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엄경(首楞嚴經)1권 3
本名; ‘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大佛頂如來密因修證了義諸菩薩萬行首楞嚴經)’
또는 '중인도나란타대도량경(中印度那蘭陁大道場經)'
당나라의 반자밀제(般刺密帝, 반랄밀제) 번역, 송나라 급남(及南) 편찬(編纂), 송나라 계환(戒環) 해석
수능엄경(首楞嚴經, Surangama Sutra) 1권 3
▷ 1. 마음은 몸속(身內)에 있는 것이다.
阿難白佛言:“世尊!一切世閒十種異生,同將識心居在身內;
縱觀如來靑蓮花眼亦在佛面,我今觀此浮根四塵秖在我面,如是識心實居身內。”
아난 존자가 부처님께 말씀드리기를, “세존이시여, 일체세간의 열 가지의 십종중생(十種異生)이라면, 누구나 똑같이 그 분별하는 마음의 식심(識心)은 몸 안에 있고, 보는 눈은 얼굴에 있습니다.
비록 푸른 연꽃과 같은 부처님의 눈을 보아도 부처님의 얼굴에 있는 것이며,
지금 부근(浮根) 사진(四塵)으로 된 제눈을 보아도 제 얼굴에 있을 뿐이니,
알아차리는 마음인 식심(識心)은 몸속(身內)에 있는 것입니다."
*십종중생(十種異生)은, 중생이 태어나는 12 가지 형류에 따라, 십이류생(十二類生)의, 태생(胎生), 난생(卵生), 습생(濕生), 화생(化生), 유색(有色), 무색(無色), 비유색(非有色), 비무색(非無色), 비유상(非有想), 비무상(非無想), 유상(有想), 무상(無想)에서 무색(無色)과 무상(無想)을 제외한 것은 그것들은 마음과 눈이 있는 무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사대(四大), 지(地), 수(水), 화(火), 풍(風)
*부근사진(浮根四塵), 부근(浮根)은 물에 뜬 식물의 뿌리를 말하며,
사진(四塵)은 색(色) 향(香) 미(味) 촉(觸)의 4 가지 경계인, 눈, 코, 입, 몸의 경계인 색경(色境, 색진), 향경(香境, 향진), 미경(味境, 미진), 촉경(觸境, 촉진)이며, 여기에서는 눈이 얼굴에 있다는 뜻이다.
佛告阿難:“汝今現坐如來講堂,觀祇陁林今何所在?”
부처님께서 아난 존자에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지금 여래의 강당(講堂)에 앉아 있으므로, 기타림(祇陀林)을 볼 수 있으니,
네가 지금 기타림을 보고 있는, 그 기타림이 어디에 있는 것인가?”
“世尊!此大重閣淸淨講堂在給孤園,今祇陁林實在堂外。”
아난 존자가 답하기를,
“세존이시여, 이 큰 중각(重閣, 이층)의 청정한 강당은 급고원(給孤園, 기환정사)에 있으며,
기타림(祇陀林)은 강당 밖에 있습니다.”
ㅡ여기에서 안과 밖의 경계를 정한 것을 안에 있는 마음이 반드시 차례로 보게 되는 것을 밝히고자 한 것이다.
“阿難!汝今堂中先何所見?”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난아, 네가 지금 강당 안에서 무엇을 볼 수 있는가?”
“世尊!我在堂中,先見如來,次觀大衆,如是外望方矚林園。”
아난 존자가 답하여,
“세존이시여, 저는 지금 강당 안에 있으며, 우선 여래를 볼 수 있고, 그 다음으로는 대중을 볼 수 있으며,
이렇게 밖을 바라 본다면, 비로소 기타림(祇陀林)과 급고원(給孤園)을 볼 수 있습니다.”
“阿難!汝矚林園因何有見?”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난아, 네가 지금 기타림과 급고원을 본다고 하였는데, 어떻게 보는 것이냐?”
“世尊!此大講堂戶牖開豁,故我在堂得遠瞻見。”
아난 존자가 답하기를,
“세존이시여, 이 큰 강당의 문과 창문이 활짝 열려 있는 까닭에,
제가 강당 안에 앉아 있으면서도 먼 곳까지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爾時,世尊在大衆中,舒金色臂摩阿難頂,告示阿難及諸大衆:“有三摩提名大佛頂首楞嚴王,
具足萬行,十方如來一門超出妙莊嚴路。汝今諦聽!”阿難頂禮,伏受慈旨。
이 때에, 부처님께서 대중(大衆) 가운데에서 황금색의 팔을 펼치시고, 아난의 정수리를 만지시면서 아난과 대중에게 말씀하셨다.
