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친(世親)의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 6권 5
세친(世親)의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 제 6권
세친(世親) 보살 지음, 현장(玄奘) 한역.
4. 입소지상분(入所知相分) 5
▶論曰:如是菩薩,已入於地`已得見道`已入唯識,於修道中,云何修行? 於如所說,安立十地,攝一切經,皆現前中,由緣摠法出世後得止觀智故,經於無量百千俱胝那庾多劫數修習故,而得轉依.爲欲證得三種佛身,精勤修行.
▷논문; 이렇게 해서 보살은 10지(地) 중에 들어가서 견도(見道)를 얻어 유식의 이치에 들어간다.
수도(修道) 중에서는 어떻게 수행하여야 하는가?
말한 바와 같이 안립된 10지의 모든 경전을 포섭하여 현전하는 중에서, 총체적인 총법(摠法)을 반연하는 출세의 후득지관의(後得止觀) 지혜에 의거하고, 무량한 백천 구지(俱胝, 억億) 나유다(那庾多)겁을 지나서 누누이 닦아 익힘으로써 전의(轉依)를 얻어 삼불신(三佛身)을 증득하기 위해서 부지런히 수행하는 것이다.
ㅡ5위 중에서 통달위인 견도(見道)와 수습위인 수도(修道)의 수행을 설명하였다.
견도(見道)는 무루(無漏)의 바른 지혜인 정지(正智)가 처음으로 진리를 비추는 때를 말한다. 초지(初地)의 입심(入心)에서 존재한다.
구지(俱胝), 범어 koṭi의 음역어로서, 억(億)이라 번역하며, 인도에서 쓰던 숫자의 단위이다.
나유다(那庾多), 범어 nayuta의 음역으로서 매우 큰 수를 나타내는 것으로, 천만(千萬) 또는 천억(千億)이라 한다.
▶釋曰:於如所說安立十地者,謂於隨說安立菩薩十種地中.由緣摠法者,謂緣摠相,非分別緣.
▷해석한다; ‘말한 바와 같이 안립된 10지’란, '십지경(十地經)'에서 말씀하신 바에 따라 안립된 보살의 열 가지 지위를 말하며,
‘총체적인 총법(摠法)을 반연한다’는 것은 총체적인 총상(摠相)을 반연하는 것으로, 분별해서 반연하지 않는, 즉 하나하나의 상을 각각 별도로 반연하지 않고, 전체를 하나의 상으로 해서 그 공통된 상, 즉 진여를 반연하는 것이다.
言出世者,無分別智.後得卽是能成立智,此不應說唯是世閒,由於世閒,未積習故;亦不應說唯出世閒,由隨世閒,而
現前故,由是因緣,不可定說.而得轉依者,由緣摠智,故得轉依.爲欲證得三種佛身,精勤修行者,謂我當證三種佛身,故勤修行.
‘출세간’이란 무분별지혜를 말하고,
‘후득’은 능히 성립하는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즉 후득지(後得智)가 일체법의 차별상을 능히 성립하는 지혜임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을 마땅히 오직 세간이라고 말해서는 안 되는 것으로, 세간에 대해서 아직 쌓아 익히지 않은 때문이며,
역시 오직 출세간이라고 말해서도 안 되는 것이니, 세간을 따라 현전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연으로 인하여, 후득지는 세간의 지혜 또는 출세간의 지혜의 어느 한 가지라고 결정적으로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전의를 얻는다’는 것은 총체적인 총상(摠相)을 반연하는 지혜에 의거함으로써 전의를 얻는 것을 말하며,
‘세 가지 삼불신을 증득하기 위해서 부지런히 수행한다’는 것이란, 스스로가 장차 삼불신을 증득하기 위해서 부지런히 수행하는 것을 말한다.
현관(現觀),문자 그대로의 뜻은 '앞에 있는 경계 즉 대상을 관(觀)한다'는 뜻인데, 산스크리트어 원어 아비삼마야(abhisamaya)는 아비사미(abhisami)와 동의어로, 서로에게 다가가다(approach together), 합치다 또는 합일하다(come together) 또는 만나다(meet at)를 뜻한다. 즉, 지혜와 대상이 바로 직접 만나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현관(現觀)은 무루의 지혜로써 대상을 있는 그대로 명료하게 파악하는 것, 즉 명료한 이해(clear understanding), 각(覺, Buddh) 즉 깨달음(Buddh, realization)이라고도 정의된다.
불교에서 현관(現觀)이라고 할 때, 그 대상은 진리를 말하는데, 부파불교의 4제현관(四諦現觀)과 대승불교의 6현관(六現觀)이 있다.
ㅡ이하는 성문과 보살의 현관(現觀)의 차이를 11가지로 설명한다.
▶論曰:聲聞現觀`菩薩現觀,有何差別?謂菩薩現觀,與聲聞異,由十一種差別應知. 一由所緣差別,以大乘法,爲所緣故;二由資持差別,以大福智二種資糧,爲資持故;三由通達差別,以能通達補特伽羅法無我故;四由涅槃差別,攝受無住大涅槃故;五由地差別,依於十地而出離故;六七由淸淨差別,斷煩惱習,淨佛土故;八由於自他得平等心差別,成熟有情加行無休息故;九由生差別,生如來家故;十由受生差別,常於諸佛大集會中,攝受生故;十一由果差別,十力`無畏`不共佛法無量功德果成滿故.
