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엄경(首楞嚴經)

수능엄경(首楞嚴經)1권 7

Skunky 2025. 4. 12. 08:00

本名; ‘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大佛頂如來密因修證了義諸菩薩萬行首楞嚴經)’ 

또는 '중인도나란타대도량경(中印度那蘭陁大道場經)'

당나라의 반자밀제(般刺密帝, 반랄밀제) 번역, 송나라 급남(及南) 편찬(編纂), 송나라 계환(戒環) 해석

수능엄경(首楞嚴經, Surangama Sutra) 1권 7

 

▷아난 존자의 애청(哀請)

阿難聞已,重復悲淚五體投地,長跪合掌而白佛言:“自我從佛發心出家,恃佛威神,常自思惟無勞我修,將謂如來惠我三昧,不知身心本不相代,失我本心,雖身出家心不入道,譬如窮子捨父逃逝,今日乃知雖有多聞,若不修行與不聞等,如人說食終不能飽。

아난 존자가  말을 듣고  다시 슬피 울면서 온몸을 땅에 던지는 오체투지(五體投地)를 한 후, 장궤합장(長跪合掌)을 하고는 부처님께 말씀드리기를, “제가 부처님을 따라 발심하여 출가하였으나, 부처님의 위신(威神)을 믿고 항상 홀로 ‘내가 수고롭게 닦지 않아도 여래께서 저에게 삼매(三昧)를 내려주실 것이라’고 생각하였으며, 

본래 몸과 마음이 서로 대신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저의 본심(本心)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비록 몸은 출가하였으나 마음은 도(道)에 들지 못하였으니, 궁자(窮子)가 아버지를 버리고 달아난 것과 같다는 것을,

오늘에야 비로소 비록 들은 지식이 많을지라도 수행하지 않는다면, 듣지 않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 마치 입으로 맛있는 음식을 아무리 말할지라도 끝내 배부를  없는, 설식종불능포(說食終不能飽, 그림의 떡)것과 같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ㅡ'궁자(窮子)가 아버지를 버리고 달아난 것'은 본심(本心)을 잃은 것을 비유한 것이다.

장궤(長跪), 몸을 똑바로 세운 채 오른쪽 무릎을 꿇거나 혹은 두 무릎을 대고 허리를 세운 채 꿇어앉는 것.

 

▷거듭청하는 중청(重請)

世尊!我等今者二障所纏,良由不知寂常心性。唯願如來哀愍窮露發妙明心,開我道眼。”

세존이시여, 저희들이 지금 번뇌장(煩惱障)과 소지장(所知障)의 이장(二障)에 얽매인 까닭은, 고요하고 영원한 심성의 적상심성(寂常心性)을 알지 못한 까닭입니다. 

부디 여래께서는 헐벗고 궁핍한 저희를 가엾게 여기시어서, 밝고 묘한 마음을 밝히셔서 도안(道眼)을 열어주시옵소서.”

 

*이장(二障)=번뇌장(煩惱障)과 소지장(所知障), 번뇌장(煩惱障)은 아집(我執)으로 인해 생겨나는 번뇌로서, 열반(涅槃)의 증득을 장애하는 번뇌, 즉 해탈을 장애하는 번뇌이다.
소지장(所知障)은 법집(法執)으로 인해 생겨나는 번뇌로서, 보리(菩提)의 발현을 장애하는 번뇌, 즉 완전한 깨달음의 증득을 장애하는 번뇌이다.

*적상(寂常), 열반의 이치이며, 번뇌가 없음을 '적(寂)'이라 하고, 생멸이 없을 '상(常)'이라 한다. 

 

*궁자(窮子), 법화칠유(法華七喩) 중 하나이며, 법화경 신해품(信解品) 제4에 나오는 비유이다.  

