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친(世親)의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 10 권 1
세친(世親)의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 제 10권
세친(世親) 보살 지음, 현장(玄奘) 한역.
11. 피과지분(彼果智分) ② 1
▶論曰:▷논문;
復次諸佛法身甚深,最甚深,此甚深相,云何可見?此中有多頌.
또한 모든 부처님의 법신은 매우 심심하고도 최심심(最甚深)하신 것이니,
이 심심상(甚深相)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여기에 많은 게송이 있으니,
ㅡ이하 법신의 매우 심오한 양상을 12가지로 설명한다.
▶釋曰:於大乘中,諸佛法身,如甚深相,今當顯示.以十二頌,顯示十二甚深之相.
▷해석한다; 대승 안에서 모든 부처님의 법신의 매우 심오한 심심상(甚深相)을 이제 나타내는 것이니, 12개의 게송으로써 12가지의 매우 심심한 상을 나타낸다.
▶論曰: ▷논문;
“佛無生爲生, 亦無住爲住, 諸事無功用, 第四食爲食.”
부처님은 태어남 없는 무생(無生)을 태어남으로 삼으시며,
역시 머무르지 않는 무주(無住)를 머무름으로 삼으시고
모든 사업이 의식적인 노력이 없는 무공용(無功用)으로서,
제4식(第四食)을 음식작용물(食)로 삼으시네.
▶釋曰:此中一頌,顯示生住`業住甚深.佛無生爲生者,顯生甚深.以諸如來無業煩惱,同諸凡愚,所造作生,故名無生.然有與此相違之生,其相難了,名生甚深.亦無住爲住者,顯住甚深.無住涅槃,以爲住處,如是涅槃,名住甚深.諸事無功用者,顯業甚深,以諸如來無功用業,一切等故,名業甚深. 第四食爲食者,顯住甚深,以佛所食是不淸淨依止住等,四種食中,第四食故.
▷해석한다; 이 한 게송은 태어남(生)ㆍ머무름(住)ㆍ업(業)ㆍ의지하여 머무름의 매우 심오함을 나타낸 것으로,
‘부처님은 태어남이 없는 무생(無生)을 태어남으로 삼는다’란,
태어남의 매우 심심함을 나타내는 것으로, 여래는 업의 번뇌가 없으나, 범부나 어리석은 소승의 태어남과 같기 때문에 태어남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과 다른 태어남이 있고 그 상을 알기 어렵기 때문에 태어남의 매우 심심함이라 하는 것이며,
‘역시 머무르지 않는 무주(無住)를 머무름으로 삼는다’란,
머무름의 매우 심심함을 나타낸 것으로, 머무름이 없는 무주열반(無住涅槃)이 머무는 곳이 되기 때문이니, 이와 같은 열반을 머무름의 매우 심오함이라 하며,
‘모든 사업이 의식적인 노력이 없는 무공용(無功用)이다’란,
업의 매우 심심함을 나타낸 것으로, 모든 여래의 의식적인 노력이 없는 업은 일체가 평등하기 때문에 업의 매우 심심함이라 하며,
‘제4식(第四食)을 음식작용물(食)로 삼는다’는 것이란,
의지하여 머무름의 매우 심심함을 나타내는 것으로, 부처님께서 음식작용물로 삼는 것은 부정(不淨)의 의지로서의 머무름 등의 네 가지 음식작용물 가운데 네 번째 음식작용물이기 때문이다.
四種食者:一不淸淨依止住食,謂段等四食,令欲纏有情,不淨依止,而得住故;二淨`不淨依止住食,謂觸等三食,令色無色纏有情,淨`不淨依止而得住故.由此依止已離下地諸煩惱故,說名爲淨,未離上地諸煩惱故,說名不淨,是故名淨,不淨依止.如是依止由觸`意`思`識食而住,除其段食;
네 가지 음식작용의 사종식(四種食)이란, 첫째는 부정의 의지로서 머무는 음식작용물이니, 이른바 단식(段食)ㆍ촉식(觸食)ㆍ의사식(意思食)ㆍ식식(識食) 등의 네 가지 음식작용물으로, 욕계에 얽매인 유정으로 하여금 부정에 의지하여 머물게 하기 때문이며,
둘째는 청정과 부정이 의지하여 머무는 음식작용물이니, 촉식(觸食)ㆍ의사식(意思食)ㆍ식식(識食)등의 세 가지 음식작용물이니, 색계와 무색계에 얽매인 유정으로 하여금 청정과 부정에 의지하여 머물게 하기 때문이며,
이 의지는 이미 하부지위의 하지(下地)의 여러 번뇌들을 여의었기 때문에 청정이라고 이름하나,
아직 상부지위인 상지(上地)의 여러 번뇌들을 여의지 않았기 때문에 부정이하는 것이므로 청정과 부정의 의지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의지는 촉식ㆍ의사식ㆍ식식에 의거해서 머물고 단식을 제외하는 것이다.
