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엄경(首楞嚴經)

수능엄경(首楞嚴經)2권 6

Skunky 2025. 4. 19. 08:00

本名; ‘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大佛頂如來密因修證了義諸菩薩萬行首楞嚴經)’ 

또는 '중인도나란타대도량경(中印度那蘭陁大道場經)'

당나라의 반자밀제(般刺密帝) 번역송나라 급남(及南) 편찬(編纂), 송나라 계환(戒環) 해석

수능엄경(首楞嚴經) 2 6

 

▷아난 존자가 총합하여 논함

阿難白佛言:“世尊!誠如法王所說,覺緣遍十方界,湛然常住性非生滅,與先梵志娑毘迦羅所談冥諦,及投灰等諸外道種說有眞我遍滿十方,有何差別?

아난 존자가 부처님께 말씀드리기를, 

“세존이시여, 진실로 법왕의 말씀과 같아서, ‘깨달음의 인연인 각연(覺緣)이 시방세계에 두루 원만하여서, 고요한 가운데 상주(常住)하는 것으로, 그 성품은 생멸하는 것이 아니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것을 앞에 나온 범지(梵志)인 사비가라(娑毗迦羅)가 말하는 ‘명제(冥諦)’나, 또는 재에 몸을 던지는 투회(投灰) 외도 등과 같은 일체 외도의 무리들이 말하는 ‘참 나인 진아(眞我)가 시방에 두루 원만하다’는 뜻과는 어떻게 다른 것입니까?

ㅡ외도들은 성품(性)의 참됨은 보지 못하고 다만 아뢰야식에 의지하여서 망령되게 진실한 것으로 혼란한 까닭에 부처님께 여쭈어서 분별하여 주시기를 바란 것이다. 

범지(梵志)란 외도들을 통칭한 것이고, 투회(投灰)란 고행하는 외도를 말한다.

 

각연(覺緣), 깨달음의 인연인 견(見)을 말한다. 각(覺)은 반야(般若) 관조(觀照) 지혜(智慧)를 말하는 것으로, 여기서는 견(見)과 같은 뜻이다. 아난 존자가 지금까지 보는 성품인 견(見)이 무엇인지 몰랐다가 알게 된 것이 각(覺)이고 이것은 잠들지 않고 늘 깨어있는 것으로 각연, 각성(覺性)인 것이다. 각연(覺緣)은 견성(見性)을 가르킨다. 견성(見性)에 의지하여 능연(能緣)의 공능(功能)이 있기 때문에 각연(覺緣)이라 한다.

 

▷문답으로 의심점을 밝힘 - 첫 번째의 의혹

世尊亦曾於楞伽山,爲大惠等敷演斯義,彼外道等常說自然,我說因緣非彼境界。

세존께서는 이전에 능가산(楞伽山)에서 대혜(大慧)보살 등을 위하여 이 뜻을 펼쳐 말씀하시기를 ‘저 외도들은 항상 자연(自然)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내가 말한 인연은 그들의 경계가 아니다’라고 하셨습니다.

ㅡ'그들의 경계가 아니다'라고 한 것은 외도들의 소견과 같지 않다는 것이다. 

진여의 불성은 비교하여 따지면 곧 어긋나고, 계교하여 헤아리면 곧 뒤섞인다

 

我今觀此覺性自然非生非滅,遠離一切虛妄顚倒,似非因緣與彼自然,云何開示不入群邪,獲眞實心妙覺明性?”

제가 지금 살펴보건데, 깨달음의 성품인 각성(覺性)은 자연 그대로의 것으로서 생기는 것도 아니고, 멸하는 것도 아니며, 일체 허망한 전도에서 멀리 벗어났으므로, 아마도 인연이 아닌 듯하며, 마치 저들이 주장하는 자연과 같은 듯합니다.

