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친(世親)의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

세친(世親)의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 5권 5

Skunky 2025. 3. 17. 09:01

세친(世親)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제 5

세친(世親보살 지음현장(玄奘한역.

3. 소지상분(所知相分) ② 5

 

▶論曰:說語義者,謂先說初句,後以餘句,分別顯示,或由德處`或由義處.

논문;가르침의 의미인 어의(語義)를 말함’이란, 먼저 첫 번째 구절을 말하고, 그 다음에 나머지 구절로써 분별하여 나타내는 것이니, 혹은 덕처(德處)에 의거하고, 혹은 의미의 의처(義處)에 의거하는 것이다.

▶釋曰:由說語義如所造釋,今當顯示,或攝其德`或攝其義.

해석한다; ‘가르침의 어의(語義)를 말한다’는 것은, 마땅히 본문에서 해석한 바와 같이 나타내는 것으로, 혹은 그 덕을 포섭하고, 혹은 그 의(義)를 포섭하는 것이다.

▶論曰:由德處者,謂說佛功德:最淸淨覺,不二現行 , 趣無相法,住於佛住, 逮得一切佛平等性, 到無障處, 

不可轉法,所行無㝵, 其所安立不可思議,遊於三世平等法性, 其身流布一切世界, 於一切法智無疑滯,

於一切行成就大覺, 於諸法智無有疑惑, 凡所現身不可分別, 一切菩薩等所求智, 得佛無二住勝彼岸,

不相閒雜如來解脫妙智究竟, 證無中邊佛地平等, 極於法界, 盡虛空性, 窮未來際,

▷논문; ‘덕처(德處)에 의거한다’는 것은 부처님의 공덕을 말하는 것이니, 즉 

가장 청정한 깨달음의 최청정각(最淸淨覺)으로써, 번뇌장과 소지장의 두 가지가 현행하지 않으며, 

무상법(無相法, 진여)에 나아가며, 부처님께서 안주하신 바의 대비심(大悲心) 머무시며, 

모든 부처님의 평등한 성품을 증득하고, 장애 없는 곳에 이르셨으며,

퇴전하지 않는 법으로서 행이 걸림이 없으시며,

중생구제를 위하여 정법을 시설하고 안립하시는 바가 불가사의하하며,

삼세를 모두 잘 아시니 평등한 법성에 노닐며,  몸은 일체의 세계에 두루하며, 

일체의 제법과 지혜에 대해서 의심과 막힘이 없으시고, 

모든 행에 있어서  깨달음을 성취하셨으니, 모든 중생의 근기에 따라 적절하게 제도하시며,

제법과 지혜에 대해서 지혜가 의혹이 없고, 

무릇 시현하시는 타수용신과 변화신의 소현신(所現身)은 분별할  없으니, 바로 모든 보살이 구하는 지혜이다. 

부처님의 둘이 없는 경지의 법신진여(法身眞如)를 증득하시어 뛰어난 피안에 안주하시며,

여래의 서로 혼잡되지 않는 해탈의 미묘한 지혜를 구경에  이루시고, 중간과 극단이 없는 부처님 지위의 평등한 성품을 증득하셨으며, 법계를 다하고, 허공의 성품을  이루며, 미래 영겁이 다하도록 중생구제의 이타활동을 하는 덕을 갖추시어, 미래 세상을 다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ㅡ여래의 경계에 대해서 우선 총덕(總德)인 최청정각(最淸淨覺) 말하고 나서 21가지 별덕(別德) 들어서 원만함을 나타낸다.

 

소현신(所現身), 타수용신과 변화신을 가리키는 것이며,

타수용신(他受用身)은 10지의 보살들을 위해 법을 설하여 대승 법락(法樂)과 청정국토를 수용시키는 부처님이며,

변화신(變化身)은 이승(二乘)과 범부를 교화하기 위하여, 성소작지(成所作智)의 힘으로 화현한 불신(佛身)이다. 