'부자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어려서 가출하여서 50년 동안 가난과 싸우며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품팔이를 하며 유랑하다가 자신도 모르게 부자 아버지의 집 앞에 도착했지만, 알지 못하고 다른 곳으로 갈려고 하였지만, 자신의 아들이라는 것을 직감한 장자는 다양한 방법으로 거지를 자신의 집에서 일할 수 있도록 유인해서는, 점차 환경에 익숙해지자 여러 가지 기술을 가르쳐 마침내는 장자의 출납을 담당하는 회계로 키우고, 그 이후 집사로 성장시켰다가 자신의 아들이라는 것을 인식시키고, 자신의 모든 재산을 물려준다는 내용입니다.
못난 아들이 아버지가 쫓아오는 것을 보고 놀라서 기절하는 것은 궁자경악 화엄시(窮子驚愕華嚴時),
화엄경을 설한 때이고, 
그 다음에 집으로 유인을 당해서, 거름을 치고 청소를 하고 하찮은 일들을 하면서 일당을 조금씩 받아오는 것은 제분전가 아함시(除糞定價阿含時), 아함경을 설한 때이며, 
그 다음 세월이 흘러서 그 집에 출입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시기가 되었을 때를 출입자재 방등시(出入自在方等時), 방등경을 설할 때가 출입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정도이며,   
그 다음에 영지보물 반야시(令知寶物般若時), 보물을 다 알게 되었을 때는 반야경을 설하신 때이다. 
반야부 경전이 내용에 있어서 중간에 위치하지만, 그 보다 낮은 교리와 높은 교리의 모두를 아우르고 근본이 되는 것이 반야부 경전인 것입니다. 
그리고 훌쩍 한 단계 뛰어넘어서 , 전부가업 법화시(傳付家業法華時)라 해서 집안의 모든 재산과 살림살이 일체를 전부 물려받는 시기가 법화경을 설하던 때이라고 배대를 합니다.  
그래서 화엄경 21일, 그 다음에 아함경 12년, 방등경 8년, 반야부 경전 21년, 법화열반 8년 동안 설하신,

아함십이(阿含十二) 방등팔(方等八) 이십일재담반야(二十一載談般若), 종담법화우팔년(終談法華又八年), 최초 화엄삼칠.ㅡ 무비스님

 

*We solve one problem and then we continue to grasp others, nonstop. The conditional mind has dozens, hundreds of thoughts that it grasps and relies on. Taking refuge in or relying on and clinging to something outside becomes our habit and forms the Karma wheel. 

Consciousness is the false thoughts following the external conditions, which we wrongly consider as our mind. So when the shadows of the six objects show up, we catch; then another shows up, we give up this shadow to grasp another. The shadow is destroyed, another objet appears. We are movable and attach to the rising-falling objects without direction. 

우리는 한 가지의 문제를 해결한 다음에도 끊임없이 다른 문제들에 파고듭니다. 조건부적 마음은 수십, 수백 가지의 생각을 따라 움켜잡고 의지하고자 합니다. 외부의 무언가에 의지하여서 위안을 받고자 집착하는 것은 우리의 습관이 되고 또한 윤회를 형성합니다.

의식은 외부 조건에 따르는 거짓된 생각이나, 우리는 그것을 우리의 마음이라고 잘못 생각합니다. 그래서 여섯 가지 대상의 그림자, 육경(六境)이 나타나면 바로 받아 들여서 집착하고, 다시 다른 그림자가 나타나면, 이 그림자를 포기하고, 다른 그림자를 받아 들여서 집착해서 다시 이 그림자는 파괴되고 다른 대상으로 옮겨 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항상 움직이면서, 일정한 방향 없이 나타나고 사라지는 대상에 집착할 뿐입니다.

ㅡ Dr. Bhikkuni Gioi Huong


卽時如來從胸卍字涌出寶光,其光晃昱有百千色,十方微塵普佛世界一時周遍,遍灌十方所有寶剎諸如來頂,旋至阿難及諸大衆。

즉시 여래께서는 가슴의 만자(卍字)에서 보배로운 광(寶光)을 놓으시니, 백천 색으로 어우러진  찬란한 광명이 일시에 시방의 미진과 같이 많은 부처님의 세계에 두루 퍼져서, 시방 일체의 보배로운 국토인 보찰(寶刹)에 계신 모든 여래의 정수리를 두루 비춘 뒤에, 다시 돌아와 아난 존자와 모든 대중을 비추었다.

