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엄경(首楞嚴經)2권 9
本名; ‘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大佛頂如來密因修證了義諸菩薩萬行首楞嚴經)’
또는 '중인도나란타대도량경(中印度那蘭陁大道場經)'
당나라의 반자밀제(般刺密帝) 번역, 송나라 급남(及南) 편찬(編纂), 송나라 계환(戒環) 해석
수능엄경(首楞嚴經) 2권 9
▷법합(法合)
阿難!吾今爲汝以此二事進退合明。
아난아, 내가 이제 너를 위하여 이 두 가지의 이사(二事)를 앞(進)뒤(法)로 맞추어 가면서 밝혀주리라.
ㅡ두 가지의 이사(二事)란, 별업의 눈병으로 보는 것과, 동업으로 느끼는 상서롭지 못한 것으로, 법(法)과 비유를 서로 맞추어 가면서 밝힌다고 한 것이며,
여기에서 '진(進)'은 법(法)을 말하고, 퇴(退)는 비유를 말하는 것이다.
阿難!如彼衆生別業妄見,矚燈光中所現圓影雖現似境,終彼見者目眚所成,
眚卽見勞非色所造,然見眚者終無見咎。
아난아, 저 중생이 개별로 지은 업으로 허망하게 보는 별업망견(別業妄見)으로, 등불의 빛에 나타난 원영(圓影)의 등무리가 비록 대상의 경계와 비슷하게 나타날지라도, 결국에는 저 보는 사람의 눈병으로 이루어진 것이니,
눈병은 곧 보는 주체가 피로하여 나타난 모습일 뿐, 빛 자체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그러나 마침내 눈병 그 자체를 보게 된다면, 그 보는 주체의 허물이 없는 것이다.
ㅡ이것은 별업의 업장으로 망령되게 보는 것은 그 허물이 눈으로 말미암은 것으로, 등으로 인한 것이 아님을 비유한 것이다. 즉 견분(見分)과 상분(相分)의 2분은 자증분(自證分)에 의해 일어난 것으로 의타기성(依他起性)에 속한다. 경계에 의한 여환(如幻)으로 말미암아 있는 것이 아니니, 마치 그렇게 보이는 것이다.
[유식학에서는 우리가 외계사물을 직접 지각하는 것이 아니라 식상(識上)의 형상을 인식한다고 본다. 이것은 곧 하나의 인식이 성립될 때, 식이 주관과 객관으로 이분화되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상분(相分)은 객관으로서의 식, 즉 식상(識上)의 영상(影像)으로서 소취분(所取分)ㆍ소량(所量)ㆍ사경상(似境相)ㆍ유상식(有相識)이라고도 하며,
견분(見分)은 주관으로서의 식, 즉 상분을 인식하는 주관적인 작용으로서 능취분(能取分)ㆍ능량(能量)ㆍ능취상(能取相)ㆍ유견식(有見識)이라고도 하며,
자증분(自證分)은 이분화 되기 이전의 식 자체로서 견분과 상분에 의한 인식작용의 결과를 확인하는 인식체의 역할을 한다. -무착(無着)의 섭대승론(攝大乘論) 상권 6]
▷정합(正合)
例汝今日以目觀見山河國土及諸衆生,皆是無始見病所成。
見與見緣似現前境,元我覺明見所緣眚,覺見卽眚 本覺明心,覺緣 非眚
예컨데 네가 지금 눈으로 산과 강과 국토와 중생들을 보는 것이 모두 다 시작이 없는 무시로부터 보는 주체가 병에 걸림으로 인하여 이루어진 것이니라.
보는 주체(작용, 見, 능견)과 보이는 대상 물질인 견연(見緣, 상견)이 마치 눈 앞의 경계와 같이 나타나나,
본래 나의 깨달음의 밝음인 각명(覺明, 묘심명체)이 허망한 대상을 깨닫는 것은 눈병이 아니니라.
ㅡ'지견(知見)에 알음알이가 성립되면, 그것이 곧 무명(無明)의 근원이다'라고 한 것과 같이, 이것은 다만 각명(覺明)의 허물일 뿐, 본각(本覺)의 잘못이 아닌 까닭에 '각명(覺明)으로 허망한 대상을 깨닫는 것은 눈병이 아니니라.'라고 한 것이다.
