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친(世親)의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 6권 6
세친(世親)의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 제 6권
세친(世親) 보살 지음, 현장(玄奘) 한역.
4. 입소지상분(入所知相分) 6
▶論曰:復有教授二頌,如『分別瑜伽論』說:
▷논문; 다시 가르침의 두 게송이 있으니, '분별유가론(分別瑜伽論)'에서 설하신 바와 같다.
“菩薩於定位, 觀影唯是心, 義想旣滅除, 審觀唯自想.
보살은 선정의 지위인 정위(定位)에서 영상이 오직 마음일 뿐이라는 것을 관찰하고,
대상(義)의 표상인 의상(義想)이 이미 소멸되어서,
오로지 스스로의 표상인 자상(自想) 뿐라는 것을 살펴서 관찰하네.
如是住內心, 知所取非有, 次能取亦無, 後觸無所得.”
이렇게 해서 내심(內心)에 안주한다면, 인식대상인 소취(所取)는 존재하지 않는 다는 것을 알게되니,
다음에 인식주체인 능취(能取) 역시도 비존재인 무(無)라는 것을 알게 되어, 이후에 무소득에 이르게 된다네.
▶釋曰:爲入眞觀,授以正教, 於此義中,說其二頌. 菩薩依定位, 觀影唯是心者, 謂觀似法似義影像,唯是其心. 誰能觀?謂菩薩.在何位?於定位. 義想旣滅除,審觀唯自想者,謂此位中,義想旣遣,審觀似法似義之想,唯是自心.
▷해석한다; 참된 관찰인 진관(眞觀)에 들어가게 하기 위해서 주어지는 바른 가르침의 정교(正教)의 뜻으로 두 게송을 설한 것이다.
‘보살은 선정의 지위인 정위(定位)에서 영상이 오직 마음뿐임을 관찰한다’는 것은, 법과 비슷하게 현현하고 의미(義)와 비슷하게 현현한 영상이 오직 그 마음일 뿐이라고 관찰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누가 능히 관찰하는가? 보살이다.
어떤 지위에 있는 것인가? 선정의 지위인 정위(定位)에서 이다.
‘대상의 표상인 의상(義想)이 이미 소멸되고 오직 스스로의 표상인 자상(自想) 뿐임을 살펴서 관찰하네’란,
이 지위에서 대상의 표상인 의상(義想)은 이미 없어지고, 법과 비슷하게 현현하고 대상(義)과 비슷하게 현현하는 표상이 오직 자기 마음일 뿐이라고 관찰하는 것이다.
如是住內心者,如攝自心住於無義,卽是令心住於內心.知所取非有者,謂了所取義,無所有.
次能取亦無者,由所取義, 旣是非有, 故能取心, 能取之性,亦不得成. 後觸無所得者,謂從此後,觸證眞如,由此眞如無所得故,名無所得.
‘이렇게 해서 내심(內心)에 안주하면’이란, 이른바 스스로의 마음을 거두어 대상의 비존재인 무의(無義)에 머무는 것이 곧 마음으로 하여금 내심(內心)에 안주하게 하는 것이다.
‘인식대상인 소취(所取)가 존재하지 않음을 안다’는 것은 취착된 인식대상의 소취(所取)인 대상(義)에는 존재하는 바가 없는 무소유(無所有)라는 것을 아는 것이며,
‘다음에 인식주체인 능취(能取) 역시도 비존재인 무(無)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은, 이른바 취착된 인식대상인 소취(所取)가 이미 비존재인 비유(非有)이기 때문에 취착된 인식주체의 마음인 능취심(能取心)이 능히 취하는 성품도 역시 성립될 수 없다는 것이며,
‘이후에 무소득에 이른다’는 것은 이것으로부터 나중에 진여를 접촉하여 증득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니,
이 진여는 무소득에 의거하기 때문에 무소득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論曰:復有別五現觀伽他,如『大乘經莊嚴論』說:
▷논문; 다시 별도로 현관에 대한 다섯 개의 게송이 있으니, '대승경장엄론(大乘經莊嚴論)'에서 설한 바와 같은 것이다.
