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엄경(首楞嚴經)

수능엄경(首楞嚴經)1권 6

Skunky 2025. 4. 11. 08:00

本名; ‘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大佛頂如來密因修證了義諸菩薩萬行首楞嚴經)’ 

또는 '중인도나란타대도량경(中印度那蘭陁大道場經)'

당나라의 반자밀제(般刺密帝, 반랄밀제) 번역, 송나라 급남(及南) 편찬(編纂), 송나라 계환(戒環) 해석

수능엄경(首楞嚴經, Surangama Sutra) 1권 6

 

▷혼미한 이류를 전체적으로 보이심

佛告阿難:“一切衆生從無始來種種顚倒,業種自然如惡叉聚,諸修行人不能得成無上菩提,

乃至別成聲聞、緣覺,及成外道、諸天魔王及魔眷屬,皆由不知二種根本,錯亂修習,

猶如煮沙欲成嘉饌,縱經塵劫終不能得。

부처님께서 아난 존자에게 말씀하셨다.

“일체중생이 시작 없는 무시(無始)로부터 가지로 뒤바뀐 전도(顚倒)된 업의 종자가 악차(惡叉)의 열매가 쌓인 덩어리와 같은 것으로,

수행자들은 더없이 높고 바른 깨달음의 무상보리(無上菩提)를 성취하지 못하고, 따로 성문(聲聞)이나 연각(緣覺)이 되거나, 일체의 외도(外道)와 모든 하늘과 마왕(魔王)과  권속(眷屬)이 되어 버리는 것은,  가지 근본을 알지 못하고 어지럽게 뒤섞이게 수습(修習)하는 때문이니라.

이러한 수행은 마치 모래를 삶아서 좋은 음식을 만들고자 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 아무리 오랜 겁 동안을 노력할지라도 성취할  없는 것이니라.

ㅡ중생들의 업종(業種)은 서로 모여서 이루어진 것이며, 수행하는 사람이 정과(正果)를 이루지 못하는 것은 반연심과 청정체의 두 가지 근본을 알지 못하고 어지럽게 닦고 익히는 까닭이니, 모름지기 결택(決擇)을 잘하여야 하는 것이다. 

반연심이란, 앞의 칠처(七處)에서 망령되게 인식하는 것이고, 청정심이란 바르게 분별하여 밝히는 것이다.번뇌에 물들지 않은 것을 보리(菩提)라 하고, 생사에 간섭되지 않는 것을 열반이라 하는데, 물둘지도 않고 간섭되지도 않으므로 본래 청정한 본체(本體)라 한 것이다. 

 

*악차(惡叉, rudra-akṣa) 과일의 이름으로, 그 씨로 염주를 만들며, 이것을 금강자(金剛子)ㆍ천목구(天目球)라고 하며,  과일이 땅에 떨어지면  장소에 많이 쌓이기 때문에,  장소에 많이 있는 것을 설명할  흔히 이것으로 비유한다.

 

*자사욕성가(煮沙欲成嘉饌), 모래를 삶아 좋은 음식을 만들고자 하는 것으로, 이루어질 수 없는 것에 대한 노력을 말한다. 모래를 쪄서 밥을 만든다는 뜻의 증사작반(蒸沙作飯), 모래 위에 집을 짓는다는 사상누각(沙上樓閣), 공중에 떠있는 누각이라는 공중누각(空中樓閣)과 비슷한 말이다. 증사작반은 원효대사의 발심수행장(發心修行章)에 나오는 말로서 전체 글은 다음과 같다. 부지런히 수행을 해도, 지혜가 없는 사람은 동쪽으로 가고자 하지만 실제로는 서쪽으로 간다. 또 지혜가 있는 사람은 쌀로 밥을 짓지만, 지혜가 없는 사람은 모래를 삶아서 밥을 지으려고 한다. 누구나 배가 고프면 밥을 먹을 줄은 알면서도 불법을 배워 어리석은 마음을 고칠 줄은 모르는구나.

