無有法名= 어떤 고정된 법으로서 이름 할 수가 없다.]
向獨覺乘(향독각승)이며, 독각승을 향한다 할 無有法名= 법이 없고,
無有法名 向菩薩乘(향보살승)과 보살승에 향한다
向阿耨多羅三藐三菩提(향아뇩다라삼먁삼보리)며,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향한다 無有法名= 할 법도 없으며,
[보살승에 향하는 고정된 법도 없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향하는 고정된 법도 없다.]
無有法名 向凡夫界(향범부계)며, 범부세계에 향한다 할 법도 없고
無有法名 向 染向淨(염향정)과 물듦에 향한다 청정함에 향한다
向生死向 涅槃(열반)이니, 생사에 향한다 열반에 향한다 할 無有法名= 법도 없기 때문이니
[금강경과 같이 이것이라고 꼭 찍어서 말할 수 있는 그런 고정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성문도 연각도 보살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도, 染 淨도 사실 우리가 자기 마음에 들면 淨이고, 자기 마음에 안 들면 染이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자리를 놓고, 한 너 댓 사람이 각축을 벌인다면 어느 쪽이든지 자기 편에 들면 그 사람은 좋고, 허물없고, 괜찮고, 능력 있는 사람이고, 그 나머지 사람은 전부 그렇지 못한 사람으로 보는 것이 그 반대편 쪽에서 보는 이쪽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감정도, 또 사람 자체에는 染도 淨도 없습니다. 성문도 연각도 보살도 고정된 것은 없습니다. 생사열반도 물론 고정된 것이 없고요.]
何以故오? 왜냐? 諸法이 無二며 無不二故니라. 그것은 모든 법이 둘도 없고 둘이 아님도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법이 不二=둘이 없으며, 남자ㆍ여자. 있다ㆍ없다. 너다ㆍ나다하는 그런 상대적인 것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현상 이야기, 중생세계의 이야기, 五蘊의 관점에서 보는 것입니다. 五蘊을 초월한 본질의 입장에서ㆍ참마음의 입장에서ㆍ참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둘이 없습니다. 조사스님들은 有一物於此(유일물어차)하니, 여기에 한 물건이 있으니, 無頭無尾(무두무미)하고 꼬리도 없고 머리도 없고 형상도 없고 이름도 없는 그것이 바로 우리의 참 성품이고 참마음이고 참사람이지요. 바로 이 자리에 있는 것이요. 또 그것이 들어서 다 좌지우지하고, 그것이 無二, 無不입니다. 그러니까 거기서 펼치기로 하면, 각양각색의 천차만별ㆍ천변만화로 벌어질 수가 있는 것이 또한 그 소식 그 자리 그 물건입니다.]
(12) 譬喩와 法
譬如虛空이 於十方中과 若去來今에 求不可得이나 然이나 非無虛空인달하야
菩薩도 如是하야 觀一切法이 皆不可得이나 然이나 非無一切法이니 如實無異호대 不失所作하야
普示修行菩薩諸行하며 不捨大願하고 調伏衆生하며 轉正法輪하야 不壞因果호대 亦不違於平等妙法하며
普與三世諸如來等하야 不斷佛種하고 不壞實相하며 深入於法하야 辯才無盡하며 聞法不着하야 至法淵底하며
善能開演하야 心無所畏하며 不捨佛住하고 不違世法하야 普現世間호대 而不着世間이니라
譬如虛空(비여허공)이, 비유컨대 허공은 於十方中(어시방중)과, 시방에서
若去來今(약거래금)에, 若去來= 과거나 미래나 今=현재에 求不可得(구불가득)이나, 구해도 얻을 수 없으되
然(연)이나, 그러나 非無虛空(비무허공)인달하야, 허공이 없는 것이 아니듯이
菩薩도 如是(여시)하야 보살도 이와 같아서 觀一切法이 일체법이 皆不可得(개불가득)이나, 모두가 얻을 수 없으되
[허공은 분명히 있는데 구할 수는 없습니다. 이렇게 분명히 웃고 울고 떠들고 말하고 또 듣고 하지만, 그것을 손으로 잡으려야 잡히지 않고, 일체법도 도저히 손에 잡을 수가 없습니다.