“여기 삼마제(三摩提)가 있으니, 대불정수릉엄왕(大佛頂首楞嚴王)이라 이름하는 것이니라.
일체의 만행(萬行)을 구족하게 갖추고 있는 것이니, 시방의 여래께서 이 일문(一門)을 통하여 묘하게 장엄된 길을 향하여 초출(超出)하셨느니라. 너는 이제 자세히 듣도록 하여라.”
아난 존자가 머리를 조아려 정예(頂禮)를 올리고, 엎드려서 부처님의 자애로우신 가르침을 받들고자 하였다.
▷마은은 몸안에 있는 것이 아님을 깨트림.
佛告阿難:“如汝所言身在講堂,戶牖開豁遠矚林園,亦有衆生在此堂中,不見如來見堂外者。”
부처님께서 아난 존자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말하기를 네 몸은 강당 안에 있으면서도 문과 창문이 활짝 열려 있는 까닭에 멀리 기타림(祇陀林)과 급고원(給孤園)을 볼 수 있다고 하였다.
이 강당 안에 있는 어떤 중생이 여래를 먼저 보지 못하고, 강당의 밖만을 볼 수 있겠는가?”
阿難答言:“世尊!在堂不見如來能見林泉,無有是處。”
아난 존자가 대답하기를,
“세존이시여, 강당 안에 있으면서 여래를 보지 못하고, 밖의 숲과 냇물만을 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ㅡ몸이 강당 안에 있으므로 먼저 안을 보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阿難!汝亦如是!汝之心靈一切明了。若汝現前所明了心實在身內,爾時先合了知內身;頗有衆生先見身中後觀外物,縱不能見心、肝、脾、胃,爪生、髮長、筋轉、脈搖,誠合明了,如何不知?必不內知,云何知外?是故應知汝言:‘覺了能知之心住在身內。’無有是處。”
“아난아, 너도 마찬가지이니라! 네 마음(심영 心靈)은 일체를 밝게 알고 있거늘,
만약 현재 너의 밝게 아는 그 마음이 네 몸 안에 있는 것이라면, 당연히 네 몸의 안을 밝게 알아야 할 것이다.
어떠한 중생이 먼저 그 몸의 안을 보고 난 후에야, 바깥의 물건들을 보는가!
비록 심장, 간장, 비장, 위장은 볼 수 없다 할지라도, 손톱이 자라나고, 털이 자라고, 근육이 움직이고, 맥박이 뛰는 것 등은 당연히 밝게 알아야 할 것이거늘, 어찌하여 모르는 것인가!
스스로의 몸속도 모르거늘, 어떻게 밖을 안다는 것인가!
그러므로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깨달아 아는 마음이 몸 안(身內)에 있다는 네 말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니라.”
ㅡ오장육부는 안에 있으므로 가까운 것이라서 마땅히 잘 알 것이나, 손톱과 털은 밖에 있으므로 멀어서 알 수 없어야 할 것인데, 그렇지 않으므로 마음이 몸 안(身內)에 있는 것이 아니다.
▷ 2. 마음은 몸의 박(身外)에 있는 것이다.
阿難稽首而白佛言:“我聞如來如是法音,悟知我心實居身外。所以者何?譬如燈光然於室中,是燈必能先照室內,從其室門後及庭際,一切衆生不見身中獨見身外,亦如燈光居在室外不能照室。是義必明將無所惑,同佛了義得無妄耶?”
아난 존자가 머리를 조아리고 부처님께 다시 말씀드리기를,
“제가 이렇게 부처님께서 법문하시는 법음(法音)을 듣고 보니, 제 마음이 몸 밖(身外)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왜냐하면 방안에 등불을 켰을 때, 그 불빛은 반드시 먼저 방안을 비추고 나서, 그 방문으로부터 뒷뜰과 마당까지 비치게 되는 것과 같은 까닭입니다.