 

ㅡ아뢰야식(阿賴耶識) 속에 본성(本性)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 진여심(眞如心)이 있다. 아뢰야식은 진심(眞心)과 무명(無明)인 망심(妄心)이 화합한 것으로 진망화합식(眞妄和合識) 이라고 한다. 화합을 깨뜨리면 본성(本性)이 저절로 나타난다.
반연하는 마음으로 보면, 대상은 ①고정되어 보이고 ②분리되어 보이고 ③스스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렇게 인식하는 마음을 무명(無明)이라고 한다. 그러나 대상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실체가 없다. 무아(無我)이고 무자성(無自性)이다. 또한 이러한 대상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실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대상은 바로 마음이 만든 대상이다. 즉, 망막에 맺힌 "영상" 을 보고 실재하는 대상이라고 인식한다. 실제 사물이 존재하기 때문에 본다고 하지만 사실은 망막에 맺힌 이미지를 인식하는 것이다. 주관의 마음이 객관의 마음을 인식하는 것이다. 이것은 반연심(返緣心)이고 육식(六識)이고 무명(無明)이다.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이 아뢰야식(阿賴耶識)의 껍질을 통하여 밖으로 나타난 것이 반연심이다.- 향적법진

 

云何二種?阿難!一者無始生死根本,則汝今者與諸衆生,用攀緣心爲自性者;

二者無始菩提涅槃元淸淨體,則汝今者識精元明,能生諸緣緣所遺者。

由諸衆生遺此本明,雖終日行而不自覺,枉入諸趣。

무엇을  가지 근본이라고 하는 것인가?

아난아, 첫째는 무시(無始)로부터 나고 죽는 생사(生死)의 근본으로서, 네가 지금 모든 중생과 함께 반연하는 마음의 반연심(攀緣心)을 스스로의 성품인 자성(自性)으로 아는이며, 

둘째는 무시(無始)로부터 보리열반의 원래 청정한 본체인 보리열반원청정체(菩提涅槃元淸淨體)이니, 네가 지금 식정(識精)의 원래 밝음으로 모든 인연을 내기도 하여서, 그 인연으로 잃어버린 것이니라.

모든 중생은  원래의 밝은 본체(本體)인 본명(本明)을 잃어버린 까닭에, 비록 종일토록 행할지라도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 어긋나게 여러 갈래의 제취(諸趣, 육취 六聚)로 들어가는 것이니라.

 

우리는 조건화된 외부 사물(대상)으로부터 고통, 기쁨, 사랑, 괴로움 등으로 허망하게 분별하는 반연심(攀緣心)을 따르는 까닭에 생사를 거듭하는 것이다. 아난 존자가 부처님의 상호를 우러러 본 것과 마탕가의 아름다움에 빠진 것도, 아난 존자는 칠처징심 중에서외부 대상에 대한 육근의 반연심을 스스로의 자성(自性)으로 잘못 안 까닭에 부처님께서 7 가지로 마음이 소재를 물었을 때, 잘 이해하지 못하고 반연심으로 대답한 것이다. 

그러므로 육근(六根, 주체)이 육경(六境, 객체)을 대상으로 일어나는 육식(六識)으로 말미암아 반연심(攀緣心, 망상, 분별심)을 일으켜서 본명(本明)을 잃어 버리고, 제취(諸趣, 육취 六聚)로 윤회를 거듭하는 것이다.

*반연(攀緣), 반(攀) 더위잡을 반, 무엇을 붙잡고 오르는 것, 
                    연(緣) 가선 연, 연줄 연, 인연 연
반(攀)이란 의지한다는 뜻이고, 연(緣)이란 조건이라는 뜻으로, 마음의 대상에 의지해서 작용을 일으키는 것, 곧 얽힌 인연이라는 말인데, 번뇌 망상의 시초이며 근본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번뇌란 의미로도 쓰이고, 인식이라는 말로도 쓰인다.
대경(​對境,대상 경계)을 의지하는, 즉 대상이 나타나면 수단을 가리지 않고 휘감고 자신의 존재를 과시한다.
​마치 칡넝쿨이 나무나 풀줄기가 없으면 감고 올라가지 못하는 것과 같이, 마음이 일어날 때에는 반드시 대경(對境)을 의지하고 일어나는 것으로, 마음은 대경을 반연 하는 것이다. ㅡ해가지니 달이뜨네

*식정(識精), 중생의 진심(眞心), 즉 정명한 지식을 말한다.