ㅡ제2 진실품의 게송에 상당하는 것으로, 5언(言)의 게송으로 되어 있다.
“福德智慧二資糧, 菩薩善備無邊際, 於法思量善決已, 故了義趣唯言類.
복덕과 지혜의 두 가지 자량(資糧)을, 보살은 잘 갖추어서 끝이 없으니,
법에 대해서 사유하여 잘 결택하므로, 의미의 취지인 의취(義趣)는 오직 언어의 종류라고 안다네.
ㅡ이 게송은 자량위에 대해서 말한 것이다.
若知諸義唯是言, 卽住似彼唯心理, 便能現證眞法界, 是故二相悉蠲除.
만약 모든 의미(義)가 오직 언어뿐이라는 것을 안다면,
곧 그것에 비슷하게 현현하며 오직 마음이라는 도리에 안주하나니, ㅡ가행위에 대한 것이다.
문득 능히 참다운 진법계(眞法界)를 현전에 증득하게되 되어 이상(二相)을 모두 없애게 된다네.
體知離心無別物, 由此卽會心非有, 智者了達二皆無, 等住二無眞法界.
자체는 마음을 떠나서 별도의 사물이 없음을 아나니, 이로 인하여 마음이 곧 비유(非有)라는 것을 안다네.
지혜로운 이는 두 가지가 다 비유(非有)라는 것을 통달하여
평등히 이무(二無)의 진법계(眞法界)에 안주한다네.
ㅡ위 게송의 두 문구와 이 게송은 통달위인 견도(見道)에 관한 내용이다.
慧者無分別智力, 周遍平等常順行, 滅依榛梗過失聚, 如大良藥消衆毒.
지혜로운 이는 무분별지혜의 힘에 의해서, 널리 두루 평등하여 항상 수순하게 행하나니,
의지처의 무성하여 막힌 듯한 과실의 덩어리를 소멸함이 훌륭한 양약이 갖가지 독을 없애는 것과 같다네.
ㅡ이 게송은 수습위인 수도(修道)에 대한 것이다.
佛說妙法善成立, 安慧幷根法界中, 了知念趣唯分別, 勇猛疾歸德海岸.”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묘법을 잘 성립하여, 지혜와 함께 근본 법계에 안주하나니,
취지를 생각하는 것은 오직 분별일 뿐이라는 것을 알고,
용맹하고 빠르게 공덕 바다의 언덕으로 돌아간다네.
ㅡ이 게송은 구경위에 관한 내용이다.
▶釋曰:復有現觀伽他,如『經莊嚴論』說.其中難解於此顯示.福德智慧二資糧,菩薩善備,無邊際者,資糧有二種:一福德資糧`二智慧資糧.謂施等三波羅蜜多,是福德資糧,第六般若波羅蜜多,是智慧資糧,精進波羅蜜多,二資糧攝.何以故?若爲智慧,而行精進,是智慧資糧,若爲福德,而行精進,是福德資糧.
▷해석한다; 다시 현관의 게송이 있으니, '대승경장엄론'에서 설한 것과 같으며, 그 중에서 알기 어려운 것을 여기에서 나타내 보인 것이다.
‘복덕과 지혜의 두 가지 자량을 보살은 잘 갖추어 끝이 없다’는 것에서,
자량(資糧)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복덕의 자량이고, 둘째는 지혜의 자량이다.
보시ㆍ지계ㆍ인욕 바라밀다는 복덕의 자량이고, 여섯 번째의 반야바라밀다는 지혜의 자량이며,
정진바라밀다는 두 가지의 자량에 포함되는 것이니, 무슨 까닭에서인가? 만약 지혜를 위하여 정진을 행한다면 이것은 지혜의 자량이고, 복덕을 위하여 정진을 행한다면 이것은 복덕의 자량이기 때문이다.
