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친(世親)의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 10 권 2
세친(世親)의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 제 10권
세친(世親) 보살 지음, 현장(玄奘) 한역.
11. 피과지분(彼果智分) ② 2
▶論曰: ▷논문;
“諸佛過諸薀, 安住諸薀中, 與彼非一異, 不捨而善寂.”
모든 부처님께서는 오온(五蘊)을 초월하시었으나, 오온(五蘊) 가운데 안주하시니,
그것과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으니, 버리지 않고서도 매우 고요하시네.
▶釋曰:此頌,顯示斷薀甚深,諸佛過諸薀.安住諸薀中者,謂諸如來,超過色等,五種取薀,住無所得法性薀中.與彼非一異者,雖已捨遍計所執諸薀,而與彼非異,以卽安住彼法性故.亦復不一,若是一者,遍計所執應同法性,成淸淨境.不捨而善寂者,謂不棄捨圓成實薀,卽是妙善涅槃體故.
▷해석한다; 이 게송은 오온(五蘊)을 단멸함이 매우 심오함인 단오온심심(斷薀甚深)을 나타낸 것으로,
‘모든 부처님께서는 오온(五蘊)을 초월하시었으나, 오온(五蘊) 가운데 안주하시니’란,
모든 여래께서는 색온 등 취착된 5취온(五取蘊)을 초월하시어서, 무소득의 법성온(法性蘊)에 안주하신다는 것을 말하며,
‘그것과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다’는 것은, 이미 변계소집의 5온을 버렸을지라도 그것과 다르지 않으니, 그것의 법성에 안주하기 때문이며,
또한 같지도 않으니, 만약 같은 것이라면 변계소집은 마땅히 법성과 마찬가지로 청정한 경계를 이루어야 하는 것이다.
‘버리지 않고서도 매우 고요하다’는 것은, 원성실성의 5온을 버리지 않는 것이니, 곧 묘선(妙善)의 열반 자체이기 때문이다.
5취온(五取薀), 5온(五蘊, pañca-skandha)은 생멸 · 변화하는 모든 것, 즉 모든 유위법(有爲法)을 구성하고 있는 색(色) · 수(受) · 상(想) · 행(行) · 식(識)을 말한다. 이들을 각각 색온(色蘊: 육체, 물질) · 수온(受蘊: 지각, 느낌) · 상온(想蘊: 표상, 생각) · 행온(行蘊: 욕구, 의지) · 식온(識蘊: 마음, 의식)이라고도 한다.
5온설(五蘊說)을 사유하는 것은 개인 존재인 나(我)는 이 5가지 집합적 요소로 분해되고, "나(我)"라고 할 때, 이 5가지 집합적 요소들 중의 하나 혹은 다수를 가리키는 것이며, 이들 5가지 집합적 요소들 밖에 나(我)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무아(無我)의 이치를 깨우쳐 자아에 대한 잘못된 견해를 극복하기 위한 것이다.
5온은 유루와 무루에 모두 통하고, 유루에 통한 5온을 5취온(五取蘊) 또는 5수음(五受陰)이라 하고,
무루에 통한 5온을 5무루온(五無漏蘊)이라고 한다. 즉 무루에 통한 5온은 유위 무루이며 이것은 곧 4성제 중의 도제(道諦), 즉 '열반(깨달음)에 이르는 길'이다.
▶論曰: ▷논문;
“諸佛事相雜, 猶如大海水, 我已現當作, 他利無是思.”
모든 부처님의 사업이 서로 섞인 것이 마치 큰 바닷물과 같네.
나는 이미(已)ㆍ현재(現)ㆍ장차(當) 행하여, 남을 이롭게 한다는, 이러한 생각이 없네.
▶釋曰:此頌,顯示成熟甚深.諸佛事相雜者,謂諸如來,成熟有情,一切事業,悉皆平等.其喩云何?猶如大海水者,譬如大海衆流所入,其水相雜,爲魚鼈等,同所受用.諸佛亦爾,同入法界,所作事業和合無二,等爲成熟有情受用.
▷해석한다; 이 게송은 성숙의 매우 심오함인 성숙심심(成熟甚深)을 나타낸 것으로,
‘모든 부처님의 사업이 서로 섞인다’는 것이란, 모든 여래께서 유정을 성숙시키는 모든 사업 모두가 평등하다는 것으로, 그 비유는 어떠한 내용인가!