*정과(正果), 불법을 닦는 사람이 정진하고 수련하여서 성과(聖果)를 얻는 것을 증과(證果)라고 하는데, 이는 외도와 다른 것이다.  

 

▷바로 결정하여 선택함의 정여결택(正與決擇)
“阿難!汝今欲知奢摩他路願出生死,今復問汝。”

아난아, 네가 이제 사마타(奢摩他)의 길을 알고 생사(生死)에서 벗어나기를 원한다면, 

이제 다시 네게 묻겠으니!”

 

卽時,如來擧金色臂屈五輪指,語阿難言:“汝今見不?

즉시 여래께서  황금색 팔을 들어 다섯 손가락을 구부리면서 아난 존자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지금 보고 있는가?”


阿難言:“見。”

아난 존자가 대답하기를, “예 보고 있습니다.”


佛言:“汝何所見?”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무엇을 보았는가?”


阿難言:“我見如來擧臂屈指,爲光明拳,曜我心目。”

아난 존자가 대답하기를, 

“저는 여래께서 팔을 들어 올리시 다섯 손가락을 구부려 광명이 빛나는 주먹을 만드셔서, 제 마음과 눈에 비추시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佛言:“汝將誰見?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너는 무엇으로 보고 있는 것인가?


阿難言:“我與大衆同將眼見。”

아난 존자가 대답하기를, “저는  대중(大衆)들과 눈으로 보고 있습니다.”


佛告阿難:“汝今答我。如來屈指爲光明拳,耀汝心目,汝目可見。以何爲心,當我拳耀?”

부처님께서 아난 존자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이제 나에게 답하기를 ‘여래가 팔을 들고 손가락을 구부려 광명이 빛나는 주먹을 만들어서 너의 마음과 눈에 비춰 주는 것을 본다’고 하였는데,  눈은 본다고 하겠으나, 무엇을 마음이어서,  주먹의 비치는 아는 것인가?”

 

▷아난 존자의 망령된 대답.
阿難答言:“如來現今徵心所在,而我以心推窮尋逐,卽能推者,我將爲心。”

아난 존자가 대답하기를, 

“여래께서 방금 마음이 있는 곳을 물으시자, 저는 마음으로 추궁하여 찾아보았으니, 저는  추궁하는 자체를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佛言:“咄!阿難!此非汝心。” 
咄 꾸짖을 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돌(咄), 아난아, 그것은  마음이 아니니라.”


阿難矍然避座合掌,起立白佛:“此非我心,當名何等?”

 말을 듣자 아난 존자는 소스라치게 놀라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합장하고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이것이  마음이 아니라면, 무엇이라 하겠습니까?”

 

▷비진(非眞)을 보이심. 
佛告阿難:“此是前塵虛妄相想惑汝眞性。由汝無始至于今生認賊爲子,失汝元常故受輪轉。”

부처님께서 아난 존자에게 말씀하셨다.

“그것은 네 앞의 경계인 전진(塵虛)의 허망한 상(相) 인연하는 생각이며, 너의  성품인 진성(眞性)을 미혹시킨 번뇌이니라. 

너는 시작이 없는 무시로부터 금생(今生)에 이르도록 도적을 아들로 잘못 알고, 너의 본래 영원한 마음을 잃어버린 까닭에, 생사의 윤회를 받고 있는 것이니라.”