最淸淨覺者.應知此句, 由所餘句分別顯示, 如是乃成善說法性 最淸淨覺者,謂佛世尊最淸淨覺,

應知是佛二十一種功德所攝.謂於所知一向無障轉功德` 於有無無二相眞如最勝淸淨能入功德`

無功用佛事不休息住功德` 於法身中所依意樂作業無差別功德` 修一切障對治功德`降伏一切外道功德`

‘가장 청정한 깨달음의 최청정각(最淸淨覺)’이란,  구절은 나머지 구절로써 분별하고 나타내 보이는 것이니, 이와 같이 법성을  말씀함을 성취하는 것이라고 알아야 하며,  

‘가장 청정한 깨달음의 최청정각(最淸淨覺)’은 부처님 세존의 가장 청정한 깨달음이니, 이에 부처님의 21가지 공덕이 포섭된다는 것을 알아야 하나니, 이른바 알아야  바에 대해서 한결같이 장애 없이 전전하는 공덕, 

유무(有無)의 두 까지에 대하여 이상(二相)이 없는 진여의 가장 뛰어나고 청정함에 능히 들어가는 공덕, 

의식적인 노력이 없는 무공용불사(無功用佛事)를 지으심에 쉬지 않고 머무시는 공덕, 

법신의 소의(所依, 의지처)ㆍ의요(意樂)ㆍ불사(作業)에 대하여 차별이 없는 공덕, 

모든 장애의 다스림을 닦는 공덕, 모든 외도를 항복시키는 공덕, 

 

生在世閒不爲世法所㝵功德` 安立正法功德` 授記功德` 於一切世界示現受用變化身功德` 斷疑功德`

令入種種行功德`當來法生妙智功德`如其勝解示現功德`無量所依調伏有情加行功德`

平等法身波羅蜜多成滿功德 `隨其勝解示現差別佛土功德` 三種佛身方處無分限功德`

窮生死際常現利益安樂一切有情功德,無盡功德等.

세간에 머물러도 세간의 법에 걸림이 없는 공덕, 정법을 안립하는 공덕, 수기(授記)하는 공덕, 

모든 세계에서 수용신(受用身)과 변화신(變化身)을 나투는 공덕, 의심을 완전히 끊은 공덕, 

갖가지 행에 들어가게 하는 공덕, 장차 법의 승묘한 지혜를 일으키는 공덕, 

 뛰어난 이해 그대로 중생의 뜻을 따라 현현하여 시현하시는 공덕, 

무량한 의지처로서 유정을 조복하는 가행(加行)의 공덕, 평등한 법신의 바라밀다를 원만히 이루는 공덕, 

 뛰어난 승해(勝解)를 따라 다른 불국토를 나타내는 공덕, 삼불신(三佛身) 장소에 한계가 없는 공덕, 

생사를 다하고 항상 현현하여 모든 유정을 이롭고 안락하게 하는 공덕, 다함이 없는 무진공덕 등이다.

 

▶釋曰:此中不二現行者,謂二現行此中無有,是故說名不二現行.卽是於所知,一向無障轉功德,

해석한다; 이 중에서 ‘두 가지가 현행하지 않는다’는 것은  가지의 여기에는 현행이 없음으므로  가지가 현행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니,  소지장에 대해서 한결같이 장애 없이 전전하는 공덕으로,  

ㅡ두 가지 장애 중에서 이승(二乘) 이미 번뇌장을 끊었기 때문에 여기서는 소지장만을 든다.

 

非如聲聞`獨覺智,亦有障亦無障故.趣無相法者,謂淸淨眞如,

성문ㆍ독각의 지혜가 역시 소지장의 장애가 있고, 역시 번뇌장의 장애가 없는 것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名無相法,趣謂趣入,卽是於有無,無二相眞如,最勝淸淨能入功德. 謂此眞如,非是有相, 諸法無性, 以爲相故;

亦非無相,自相有故. 於此無相眞如, 最勝淸淨能入,最勝能入故`淸淨能入故.

