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엄경(首楞嚴經)1권 2
本名; ‘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大佛頂如來密因修證了義諸菩薩萬行首楞嚴經)’
또는 '중인도나란타대도량경(中印度那蘭陁大道場經)'
당나라의 반자밀제(般刺密帝, 반랄밀제) 번역, 송나라 급남(及南) 편찬(編纂), 송나라 계환(戒環) 해석
수능엄경(首楞嚴經, Surangama Sutra) 1권 2
▷아난 존자의 반성(反省)
阿難見佛頂禮悲泣,恨無始來一向多聞未全道力,慇懃啓請十方如來得成菩提妙奢摩他、三摩禪那最初方便。
於時,復有恒沙菩薩及諸十方大阿羅漢、辟支佛等,俱願樂聞,退坐默然承受聖旨。
아난(阿難) 존자는 부처님을 뵙고 머리를 조아려 정예(頂禮)를 올리고 슬피 울면서, 시작이 없는 무시(無始)로부터 한결같이 많은 불법을 들어서 알기만 하였을 뿐, 도력(道力)이 완전하지 못함을 한탄하였다.
그리고는, 은근하게 시방의 여래께서 보리(菩提)를 성취하신 묘한 사마타(奢摩他, Samatha, 집중된 선정)와 삼마(三摩, 삼마발저)와 선나(禪那, 정려)의 최초방편(最初方便)을 간절히 청하였다.
그러자 항하 강의 모래 수와 같이 많은 보살들과 시방의 여러 훌륭한 대 아라한(大 阿羅漢)들과 벽지불(辟支佛)들도 모두 기뻐하면서 원하는 마음으로, 묵연(默然)히 물러나 앉아서 거룩한 가르침의 성지(聖旨)을 받들고자 하였다.
ㅡ우리 모두는 부처님께서 아난 존자를 구하기 위해서 설하시는 수능엄경을 들을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주신 아난존자에게 감사드려야 할 것이다.
*사마타(奢摩他, Samatha, 정定), 등지(等持)ㆍ삼매(三昧)라하며, 산란한 마음을 한 곳에 모아 움직이지 않게 하고, 마음을 바르게 해서 망념을 갖지 않는 것을 말하며, 정위(定位)ㆍ산위(散位)에 통하지만 유심위(有心位)에만 통하고 무심위(無心位)에는 통하지 않는다.
Samatha is the theory that distinguishes between trueness anf falseness.
삼마발저는 근본적인 망상 분별과 진실을 구별하는 지혜를 닦는 방법을 위하여 방법이다
*삼마(三摩, samāpatti, 지止), 삼마발저(三摩鉢底), 삼마발제(三摩鉢提)로 음역하며, 등지(等至)라고도 하며, 몸과 마음의 평등에 이른다는 뜻이다. 정(定)의 일곱 가지 이명(異名) 중의 하나이며, 유심(有心)과 무심(無心)의 2정(定)에 통하며 산위(散位)에는 통하지 않는다.
Smapatti is the practice of the truth, the fundamental bodhi or basic wisdom.
디아나(Dhyana)는 모든 진실은 거짓이고 모든 거짓은 진실이라는 지혜를 적용하는 것이다.- 수(修)
*선나(禪那, dhyāna, 혜慧), 정려(靜慮)ㆍ선(禪)ㆍ사유수(思惟修) 등이라고도 하며, 마음을 하나의 대상에 오로지 기울여서 자세히 사유하는 것으로서, 정(定)과 혜(慧)가 균등하다. 이것은 번뇌를 보리로 바꾸고, 생사를 여래의 열반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Dhyana is the application of the resulting wisdom that all truth is falseness and all falseness is truth.
정려는 모든 진실은 거짓이고 모든 거짓은 진실이라는 지혜를 적용하는 것이다.
Another way to explain: samatha is stopping, samapatti is contemplation, and dhyana is meditation, explained by Zhiyo Master. ㅡ Rebirth Views in The Surangama Sutra by Dr. Bhikkhuni Gioi Huong.
다시 말하자면, 사마타는 멈추는 것이고, 사마파티는 관조하는 것이고, 디아나는 명상하는 것이라고 지요 스승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견도분(見道分)
ㅡ진망(眞妄)을 선택하여 밀인(密印)으로 삼음
▷마음(心)의 소재(所在)
佛告阿難:“汝我同氣情均天倫,當初發心,於我法中見何勝相,頓捨世閒深重恩愛?”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시기를, “너와 나는 천륜(天倫, 사촌)으로 정(情)을 나눈 동기(同氣)이니라.