‘마치 큰 바닷물과 같다’는 것은, 비유하자면, 큰 바다는 여러 강의 흐름이 유입된 것으로서 그 물이 서로 섞여서 고기ㆍ자라 등을 다 같이 수용하는 것과 같이, 모든 부처님도 역시 그러하여서, 다 같이 법계에 들어가고, 짓는 사업이 화합하여 둘이 없는 무이(無二)이며, 평등히 유정을 성숙시키는 것을 수용하는 것이다.
我已現當作者,於三時中,隨一時作.他利無是思者,不作是思:我於他利,已現當作.然無功用,能作一切利益安樂諸有情事,譬如世閒末尼`天樂.
‘나는 이미ㆍ현재(已)ㆍ현재(現)ㆍ장차(當) 행한다고’란, 과거ㆍ현재ㆍ미래의 삼시(三時) 중의 어느 한 시기에 짓는 것이며,
‘남을 이롭게 한다는, 이러한 생각이 없다’는 것은, “내가 남을 이롭게 함에 있어서 과거ㆍ현재ㆍ미래에 행한다”라는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곧 의식적인 노력이 없는 무공용(無功用)이면서도 능히 모든 유정을 이롭고 안락하게 하는 사업을 행한다는 것이니, 비유하자면 세간의 마니보주ㆍ하늘의 음악과 같은 것이다.
▶論曰: ▷논문;
“衆生罪不現, 如月於破器, 遍滿諸世閒, 由法光如日.”
중생의 죄 때문에 나타나지 않는 것이니, 달이 파손된 그릇에 있는 것과 같구나.
모든 세간에 두루 가득함은, 법의 광명이 태양과 같은 때문이라네.
▶釋曰:此頌,顯示顯現甚深.若諸世閒,不見諸佛,而說諸佛其身常住,佛身旣常,何故不見?衆生罪不現,如月於破器者,如破器中,水不得住,水不住故,月則不現如是.有情身中,無有奢摩他水,佛月不現.水喩等持,體淸潤故.遍滿諸世閒,由法光如日者,謂今世閒,佛雖不現,然遍一切,施作佛事.由說契經`應頌等法,譬如日光,遍滿世閒,作諸佛事,成熟有情.
▷해석한다; 이 게송은 현현의 매우 심오함인 현현심심(顯現甚深)을 나타낸 것으로,
만약, 모든 세간에서 부처님을 불 수 없음에도 부처님의 불신이 상주한다고 말한다면, 불신이 이미 상주하시거늘 어찌하여 보지 못하는 것인가? 중생의 죄 때문에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달이 파손된 그릇에 있는 것과 같다’는 것이란, 파손된 그릇에는 물이 머물 수 없고, 물이 머물 수 없기 때문에 달이 나타나지 않는 것과 같이, 유정의 몸에 사마타의 물이 없으면 부처님의 달이 나타나지 않는 것과 같다.
물은 등지(等持, 선정)에 비유한 것으로, 그 자체가 맑고 빛나기 때문이다
‘모든 세간에 두루 가득함은 법의 광명이 태양과 같은 때문이다’란, 세간에 부처님께서 지금 시현하시지 않을지라도 모든 곳에서 두루 불사를 베풀고 계시는 것이니, 계경ㆍ응송 등의 법을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비유하자면 햇빛이 세간에 두루 가득한 것과 같이, 모든 불사를 지어서 유정을 성숙시키시는 것이다.
▶論曰: ▷논문;
“或現等正覺, 或涅槃如火, 此未曾非有, 諸佛身常故.”
혹은 등정각을 현현하시고, 혹은 열반에 드는 것이 불(火)과 같으시니,
이것은 일찍이 비유(非有)인 것으로, 모든 불신은 항상하기 때문이라네.
▶釋曰:此頌,顯示示現等覺涅槃甚深.或現等正覺`或涅槃,如火者,謂諸如來或現成佛`或現涅槃,其事如火,或時燒然`或時息滅.諸佛亦爾,或於未熟諸有情類,現般涅槃,或於已熟諸有情類,現成佛果,爲欲令彼得解脫故.譬如一火性無差別,法身亦爾,應知唯一.餘半頌文其義易了.
▷해석한다; 이 게송은 등각과 열반을 시현하는 데에 있어 매우 심오함을 나타낸, 시현등각열반심심(示現等覺涅槃甚深)이다.