이 가운데 법(法)과 비유한 대의(大意)는 눈(目)은 제 7식, 눈병은 사람과 법에 대한 2 가지의 집착을,
등불은 제 8식에 비유한 것이다.
등불을 식(識)에 비유한 것은, 등불이 기름과 결합하여 계속 타는 것과 같이, 식(識)도 탐욕과 애욕에 의해서 생사가 끊어지지 않고, 아집(我執)과 법집(法執)은 눈병과 같아서, 경계에 오취(五聚)에 차별이 있으므로, 각각 지은 별업이라 하였다.
눈병이 없으면 다만 등불만 보일 것이고, 집착이 없는 사람은 다망 유식(唯識)만 볼 것이다.
覺所覺 眚 覺非眚中(?) (性覺明元 卽非眚中, 누락된 듯) 此實見見。云何復名覺聞知見?
깨달아야 할 대상인 소각(所覺)을 깨닫는 것은 눈병이지만,
깨닫는 성품인 성각의 밝은 근본인 성각명원(性覺明元)은 눈병 가운데에 있는 것이 아닌 것으로, 이는 보는 주체를 보는 것이거늘 어찌하여 또 다시 깨달으며(覺), 들으며(聞), 알고(知), 본다(見)고 이름하겠는가?
ㅡ깨달아야 할 대상인 소각(所覺)은, 곧 볼 수 있는 일체의 대상 경계이니, 대상 경계를 분별하는 것은 눈병이지만, 각성(覺性)은 눈병이 아니므로 볼 수 있는 경계가 아니다.
성각(性覺), 진여의 본체는 본래 자명(自明)한 것이므로 성각이라고 하였다.
전심법요(傳心法要)에 이르기를 “세인(世人)은 진성(眞性)을 깨닫지 못해서 견문각지(見聞覺知)를 마음이라 오인하여 견문각지에 덮여서 정명본체(精明本體)를 볼 수 없다”라고 하였다.
是故汝今見我及汝幷諸世閒十類衆生,皆卽見眚;非見眚者,彼見眞精性 非眚者故不名見。
그러므로 네가 지금 나를 보고, 너를 보고, 모든 세간의 10 종류의 중생을 볼지라도, 그것은 다 보는 주체(작용)이 눈병에 걸린 것이지, 눈병을 보는 진실한 주체는 아닌 것이다.
저 보는 주체(작용)의 정밀하고 참된 성품의 진정성(眞精性)은 눈병이 아니기 때문에 ‘보는 주체(작용)’라고 이름하지 않는 것이다.
ㅡ'보는 주체(작용)이 눈병에 걸린 것이지 눈병을 보는 진실한 주체가 아닌 것이다'란, 볼 수 있는 법은 모두 눈병이지 보는 주인공의 본체는 아니라는 것이다. 자성(自性)이 불변수연(不變隨緣)하고, 수연불변(隨緣不變)하는 것이라, 견분과 상분이 의지할 수 있으나, 견상(見相)이 변화시킬 수 없다. 따라서 생망(眚妄)에 떨어지지 않으므로, 비생(非眚)이라 하였다.
▷합동업(合同業)
阿難!如彼衆生同分妄見,例彼妄見別業一人,一病目人同彼一國,彼見圓影眚妄所生,此衆同分所現不祥,同見業中瘴惡所起,俱是無始見妄所生。
아난아, 저 중생들이 본 공동으로 허망하게 보는 동분망견(同分妄見)과,
따로 지은 업장으로 망령되게 지은 별업망견(別業妄見)한 사람을 예로 들어 비유로 밝혀 보리니,
눈병에 걸린 한 사람은 한 나라와 같으며, 또 그가 보는 등불의 원영(圓影)은 눈병으로 허망하게 생긴 것이며,
이 공동의 무리인 중동분(衆同分, 동업)이 다 같이 불길한 불상(不祥)을 보는 것은 같은 업장 가운데 나쁜 기운의 장악(瘴惡)으로 생긴 것이니, 모두 시작이 없는 무시로부터 보는 주체(작용)의 허망된 망견(妄見)에서 생긴 것이니라.