일체중생이 몸속을 보지 못하고, 오로지 몸의 밖만을 본다는 것은, 방의 밖에 있는 등불이 방의 안을 비추지 못하는 경우와 같은 것이 되겠습니다.
이러한 뜻은 확실하여 의심할 여지가 없어서, 부처님의 분명하신 요의(了義)와 일치하는 것이니, 잘못되지 않은 것이라 생각 됩니다.”
ㅡ아난 존자의 두 번째의 주장으로 마음은 몸의 밖(身外)에 있다는 것이다.
佛告阿難:“是諸比丘適來從我室羅筏城,循乞摶食歸祇陁林,我已宿齋,汝觀比丘一人食時諸人飽不?”
부처님께서 아난 존자에게 말씀하셨다.
“여기에 있는 비구들은 얼마 전에 나와 함께 실라벌성(室羅筏城)에서 법식대로 공양을 얻어서 기타림(祇陀林)으로 돌아온, 환걸(循乞)하였느니라. 나는 이미 공양을 끝냈으나, 공양하고 있는 저 비구들을 보아라. 한 사람이 공양함으로써 나머지의 모든 사람들이 다 배부를 수 있는 거신가?”
ㅡ마음이 몸의 밖에 있는 것이라면, 그 몸을 가진 사람에게 속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속한다는 뜻이다.
阿難答言:“不也。世尊!何以故?是諸比丘雖阿羅漢,軀命不同,云何一人能令衆飽?”
아난 존자가 답하기를,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이 비구들이 비록 아라한(阿羅漢)일지라도,
몸과 목숨이 같지 않은 부동(不同)이거늘, 어떻게 한 사람의 공양으로 이 모든 사람이 배부를 수 있겠습니까?”
ㅡ저 사람이 먹음으로써 이 사람을 배부르게 할 수 없듯이 몸 밖에 있는 마음은 몸을 알 수가 없을 것이다.
▷마음이 몸 밖(身外)에 있는 것이 아님을 깨트리시다.
佛告阿難:“若汝覺了知見之心實在身外,身心相外自不相干,則心所知身不能覺,覺在身際心不能知。我今示汝兜羅緜手,汝眼見時心分別不?”
부처님께서 아난 존자에게 말씀하셨다.
“만약 너의 깨달아서 알고 보는 마음이 참으로 몸밖(身外)에 있는 것이라면, 몸과 마음은 서로 따로 떨어져 있는 것으로서 서로를 상관하지 않을 것이니라.
그러하다면 마음이 알게 되는 것을 몸은 깨달을 수 없어야 할 것이며,
몸이 알게 되는 것을 마음도 알 수 없어야 할 것이다.
아난아! 나의 도라면(兜羅綿)과 같은 손을 보거라.
지금 네 눈이 내 손을 보면서, 마음이 함께 분별하고 있는가?”
阿難答言:“如是,世尊!”
아난 존자가 대답하기를,
“예, 분별하고 있습니다. 세존이시여.”
佛告阿難:“若相知者,云何在外?是故應知汝言:‘覺了能知之心住在身外。’無有是處。”
부처님께서 아난 존자에게 말씀하셨다.
“만약 네 눈과 마음이 서로를 알고 있다면, 어찌하여 네 마음이 밖에 있는 것이라 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깨달아 아는 마음이 몸밖(身外)에 있다는 네 말은 옳지 않은 것이라고 알아야 하느니라.”
▷3. 마음은 눈 속에 숨어 있는 잠근(潜根)이다.
阿難白佛言:“世尊!如佛所言,不見內故不居身內;身心相知不相離故,不在身外。我今思惟,知在一處。”
아난 존자가 부처님께 말씀드리기를,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바대로 몸속을 보지 못하는 것이므로 몸 안(불거신내不居身內)에 있다고 할 수도 없고,
몸과 마음이 서로를 아는 것으로써, 서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닌 까닭에 몸밖(불재신외不在身外)에 있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제가 지금 다시 생각하여서, 그 마음이 있는 한 곳을 알았습니다.”
佛言:“處今何在?”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 한 곳이란 어디를 말하는 것이냐?”