 

'만자문(卍字紋)', 영원한 법과 복덕의 상징이며, 불교의 진리를 상징하는 중요한 요소이며, 이 문양은 우주와 자연의 조화를 나타내며, 부처님의 공덕과 지혜를 상징하는 의미도 포함하고 있다.일반적으로 왼쪽 방향(반시계 방향)으로 도는 좌만자(卍)가 주로 사용되며, 고대 인도에서 사용된 것이었다.

卍은 불경과 함께 중국에 전해졌으며, 후진의 구마라습과 당나라의 현장은 이를 '덕(德)'으로 번역했지만 북위 시대의 보리류지(菩提流支)는 '만(萬)'으로 번역하였는데 이는 만덕(萬德)의 의미를 가진다. 측천무후 시절에는 卍은 '만(萬)'으로 읽도록 정했는데 이는 길상만덕(吉祥万徳)이 모인다는 뜻이다.ㅡ나무위키

 

▷아난 존자의 요청에 응하심.

告阿難言:“吾今爲汝建大法幢,亦令十方一切衆生,獲妙微密性淨明心得淸淨眼。

阿難!汝先答我見光明拳,此拳光明因何所有?云何成拳汝將誰見?”

부처님께서 아난 존자에게 말씀하셨으니, 

“나는 이제 너를 위하여 위대한법(大法)의 깃대(幢)를 세우리니, 따라서 시방의 일체중생에게 미묘하고 비밀스러운 심오한 성품인 미묘밀성(妙微密性)의 맑고 밝은 정명심(淨明心) 얻게 하여서 청정한 안목의 청정안(淸淨眼)을 밝히도록 할 것이니라.”

아난아, 네가  전에 나에게 ‘광명이 빛나는 광명권(光明拳) 본다’고 답하였는데, 

 주먹의 광명이 있는 까닭은 무엇이며? 

어떻게 주먹이 되었으며?

또한 너는 무엇으로 보았는가?”

깃대(幢)이란 삿된 것을 꺾고 올바른 것을 세우는 것을 말한다. 앞에서 묘한 마음과 깨끗한 눈을 밝혀서 삿된 것을 꺽고 항복받아서 올바른 지견(智見)을 얻게 하신 것이 대법의 깃대(幢)를 세운 것이다. 지견(知見)이 바르게 되면, 묘한 마음과 깨끗한 눈을 얻게 되는 것이니, 중생과 여래가 다같이 가지고 있으나 헤아려 알 수 없는 것을 '미묘하고 비밀스러운 심오한 성품의 미묘밀성(妙微密性)이라 하였고,

때가 능히 더럽힐 수 없고 어두움이 능이 어둡게 할 수 없는 것을 맑고 밝은 정명심(淨明心)이라 하였으며,

봄에 있어서 눈병을 벗어나 환하고 뚜렷하게 보는 것을 말고 깨끗한 눈을 청정안(淸淨眼)이라 한다.


阿難言:“由佛全體閻浮檀金赩如寶山,淸淨所生故有光明,我實眼觀五輪指端屈握示人,故有拳相。”

아난 존자가 말씀드리기를, 

“염부단금(閻浮檀金)과 같은 부처님의  몸이 보배 산과 같이 붉어서 청정한 빛을 내시는 까닭에 광명이 있는 것이며, 

그러한 것을 저의 눈으로 보았습니다. 

또한 다섯 손가락의 오륜지(五輪指)을 구부려 쥐시고 사람들에 보여주신 까닭에 주먹의 모습인 권상(拳相)이 있는 것입니다.”

염부단금(閻浮檀金), 염부나무 사이를 흐르는 강에서 나오는 사금(沙金), 또는 염부나무 밑에 있다고 하는 금.