 

육근(六根, 주체, 감각기관) + 육경(六境, 객체, 인식하는 대상, 경계) = 육식(六識, 분별 인식 작용, 인연) 

안근(眼根, 눈) 시각 기관 + 색경(色境) 눈이 인식하는 색깔 = 안식(眼識) 눈의 분별 인식 작용
이근(耳根, 귀) 청각 기관 + 성경(聲境) 귀가 인식하는 소리 = 이식(耳識) 귀의 분별 인식 작용

비근(鼻根, 코) 후각 기관 + 향경(香境) 코가 인식하는 냄새 = 비식(鼻識) 코의 분별 인식 작용
설근(舌根, 혀) 미각 기관 + 미경(味境) 혀가 인식하는 맛 = 설식(舌識) 혀의 분별 인식 작용
신근(身根, 몸) 촉각 기관 + 촉경(觸境) 몸이 인식하는 촉감 = 신식(身識) 몸의 분별 인식 작용
의근(意根, 마음) 정신적 인식 기관 + 법경(法境) 마음이 인식하는 대상, 즉 생각, 개념, 정신적 대상 = 의식(意識) 마음의 분별 인식 작용

 

*인적위자(認賊爲子) ① 도둑을 아들로 생각하다 ② 부정당한 견해를 진실로 여기다.

여기에서는 마음, 즉 망심을 자신으로 생각한다는 것으로, 육식(六識, 분별 인식 작용, 인연)은 진심이 아니다.

 

阿難白佛言:“世尊!我佛寵弟,心愛佛故令我出家,我心何獨供養如來,乃至遍歷恒沙國土,承事諸佛及善知識,發大勇猛,行諸一切難行法事皆用此心;縱令謗法永退善根亦因此心。若此發明不是心者,我乃無心同諸土木,離此覺知更無所有。云何如來說此非心?我實驚怖,兼此大衆無不疑惑,唯垂大悲開示未悟!”

아난 존자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저는 부처님의 귀여운 아우로서, 마음 깊이 부처님을 연모하여 출가하였으나, 

어찌 제 마음만이 홀로 여래를 공양하는 것이 겠습니까! 

나아가 항하(恒河) 강의 모래 수와 같이 많은 국토를 두루 다니면서 모든 부처님과 선지식(善知識)을 받들어 섬기거나,  용맹을 일으켜서 일체의 행하기 어려운 불법의 난행법사(難行法事)를 행하는 것 모두가 이 마음으로 행하는 것이며, 

가령 법을 비방하여 영원히 선근(善根)에서 물러난다 할지라도, 역시  마음 때문인 것입니다. 

만약 이러한 마음을 내 마음이 아니라고 밝히신다면, 저는 바로 마음이 없는 흙과 나무와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깨달아 아는 마음을 떠나서는  이상 아무것도 없을 것인 즉, 어찌하여 여래께서는  마음이 아니라고 하십니까! 

 혼자만 두려운 것이 아니라, 여기의  대중들도 의혹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부디 대비(大悲)를 내리시어  깨닫지 못한 어리석음을 깨우쳐 주시옵소서!”

 

▷시유진심(示有眞心), 진심이 있음을 보이시다.
爾時,世尊開示阿難及諸大衆,欲令心入無生法忍,於師子座摩阿難頂而告之言:

“如來常說諸法所生唯心所現,一切因果世界微塵因心成體。

阿難!若諸世界一切所有,其中乃至草葉縷結,詰其根元咸有體性,縱令虛空亦有名貌,

何況淸淨妙淨明心性一切心而自無體?

이때 세존께서 아난과 대중에게 열어 보이시고  마음을 무생법인(無生法忍)에 들게 하시고자, 사자좌(師子座)에서 아난의 이마를 쓰다듬으며 말씀하셨다.

“이 여래는 항상 ‘제법이 생겨나는 제법소생(諸法所生) 오로지 마음에 나타난 경계인 유심소현(唯心所現)이며, 

일체의 인과(因果)와 세계 미진(微塵)은 마음으로 자체를 이루는 인심성체(因心成體)이다’라고 설해 왔느니라.