네가 처음에 초발심(初發心)을 하였을 때, 나의 법 가운데에서 어떠한 훌륭한 승상(勝相)을 보았기에,
세간에서의 깊고 소중한 은혜와 애정을 단박에 버렸건 것인가?”
阿難白佛:“我見如來三十二相勝妙殊絕,形體映徹猶如琉璃。常自思惟:“此相非是欲愛所生。何以故?欲氣麤濁,腥臊交遘膿血雜亂,不能發生勝淨妙明紫金光聚。”是以渴仰從佛剃落。”
아난 존자가 부처님께 답하여 말하기를, “저는 여래의 더없이 미묘하고 훌륭한 승상(勝相)의 32상(相)에서 유리(琉璃)와 같이 사무치는 영철(映徹)한 빛을 보았으며, 항상 생각하기를, ‘이 상(相)은 애욕으로 생긴 것이 아니다’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애욕의 기운은 추하고 탁한 추탁(麤濁)한 것이며, 비린내와 누린내가 서로 어울린 것이며, 고름과 피가 어지럽게 섞인 것이니, 이렇게 자금(紫金, 황금)과 같이 훌륭하고 맑고 묘하고 밝은 빛의 광취(光聚)를 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러함에 감동하여서, 간절히 우러러 존경하는, 갈앙(渴仰)하면서 부처님을 따라 머리를 깍게 되었습니다.”
佛言:“善哉,阿難!汝等當知,一切衆生從無始來生死相續,皆由不知常住眞心性淨明體,
用諸妄想,此想不眞故有輪轉。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참으로 훌륭하구나! 아난아, 너희들 모두는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일체중생이 시작이 없는 무시(無始)로부터 생사를 계속한다는 것 모두는, 상주진심(常住眞心)의 성품이 맑고 밝은 본체를 알지 못하고,
일체의 허망한 망상(妄想)을 제 마음이라고 잘못 알고 있는 탓이며,
이러한 진실하지 못한 생각(想) 때문에 생사에서 윤회하는 것이니라.
▷마음과 눈으로 인하여 뒤바뀌는 것이다.
汝今欲硏無上菩提眞發明性,應當直心酬我所問。十方如來同一道故,出離生死皆以直心,心言直故,如是乃至終始地位,中閒永無諸委曲相。
네가 이제 더없이 높은 무상보리(無上菩提)의 진실하게 열린 밝은 성품의 명성(明性)을 닦아 나아가고자 한다면, 마땅히 내가 묻는 말에 곧은 마음의 직심(直心)으로 대답하여야 하느니라.
시방 여래께서도 동일한 일도(一道)를 따라 생사를 벗어나셨으니, 곧은 마음의 직심(直心)으로 행하신 가닭이셨느니라.
마음(心)과 말씀(言)이 곧고 바르신 까닭에 시작의 초지위(初地位)에서부터 마지막의 종지위(終地位)에 이르실 때까지의 그 중간에 조금도 구부러지거나 잘못된 위곡상(委曲相)이 없으셨던 것이니라.
선재(善哉), ‘매우 좋다' 매우 훌륭하다, 잘했다는 칭찬의 뜻으로 쓰이는 말.
阿難!我今問汝,當汝發心緣於如來三十二相,將何所見誰爲愛樂?”
“아난아! 내가 너에게 묻겠으니, 네가 답하기를 여래의 32상을 보고 출가할 마음을 발심(發心)하였다고 하였으니,
무엇으로 보았으며? 누가 좋아하였던가?.”
ㅡ누가 좋아하였던가?는 망(妄)의 근본을 물어서 일으키는 것이다.
*불변의 상주하는 진심의 상주진심(常住眞心)은 본래 청정하고 밝은 근본체인 성정명체(性淨明體)이며, 바로 직심(直心)의 정념진여(正念眞如)로 제1의제의 진실혈맥眞實血脈임을 설하고 있습니다 -한울림
阿難白佛言:“世尊!如是愛樂用我心目。由目觀見如來勝相心生愛樂,故我發心願捨生死。”
아난 존자가 부처님께 답하였으니,
“세존이시여. 이렇게 좋아하게 된 것은 저의 마음(心)과 눈(目)으로 입니다.