그러니 저들이 주장하는 자연과 어떻게 가려내어야, 일체의 사견(邪見)에 빠지지 않고, 진실한 마음의 묘하게 깨닫는 밝은 성품의 묘각(妙覺)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ㅡ아난 존자의 생각으로는 깨닫는 성품의 각성(覺性)이 생멸하는 것이 아니라면, 아마도 자연과 같고, 이미 자연이 아니라면 이는 인연과 같은 것이니, 말학(末學)들이 이를 잘못 해석할 것을 염려하여 질문한 것이다.

 

견성은 모든 경계에 따라 응화하여 분별없이 상주하는 불생멸체이므로 묘정명체(妙精明體)라 한다. 
수연(隨緣)하면서도 그 불변의 체(體)를 잃지 않으며, 불변하면서도 수연의 용(用)이 있다. 
자연 중에 인연이 있고, 인연 중에 자연이 있어서 서로 여의지 않는다.
외도들이 이야기 하는 “신아(神我)는 시방계에 편만(遍滿)한다.”와 여래께서 설하신 “각연(覺緣)은 시방계에 편만(遍滿)한다.”와 차이점이 무엇인지, 또 외도가 항상 주장하는 자연을 여래께서 능가산에서 인연법으로 이를 파하셨는데, 이 자연과 여래께서 설하신 인연은 상반된다. 
여래설 자연과 외도설 자연의 차이를 존자가 모르기 때문에 청문하고 있다. ㅡ한울림 

 

▷부처님께서 의혹을 풀어주심.

佛告阿難:“我今如是開示方便,眞實告汝,汝猶未悟,惑爲自然。阿難!若必自然,自須甄明有自然體。汝且觀此妙明見中,以何爲自?此見爲復以明爲自?以暗爲自?以空爲自?以塞爲自?阿難!若明爲自,應不見暗;若復以空爲自體者,應不見塞。如是乃至諸暗等相以爲自者,則於明時見性斷滅,云何見明?”

부처님께서 아난 존자에게 말씀하셨다.

“아난아, 내가 지금까지 이렇게 방편으로 설명하여 진실하게 너에게 알려주었거늘, 너는 오히려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자연인가 하고 의심을 하는것인가!

아난아,만약 틀림없이 자연이라고 한다면 ‘저절로의 자(自)’를 분명하게 밝힐 수 있어서 자연의 본체인 자연체(自然體)가 있어야 할 것이다.

너는 또 이것을 살펴보아라. 이 묘하고 밝은 견(見) 가운데에서 무엇을 자연(自然)이라 하겠는가!

이 견(見)이 밝음을 자(自)로 삼겠는가? 어둠의 암(暗)을 자(自)로 삼겠는가?

허공의 공(空)을 자(自)로 삼겠는가? 막힘의 색(塞)을 자(自)로 삼겠는가? 

아난아, 만약 밝음으로 자(自)로 삼는다면 당연히 어둠을 볼 수 없어야 할 것이며,

만약 허공의 공(空)을 자(自)로 삼는다면 당연히 막힘의 색(塞)을 볼 수 없어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이 나아가서, 일체의 어두움 등의 상(相)을 자(自)로 삼는다면, 밝을 때는 보는 성품이 끊어져서 없어야 할것이니, 어떻게 밝음을 보겠는가?”

ㅡ자연이 아님을 해석한 것으로, 자연이란, 자체가 본래 그러한 것을 말하는 것이다. 

자체가 본래 그러하다면, 경계를 따라서 변하지 않아야 하는데, 지금 모두 경계를 따라 변하고 있으므로 자연이 아닌 것이다. 

명암통색(明暗通塞) 중에서 자연의 체가 무엇인가? 만약 밝음이 자연체라면 견성은 단지 밝음을 보는것만 합하고 ​
어둠을 보는 것과는 합하지 않는다. 
만일 공(空)이 자연체라면 견성은 단지 공만 볼 수 있지 막힌 곳은 볼 수 없다.

그러나 밝음이 오면 밝음을 보고 어둠을 오면 어둠을 본다. 즉 이 각성은 자연의 체가 아님을 알 수 있는 것이다. 