ㅡ망견을 일진일퇴(一進一退)의 비유로 밝히는 것이다. 망업(妄業)은 비록 다르나, 망본(妄本)은 다르지 않은 것이다.
例閻浮提三千洲中,兼四大海娑婆世界,幷洎十方諸有漏國及諸衆生,同是覺明無漏妙心,見聞覺知虛妄病緣,和合妄生、和合妄死。若能遠離諸和合緣及不和合,則復滅除諸生死因,圓滿菩提不生滅性淸淨本心本覺常住。
염부제(閻浮提)의 3천개 섬(洲) 가운데 사방의 대해(大海)와 사바세계(娑婆世界)와 아울러 시방(十方)의 모든 번뇌가 있는 유루(有漏)의 중생들이 살고 있는 나라인 유루국(有漏國)들과 중생들을 견주어 예를 들면,
이 모두가 깨달음이 밝고 번뇌가 없는 묘한 마음의 각명무루묘심(覺明無漏妙心)이, 보고(見) 듣고(聞) 깨닫고(覺) 아는(知)것의 허망한 병의 인연으로, 화합하여 허망하게 나고(生), 허망하게 죽는(死) 것이니라.
만약 능히 모든 화합하는 화합연(和合緣)과 화합하지 않는 불화합연(不和合緣)을 멀리 벗어날 수 있다면, 곧 생사의 원인을 멸하게 되어서 원만한 보리의 생멸을 떠난 성품을 원만하게 이루어서, 청정한 본심(本心)에 본각(本覺)이 항상 상주하게 될것이니라.
ㅡ앞에서는 한 사람으로 한 나라를 비유하였고, 여기에서는 한 나라를 대천세계에 비유하여서, 기계(器界)와 근신(根身) 모두가 보는 주체의 병과 하합하여 아집으로 부질없이 오도에서 생멸하지 않는 것이 없음을 밝히셨다.
화합연(和合緣)이란, 대상 경계로 인하여 생기는 아집의 거친 생각의 추상(麤想)이며, 그것이 번뇌장(煩惱障)이며
불화합연(不和合緣)이란, 대상 경계를 여의고 홀로 집착하는 법집(法執)의 미세한 생각으로, 소지장(所知障)이다
이러한 이장(理障)이 생사를 이어가며 바른 지견을 가로 막는 나쁜 인(因)이 되어서 보리(菩提)를 없애는 것이다.
▷다시 밝히시다.
阿難!汝雖先悟本覺妙明性非因緣、非自然性,而猶未明如是覺元,非和合生及不和合。
아난아, 네가 비록 본각의 묘하고 밝은 성품의 묘명성(妙明性)이 인연도 아니고 자연성도 아님을 깨달았다고 하였으나, 오히려 이러한 깨달음의 근원은 서로 화합하여 생기는 것도 아니고, 서로 화합하지 않는 것도 아닌 이치를 밝히지 못하였느니라.
ㅡ도를 증(證)하는 성품은 화합으로도 불화합으로도 생기는 것이 아님을 아직 알지못하는 것이니, 이는 공부하는 마음에 남아 있는 번뇌의 찌꺼기 이므로 다시 바르게 깨우쳐 주어 밝고 맑게 되도록 하고자 하시는 것이다.
▷정(淨)을 밝히시다
阿難!吾今復以前塵問汝。汝今猶以一切世閒妄想,和合諸因緣性,而自疑惑。證菩提心和合起者,則汝今者妙淨見精,爲與明和?爲與闇和?爲與通和?爲與塞和?
아난아, 내가 이제 또 앞 경계의 미진을 들어 너에게 묻겠으니,
너는 아직까지도 오히려 일체 세간의 망상으로 화합하는 모든 인연성(因緣性)으로 인하여 스스로 의혹을 가지기를, 보리심를 증득하는 마음도 화합으로 일어나는 것이라고 여기는구나.
지금 너의 묘하고 깨끗한 보는 견정(見精)은 밝음(明)과 화합한 것인가? 어둠(闇)과 화합한 것인가?