▷논문; 성문의 현관(現觀)과 보살의 현관(現觀)에 어떠한 차이가 있는 것인가?
보살의 현관과 성문의 현관에는 11가지 차이가 있으며, 이에 의한 것이라고 알아야 하나니,
첫 번째는 인식대상인 소연(所緣)의 차이에 의하는 것이니, 대승법으로써 인식대상인 소연(所緣)을 삼기 때문이며,
두 번째는 자량(資糧)을 지니는 것의 차이에 의하는 것이니, 큰 복과 지혜의 두 가지 자량으로써 깨달음의 바탕을 삼기 때문이며,
세 번째는 통달의 차이에 의하는 것이니, 능히 보특가라의 인무아(人無我)와 법무아(法無我)에 통달하기 때문이며,
네 번째는 열반의 차이에 의한 것이니, 생사와 열반에 머무름이 없는 대열반을 섭수하기 때문이며,
다섯 번째는 지위의 차이에 의하는 것이니, 10지에 의지해서 벗어나기 때문이며,
여섯 번째와 일곱 번째는 청정의 차이에 의한 것이니, 번뇌와 습관을 끊고 불국토를 청정하게 하기 때문이며,
여덟 번째는 자신과 남에 대해서 평등심을 얻는 차이에 의한 것이니, 유정을 성숙시키는 가행은 휴식함이 없기 때문이며,
아홉 번째는 태어남의 차이에 의한 것이니, 여래가(來家故)에 태어나기 때문이며,
열 번째는 생을 받는 차이에 의한 것이니, 항상 모든 부처님의 큰 법회에서 생을 섭수하기 때문이며,
열한 번째는 증과(果)의 차이에 의한 것이니, 10력(力)ㆍ네 가지 두려움이 없음의 사무외(四無畏)ㆍ18 불공법(不共法)인 부처님 불법의 무량한 공덕의 증과를 원만히 이루기 때문이다.
십력(十力), 부처님만의 열 가지 지혜의 힘으로, 첫째, 바른 도리와 그렇지 않은 도리를 변별하는 지혜의 힘.
둘째, 선악업과 그 과보를 여실하게 아는 지혜의 힘.
셋째, 4선(禪)ㆍ8해탈(解脫)ㆍ3삼매(三昧)ㆍ8등지(等持) 등을 여실히 아는 지혜의 힘.
넷째, 중생의 근기의 고하(高下) 우열을 여실히 아는 지혜의 힘.
다섯째, 중생의 여러 가지 의욕 성향을 여실히 아는 지혜의 힘.
여섯째, 중생계와 그 성류(性類)를 여실히 아는 지혜의 힘.
일곱째, 어떤 수행에 의해서 어떤 도에 나아가는가를 여실히 아는 지혜의 힘.
여덟째, 중생의 숙명(宿命)을 여실히 아는 지혜의 힘.
아홉째, 중생의 미래를 여실히 아는 지혜의 힘.
열째, 모든 번뇌가 다한 것을 여실히 아는 지혜의 힘이다.
사무외(四無畏), 부처님께서 10력(力)을 갖추셨으므로 다음과 같은 두려움이 없음을 말한다.
① 모든 것을 아는 분인 ‘일체지자’로서의 자신감, ② 모든 번뇌를 극복했다는 자신감,
③ 모든 장애를 극복한 까닭에 수행에 장애되는 길을 말할 수 있는 자신감,
④ 모든 괴로움이 소멸되었기 때문에 괴로움을 멸하는 길을 말할 수 있는 자신감.
18 불공법(不共法)이라 함은 범부는 말할 것도 없고 아라한ㆍ벽지불 또는 보살과도 공통되지 않는 부처님 특유의 법이다. 이에 10력(力)ㆍ4무소외(無所畏)ㆍ3염주(念住)ㆍ대비(大悲)의 18가지가 있다.
▶釋曰:由涅槃差別者,以菩薩現觀攝受無住大般涅槃,聲聞不爾.由淸淨差別者,以菩薩現觀永斷煩惱及諸習氣,能淨佛土,聲聞不爾.
▷해석한다; ‘열반의 차이에 의거한다’는 것은 보살의 현관은 생사와 열반에 머물지 않는 대열반을 섭수하지만 성문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며,
‘청정의 차이에 의해서’란 보살의 현관은 번뇌와 모든 습기를 영원히 끊고 능히 불국토를 청정케 하지만 성문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論曰:此中有二頌:
▷논문; 이러함에 대하여 두 게송이 있으니,
“名事互爲客, 其性應尋思, 於二亦當推, 唯量及唯假.
명칭(名)과 사물(事)은 서로 객(客)이 되나니, 그 속성을 마땅히 심사(尋思, 사색)해야 하리니,
오로지 인식작용인 유량(唯量)과 오로지 가립인 유가(唯假)라는 둘에 대해서도 마땅히 추리해야 하네.