三一向淨依止住食,謂段等四食,令聲聞等,淸淨依止,而得住故;四唯示現依止住食,謂卽四食,諸佛示現,受之得住.是故諸佛食,此第四示現住食,爲令能施諸有情類,淨信爲因,福德增長,雖現受食不作食事,如來食時,諸天受取.施佛意許,諸餘有情,由此因故,彼有情類,速證菩提.如是一切,應知摠說爲一甚深.
셋째는 한결같이 청정함에 의지하여 머무는 음식작용물이니, 이른바 단식 등의 네 가지 음식작용물은 성문등으로 하여금 청정에 의지해서 머물게 하기 때문이며,
넷째는 오직 시현(示現)하고 의지하여 머무는 음식작용물, 즉 제4식(第四食)이니, 모든 부처님께서는 시현하여 그것을 수용해서 머물기 때문에 모든 부처님의 음식작용물인 것이다.
이 네 번째의 시현하여 머무는 음식작용물은 다음과 같으니,
능히 베푸는 유정의 무리들로 하여금 청정한 믿음을 원인으로 복덕을 증장시키기 위한 것으로, 음식작용물을 시현하여 수용하지만 음식을 드시지는 않는 것이니, 여래께서 음식을 들 때, 여러 하늘이 받아서 유정에게 베푸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허락하시는 뜻이 이러한 것이니, 나머지 모든 유정은 이러한 원인에 의거하기 때문에, 그들 유정은 속히 깨달음을 증득하나니, 이상과 같은 것들을 종합적으로 말하여 하나의 매우 심오한 것이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ㅡ모든 부처님께서 음식을 드실 때, 여러 하늘이 가까이 받아서 나머지 유정들에게 베푸는 인연으로 인해서 그들 유정들이 장차 깨달음을 증득할 수 있다고 한다.
又由十因,應知諸佛生無生相,一與愚癡不同法故`二與差別不同法故`三於攝受得自在故`四於住持得自在故`五於棄捨得自在故`六無二相故`七唯似光影故`八同幻化故`九住無住故`十成大事故.
또한 다음의 열 가지 원인에 의거해서 모든 부처님의 태어남은 태어남이 없는 무생(無生)의 상임을 알아야 하나니,
첫째는 어리석음과는 다른 법이기 때문이고, 둘째는 차별과는 다른 법이기 때문이며,
셋째는 섭수(攝受)에서 자재를 얻기 때문이고, 넷째는 맡아 지니는 것에서 자재를 얻기 때문이며,
다섯째는 버리는 것에서 자재를 얻기 때문이며, 여섯째는 두 가지가 없는 무이상(無二相)이기 때문이고,
일곱째는 오직 그림자와 비슷할 뿐이기 때문이며, 여덟째는 요술(幻)로 나타난 것과 비슷하기 때문이고,
아홉째는 머묾이 없는 곳에 머물기 때문이며, 열째는 큰 대사(大事)를 성취하기 때문이다.
復由十因,應知如來不住生死及以涅槃,一非遍知故`二非永斷故`三非修習故`四知非有性故`五無所得無分別故`六遠離心故`七心證得故`八平等心故`九事不可得故`十可證得故.
또한 열 가지의 십인(十因)에 의거해서 여래께서는 생사와 열반에 머물지 않음을 알아야 하나니,
첫째는 두루 아는 것이 아닌 비변지(非遍知)이기 때문이고,
둘째는 영원히 끊는 것이 아인 비영단(非永斷)이기 때문이며,
셋째는 닦아 익히는 것이 아닌 비수습(非修習)이기 때문이니, 열반은 수습(修習)에 의해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본래 적멸이기 때문이다.
넷째는 실재하지 않는 성품의 비유성(非有性)임을 알기 때문이며,
다섯째는 얻는 바가 없고 분별이 없는 무소득부분별(無所得無分別)이기 때문이며,
여섯째는 멀리 여의는 마음의 원리심(遠離心)이기 때문이고,
일곱째는 마음의 증득인 심증득(心證得)이기 때문이며,
여덟째는 평등한 마음의 평등심(平等心)이기 때문이고,
아홉째는 현상(事)은 불가득(不可得)한 것이기 때문이며,
열째는 증득할 수 있는 가증득(可證得)이기 때문이다.
復由十因,應知諸佛無功用事,而得成立,一妙斷離故`二無所依故`三所作無功用故`四作者無功用故`五作業無功用故`六無所有無功用故`七本來無差別故`八所作已辦故`九所作未辦故`十純熟修習一切法中得自在故.