‘무상법(無相法)에 나아간다’는 것은 청정한 진여를 무상법이라 이름하고, 

나아간다는 취(趣)란, 향하여 나아가 들어가는 취입(趣入)의 뜻으로, 이것은  유무(有無)에 대해서  가지 상이 없는 진여의 가장 뛰어나고 청정한 것에 능히 들어가는 공덕인 것이다.

 진여는 상이 있지 않으니, 일체법의 자성 없음을 상으로 삼기 때문이다. 

역시 무상(無相)인 것도 아니니, 자상이 있기 때문이다. 

 무상진여의 가장 뛰어나고 청정한 최승청정(最勝淸淨)함에 능히 들어가는 것은, 가장 뛰어난 최승(最勝)에 능히 들어가기 때문이고, 청정(淸淨)함에 능히 들어가기 때문이다. 

 

住於佛住者,謂住佛所住無所住處,卽是無功用佛事,不休息住功德,謂此住中,常作佛事,無有休息.

逮得一切佛平等性者,卽是於法身中, 所依意樂作業無差別功德. 到無障處者, 卽是修一切障對治功德,

謂一切時,常修覺慧, 對治一切障故. 不可轉法者,卽是降伏一切外道功德. 所行無㝵者, 卽是生在世閒,

不爲世法所㝵功德,謂雖生世閒行,於世閒,所行之處,不爲利等世閒八法所染污故.

‘부처님의 안주하는 곳에 머문다’는 것은 부처님께서 안주하시는 바이나, 안주함이 없는 곳에 머무는 것을 말하는 것이니, 이것은  의식적인 노력없이 자연스럽게 무공용(無功用) 불사(佛事)를 짓고 휴식 없이 머무는 공덕으로, 이른바  안주하는 가운데 항상 불사를 짓고 휴식 없이 머무는 것이다.

‘모든 부처님의 평등한 성품을 증득한다’는 것은  법신의 의지처인 소의(所依)ㆍ의요(意樂)ㆍ불사(作業)에 대해서 차별이 없는 공덕이며,

‘장애 없는 곳에 이르셨다’는 것은  모든 장애의 다스림을 닦은 공덕이니, 이른바 어느 때나 항상 깨달음의 지혜를 닦아서 모든 장애를 다스리기 때문이다.

‘퇴전하지 않는 불가전법(不可轉法)’이란  모든 외도를 항복시키는 공덕이며,

‘행에 걸림없는 소행무애(所行無㝵)’란, 곧 세간에 머물러도 세간의 법에 걸림없는 공덕이니, 이른바 세간에 태어나서 세간에서 행하여지는 행할지라도 이익  세간팔법(世間八法)에 의해 오염되지 않기 때문이다.

 

세간팔법(世間八法), 이득(利)ㆍ손실(衰)ㆍ뒤에서 험담하는 훼(毁)ㆍ뒤에서 칭찬하는 예(譽)ㆍ면전에서 칭찬하는 칭(稱)ㆍ면전에서 비방하는 기(譏)ㆍ괴로움(苦)ㆍ즐거움(樂)의 여덟 가지 법은 세인(世人)의 마음을 동요시키기 때문에 8풍(風)이라고도 한다.


其所安立不可思議者,卽是安立正法功德,由契經等正法無量不可思議, 非諸愚夫所能解故. 由此故,名最淸淨覺,此最淸淨覺句,於句句中,皆遍相應.

‘그 안립하는 바가 불가사의하다’는 것은  정법을 안립하는 공덕으로, 계경 등의 정법은 무량하고 불가사의하므로 모든 어리석은 범부가 능히 이해할 바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하여 가장 청정한 깨달음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니,  가장 청정한 깨달음의 구절은 구절구절마다 두루 상응하는 것이다.

가장 청정한 깨달음은 총덕(總德)이며,  구절을 해설하기 위해 21가지의 별덕(別德) 들기 때문에,  구절은  구절마다 공통적으로 해당된다는 뜻이다.