實智觀無義, 唯有分別三, 彼無故此無, 是卽入三性.”
진실된 실지(實智)는 대상의 비존재인 무의(無義)로서, 오직 세 가지의 분별(分別)이 있을 뿐임을 관찰하네.
저것이 없기 때문에 이것도 없는 것이니, 이것이 곧 삼성(三性)에 들어가는 것이라네.
ㅡ진제 역본인 진본(陳本)이나 급다(笈多)ㆍ행구(行矩)의 역본인 수본(隋本)에는 3무성(無性)으로 되어 있다.
▶釋曰:將入眞觀,故說二頌.名事互爲客,其性應尋思者,謂名於事爲客,事於名爲客,非稱彼體故.
▷해석한다; 장차 참된 관찰에 들어가기 위해서 두 개의 게송을 말하였다.
‘명칭(名)과 사물(事)이 서로 객(客)이 되니, 그 속성을 마땅히 사색해야 하네’란,
명칭(名)은 명칭에 의지해서 나타내어지는 사상(事相), 즉 사물(事)에 대해서 객(客)이 되고, 사물(事)은 명칭(名)에 대해서 객(客)이 되는 것이니, 그것의 자체에 계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명칭(名)과 사물(事)이 서로 객관이 되어 각각 다르게 떨어져 있는 것은 명칭(名)과 사물(事)이 하나의 체(體)가 아니기 때문이다.
由定而觀,故名尋思. 於二亦當推唯量及唯假者,應當推尋義之自性 `差別竝無,唯有識量,唯有自性`差別假立.
선정에 의거해서 관찰하기 때문에 심사(尋思, 사색)라고 하는 것이며,
‘오로지 인식작용인 유량(唯量)과 오로지 가립인 유가(唯假)라는 둘에 대해서도 마땅히 추리해야 하네.’란,
마땅히 대상의 자성과 차별도 모두 비존재인 무의(無義)이고, 오직 식의 인식작용만이 있고, 오직 자성과 차별의 가립(假立)만이 있다고 추리해야 하는 것이다.
言實智者,應知卽是如實遍智,謂由四種尋思爲因,發生四種如實遍智.
‘참다운 지혜의 실지(實智)’란, 곧 있는 그대로 두루 아는 여실편지(如實遍知)이다.
네 가지의 심사(尋思, 사색)을 원인으로 함으로써 발생되는 있는 그대로 두루 아는 네 가지의 지혜인 사여실편지(四如實遍知)인 것이다.
所言觀無義唯有分別三者,謂觀於義本無所有,唯有三種虛妄分別,謂名分別`自性分別`差別分別. 彼無故此無者,謂義無故,分別亦無.何以故?若有所分別義,可有能緣分別;由義無所有故,當知分別亦無.
‘대상의 비존재인 무의(無義)로서 오직 세 가지의 분별(分別)이 있을 뿐임을 관찰한다’는 것이란, 이른바 대상(義)에 대해서 본래부터 있는 바가 없는 무소유(無所有)이고, 오직 세 가지의 허망분별이 있을 뿐임을 관찰하는 것이니,
명칭의 분별인 명분별(名分別), 자성분별(自性分別), 차별분별(差別分別)이 그 세 가지이다.
‘그것이 없기 때문에 이것도 없다’는 것은 대상(義)이 없기 때문에 분별(分別) 역시도 없음을 말하는 것이니, 무슨 까닭에서인가?
만약 분별되는 대상(義)이 존재한다면 인식의 주체인 분별도 존재해야 하는 것이나, 대상(義)은 있는 바가 없는 무소유이기 때문에 분별 역시도 없는 것이다.
是卽入三性者,謂於此中,悟入三性,觀見名事互爲客故,卽是悟入遍計所執性.觀見二種本無有義,唯有分別量,唯有名自性`差別假立故,卽是悟入依他起性. 亦不觀見此分別故,卽是悟入圓成實性.如是名爲悟入三性.
‘이것은 곧 세 가지 자성인 삼성(三性)에 들어간다’는 것은, 이 중에서 세 가지 자성에 깨달아 들어가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명칭(名)과 사물(事)이 서로 객(客)이 됨을 관찰함으로써 곧 변계소집성에 깨달아 들어가는 것이며,
명칭(名)과 사물(事), 두 가지가 본래부터 존재하지 않고, 오직 분별의 인식작용이 있을 뿐이며, 오직 명칭의 명분별과 자성분별과 차별분별의 가립이 있을 뿐임을 관찰함으로써 곧 의타기자성에 깨달아 들어가는 것이며,
역시 이러한 분별도 관찰하지 않음으로써 곧 원성실성에 깨달아 들어가는 것이다.
ㅡ앞에서 능히 반연하고 분별하는 식을 인정하여 명칭의 자성과 차별을 가립했는데, 다시 나아가 그 인식주체인 분별식마저도 보지 않는, 경식구민(境識俱泯)이면 아공ㆍ법공의 상태에서 나타나는 원성실성에 깨달아 들어가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을 세 가지 자성인, 삼성(三性)에 깨달아 들어간다고 이름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