또한 열 가지 원인에 의거해서 모든 여래의 의식적인 노력이 없는 무공용사(無功用事)가 성립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하나니,
첫째는 승묘하게 여의는 묘단리(妙斷離)이기 때문이고,
둘째는 의지처가 없는 무소의(無所依)이기 때문이며,
셋째는 짓는 대상이 의식적인 노력이 없는 소작무공용(所作無功用)이기 때문이고,
넷째는 짓는 주체가 의식적인 노력이 없는 작자무공용(作者無功用)이기 때문이며,
다섯째는 작업이 의식적인 노력이 없는 작업무공용(作業無功用)이기 때문이며,
여섯째는 있는 바가 없어서 의식적인 노력이 없는 무소유무공용(無所有無功用)이기 때문이고,
일곱째는 본래 차별이 없는 본래무차별(本來無差別)이기 때문이며,
여덟째는 해야 할 바를 이미 해마친 소작이판(所作已辦)이기 때문이고,
아홉째는 해야 할 바를 아직 해마치지 않은 소작미판(所作未辦)이기 때문이며,
열째는 닦아 익힘을 순전하게 성숙시켜서 일체법에 자재를 얻기 때문이다.
復由十因,應知諸佛實無所食,而現受食, 一示現以食住持身故`二令諸有情福增長故`三爲欲示現有同法故`四爲令隨學正受用故`五爲令隨學廉儉行故`六爲令發起精進行故`七爲令成熟諸善根故`八爲顯自身無染著故`九爲恭敬業助任持故`十爲欲圓滿本願生故.
열 가지 원인에 의거해서 모든 부처님께서는 참으로 음식을 드시지 않으시나 음식을 수용함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알아야 하는 것이니,
첫째는 음식으로써 유지되는 신체를 나타내기 때문이고,
둘째는 모든 유정에게 복을 증장시키기 때문이며,
셋째는 같은 법이 있음을 시현하시고자 하기 때문이니, 중생과 마찬가지로 인간세계에 태어나서 음식을 취하는 것이며,
넷째는 올바른 수용을 따라서 배우도록 하기 위한 것이니, 제자로 하여금 여법(如法)하게 음식을 수용하는 것을 부처님을 따라서 배우도록 하기 위한 것이며,
다섯째는 검소한 행을 따라서 배우도록 하기 위한 것이며,
여섯째는 정진행을 일으키기 위하여서 이며, 일곱째는 모든 선근을 성숙시키기 위해서이며,
여덟째는 자신에게 탐착이 없음을 나타내기 위해서이고,
아홉째는 공경하는 업을 도와서 지니게 하기 위해서이며,
열째는 본원의 생을 원만하게 하기 위해서이니, 즉 본원(本願)에 의지해서 중생제도를 위해 받은 생을 원만하게 하는 것이다.
▶論曰: ▷논문;
“無異亦無量, 無數量一業, 不堅業堅業, 諸佛具三身.”
다름이 없는 무이(無異)이며 무량하고, 숫자가 한량없으면서도 동일한 일업(一業)이니,
견고하지 않은 업과 견고한 업으로서, 모든 부처님께서는 3신(身)을 구족하시네.
▶釋曰:此頌,顯示安立數業甚深.無異亦無量者,顯安立甚深.諸佛法身無差別故,說名無異,無量依止,現等覺故,說名無量.
▷해석한다; 이 게송은 안립ㆍ숫자ㆍ업의 매우 심심함을 나타낸 것으로,
‘다름이 없는 무이(無異)이며 무량하다’는 것은 안립의 매우 심오함인, 안립심심(安立甚深)을 나타내는 것이니, 모든 부처님의 법신은 차별이 없기 때문에 다름이 없는 무이(無異)라 말하고, 무량한 의지처로 등각(等覺, 정등각)을 현현하기 때문에 무량하다고 이름하는 것이다.
ㅡ무량한 신(身)이 이 법신에 의지해서 불도를 성취한다는 뜻이다.
등각(等覺), 등정각(等正覺)을 말하며, 진리를 깨달아서 제불(諸佛)의 깨달음의 내용이 동등하다는 뜻으로, 무상정등각(無上正等覺)이라고도 한다.
無數量一業者,顯數甚深.佛雖無量,而同一業,是故甚深.不堅業`堅業,諸佛具三身者,謂諸如來三身相應,其受用身事業堅住,其變化身業不堅住,如是事業,名爲甚深.