 

阿難言:“必此妙見性非自然。我今發明是因緣性,心猶未明,諮詢如來是義云何合因緣性?”

아난 존자가 말씀드렸다.

“이 묘하게 보는 성품의 견성(見性)이 분명 자연이 아니라면, 제가 지금 인연의 성품인 인연성(因緣性)으로 생긴다는 것을 밝히고자 합니다만, 제 마음이 아직까지 명확하지 못하여서 여래께 여쭙니다.

이 뜻을 어찌하여야 인연의 성품인 인연성(因緣性)에 부합할 수 있겠습니까?”

ㅡ자연을 버리고 인연이라 계탁하는, 즉 하나를 버리고 다시 다른 하나에 집착하는 것이다.

 

佛言:“汝言因緣,吾復問汝。汝今同見,見性現前,此見爲復因明有見?因暗有見?因空有見?

因塞有見?阿難!若因明有,應不見暗;如因暗有,應不見明。如是乃至因空、因塞,同於明暗。

復次,阿難!此見又復緣明有見?緣暗有見?緣空有見?緣塞有見?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네가 인연이라고 했으니 네게 묻겠다. 너는 지금 보(見)는 것으로 인(因)하여 보는 성품이 눈앞에 뚜렷이 나타나나니, 이 보(見)는 성품은 밝음으로 인해서 보(見)는 것이 있는 것인가? 어둠으로 인하여 보(見)는 것이 있는 것인가?

공(空)으로 인하여 보(見)는 것이 있는 것인가? 막힘의 색(塞)으로 인하여 보(見)는 것이 있는 것인가?

아난아, 만약 밝음으로 인하여 보(見)는 것이 있다면, 당연히 어둠을 볼 수 없어야 할 것이며,

만약 어둠으로 인하여 보(見)는 것이 있다면, 당연히 밝음을 볼 수 없어야 할 것이니,

이와 같이 나아가 공(空)과 막힘의 색(塞)으로 인한 경우도 밝음과 어둠의 경우와 같은 것이다.

다시 아난아, 이 보(見)는 것은 또 밝음을 연(緣)하여 보는 것이 있는 것인가?

어둠을 연(緣)하여 보는 것이 있는 것인가?

공(空)을 연(緣)해서 보(見)는 것이 있는가? 막힘의 색(塞)을 연(緣)해서 보(見)는 것이 있는가?

ㅡ인연(因緣)이 아님을 해석한 것으로, 물질을 가탁하는 것이 인(因)이고, 

물질을 따르는 것이 연(緣)이다. 이미 정해진 뜻이 없으므로 인연이 아니라는 것이다.

 

▷거듭하여 보여주시다.

阿難!若緣空有,應不見塞;若緣塞有,應不見空。如是乃至緣明、緣暗,同於空塞。

아난아, 만약 공(空)을 연(緣)해서 보(見)는 것이 있다면 당연히 막힘을 보지 못해야(不見) 할 것이며,

만약 막힘의 색(塞)을 연(緣)을 연해서 보(見)는 것이 있다면 당연히 공(空)을 보지 못해야(不見) 할 것이니,

이와 같이 나아가, 밝음과 어둠을 연(緣)하는 경우도 공(空)과 색(塞)의 예와 같으니라.

 

當知如是精覺妙明

그러므로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이와 같이 정밀한 깨달음의 정각(精覺)의 묘한 밝음은 

 

①非因非緣,인(因)도 아니고 연(緣)도 아니며,

진심은 불변하는 것이므로 인연이 아니고, 수연(隨緣)하는 것이므로 자연도 아니다.

인도 연도 자연도 아니라는 것은 쌍차쌍파(雙遮雙破)로써,

자연에 집착하는 것은 수연(隨緣)을 이해하지 못함이요, 
인연에 집착함은 불변(不變)을 이해하지 못함이다. 