 

遊於三世平等法性者,卽是授記功德. 其身流布一切世界者, 卽是於一切世界, 示現受用變化身功德.於一切法智,無疑滯者,卽是斷疑功德.於一切行,成就大覺者,卽是令入種種行功德. 於諸法智 無有疑惑者,卽是當來,法生妙智功德, 謂知當來如是法生如來妙智.

‘삼세의 평등한 법성에 노닌다’는 것은  수기의 공덕이며,

‘그 몸은 모든 세계에 나타내 보인다’는 것은  모든 세계에서 수용신과 변화신을 시현하는 공덕이며,

‘제법과 지혜에 대해서 의심과 막힘이 없다’는 것은  의혹을 완전히 끊은 공덕이다. 

‘모든 행에 있어서  깨달음의 대각(大覺)을 성취하셨다’는 것은,  갖가지 행에 들어가게 하는 공덕이며,

‘제법과 지혜에 대한 지혜가 의혹이 없다’는 것은  장차 법에 대한 묘지(妙智)가 생겨나게 하는 공덕이니, 이른바 장차 이와 같은 법은 여래의 승묘한 묘지(妙智)가 생겨나는 것을 아는 것이다.

 

凡所現身不可分別者.卽是如其勝解示現功德.一切菩薩等所求智者,卽是無量所依調伏有情加行功德,謂無量菩薩,所依`能作調伏諸有情事, 此非諸佛已得自他平等更求此智,唯有諸佛,已作如是勝調伏事.

‘무릇 시현하는 몸은 분별할  없다’는 것은   뛰어난 승해(勝解) 그대로 시현하는 공덕이니, 무량한 중생의 뛰어난 승해(勝解)에 따라 불신(佛身)을 시현하는 것이며,

‘바로 모든 보살이 구하는 지혜’란, 무량한 의지처로서 유정을 조복하는 가행의 공덕이니, 이른바 무량한 보살의 의지처로서 능히 모든 유정을 조복하는 일을 하는 것이다. 

모든 부처님께서는 이미 자타(自他)의 평등을 얻으셨기 때문에 다시 이러한 지혜를 구하지 않으며, 다만 모든 부처님들만이 이와 같은 뛰어난 조복의 일을 할 수 있는 것이다.

 

得佛無二住勝彼岸者,卽是平等法身波羅蜜多,成滿功德.謂無二法身,名平等法身, 卽於如是,無二法身, 得善淸淨波羅蜜多.

不相閒雜, 如來解脫妙智究竟者,謂於無雜如來智中,勝解究竟. 此中勝解,名爲解脫,卽是隨其勝解, 示現差別功德.

‘부처님의 둘이 없는 경지를 증득하여 뛰어난 피안에 안주한다’는 것은  평등한 법신의 바라밀다를 원만히 성취한 공덕으로, 둘이 없는 법신, 무이법신(無二法身)을 평등법신(平等法身)이라 이름하는 것이니, 곧 이와 같은 무이법신(無二法身) 대해서 청정한 바라밀다를  증득하는 것이다. 

‘여래의 서로 혼잡되지 않는 해탈의 미묘한 지혜를  이룬다’는 것은 여래의 서로 혼잡되지 않는 지혜의 뛰어난 이해를  이루어 해탈하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여기서 승해(勝解) 해탈이라 이름하는 것이니, 이것은   뛰어난 이해를 따라 차별한, 각각 다른 불국토를 나타내는 공덕이다.

 

證無中邊佛地平等者,卽是三種佛身, 方處無分限功德, 謂佛法身,不可分限爾所方處, 受用變化,

亦不可說爾所世界. 極於法界者,謂極淸淨法界,是名極於法界, 卽是窮生死際, 常現利益安樂一切有情功德.

盡虛空性者,卽是無盡功德,謂佛智無盡,如虛空故. 窮未來際者,卽是究竟功德.

等言, 等此佛智究竟窮未來際無有閒斷,是故名爲最淸淨覺.