체법이 있으면서 일체법이 없는 소식. 그러니까 일체법이 없으면서 있고, 있으면서 없다는 말입니다. 불교는 조금 깊이 들어가면 속인들이나 불법을 처음 공부하는 사람들이 참 이해하기 어려운, 알쏭달쏭한 말이 너무 많이 나오지요. 세속의 논리로써는 도저히 설명이 안 되지만, 이치가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말 할 수밖에 없습니다.]
然이나, 그러나 非無一切法이니, 일체법이 없는 것이 아님을 觀= 관찰하여
如實無異(여실무이)호대, 실제와 다름없는 그대로 不失所作(불실소작)하야, 지은 것들을 잃지 않고
普示修行菩薩諸行(보시수행보살제행)하며, 보살의 여러 행을 널리 수행해 보이며,
[보살의 온갖 행= 6바라밀ㆍ10바라밀ㆍ4섭법ㆍ4무량심 등]
不捨大願(불사대원)하고, 대원을 버리지 아니하고 따라 調伏衆生(조복중생)하며, 중생을 조복하고
[초기불교에서부터 근본불교ㆍ법화불교ㆍ대중부불교ㆍ상좌부불교, 그리고 대승불교도 초기대승불교ㆍ중기대승불교ㆍ후기 대승불교로 나누고, 또 비밀불교= 密敎(밀교) 그 반대로 顯敎(현교)= 드러난 불교. 또 중국에 넘어와서는 禪佛敎라 하고 그 다음에 상황에 따라 불교를 통해서 국가를 지켜야 할 경우는 護國佛敎라 하고 또 복을 비는 것을 祈福佛敎, 근래에는 특히 대만 쪽에서 잘 쓰는 인간불교=사람 중심의 불교라는 표현도 아주 좋은 말입니다.
저는 보살불교ㆍ대승불교라고 하는데 그것이 不捨大願하고 調伏衆生입니다. 보살은 열반에 안 듭니다. 生死涅槃이 相共和인데 따로 들어가고 말고 할 것이 없습니다. 穢土(예토) 淨土(정토)를 둘로 안 보니까요.]
轉正法輪(전정법륜)하야, 정법의 수레[正法輪]를 굴리며,
[석가모니 부처님은 정법의 바퀴를 굴려서 이렇게 2600여년의 세상을 전부 뒤덮었지만, 만약에 출가하지 않고 왕위를 계승했다면, 부처님 당대에 없어진 아주 소국입니다. 그 당시에 16개국 나라가 있었고, 그 중 큰 나라가 마갈타국과 코살라국입니다. 우리가 보통 일반적으로 사문유관해서 발심해서 출가했다고 보는데요. 정치적 상황이 출가 안하고 못 배기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수행을해서 정각을 이루고 나서, 정치적 수레바퀴로 인도를 덮은 것이 아니고, 법의수레 바퀴ㆍ진리의 수레바퀴로써 전 세계를 뒤덮어서 오늘 날까지도 부처님의 왕국이 전 세계를 뒤덮고 있습니다.]
不壞因果(불괴인과)호대, 인과를 무너뜨리지 않고
亦不違於平等妙法(역불위어평등묘법)하며, 또한 평등한 묘법에도 위배하지 않아서
[부처님의 깨달음을 “연기의 이치를 깨달았다.”고 하잖아요. 선불교 하는 사람들은 “마음을 깨달았다.”는 표현을 하지만, 불교 학문적으로 조금 이해가 깊은 사람들은 전부 “연기를 깨달았다.”그래요. 연기를 깨달은 사람이 緣覺(연각)입니다. 사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연각입니다. 내용을 보면 緣覺까지라고요. 석가모니 부처님은 홀로 깨달았다고 해서 獨覺(독각)이라고도 하고, 연기를 깨달았다고 해서 緣覺이라고도 하지만, 석가모니는 한편 연각이면서도 보살을 뛰어넘은 부처의 경지에 있는 분으로 대승불교에서는 그렇게 정리를 했습니다. 여기 不壞因果라는 말이 그 의미와 연관이 있습니다.]
普與三世諸如來로 等(보여삼세제여래등)하야, 삼세의 모든 여래와 평등하며,
[과거ㆍ현재ㆍ미래 모든 깨달은 사람은 동등하다는 말입니다.]