如是靜慮波羅蜜多,亦通二種,若緣無量,而修靜慮,是福德資糧,餘是智慧資糧.如是資糧,是誰所有?謂諸菩薩.長遠難度,名無邊際,如無邊語,非無有邊,但以多故,得無邊稱,此亦如是.
이와 같이 정려바라밀다도 역시 두 가지에 통하나니, 만약 네 가지의 무량한 마음의 사무량심(四無量心)의 자(慈)ㆍ비(悲)ㆍ희(喜)ㆍ사(捨)를 반연하여 정려를 닦으면 이것은 중생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므로 복덕의 자량이 되고,
나머지의 아공ㆍ법공 등을 반연할 때에는 지혜의 자량이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자량은 누구의 소유인가? 모든 보살이다.
매우 멀어서 건너기 어려운 것을 끝이 없다는 무변제(無邊際)라 말하는 것에서 ‘끝이 없다는 무변(無邊)’이란, 끝이 전혀 없다는 것이 아니라 다만 많기 때문에 끝이 없다고 부르는 것과 같으니, 이 역시도 그와 같은 것이다.
於法思量,善決已者,要由定後思惟諸法,方善決定,非餘所能.故了義趣,唯言類者,謂了知諸義,唯意言爲因.若知諸義唯是言,卽住似彼,唯心理者,謂若了知似義顯現,唯是意言,卽住似義,唯心正理,便能現證眞法界.是故二相悉蠲除者, 謂從此後現證眞如,永離所取`能取二相,如入現證,次當顯示.
‘법에 대해서 사유하여 잘 결택하니’는 반드시 선정에 의거하여서 제법을 사유하여 비로소 잘 결택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니, 다른 것이 할 바가 아니기 때문이며,
‘의미의 취지인 의취(義趣)는 오직 언어의 종류라고 안다’는 것이란, 모든 의미가 오직 생각 속의 언어인 의언(意言)을 원인으로 삼는다는 것을 아는 것이며,
‘만약 모든 의미(義)가 오직 언어뿐이라는 것을 안다면, 곧 그것과 비슷하게 현현하며 오직 마음이라는 도리에 안주하여’란, 만약 의미(義)와 비슷하게 현현한 것은 오직 생각속의 언어인 의언(意言)일 뿐이라는 것을 안다면, 곧 의미(義)와 비슷하게 현현하며, 오직 마음이라는 바른 이치에 안주한다는 것이며,
‘문득 능히 참다운 진법계(眞法界)를 현전에 증득하게 되어 이상(二相)을 모두 없애게 된다네.’란,
이것 이후에 진여를 현전에 증득하고, 영원히 취착된 인식대상의 소취(所取)와 인식주체인 능취(能取) 두 가지의 상을 떠나는 것을 말하며, 현전에 증득함에 들어가는 것에 대해서는 나중에 설명할 것이다.
體知離心,無別物,由此卽會心非有者,體知離心無所緣義,彼無有故,卽會能緣心,亦非有.智者了達二皆無者,謂諸菩薩了達此二悉皆是無.等住二無眞法界者,謂平等住離義離心眞實法界.慧者無分別智力者,謂諸菩薩,無分別智,所有勢力.周遍平等,常順行者,於平等中,隨順而行,觀契經等,一切諸法,猶如虛空, 性平等故.內外諸法,皆如是觀,故名周遍. 常者,時恒. 滅依榛梗過失聚,如大良藥消衆毒者,滅謂除滅,依謂所依,卽所依中,雜染法因極難了故.如溪谷林榛梗難入.過失聚者,是雜染法熏習自性.