‘중간과 극단이 없는 부처님 지위의 평등한 성품을 증득한다’는 것은   가지 불신이 장소에 한계가 없는 공덕으로, 부처님의 법신은  장소를 한계 지을  없으며, 수용신과 변화신 역시도  세계를 말할  없는 것이다. 

‘법계를 다한다’는 것은 청정한 법계를 다함을 법계를 다한다고 말하는 것이니, 곧 생사를 다하고 항상 현현하여서 모든 유정을 이롭고 안락하게 하는 공덕이다. 

‘허공의 성품을  이룬다’는 것은 바로 다함이 없는 무진공덕이니, 부처님 지혜가 무진한 것이 허공과 같기 때문이다.

‘미래 세상을 다한다’는 것은  궁극적인 구경공덕(究竟功德)이며,

‘등(等)’이라고 말하는 것이란, 부처님의 지혜는 궁극적으로 미래 세상이 다하도록 중단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장 청정한 깨달음의 최청정각(最淸淨覺)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論曰:復次由義處者,如說若諸菩薩,成就三十二法,乃名菩薩,謂於一切有情, 起利益安樂增上意樂故: 令入一切智智故` 自知我今何假智故`摧伏慢故` 堅牢勝意樂故` 非假憐愍故` 於親非親平等心故`永作善友乃至涅槃爲後邊故` 應量而語故`含笑先言故`無限大悲故`於所受事無退弱故`

▷논문; ‘또한 의미의 포섭처, 의처(義處)에 의거한다’는 것이란, 보살이 32가지 법을 성취하면  보살로 이름한다고 말한 것과 같이, 모든 유정에게 이익과 안락을 더하여 주려는 의요를 일으키기 때문이며,  

모든 것을 아는 일체지지(一切智智) 들어가게 하기 때문이고,

나는 지금 어떠한 임시적인 지혜인가를 스스로 알기 때문이며, 아만을 조복하기 때문이다. 

또한 견고하고 뛰어난 승의락(勝意樂)이기 때문이며, 임시적인 연민이 아니기 때문이며,

친한 이와 친하지 않은 이에 대하여 평등한 마음이기 때문이며,

영원히 착한 벗이 되어서 열반을 최후의 목적으로 삼기 때문이며,

올바른 인식에 상응하여 말하는 까닭이며, 미소를 머금고 먼저 말하기 때문이며, 

무한한 대자비이기 때문이며, 수용한 대승의 교법 대해서 약해져서 물러서지 않기 때문이다.  

 

無厭倦意故`聞義無厭故`於自作罪深見過故` 於他作罪不瞋而誨故`於一切威儀中恒修治菩提心故` 不悕異熟而行施故`

권태의 마음이 없기 때문이며, 교의(義) 듣는 것을 싫어하지 않기 때문이고, 

스스로 지은 죄에 대하여 깊이  허물을 보기 때문이며, 남이 지은 죄에 대해서 성내지 않고 가르치기 때문이며,

모든 위의(威儀) 가운데 항상 보리심을 닦기 때문이고, 과보인 이숙(異熟) 바라지 않고 보시를 행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이숙(異熟, vipāka) 행위(業) 대한 과보의 의미이다.

 

不依一切有趣受持戒故` 於諸有情無有恚㝵而行忍故` 爲欲攝受一切善法勤精進故` 捨無色界修靜慮故` 方便相應修般若故`由四攝事攝方便故`於持戒破戒善友無二故`以慇重心聽聞正法故`以慇重心住阿練若故`

모든 유정의 윤회세계(趣)에 의지하지 않고 계율을 수지하기 때문이며,

모든 유정에 대해서 성내지 않고 인욕을 행하기 때문이며,

모든 선법을 섭수하기 위하여 부지런히 정진하기 때문이며, 무색계를 버리면서 정려를 닦기 때문이고, 

방편과 상응하여 반야를 닦기 때문이며, 사섭사(四攝事, 사섭법) 섭방편(攝方便) 의거하기 때문이며,

계율을 지키고 계율을 파함에 있어서 착한 벗으로서  가지가 없기 때문이며,

간절하고 공경하는 마음으로 정법을 듣기 때문이며,

간절하고 공경하는 마음으로 아련야(阿練若) 머물기 때문이다.