아난아! 만약 모든 세계의 일체 존재인 일체소유(一切所有)에서 조그마한  잎새나 가느다란  가닥까지도  근원을 따져보면, 그 모두 자체의 성품이 있고, 허공일지라도 이름과 모습이 있거늘,

더욱이 청정하고 미묘하고 맑고 밝은 마음은 일체 마음의 본성인 청정묘정명심성(淸淨妙淨明心性, 본성)이 어찌하여 자체가 없는 무체(無體)이겠는가?

 

▷망령된 집착을 분별하여 물리침
若汝執悋分別覺觀,所了知性必爲心者,此心卽應離諸一切色、香、味、觸,諸塵事業別有全性,如汝今者承聽我法,此則因聲而有分別,縱滅一切見聞覺知,內守幽閑猶爲法塵分別影事,

만약 네가 분별(分別)하고 깨닫고 살피는 각관(覺觀, 추측하여 헤아리는 마음)으로, 분명하게 아는 성품에 굳게 집착하여서, 그것이 틀림없는 마음이라 한다면, 

 마음은 마땅히 색(色, 모습)을 보고 냄새(香)를 맡고 맛(味)을 알고 닿음(觸)을 느끼는 일체경계를 떠나서, 따로이 완전한 스스로의 성품이 있어야 할 것이니라. 

네가 지금 나의 설법을 받들어 듣고 있을지라도 소리를 따라 분별하고 있는 것이니, 가령 일체의 보고 듣고 깨닫고 아는 견문각지(見聞覺知)의 작용이 멸하여 안으로 고요한 경계를 지킬지라도, 오히려 법의 경계인 법진(法塵)을 분별하는 그림자의 분별영사(分別影事) 일 뿐이니라. 

 

각관(覺觀), 거친 마음으로 처음 생각하는 것을 각(覺)이라 하고, 세밀한 마음으로 분별하는 것을 관(觀)이라 한다.
각관(覺觀)은 심사(尋伺)이며, 심(尋)은 찾아 헤매는 마음과 사물에 대한 개략적인 사고 작용, 

사(伺)는 그보다 세심한 분별 작용을 가리킨다. 번뇌에 수반되는 수번뇌(隨煩惱)의 일종으로 분류된다. 

선정=定도 무의식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생각하고 살피는 작용이 있다. 그러나 심사와 다른 점은 선정은 '바르게' 생각하고 살피는 것이고 심사는 바르지 못한 것이며, 이 각관(覺觀), 즉 심사(尋伺)를 버려야 2선으로 들어갈 수 있다.  

 

非勅汝執爲非心,但汝於心微細揣摩,若離前塵有分別性卽眞汝心;若分別性離塵無體,斯則前塵分別影事,塵非常住若變滅時,此心則同龜毛兔角,則汝法身同於斷滅,其誰修證無生法忍?”

卽時阿難與諸大衆默然自失。

나는 네게 굳이 마음이 아님을 고집하라고 강요하는 것이 아니니, 너는 그저 마음으로 자세히 헤아려 보거라. 

만약 앞의 경계(塵)를 떠나서 분별하는 성품이 있다면, 바로 진실한 너의 마음인 진심(眞心)이라 하겠는가?

만약 분별하는 성품의 경계(塵)를 떠나서 자체가 없는 무체(無體)라면, 

이것은  앞의 경계를 분별하는 분별영사(分別影事)이니라. 

경계는 영원히 머무는 상주(常住)의 진리가 아니니, 만약 변하여 사라질 때의 그 마음이 곧 거북의 털인 귀모(龜毛)나 토끼의 뿔인 토각(兔角)과 같은 것이라면, 너의 법신(法身)도 끊어져 없어지는 단멸(斷滅)하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니라. 

그러하다면  무엇이 무생법인(無生法忍)을 닦아서 증득한다는 것인가?”

그러자 아난과 대중은 무엇을 잃어버린  말없이 잠자코 있는 묵연자실(默然自失)하였다.

 

▷망령되고 잘못됨이 이루어진 것임을 결론 지음.
佛告阿難:“世閒一切諸修學人,現前雖成九次第定,不得漏盡成阿羅漢,皆由執此生死妄想誤爲眞實。

是故汝今雖得多聞不成聖果。”

부처님께서 아난 존자에게 말씀하셨다.