통함(通)과 화합한 것인가? 막힘(塞)과 화합한 것인가?
ㅡ'화(和)'라고 한 것은 섞여서 분별하기 어려운 것이고,
'합(合)'이라는 것은 집착하여서 떠나지 않는 것이다.
若明和者,且汝觀明,當明現前,何處雜見?見相可辨,雜何形像?
만약 밝음(明)과 화합하였다면, 네가 밝음을 보는 관명(觀明)할 때에 마땅히 밝음이 나타날 것이니, 어느 곳에 보는 것이 섞여있는 것인가? 보는 것과 상(相)은 분별할 수 있지만, 섞인 것은 어떠한 형상인가?
ㅡ보는 것과 상(想)이란, 보는 것과 밝은 상(相)을 말하는 것이다.
若非見者,云何見明?若卽見者,云何見見?必見圓滿,何處和明。若明圓滿,不合見和,
만약 보는 주체(작용)가 아닌 비견(非見)이라면, 어떻게 밝음을 보겠으며?
만약 보는 주체(작용)라면, 어떻게 보는 주체를 본다고 하겠는가?
반드시 보는 주체(작용)가 원만하다면, 어디에서 밝음과 화합할 것이며
만약 밝음이 원만하다면 보는 주체(작용)와 화합하여 어울리지 못할 것이다.
ㅡ화합한 것이라면, 그 사이사이에 섞인 것이라서 원만하지 못할 것이며, 원만하다면 서로 화합하지 못할 것이다.
見必異明;雜則失彼性明名字。雜失明性,和明非義,彼暗與通及諸群塞亦復如是。
보는 주체(작용)은 반드시 밝음과는 다른 것이므로, 섞이었다면 저 본성이 밝다는 명분을 잃게 될 것이니,
섞임으로 인해서 밝은 본성을 잃어버린다면, 밝음과 화합했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니,
어둠(闇)과 통함(通)과 막힘(塞)의 경우도 역시 그러할 것이니라.
復次,阿難!又汝今者妙淨見精,爲與明合?爲與暗合?爲與通合?爲與塞合?
다시 아난아, 네가 지금 묘하고 맑은 묘정견정(妙淨見精)은 밝은(明) 것과 합(合)한 것인가?
어두운(闇) 것과 합한 것인가? 통한(通) 것과 합한 것인가? 막힌(塞) 것과 합한 것인가?
ㅡ홥한 것이 있으며, 곧 망진(妄塵)과 관련된 것이라서, 묘하고 맑은 묘정(妙淨)이라고 할 수 없다.
若明合者,至於暗時明相已滅,此見卽不與諸暗合。云何見暗?
만약 밝음과 합한 것이라면, 어두울 때에는 밝은 모양의 명상(明相)은 이미 없어졌을 것이니, 저 보는 주체(작용)가 어두움과는 합하지 못할 것인 즉, 어떻게 어두움을 본다고 하겠는가?
ㅡ합하였으면, 떨어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명상(明相)이 없을 때에는 보는 주체(작용)도 따라서 없어질 것이니, 어두움과 합한 것도 아닐 것이다.
若見暗時不與暗合,與明合者應非見明,旣不見明云何明合?了明非暗彼暗與通,及諸群塞,亦復如是。”
만약 어두움을 볼 때 어둠과 합하지 않았다면, 밝음과 합한 명합(明合)의 경우에도 마땅히 밝음을 보지 못해야 할 것이다.
이미 밝음을 보지 못한다면, 어떻게 밝음과 합하였다고 할 것이며, 밝은 것이 어둠이 아닌 것을 알 수 있겠는가?
그 밖의 어둠(闇)과 통함(通)과 막힘(塞)의 경우 경우도 역시 이와 마찬가지이니라.
ㅡ만약 어두움과 합하지 않고서도 어두움을 능히 볼 수 있다면, 밝음과 합할 때에도 마땅히 밝음을 보지 못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미 밝음을 보지 못한다면, 어떻게 밝음과 합하였다고 하겠으며, 어떻게 밝은 것은 어두운 것이 아님을 안다고 하겠는가? 합하는 이치가 성립되지 않으면, 보리심을 증득하는 마음이 화합으로 생기는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