 

아련야(阿練若)는 범어 ārāṇya의 음역(音譯)으로, 아란야(阿蘭若)라고도 한다. 마을에서 떨어진 고요하고 한가한 공한정처(空閑靜處)를 말하며, 세속의 번뇌ㆍ산란ㆍ투쟁 등이 이르지 않는 곳으로서 출가 구도자가 머무는 곳이다.

 

於世雜事不愛樂故`於下劣乘曾不欣樂故`於大乘中深見功德故`遠離惡友故`親近善友故`恒修治四梵住故

세간의 번잡한 일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며, 열등한 교법에 대해서 일찍이 기뻐하지 않기 때문이며, 

대승 안의 깊은 공덕을 보기 때문이며, 나쁜 벗을 멀리하고 착한 벗을 가까이하기 때문이며,

항상 청정에 자(慈)ㆍ비(悲)ㆍ희(喜)ㆍ사(捨)의 사범주(四梵住, 사무량심四無量心)를 닦기 때문이다. 

 

`常遊戲五神通故`依趣智故`於住正行不住正行諸有情類不棄捨故`言決定故`重諦實故`

大菩提心恒爲首故. 如是諸句,應知皆是初句差別,謂於一切有情,起利益安樂增上意樂.

항상 다섯 가지의 오신통(五神通)에서 노닐기 때문이며, 지혜에 의지하기 때문이며, 

바른행에 머물거나 혹은 바른행에 머물지 않는 모든 유정의 무리를 버리지 않기 때문이며,

말이 결정적이기 때문이며, 참다운 진리를 존중하기 때문이며, 대보리심을 항상 으뜸으로 삼기 때문이다.

이상과 같은 여러 문구들은 모두  번째 문구를 분별한 것으로서, 모든 유정에 대해서 이익과 안락을 더하고자하는 이익안락증상의락(利益安樂增上意樂)을 일으킨 것이라고 마땅히 알아야 하는 것이다.

 

오신통(五神通), 천안통(天眼通)ㆍ천이통(天耳通)ㆍ신족통(神足通)ㆍ타심통(他心通)ㆍ숙명통(宿命通).


此利益安樂增上意樂句,有十六業差別應知.此中十六業者,一展轉加行業;二無顚倒業;三不待他請,自然加行業;四不動壞業;五無求染業,此有三句差別應知,謂無染繫故`於恩非恩無愛恚故`於生生中恒隨轉故;

이 이익과 안락을 더하고자하는 이익안락증상의락(利益安樂增上意樂)의 문구에 16가지 업의 차이가 있다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이 16가지 업이란,

첫 번째는 전전하여 가행하는 전전가행업(展轉加行業)이고, 두 번째는 전도됨이 없는 무전도업(無顚倒業)이며,

세 번째는 남이 청함을 기다리지 않고 자연히 가행하는 자연가행업(自然加行業)이고,

네 번째는 동요하거나 무너지지 않는 부동괴업(不動壞業)이며,

다섯 번째는 잡염을 구하지 않는 무구염업(無求染業)이니, 이에 세 가지 구절의 차별된 뜻이 있으니, 잡염의 속박이 없기 때문이고, 은혜와 은혜 아닌 것에 대해서 사랑과 성냄이 없기 때문이며, 끊임없는 윤회의 생사에 유전(流轉)하여 끝이 없는 생생(生生)을 항상 따라 유전하기 때문이라고 마땅히 알아야 하는 것이다.