佛告阿難:“如來今日實言告汝,諸有智者要以譬喩而得開悟。

阿難!譬如我拳,若無我手不成我拳;若無汝眼不成汝見。以汝眼根例我拳理,其義均不?”

부처님께서 아난 존자에게 말씀하셨다.

“이 여래는 오늘 진실한 말로써 네게 알려주리라. 지혜 있는 사람이라면  비유로 반드시 깨달을  있을 것이니,

아난아, 비유하자면 나의 주먹과 같은 것이다. 

만약 내 손이 없다면  주먹을 만들  없었을 것이며, 

 눈이 없다면 너는   없었을 것이니라. 

이와 같은 이치로  눈을  주먹에 비교한다면  뜻이 같은 것이 겠는가?”


阿難言:“唯然,世尊!旣無我眼不成我見,以我眼根例如來拳,事義相類。”

아난 존자가 말씀드리기를, 

“예,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눈이 없다면 저는   없었을 것이므로, 

 눈을 여래의 주먹에 비교한다면 실제와 뜻이 서로 같은 사의상류(事義相類)인 것입니다.”

ㅡ눈(眼)을 주먹(拳)에 비유한 것은 이치가 비슷하지 않으나, 아난 존자가 이를 미처 깨닫지 못한 까닭에 비슷하다고 대답한 것이다.

 

▷정택진견(正擇眞見)

佛言阿難:“汝言相類,是義不然。何以故?如無手人拳畢竟滅;彼無眼者非見全無。所以者何?汝試於途詢問盲人:‘汝何所見?’彼諸盲人必來答汝:‘我今眼前唯見黑暗,更無他矚。’以是義觀,前塵自暗,見何虧損?”

부처님께서 아난 존자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서로 같다고 하였으나  뜻은 그렇지 않은 것이니,

 까닭은 만약 손이 없는 사람이라면 전혀 주먹을 만들  없으나, 

눈이 없는 사람은 전혀  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니라. 

 이유를 말할 것이니, 네가 시험 삼아 길거리로 가서 맹인(盲人)들에게 ‘당신은 무엇을 봅니까’라고 묻는다면, 

 맹인들은 ‘나는 지금 눈앞에 캄캄한 것만을 볼 뿐,  밖에는 아무것도 볼 수 없습니다’라고 대답할 것이니라. 

이러함으로 본다면, 앞 경계가 스스로 어두울 뿐, 보는 작용에는 모자람이 없는 것이니라.”


阿難言:“諸盲眼前唯睹黑暗,云何成見?”

아난 존자가 말씀드리기를, “맹인들의 눈앞이 캄캄함을 어찌하여 본다고 하시는 것입니까.”


佛告阿難:“諸盲無眼唯觀黑暗,與有眼人處於暗室,二黑有別?爲無有別?”

부처님께서 아난 존자에게 말씀하셨다.

“눈의 기능이 없는 맹인들이 보는 캄캄함과 눈의 기능이 있는 사람이 암실(暗室)에서 보는 캄캄함을 비교한다면, 

이러한 두 캄캄함인 다른 것이겠는가?

다르지 않은 것이겠는가?”

ㅡ두 어두움이 다르지 않다면, 어두움은 곧 눈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고, 다만 보는 대상이 어두운 것일 뿐이다.


“如是,世尊!此暗中人與彼群盲,二黑挍量曾無有異。”

아난 존자가 말씀드리기를,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암실에 있는 사람을  맹인들과 비교한다면,  캄캄함은 조금도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阿難!若無眼人全見前黑,忽得眼光還於前塵,見種種色名眼見者;彼暗中人全見前黑,忽獲燈光,亦於前塵見種種色,應名燈見。若燈見者,燈能有見自不名燈,又則燈觀何關汝事?是故當知燈能顯色。如是見者是眼非燈,眼能顯色,如是見性是心非眼。”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난아 “만약   사람이 눈앞의 캄캄함만을 보다가 홀연히 눈빛을 얻어서, 앞 경계의 갖가지 물체를 보는 것을 눈이 본다고 하는 것이라면, 

 암실에 있는 사람이 눈앞의 캄캄함만을 보다가 홀연히빛을 얻어서,  경계의 갖가지 물체를 보게 된다면, 당연히 등(燈)이 본다고 해야 하리라. 