“이 세상에서 닦고 배우는 수학인(修學人)들이 현재 비록 아홉 단계의 선정인 구차제정(九次第定)을 성취할지라도, 번뇌를 다한 아라한(阿羅漢)을 성취하지 못하는 것은, 생사(生死)의 허망한 생각에 집착하여서 그것을 진실한 마음으로 잘못 알기 때문이니라.

그러므로 네가 이제 비록 많이 들어 아는 지식을 쌓았을지라도, 성인의 과위인 성과(聖果)를 성취하지 못하는 것이니라.”

 

불성과 여래장에는 자아라는 실체가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실체가 없다.

불성·여래장은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씨앗을 의미할 따름이다.

'불성론(佛性論'에 의하면 공성(空性)이 모든 상(相)을 없애고 궁극에는 부처를 이루게 하므로 이를 불성이라고 설하고 있다. 공성은 유(有)도 아니고 무(無)도 아닌 중도(中道)이며, 모든 견해가 완전히 사라진 상태이다.

유마경(維摩經)에서는 병을 깨트려 아무 것도 없는 것이 공(空)이 아니라 병 그대로 공(空)이라고 설한다. 그렇다면 어찌 공성(空性)을 자아라고 할 수 있을까?
열반(涅槃)의 4덕(德)인 상락아정(常樂我淨)에도 힌두교의 아트만(ātman)처럼 아(我)가 명시돼 있지 않느냐고 반론할 수 있다. 그러나 힌두교의 아트만은 고정불변의 유아(有我)인 반면에 공(空)이란 내재하는 그 어떤 것도 없는 것이다.

'보성론(寶性論)과 불성론'에서 분명히 설하고 있는 것과 같이, 상락아정의 아(我)는 자체성품이 없는 공(空)이며 무아(無我)이다.
한때 인도의 힌두수행자 라마나 마하리쉬에 의해 <나는 누구인가>라는 명상법이 유행한 적이 있다. 그리고 이것을 화두참구법의 하나인 <이뭣고>와 유사하게 생각하는 경우들이 있다. 그러나 이는 확연히 다르다. <나는 누구인가>라고 탐구하는 전제는 자아(自我)이다. 자아를 전제로 자아를 탐구하면 그 결과는 자아가 나올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뭣고>의 전제는 자아가 아닌 말과 생각을 떠난 불성(佛性)이다. 불성은 본래 말과 생각을 떠나있지만 어쩔 수 없이 이름을 그렇게 붙였을 뿐이다. 그러나 불성조차 실체적 개념으로 파악될 여지가 있으므로 화두(話頭)라는 말로 바꾸어서 간(看)하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화두를 참구해서 <참나>를 깨쳤다면 그 <참나>는 무아(無我)의 아(我)이므로 힌두교의 아트만인 <참자아>와는 크게 다른 것이다.
어느 시민선방에서 일어난 일이다. 지도를 맡은 분이 “지금부터 <이뭣고>합니다”라고 말한 뒤 죽비치고 좌선에 들어갔다. 좌선시간이 끝나는 죽비를 치니까 한 사람이 일어서면서 “이뭣고가 사람잡네”라고 했다고 한다. 아무런 설명 없이 무작정 <이뭣고>만 하라고 하니 이것을 염불처럼 외우라는 것인지, 아니면 이 말을 깊이 사유하라는 것인지 도통 몰랐다는 것이다. 그러니 무작정 앉아 있는 시간이 얼마나 힘들고 괴로웠을까. 그 분이 “이뭣고가 사람잡네”라는 말을 왜 했을까 쉽게 짐작이 간다.
참선에 대한 명확한 이해가 없으면 수행은 진전될 수 없다. 무아로서의 불성을 깨닫는 일은 더더욱 불가능하다. 수행에 대한 친절한 설명과 꼼꼼한 점검이 반드시 필요한 이유다. 그것이 대중들이 불교를 제대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첩경이기도 하다.ㅡ향적법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