六相稱語`身業,此有二句差別應知;七於樂`於苦,於無二中,平等業;八無下劣業;九無退轉業;十攝方便業;

여섯 번째는 서로 일치하는 구업과 신업의 상칭어신업(相稱語身業)이니, 이에 두 문구의 차별된 뜻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며,

일곱 번째는 즐거움에 대해서도, 괴로움에 대해서도, 즐거움도 괴로움도 아닌 무이(無二)에 대해서도 평등한 업이며,

여덟 번째는 열등하지 않은, 무하열업(無下劣業)이고, 아홉 번째는 퇴전하지 않는 무퇴전업(無退轉業)이며,

열 번째는 중생을 거두어 교화하는 섭방편업(攝方便業)이다.


十一厭惡所治業,此有二句差別應知;十二無閒作意業;十三勝進行業,

此有七句差別應知,謂六波羅蜜多正加行故,及四攝事正加行故;

열한 번째는 다스려지는 것을 혐오하는 염오소치업(厭惡所治業)이니, 이에 두 문구의 차이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열두 번째는 끊임없이 작의하는 무간작의업(無閒作意)이며,

열세 번째는 뛰어나게 나아가는 행의 승진행업(勝進行業)이니, 이에 일곱 문구의 차별된 뜻이 있으니, 이른바 여섯 가지 바라밀다의 바른 가행이기 때문이고, 네 가지 포섭하는 사섭사(四攝事)의 바른 가행이기 때문이다.

 

사섭사(四攝事), 4섭법(攝法)이라고도 하며, 보살이 중생을 제도할 때 취하는 네 가지 기본적인 태도으로, 

첫째, 보시섭(布施攝)은 재물을 기꺼이 베풀거나 진리를 가르쳐 주며, 

둘째, 애어섭(愛語攝)은 남에게 미소띤 얼굴과 부드럽고 온화한 말로 대하며,

셋째, 이행섭(利行攝)은 신체ㆍ언어ㆍ의지의 3업에 의한 선행으로 남에게 이익을 주며,

넷째, 동사섭(同事攝)은 자타가 일심이 되어 협력하여 중생과 같이 일하면서 제도하는 것이다.

 

十四成滿加行業,此有六句差別應知,謂親近善士故`聽聞正法故`住阿練若故`離惡尋思故`作意功德故,此復有二句差別應知,助伴`功德故,此復有二句差別應知;

열네 번째는 가행을 원만히 성취하는 성만가행업(成滿加行業)이니, 이에 여섯 문구의 차별된 뜻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나니, 이른바 선지식을 가까이하기 때문이고, 정법을 청해 듣기 때문이며, 아련야에 머물기 때문이고, 나쁘게 헤아리는 생각을 여의기 때문이며, 바르게 사유하는 공덕, 즉 이승(二乘)을 버리고 대승을 구하는 작의의 공덕이기 때문이니, 이에 다시 두 문구의 차이가 있으니, 도와주는 공덕이며, 이에 다시 두 문구의 차별한 뜻이 있다고 알아야 한다.

 

十五成滿業,此有三句差別應知,謂無量淸淨故`得大威力故`證得功德故;

열다섯 번째는 원만히 성취하는 성만업(成滿業)으로, 이에  문구의 차별된 뜻이 있으니, 이른바 무량 청정하기 때문이고, 대 위력을 얻기 때문이며, 증득하는 공덕이기 때문이다.


十六安立彼業,此有四句差別應知,謂御衆功德故`決定無疑教授教誡故`財法攝一故`無雜染心故.如是諸句,應知皆是初句差別.
 

열여섯 번째는 그것을 안립하는 안립피업(安立彼業)이니, 이에 네 문구의 차별된 뜻이 있음을 알아야 하나니,

이른바 대중을 제어하는 공덕이기 때문이고,

결정적으로 의혹 없이 가르치고 훈계하기 때문이며,

재물과 법을 하나로 포섭하는 재법섭일(財法攝一)이기 때문이고, 잡염심이 없는 무잡염심(無雜染心)이기 때문이다.

이상과 같은 여러 문구는 모두 첫 번째 문구의 차이라고 마땅히 알아야 하는 것이다.