不斷佛種(부단불종)하고, 부처의 종성(種性)을 단절시키지 않고
不壞實相(불괴실상)하며, 實相= 진실한 모습을 무너뜨리지 않으며,
深入於法(심입어법)하야, 법에 깊이 들어가 辯才無盡(변재무진)하며, 다하지 않는 변재와
聞法不着(문법불착)하야, 집착하지 않는 문법으로, 법을 듣는데 집착하지 아니해서
至法淵底(지법연저)하며, 법의 근원에 깊이 도달하니
[法淵底에 까지 이르렀다 → 남김 없다. 부처님의 실상에 대한 이치의 깨달음, 모든 존재의 실상에 대해서 조금도 남긴 바 없이 다 깨달았습니다. 불법 안에서는 어떤 이치도 다 밝혀내지 못한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善能開演(선능개연)하야, 법을 開演=잘 능히 열어서 연설함에, 心無所畏(심무소외)하며 마음에 두려움이 없으며
不捨佛住(불사불주)하고, 부처님 머무시는 데를 버리지 않은 채
[不捨는 머문다는 뜻이니까, 머문다면 世法하고 반대 아니냐고 할 수 있지만 그것이 아니라 부처님이 머무는 데 머물되 세상법도 어기지 않는다. 그렇게 되어야 가치가 있는 불법이 됩니다. 세상 떠나는 것이 열반이고 해탈이 아니라 중생들과 같이 더불어 울고 웃고 해야 되는 것이 대승불교, 화엄경불교, 법화경불교입니다.
사실 금강경은 좀 부족합니다. 五時교를 그려놓고 보면 반야부 불교는 중간에 있습니다.
금강경은 선사들의 선불교 구미에 맞는 경전입니다. 그저 자기의 깨달음 속에서 즐기고 더 이상 중생의 살림살이, 중생의 고뇌는 ‘나 몰라라.’하는 선사다 해서 제가 “소승선사”라는 표현을 쓰는데, 소승 아라한과 똑 같습니다.]
不違世法(불위세법)하야, 세간법에도 어긋나지 않게 普現世間(보현세간)호대, 세간에 두루 나타내지만
而不着世間(이불착세간)이니라. 세간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不着世間= 보살은 세상을 제도하지만 세상에 집착하지 않는다.
한국 역대스님들 중에서 원효스님ㆍ경허스님, 어머니를 모시고 사셨던 진묵스님. 그 3대 스님을 최고 스님으로 꼽는 것은 전부 공부가 하늘 끝까지 높은 분인데도 세속과 함께 하셨거든요. 혼자출가해서 독야청청 하는 것이 제일 훌륭한 수행으로 알고 있었는데, 이 대승불교 화엄경ㆍ법화경을 보니까 그것 잘못된 바람직하지 않다고 보는 것입니다.]
(13) 慈悲의 行
菩薩이 如是成就難得智慧心하야 修習諸行호대 於三惡趣에 拔出衆生하야 敎化調伏하야
安置三世諸佛道中하야 令不動搖니라
復作是念호대 世間衆生이 不知恩報하고 更相讐對하며 邪見執着하야 迷惑顚倒하며
愚癡無智하야 無有信心하며 隨逐惡友하야 起諸惡慧하며
貪愛無明의 種種煩惱가 皆悉充滿하니 是我所修菩薩行處라
設有知恩과 聰明慧解와 及善知識이 充滿世間이면 我不於中에 修菩薩行이니
何以故오 我於衆生에 無所適莫하며 無所冀望하며 乃至不求一縷一毫와
及以一字 讚美之言하고 盡未來劫토록 修菩薩行호대 未曾一念도 自爲於己요
但欲度脫一切衆生하야 令其淸淨하야 永得出離니라
菩薩이 보살은 如是成就難得智慧心(여시성취난득지혜심)하야, 이와 같이 얻기 어려운 지혜의 마음을 성취하고
修習諸行(수습제행)호대, 諸行= 여러가지 행을 닦아 익혀서 於三惡趣(어삼악취)에, 삼악도= 지옥, 아귀, 축생에서
拔出衆生(발출중생)하야, 중생을 건져내어 敎化調伏하야, 교화 조복하여
安置三世諸佛道中(안치삼세제불도중)하야, 삼세제불의 도=깨달음의 길에 이끌어
令不動搖(영불동요)니라. 흔들리지 않게 합니다.