‘숫자가 무량하면서도 동일한 일업(一業)’이란 숫자의 매우 심심함을 나타내는 것으로, 부처님은 무량하면서도 동일한 일업이므로 매우 심심한 것이며,
‘견고하지 않은 업과 견고한 업으로서 모든 부처님께서는 3신을 구족한다’는 것이란, 모든 여래께서는 3신과 상응하나니, 그 수용신의 사업은 견고하게 머물지만, 그 변화신의 사업은 견고하게 머물지 않으니, 이와 같은 사업을 매우 심오하다고 하는 것이다.
▶論曰: ▷ 논문;
“現等覺非有, 一切覺非無, 一一念無量, 有非有所顯.”
등각(等覺)을 현현할지라도 실재가 아니고, 모든 깨달음은 비존재가 아닌 비무(非無)라네.
하나하나의 생각이 무량하여서, 존재(有)와 비존재(非有)가 나타난 바라네.
▶釋曰:此頌,顯示現等覺甚深.現等覺非有者,補特伽羅法非有故.一切覺非無者,由假名理,說一切佛現等覺故.
▷해석한다; 이 게송은 등각의 현현함이 매우 심오함을 나타낸 것으로,
‘등각을 현현할지라도 실재가 아니다’라는 것은 보특가라와 법이 실재가 아니기 때문이며,
‘모든 깨달음은 비존재가 아닌 비무(非無)’라는 것은, 가명(假名)의 이치에 의거해서 모든 부처님께서는 등각을 현현한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ㅡ앞에서는 깨달음의 대상인 보특가라와 법은 비존재임을 밝혔으나, 이 문구에서는 깨달음의 대상이 비존재이긴 하지만, 깨달음의 주체의 자체를 가명에 의거해서 부처님, 각자(覺者)로 삼는 것을 말한다.
云何知佛現等正覺?謂一一念,無量佛故,此卽顯示一一念中,有無量佛,現等正覺.有`非有所顯者,此顯眞如是有`非有,諸佛是此眞如所顯.
부처님께서 등정각을 현현함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나하나의 생각에 무량한 부처님께서 계시기 때문이니, 이것은 곧 하나하나의 생각 가운데에 무량한 부처님께서 계셔서 등정각을 현현한다는 것을 나타낸 것이며,
‘존재(有)와 비존재(非有)가 나타난 바’란, 진여는 있는 것이면서도 없는 것으로서, 모든 부처님께서는 이 진여가 나타난 바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論曰: ▷ 논문;
“非染非離染, 由欲得出離, 了知欲無欲, 悟入欲法性.”
잡염이 아니고 잡염을 떠난 것도 아니니, 탐욕에 의거해서 벗어남의 출리(出離)를 얻는다네.
탐욕은 탐욕이 아니라고 안다면, 탐욕의 법성에 깨달아 들어가는 것이라네.
▶釋曰:此頌,顯示離欲甚深.非染非離染者,貪欲無故,說名非染,以無染故,離染亦無.所以者何?貪染若有,可有離染,染旣是無,故無離染.由欲得出離者,由伏斷貪纏,留貪隨眠故,得究竟出離;若不留隨眠,應同聲聞等,入般涅槃故.
▷해석한다; 이 게송은 탐욕을 벗어남의 매우 심심함을 나타낸 것으로,
‘잡염이 아니고 잡염을 떠난 것도 아니다’라는 것은, 탐욕이 없기 때문에 잡염이 아니라고 말하며, 잡염이 없기 때문에 잡염을 떠남도 역시 없는 것이니, 무슨 까닭에서인가? 탐욕의 잡염이 있으면 잡염을 떠남도 있어야 하는데, 잡염이 이미 없기 때문에 잡염을 떠남도 없는 것이다.
‘탐욕에 의거해서 벗어남의 출리(出離)를 얻는다’는 것이란, 탐욕의 번뇌가 현행하여서 얽어매인 전(纏)을 조복하고, 탐욕의 수면(隨眠, 번뇌의 잠재력)을 머물게 함으로써 구경의 벗어남인 출리(出離, 해탈)을 얻으니,
만약 수면을 머물게 하지 않는다면 마땅히 성문등의 반열반에 들어감과 같아야 하기 때문이다.
ㅡ벗어남의 출리(出離)은 해탈의 의미이며, 미혹을 머물게 해서 생사에 왕래하고 부처님의 행을 닦음으로써 구경의 해탈을 얻는 것이다.
了知欲無欲,悟入欲法性者,了知遍計所執,貪欲`無貪欲性,卽能悟入欲法眞如.
‘탐욕은 탐욕이 아니라고 안다면, 탐욕의 법성에 깨달아 들어간다’는 것은 변계소집의 탐욕과 탐욕이 없는 무탐욕성(無貪欲性)을 안다면, 곧 능히 탐욕법의 진여에 깨달아 들어간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