‘혹은 등정각을 현현하고 혹은 열반에 드는 것이 불(火)과 같다’는 것이란, 이른바 모든 여래께서는 혹은 성불을 나타내시고, 혹은 열반을 나타내시는 것이 불과 같이 혹 어느 때는 타오르고 혹 어느 때는 소멸하는 것과 같으니, 모든 부처님 역시 그러하시며, 혹은 미숙한 유정의 부류에 대해서는 반열반을 나타내시고,
혹은 이미 성숙한 유정의 부류에 대해서는 불과의 성취함을 나타내시나니,
그들로 하여금 해탈을 얻게 하기 위한 것이니, 비유하자면 불(火)의 속성은 한 가지로 차별이 없는 것과 같이, 법신 역시도 그러한 것이니, 오직 하나일 뿐이라고 알아야 하는 것이다.
게송의 나머지 반은 그 뜻이 알기 쉬울 것이다.
▶論曰: ▷ 논문;
“佛於非聖法, 人趣及惡趣, 非梵行法中, 最勝自體住.”
부처님께서는 성스럽지 않은 비성법(非聖法)ㆍ인간세계의 인취(人趣)ㆍ살기 괴로운 세계의 악취(惡趣)ㆍ청정한 행이 아닌 비범행(非梵行)의 법 가운데에서 가장 뛰어난 자체로서 안주하신다네.
▶釋曰:此頌,顯示住甚深.佛於非聖法中`人趣惡趣中`非梵行法中`由最勝自體住最勝住,由聖住等而安住故.
▷해석한다; 이 게송은 안주함의 매우 심오함을 나타낸, 주심심(住甚深)으로,
부처님께서는 성스럽지 않은 비성법(非聖法)ㆍ인간세계의 인취(人趣)ㆍ살기 괴로운 세계의 악취(惡趣)ㆍ청정한 행이 아닌 비범행(非梵行)의 법 가운데에서 가장 뛰어난 자체로서 안주하시기 때문이니,
ㅡ부처님께서는 성스럽지 않은 비성법(非聖法)에 있어서 성스러운 법으로 안주하시고, 인간세계와 살기 괴로운 세계에 있어서도 천상의 머무름으로 안주하며, 청정한 행이 아닌 법에 있어서도 청정한 행으로 안주하나니, 가장 뛰어난 자체 때문에 가장 뛰어나게 안주한다고 말한 것이다.
此中聖住者,謂空等住.天住者,謂諸靜慮住.梵住者,謂慈等無量住.非聖法者,謂不善法.佛於其中,住空等住,由此空等聖所住故,名爲聖住.人趣及惡趣者,謂緣彼有情,住諸靜慮,所住靜慮,名爲天住.非梵行法者,謂於彼法,住慈悲等,四種梵住.最勝自體住者,謂由如是最勝自體住最勝住,此顯諸佛於諸住中,安住最勝自體諸住.
‘가장 뛰어나게 안주한다는 성주(聖住)’란, 성스러운 안주 등으로 인하여 안주하기 때문이니, 여기에서 성스러운 안주는 공(空)해탈문ㆍ무상(無相)해탈문ㆍ무원(無願)해탈문 등의 안주를 말하며,
‘천상의 안주인 천주(天住)’는 모든 정려(靜慮)의 안주를 말하고,
'청정의 안주인 범주(梵住)'는 자비희사(慈ㆍ悲ㆍ喜ㆍ捨)의 사무량심 등의 사무량심(四無量心)에 안주하는 것을 가리키며,
‘성스럽지 않은 비성법(非聖法)’이란, 불선법(不善法)으로, 부처님께서는 그 안에서 공해탈문등의 안주에 머무시는 것이니, 이 공해탈문등은 성인(聖人)이 안주하는 바이기 때문에 성스러운 안주인 성주(聖住)라 하며,
인간세계와 살기 괴로운 세계는 그 유정을 반연하여 모든 정려에 안주하는 것을 말한다.
머무는 바의 정려를 천상의 안주라고 이름하는 것이니, 청정한 행이 아닌 법은 그 법에 대해서 자(慈)ㆍ비(悲) ㆍ희(喜)ㆍ사(捨)등의 네 가지 청정의 안주에 머무는 것이다.
‘가장 뛰어난 자체로서 안주한다’는 것이란, 이와 같은 가장 뛰어난 자체에 의거함으로써 가장 뛰어난 안주에 머무는 것이니, 이것은 모든 부처님께서 모든 안주 가운데, 안주최승(安住最勝)의 자체에 안주하는 것을 나타낸 것이다.
▶論曰: ▷논문;
“佛一切處行, 亦不行一處, 於一切身現, 非六根所行.”
부처님께서는 일체의 모든 곳에서 행하시나, 역시 한 곳에서도 행하지 않으시는 것이니,
모든 곳에서 불신(佛身)을 나투시나, 육근(六根)이 행하는 경계가 아니라네.