만약 등이 본다고 한다며, 등(燈)에게 보는 능력이 있으므로 등(燈)이라 이름할  없을 것이며, 

 등(燈)이 보는 것이니 너와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등(燈)은 빛을 드러낼  있으나,

이렇게 보는 작용은  눈(眼)이요, 등(燈)이 아니며, 

눈은 색(色)을 드러낼  있으나, 이렇게 보는 성품은  마음(心)이요 눈이 아닌 것이니라.”

ㅡ모는 주체는 성품(性)이라는 것이다. 

 

*견() 마음의 작용이다

우리는 눈으로 본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보는 것은 <눈> 이 아니고 <마음> 이다. 

캄캄한 방에 촛불을 켜면 환하게 보인다고해서 촛불이 보는 것인가? 

환한 것을 아는 것은 촛불이 아니고 마음(眞心)이며, 눈(眼根)은 기관일 뿐이다.

보는 것은 물론이고 견문각지(見聞覺知) 하는 것은 전부다 마음이다.
등(燈) ―― 물체 ―― 눈(眼)
눈(眼) ―― 물체 ―― 마음
등과 눈을 비교하여 등이 보는 것이 아니고 눈이 보는 것과 같이,

눈과 마음을 비교하여 눈이 보는 것이 아니고 마음이 보는 것이다.ㅡ향적법진

 

▷아난 존자가 아직 깨닫지 못함
阿難雖復得聞是言,與諸大衆口已默然心未開悟,猶冀如來慈音宣示,合掌淸心佇佛悲誨

이러한 말씀을 듣자 아난 존자는 대중들과 함께 비록 입으로는 이미  말이 없어졌으나, 마음으로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였으므로, 오로지 여래께서 자비하신 음성으로 설해주시기를 바라면서, 

합장하여 마음을 비운, 합장정심(合掌淸心)으로 부처님의 자비로운 가르침을 기다릴 뿐이었다.

ㅡ마음으로 보는 것임을 조금 알았기 때문에 잠자코 있었으나 아직 의심은 남아 있다.

 

▷객진번뇌를 떨쳐버림 - 추문하여 깨닫게 함.
爾時,世尊舒兜羅緜網相光手,開五輪指,誨勅阿難及諸大衆:“我初成道於鹿園中,爲阿若多五比丘等及汝四衆言:‘一切衆生不成菩提及阿羅漢,皆由客塵煩惱所誤。’汝等當時因何開悟今成聖果?”

이때 세존께서 그물 모양처럼 무늬 진, 도라면(兜羅綿, 깨끗하고 부드러운 솜)과 같이 부드럽고 광명이 빛나는 손을 들어 다섯 손가락을 펴시면서, 아난 존자와 대중에게 가르침을 주셨다.

“내가 처음 도를 이루고 녹원(鹿園)에서 아야다(阿若多, 得解, 앎의 뜻, 교진여)  다섯 비구와 너희들 사부대중(四部大衆)에게 말하기를 ‘일체중생이 보리(菩提)와 아라한(阿羅漢)을 이루지 못하는 것은 모두  객진번뇌(客塵煩惱)의 잘못 때문이니라’고 하였 때, 당시에 너희들은 무엇을 근거로 깨달았기에 거룩한 과위의 성과(聖果)를 이룬 것인가!”

 

*부처님께서 가르침을 설파를 '법의 수레바퀴가 굴러간다'고 하여서 전법륜(轉法輪)이라 하며, 처음으로 법의 수레바퀴를 굴린 것을 초전법륜(初轉法輪)이라 한다.
깨달음을 얻은 직후 자신과 수행했던 다섯 수행자, 콘단냐(Kondanna, 교진여, 아야다)· 아사지(Assaji, 아설지) · 마하나마(Mahanama, 마하남) · 밧디야(Bhaddhiya, 바제) · 바파(Vappa, 바파)에서 초전법륜을 하였다. 이들은 처음 싯다르타가 출가했을 때에 아버지 숫도다나가 아들을 호위하라고 파견했다는 설이 있고, 혹은 싯다르타의 인간됨을 보고 따랐던 그의 수행 시절 동료였다고도 전한다. 