 

②亦非自然非不自然,자연(自然)도 아니고 자연이 아닌 것도 아니며, 

ㅡ인연이 아닌 것도 자연이 아닌 것도 아님은 쌍조쌍립(雙照雙立)이다. 
견성이 만약 자연이라면 인연 중에는 견성이 없어야 하고, 
견성이 만약 인연이라면 자연 중에는 견성이 없어야 한다. 

 

③無非不非 인연과 자연이 아닌 것도 아니고, 인연과 자연이 아니라는 것이 아닌 것도 없으며, 

ㅡ불변하지만 수연(隨緣)하고, 수연(隨緣)하지만 불변한다. 

 

④無是非是 인연과 자연이란 것도 없고, 인연과 자연이란 것이 아니란 것도 없는

ㅡ전체적으로 시(是)도 비(非)도 없다. 
인연의 용(用)을 여의면 자연의 체(體)를 드러낼 수 없고, 자연의 체(體)가 없이는 인연의 용(用)을 발휘할 수 없다. 
즉용즉체(卽用卽體)이며, 즉체즉용(卽體卽用)이다.
정각묘명(精覺妙明)은 인연에도 자연에도 속하지 않으며, 비인연(非因緣)에도 비자연(非自然)에도 속하지 않으며, 
일체상(一切相)을 여의고 일체법(一切法)에 즉(卽)한다.

 

離一切相卽一切法。

이러한 가운데에서 일체의 상(相)을 떠나서 일체의 법에 나아가느니라. 

ㅡ4 번에 걸쳐 인연(因緣)도 아니고 자연(自然)도 아니라 하였다. 

정밀한 깨달음의 정각(精覺)의 모든 망령된 마음으로 분별이 없으므로 묘한 밝음이고, 일체의 상을 떠났으므로 온갖 계량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아난 존자가 수연불변(隨緣不變)의 뜻을 몰라서 견성이 인연으로 있는 것이라는 미혹을 파하고 있다. 
특히 아난 존자는 인(因)하는 바가 있음도 연(緣)하는 바가 있음도 모두 의타기성임을 알지 못하는 데에서 나오는 착각이라는 것을 모른다. 

 

汝今云何於中措心,以諸世閒戲論名相而得分別?如以手掌撮摩虛空,只益自勞!虛空云何隨汝執捉?”

너는 지금 어느 가운데에 마음을 두고 세상에서 희론(戱論)과 명상(名相)으로 분별하려는 것인가?

이렇게 분별하는 것은 마치 손으로 허공을 잡으려고 하는 것과 같아서, 스스로 수고로움만 더할 뿐, 허공이 어떻게 너의 손에 잡히겠는가?”

ㅡ정밀한 깨달음의 정각(精覺)에 마음을 둘 수 없는 것이, 마치 허공을 손으로 잡을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

 

아난 존자가 미혹하여 인연이라 한 것은, 견성(見性)이 인연으로 생긴다고 오인하여서, 특히 인(因)하는 바와 연(緣)하는 바가 있다는 것이 모두 의타기성(依他起成)임을 모르기 때문이다. 
외경이 없으면 의타기성은 없지만, 견성은 불변의 체로서 외경을 따라 생멸하지 않는다. 
정각(精覺)이란 정순(精純)하고 잡(雜)스럽지 않으므로 불변(不變)이다. 
묘명(妙明)은 불가사의하면서 밝은 수연(隨緣)의 뜻이 있다. 
각성(覺性)은 수연불변(隨緣不變)하여 마주함도 끊고 정량(情量)도 초월함을 드러낸다. 
'종경록'에서 “因緣自然 皆是世間言論. 인연과 자연은 모두 세간의 언론이고
有無眞俗 悉是分別識心 진과 속이 있다 없다는 식심의 분별일 뿐
妙覺性中 不許有一絲毫妄念停留 묘각성 중에는 한 터럭 망념이 머물 수 없는데
云何汝等於覺性上 措心作意也.어찌 너희들은 각성에 마음을 두고  뜻을 조작하느냐?” 라 하였다.ㅡ한울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