▶釋曰:此頌,顯示自體甚深.佛一切處行,亦不行一處者,謂後得智於善`不善,無記等中,分別而轉,無分別智不行一處.第二義者,謂變化身一切處行,其餘二身,不行一處.於一切身現者,卽變化身,遍於一切處處
可見.非六根所行者,卽變化身.爲欲化彼那落迦等,現於彼生.那落迦等,受生有情,見化身時,不如實見`不能了知,但謂卽是那落迦等,是故化身決定非彼那落迦等,六根所行.
▷해석한다; 이 게송은 자체의 매우 심오함을 나타낸, 자체심심(自體甚深)으로,
‘부처님께서는 일체처에서 행하시면서도 또한 한 곳에서도 행하시지 않는다’는 것이란,
후득지는 선ㆍ불선ㆍ무기 등에 대해서 분별하여 전전하는 것이지만, 무분별지는 한 곳에서도 행하지 않으며,
두 번째의 뜻은, 이른바 변화신은 모든 곳에서 작용하실지라도 그 나머지의 자성신과 수용신의 두 불신은 어느 곳에서도 작용하지 않으시니, ‘일체처에서 불신을 나투어도’라는 것은 변화신이 일체처에서 두루하신 것이다.
‘육근(六根)이 행하는 경계가 아니네’란, 변화신은 그 나락가(那落迦, 지옥) 등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그 생을 나타내실지라도 지옥 등에서 생을 받은 유정이 그 화신을 볼 때에는 변화신이 있는 그대로의 실체를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것이니, 다만 지옥의 유정 등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화신은 결정적으로 그 지옥 등의 여섯 가지 감각기관인 육근(六根)의 경계가 아닌 것이다.
▶論曰: ▷논문;
“煩惱伏不滅, 如毒呪所害, 留惑至惑盡, 證佛一切智.”
번뇌를 조복해도 소멸하지 않는 것이니, 독이 주문에 의해 상(害)하는 것과 같으니,
미혹이 남아 있음이나 미혹이 다함에 이르러, 부처님의 일체지(一切智)를 증득한다네.
▶釋曰:此頌,顯示斷煩惱甚深.煩惱伏不滅,如毒呪所害者,菩薩位中,伏煩惱纏`未滅煩惱,有隨眠故.
▷해석한다; 이 게송은 번뇌를 단멸함이 매우 심오하다는 것을 나타낸, 단번뇌심심(斷煩惱甚深)으로,
‘번뇌를 조복할지라도 소멸하지 않으니, 독이 주문에 의해 상(害)하는 것과 같으니’란, 보살의 지위에서 번뇌의 얽어매임(纏)을 조복하였을지라도, 아직 번뇌를 소멸하지는 못하였으니, 수면(隨眠)이 있기 때문이다.
ㅡ전(纏)은 번뇌의 현행 세력을 말한 것으로, 그것을 조복한다는 것은 번뇌의 현행 세력을 제압하는 것이고, 번뇌를 소멸하지 않는다는 것은 번뇌의 근원을 단멸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譬如衆毒呪力所害,體雖猶在,而不爲害.煩惱亦爾,智了知故,體雖猶在,而不爲害.
비유하자면 갖가지 독이 주문의 힘에 의해서 해를 입은 까닭에, 독 그 자체는 아직 남아 있을지라도 해를 입히지 못하는 것과 같이, 번뇌 역시도 그러한 것으로, 지혜로 알기 때문에 번뇌의 자체가 아직 남아 있어도 해를 입지 않는다는 것이다.
ㅡ독의 해를 입어도 주술의 힘에 의해서 그것을 제압하면, 그 독 자체는 멸하지 않을지라도 그 효력이 억압되어 해를 입히지 못하는 것과 같다.
留惑至惑盡者,以留隨眠諸煩惱故,不如聲聞速般涅槃得,至究竟諸煩惱盡.
‘미혹이 남아 있음이나 미혹이 다함에 이른다’는 것이란, 수면의 모든 번뇌를 머물게 함으로써 성문과 같이 속히 반열반에 들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궁극적으로 모든 번뇌가 다함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
ㅡ수면(隨眠)의 번뇌를 머물게 하여 단멸시키지 않음으로써 생사에 왕래하고 보살의 조도법(助道法)을 닦아서 궁극의 증과를 얻는다.
證佛一切智者,煩惱盡時,得一切智.
‘부처님의 모든 것을 아는 일체지(一切智)를 증득한다’는 것은 번뇌가 다할 때, 즉 번뇌의 습기까지 모두 소멸하여 청정하게 될 때, 모든 것을 아는 일체지를 증득한다는 것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