*객진번뇌(客塵煩惱)와 자진번뇌(自塵煩惱), 미세하고 수가 많으므로 진(塵)이라 함.
객진번뇌는 외부 환경이나 상황에서 비롯된 번뇌를 의미하는 것으로, 예를 들어, 타인의 비판, 물질적 손실, 사회적 갈등 등 외부 자극에 반응해서 생기는 분노, 시기, 불안 등으로, ‘객(客)’은 ‘손님’을 뜻하며, 일시적으로 나타났다 사라지는 특성을 지닙니다.
자진번뇌는 개인의 내면에서 발생하는 근본적인 번뇌를 가리키며, 예를 들어, 탐욕(貪), 성냄(瞋), 어리석음(癡) 등 삼독(三毒)과 같은 선천적 습관이나 무명(無明)으로, ‘자(自)’는 ‘스스로’를 의미하며, 오랜 세월 동안 축적된 심층적인 문제로 간주됩니다.

대처 방식으로는; 
객진번뇌는 외부 자극에 대한 반응을 조절하는 데 초점을 둡니다. 마음챙김(念)이나 상황에 대한 객관적 관찰을 통해 일시적인 감정의 흐름을 끊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이 비판은 나를 향한 것이 아니라 상황에 대한 상대방의 해석일 뿐’이라고 인식하는 태도를 갖는 것입니다.
자진번뇌: 내면의 근본적 원인을 제거하기 위해 수행(修行)이 필요합니다. 명상, 계율 준수, 지혜 함양 등을 통해 무명을 벗어나고 삼독을 소멸시키는 것이 목표입니다. 예를 들어, 탐욕의 뿌리를 찾아 집착을 버리는 과정입니다. ㅡ향림

 

▷교진여가 뜻을 밝힘.
時,憍陳那起立白佛:“我今長老於大衆中獨得解名,因悟客塵二字成果。

이때 교진나(憍陳那, 아야다)가 일어나서 부처님께 말씀드리기를, 

“제가 지금 장로(長老)로서 대중 가운데 홀로 ‘잘 아는 사람의 득해(得解)’로 널리 알려진 것은 객진(客塵)의  글자를 깨닫고 과(果, 과위, 불과)를 성취한 까닭에서 입니다.

 

世尊!譬如行客投寄旅亭,或宿或食,食宿事畢,俶裝前途不遑安住;若實主人自無攸往。

如是思惟不住名客、住名主人,以不住者名爲客義。

세존이시여, 비유를 들어 말하자면, 나그네가 여정(旅亭)에서 머물러서 자기도 하고, 먹기도 하다가, 자고 먹는 일이 끝나면, 편안히 머무를 여유도 없이 짐을 싸서 길을 떠나지만, 주인은 멀리 떠나지 않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와 같이 사유해 보면, 머물지 않는 것은 나그네인 객(客)이고, 머무는 것은 주인(主)이니, 

머물지 않는 것을 객(客)의 뜻으로 생각하였습니다.

 

又如新霽淸暘昇天光入隙中,發明空中諸有塵相,塵質搖動虛空寂然。

如是思惟澄寂名空,搖動名塵,以搖動者名爲塵義。”

또한 날씨가 맑게 개인 아침에 밝은 태양이 하늘에 떠올랐을 때,  빛이 틈새로 들어와서 빈틈의 티끌(塵)을 밝게 비추면, 티끌은 흔들리지만, 허공은 고요하여 흔들리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이와 같이 사유하여 보면, 맑고 고요한 자체는 허공의 공(空)이고, 

흔들리는 것은 티끌(塵)이니, 흔들리는 것을 진(塵)이라는 뜻으로 생각하였습니다.”


佛言:“如是。”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러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