[복잡하게 사는 요즘 사람들이 아주 간단하게 할 수 있는 수행법은 보시입니다. 그것은 금강경, 6바라밀, 10바라밀에서도 보시가 첫째입니다. 회향하고 보시하고, 보시하고 회향하는 겁니다. 보시하는 것이 회향하는 겁니다. 내게 없는 것을 줄 수는 없잖아요. 내게 있는 것을 주는 것입니다.- 무애칠시]
復作是念호대, 다시 생각하기를, 世間衆生이 세간의 중생들이 不知恩報(부지은보)하고, 은혜를 갚을 줄 모르고
更相讐對(갱상수대)하며, 더욱이 서로 원수처럼 대하며, 邪見執着(사견집착)하야, 삿된 견해에 집착하여
迷惑顚倒(미혹전도)하며, 미혹하고 전도되며, 愚癡無智(우치무지)하야, 어리석고 무지하여
無有信心하며, 신심이 없고 隨逐惡友(수축악우)하야, 나쁜 친구를 따라
起諸惡慧(기제악혜)하며, 온갖 악한 지혜를 일으키며, 貪愛無明(탐애무명)의, 탐애와 무명으로
種種煩惱(종종번뇌)가, 갖가지 번뇌가 皆悉充滿(개실충만)하니, 온통 가득하니
是我所修菩薩行處(시아소수보살행처)라. 여기가 바로 나의 보살행을 닦을 곳이요
設有知恩(설유지은)과, 설사 은혜를 아는 이들이나 聰明慧解(총명혜해)와, 총명한 지혜로 이해하는 이들과
及善知識(급선지식)이, 선지식들이 充滿世間(충만세간)이면, 가득한 세간이라면
我不於中에, 나는 거기에서는 修菩薩行이니, 보살행을 닦지 不= 않으리라.
何以故오? 왜냐하면, 我於衆生에 無所適莫(무소적막)하며, 나는 중생에게 꼭 그리해야 하고 말 것이 없고
[無所適莫은 유교 논어의 표현입니다. 適= 내 마음에 맞는 것, 莫= 맞지 아니한 것. 맞는 것과 맞지 아니한 것도 없으며,]
無所冀望(무소기망)하며, 冀望= 바라고 기대할 것도 없으며,
乃至不求一縷一毫(내지불구일루일호)와, 나아가 실 한 오라기, 털 하나와 及以一字 한 마디
讚美之言(찬미지언)하고, 칭찬하는 말도 구하지 않고 盡未來劫(진미래겁)토록 미래 겁이 다하도록
修菩薩行호대, 보살행을 닦아서 未曾一念(미증일념)도. 한 순간도 自爲於己(자위어기)요. 자신을 위한 적 없이
但欲度脫一切衆生(단욕도탈일체중생)하야, 다만 일체중생을 제도하고 해탈시키고자 하여
令其淸淨(영기청정)하야, 그들을 청정히 하고
永得出離(영득출리)니라. 영원한 출리를 얻게 해야 하기 (何以故) 때문이다.
(14) 菩薩의 法
何以故오 於衆生中에 爲明導者가 法應如是하야 不取不求하고 但爲衆生하야 修菩薩道하야
令其得至安隱彼岸하야 成阿耨多羅三藐三菩提라하나니 是名菩薩摩訶薩의 第八難得行이니라
何以故오? 그것은 於衆生中에, 중생 가운데
爲明導者(위명도자) 法應如是(법응여시)하야, 밝은 지도자가 되는 법이 응당 그러하다는 것이니
不取不求(불취불구)하고, 취하지도 구하지도 않고 但爲衆生(단위중생)하야, 다만 중생을 위해
修菩薩道(수보살도)하야, 보살도를 닦아
令其得至安隱(穩)彼岸(영기득지안은(온)피안)하야, 그들로 하여금 안은한 피안에 이르러
[편안한 彼岸= 저 언덕, 마음으로부터 모든 문제가 해결된 곳.]
成阿耨多羅三藐三菩提(성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하나니,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루게 하리라.' 하나니
是名菩薩摩訶薩의, 이것을 보살마하살의
第八 難得行이니라. 제 8 난득행=얻기 어려운 행이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