‘자체는 마음을 떠나서 별도의 사물이 없음을 아나니, 이로 인하여 마음이 곧 비유(非有)라는 것을 안다네.’란,
자체는 마음을 떠나서 인식대상인 대상인 소연의(所緣義)가 없음을 알고, 그것이 비존재인 비유(非有)이기 때문에 곧 인식주체인 마음 역시 비존재인 비유(非有)라는 것을 아는 것이며,
‘지혜로운 이는 두 가지가 다 비유(非有)라는 것을 통달한다’는 것은, 보살이 이 두 가지는 다 비존재인 비유(非有)임을 통달하는 것이며,
‘평등히 이무(二無)의 진법계(眞法界)에 안주한다’는 것이란, 평등히 대상을 떠나고 마음을 떠난 참된 법계에 안주함이며,
‘지혜로운 이는 무분별지혜의 힘에 의해서’는 모든 보살의 무분별지혜가 갖는 세력을 말하며,
‘널리 두루 평등하여 항상 수순하게 행한다’는 것이란, 평등 안에서 수순하여 행하고, 계경 등의 제법은 마치 허공과 같다고 관찰하니, 본성이 평등하기 때문이다.
내부와 외부의 제법 모두를 이렇게 관찰하기 때문에 ‘널리 두루의 주변(周遍)’이라 말하며,
‘항상한 상(常)’은 시간의 항상함이며,
‘의지처의 무성하여 막힌 듯한 과실의 덩어리를 소멸함은 훌륭한 양약이 갖가지 독을 없앰과 같네’에서,
‘소멸’은 제거하는 것을 말하고, ‘의(依)’는 의지처인 소의(所依)이다.
소의(所依, 의지처) 안의 잡염법의 원인은 매우 알기 어렵기 때문에, 계곡의 숲이 무성하여서 들어가기 어려운 것과 같으며,
‘과실의 덩어리’는 잡염법으로서 훈습된 자성이다.
佛說妙法善成立,安慧幷根,法界中者,謂由佛教善安其慧,置眞如中,及能緣彼根本心中.根本心者,謂緣如來所有正教,摠爲一相,應知卽是無分別心.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묘법을 잘 성립하여 지혜를 아울러 근본과 법계 안에 안주한다’는 것이란, 부처님의 가르침은 그 지혜를 진여와 능히 그것을 반연하는 근본 마음 안에 잘 안주시키기 때문이니,
‘근본 마음’은 여래의 모든 바른 가르침을 반연하여 총체적으로 하나의 상으로 삼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이것은 무분별의 마음이라고 알아야 한다.
了知念趣唯分別者,謂彼安住根本心已爲說正教,由後得智,念諸義趣,知此念趣唯是分別.勇猛疾歸德海岸者,謂諸菩薩,由無分別智及後得智巧方便故,速趣佛果功德海岸.如是五頌摠略義者,謂第一頌顯資糧道`第二初半顯加行道`後半第三顯於見道`第四一頌顯於修道`第五一頌顯究竟道.
‘취지를 생각함은 오직 분별임을 안다’는 것이란, 그 근본 마음에 안주하고 나서, 바른 가르침을 설하기 위해서 후득지에 의거해서 모든 의취(義趣)를 생각하나, 이 취지를 생각하는 것은 오직 분별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며,
‘용맹하고 빠르게 공덕 바다의 언덕으로 돌아간다’는 것이란, 모든 보살은 무분별지와 후득지의 훌륭한 방편에 의거함으로써 불과(佛果)의 공덕 바다의 언덕에 조속히 도달하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다섯 개의 게송의 뜻를 간략히 말한다면,
첫 번째 게송은 자량도(資糧道)를 나타내고,
두 번째 게송의 전반부는 가행도(加行道)를 나타내며, 후반부와 세 번째 게송은 견도(見道)를 나타니며,
네 번째 게송은 수도(修道)를 나타내고, 다섯 번째 게송은 구경도(究竟道)를 나타낸 것이다.
攝大乘論釋卷第六 終 섭대승론석 제 6권을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