눈(目)으로 여래의 거룩한 모습을 보면서 마음으로 좋아했기 때문에 저는 발심하여 생사에서 벗어나기를 원했습니다.
ㅡ'마음과 눈으로'라는 것은 망(妄)의 근본을 나타낸 것이다.
▷거짓의 실체를 깨트리고 전체를 추구함
佛告阿難:“如汝所說,眞所愛樂因于心目,若不識知心目所在,則不能得降伏塵勞。譬如國王爲賊所侵,發兵討除,是兵要當知賊所在。使汝流轉心目爲咎。吾今問汝,唯心與目今何所在?”
부처님께서 아난 존자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진실로 좋아한 동기가 마음(心)과 눈(目)에 있다고 말하였으나,
만약 마음(心)과 눈(目)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지 못한다면, 진로(塵勞, 번뇌)를 항복시킬 수 없는 것이니, 마치 적의 침략을 당한 국왕(진심)이 군대(진실되게 보는 것)를 일으켜서 적(망상)을 토벌하고자 한다면, 먼저 적군의 소재를 알아야 하는 것과 같이,
너를 생사에 흘러 다니게 하는 것은 마음(心)과 눈(目)의 잘못이므로, 마음(心)과 눈(目)마음과 눈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아야 하는 것이니라다.
내가 이제 너에게 묻겠으니, 마음(心)과 눈(目)이 지금 어디에 있는가?”
ㅡ 왕은 진심에 비유한 것이고, 적은 망상에 비유하였으며, 군대는 참되게 보는 것에 비유한 것이다.
망령된 마음과 망령되게 보는 것은 모두 본래 실체가 없고 반연(攀緣)으로 일어나는 것임을 나타낸 것으로, 이것이 곧 시작이 없는 생사의 근본인 것이다.
ㅡ아난 존자는 부처님의 32 상호의 아름다움과 함께 마탕가의 아름다움의 육체적인 욕망의 눈으로 본 것이며,
부처님께서는 아난 존자가 아난 존자가 옳든 그르든, 그가 자신의 사고 과정을 깨닫고 이해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We can see the Buddha was very psychological and subtle in the way he comforted Ananda, so he would not feel shamed, would have spiritual trust, rely on the Buddha, and avoid fear and sadness about his faults. The Buddha reminded him that "Ananda and the Buddha are cousins in the same royal family. So, we love each other as real brothers." The Buddha showed his friendliness to stabilize Ananda's mind. Then, he began asking him some questions, so he could experience for himself why Ananda willingly left the palace to become a monk.
여기에서 우리는, 부처님께서 아난다를 위로하시는 방범이 매우 심리적이고 미묘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아난 존자가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고, 부처님을 정신적으로 신뢰하면서 의지하고, 자신의 잘못에 대한 두려움과 슬픔을 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아난다와 부처님은 같은 왕족의 사촌이지만, 우리는 진짜 형제와 같이 서로를 사랑한다."라고 상기시켜서 인자하게 아난다의 마음을 안정시킨 후에, 몇 가지 질문을 하기 시작하여서, 아난다가 왜 기꺼이 궁전을 떠나 승려가 되었는지를 다시 상기 시키고 있습니다.
Since beginningless time, all living beings have been born and have died continuously. It can be illustrated by the picture of a ferryman sailing on the river of birth and death. The ferry man is the mind, the boat is the body, and the river of birth and death receives countless bodies(boats) from this life to the next, since ancient time, without end. It is out mind, the ferryman, who insturcts us to sail. So, the Buddha asked, which mind transformed Ananda to become the sage and which mind rose up to attach to Matangi?
시작이 없는 무시로부터 모든 생명체는 끊임없이 태어나고 죽는 생사를 거듭하고 있습니다. 이는 생사의 강을 항해하는 뱃사공의 그림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으로, 뱃사공은 마음(心)이고, 배는 몸이고, 생사의 강은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셀 수 없이 많은 몸(배)을 받는 것으로, 태고부터 끝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항해하라고 지시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 뱃사공이므로, 부처님께서 아난다를 성인으로 변화시키는 마음(心)과 마탕가에 빠져드는 마음(心)이 무엇인지를 물은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