阿難言:“此了知心,旣不知內而能見外,如我思忖潛伏根裏,猶如有人取琉璃椀合其兩眼,雖有物合而不留㝵,彼根隨見隨卽分別,然我覺了能知之心,不見內者爲在根故,分明矚外無障㝵者潛根內故。”
아난 존자가 말씀드리기를,
“이 분명하게 아는 마음이 몸속은 알지 못하나, 밖은 잘 보고 있으므로, 제가 헤아려 보건데 마음은 눈의 뒤인, 근이(根裏, 안구의 뒤)에 가만히 숨어 있는 것입니다.
마치 어떤 사람이 유리조각(안경)으로 두 눈을 가렸을 경우, 비록 눈은 물체에 가리워졌으나, 그 눈이 보는 것에는 아무런 장애가 없으므로, 마음이 따라서 분별하는 것과 같은 것이 되겠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깨달아 아는 마음이 나의 몸속을 보지 못하는 것은, 눈에 있는 까닭이며,
걸림없이 밖을 분명하게 보는 것은 눈 속에 숨어 있는 까닭입니다.
ㅡ아난 존자의 세 번째의 주장으로 마음은 눈의 뒤(안구의 뒤)에 숨어서, 잠복근이(潛伏根裏)하고 있는 것이라 하였다.
佛告阿難:“如汝所言,潛根內者猶如琉璃。彼人當以琉璃籠眼,當見山河見琉璃不?”
부처님께서 아난 존자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말하는 바대로 눈 속에 숨어 있는 것이 마치 유리로 가린 것과 같은 것이라면,
유리로 눈이 가리워진 사람이 산과 강을 본다면, 유리를 보는 것인가?”
ㅡ유리로 눈을 가리는 것을 눈 속에 마음이 숨어 있는 것을 비유한 것이고, 보는 곳을 따라 분별함은 눈이 보는 대상 경계에 대해서 마음이 눈을 따라 아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마음이 눈에 있기 때문에 오장 육부를 보지 못하는 것이고, 눈이 투명하기 때문에 밖의 것을 환하게 볼 수 있으므로, 마음이 눈의 뒤에 숨어 있다고 한 것이다.
“如是,世尊!是人當以琉璃籠眼,實見琉璃。”
아난 존자가 대답하기를,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그 사람은 유리로 눈을 가리고 있는 까닭에 당연히 유리를 보게 됩니다.”
▷잠복근이(潛伏根裏)를 깨트리심
佛告阿難:“汝心若同琉璃合者,當見山河何不見眼?若見眼者,眼卽同境不得成隨;若不能見,云何說言此了知心,潛在根內如琉璃合?是故應知汝言:‘覺了能知之心潛伏根裏如琉璃合。’無有是處。”
부처님께서 아난 존자에게 말씀하셨다.
“네 마음이 눈에 유리를 댄 것과 같은 것이라면, 산과 강을 볼 때 어째서 눈을 보지 못하는 것인가?
만약 눈을 본다면, 눈은 곧 경계(境)와 같은 것으로써, ‘눈이 보는 바대로 마음이 따라 분별한다는 말’이 성립될 수 없을 것이며,
만약 눈을 볼 수 없다면, 어찌하여서 이 분별하고 아는 마음이 눈에 유리를 댄 것과 같이, 눈 속(안구 뒤)에 숨어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깨달아 아는 마음이 눈에 유리를 댄 것과 같이 눈 뒤에 가만히 숨어 있다는 네 말은 옳지 않은 것이라고 알아야 하느니라.”
ㅡ유리를 눈에 댄 것과 같다고 하면, 사실에 어긋나고, 눈에 마음이 숨어 있다고 하면 이치에 어긋난다. 사실과 이치 모두에 어긋나는 것이니, 마음이 눈 뒤에 숨어 있다는 것이 아니다.
앞에서는 '보는 곳을 따라 분별한다'고 했는데 여기에서는 '눈이 보는 대상 물질이 된다'고 하면, 보는 곳을 따라 분별한다는 말이 성립되지 못하는 것이다.
*안근(眼根)의 근(根)은 우리의 감각기관인 육근(六根)을 말하는 것으로,
만약 마음이 눈 뒤에 숨어 있는, 즉 마음이 우리의 육근 뒤에 숨어 있는 것이라면, 육근이 대상(경계)이 되는 것이며, 또한 눈이 바깥의 대상을 보기전에 망막을 먼저 보아야 할 것이므로, 옳지 않다고 하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